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Home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
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
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있은 한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성 7명과 동시에 결혼해 도합 27명의 자녀를 낳은 진실한 이야기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함에 있어서 당연히 많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과 생기는 감정적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영장 동물이다. 더군다나 특정된 장소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런 감정이 싹트기 쉽다. 대천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반려자로부터 선택되고 또한 반려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거나 감정적인 욕구가 없는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큰 착오로 벌어진 태평양 전쟁 말기 남성 1명과 여성 7명이 태평양 가운데의 트루크 군도에 남겨지면서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기까지 이 해괴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이야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모든 전쟁의 근원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러모로 미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저울질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를 공격했으며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군이 일본군 약점을 연속 꿰뚫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군은 차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하나둘씩 빼앗겼던 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일본군 점령 섬들은 고립되어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경우엔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미군은 이 섬들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당시 트루크 제도에는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부역자 및 일본군 위안부가 주둔해 있던 고립된 섬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공급 사슬을 끊자 섬에 갇혀 있던 이들은 고립되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구원투수들에게 삶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구조자를 섬에 보냈을 때 갇힌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희망을 본 듯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짧디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일본 본토에서 보낸 구조선은 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조선박은 섬 기슭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 하자 무인도로 여기고는 재빨리 선수를 돌려 트루크 섬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조선인 부역자 김유길과 일본인 위안부 7명이 “사람을 살려요”라고 외치며 해안으로 달려 내려갔을 때는 배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깨지자 일곱 여인은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면서 땅을 쳤고 김유길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할 수는 없었다. 몹시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남자로서 좀 강해야만 했다. 그는 엉겁결에 일본 여인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고는 그녀들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어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자 그는 다가가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만 했다. 울음을 터뜨릴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사위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들 일남 칠녀는 섬에서 두 달 넘게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한 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와 과일은 거의 다 뒤졌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들이 앞날이 막막할 때 뜻밖으로 담수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빛 한 가닥 생긴 것이다. 한편 섬에서의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모두가 굶어죽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일에는 고기잡이 말고도 비교적 건장한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그리고 그 때면 나머지 몇몇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 불을 피우고 빨래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각각 자기의 맡은 바의 일에 충실했다. 처음에 김유길과 그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교류는 손짓 혹은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김유길은 그녀들한테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또한 그녀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었으며 이렇게 되어 그들은 얼마 안돼 서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섬에 갇힌 지 1년이 되는 해 봄의 어느 날, 김유길은 섬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벼 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김유길의 머릿속에서는 기발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바로 벼농사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논을 풀었다. 그 해 그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논을 풀었다. 논둑을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두고…그리고 벼 모종을 논에 심자 과연 벼가 우썩우썩 벼가 잘 자랐다. 그 뒤 가을이 되자 김유길은 또 여인들과 함께 벼를 베어 거두어 들이고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자 이들은 마침내 첫 햇밥을 먹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유길은 점차 모든 여자들의 숭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자 김유길은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 바로 빗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는 것. 원래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김유길은 그 실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연 며칠 나무를 찍어 와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았으며…마침내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집 모양새를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집은 비록 허름하고 그닥 크지도 않았지만 이 외딴 섬에 그들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드디어 생긴 셈이었다. 여성 그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사랑하기가 쉬운 것이다. 섬에 버려진 뒤 여자들은 몹시 절망했지만 당시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그녀들을 책임지고 그녀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환경까지 해결해줬기에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김유길이라는 유일한 남자에게 마음을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갖가지 애로와 언어의 장벽까지 뚫고 나온 김유길은 일본 여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감출 것도 없이 속심을 털어 놓을 때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속된 농담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동안 어울리던 중 김유길은 자신이 그 중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여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다. 헌데 이 여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를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자랑할 줄이야?! 이러자 이들 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유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유길은 황제처럼 되어 일곱 명의 여자를 동시에 품에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꾸린 뒤 이들은 아예 귀국할 생각을 접고 살림을 차리고 김유길의 아내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은 선후하여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김유길한테 낳아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하나의 대가족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간 뒤 이 35명의 대 가정은 바다에 나타난 미군 순찰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귀국생각을 접었던 이들에게 마침내 각자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김유길은 고향으로 즉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그 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김유길은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그 아내들이 그리워났다. 거기에 자녀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두루 수소문한 결과 그의 다섯 명의 아내는 이미 재가하여 다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2명만이 그래도 김유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정부도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①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마릴린 먼로(Marilyn Monroe)-그녀는 60년대까지 미국 할리우드의 유명한 여배우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수많은 남자들 마음속에 자리 잡은 ‘유혹의 여신’이기도 했다. 마릴린 먼로-그녀의 별명은 노마 제인 모테이센(Norma Jeane Baker)으로 미국계 유대인이었으며 출생지는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다. 마릴린 먼로: 출생일 1926년 6월 1일, 사망일 1962년 8월 5일, 별자리 쌍둥이자리, 혈형 AB형, 키 166cm, 몸무게 53kg, 직업 프로배우, 모델, 대표작 ‘7년차 가려움’, ‘버스터미널’, ‘용놀이’, ‘열정은 불처럼’ 등 다수 주요 성과로는 제9회 영국․TV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 최우수 외국여배우상, 제14회 미국영화방송 골든글로브 영화부문-뮤직코미디부문 최우수 여주연상, 제11회 영국 영화·TV예술아카데미 영화상 최우수 여배우상, 제17회 미국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뮤직코미디 최우수 여주역상, 100년 만의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 1926년 6월 1일, 미국 로스앤젤레스 본병원에서 태어난 마릴린 먼로는 당시 노마 제인 모태슨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한 차례의 세례 후 그녀는 이름을 노마 제인 베이커로 변경했다. 불행한 것은 그녀가 사생아라는 것이다. 아버지는 그녀가 태어나기도 전에 멀리 타향으로 떠났으며 먼로는 태어난 지 13일 만에 브라운다이 부부의 집에서 매주 5달러씩 내기로 하고 입양됐다. 1933년 가을, 마릴린 먼로는 어머니 글라디스 바크르에게 인계되었다. 글라디스는 1935년 6월 1일 먼로의 보호자가 됐지만 몇 개월 후인 9월 13일 먼로를 고아원에 보냈다. 이어 먼로는 1937년 11월부터 안나란 여인과 함께 살기 시작했다. 고교생이던 1941년 마릴린 먼로는 어린 나이에 결혼과 함께 ‘아름다운 여자’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결혼 후 마릴린 먼로는 올림픽 챔피언 하워드한테서 역도와 서핑을 배웠으며 1944년 5월부터는 항공기 무전기 제조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945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는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과 함께 잡지 사진을 찍었다. 그 때 사진작가 데이비드 코너일은 그녀가 사진을 게재하여 미군을 고무시키기를 희망했다. 마릴린먼로는 1946년 5월 26일 ‘가족권’ 잡지 표지를 통해 처음으로 얼굴을 알렸다. 1946년 7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로 처음으로 가게 되었고 7월 26일 폭스와 첫 6개월 계약을 맺었다. 또 머리를 황금색으로 염색하면서 ‘제인 아델’이라는 예명을 붙이기도 했다. 1948년 마릴린 먼로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슈쿠다, 허!스쿠다, 하이!(It's Shukuda, Huh! It's Shukuda, Hi!)’에서 교회를 달군 여자 역을 맡았지만 그한테 차례진 대사는 한 줄밖에 없었다. 이후 그녀는 한 영화에서 여자아이를 연기하였으나 역시 대부분의 장면은 삭제되었다. 1949년 5월 27일, 사진작가 톰 켈리는 먼로의 누드 사진을 여러 장 촬영하여 골드 미스 드림 달력을 출판했다. 하지만 먼로는 달력에 실린 자기의 사진에 싸인을 하지 않아 50달러만 받게 되었다. 그해의 8월 15일, 먼로는 뮤지컬 영화 ‘토마호크행 티켓(Tickets to Tomahawk)’의 촬영에 참여했고 10월에는 또 범죄영화 ‘밤의 밤’ 촬영에도 참여했다. 1950년 1월 5일, 먼로는 드라마 ‘화구(火球)’의 촬영을 시작했고 4월에는 또 드라마 ‘혜성미인’에서 어느 한 주요 배역을 맡았다. 같은 해 먼로는 잡지 ‘성조기’가 선정한 ‘매력 아가씨’로 뽑히기도 했다. 1951년 4월 18일, 먼로가 출연하는 애정 코미디 영화 ‘사랑의 둥지’ 촬영이 시작되면서 그해 5월 1일, 폭스는 먼로와 6개월 계약 기간을 7년으로 연장했다. 뒤이어 먼로는 1952년 5월 7일 ‘라이프(life!)’지의 표지모델로 데뷔했으며 6월 1일에는 멜로영화 ‘신사는 미인을 사랑한다’의 주역으로 발탁됐다. 그리고 그해 8월 31일 라디오 생방송에 첫 출연 했고 9월 2일에는 ‘미스 아메리카 모델 쇼’에 출연했다. 1953년 6월 26일 마릴린 먼로가 미국 연예계에 짙은 손자국과 발자국을 남겼으며 9월 13일에는 TV에 처음 등장했다. 이어 11월 5일 로렌 바이콜, 로리 캘헌과 함께 출연한 애정 코미디 영화 ‘결혼하고 싶어’가 개봉됐다. 영화에서 먼로는 어릴 때부터 백만장자와의 결혼에 목마른 성감 모델 ‘보라 드 베이워스’ 역을 맡았다. 1954년 4월 30일, 마릴린 먼로가 로버트 미첨과 함께 촬영한 서부 모험영화 ‘동으로 흐르는 강물’이 개봉했다. 이 영화에서 먼로는 팜므파탈의 바 가수 ‘카이’역을 맡았다. 먼로는 9월 1일 로맨틱 코미디 영화 ‘7년차 가려움’을 촬영하기 시작했다. 이 영화로 먼로는 제9회 영국영화·텔레비전예술아카데미상 영화상인 외국여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5년 1월 7일, 마릴린 먼로는 밀턴 그린과 함께 기자회견을 갖고 ‘마릴린 먼로 프로덕션 센터’의 설립을 발표하였고 1월 15일 20세기 폭스 프로덕션과의 계약은 종료됐다. 1956년 1월 4일, 마릴린 먼로는 20세기 폭스프로덕션과 재계약을 맺고 2월 25일 할리우드에 복귀했다. 그 때로부터 그녀는 마릴린 먼로로 개명했고 이어 3월 3일에는 주연 로맨틱 코미디 영화 ‘버스터미널’에 출연했다. 그녀는 이 영화로 제14회 미국 영화 TV 골든글로브 영화․TV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 후보에 올랐다. 1957년 6월 13일, 마릴린 먼로가 로런스 올리버와 함께 주역을 맡은 로맨틱 코미디 영화 ‘드래곤 봉황’이 개봉되었다. 이 영화에서 마릴린 먼로는 관능적이고 매력적인 쇼걸 ‘엘시 마리나’의 역을 맡았으며 이 역할로 제11회 영국영화·TV예술 아카데미상 영화상-외국 여배우상 후보에 올랐다. 1958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애정 코미디 영화 ‘열정은 불처럼’에서 마이애미 악단의 아름다운 관능의 여인 ‘수가’ 역을 맡았다. 1960년 3월 8일 먼로는 영화 ‘열정은 불처럼’으로 제17회 미국 영화․TV 골든글로브 영화 부문-뮤직코미디 부문 여 최우수 주연상을 받았다. 1961년 1월 31일, 마릴린 먼로는 클라크 게이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함께 촬영한 서부 애정 영화 ‘난점 원앙보’가 개봉됐다. 1962년 3월 5일, 마릴린 먼로는 ‘세계 최고의 여배우상’을 수상했고 이어서 4월 23일에는 그녀는 주연 코미디 단편 영화 ‘멘붕’ 촬영을 시작했다. 1962년 6월 1일은 마릴린 먼로의 20세기 폭스프로덕션에서의 마지막 출근 날이자 마지막 공식석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었다. 6월 7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먼로와 계약을 종료했다. 하지만 그해의 8월 1일, 20세기 폭스프로덕션은 월급을 2배로 주기로 하고 마릴린 먼로를 다시 고용하기로 결정했으며 8월 3일, 먼로는 ‘라이프’지의 표지를 장식하는 ‘멘붕'의 재촬영에 동의하면서 ‘라이프’지의 표지모델이 됐다. 1999년 미국영화학회가 선정한 ‘100년 만에 나타난 가장 위대한 여배우 랭킹’ 6위에 올랐다.
