• 최종편집 2024-02-24(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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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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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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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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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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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2-08-28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중국과 세계에 영향력을 미친 마오저둥의 예언
    “학문이 있다는것은 마치 높은 산에 올라 남보다 더 많이 더 멀리 바라볼수 있는 것과 같으며 학문이 없다는것은 마치 암흑속에서 걷는 것과 같이 한치앞을 바라보기조차 힘들다! 마오저둥” 마오저둥의 예언은 억측이 아니였다. 우연의 일치는 더구나 아니였다. 그것은 풍부한 실천경험과 연박한 지식 그리고 비범한 통찰력과 현실속에 깊이 침투해 조사하고 연구하고 분석하고 판단하면서 쌓은 경험적 결론이였다. 중국공산당제7차전원회의에서 마오저둥은 이같은 발언을 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아무것도 보아내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영도가 아니다. 지휘대에 올라서서 수면우에 드러난 보편적인 상황들만 본다면 이 역시 진정한 영도자가 아니다. 문제가 발생하기전에 바야흐로 일어나게 될 상황들을 예견하고 멀리 내다보며 상황을 파악하는 사람만이 진정한 영도자이다!” 1916년 7월 25일 예언 “앞으로 20년사이에 중국과 일본간에 큰 전쟁이 있을 것이다!” 1937년 7월 7일, 로구교사변을 알리는 첫 총성이 드디여 항일전쟁의 서막을 열어제꼈고 이 한방의 총소리는 20년전 24살난 한 사범생의 예언이 적중했음을 증명했다. 1919년 7월 21일 예언 “20년후, 프랑스인들에게 골치아픈 일이 생길 것이다!” 그로부터 20년후, 프랑스인민들앞에 크나큰 치욕이 생겼다. 히틀러는1918년에 독일이 투항을 선포한적 있는 바로 그 지점, 같은 기차, 같은 차바곤에서 프랑스가 투항서에 싸인하도록 강요했던 것이다. 1919년 7월 28일 예언 “일본과 독일은 세계적인 화를 불러올 것이다!” 마오저둥은 놀랄만한 관찰력으로 일본과 독일의 관계를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그는 장장 20년을 앞당겨 “추축국( 心 )”의 2대 파쑈마왕들이 한통속이 되여 세계에 위해를 끼치게 될 것을 예견했다. 제2차세계대전의 폭발이 바로 이러한 예언의 철같은 립증으로 되였다. 1933년 11월 예언 “우리는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잃게 될 것이다!” 장개석이 중앙쏘베트지구를 상대로 제5차 포위토벌을 발동하고 있을 때 마침 마오저둥은 정치생애의 궁지(低谷)에 처해있었다. 쏘베트구역과 홍군의 안위를 위해 마오저둥이 계략을 내놓았지만 중앙에서는 결국 마오저둥의 의견을 채납하지 않았다. 따라서 “제5차 포위토벌”을 막을 절호의 기회를 놓쳐버리게 되였던 것이다. 1934년 12월 12일 예언 “적들이 준비해둔 ‘주머니’속에 기여들어가서는 안된다! ” 마오저둥은 “주머니”전문가이다. 그는 항상 계략의 주머니를 풀어 장개석이 스스로 기여들어오도록 했었다. 그런 그가 어찌 달갑게 장개석이 풀어놓은 주머니에 기여들어간단 말인가! 류백승이 말했다. “마오저둥의 지략이 없었더라면 당시 3만홍군의 앞길은 훼멸밖에 없었을 것이다.” 1935년 5월 24일 예언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 우리가 반드시 뚫고만다!” 태평천국은 증국번(曾 藩)이 이끄는 상서군의 수하에 의해 최종패배를 당했다. 장개석은 증국번을 아주 숭배했는데 늘 증국번을 모방하기를 즐겼다. 장개석은 마오저둥이 “제2의 석달개”로 되기를 바랐지만 마오저둥은 홍군을 령솔해 겹겹한 포위를 뚫고 석달개가 뚫지 못한 길을 뚫는데 성공했다. 1935년 9월 예언 “남하하는것은 출로가 없다. 1년후 당신들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다!” 마오저둥과 장국도(   )는 함께 “중국공산당제1차대표대회”에 참석한적 있는 원로이다. 이들은 장정의 길에서 회합한후 다시 두갈래로 갈라져 각기 제 갈길을 갔다. 장국도와의 분렬로 인해 마오저둥은 장개석의 포위권을 뚫고난후 일생중 가장 암흑했던 시기를 보냈다. 1936년 10월 9일, 홍군의 3대주력이 합류하고 장정은 결속되였다. 1936년 7월 15일 예언 “중국은 독립된후 대규모로 외자를 끌어들일 것이다!” 새중국이 건립된후 처음으로 끌어들인 외자는 쏘련정부에서 제공한 정보대부금 3억딸라였다. 그후 중국인들은 국제적채무를 갚기 위해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다.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은 후일 등소평에 의해 실현되였다. 1994년, 중국은 이미 세계에서 미국에 이어 두번째로 외자를 많이 보유한 국가로 성장했다. 1938년 5월 예언 “중국의 항전은 7~8년이 소모될것이다!” 성사원의 회억에 의하면 마오저둥의 《지구전을 논함》이라는 문장이 발표되기전, 주은래는 이미 문장의 기본정신을 백숭희에게 소개했다. 백숭희는 문장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는 적을 물리치고 승리를 이끌어내는데 있어서 최고의 전략방침으로 될 것이라고 했다. 《지구전을 론함》을 두고 백숭희는 “작은 승리를 모아 큰 승리를 이끌어내고 공간을 시간으로 바꾼다.”라고 규납했다. 이는 군사위원회를 통해 전국에 널리 전파되였고 항일전쟁중의 전략적지도사상으로 되였다. 과연 8년의 간고분투끝에 일본은 종국적으로 투항을 선포했다. 1938년 10월 예언 “장백륜은 반드시 돌멩이를 들어 자신의 발등을 깔 것이다!” 2차대전전, 영국의 수상인 장백륜은 정치가의 리성과 상인의 자사자리를 내세워 전쟁미치광이 히틀러를 대처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장백륜이 들어올린 돌멩이는 쏘련인들의 머리꼭대기에 던져진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등을 내리친격이 되고말았으며 그의 정치생명도 뿌리채 뽑히우는 격이 되여버렸다. 1939년 9월 23일 예언 “루즈벨트는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가하도록 할 것이다!” 연안의 작은 움막에서 마오저둥은 2년이나 앞당겨 미국이 제2차세계대전에 참전 할 것이라는 것을 예견했다. 이는 중국인민들이 항전에 대한 필승신념을 수립하는데 중요한 의의로 되였다. 1959년 3월 16일 예언 “우리 군의 장래 출로는 중원에 있다!” 7년후, 마오저둥은 3갈래 대군을 중원에 파견해 정권쟁탈에 나섰으며 전국적인 전쟁의 승리를 확고히 다졌다. 1942년 7월 2일 예언 “제2전쟁터가 있으면 1년내에 독일을 물리칠수 있다!” 구라파대륙이 제2의 전쟁터를 개척하기만 하면 독일을 물리치는데 1년정도의 시간이 소요 될 것이라는 마오저둥의 예언대로 제2의 전쟁터는 1944년 6월에 개척되였고 독일은 이듬해인 1945년 5월에 패배를 당했다. 1945년 8월 13일 예언 “핵전쟁은 일어나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히로시마(  )에 첫 원자탄을 투척한 7일후, 마오저둥은 단언했다. “원자탄은 결코 전쟁을 해결하지 못할 것이다.” 