-
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③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중국의 약속, 그것은 역중천균(力重千钧)이다. 또한 수파 세계무역기구(WTO) 사무총장이 말한 것처럼 “중국이 ‘WTO 가입’시 약속한 대외 개방을 이행한 것은 구성원 중 가장 깊고도 광범위하였다” 그리고 진리췬(金立群) 아시아 인프라투자은행 총재는 “‘WTO 가입’ 초기 중국이 발전 배당금을 더 많이 받았더라면 현재와 미래는 세계가 중국의 기회를 더욱 많이 공유할 것”라고 말했다. 중국공산당 제18차 대회 이래 중국은 개방의 역사를 주도적으로 파악하여 대외 개방의 질적 증가속도를 높였다. FTA 시험 구역과 자유무역 항구의 범위를 끊임없이 확대하였으며 외국인 투자 진입 네거티브의 부단한 축소와 ‘일대일로(一带一路)’의 가일층 심화…세계는 중국을 집중 조명하면서 중국 발전의 ‘급행열차’와 ‘편승열차’를 함께 타기도 했다. 푸젠(福建)에서 태어난 ‘중국초(中国草)’는 초대목(草代木)으로 식용균을 재배할 수 있어 경제적 가치와 생태적 효과를 겸비했다. 중국은 이 균초 기술을 전문가 그룹과 더불어 사심 없이 세계, 특히는 저개발국과 공유하고 있다. 현재 ‘중국초’는 세계 100여 개 국가에 뿌리를 내리고 수십만 개의 일자리를 창출했다. ‘중국초’가 빈곤 지역의 발전 희망을 부풀리는가 하면 ‘중국 도로’, ‘중국 교량’과 ‘중국 열차’도 국경을 넘어 우정과 발전의 맥을 전하고 있다. 지난 12월 3일 중국-라오스 국제철도가 개통됐다. 북쪽 쿤밍(昆明)에서 출발하여 남쪽의 비엔티안에 도착하는 국제 열차이다. 전체 길이는 1035킬로미터이다. 이 ‘강철 실크로드’는 동남아 국가들에 피복되어 번영과 풍요로움을 주는 큰 통로가 됐다. 또한 중국과 아프리카 27억 대중이 손잡고 높은 수준의 중국―아프리카 운명공동체 구축을 추진하고 중국·아세안 협력도 가일층 승화돼 동아시아 경제통합을 이끌고 있다. ‘차이나 기회(中国机遇)’의 스토리가 매일 이어지면서 전 세계 우호 국가가 확대되고 개방과 공영의 굉장한 힘을 모으고 있다. 중국식 다스리기- 개방은 개혁을 추진하고 중국식 현대화의 새로운 길 개척 이는 ‘WTO 가입’의 배당금이자 개혁의 배당금이었다. 개혁은 진통이 있지만 개혁하지 않으면 긴 고통이 따르기 마련이다. ‘중국 기적’은 대외 개방과 개혁 심화를 결합한 소중한 경험을 갖고 있다. 왕원타오(王文涛) 중국 상무부장은 “WTO에 가입한 이래 중국은 개방으로 개혁과 발전을 촉진하면서 사회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끊임없이 완전하게 추진해 시장과 사회의 역동성을 불러일으켰다”며 “개방은 체제의 문제점을 표출시키기 마련이지만 그것이 바로 개혁의 주안점이다”라고 밝혔다. 1986년 중국이 정식으로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총 협정 체결국 지위 회복신청을 낸 이래 15년이란 긴 회복기간과 ‘WTO 가입’ 협상이 있었다. 이로 하여 중국은 WTO에 미리 적응하는 시간을 벌었고 국내 경제 개혁에 방향을 제시했다. 장샹천(张向晨) 세계무역기구 사무 부총장은 “다자간 무역체제와 국내 경제체제 개혁을 통합해야 국제무역체제에서 수혜를 볼 수 있다”며 “결재기간은 15개의 영업일에서 3개의 영업일로 압축되었으며 올해 4월 하이난(海南) 해상사무 부문의 개혁으로 하이난 FTA항의 첫 외국인 독자기업인 양푸항(洋浦港) 착지가 빨라졌다”고 평가했다. 20년 동안 중국의 이러한 국내개혁 변화는 끊임없이 일어났었으며 경제 분야의 각종 체제기제의 약점을 부단히 보충했다. 개방하면 늑대와 춤을 추는 업종이 반드시 있을 법이기에 중국은 오히려 개혁을 가속화하면서 ‘굳은 살을 헤치고 다시 태어나라’고 몰아붙이곤 했다. 자동차업계의 경우 더 많은 외국 브랜드를 유치했지만 자국 브랜드에도 기회를 주어 중국 자동차도 경쟁에서 ‘물 대포’를 맞으며 ‘보위전’을 치렀지만 그것이 ‘진급전’을 이어갈 정도로 경쟁이 커졌다. 469만 대와 5000만 대, 이는 2001년과 2020년 중국 자동차생산 판매량의 비율로 거대한 차이가 업계의 변화를 뚜렷하게 보여준다. 2018년 합자주율 제한이 가시화되면서 신에너지 트랙에서 중국산 자동차들이 앞지르기를 준비하고 있다. 외국인 투자 유치 네거티브 리스트 개정(负面清单) ‘감법(减法)’ 하나하나가 더 개방적인 영역을 의미했고 리스트가 적어질수록 관리 틀과 모델상의 개혁 요구는 더 높아졌다. 개방은 제도로 보장하고 개방은 제도로 확대한다는 것이 중국이 세계에 보내는 더 높은 수준의 개방 신호다. 2018년에는 중국의 첫 ‘제도적 개방’을 실시했고 2019년에는 ‘규제·관리·기준 등 제도적 개방 추진’을 명시해 중국의 개방 개혁이 국내제도 차원으로 한 단계 더 확대됐음을 보여주었다. 중국의 ‘WTO 가입’은 중국이 시장경제를 하겠다고 전 세계에 약속하고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강조하고 있는 중대한 돌파구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룽융투(龙永图) 중국의 ‘WTO 가입’ 수석협상대표는 “오늘날 인민 중심으로 된 사회주의 시장경제의 길이 세계의 모범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20년간 중국은 개발도상국의 발전 수준, 발전 단계, 수용 능력에 입각하여 질서정연하게 시장 개방을 추진하였다. 또 선진국 발전 경험과 사회주의 제도를 유기적으로 결합해 중국식 현대화의 새로운 길을 만들어냈다. 금융업에서 중국은 서방의 100년 간 경험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않았으며 한편으로는 열심히 공부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서방의 발전 경로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았다. 즉 본토와 결합해 제도 혁신을 하였고 나름대로의 세계적 금융허브를 만들려고 노력하였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도 중국은 반성과 함께 금융업 개혁과 개방을 자국의 절주대로 밀고 나갔다. ‘선위불가승, 이대적지가승(先为不可胜,以待敌之可胜)’이라고 ‘손자병법’의 이 구절은 소박한 진리를 말한다. 자신의 단점을 직시해 약한 부분을 공략하면 후발 강점을 살리고 결국에는 경쟁에서 이기고 승리할 수 있는 것이다.(다음 계속)
-
中, '융합'에서 '세계화'로 이끈 역사적 변혁②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세계경제가 중국을 ‘수용’했기에 새로운 시대에 들어 중국의 더욱 폭 넓은 개방에 더욱 경탄하고 있다. 중국공산당 제18차 대표 대회 이래 중국의 대외 개방은 수동적으로부터 주동적으로 세계 경제를 이끄는 뚜렷한 특징이 나타났다. 지난 12월 1일, 중국-유럽행 열차가 충칭 단결촌에 있는 철도 중심역에서 화물을 가득 실은 채 천천히 빠져나왔다. 충칭세관이 올해 들어 감독관리를 더 한층 풀어준 2191번째 중국-유럽행 열차로 그 옛날 사막의 낙타방울이 오늘날의 ‘강철 낙타 행렬’로 된 셈이다. 10년간 중국-유럽행 열차는 이미 일대일로를 공동 건설하는 중요한 운반체가 되어 중국의 대외개방 판도를 넓혔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경제의 세계화 과정에서도 큰 진전을 보여주고 있다. 충칭이란 이 ‘산성’은 세계에로 통했고 ‘옛 고지’는 다시 새로운 봉우리로 올라가게 되었다. FTA 실험 구역은 수차례 중국의 동서남북에 일떠섰다. 선전 경제특구의 40년 재출발, 하이난 자유무역항은 돛을 올려 항해를 시작했고 광둥, 홍콩과 마카오는 공동으로 국제 일류의 걸프 지역과 세계적인 도시 군을 건설했으며 슝안 신구(雄安新区) 천년대계와 국제소비중심도시 건설은 쾌속 궤도에 진입했다. 이렇듯 하나의 강력한 움직임이 모여 중국경제 총량을 100만 억 위안의 새로운 단계로 진입하게 했고 1인당 GDP는 1만 달러를 돌파하였다. 새로운 시대로 접어들면 중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완전한 공업 분야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욱 빠른 걸음으로 고품질 발전을 향해 전력투구하고 있다. 즉 신에너지차, 인공지능(AI), 디지털경제 등 분야에서 대규모의 추월을 야망하고 있다. 중국의 기회, ‘세계시장’을 개방 육성하고 세계경제를 일지춘수(一池春水)로 활성화 시켜 중국은 개방 속에서 스스로를 발전시키고 개방 속에서 세계를 행복하게 한다. ‘중국의 기회’는 세계적인 대 변혁사였으며 4회 연속 거행된 수입품 박람회는 경전적인 주목으로 ‘이전난구(一展难求)’의 큰 인기였다. 곧 바로 세계 각국이 개방 확대와 세계화의 종심(纵深) 발전을 향해 던진 중국의 ‘신뢰표’는 중국 시장의 큰 매력을 입증하고도 남음이 있다. 2018년, 중국은 보호무역주의 역풍에 맞서 세계 최초로 수입을 주제로 한 국가 급 수입품박람회를 상하이(上海)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무역자유화와 경제세계화를 지지한다는 확고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 또한 2019년에 있은 제2회 수입품박람회는 신 중국 창립 70주년을 맞아 ‘더 높은 수준의 개방’이라는 시대적 강음을 전했다. 이는 중국의 개혁개방의 재출발 의지를 과시한 것이다. 그리고 2020년에 있은 제3회 수입품박람회는 전 세계 코로나19 상황의 충격에 직면하여 중국은 세계에 향해 “새로운 발전 구도는 결코 폐쇄적인 국내 순환이 아니다”라고 정중히 선언했다. 국내와 국제라는 쌍 순환 트랙을 더욱 활짝 열어놓은 셈이다. 2021년 제4회 수입품박람회의 취지는 ‘개방의 봄바람으로 세계가 따뜻하게 하자’는 대국의 드넓은 도량이었다. 중국은 인구 14억여 명과 중위소득 4억 명 이상으로 연간 약 2조5000억 달러의 수입과 서비스를 제공하였고 시장 규모도 엄청나게 크다. 수입품박람회의 ‘로드맵’중국 시장은 ‘세계의 시장, 공유하는 시장, 우리 모두의 시장’임을 잘 보여주고 있다. WTO 가입 20년, 중국은 스스로 책임을 지는 것으로 세계와 시장 기회를 확고히 공유하고 있다. -화물 부문은 전체 관세가 7.4%로 낮아지고 서비스 부문은 120개 가까이 개방돼 모두 ‘WTO 가입’ 시의 약속 수준을 웃돌았다. -중국은 120여 개국의 주요 교역 파트너로 부상해 지난 20년간 세계 경제성장에 대한 연평균 기여율이 30%에 육박했다. -세계적인 수입대국이 되어 42개 최빈 개도국의 97%에 대해서는 관세면제 혜택을 주었고 25%에 해당하는 그들의 수출을 유치하여 최빈개도국의 최대 수출시장으로 되었다. (다음 계속)
-
53년 전, 생명으로 지킨 中극비문서...22일 후 세계를 진감④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지난번 계속) 1968년의 10월 초부터 곽영회는 핵 실험장에서 중국의 첫 열핵탄두 발사 준비작업에 참여하면서 12월 초까지 머물렀다. 그날 저녁 그는 북경으로 가는 항공편을 알아보고는 곧 비행기를 탈 목적으로 비행장으로 향했다. 당시 야간항공편을 타지 말고 다음날 아침에 출발하라는 동료의 만류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곽영회는 역시 “야간항공편을 이용하면 이튿날 근무에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해 비행기를 기다리는 사이 곽영회는 과제 연구조 성원의 회보를 받은 후 인차 비행기에 올랐다. 5일 새벽, 곽영회가 탑승한 비행기는 북경 수도공항에 서서히 착륙하다가 지상 400미터 되는 지점에서 갑자기 균형을 잃었으며 한동안 허우적거리다가 공항에서 불과 1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옥수수 밭에 추락했다. 당시 탑승한 승객과 승무원 도합 14명 중 중상자는 단 1명에 불과했다. 그 생존자는 당시 추락 직전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곽영회가 생명의 마지막 시각에 “아, 나의 서류!”라고 소리쳤다고 회고했다. 사고 직후 구조대원들이 추락 현장에 도착했을 때 나머지 13구의 희생자는 이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불에 타고 너부러져 있었지만 유독 2구의 시신은 서로 부둥켜안고 있었다. 구조대원들은 시커멓게 탄 시신 2구를 떼어내려고 애를 쓰던 중 그 2구의 시체의 가슴사이에서 뭔가를 발견하였다. 거의 멀쩡한 서류 가방이 끼워져 있었던 것이다. 서류 가방을 열자 그 안에는 곽영회가 상급에 보고하려고 했던 그 열핵미사일 시험 데이터 자료가 있었다. 그 시신 2구의 시신은 곧 바로 곽영회와 경호원으로 확인됐다. 열사의 정신은 영생한다 곽영회가 당한 조난은 삽시에 세상을 진동하였다. 주은래의 강력한 요구에 의해 사고 원인을 철저히 조사한 결과 비행기는 내비게이션시스템(导航系统)에 고장이 난 것으로 추정되었다. 곽영회의 비보를 듣고 울음을 터뜨리던 전학삼은 “그냥 10초였다. 생명이 있고 지혜가 있는 사람,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고 우수한 역학 연구 대가가 세상을 떠났다. 삶과 죽음, 10초였다!”며 몇 번이고 되뇌이었다. 한편 조난 소식을 접한 곽영회의 아내 이패는 눈물을 흘리지 않고 혼자 베란다로 나와 먼 곳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2007년 이패 여사는 평생 모은 돈 60만 위안을 두 차례에 걸쳐 중국과학기술대학과 중국 과학원 역학연구소에서 설립한 ‘곽영회 장학금’에 기부했다. 들려오는 풍문에 따르면 당시 누군가 이패 여사에게 “왜 기부의식을 차리지 않느냐”고 묻자 이패 여사는 그냥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면서 “의식은 무슨 의식? 그냥 원해서 기부한다”고 답했다고 한다. 1968년 12월 25일 중공중앙에서는 곽영회에게 열사 칭호를 수여했다. 그리고 12월 27일 즉 곽영회가 사망한지 22일 후, 그가 생명으로 지켜낸 중요한 자료에 따라 중국은 첫 열핵미사일 실험이 성공하여 수소폭탄의 무기화가 실현되었다. 또한 1970년 4월, 곽영회가 직접 설계한 ‘동방홍 1호(东方红一号)’ 인공위성이 성공적으로 발사됐다. 1999년 9월 18일, ‘양탄일성(两弹一星)’프로젝트에 탁월한 공헌을 한 중국 과학자 23명이 국가로부터 ‘양탄일성공훈장’을 수여받았다. 이 23명 중 곽영회는 유일하게 핵폭탄, 미사일과 인공위성 연구개발에 모두 참여하고 이바지한 과학자이자 유일한 열사였다. 2018년 7월, 국제 소행성센터는 국제사회에 정식으로 공지를 발표하여 일련번호 212796과 212797의 소행성은 ‘곽영회성’과 ‘이패성’으로 영구 명명했다. 매번 우리가 고개를 들고 먼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항상 우리의 진로를 안내하는 것은 언제나 빛나는 그 별이었다.(끝)
-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 1927년, 중국과 독일의 접촉을 시작으로 항일전쟁 직전까지 독일은 중국의 최대 협력 파트너였다. 원래 독일 군사고문은 장개석에게 60개의 독일의 기계사단을 통폐합해 내놓아야 했지만 국민정부는 그렇게 많은 돈이 없었고, 또 그렇게 큰 대가를 치르려 하지 않았기에 항일 전쟁이 발발한 후 중국 전역에 30개의 ‘조정사’만 있었고 독일은 40만 세트의 장비만 쏟아부었다. 이 정예부대는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거의 소진되었다. 최초의 ‘송호회전’, ‘남경보위전’, 화북전장의 ‘흔구회전’, ‘낭자관전투’;등 전투에는 대량의 독일 기계사단이 일본군과 교전하여 참혹한 대가를 치렀다. 이들 30개의 ‘조정사’ 중 28개는 사단 전체가 마비됐고, 2개 사단만이 격렬한 전투를 피했기에 그 병력과 장비를 보존할 수 있었다. 또 전쟁 때문에 독일의 무기는 제때 수송되지 못했고, 독일군은 장비를 보충받지 못해 많은 병사들이 국산장비를 갖고 전쟁터로 나가야 했다. 게다가 독일은 일본과 동맹을 맺은 탓으로 독일군은 중국에 대한 군사 지원을 늦추다가 1938년 7월 중국에 대한 지원을 모두 멈추고 중국에서 철수했다. 독일인들은 철수했고, 중국의 항전은 여전히 계속되었다. 중국내 전장은 군사 장비의 보충이 시급했고, 장개석은후원자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바로 이때 소련이 나타났다. 소련은 국민정부로 하여금 일본군의 진군속도를 저지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기에 장개석과 합작협정을 맺고 중국에 군사물자를 지원했다. 이에 따라 독일기계사와 미국기계사 사이에 소련기계사가 하나 더 생겼다. 소련은 독일과 마찬가지로 국민정부가 농수산물과 각종 금속 원자재만 제공하면 된다는 조건을 내걸었고, 10년 만에 중소 협력은 이렇게 성사됐다. 소련인들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나름대로 성의를 갖고 있었고, 탱크와 비행기 같은 중무기를 제공했을 뿐 아니라 소련 장비로 20개 사단을 무장시켜 독일군 무기사단의 손실로 생긴 공백을 메우려 했다. 이렇게 양 측이 각각 필요한 것을 취해서 교역은 비교적 만족스럽게 진행 됐다. 하지만 소련 기계사의 배치에 있어서 중·소 양측은 이견이 있었다. 소련 측은 모두 소련군 편제대로 새로 편성된 부대에 장비를 배치하자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개석은 몰래 장비를 따로 빼돌려 포병단을 조직했다. 이렇게 10여 개의 포병단위를 만들면서, 미리 약속했던 대로 소련 기계사단에 이를 전달하지 않았다. 한편 소련이 중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물자 수송도 간단해 1차 소련의 기계장비로 4개 사단을 무장시킬 수 있었으며 이 중 제200사단은 중국 최초의 기계화사단이 됐다. 그리고 후속으로 소련의 기계화 장비도 육속 도착해 장개석은 18개의 소련 기계화사단을 구성해 일본군과 잘 싸울 수 있었다. 이 보배같은 소련 기계화사단들에 대해 장개석은 독일 기계사단들처럼 잔혹한 전장으로 보내져 소모되게 하지 않았다. 그래서 1941년에는 15개 사단이 각 전장에서 활약했다. 그러나 소련과 일본이 중립조약을 맺은 뒤 중소 관계가 약화되면서 소련의 군사장비는 보충되지 않았고, 소련의 기계화사단 역시 점차 역사적 명사로 되었다. 미국의 원조는 큰 것을 노린 전략적 움직임 실제로 영국은 독일의 지원이 끊긴 뒤에도 잠시나마 중국에 군사물자를 제공했지만 일본의 압력에 원조를 중단했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야 중영 간 원조가 회복됐다. 그러나 대영제국은 이때 이미 해가 기울어 극동에 전념할 여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소련의 장비가 없어지자 미국은 국민당 정부를 지원하는 구세주가 됐고 국민당 군은 미 장비로 교체하기 시작했다. 항일전쟁 단계에서 미국이 실제로 충분한 지원을 하지 않은 데는 객관적인 이유도 있고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 한편으로 운남-미얀마 도로가 끊기자 물자 장비는 험준한 항로를 통해서만 수송할 수 있을 정도로 규모가 적었다. 다른 한편으론 아시아 전장을 대수롭지 않게 여겨 영국과 소련에 많은 장비를 보내기도 했다. 미국인은 통이 컸다. 중국의 해방전쟁 시기까지 22개 군 64개 사단이 무장할 수 있는 장비를 장개석에게 보내와 국민당 군대의 전투력을 크게 향상시켰다. 그러나 장개석은 미국인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공산당에 의해 대만이란 작은 섬으로 쫓겨나 지내다가 일생을 울적하게 마감했다. 중국은 북벌전쟁 때부터 외국의 군사원조를 대대적으로 받으면서 중간에 공급처를 여러 개 바꿨다. 심지어 프랑스·벨기에·이탈리아 등도 중국에 숟가락을 얹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독일·소련·미국이 더 많이 지원했다. 왜 이런 나라들이 그렇게 호의적으로 중국을 지원했을까? 독일의 속셈은 짐작이 가는 대로 장사를 하러 온 것이다. 그들이 필요로 하는 금속과 각종 원자재가 중국에 많고 거기에 무기까지 팔아 큰돈을 벌 수 있는 중국을 싫어 할리가 없는 것이다. 소련은 여러 가지 생각을 갖고 있었다. 동아시아에서 중국이 일본을 견제하여 극동에서의 이익을 보장해야 하는 한편, 당시 소련은 넓은 영토가 독일군에 함락되고 원자재가 부족했기에 가까운 곳에서 필요로 하는 물자를 공급할 수 있는 나라로 중국을 선택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은 국민정부에 원하는 게 없음에도 속내는 더 흉악했다. 미국이 내놓은 ‘임대법’은 파시스트의 침략을 받는 전 세계 국가들을 지원하는 것으로, 앞에서 이런 국가들이 육탄이 되어 주는 것이고 양쪽이 다 소모되면 그 때에 가서 그들이 나서서 수습하여 이들 국가들을 깊이 통제하겠다는 취지가 있었다. 한마디로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 속에 있고, 친구와 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 속에서 판단되며 이익만이 영원한 것이다. 이들 나라가 중국에게 도움을 줬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이는 거래일 뿐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현대 사회에도 약육강식의 규칙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다만 실력이 강해야 비로소 존경을 받을 수 있다는 경직된 도리가 있다.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②
-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 [동포투데이 철민] 1937년 8월 13일, 제2차 상해 보위전이 발발하자, 장치중(張治中) 장군의 국민당 제9집단군이 상해에 진주했다. 당시 장개석은 장치중 장군에게 2개의 독일의 기계화사인 87사단과 88사단을 지원하였다. 이어진 남경 보위전에서도 몇몇 개편 완성된 독일 기계화사가 빛을 발산하면서 중국군의 완강함을 보여주었다. 중국과 독일, 양국은 서로 다른 진영에 있었다. 그런데 왜 장개석은 독일 기계화 부대가 소유하고 있었을까? 그리고 두 나라는 또 어떻게 교역했을까? 그럼 제2차 세계대전 전후 독일의 타산을 알아본다. 국민당이 독일을 처음 접한 것은 손중산(孫中山) 때였다. 당시 혁명을 위해여 손중산은 도처에서 활동하면서 많은 나라들에 손을 내밀었다. 당시 독일은 공산주의의 발원지로서 손문의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이번 인연은 성공하지 못했다. 독일은 당시 낙후한 중국을 외면했으며 손문은 어쩔 수 없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 뒤 비로소 제1차 국공합작과 소련이라는 거물이 등장하면서 손문을 후원하게 되었고, 격렬한 북벌전쟁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1924년 손중산이 사망하자 장개석은 자신의 권력욕을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좌익과 공산당 세력을 소탕함과 아울러 소련과 완전히 단절했다. 당시 중국은 가난했고, 전쟁 때는 어쩔 수 없이 장개석은 또 밖으로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다. 당시 남경정부가 직면한 국제 환경은 매우 험악하고 객관적으로도 중국과 독일은 일련의 교류를 촉진하는 것으로 양국의 교역에 유리한 조건을 제공해야만 했다.