마오저둥의 예언은 헛된 것이 아니였다. 오늘날까지 원자탄의 습격을 받은 국가는 일본이 유일한 나라이다. 1949년 12월 9일 예언“향항문제는 협상방법으로 해결 될 것이다!” 40년대부터 마오저둥은 향항과 오문 나아가서 대만문제를 해결할데 관한 기본사로를 세우고있었다. 즉 문제의 해결에 급급해하지 않고 향항과 오문의 력사와 현상태를 충분히 존중하는 전제하에서 협상을 통해 평화공존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는 것이였다. 오늘날, 향항과 오문이 순조롭게 회귀한 것은 마오저둥의 영명한 예견을 잘 반영하고있다. 1949년 3월 예언 “일부 공산당원들은 사탕포탄앞에 무너질 것이다!” 1952년 2월 10일, 사탕포탄의 유혹을 못이긴 류청산, 장자선이 드디여 정의의 총구앞에 쓰러졌다. 이는 수십년이 흐른 현재까지도 부패를 반대하고 청렴을 창도하는 전형으로 손꼽히고있다. 1955년 1월 15일 예언 “기본립자도 분해할수 있다!” 물리학에 대한 깊은 연구는 없었지만 마오저둥은 신기하에도 20년후 물리학의 발전추세를 예측했다. 1978년, 하와이에서 거행된 “제7기 세계립자물리학토론회”에서 노벨물리상획득자는 기본립자의 이름을 “모립자”로 지을 것을 제의했다. 1956년 6월 예언 “높은 협곡은 호수에서 시작된다!( 高 出平湖)” 마오저둥은 장강삼협에 관한 전망계획을 세웠지만 자신의 예언이 실현되는것을 보지 못한채 서거되였다. 1992년 4월 3일, 제7기인민대표대회 제5차회의에서는 절대적인 우세로 “삼협공사의안”이 통과되였다. 현재 삼협공사는 시공중에 있다. 1958년 6월 21일 예언 “원자탄, 수소탄, 대륙간유도탄은 10년내에 만들어낼수 있을것이다!” 1960년, 쏘련에서 전문가를 철수하고 설계도를 가져가자 일부 외국인들은 “중국은 20년사이에 아무런 원자탄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했다. 하지만 중국은 10년사이에 원자탄뿐만아니라 수소탄, 중성자탄까지 만들어내는데 성공했다. 1958년 9월 5일 예언 “대고락이 나서면 좋은 점이 있을 것이다!” 대고락(戴高 )은 경상적으로 프랑스의 해외식민정책을 위해 변호하며 적극적으로 랭전을 추동한 장본인이다. 때문에 국제여론은 보편적으로 이같은 정치국면의 변화에 의해 구라파가 우회전할것이라고 인정했지만 마오저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대고락이 나섬으로 하여 구라파중립주의의 발전을 추동하고 구라파가 미국을 떨쳐버릴수 있다고 단언했다. 역사의 발전은 드디여 마오저둥의 이같은 예언을 실증했다. 1962년 1월 30일 예언 “중국이 세계선진국을 따라잡는데는 백여년의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마오저둥이 1962년 “7차인민대표대회”에서 예견했던 발전속도는 제2대 영도자가 제정한“3보(三步走)”전략과 묘한 일치를 가져왔다. 동포투데이 편집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3-21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0)
    팔미라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시리아, 지점: 수리아 중부의 한 오아시스함의: 수리아경내 “비단의 길”에서의 저명한 고대도시임 팔미라(巴尔米拉)는 동서의 상업무역통로에 있다. 서기 2-3세기 시기 당시 세계에서 가장 부요한 도시 중의 하나였다. 부유하고 휘황한 궁전은 바로 그 시기에 수건한 것이다. 기원 3세기에 들어 로마인들은 이 팔미라성을 공략한 후 대대적으로 빼앗아 냈으며 마지막엔 불을 질러 이 이름난 도시로 하여금 훼멸되게 하였다. 그리하여 팔미라성은 꽃과 같은 그 영광스러운 역사를 종말짓게 되었다. 지금 여기에는 페허만이 남아 당년의 그 위대하고 화려함을 말해주면서 묵묵히 서있다. 방불히 세인들한테 하나의 오랜 문명도시의 흥망성쇠를 말해주는듯 하다. 여왕의 전기 서기 267년, 팔미라국왕이 암살당하자 그의 미망인 자누비아 여왕은 유공자를 대신하여 집정, 자신을 “동방여왕”으로 자칭하였다. 여왕의 통치하에 나라의 변강지역은 부단히 확대발전하였다. 팔미라가 강대해지자 이는 로마제국의 경각성을 불러 일으켰으며 뒷따라 팔미라는 로마군사에 의해 함락됐고 여왕은 포로되었다가 후에 감옥에서 사망했다. 후에 시리아국민들은 여왕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그들의 화폐에 여왕의 초상화를 새겨넣었다. 아름다운 문명잔해 팔미라가 다종문화의 집중지방에 위치해 있기에 이 곳의 건축물들은 고대그리스풍격, 로마풍격, 이란풍격 및 당지의 전통풍격 등으로 완미하게 융합되었으며 신비하고도 화려하다. 팔미라유적에는 아직도 중앙거리, 석각개선문, 패륵신(贝勒神)무덤, 기둥복도, 왕궁 등 유적이 남아있다. 유적의 중심에 서있는 석각개선문은 “山”자형으로 정문과 부문이 모두 큰 방석을 깎아 만든 것이다. 중앙거리는 길이가 약 2000미터에 달하는데 거리 양측에는 750개의 원형돌기둥으로 구성된 기둥복도가 있어 웅위롭고도 아름답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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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3-09
  • 오묘한 세계 대백과(30)
    “곧추 날아예서 3000자요, 구천에 떨어지는 은하 믿기 어려워라.” 이는 중국 당조시의 대시인 이백이 폭포를 묘사한 저명한 시이다. 결백한 물이 고공중에서 날아떨어지며 폭포를 형성하는 것은 마치 부드러운 비단대와도 같아 아름답기 그지 없다. 그럼 폭포는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폭포란 물흐름이 높은 곳에서 지세가 낮은 곳으로 떨어지면서 형성된 것이다. 이런 낙차가 비교적 큰 지세는 흔히 자연계 중의 높고도 큰 암석이 단렬로 인해 조성된 것이다. 단렬된 암석은 마치 층계와도 같아 한층은 높고 한층은 낮은바 물이 이 곳을 흘러서 지날 때면 날아 떨어지면서 아주 장관을 이루는 폭포가 형성된다. 그리고 위로부터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의 충격력이 매우 크게 되면서 그 물기둥이 아래의 암석을 호되게 내리치게 되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암석에는 큰 “凹”자형 구명이 생기며 점차 이 것이 깊은 담으로 되기도 한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3-09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6)
    ■ 김철균 3 순자가 문영이란 애를 한번 만나보려고 했으나 기다리던 그 애는 며칠이 지나도록 나타나지 않았다. 다른 애들과 물어보아도 그저 그애는 밖에 나다니기를 썩 좋아하는 타입이 아니라는 것만 알려줄뿐 더 이상 아는 것이 없었다. 순자는 한번 위생학교 기숙사를 찾아갈까 하고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무턱대고 찾아갈 명목도 없었다. 무턱대고 찾아가면 문영이란 애가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니 그럴만도 했다. 그러는 사이 이틀이란 날자가 또 훌쩍 지나갔다. 순자는 이제 하루만 기다려서 오지 않으면 아무런 이유라도 달고 찾아가려고 했다. 순자가 이렇게 궁리하고 있던 찰라 마침 문영이가 찾아왔다. 순자가 “또 우표와 편지봉투를 사려는가”고 물으려 하는데 생각밖에도 문영이는 싸구려 빵 하나를 사려고 했다. 점심을 굶었는지 무척 허기진 모양이었다. “학생, 빵갖고 요기나 하겠어? 마침 상점에 금방 해놓은 뜨근뜨근한 밥과 국이 있으니 그걸 먹으라우.” 이에 문영이는 아주 놀라하며 순자를 빤히 쳐다보는 것이었다. 상점에서 국밥도 파는가 의아해하는 모양이었다. “돈을 받지 않을테니 근심마우. 워낙 내가 먹자고 지었는데 좀 많이 했수다. 다 딸같은 애들인데 그냥 학생한테 먹이고 싶어서 그런다오.” 그제야 문영이는 이것저것 눈치를 보면서 순자가 차려주는 밥과 국에 수저를 대였다. 그러나 의연히 의아해하는 기색이었다. “눈치보지 말고 그냥 먹수. 쯧쯧 얼마나 배고겠수?!” 