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같은 아시아에서의 이익은 대부분 남아시아와 동남아에 있었으며, 중국에 대한 수요는 그리 높지 않다는 점을 장개석은 명심해야 했다. 한편 그 시기, 일본은 메이지 유신을 통해 강대해졌고, 동아시아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으며, 영국·프랑스 식민지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었다. 일본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식민이익을 지키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는 일본의 중국 침략을 방임하면서 묵인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으며, 중국을 지원하는 물자의 통로를 차단하고 될수록 일본에 아첨했다. 미국은 당시만 해도 그렇게 강하지 않았으며 유럽은 여전히 세계의 중심이었고, 후발주자인 미국은 앞사람의 눈치를 봐야 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모범을 보였고 다른 나라들도 감히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를 감히 하지 못하자 장개석의 아첨은 ‘장님’에게 던져지면서 이상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지만 다행히 독일은 그 바닥을 지켰다. 1927년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본전을 모두 잃었고, 자신의 군사력이 각종 권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등으로 나라 전체가 억눌리자 복수를 꿈꾸고 있었다. 독일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동원해 실력을 키웠다. 그중 중국에 대한 군사원조는 그 일부였다. 영국과 프랑스 등 나라의 요구대로라면 독일은 국방군을 10만 명으로 줄이고 나머지 독일 병사들은 모두 현지에서 전역해야 하며, 방위산업도 모두 전환하여 더 이상 군사 장비를 생산할 수 없도록 되어 있었다. 장개석이 협력 요청을 하는 순간, 이는 독일의 마음에 와 닿은 거대한 군사기구로선 힘겨운 일이었지만 해 볼만한 것이기도 했다. 그러자 중국과 독일은 군사협력을 시작했다. 독일 측은 군사교관을 파견하고 장개석이 군대를 훈련시켜 많은 병사가 전역한 뒤 독일의 국방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하고 전투력을 유지하도록 도왔다. 또 독일 장비를 대량으로 팔아 물자와 돈을 챙기고 노동자를 단련시켜 생산량을 보장하면서 부수입도 챙겼다. 장개석은 유럽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 장비를 대량으로 확보해 자신의 통치를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독일은 이미 무릎을 꿇고 유럽의 2등 국가가 됐지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장개석이 비로소 가격을 낮추고, 최소의 대가로 최대의 이익을 얻는 방법이 되었으며, 그의 장사는 매우 잘 되었다. 그래서 서로가 서로에게 이익이 되고, 서로에게서 이익을 얻을 수 있고, 거래도 오래갔다. 독일은 1927년부터 수백 명의 군사고문을 파견해 40만 세트의 무기·장비를 지원했고, 중국의 군수공장 설립을 도왔으며 독일 무기상들과 연계해 중국 군사물자의 주요 공급국이 됐다. 중국과의 교역에 신경을 쓰는 독일은 다른 대안이 없으니 성의를 보여야 했다. 이들이 차례로 파견한 군사고문은 선발된 엘리트들로, 전임 두 단장은 중국군 지휘중추와 장교 양성제도를 각각 개량해 보병의 지휘를 원활히 하고 산하 각급 병종도 전장에 효율적으로 운용할 수 있도록 했다. 3인 군사고문단의 단장인 세케트 장군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모진이 독일 ‘10만 국방군’ 개편에 착수한 것으로 군을 줄이고 전투력을 높인 경험이 있다. 이 장군은 확실히 힘이 있었다. 그는 전형적인 독일 군인에 속했다. 국민정부 군대의 각종 폐해에 대해 하나씩 해결책을 제시해 장개석에게 많은 유용한 건의를 가져다주어 진정으로 중국군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세케트 장군의 계획대로라면 국민당은 60개의 ‘조정사’와 60개의 ‘정리사’를 개편하는데, 전자는 정당한 독일군 무기사, 후자는 일부 독일군 무장을 한 부대였다. 다만 당시 국민정부의 부정부패가 횡행하고 독일도 제대로 장비를 팔 수 없어 ‘7.7사변’ 직전까지 장개석의 손에는 3개의 완전체 독일 기계화 사단과 1개의 교도총대, 그리고 공상희의 체제 내에 없는 세경 총단 밖에 없었다. 1935년 세케트 장군이 병으로 사임하자 후임자인 파켄하우젠도 국민정부의 군사산업 발전을 적극 도왔다. 독일인의 도움으로 국민당은 정식으로 승마총, 꽃 기관총, 82박격포 등을 본떠 선택적으로 병기공장을 세워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고, 상황은 곧 호전될 것 같았다. 그런데 이때 문제가 생겼다. 당시 중국은 가난하여 대양과 은화를 국내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으며, 대외 무역에서 다른 나라들은 인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경화인 달러와 파운드화는 국민정부 스스로도 부족하고 금은과 은 같은 귀금속은 더더욱 내놓지 못했다. 그럼 중국과 독일 간 군사물자 거래는 도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한 것일까? 답은 텅스텐(钨矿), 석(锡), 안티몬(锑) 등 세 가지 금속이었다. 이 세 가지 금속은 방산 분야에서 널리 쓰이지만 독일 본토에서 생산되지 않아 99%가 외국산이었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군비확충에 나서면서 이들 금속의 수요가 크게 늘었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은 관리가 철저해 독일은 원료를 충분히 조달받을 방법이 없었다. 이 세 종류의 금속은 중국에서는 오히려 매우 흔히 볼 수 있었다. 호남, 광동 등지에서는 모두 상응하는 광물 매장량이 채굴되고 있었다. 게다가 중국은 솔직히 많이 쓰지 않았고 산업용 원자재를 군사장비와 교환하는 것을 선호했다. 독일은 전쟁에 대비해 대규모로 원료를 비축해야 했고, 중국은 물산이 풍부해 독일의 많은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중국은 금속광산을 제외한 농산물·면화·브루마 등의 물자를 돈처럼 쓸 수 있었고, 독일이 국민정부에 지원을 요청한 유일한 품목이다. 다만 장개석의 무기·장비에 대한 수요가 높아졌고 국제정세 변화, 물자수송의 지연, 영국의 봉쇄 등으로 중·독 양국 간 원자재·무기 교역이 이뤄지지 않자 국민정부가 현금·백은을 들고 독일과의 협력에 나선 것으로 보인다. (다음 계속)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2차 세계대전 전후 국민혁명군에 군장비 제공한 국가들①
-
-
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 [동포투데이] 중화민국의 대통령 장개석은 장경국과 장위국 이 두 아들을 둔 가운데, 본처가 낳은 장남 장경국은 아버지를 많이 닮았지만 차남 장위국은 아버지를 닮지 않았을 뿐 아니라 아버지의 네명의 부인과도 닮은 곳이 전혀 없었다. 당시 장위국의 신상에 대해 여러 가지 풍설이 나돌았다. 이를 두고 장개석은 송미령조차 호기심에 그한테 추궁할 정도로 대외적으로 극력 말을 아꼈다. 당시 장개석의 대답은 부인 송미령으로 하여금 분노로 인해 가출까지 강행할 정도였다. 그렇다면 장위국의 생모는 과연 누구일까? 그리고 장개석의 대답은 왜 송미령을 이렇게 화가 나도록 했을까? 사실 장위국도 줄곧 자신의 신상에 대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어 했다. 1941년 계모 송미령과 친하게 지내던 장위국은 계모의 허락을 받아 송미령의 서재를 마음대로 드나들며 책을 읽을 수 있었다. 장위국은 우연하게 송미령의 서재에서 ‘아시아의 내막’이라는 책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인차 그 책을 읽기 시작했다. 미국 작가 존 겐실이 쓴 이 책은 한 페이지가 한 귀퉁이로 접혀져 있었으며 장위국은 그대로 읽어 내려갔다가 그 내용에 화들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책에는 장위국이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라고 적혀 있었다. 장위국은 놀란 나머지 이전에 들었던 소문들을 머리에 떠올렸다. 아버지와 별로 닮지 않은 생김새로 태어난 그의 신상에 여러 가지 의혹이 있다는 것을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장위국은 1916년 10월에 태어났다. 당시 장개석에게는 아들 둘뿐이었지만 작은 아들인 장위국은 어려서부터 떠돌아다니며 여러 곳을 전전했다. 네 살이 되자 장위국은 아버지 장개석에 의해 고향인 봉화(奉化)로 보내지기 전까지 상하이 구(邱)씨와 주(朱)씨 두 집안의 평범한 가정에서 양육됐다. 그가 장개석의 고향인 절강 봉화에 온 뒤 장개석의 본처 모복매(毛福梅)와 첩 요야성(姚冶成)이 번갈아가며 돌보던 중 요야성은 자식이 없었기에 오랫동안 장위국을 돌봐왔다. 장위국은 모복매를 ‘어머니’라고 불렀고, 요야성을 ‘모친’이라고 불렀다. 당시 장개석의 생모인 왕부인이 생존해 있었고, 봉화에 있던 가족들도 모두 장위국을 좋아하며 극진히 잘 대해줬다. 수 십 년 후 장위국은 그 옛일을 다시 들먹이면서 계구(溪口)에 살았던 그 시간을 매우 행복하고도 즐겁게 여겼다. 그러나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위국은 여덟 살 때 장개석에 의해 광주(廣州)로 가 황포군관학교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당시 장개석은 이미 진결여(陈洁如)와 결혼했기 때문에 장위국을 돌보는 사람은 진결여로 바뀌었다. 그 뒤 장위국이 11살이 되자 장개석은 송미령을 부인으로 맞아들이기 위해 모씨, 요씨와 진씨 이 세 여인 모두와 관계를 끊었다. 장개석은 진결여를 미국으로 보냈으며 장위국을 그의 신임이 두터운 오충신(吳忠信)의 집으로 보내게 되었다. 그때로부터 오충신의 부인이 장위국의 이모로 되었다. 장위국과 송미령이 처음 만난 것은 1940년이었다. 그때 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장위국은 스물네 살이었고, 장개석은 둘째 아들과 송미령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어색해질까 봐 어느 정도 걱정하였다. 하지만 장위국은 송미령을 만나자마자 아주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영어로 ‘어머니’라고 불렀고, 서양식 예의에 따라 송미령의 볼에 입을 맞추기도 했다. 송미령은 젊은 시절 서양식 교육을 받았기에 장위국에 대한 첫인상도 좋았다. 두 사람은 모두 기독교를 믿었고, 이후 아주 사이좋게 지냈다. 그래도 그 해의 크리스마스 날 밤이 되자 장위국의 생모가 누구인지 궁금했던 송미령은 장개석한테 자꾸만 따지고 캐물었다. 그런데 줄곧 송미령에게 순종하고 질문이 있으면 반드시 대답하군 하던 장개석이었지만 이번에는 매우 내키지 않는 것처럼 보였고, 송미령의 핍박에 아주 짜증스럽게 “묻지 마, 난 절대 말하지 않을 거야”라고 한마디로 일축하며 내뱉었다. 그러자 이에 몹시 화가 난 송미령은 크리스마스 날 밤 집을 나와서는 홀몸으로 홍콩행을 강행했다. 그녀는 장위국과 사이가 좋았기에 당연히 그의 존재 때문에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송미령이 화가 난 것은 장개석이 자기한테 속이는 것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중에 장개석이 직접 시간을 내 홍콩으로 가서 그녀를 찾았고, 두 사람은 곧 다시 사이가 좋아졌다. 아마 장개석도 이때 장위국의 신상을 송미령에게 알렸을 가능성이 컸다. 이후 송미령은 이 문제에 대해 더는 한 번도 언급하지 않았으며 장위국을 예전처럼 잘 대해주었다. 장위국은 송미령의 방에서 그 ‘아시아의 내막’을 보고는 계모가 자기한테 뭔가를 암시하려는 것이 아니냐고 생각했다. 그 후부터 장위국은 생모를 찾을 타산을 했다. 장개석은 그 몇 년 동안 손중산(孫中山)을 따르면서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를 보아 장위국은 아마도 일본에서 태어났을 가능성이 크다. 장위국은 장개석의 권고에 의해 미국으로 연수를 보내진 틈을 타 일본으로 건너가 야마다 준자부로라는 사람을 찾아냈다. 이 사람은 손중산이 일본에 있을 때 손중산의 충실한 추종자였다. 그리고 장개석이 그 몇 년 동안 일본에서 생활할 때, 두 사람은 왕래가 밀접했다. 장위국은 이 사람이 긍정코 자기의 출생 내막을 알고 있으리라 믿었다. 과연 장위국의 예상대로 야마다는 그의 생모의 이름을 말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시아의 내막’에 나오는 설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켰다, 그랬다. 장위국은 확실히 장개석의 친아들이 아니었다. 야마도에 따르면 장위국의 생부의 이름은 대계도(戴季陶)로 국군의 원로 중 한 명이자 중량급 인물이었다. 당시 대계도는 장개석과 함께 손중산을 따라 일본으로 망명했고, 장개석과는 동향이자 동창으로 친하게 지냈으며 나중에 대계도는 장개석 휘하의 장군으로 되기도 했다. 1913년, 일본에 있던 대계도는 급병에 걸려 현지 병원에 입원하게 되었으며 당시 그는 시게마츠 가네코라는 간호사를 알게 되었다. 그가 입원해 있는 동안 두 사람의 관계는 급속도로 뜨거워졌고, 대계도가 퇴원한 후 두 남녀는 동거하게 됐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일찍 결혼한 몸이었고 그의 아내 뉴유항(钮有恒)은 그보다 나이가 많았지만 대갓집 규수였기에 대계도는 그녀를 사랑하면서 두려워했으며 한 번도 그녀를 화나게 한 적이 없었다. 본인은 한때 국군 고위층의 ‘3대 공처가’ 중 일원으로 꼽히기도 했다. 일찍 대계도는 조카와 사사로운 정을 나눈 적이 있었다. 그러던 그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아내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는 크게 놀란 나머지 다리에서 뛰어내려 자살까지 하려고 했다. 다행이도 당시 그의 부하가 재빨리 그를 구해 주었으니 말이지 큰 일이 날 뻔 했다. 한편 1916년 대계도가 손중산을 따라 귀국할 때 시게마쓰 가네코는 이미 임신 3개월이었다. 하지만 당시 대계도는 감히 그녀를 데리고 귀국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는 고통을 참으면서 시게마쓰 가네코를 일본에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시게마츠 가네코는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야마다 준자부로에게 자기가 낳은 아이를 중국으로 데려가 달라고 간절하게 부탁했다. 이 아이가 바로 장위국이었다. 이렇게 되자 그 몇 년 간 점점 더 아내를 두려워하고 있었던 대계도는 아내에게 이 아이의 내력을 도무지 설명해야 할 수가 없었다. 이에 대계도의 절친한 친구로서, 장개석은 그를 곤란하게 하지 않게 하기 위해 스스로 이 아이를 입양할 것을 제의하였다. 대계도는 즉석에서 동의했으며 이렇게 되어 생부가 아이의 의부가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장개석은 절친한 친구에 대한 약속 때문에 끝까지 진실을 말하지 않았고, 송미령이 따져 물었지만 처음에는 말하지 않았다. 장위국은 이때의 실정을 알게 되었고, 마음속으로는 장개석에 대해 몹시 감탄했다. 다른 한편 생모인 시게마츠 가네코는 장위국이 다섯 살 때 이미 세상을 떠났으며 장위국은 야마다의 말을 반신반의로 믿다가 장개석의 일기를 읽어본 결과 그것은 모두 사실이었다. 그는 확실히 장개석의 아들은 아니었지만, 장제스는 그를 자식처럼 여겼으며 ‘경문위무(经文纬武)’라는 좋은 뜻으로 장경국의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장차 형 장경국(蒋经国)에게 큰 도움이 되기를 바랐으며, 또한 큰 돈을 투입하여 장위국의 마음가짐에 따라 그를 외국에 유학 보내 훌륭한 군인으로 키우기도 했다. 그러나 장위국이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장개석과 장경국은 어쩔 수 없이 그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장개석이 회의나 순시하러 나갈 때면 데리고 가는 사람은 반드시 장경국이었고 정계에서 중점적으로 양성한 사람도 장경국이었으며, ‘호구병변(湖口兵变)’을 틈타서는 장위국의 수중에 있던 병권을 빼앗기도 했다. 장위국은 이때부터 의기소침해졌고, 장경국이 죽은 후에야 사람들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장위국은 자신의 신상을 알고도 장개석처럼 대외적으로 입을 다물었다. 그는 1996년에야 자기가 서술한 책에서 자신이 대계도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인정했다. 하지만 장위국은 ‘물방울 같은 은혜도 샘솟듯한 물량으로 갚는다’는 이치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장개석이 혈연관계가 없는 아버지였지만 이미 그 친아버지가 준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랑을 장위국에게 주었다는 알고 있었다. 장위국은 언제 누가 물어도 장개석의 아들이 된 것을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장개석의 차남 장위국의 생모는 누구일까
-
-
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이 이야기는 지난 세기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반 사이에 있은 한 조선인 남자가 일본인 여성 7명과 동시에 결혼해 도합 27명의 자녀를 낳은 진실한 이야기다. 사람은 사회에서 생활함에 있어서 당연히 많은 욕구가 있기 마련이다. 그중에서도 이성과 생기는 감정적 욕구가 가장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인간은 감정을 말과 행동으로 표현할 줄 아는 영장 동물이다. 더군다나 특정된 장소에서는 남녀 사이에 이런 감정이 싹트기 쉽다. 대천세계에서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형형색색의 사람을 만나기 때문에 반려자로부터 선택되고 또한 반려자를 선택하기도 한다. 하지만 딱히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다. 경우에 따라 인간은 반려자를 선택할 수 없거나 감정적인 욕구가 없는 즉 마음에 들지 않는 이성과 함께 사랑을 나눌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래에 이어지는 이야기가 어느 정도 증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군사적 큰 착오로 벌어진 태평양 전쟁 말기 남성 1명과 여성 7명이 태평양 가운데의 트루크 군도에 남겨지면서 40년대 중반부터 50년대 초기까지 이 해괴한 일부다처(一夫多妻)의 이야기가 벌어졌던 것이다. 사람들은 태평양 전쟁이라고 하면 모든 전쟁의 근원은 일본의 진주만 기습사건이라고 말한다.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여러모로 미국이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알면서도 요행을 바라고 저울질하면서 미국의 태평양 해군기지를 공격했으며 전쟁 초기에는 연전연승하는 양상을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미군이 일본군 약점을 연속 꿰뚫을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미군은 차츰 전쟁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하나둘씩 빼앗겼던 섬을 되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운데 끼인 일본군 점령 섬들은 고립되어 보급은 전혀 없었으며 어떤 경우엔 단 한 명의 병력 손실도 없이 미군은 이 섬들을 스스로 무너뜨릴 수가 있었다. 당시 트루크 제도에는 일본군 병사와 조선인 부역자 및 일본군 위안부가 주둔해 있던 고립된 섬이었다. 미국이 일본의 공급 사슬을 끊자 섬에 갇혀 있던 이들은 고립되기 마련이었고 시간이 흐르자 구원투수들에게 삶의 기대를 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일본 본토에서 구조자를 섬에 보냈을 때 갇힌 사람들은 한동안 삶의 희망을 본 듯 들뜨기도 했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짧디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일본 본토에서 보낸 구조선은 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구조선박은 섬 기슭에 사람이 보이지 아니 하자 무인도로 여기고는 재빨리 선수를 돌려 트루크 섬을 빠져나가면서 아무도 돌아보는 이가 없었다. 그 후 조선인 부역자 김유길과 일본인 위안부 7명이 “사람을 살려요”라고 외치며 해안으로 달려 내려갔을 때는 배가 이미 멀어져 있었다. 그렇게 희망이 깨지자 일곱 여인은 서로 얼싸안고 펑펑 울면서 땅을 쳤고 김유길도 마찬가지의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인들처럼 울고불고 할 수는 없었다. 몹시 절망적이었지만 그는 남자로서 좀 강해야만 했다. 그는 엉겁결에 일본 여인들이 흐느끼는 것을 보고는 그녀들을 위로하려고 했지만 적당한 어구가 없었다. 말문이 막히자 그는 다가가 그녀들의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기만 했다. 울음을 터뜨릴 뿐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그들이었다. 하지만 울음이 그치고 사위가 잠잠해진 뒤에도 이들의 삶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이들 일남 칠녀는 섬에서 두 달 넘게 함께 생활했다. 이들은 구조를 기다리지도 못한 채 섬에서 먹을 수 있는 열매와 과일은 거의 다 뒤졌다. 그러다가 다행히 그들이 앞날이 막막할 때 뜻밖으로 담수호를 발견하게 되었다. 삶의 빛 한 가닥 생긴 것이다. 한편 섬에서의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물고기라도 잡아서 모두가 굶어죽지 않도록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평일에는 고기잡이 말고도 비교적 건장한 여자 몇 명을 데리고 사냥을 했으며 그리고 그 때면 나머지 몇몇 여자들은 나무를 찾아 불을 피우고 빨래 같은 일을 하면서 제각각 자기의 맡은 바의 일에 충실했다. 처음에 김유길과 그녀들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일상적인 교류는 손짓 혹은 몸짓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김유길은 그녀들한테서 일본어를 배웠고 그 또한 그녀들에게 조선말을 배워주었으며 이렇게 되어 그들은 얼마 안돼 서로 정상적으로 소통할 수 있게 되었다. 