진짜 몹시 배가 고팠는지 문영이는 제법 밥과 국을 맛스레 먹었다. “이름이 문영이라지? 우리 좀 얘기를 해볼까?” 문영이가 어느 정도 배가 찼겠다고 생각되자 순자는 문영이곁에 다가앉으며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문영이도 다소 안심이 되는지 순자를 향해 약간 방그레 웃어보였다. 크게 접촉해보지는 않았지만 얼핏 봐도 순자가 착해보였던 모양이었다. “돈화에서 왔다지?” “예, 돈화 사하연의 산골에서 왔어요.” “집에는 어떤 식구들이 있지?” “어머니는 아주 오래전에 돌아가고 아버지는 장기환자로 힘든 일은 못하고 있어요.” 문영이는 사실대로 말씀드렸다. “쯧쯧, 농촌살림에 안사람도 없고 거기에 병까지 있다니… 그러구보니 학생도 몹시 외롭구 불쌍하구만.” 문영이를 보니 순자는 어쩐지 자꾸 눈물이 나왔다. 순자는 문영이더러 많이 먹으라며 밥과 국을 더 떠주었다. 문영이가 돌아갈 때 순자는 그녀한테 과자, 사탕 등 먹을 것을 호주머니에 가득 넣어주었다. 문영이가 뿌리치는 것도 “저녁에 허기질 때 요기하라”며 억지로 밀어넣었다. 한편 기숙사로 돌아온 문영이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납득이 가지 않았다. 세상에 아무리 맘씨고운 사람이 많다지만 “북해상점” 조선족 할머니의 거동은 어떻게 봐도 이해할 수 없었다. 혹시 저 어머니가 다른 그 어떤 목적이 있어서가 아닐까? 그녀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조선족 여인들이 선량하고 동정심이 강하다더니 그렇다면 저 어머니가 서양의 명절 크리스마스에 나타난다는 산타클로스 노인같은 분이 아닐까? 그렇찮으면 조선족 여인들중에서도 남을 즐겨돕는 뇌봉같은 어머니? 맞아 꼭 뇌봉같은 어머니일것야…… 결국 문영이는 긍정적인 면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세상인심이 아무리 박하다 해도 어디에 가든지 좋은 사람은 있기 마련이라고 믿었다. 이렇게 긍정적으로 생각하니 문영이는 저도 몰래 순자한테 마음이 끌리는 것을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호기심이 생기기도 했다. 그 뒤에도 문영이는 몇번 “북해상점”으로 찾아갔다. 웬간해서는 외출하기 싫어하는 그녀었건만 “북해상점”의 김순자를 알고난 뒤에는 틈만 있으면 절로 그 쪽으로 발길이 돌려지군 하는 문영이었다. 결코 의도적이 아니었다. 허기진 배를 달래려고 찾아가는 것도 아니었다. “북해상점”에 가면 어쩐지 마음이 편해졌다. 특히 순자와 마주할 때마다 문영이는 까마득히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던 친어머니의 얼굴이 자꾸 떠오르면서 무척 따사로움이 느껴지군 했다. 한편 문영이가 찾아갈 때마다 순자는 맛갈스러운 음식을 내놓군 했다. 문영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몰래 남겨 놓은듯이 말이다. 그것은 문영이를 위해 남겨놓은 것이 분명했다. 당시 문영이는 흔히 주말 저녁이면 순자가 운영하는 “북해상점”으로 찾아갔고 이에 순자 또한 문영이가 찾아올 것을 예견하여 맛있는 것을 만들어서는 남겨놓군 했다. 그러면 문영이가 와서 그 음식을 먹으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재미나는 일과 책에서 읽은 장면들을 웃고 떠들고 손질발질하며 이야기했고 그것을 바라보는 순자의 마음은 흐뭇하기가 그지없었다. 그리고 문영이가 기숙사로 돌아갈 때면 순자는 어김없이 호주머니에 당과류같은 것을 불룩하게 넣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제 12 회 모성애 1 고생스레 자란 애들이 남의 눈치를 많이 본다는 말이 있다. 이는 이런 애들이 자라온 생활환경이 그렇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이런 애들은 자존심이 강하며 쉽게 남을 오해할 때도 많은 법이다. 이 면에서 흔히 여자애들이 더 심한 양상을 보이군 한다. 문영이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었다. 어느 날 문영이가 “북해상점”에서 순자가 해준 국밥을 먹고있을 때 순자의 셋째 딸 영애가 시내로 일보러 나왔던 김에 친정 어머니가 차린 상점에 들렸다. 영애는 밥을 먹고있는 문영이를 보고는 이상해하며 어머니한테 물었다. “어머니, 누구세요?” 하긴 순자가 문영이를 딸처럼 대하면서 자주 밥을 먹이는 것 등에 대해 영감과 자식들한테 일언반구도 한적이 없는지라 영애가 알리 만무했다. “오, 위생학교 학생인데 엄마가 없고 아버지는 장애인으로서 몹시 불쌍한 애란다.” “그래요? 거 참 안됐구나.” 영애는 몹시 놀라는듯 하다가 인차 마음을 가라 앉히고는 문영이한테 다가 앉으며 살갑게 굴었다. 마음이 착하고 동정심이 많기는 영애 역시 마찬가지었다. “얘, 너 올해 몇살이지? 우리 한번 친해보자꾸나!” 하지만 영애가 낯설어서인지 문영이는 물어보는 대답이나 겨우 할 정도였다. 문영이는 어쩐지 순자한테는 어리광을 부릴 정도로 친근감을 느꼈지만 순자의 딸임에도 영애한테만은 저으기 눈치가 보였다. 자기가 불시에 나타났기에 문영이가 불편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영애가 문영이더러 시름놓고 밥을 먹으라고 자리를 피해주었지만 문영이는 그것마저 미안했다. 자기가 상점에 와서 밥같은 것을 먹으면 상점주인의 자식들이 좋아할 수 없다고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그 뒤부터 문영이가 “북해상점”으로 다니는 차수가 차츰 뜸해졌다. 순자가 잘 대해줄수록 문영이는 자주 다니기가 더욱 무엇했다. 그럴수록 자기를 두고 영애네 형제들이 곱지 않는 시선을 보낼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웬간해서는 “북해상점”에 가서 밥같은것을 먹지 않기로 작심했다. 일부러 자제하기로 했던것이다. 한편 문영이가 상점으로 다니는 차수가 뜸해지고 어쩌다 와서도 웬간해서는 밥술을 들지 않자 순자는 이상스럽게 생각했다. 혹시 그날 영애가 문영이한테 그 무슨 상처가 될 말을 하지 않았나 해서 셋째 딸한테 따져 묻기도 했다. 셋째 딸 영애는 그 날 절대 문영이한테 서운하게 대하지 않았다고 재삼 설명했다. 순자는 여전히 시름이 놓이지 않아했다. “너희들이 앞으로 이 어미가 하는 일에 절대 참견해서는 안된다. 그리고 불쌍한 사람을 도와줄줄 모르면 그것은 사람이 할 도리가 아니느리라.” 영애 역시 착하기는 형제들 중 둘째로 가라고 하면 서운해 할 사람이라 어머니의 말뜻을 너무나 잘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가뜩이나 발길이 뜸해지던 문영이는 언제부터인가 일주일 가량 지났어도 상점에 나타나지 않았다. (영애도 그애한테 별다른 소리를 하지 않았다는데…아무렴 영애가 그런 싫은 소리를 할 애가 아니지. 그런데 문영인 웬일일까?) 이제나 저제나 하고 문영이가 나타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려도 오지 않자 어느 날 순자는 상점에 온 학생들한테 문영이가 왜 상점에 오지 않는가고 물었다. “문영이 말인가요? 그앤 요사이에 된감기에 걸렸답니다. 기숙사가 추운데다 입은 옷까지 얇아 감기에 걸린 것이지요.” 그 학생의 말에 순자는 갑자기 속에 맺히는 것이 있었다. (아, 내가 왜 그것을 생각하지 못했을까?! 애가 분명 옷을 얇게 입은 것을 보면서도 말이야. 문영이의 엄마로 돼주겠다고 하면서도 애한테 밥이나 먹이는데만 만족하고…) 순자는 등한했던 자신을 책망하면서 내일엔 상점을 딸들한테 맡기고는 기어코 문영이한테 동복을 사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순자는 무심중 밖을 내다 보았는데 하늘에서는 눈송이가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다. (안되겠군. 오늘 눈이 내리면 내일은 긍정코 눈보라가 터질 것이고 그러면 날씨가 더 맵짜고 추워질 것이 아닌가?) 여기까지 생각을 굴린 순자는 더이상 지체할세라 상점문을 잠그고는 그 길로 백화상점으로 향했다. 