그들이 섬에 갇힌 지 1년이 되는 해 봄의 어느 날, 김유길은 섬에서 일본인들이 흘린 것으로 보이는 벼 종자를 발견하게 되었다. 순간, 김유길의 머릿속에서는 기발한 생각이 섬광처럼 떠올랐다. 바로 벼농사를 한번 해보자는 결심으로 마음속으로부터 논을 풀었다. 그 해 그는 여인들을 거느리고 열심히 일하면서 논을 풀었다. 논둑을 만들고 논에 물을 가두고…그리고 벼 모종을 논에 심자 과연 벼가 우썩우썩 벼가 잘 자랐다. 그 뒤 가을이 되자 김유길은 또 여인들과 함께 벼를 베어 거두어 들이고 타작을 했다. 타작이 끝나자 이들은 마침내 첫 햇밥을 먹어볼 수 있게 되었으며 더 이상 끼니 걱정을 하지 않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김유길은 점차 모든 여자들의 숭배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먹는 문제를 해결하자 김유길은 자연스럽게 인간답게 살아야 한다는 것을 연상하게 되었다. 바로 빗 바람을 막을 수 있는 집을 짓는 것. 원래 집짓기 같은 것에 대해 조금은 알고 있었기에 김유길은 그 실행이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그는 여자들을 거느리고 연 며칠 나무를 찍어 와서는 서두르지 않고 하나하나씩 기둥을 세우고 벽을 쌓았으며…마침내 지붕까지 얹게 되었다. 그렇게 되자 집 모양새를 두루 갖출 수 있었다. 집은 비록 허름하고 그닥 크지도 않았지만 이 외딴 섬에 그들도 비바람을 피할 곳이 드디어 생긴 셈이었다. 여성 그 자체가 워낙 감성적인 동물이기에 어려운 상황에서 자기에게 도움을 주는 남성을 사랑하기가 쉬운 것이다. 섬에 버려진 뒤 여자들은 몹시 절망했지만 당시 유일한 남자인 김유길은 그녀들을 책임지고 그녀들에게 정신적 위로를 주었을 뿐만 아니라 생존환경까지 해결해줬기에 그럴만도 한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가 김유길이라는 유일한 남자에게 마음을 기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갖가지 애로와 언어의 장벽까지 뚫고 나온 김유길은 일본 여자들과 자주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나중에는 거의 감출 것도 없이 속심을 털어 놓을 때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속된 농담도 거침없이 할 정도였다. 이렇게 한동안 어울리던 중 김유길은 자신이 그 중 한 여자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고는 몰래 그 여인한테 자기의 마음을 고백했다. 헌데 이 여자가 너무도 기쁜 나머지 이를 다른 여자들한테까지 자랑할 줄이야?! 이러자 이들 여자 모두가 한결같이 김유길에게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어 김유길은 황제처럼 되어 일곱 명의 여자를 동시에 품에 안을 수가 있었던 것이다. 가정을 꾸린 뒤 이들은 아예 귀국할 생각을 접고 살림을 차리고 김유길의 아내로서의 각자의 의무를 다 하였다. 그리고 아내들은 선후하여 스물일곱 명의 자녀를 김유길한테 낳아주었다. 이렇게 그들은 하나의 작은 가정으로부터 하나의 대가족으로 발전했다. 그로부터 8년이 흘러간 뒤 이 35명의 대 가정은 바다에 나타난 미군 순찰함에 의해 발견되었고 오랫동안 귀국생각을 접었던 이들에게 마침내 각자가 조국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생겼으며 김유길은 고향으로 즉 한국으로 돌아가게 됐고 그 외의 아내와 자녀들은 모두 일본으로 송환됐다. 김유길은 귀국한 지 몇 년 만에 그 아내들이 그리워났다. 거기에 자녀들이 보고 싶기도 했다. 마침내 그는 일본으로 건너가 처자들을 찾기 시작했다. 일본에서 두루 수소문한 결과 그의 다섯 명의 아내는 이미 재가하여 다시 살림을 차렸고 나머지 2명만이 그래도 김유길이 다시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일본 사회는 이미 일부일처제를 시행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특별한 예외의 경우였다. 정부도 이를 시인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들은 이렇게 죽을 때까지 함께 생활했다고 한다.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무인도에 갇인 1남 7녀, 그들의 운명은…
-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지난번 계속) 마릴린 먼로의 본명은 노마 진 베이커이다. 그녀의 외할아버지 성은 먼로, 그는 정신 질환으로 앓고 있는 자동차 엔지니어였으며 늘 자신을 제임스 먼로 대통령의 자손이라고 했다. 그리고 외할머니인 델라에게도 정신적인 장애가 있어 발작을 일으키기 시작하면 매우 격렬했다. 그런가 하면 어머니 글래디스는 MGM 콜롬비아의 한 영화제판공장에서 스크랩 작업을 했으며 어머니 역시 심각한 정신분열증 환자로 평생 수용소 출입이 아주 잦았다고 한다. 1942년 6월 19일, 마릴린 먼로는 제임스 아이젤 돌티와 결혼했으나 1946년 9월 13일 첫 결혼은 이혼으로 막을 내렸다. 그 뒤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는 1954년 1월 14일 샌프란시스코의 한 모텔에서 결혼식을 올린 뒤 2월 2일 일본 도쿄로 신혼여행을 떠났다. 하지만 이들이 혼인신고를 한 지 274일 만에 마릴린 먼로가 이혼을 제출했고 1954년 10월 31일, 법원은 마릴린 먼로가 조 디마지오와 이혼하라고 판결했다. 뒤이어 마릴린 먼로는 1956년 6월 29일 극작가 아서 밀러와 극비리에 결혼했고 그해 8월 메릴린 먼로는 임신했지만 곧 유산했다. 마릴린 먼로는 1957년 8월 1일 자궁외 임신으로 다시 유산했다. 1961년 1월 20일 두 사람은 멕시코에서 정식 이혼하고 말았다. 18세 때 마릴린 먼로는 기독교인이 됐다. 하지만 1956년 아서 밀러와 결혼하면서 먼로는 유대교로 전향했다. 생전에 마릴린 먼로는 생전에 애완견을 많이 키웠으며 그 중 마지막 한 마리는 시나트라가 선물한 몰타 개로 이름을 지어 ‘마피아(Mafia)’라고 불렀다. 1960년 8월 28일, 마릴린 먼로는 정신과 입원치료를 받았으며 그 뒤 1961년 2월 7일 재차 뉴욕에서 병원에 입원했다가 3월 5일에 퇴원했다. 1962년 1월, 마릴린 먼로는 로스앤젤레스로 이사했으며 7월 20일 자궁내막염으로 또 입원치료를 받았다. 1962년 8월 4일, 마릴린 먼로는 심리치료사와 6시간을 보냈다. 이는 그녀의 생에 있어서 마지막 하루가 됐다. 그 이튿날 즉 8월 5일, 로스앤젤레스 경찰은 마릴린 먼로가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무에 있는 자신의 거처에서 36세의 나이로 사망했음을 확인했다. 8월 8일,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마릴린 먼로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마릴린 먼로는 익숙한 이름이었고 익숙한 이미지였다. 그녀는 트레이드마크식의 웃음과 매혹적인 몸짓으로 하나 또 하나의 성감적이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그녀의 감동적인 연기 스타일과 죽음은 영화 팬들의 영원한 성감 적인 아이콘이자 대중문화의 대표주자로 자리 잡았다. 많은 팬들은 살아가면서 그녀의 사진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아니 보고 또 보았을 것이다. 하얀 치마를 입고 뉴욕 거리에 있는 모습과 땅속 열기에 그녀가 걸친 치마가 나팔을 벌린 듯한 모습의 흑백사진 그리고 카메라를 향해 눈을 살짝 감은 듯 입술을 감빠는 모습, 소파 위에 하얀 다리를 드러낸 모습 등을 보노라면 사진만이 아닌 특별한 감정의 전달과 순수하고 성감적인 정국이 될 때가 많다. 공개된 사진에서 마릴린 먼로는 이전과는 다른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며 청순하기도 하고 털털하기도 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좀 길게 땋은 머리 태, 청바지, 리넨 스커트 등은 다양한 스타일링으로 생활 속 먼로의 사랑스러움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먼로는 1962년 8월 5일, 자기의 거처이 로스앤젤레스 브라이든 무브먼트의 거실에서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숨진 채 발견됐다. 이후 케네디 대통령 암살사건을 떠올리면 마릴린 먼로의 죽음은 케네디 가문과 정치권의 암막에 휘말렸기 때문이라는 시각도 있었다. 그가 죽은지 수 십 년이 넘도록 그녀에 대한 공식 조사서류는 대부분 고급기밀로 분류돼 있었다. 2006년까지 FBI(미 연방수사국)는 미국 자유정보법에 따라 500쪽 분량의 먼로 관련 문건의 비밀을 해제했다. 그러자 마릴린 먼로의 죽음이 그가 적어놓은 비밀일기와 관련이 깊다는 사실을 역사 전문가들은 뒤늦게 밝혀냈다. 먼로의 일기에는 먼로와 케네디 형제의 ‘베갯머리 대화’가 다수 기록돼 있었다. 1962년 8월 초, 케네디 형제는 약속이나 한 듯 먼로와의 모든 왕래를 끊었다. 갑작스런 격변에 직면하여 마릴린 먼로 역시 자신의 위험을 의식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8월 4일 오후 9시 반, 그녀는 절친인 시드니 길라로프에게 전화로 케네디 형제와 있었던 자신의 사생활을 털어놓았다. 그러면서 “한 가지 위험한 비밀을 알고 있다”고 했다. 다음날 새벽 LA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된 마릴린 먼로는 공교롭게도 그날 밤 스스로 목숨을 끊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의 ‘비밀 일기’도 신비롭게 사라졌으며 LA지검 사무실 또한 마릴린 먼로가 일기를 썼다는 것과 먼로의 죽음이 모살과 관련이 있다는 것도 부인했다. 2012년 5월 16일, 제65회 칸 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마릴린 먼로를 주인공으로 한 영화제 홍보 포스터가 나붙었고 현장의 대형 스크린에는 마릴린 먼로 주연의 각종 다른 영화의 스틸 사진이 끊임없이 상영되면서 그녀에게 경의를 표했다. 그리고 유명 조각가 수어드 존슨이 만든 마릴린 먼로 조각상 ‘영원한 먼로’가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에서 전시되기도 했다. 그녀는 줄곧 어떤 남자가 그녀를 사랑하기를 원했고 그녀도 전심으로 상대방을 사랑했지만 안타깝게도 먼로는 평생 이 남자를 만나지 못했다. 사랑을 느껴본 적이 없는 여인으로서 먼로는 전심전력으로 절대적인 관심을 필요로 했다. 이런 100%의 사랑을 남편들은 주지 못했고 애인들은 더욱 주지 못했다. 지금으로부터 59년 전, 36세의 마릴린 먼로는 그 길지 않은 생을 마감했다. 하늘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용모를 주었지만 운명은 그녀에게 아름다운 인생을 주지 않았다. ‘세상의 좋은 물건은 견고하지 못하고 아름다운 구름은 쉽게 흩어진다’는 말이 있다. 이 말은 아마도 마릴린 먼로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싶다.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시대를 빛낸 할리우드 여배우- 마릴린 먼로②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6)