백화상점에서 순자는 문영이가 입을 두터운 솜옷을 샀고 또한 돌아오는 길에 연변병원에 들려 문영이가 먹을 감기약을 샀다. … 그 날 순자가 문영이네 기숙사방에 들어서자 침대에 누운채 눈도 겨우 뜨고 있으면서 신음소리를 내고 있던 문영이는 불현듯 앓던 사람이 같지 않게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순자의 품에 안기면서 서럽게 울었다. “마마(어머니),” “너, 정말 멍청하구나. 이렇게 된감기에 걸려갖고도 왜 엄마한테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느냐?! 너 아직도 이 엄마의 마음을 모르겠느냐?” 문영이를 껴안은 순자는 눈물이 솟구치는 것을 금할 수 없었다. 순자가 눈물을 흘리자 문영이는 더욱 서럽게 울었다. “어머니, 미안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어머니한테 찾아갈 용기가 없었어요.” 문영이는 잠시나마 생각이 짧았던 자신을 탓하며 더욱 소리내여 울었다. 그 날 순자가 문영이한테 가져간건 단지 한벌의 솜옷이나 한봉지의 감기약만이 아니었다. 문영이가 여태껏 받아보지 못했고 꿈속에서도 바라마지 않던 모성애였다. 그 날 문영이는 태어나 처음으로 스스로 자기는 행운아라고 자부해보았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3-06
  • “나 공산당과 함께 널 토벌할테다”
    1941년 여름, 중국의 항일전쟁이 가장 간고한 대치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특히 당시 염석산이 담당구역인 중원지구가 일본군에 의해 점령될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그것은 염석산의 병력이 약해서보다는 이 전구장관인 염석산이 항일에 대해 동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렇듯 관건적인 시각, 염석산의 꿍꿍이를 미리 보아낸 장개석은 자신의 특사 서영창을 제2 전구 즉 염석산이 맡은 전구를 시찰하게 하였다. 이 해 8월 25일, 중경으로 돌아온 서영창은 장개석한테 몇가지 중요한 것을 회보하였다. 첫째, 염석산이 일본과 결탁할 가능성이 있기에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야 한다. 둘째, 산서의 염석산이 중앙과 오해가 생겨 다른 정권을 세울 우려가 있다. 셋째, 공산당에 대한 염석산이 증오가 극도로 달해 일본군과 함께 공산당을 제거할 가능성이 크다. 8월 29일, 장개석은 염석산한테 편지를 보냈는데 내용은 “존경과 위안의 뜻”이 내포되어 있으면서도 어딘가 다른 뜻이 담겨져 있었다. 특히 서영창이 염석산의 방위지역인 산서성 길현지구를 방문할 때 염석산은 일본과 비밀리에 담판을 진행, 얼마 후 과연 일본과 염석산은 모종의 협의를 달성했는데 당시 협의내용에는 일본측에 기울여지려는 경향이 농후했다. 또한 염석산은 한편으로는 장개석의 동의를 거쳐 “합법”적으로 일본과 연합해 공산당을 토벌하려고 시도했다. 이 해 9~10월 기간 염석산은 연속 3차례 장개석한테 전보를 보내어 “오직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본인은 그 어떤 희생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위원장께서 공산당을 토벌하려면 공산당 소련의 눈치를 봐야 하는 난처한 입장이기에 일본의 힘을 빌어 공산당을 제거하면 위원장의 난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장개석의 특사 서영창은 다르게 생각했다. 즉 염석산이 일본과 연합해 중공을 제거하려고 하는 것은 완전히 일본에 투항하려는 뜻이며 가짜로 공산당을 토벌하는 것으로 자기의 진정한 목적을 가리려는데 불과하다고 분석했다. 당시 염석산에 대한 서영창의 분석은 매우 적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일본에 대해 염석산은 기본상 저항을 포기하려는 태도였다. 당시 국군이 여러 전선에 거쳐 전면 패하고 있을 때 상당 부분의 국군을 지휘하고 있는 염석산의 음모는 장개석의 중시를 불러일으키지 않을 수 없었다. 10월 26일, 장개석은 일기를 통해 염석산을 호되게 질책했다. “비열하고 교활한 한간, 왕정위 역도보다 다를바 없도다.” 하지만 장개석은 그냥 혼자서 이빨만 갈뿐 공개적으로 염석산을 질책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염석산의 수십만 대군이 일제한테로 넘어가는 날이면 더욱 큰 손실이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일본군은 황하 동안 용문산에 있는 국군을 향해 공격을 발동, 호종남은 한개 사의 병력을 도하시켜 지원하려고 하였다가 염석산의 거절을 당했다. 이유는 중앙군이 도하해오면 후방질서가 혼란스럽게 된다는 것이었다. 기실 당시 중앙군이 황하를 도하하여 협력하면 염석산과 일본과의 협의가 무산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로 보아 염석산에 대한 서영창의 판단은 적중했다. 1월 6일, 장개석은 염석산에게 명령하여 “중앙군 61사를 반드시 도하시키며 상론한 여지가 없다”고 못박았다. 이날 장개석은 또 자기의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최종 이 한간이 적에게 투항할 경우 나 이 중정은 극단의 조치로 한간을 처단하겠노라 한편 장개석은 중앙군 61사를 기어코 도하시킬 결심을 굳히었다. 그 중요한 목적은 압력을 가하는 것으로 일본에 투항하려는 염석산의 의도가 실현되지 못하게 하는 동시에 막부득한 경우 공산당의 팔로군과 협력하여 염석산을 토벌하려는데 있었다. 이어 장개석은 재차 가경덕을 염석산이 맡은 전구에 파견하여 섬서 혹은 감숙 등지에 발을 붙이지 못할 경우 염석산의 책임을 추궁할 것이며 만약 염석산이 일본과 손잡고 공산당을 토벌할 경우 자신이 더욱 큰 토벌대상으로 될 것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고 경고하면서 그 때는 장개석이 직접 공산당을 거느리고 염석산 토벌에 나설 것이라고 했다. 당시 장개석은 민족의 운명아에서 추호의 여지도 없이 중공과 함께 한간을 토벌할 것이며 적아사이에는 그 어떤 투기적인 수작도 있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당시 염석산이 문무관원 중에는 일본과 결탁하려는 극소수의 투항주의파 외 대다수 장병들은 모두 항전으로 출로를 찾고 태원을 수복하여 산서군벌의 자존심을 되찾자는 결의로 충만되어 있었다. 거기에 1941년 말 미국이 일본에 선전포고를 하자 염석산은 자기의 판단이 틀렸음을 인식, 1942년 1월 초, 장개석한테 전보를 보내어서는 “위원장과 함께 공산당과 손잡고 항전을 끝까지 견지하겠노라”고 표했다. 이는 일본에 대한 염석산의 큰 태도변화였다. 하지만 염석산은 여전히 장개석한테 완전히 기대를 건 것은 아니었으며 일본에 투항하려는 뜻을 완전히 포기한 것도 아니었다. 이해 3월 하순, 장개석은 염석산한테 서안에서 한번 만나자고 제의하였다. 하지만 염석산은 “전방이 긴장하여 떠날 수 없다”고 거절하였고 이해 8월 14일에도 장개석이 서안에서 재차 염석산과 만나자고 제의했지만 염석산은 여전히 각종 이유로 조승수와 왕정국 두사람을 서안에 보내어 장개석과 만나도록 했을뿐이었다. 1943년 12월 29일, 산서성 주석 조대문이 타계하자 이듬해 1월 6일, 장개석은 자기의 일기에서 반간첩 전략에서 큰 기여를 한 조대문을 추모하는 글을 적어두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대문은 장개석의 특사 서영창은 당시 일본에 투항하려는 염석산 시도를 파괴시겼을 뿐만 아니라 한편 염석산을 설득하여 올바른 판단을 하도록 하였다. 그 뒤 염석산과 일본의 관계는 점차 냉담해지기 시작하였고 장개석도 더는 특별조치를 취하자던 결심을 포기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편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2-18
  • 오묘한 세계 대백과(29)
    혹시 그대는 잘 모를 것이다. 세계의 많은 도시들 즉 상해, 북경, 천진, 로스앤젤레스, 베니스, 오사카, 도쿄 등 도시의 지면은 지금도 꺼져내려가고 있으며 그 꺼져 내려가는 속도가 매우 빠르다. 중국의 상해는 1921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면이 줄곧 꺼져 내려갔는데 어떤 지구는 이미 2미터까지 꺼져 내려 앉았다.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그럼 무엇 때문에 이런 도시들의 지면이 쉼없이 꺼져 내려 앉을가? 이는 우리 인류 자체를 탓해야 한다. 즉 지하수를 과도하게 뽑아 올리는 것이 도시의 지면이 내려가게 하는 직접적 원인이다. 지하수란 인류생존의 자원일뿐만 아니라 지면을 평형을 잡아주는 작용도 한다. 만약 인류가 과도하게 지하수를 뽑아 올린다면 충족한 물로 지면을 도와 도시의 압력을 담당할 수 없게 되며 도시는 자연스럽게 천천히 거져 내려앉게 된다. 지면이 내려 앉으면 위해성이 크다. 일단 도시가 내려 앉는 일이 발생하면 사람들의 생산과 생활에 엄중한 후과를 초래하게 된다. 예하면 시정 기초시설, 도로와 교량 및 항구와 부두, 지하케이블의 손해와 깊은 우물의 사고 및 지면의 갈라지는 등 위해성을 갖다 주게 된다. 편집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2-16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9)
    노틀담 대성당의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 세느강 중앙의 시테섬(塞纳中央的西岱岛) 함의: 유럽에서 조기고트식 건축과 조각 예술의 대표임 가령 그대가 프랑스 작가 빅토르 유고의 소설 “노틀담 대성당(일명: 파리 성모원)”을 읽어 보았다면 이 노틀담 대성당으로 몹시 가보고 싶을 것이다. 노틀담 대성당은 세계에서 저명한 프랑스의 천주교 성당으로 1163년에 교황 알렉산드르와 프랑스 국왕 루이 7세가 공동으로 손잡고 지은 것으로 공사시일이 200년이 걸렸다고 한다. 노틀담 대성당은 유럽에서 일찍 지은 대표적인 고트식 건축과 조각예술의 건물로서 종교, 문화, 건축예술이 한몸에 집중돼 있으며 프랑스에서 가장 위대한 예술걸작으로 되고 있다. 노틀담 대성당의 진면모 노틀담 대성당은 정면이 정방형으로 된 건물로 제일 밑에는 세개의 복숭아형 문이 있으며 전반 건물 중 가장 눈부신 곳이다. 그 중 좌측의 성모마리아문은 3개의 문중 가장 아름답고도 정교한 문으로 중간에 성모마라아와 아이의 조각상이 있으며 양 옆에는 성모 마리아의 생애를 표현한 그림들이 있다. 그리고 문의 양 측에는 1년 12개월의 그림과 신도와 천사의 조각상이 있다. 그 외 문위에는 긴 벽감(壁龛)이 있으며 거기에는 28명의 유대국왕의 조각상이 모셔져 있어 사람들은 이를 “국왕장랑(长廊)”이라고 부른다. 노틀담 성당의 무대 노틀담 성당 중의 무대는 국왕 루이 13세가 자식을 보게 한 성모 마리아를 위해 세운 것이다. 그는 결혼 후 23년만에 자식을 보았다. 그 자식이 바로 후세의 루이 14세였다. 루이 13세는 이 일을 하느님의 은덕으로 생각, 바로 성모 마리아를 가송하기 위하여 이 무대를 세웠던 거이다. 무대의 앞에는 하나의 아름다운 조각상이 있으며 이 조각상이 바로 “성모 마리아가 아기를 품에 안고 있는 모습”이다. 그리고 무대 중의 파이프오르간(管风琴)이 있었는데 이 파이프 오르간은 전 프랑스에서 제일 큰 것이었으며 그 무겁고 폭넓은 음악은 노래에 어울려 더욱 아름답게 들려온다. 편집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2-16
  • 상처한 뒤 처제와 재혼한 중국 영화배우 김산
    편집자의 말: 중국의 저명한 영화배우 김산(金山)은 1911년 절강태생으로 본명은 조묵(赵默)이다. 1920년대 김산은 상해에 가서 시화를 배우는 한편 아마추어로 경극공연에 참가하다가 1936년부터 영화계에 입문, 선후로 “광환지야(狂欢之夜)”, “밤중의 노래소리(夜半歌声)” 등 여러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1946년 김산은 장춘영화촬영소 건립사업에 착수, 촬영소 창립자로 되었으며 이 해에 영화 “송화강에서”의 감독을 맡아하였다. 그는 선후로 중국희극가협회 부주석, 전국 문련위원, 전국정협위원 등 직을 맡았었다. 1982년 7월, 김산은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71세었다. ▲ 김산과 손유세 1950년 10월 14일, 북경청년궁은 등불이 찬연하고 음악소리가 흥겹게 울려퍼졌다. 이 날 이 곳에서는 29세의 여인 손유세와 39세의 남성 김산의 결혼식이 있었다. 결혼식에는 북경에 있는 각계 명류인사들이 분분히 찾아와 이들의 결혼을 축하해주었으며 주은래의 부인 등영초도 찾아왔다. 이날 등영초는 이들에게 아주 진귀한 선물을 주었다. 이 선물인즉 새로 출범된 “중국 국가혼인법”으로 이를 선물한 것은 현시대의 부부답게 “혼인법”에 충실하라는 이었다. 결혼 후 김산과 손유세는 중국청년예술극원에서 김산한테 분여해 준 숙소에 신혼살림을 차렸는데 당시 손유세의 여동생 손신세(新世)가 언니와 함께 있다보니 매우 불편해하였다. 그러자 주은래와 등영초는 손신세의 고충을 헤아려 주어 자기네가 살고 있는 서화청에 와 함께 살도록 하였다. 당시 주은래와 등영초는 손신세를 월생녀(粤生女儿)라고 친절하게 불러 주었다. 그리고 주총리가 외국방문을 갈 때마다 등영초는 손신세를 집에 불러 함께 자게 하면서 주로 총리에 침대를 사용하게 하였다. 이 시기 손신세는 매우 유쾌한 나날을 보냈으며 생활도 아주 안정되였다. 헌데 그 때 언니 손유세의 혼인생활이 풍파를 겪게 되었다. 1951년 김산과 문화예술위문단이 북한에 나가 위문활동을 하게 되었다. 당시 김산이 6.25를 소재로 한 씨나리오를 쓰겠다고 하자 김일성은 대단히 기뻐하면서 자기의 여비서로 하여금 김산의 가이드 겸 통역을 맡게 하였다. 헌데 얼마 되지 않아 김산과 김일성의 여비서가 눈이 맞아 탈선행위를 저지른 것이 탄로되어 그 여비서가 총살형에 언도되고 김산은 당적을 직무를 박탈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이 일은 손세유로 하여금 크나큰 충격에 빠지게 했다. 하지만 결국 손세유는 김산을 양해해 주었고 이것으로 하여 김산은 아내한테 크나큰 감동을 받기도 했다. 그 뒤 손신세는 소련 레닌드라드대학에 유학하여 러시아문학을 저공하게 되었다. 이러자 등영초는 손신세가 조국을 멀리 떠나 고독해 한다고 경상적으로 책을 보내주고 편지를 써주면서 관심하군 하였다. 그러자 손신세 또한 모든 일을 등어머니한테 회보, 자신이 남친인 이종창을 사귀게 되자 이런 소식도 등영초어머니한테 알려주군 하였다. 이에 등영초 또한 손신세가 자기의 반려를 찾은데 대해 진심으로 축하해주군 하였다. 1957년 2월, 손신세는 소련에서 결혼식을 올리었고 또 얼마 되지 않아 귀국해 북경대학에서 교편을 잡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손신세는 등영초어머니와 총리아버지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어 무등 기쁘기만 했다. 그 뒤 손신세가 아이를 출산하자 등영초와 주은래는 아이를 이뻐해하는 한편 더욱 이들 부부를 아껴주었다. 특히 어린 것이 말을 하게 되어 TV를 통해 영초할머니 혹은 총리할아버지를 보았다고 하면 총리네 노부부는 아이가 기특하다고 하면서 자주 어린 것의 볼에 뽀뽀를 해주군 하였다. 헌데 이런 날을 그닥 오래가지 못하였다. 얼마 안되어 문화혁명 폭풍우가 도래하자 이들 부부는 총리네 부부를 더는 볼 수가 없었다. 문화혁명이 시작되자 강청은 손세유가 이립삼(李立三)한테 극장티켓 한번 선물한 것을 이유로 억지로 손세유한테 “소련수정주의 간첩”이란 죄명을 씌웠으며 장기간 조리돌림을 시키기도 하였다. 손세유는 자기가 잡혀가기 전에 어느 금요일 저녁 여동생 손신세와 비밀리에 천안문앞에서 만났다. 그녀는 여동생한테 “난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절대 자살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내가 죽게 되면 이는 타인한테 박해를 받아 죽은 것으로 될 것이다. 너는 이것만은 꼭 믿어주기 바란다”고 하였다. 과연 얼마 뒤 손세유는 반란파들의 시달림을 받아 억울하게 죽게 되었다. 언니의 죽음은 손신세로 하여금 비할데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하였다. 