-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전남 완도군 청산도 팸투어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완도에 도착했다. 드디어 육지로서는 한국의 최남단에 위차한 완도군에 도착한 것이다. 완도에 도착한 우리는 완도행 첫 코스로 완도 어귀에 있는 장보고기념관을 참관하게 되었다. 기념관은 옛날 수병들을 거느리고 왜적들의 침입을 물리는 장보고 장군의 업적을 기리어 지은 것이었는데 당시에 쓰던 배를 복원하고 또 기타의 많은 문물도 소장하고 있었다. 특히 당시의 해상전을 복원한 대형 목각화가 벽에 걸려 있었는데 그 조각이 대형적이고도 섬세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경탄케 했다. 기념관 참관에 이어 우리 일행은 기념관 1층에 있는 행사장에서 완도군 신우철 군수로부터 완도군의 현황과 전망에 대한 소개를 청취하였다. 신우철 군수에 따르면 완도군의 천연적인 해양보물고로서 완도군 주위의 바다에는 질좋은 김, 미역 외 전복 등 해양자원이 아주 풍부한 바 앞으로 완도군은 세계에서 가장 완정한 생태보존지역으로 될 것이라고 언급하면서 우리 언론인들한테 한국 전라남도 완도군을 널리 홍보해 줄 것을 부탁했다. 이 날 우리가 행장을 푼 곳은 완도의 관광호텔이었다. 이 호텔은 바닷가에 건축되었는데 바닷물이 늘 호텔남쪽벽을 철썩 철썩 치고 있는 환경이 좋은 호텔이었다. 헌데 나와 박정일씨가 투숙한 방은 306호실로 바닷쪽을 향한 방이 아니어서 어딘가 서운하기도 했다. 이 날 저녁, 우리 일행은 완도군청에서 베푼 연회에 참가하였다. 연회상에는 역시 완도의 특산물인 전복을 비롯한 해산물로 풍성하게 올랐다. 또한 술은 완도에서 자체로 만들었다는 술도 연회석에 올랐는데 맛보니 좀 순한 편이었으나 우리 연변의 된장술이나 송이술 같은 맛이 좀 있는 것 같아 입에 맞았다. 이날 밤, 우리 세계한언의 회원 거의 모두가 앞에 나가 축배를 제의했고 그 제의 때마다 신우철 완도군수가 건배에 응했다. 꽤나 주량이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렴, 우리 중국에는 “주량은 담량이고 담량은 생산량(酒量是胆量、胆量是产量)”이라는 말도 있다. 이 말이 과학적 도리가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글에서는 가끔씩 써먹는 경우가 많다. 여하튼 이날 밤, 우리는 어느 정도 거나하게 마셨으며 나 역시 어떻게 호텔방에 올라와 쓰러졌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부분적 회원들은 밖에 나가 또 마셨다고 했다. 이튿날 아침, 나는 호텔옆에 붙은 해수사우나에 가 해수욕을 하였다. 해수였지만 뜨거운 물에 몸을 푹 담궜다가 나오니 전날에 마신 술이 한결 깨는듯 했고 몸도 거뿐하였다. 이 날 우리 일행은 완도여객선 터미널에서 여객선을 타고 완도군 경내에 있는 청산도로 향했다. 이는 나를 놓고 말하면 20여년만에야 타보는 선박이었다. 다르다면 1993년 내가 탄 배는 냉동운반선이었고 오늘 내가 타는 배는 여객선이었으며 1993년의 나는 선원신분이었지만 오늘의 나는 여행객 신분이었다. 여객선이 출항하자 나는 어쩐지 20여년전에 있은 선원생활이 머리속에 갈마들었다. 당시에는 배를 타는 것이 짜증나고 힘겹던 것이었지만 오늘날 배를 타는 것은 일종 기분 좋은 일이어서 그런지 그 감회가 더욱 깊었다. 여객선의 항행시간은 50분가량, 그제날 내가 배를 타고 대서양이나 인도양을 가로 지르는 것에 비하면 배타는 것도 아니었다. 청산도에 이르러 우리는 우선 청산도 이곳 저곳을 돌아보는 기회를 가졌다. 이곳에서 우리는 대면적의 유채꽃밭을 구경했고 또 옛날 왜놈들과 싸울 때 쌓았다는 돌담도 둘러보았으며 순 돌로 지은 집과 쌓은 담장으로 구성된 마을도 돌아보았다. 이어 우리는 바닷가에 우뚝솟은 범바위라는 곳을 가보았는데 거기에서 나와 동포투데이 허을진 대표가 대오에서 떨어지다 보니 버스를 놓쳐 약속 지점까지 약 1시간 가량 도보로 찾아오기도 했다. 그 때 나는 한바탕 꾸지람을 들을줄 알았었는데 생각밖으로 박수를 치는 것이었다. 도보로라도 대오를 찾아온 우리를 환영한다는 것이었다. 나는 한동안 어리둥절했다. 점심을 먹은 뒤 우리는 인차 바닷가로 향했다. 전복사육장에 가서 체험하는 활동이 있었던 것이었다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6)
-
-
오묘한 세계 대백과(35)
- 일반적으로 아이는 엄마의 배속에서 태어 나지만 어떤 아이들은 처음부터 시험관으로부터 잉태되고 태어 나기도 한다. 사람들은 이런 아이들을 “시험관영아”라고 부른다. 그럼 영아가 어떻게 시험관에서 태어 날 수 있을까? 우선 의사들은 생육할 수 없는 여성의 체내에서 성숙한 난자를 배육시킨 다음 그것을 추출해 내어 일정한 온도와 배양액이 있는 유리그릇 안에 넣어 둔다. 그 뒤 수요되는 남성의 체내에서 정자세포를 추출하여 이 유리그릇 안에 넣어 난자와 정자가 서로 결합하여 수정란이 되게 한다. 이어서 의사들은 그 배양액을 부단히 바꾸어 주면서 수정란이 자연적으로 분열 발육되게 한다. 그리고 그 수정란 발육이 많은 세포로 배태가 되면 의사는 그것을 다시 여성체내의 자궁안에 넣는다. 또 수개월간의 세심한 보살핌 속에서 건강한 아이가 태어난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오묘한 세계 대백과(35)
-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4)
- 차빈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남아메리카, 소속국가 페루, 지점: 안카스성 함의: 마야문화의 발상지 하나임 차빈유적은 페루 안드스산맥 코르딜레라산의 동쪽비탈에 위치, 고대아메리카 마야문화의 발상지중 하나이다. 차빈문화의 흥성기는 기원전 1500년과 기원전 300년 사이 페루 안디스산의 고산협곡에서 발전해온 일종 문화이다. 차빈성내에는 종횡으로 교차된 긴 복도가 있다. 높고도 큰 난송묘(兰宋亩)와 태유(泰优) 피라미드가 있고 많은 석비조각들이 있다. 그리고 이곳의 비탈과 광장주위에는 모두 돌건물이며 절반 가량이 야수모습의 장식물로서 각이한 자태를 나타내고 있다. “U”자형 신무덤 코르딜레라(科迪勒)산의 동쪽언덕에는 두갈래의 강이 흐르는데 차빈유적중 가장 저명한 차빈 신무덤이 바로 이 두 강의 합수목 부근에 있으며 그것이 보존해 내려온 제일 오랜 제상건물은 바로 이 낡은 무덤이다. 낡은 무덤은 3개의 상호 연결된 토돈으로 “U”자형결구를 이루며 그 중 북부 토돈(土墩)의 높이는 14미터, 중부 토돈의 높이는 11미터, 남부 토돈의 높이는 16미메터이다. 그리고 낡은 무덤에는 성자들의 가장 존경을 받는 신석(朗松神石)이 있는데 높이가 4.53미터에 달하는 화강암거석이다. 특이한 조각 차빈의 석판조각은 차빈문화의 큰 특색이다. 차빈석판조각 중 가장 저명한 것은 신석(朗松神石)이다. 이 신석의 밑부분은 차빈신묘의 기지내에 묻혀 있으며 윗부분은 묘의 꼭대기에까지 달한다. 그리고 이 거석에는 한마리의 고양이가 입을 벌이고 잇빨을 드러낸 모습을 하고 있는데 머리에는 숱한 뱀으로 엉켜져 있으나 손과 발은 도리어 사람의 모습과 같은 생물로 되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런 생물은 천당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지옥으로 들어갈 수 있는 모종 신기한 생물이라고 인정, 이는 가능하게 모종 아마존지구에서 발원된 종교숭배일가능성도 있다. 동포투데이 김민 기자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4)
-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2)
- ■ 김철균 1991년은 연변 조선족자치주 창립 39주년이 되는 해었다. 그 해의 8월 31일, 곧 다가오는 “9.3” 명절을 앞두고 연길시 당위와 연길시 정부에서는 연길시 노동자문화궁에서 전 시 범위로 된 민족단결 모범선진 표창대회를 성대하게 개최하였다. 이 대회에서 순자는 영광스럽게도 연길시 민족단결 모범개인으로 추천평의 되었다. 앞가슴에 붉은 꽃을 달고 표창받고 상장을 받아 안았으며 민족단결 모범개인들을 대표하여 대회에서 발언하기도 했다. 순자의 발언은 관중석으로부터 터져 나오는 박수소리에 자주 중단되군 하였다. 주 정부 서쪽 동네에서 살면서 한족이웃들을 도와준 이야기, 건축공사장에서 임신중절수술을 한 한족 임시공(비정규직)과 일을 바꾸어 한 이야기 그리고 문영이를 알게 되고 그 애를 돌봐 준 이야기와 삼복염천에 6명의 한족자식들한테 골무떡을 해먹일 때의 이야기 등 사적은 수많은 참가자들을 감동의 도가니에 몰아 넣었으며 대회장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술렁이게 했다… 한편 대회에서는 또 모든 매스컴의 취재 초점으로 화제에 오를만한 한 젊은 여성도 나타나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아직 한돌도 되지 않은 아기를 안은 채 좌우 관중석을 향해 곱게 인사를 하고는 자아소개를 하였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는 돈화시 화교풍습병전문병원에서 근무하는 이문영입니다. 그리고 아까 대회발언을 한 김순자 어머니의 한족양딸이기도 합니다.” 문영이가 자아소개를 하자 순간 장내는 우뢰와 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오면서 오래도록 그치지 않았다. 박수소리가 즘즘해지자 문영이는 “세상에 둘도 없는 위대한 조선족 어머니에게 이 노래를 선물한다”면서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를 불렀다. 세상에는 엄마가 좋아/ 엄마있는 아이는 보배 같지요// 엄마 품에 안기면 행복 끝이 없어요… 주석대에 오른 문영이는 눈물을 흘리며 이 노래를 불렀고 이를 바라보는 수많은 참가자들도 눈물을 흘리며 그 노래에 귀를 기울이였다. 그리고는 무대에 나란히 선 그들 모녀한테 관중전체가 기립하여 우렁찬 박수갈채를 보냈다. 여기저기에서 카메라 플랫시 불빛이 번쩍이었고 촬영기렌즈와 취재용 마이크가 이들 모녀한테 집중되었다. 바로 이 순간 순자는 문영이와 있었던 지나간 모든 사연들이 주마등처름 갈마들면서 가슴이 뭉클해 났다. …“북해상점”에 와서 우표와 편지봉투만 달랑 사던 문영이, 솜옷과 감기약을 사갔을 때 “마마(어머니)”하며 침대에서 일어나며 목에 매달리던 문영이, 냉면 한 그릇을 사준다고 할 때 그렇게도 천진란만하게 기뻐하던 문영이와 아들 내외가 사온 옷과 신을 주었을 때 그렇게도 감격으로 눈물을 흘리던 문영이… 결혼식에 참석하려고 돈화역에 도착했을 때 그렇게도 기뻐하며 눈물을 펑펑 쏟던 문영이, 그리고 자기가 낳은 아들 심붕곤이가 외 할머니를 닮았다며 그렇게도 기뻐하던 문영이…… 인생의 보람이란 과연 무엇이고 그것을 가늠하는 척도 또한 과연 무엇이더냐?! 바로 이 순간 순자는 인생의 보람이란 돈낟가리에 올라 있는 것도, 남들이 다 우러러 보는 명인이 되는 것도 아니요, 바로 자기처럼 불행한 사람한테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 구해주고 밀어주는 것이야 말로 가장 큰 인생의 보람이라고 단언했다. 그랬다. 순자의 사회적 직위라면 연길시 중앙소학교와 신흥소학교의 총 보도원과 가두적십자회 주임직이 전부었다. 또한 정식직업도 없었고 당원도 아니었다. 한 시기 연길시 신흥가두의 많은 주임들은 김순자를 당원인줄로 착각하고 친절하게 “당원 할머니”라고 불러 주었다. 당원이 아닌 “당원할머니!”ㅡ 모두가 순자를 이렇게 친절하게 불러줄 때 이는 우리 모두가 사색하고 심사숙고하게 하는 여운을 남겨주지 않을 수 없다. 한편 순자가 문영이를 비롯한 어려운 학생과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가정에서의 갈등이 없은 것은 아니었다. 순자가 어려운 이웃을 도울 때, 문영이를 양딸로 삼고 그 애한테 온갖 사랑을 몰부을 때 자녀들한테서 “책망” 아닌 책망을 들을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순자는 “사람은 남한테 베푸는 것을 천직으로 삼아야 한다”는 철리로 가정구성원들을 교육하여 그들 모두가 남을 즐겨돕는 사람이 되게 하였다. 