손신세는 그 누구보다도 언니 손세유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아버지가 희생된 후 손유세는 어머니와 함께 상해에서 숨어살다가 16살이 되어서야 겨우 조직을 찾았고 후에 주은래와 등영초의 추천으로 소련 동방예술학교에 입학했던 것이다. 소련에서 손세유는 소련의 위국전쟁에 참가하기도 했다. 한편 그는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기에 1950년 모택동과 주은래 등이 소련을 방문했을 때 모택동과 스탈린, 주은래와 스탈린 사이의 통역을 담당하기도 했었다. 이렇듯 당과 국가의 지도일군한테 충직한 언니가 어떻게 수정주의 간첩으로 될 수 있단 말인가?! 문화혁명시기 손신세 역시 “현행 반혁명분자”란 감투를 쓸 수 밖에 없었다. 헌데 이상하게도 몇차례의 비판과 투쟁을 받은 뒤 그냥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후에 알고 보니 당시 북경대학에 진주한 군대표는 손신세에 대한 자료를 근본 “중앙 문화혁명소조”에 바치지 않았던 것이었다. 한편 문화혁명시기 손세유와 마찬가지로 박해를 받다 감옥으로 갔던 김산은 1975년 4월에야 만기석방되었고 집으로 돌아온 뒤에서 아내 손세유는 일찍 저 세상 사람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손신세는 옥살이를 하고 나온 김산을 돌보기 위해 김산으로 하여금 자기의 집에 와 거처하게 하는 것으로 아내를 잃은 김산의 만년생활이 안위를 얻도록 하였다. 얼마 후 문화혁명이 결속되자 손신세는 20여년간 사업해온 북경대학을 떠나 중국TV예술위원회로 전근하였다. 이어 손신세의 남편 이종창이 병으로 세상뜨자 이 가정에는 오직 김산과 손신세만이 친인으로 남게 되었다. 사람의 인연이란 참 미묘할 때가 많다. 손신세의 남편 이종창은 임종시 아내한테 자기가 죽은 후에도 김산을 잘 돌봐주라고 부탁했고 그가 죽은 뒤 김산 역시 손신세의 집에서 나가려고 하지 않았다. 결국 얼마 안되어 김산은 당조직에 편지를 보내어 그와 손신세가 결혼하도록 비준해줄 것을 희망하였다. 1976년, 50세가 된 손신세와 나이 65세가 된 김산은 손잡고 서로 상대방 심령을 위로해주면서 새로운 인생길에 들어섰다. 1978년 김산은 중앙희극학원 원장 겸 중국TV예술위원회 주임직을 맡게 되였다. 1982년 7월 7일, 김산은 돌발성 뇌익혈로 타계, 향년 71세었다.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손신세 노인의 친인들은 모두 한명씩 저 세상으로 떠나갔다. 현재 손신세의 자식들은 모두 해외에 체류, 노인은 경상적으로 출국하여 자녀와 손군들을 만나보군 한다. 하지만 노인은 여전히 북경의 옛집을 잊지 않고 있으며 청명절이 돌아올 때마다 북경의 공동묘지에 가서 친인들을 찾아보군 하고 있으며 몇개의 기념일을 잊지 않는다. 주은래총리가 서거한 날, 등어머니가 별세한 날, 언니가 순직한 날과 김산이 타계한 날… 그리고 “문회보”에 추억록을 발표하여 돌아간 친인들에 대한 그리운 정을 담기도 했다. 현재 손신세 노인은 한권의 회억록을 준비, 생전에 이를 완수하지 못하면 친인들한테 미안한 노릇이라고 말하고 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2-12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
    ■ 김철균 제11회 북해상점 1983년 순자는 연변위생학교 남쪽 거리의 길옆에 식료품상점을 차렸다. 순자가 차린 상점은 개혁개방과 더불어 연길시에서는 가장 선참으로 나온 개체상점 중의 하나였다. 순자가 상점을 차린 것은 딱 돈을 벌자는 것만은 아니었다. 점차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이전처럼 임시공으로 공사장으로 다니면서 막일을 할 수는 없고 그렇다고 집에서 놀자니 아직 그 나이까지는 된 것 같지 않아서었다. 또한 상점으로 드나드는 학생애들과 얘기같은 것을 나누면서 학생시절의 옛추억을 떠올리는 것도 일종의 즐거움으로 될 것 같아서였다. 순자가 차린 식료품상점의 간판이름은 “북해상점”이었다. 그닥 크지 않은 상점이었지만 순자는 영업을 시작한 날부터 상점안팍을 매우 깨끗하게 거두었다. 특히 상점하게 들어서면 벽에 붙여놓은 “위생공약”이 유표하게 안겨왔다. 이는 상급 해당부문에서 요구하여 써붙인 것이 아니고 순자 스스로 제정한 것이었다. 위생공약 위생청결은 본인과 찾아오는 손님의 신체건강에는 물론 주위환경도 깨끗하게 하는 아주 훌륭한 일이다. 본 상점은 상급 해당부문에서 상점내외의 위생을 검사감독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환영하며 한편 아래와 같은 자체공약을 제정한다. 첫째: 천정, 벽과 방바닥 등 곳에 구멍같은 것이 전혀 없어야 한다. 둘째: 모기장, 파리채, 파리약, 가래통, 위생복과 위생종이를 놓는 철망통은 항상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셋째: 맥주통, 맥주컵은 3일에 한번씩 소독해야 한다. 특히 상점이 결핵병원 근처에 있기에 더욱 이에 유의해야 하고 여름철에는 철저히 질병예방에 신경써야 한다. 넷째: 돈을 담는 그릇, 거울, 간장그릇과 형광등은 자주 닦아야 한다. 다섯째: 상점 문앞엔 항상 깨끗한 물을 떠놓아야 한다. 그래야 상점으로 드나드는 손님들이 수시로 손을 씻을 수가 있다. 여섯째: 상점주위와 큰 길 등을 매일 2차 내지 3차 정도 쓸어야 한다. 왜냐하면 상점주위엔 몰래 소변을 보는 사람이 많기 때문이다. 연길 북해상점 1983년 ×월 ×일 이렇게 위생공약을 제정한 외 순자는 자신의 개인위생에 특별히 신경을 썼다. 그는 항상 새하얀 위생모자와 위생복을 착용, 그것을 이틀에 한번씩 갈아입었으며 하루에도 수십번씩 손을 씻었고 아무리 손으로 쥐여도 될 음식물이라 해도 손으로 쥐지 않고 항상 소독을 한 집게로 집어 그릇에 담군 하였다. 봉사자세에도 신경을 썼다. 남녀노소를 막논하고 일단 상점에 들어서면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란 인사를 하였으며 설사 손님이 물건을 사지 않고 그냥 나가더라도 “편히 나가십시요. 또 오세요”란 말로 손님들의 마음을 즐겁게 하였다. 그리고 상점에서 맥주를 청해마시는 손님들한테는 김치나 기타 짠지같은 안주는 그냥 공짜로 주었는데 손님들이 부담스러워하면 “장려음식”이라고 했다. 그 뒤 연길시에는 상점이나 식당들 거개가 손님들이 매상을 많이 올리면 이른바 “장려음식”이란 것을 음식상에 많이 올리군 했는데 이 “장려음식”이 아마도 순자가 운영하는 “북해상점”으로부터 첫 스타트를 뗀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상점이 깨끗하고 순자가 친절해서일까? 상점에는 위생학교 교직원들도 자주 들려서는 맥주잔을 나누군 했다. 처음에 그들 거개가 이 상점이 김용환 교수의 부인이 차린 상점인줄을 몰랐었다. 그러다가 언젠가 김용환 교원과 함께 이 상점에 와서 맥주를 마시면서 이 상점의 주인이 김용환 교원의 부인인 것을 알고는 모두가 놀라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김용환 교원을 부러워하는 모습이었다. “상점이 참 깨끗하고 좋습니다. 가만히 보니까 김선생님은 진짜 사모님복이 많은 것 같습니다. 얼핏 선생님이 입고 다니는 옷만 봐도 그렇습니다. 우린 선생님께서 주름살이 간 옷을 입고 다니는걸 정말 한번도 본적이 없다니까요.” “그렇다오. 아무리 마누라자랑을 하면 상등바보라고 하지만 난 정말 마누라를 잘 만난 것 같수다. 일찍 툭 털면 먼지밖에 없는 나와 결혼해줘서 고맙고 후에 문화혁명 때 그 고생을 하면서도 자식들을 잘 키워줘서 또 고맙고… 바른대로 말해 이 마누라가 아니었더면 오늘의 나를 상상도 못할 일이지…” 이에 순자는 눈을 곱게 흘겼으나 자기의 노력을 긍정해주고 또 고맙게 생각해 주는 남편이 슬며서 고맙기만 했다. 한편 순자는 상점의 손님뿐 아니라 기타의 상점에 물건을 나르는 일군들한테도 잘해주었다. 다른 상점들에서는 물건을 날라주는 사람한테 고작해 냉수나 한고뿌를 대접하는데 그쳤으나 순자는 이런 사람들한테 냉장고 안에서 얼음과자나 사이다같은 것을 꺼내주기도 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점심밥을 공급하기도 했다. 그 중에는 부모가 없이 살면서 상점에 물건을 날라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하는 보일이라고 불리우는 한 조선족 총각이 있었다. 순자는 그 총각한테 특별히 잘해주었다. 남편도 고아로 자랐던터라 부모가 없이 자란 젊은이들을 보면 그냥 남의 일 같지 않아서였다. 그 와중 보일이란 젊은이가 날라오는 물건에는 간혹 요구했던 수자가 모자랄 때도 있었는데 특히 맥주같은 것이 한두병씩 모자라는 일은 흔히 있었다. 보일의 말로는 운수도중 쏠쏠이패들한테 빼앗겼다고 했다. 헌데 거의 번마다 이런 일이 생기니 어느 정도 의심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순자는 “맥주같은 건 마시고 싶을수가 있지만 운수도중 술을 마시면 사고가 날 수 있으니 다 날라온 후 상점에서 안주를 먹으면서 마셔야 한다”고 일깨워주었을뿐 더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그리고 진짜 보일이더러 자주 상점에서 밥술을 들게 했으며 자식들이 몇번 입지 않아 거의 새 것이나 다름이 없는 옷을 가져다는 그 보일이란 총각한테 몇번 주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 총각은 순자네 상점의 물건을 날라주기를 각별히 좋아했으며 순자네 상점의 물건을 날라주는 날인즉 그가 상점에서 점심밥을 공짜로 얻어먹는 날이었고 뭔가를 얻어가지는 날이기도 했다. 순자는 길가는 행인들한테도 아주 잘해 주었다. 그는 길가는 노인들이 몸이 불편한 모습이라도 보이면 항상 상점안에 들어와 휴식하게 하였을 뿐만 아니라 노인들이 마실 수 있는 사이다 혹은 기타 노인들이 즐기는 귤같은 식품을 공짜로 대접하군 하였다. 그러던 어느날 한 할머니가 역시 순자의 부축으로 상점안으로 들어와 휴식하게 되었는데 이말 저말을 하던 중 순자가 신흥소학교 부근에서 살고 있고 이름이 아무개라고 하자 “난 임자가 뢰봉처럼 좋은 일을 많이 한다는 소문은 들었어도 이렇게 얼굴을 처음 보는구려”하고 하며 기뻐하면서 후에는 이 거리를 지날 때마다 상점에 들려서는 한참씩 한담하군 하였다. 이렇게 순자가 상점을 하게 된 후에야 순자의 얼굴을 처음 보았다는 사람은 그 할머니뿐이 아니라 몇명 잘되었다. 2 순자가 상점을 시작한지도 어언간 2년철을 잡았다. 그 동안 순자는 새벽마다 맥주공장에 가서 생맥주를 받아 밀차에 밀어오는 등으로 몹시 바삐게 보냈지만 낮이 되여 찾아오는 위생학교 학생들과 얘기같은 것을 나누노라면 시간이 가는줄도 몰랐고 별로 피곤하지도 않았다. 한편 순자는 자신이 어렵고도 힘들게 공부하던 옛날과 그리고 비록 해방후였지만 없고 가난하던 그세월 자식들한테 배불리 한번 먹이지 못하면서 키우던 그제날을 생각하니 상점으로 찾아오는 모든 학생들한테 뭐든지 공짜로 주고 싶었다. 그만큼 순자한테 있어서 돈버는 것보다 더 기쁜 일이 있었으니 그것이즉 바로 매일 그 학생들이 상점으로 찾아오는 것이었다. 생각밖으로 상점으로 찾아오는 학생들 거개가 가정생활이 비교적 풍족한 모양이었다. 여학생들은 대부분 털실적삼에 오리털 방한복을 입었었고 남학생들도 용돈을 귀하지 않게 썼으며 일주일에 한두번씩 맥주놀이를 하는 남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물어본즉 학생들 거개가 가정으로부터 용돈을 비교적 넉넉하게 보내준다는 것이었다. (세월이 좋아졌구나! 이전에 우리가 공부할 때와는 판이하구나!) 순자는 웃고 떠들며 좋아하는 학생애들을 흐뭇한 얼굴로 바라보며 “개혁개방이 좋긴 확실히 좋은 모양이야”라고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순자는 위생학교 학생들의 가정형편을 다는 알 수 없었다. 기실 위생학교에는 가정생활이 부유한 집의 애가 있었는가 하면 가난한 집의 애들도 있었으며 지어 어떤 가정의 학생들은 집이 가난한 시골에 있는데다 한쪽 부모 혹은 부모 양쪽이 다 없는 불쌍한 애들도 있었다. 상점으로 다니는 애들한테서 알아본즉 가난한 가정의 자식들은 일요일날에도 기숙사에 있으면서 아주 드물게 시내로 나온다는 것이었다. (아무렴 그렇지 그렇구말구. 가난한 집 자식들이 어떻게 상점으로 드나들 수 있겠는가?!) 그도 그럴 것이 이는 순자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이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순자의 “북해상점”에도 옷을 아주 남루하게 입은 한 여학생이 찾아왔다. 수심이 가득한 얼굴에 피기가 별로 없이 해쓱한 모습으로 상점에 들어선 그 여학생은 순자한테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8전짜리 우표와 편지봉투 몇 개 씩만 산 뒤 다시 약간 고개를 숙여 인사를 남기고는 인차 나가버리는 것이었다. 순자는 그 여학생이 나간 문 쪽을 이윽토록 바라보았다. 단지 가난 때문만이 아닌 것 같았다. 꼭 다른 말못할 사연이 있는 여학생임에 틀림없었다. 순자는 어쩐지 이상한 예감이 들어 상점에서 음료수를 마시는 다른 학생들한테 물었다. “학생들은 아까 우표와 봉투만을 사간 학생을 아우?” “예, 돈화에서 온 이문영이란 앤데요.” “돈화에서 왔다구? 그런데 너무 측은한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래요. 저 애는 엄청 불쌍한 애예요. 엄마가 일찍 세상을 뜬데다 70세가 되는 아버지는 또 심한 장애인이고 말예요. 때문에 그애는 얼마 안되는 조학금마저 남겨서는 아버지한테 약도 사서 보내드린답니다.” “그래? 참 안됐구나!” 순자의 짐작은 맞아 떨어졌다. 이어서 다른 애가 “문영인 언니 한명이 산동에 있고 오빠 한명이 돈화 시내에 있으나 모두가 사는 꼴이 여의치 않아 모두 여동생의 뒤를 대줄 형편이 못된다”고 덧붙였다. 순자는 또 그제날 의지가지가 없는 고아의 몸으로 어렵게 어렵게 자라며 공부해온 남편을 머리속에 떠올렸다. 순자는 없고 외로운 사람한테 주는 정신적 위안과 사랑이 얼마나 큰가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순자는 언제 한번 기회가 있으면 문영이란 그 애를 직접 만나보리라 생각을 굴렸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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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2-12
  • 중국 ‘홍색연안’의 10대 미녀들의 운명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 세기 40년대, 중국의 연안은 중국혁명의 “성지”었다. 당시 수많은 열혈청년들은 천리길도 멀다 하지 않고 또한 온갖 험난도 무릎쓰고 연안을 찾아와 구국의 길과 인생의 이상을 찾으려 시도하였다. 이 중에는 여성청년들도 근 50%를 차지, 또한 이들 여성청년들 중에는 남성들의 이목을 끄는 미녀들도 일부 있었으며 후에 사람들은 취미로 이들 여성들중에서 “10대 미녀”를 선정, 당시 이들은 연안의 인기인물들이기도 했다. 하다면 이들은 모두 누구와 결혼했으며 어떠한 인생의 길을 걸어왔을까? 소비 : 소비(苏菲)는 당시 연안 노신예술학원 “교정의 꽃”으로 원명은 주소진(周素珍)이었으며 원적은 절강 정해였다. 소비는 15살 되던 해에 강청, 조단 등과 함께 상해에서 연극 “대뢰우(大雷雨)”에 출연, 강청이 여주인공 카싸리나 역을 맡고 조단이 카싸리나 남편 역을 맡았으며 소비는 카싸리나의 시녀 역을 맡았다. 이 해 소비는 영화 “해장(海葬)”에도 출연했다. 1939년 10월, 소비는 19살 나이에 연안에 와 노신예술학원에 입학했다. 당시 연안성에서는 연안으로 온 그녀를 두고 강청의 여동생이 왔다고 했으며 소비는 일약 사람들의 주목을 끄는 인물로 되었고 사람들은 분분히 누가 강청의 여동생인가 하고 탐문하기도 했다. 1940년 구정 전야에 노신예술학원 예당에서는 무도회가 열렸다. 그 때 코가 큰 미국인 하드무가 대담히 소비한테 춤을 청했다. 이에 소비가 춤 출줄 모른다고 사절했지만 그는 배워주겠다고 하면서 지꿎게 달라붙었다. 이렇게 하드무는 소비의 섬섬옥수같은 손을 잡고 놓을줄 몰랐다. 이 날 밤, 소비와 같은 움막에서 거주하는 한 여성이 출산하게 되자 모두들 소비더러 하드무 의사를 청해오도록 하였다. 당시 하드무는 자기가 산부인과 의사가 아니라고 하면서도 소비와 함께 임산부한테로 달려왔다. 새벽이 되어 아기는 순리롭게 태어났다. 그 뒤 소비는 하드무더러 돌아가 휴식하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도리어 소비와 함께 밖에 나가 산보하고 싶다고 하였다. 밖에서 거닐면서 하드무는 소비한테 프로포즈를 하였고 소비는 하드무의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다. 일직 “연안정풍” 기간 “간첩”혐의를 받은 하드무는 문화혁명기간에도 가산을 몰수당하고 감옥에 갇히었다. 하지만 소비의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이들은 첫날의 언약을 잊지 않고 그 사랑을 종신토록 이어갔다. 포안수: 1938년 북평사범대학 학생 포안수(浦安修)가 연안에 도착했고 북평사범학원 부속중학교를 졸업한 엽정의(후에 엽군으로 개명)도 연안에 도착했다. 그리고 설명과 주은래의 앙녀 손유세 역시 선후로 연안으로 달려왔다. 이렇게 되어 연안에는 남평(강청), 유지란, 엽정의, 포수안 등으로 1938년판 연안의 “10대 미녀”로 되었다. 1938년 4월, 연안에 도착한 포수안은 팽덕회의 눈에 들어 20살 나이에 팽덕회와 결혼하였다. 당시 두 사람의 나 차이는 아주 현저했다. 1949년 건국후 포수안은 중국 국가경공업부 노동노임사(司) 사장, 북경사범대학 당위 부서기 등 직을 역임하였다. 팽덕회가 평판된 후 그의 추도회를 준비하는 기간 팽매괴 등 사람들은 포수안이 “부인”의 신분으로 추도활동에 참가하는 것을 견결히 반대했다. 하지만 최종 중앙에서는 포수안의 이혼보고가 비준되지 않았다는 것을 이유로 포수안을 여전히 팽덕회의 부인으로 인정했다. 1991년 포수안은 유선암으로 북경에서 타계하였다. 증헌식: 증헌식(曾宪植)은 호남 상향(지금의 쌍봉)사람으로 엽검영 원수의 첫번째 부인이었다. 증헌식은 1926년 중앙 군사정치학교 무한분교의 여성대에 가입해 북벌전쟁에 참가했고 1928년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으며 1929년에 일본유학길에 올랐다가 다시 1941년에 연안으로 돌아왔다. 1946년 증헌식은 중경과 남경에서 중공대표단 성원 등영초의 비서로 있었고 건국후엔 중화 전국 부련회 부비서장, 부련회 제3기 서기처 서기, 제4기 전국부련회 집행위 부주석직을 역임했고 제4기, 제5기 전국 정협 상무위원으로 있었다. 증헌식은 1989년 10월 11일, 북경에서 타계하였다. 1938년 초, 증헌식은 임신한 몸으로 홍콩으로 갔다. 그 해 10월 증헌식은 홍콩에서 그녀 일생에서의 유일한 자식인 엽선녕을 낳았다. 1941년 증헌식은 재차 연안으로 돌아와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에서 학습하다가 후에 당조직의 배치에 의해 부녀통일전선 등 방면의 사업을 하였다. 당시 그녀는 엽검영의 아들 엽선녕을 홀로 키우며 엽검영과의 결혼을 기다렸으나 엽검영은 끝내 그녀를 아내로 맞지 않고 다른 여인한테 장가들었다. 오광위: 연안시기 중공의 수령 모택동이 부인 하자진과 한번 크게 싸운적이 있다. 그것인즉 바로 그들 사이에 “제3자”가 끼어들었기 때문이었다. 1937년 1월, 미국 작가 스미들리가 독일 “프랑크 푸트 데일리(法兰克福日报)” 기자의 신분으로 연안에 왔을 때 그의 비서 겸 통역을 선 중국여인이 있었다. 이름은 오광위(吴光伟)었고 오리리(吴莉莉)로 불리기도 했으며 당시 그녀는 연안의 제1 미녀로서의 손색이 없었다. 그 뒤 모택동과 스미드들리 및 오광위 사이에 내왕이 밀접해지자 마침내 참고 참았던 하자진이 큰 반응을 보였다. 한번은 모택동과 스미들리 그리고 오광위가 친절하게 한담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하자진이 뛰어들더니 오광위와 트집을 잡기 시작했고 나중에 두 여인은 몸싸움까지 벌였다. 이것이 바로 당시 연안성을 놀래운 “오광위 사건”이었다. 그 뒤 오광위와 하자진은 선후로 연안을 떠났다. 듣는바에 따르면 후에 오광위는 남편을 따라 대만으로 건너갔다고 하지만 그 뒤의 일은 종무소식이다. 손유세: 1921년생인 손유세(孙维世)는 황포군관학교 교관이었던 손병문(孙炳文)의 딸이다. 손유세의 부친 손병문은 일찍 주덕과 함께 독일유학을 하였다. 당시 그는 주은래의 소개로 주덕과 함께 중국공산당에 가입했다. 1925년, 손병문은 귀국해 국민혁명군 정치부 비서, 광동대학 교수, 황포군관학교 교관 등 직을 맡았고 북벌전쟁에 참가하였다가 1927년 대혁명 시기에 희생되었다. 당시 손병문의 딸 손유세는 5살에 불과하였다. 1938년 손유세는 중국공산당에 가입, 그 뒤 주은래를 따라 연안에 왔으며 주은래의 양딸로 되었다. 연안에서 손유세는 마르크스-레닌주의 학원에서 공부하면서 “홍색공주”로 불리었다. 사진은 1930연대의 손유세(중간 사람)이다. 문화혁명기간 손유세는 잔혹한 비판투쟁을 받았으며 당시 주은래마저 손유세를 보호할 수가 없었다. 손유세는 1968년 반란파들의 박해로 사망, 당시 47밖에 되지 않았다. 사진은 남편 김산과 함께 있는 손유세이다. 유지란: 북경사범대학 시절 유지란(刘志兰)과 포안수는 친구사이었다. 당년에 유지란은 허다한 남학생들의 애모를 받았었다. 연안으로 온 뒤 유지란은 중공북방국 부녀사업을 책임졌었고 섬북 공학분교 교도원으로도 있었다. 1939년, 팔로군 총부가 있는 노성북촌에서 좌권과 결혼하였다. 결혼 1년후 유지란은 딸 좌태북(左太北)을 출산하였다. 1942년 좌권과 결혼할 때 유지란의 나이는 25세였다. 좌권과 결혼한 후 1년여만에 좌권의 희생으로 이들은 영별하였다. 유지란이 비통에 잠겨 있을 때 팔로군 총사령 주덕이 자주 그녀를 찾아 위안하군 했었다. 설명: 설명(薛明)은 1916년 생으로 하북성 패현의 한 빈고농 가정에서 태어났으며 원명은 왕애진(王爱真)이었으나 후에 모친의 성을 따르면서 설명으로 이름을 고쳤다. 설명은 1936년 비밀리에 중국공산당에 가입했고 1938년 여름에 연안으로 갔으며 1942년 8월 1일에 하룡과 결혼하였다. 그 뒤 설명은 하룡을 따라 남정북전을 하면서 장기간 군대직을 맡았다. 그러다 선후로 서남국 부녀복리부 부장, 총참모부 판공청 당위 위원을 맡았고 선후로 전국 정협 제6기, 제7기 상무위원으로 되었으며 중공 제12차 대회 대표로 선출되기도 했다. 설명은 2011년 8월 31일, 북경에서 병으로 타계하였다. 향년 95세로 신중국 개국원수의 부인 중 제일 마지막으로 타계한 노인이었다. 범원견: 범원견(范元甄)은 일찍 강청, 엽군, 손세유와 더불어 연안의 “4대 미녀”에 속했었다. 범원견은 일찍 학생운동시절 왕명의 높은 평가를 받았으며 연안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학원을 다닐 때에는 모택동마저 그의 이름을 기억할 정도로 인기가 높았었다. 1939년 범원견은 중경 팔로군 판사처에서 이열(李锐)과 결혼했다. 결혼 뒤 둘은 함께 연안으로 갔다. 1943년 봄 이열은 간첩혐의로 연안 보안처에 의해 감금되었고 그 뒤 이열과 범원견은 이혼했으나 이열이 출옥하자 복혼하였으며 얼마 후 두번째로 이혼하기도 했다. 이어서 각종 정치운동이 있을 때마다 범원견은 미친듯이 이열을 적발했다. 그녀한테는 오직 당성만 있고 인성은 없었으며 나중에는 뭇사람들의 버림을 받기에까지 이르게 됐다. 범원견의 비극은 그 시대의 비극이었다. 사진은 인생만년의 범원견이다. 엽군: 1938년 4월 북경사범대학 부속중학교를 졸업한 엽군(원명 엽정의)이 연안에 도착, 남평(강청), 유지란, 포안수 등과 더불어 연안의 “10대 미녀”로 되었고 팔로군의 유명한 장군 임표의 부인으로 되었다. 결혼 뒤 임표는 “부드럽고 호방하며 이지적인 여인”이란 글로 엽군을 평가했었다. 하지만 임표 역시 대도시에서 온 이 인테리형 여성한테 허영적인 일면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지 못하였다. 1971년 9월 13일, 엽군은 결국 남편 임표와 함께 비행기에 앉아 외국으로 도망가다가 몽고국 언더르한에 추락되어 허영심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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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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