때문에 순자의 자식들은 한결같이 문영이를 친 동생처럼 대했고 그한테 대사가 있을 때마다 마치 자기의 일처럼 간주하고 발벗고 나서 주기도 했다. 모두가 순자한테서 이른바 “세뇌교육”을 받은 결과라고 해야 적절한 것 같다. 그 날 대회가 끝난 뒤 순자는 대회주최 측에서 차리는 연회도 마다하고 문영이와 함께 조용히 노동자문화궁에서 빠져 나왔다. 연회에 참가하여 많은 사람들의 축복을 받는 것이 필경 나쁜 일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사람을 비행기처럼 너무 높이 둥둥 띄우는 것도 그닥 좋은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날 만은 어쩐지 독한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은 충동이 생겼다. “문영아, 오늘 너와 나 냉면 한그릇씩 사먹지 않을래?” “아이고요, 어머니도 참 또 한그릇만 달랑 사놓고 저만 먹게 할려구요.” 문영이는 눈을 곱게 흘기더니 “그러지 않아도 전 오늘 냉면 100그릇을 살 용의가 있어요”라고 하며 동을 달았다. 순자와 문영이가 큰 길쪽으로 나오니 거기에는 용환영감을 비롯한 모든 자식과 손자 손녀 등 온 가족이 총출동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그 날 가족일동은 연길복무청사에 들어가 특실을 도맡고 가족파티를 열었다. 용환영감과 나란히 앉은 순자는 술잔을 들어 영감의 술잔에 마주치며 “건배”를 불렀다. 환갑을 쇤 후에는 평소에도 영감과 함께 가끔씩 한잔씩 하는 순자였다. 순자가 영감과 잔을 마주치며 “건배”를 부르자 가족일동이 모두 일어나 “아버지와 어머니의 건강장수를 위하여”를 웨치며 잔을 굽냈다. 술을 몇잔 마시고 어느 정도 흥분된 순자는 저도 몰래 일어나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꽃가지 쓸어안고 휘파람을 불어서 이 가슴을 전할소냐/ 이슬비 소리없이 느껴우는 한많은 // 봄밤이 그리워 그리워 그리워 웁니다 흘러간 옛노래를 부르는 순자의 눈에서는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자신이 민족단결 모범개인으로 되어 표창받고 대회발언까지 한 날인데 왜 우시는걸까? 순간 이를 보는 문영이는 어떤 영문인지 몰라 두리번거리며 눈치를 살폈고 자식들도 어머니가 이런 장소에서 이렇듯 애환에 담긴 흘러간 옛노래를 부를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여태껏 이런 노래를 불러보는 모습을 처음 보기도 했다. 한평생 남편을 섬기고 자식을 키우고 거기에 또 남들까지 도우면서 낙천적으로 살아오던 어머니,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으나 어머니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는 그 애환에 대해 자식들도 다는 알 수 없었다. 그것에 대해 가장 잘 알아주는 이는 그래도 오직 남편인 김용환 영감뿐이었다. 4 순자와 문영이 사이의 모녀관계는 계속 이어졌다. 순자는 문영에 대해 아끼고 사랑하며 또 명절기간에 서로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선물이나 주고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았다. 순자는 문영이가 처사를 잘못하는 것이 보이면 타이르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엄하게 꾸중하기도 했다. 이는 문영이가 결혼하면서부터 더욱 그랬다. 그 만큼 순자는 자식을 사랑하면 자식이 밖에서 일처사를 잘하도록 교육을 잘해야 한다고 인정했다. 여기에 들어서 순자는 아들보다 딸들에 대해 더 엄하게 굴었다. 왜냐하면 딸이 시집간 후 시부모와의 관계, 시누이 및 시동생들과의 관계 등을 잘 처리해야 양쪽 사돈 사이가 더욱 화목하기 때문이었다. 아무리 뜻이 잘맞고 생활수양이 높은 남녀라 해도 일단 결혼하여 생활하다 보면 이러 저러한 모순에 봉착하게 되고 때로는 네탈 내탈하며 다툴 때도 있기 마련이다. 문영이네도 마찬가지었다. 두 사람 모두가 거의 빈손으로 결혼하다 보니 이러 저러한 생활고초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살아감에 있어서 돈이 아무리 결정적인 요소는 아니라고 하지만 돈의 역할에 대해서는 무시할 수는 없었으며 아무리 시댁식구나 처가식구가 반갑다고 해도 부부와 자식 이렇게 단촐하게 생활하는 것이 더 편하고 자유로운 것은 사실이다. 이 면에 들어 문영이네는 원체 생활기초가 박약한데다 시댁식구들의 출입이 비교적 잦은 편이었다. 특히 시부모가 장기환자였는데 노인들은 왜서인지 그 몇명의 자식 중 문영의 남편인 심엽군한테 주로 의거하는 모양이었다. 물론 시부모가 교원인 남편한테 주로 의거하는데 대해 문영이는 아무런 불평도 없었다. 하지만 문영의 가정 역시 사정이 있기 마련이었다. 시부모의 생활비 혹은 병치료비 같은건 부부가 돈을 절약하여 얼마씩 보내드리는건 마땅한 일이나 집이 작다 보니 잠자리가 불편할 때가 많았다. 특히 병치료 때문에 시아버지와 시어머니 두분 모두가 와서 며칠씩 체류할 때면 자연스럽게 짜증이 나군 했다. 거기에 결혼 후 문영이 또한 웬일인지 몸에 이탈 저탈 생기면서 모든 것이 여의치가 않은 상황이었다. 문영이는 가끔씩 순자앞에서 그런 고충에 대하여 털어놓군 했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너, 시부모를 외면하면 안된다”, “사람이 나이 들면 병이 나기 마련이라 이럴 때 자식이 돌봐 드리지 않으면 누가 돌봐 드리겠느냐?!”, “노인한테 효도하는 면에서는 부모가 자식한테 훌륭한 본보기를 보여줘야 한다”는 식으로 반복적으로 일깨워 주군 했다. 모든 것은 큰 딸 영순이를 교육할 때와 다름이 없이 엄격하고도 조리성이 있었다. 몇 년 전 문영의 아들이 커서 대학교 시험준비를 할 때었다. 그때도 문영이네 집은 30여평방미터밖에 안되는 작은 집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아들 붕곤이가 대학교 시험준비를 할 때 시부모가 병치료 때문에 와있겠다는 것이었다. 애가 대학교시험준비를 하려면 독방이 있어야겠는데 시부모가 오면 그방을 내주어야 했다. 그러니 잠자리, 식사 등 많은 면에서 불편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당시 시아버지의 병은 폐암이었다. 그러자 문영이는 가끔씩 남편과 바가지를 긁었으며 나중에는 부부 사이의 종종 말다툼도 생겼다. 물론 문영이는 혹시 연길에 와도 순자 어머니한테 부부 사이에 다투었다는데 대해서만은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었다. 하지만 순자는 수심에 잠겨있는 문영이의 얼굴모습을 통해 꼭 심상치 않은 일이 있다고 단정했다. 순자는 아무리 생각해도 문영이한테 일이 생긴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마음같아서는 자기 자신이 직접 돈화에 가서 문영이네 가정에 도대체 어떤 일이 생겼는가를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 때는 몸이 몹시 불편하여 나다니기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느날 순자는 자기 대신 큰 딸 영순이와 둘째 딸 영옥이를 돈화로 보내기로 하였다. 문영이네 가정상황을 알아보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그날 돈화에 도착한 영순이와 영옥이가 문영이한테 전화로 연락하면서 언니네가 돈화로 왔다고 알렸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문영이는 집으로 오지 말고 밖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집에 꼭 무슨 불쾌한 사연이 있으리라는 순자의 예감이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영순이와 영옥이는 어느 한 작은 음식점에서 문영이를 만났다. “너, 가정에 꼭 심상치 않은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구나. 왜 우리더러 집으로 가지 못하게 하는거냐?” 영순이가 캐여묻자 문영이는 한동안 머뭇거리더니 마침내 자초지종을 이실직고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어떤 날에는 기분이 말째여서 집에도 들어가지 안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이에 영순이는 몹시 화가 동했다. “너, 도대체 왜 이러는거냐? 정말 내 동생 답지 않구나.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집에 들어가야지. 집에 들어가 남편과 상론하여 좋게 해결하는 쪽으로 노력해야지 이게 뭐냐?!” “언니, 언니레를 실망시켜 죄송하지만 전 어쩔 수가 없어요. 시아버지의 병은 몹시 좋지 않은 병으로 다른 사람한테도 피해를 주는 그런 병이예요. 그리고 그보다 더 답답한건 애가 대학시험준비를 하는데 공부할 자리마저 없거든요.” “하지만 너 바꿔놓고 생각해 보아라. 만약 연길에 있는 어머니가 그런 병에 걸려 너희들 집에 가있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 “어머닌 다르죠. 어머니가 저한테 얼마나 잘해줬는데 제가 어머니를 마다하겠어요?” “쯧쯧 이것봐라. 그러니 네가 속이 짧다는거란다. 그럼 이전에 너의 시아버지도 네 남편한테 아주 잘해주었을 것이 아니냐? 그러니 너의 시아버진 남편한테는 아주 소중한 분이란다. 부모가 있고 그 다음에 자식이 있다는 도리를 너 왜 모르는거냐?! 사람이 살다보면 힘들고 애가 탈 때가 어디 한두번이냐? 그렇다고 자기가 내키는대로 하면 어떻게 되겠느냐!” 이에 문영이는 별로 변명같은건 하지도 않았다. 언니 영순이의 말이 틀린건 아니었다. 하지만 영순의 타이름과 책망에 내심으로 설득된 것도 아니었다. 후에 문영이가 완전히 감화된 것은 역시 순자의 행동에서였다. 언젠가 문영이는 귀수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순자는 그 소식을 듣자 바람으로 많은 영양제품을 사갖고 돈화로 찾아가 내놓았는가 하면 극성스레 간호해 주었으며 돌아올 때는 몸을 춰세우라며 돈 1000원까지 내놓았다. 순자는 문영이가 앓을 때마다 그렇게 처사했다. 그 때 순자는 이미 80세를 바라보는 나이었다. 연로한 몸임에도 자식의 건강에 신경쓰는 순자어머니를 바라보며 문영이는 자신한테서 많은 것을 반성했다. 바꿔놓고 앞으로 아들 붕곤이가 장가를 들어 색시를 맞았을 때 그 색시가 자기를 홀대했을 경우를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 뒤 공무로 연길에 왔다가 순자어머니를 찾아온 문영이는 눈물을 흘리며 진정으로 참회하였다. “어머니, 그 때 어머니가 다녀간 후 여러번 궁리해 보았는데 제가 진짜 생각이 짧았어요. 어머니의 말씀을 제대로 들었더라면…” 뿐만 아니라 문영의 신랑 심엽군도 언제인가 일부러 연길로 찾아와서는 순자한테 자기 자신을 반성하기도 했다. “한시기 저와 문영이가 찧고 박고 한건 문영이의 잘못만이 아니랍니다. 기실 제가 당시 시아버지 때문에 부담스러워하는 문영이의 심정을 이해해 주지 못했고 잘 달래 주지도 못한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니 장모님 그 때의 일을 갖고 욕하려면 절 욕해 주십시오.” “자네 그만 두게나. 난 이미 다 알고 있다네. 기실 내 딸 문영이가 한시기 생각이 짧아서 옹졸하게 처사했으니 오히려 내가 자네한테 미안할 따름일세. 여자들이란 머리칼만 길지 궁냥이 짧으니 자네 많이 양해해주게나.” 이렇듯 항상 자기의 자식을 책망하는 순자였지 절대 남의 집 자식을 욕하거나 책망하는 순자의 성미가 아니었다. 이는 또한 진정 문영이 친정어머니의 자세로부터 나오는 말이었다. 그랬다. 다만 문영이를 낳아주지 않았을뿐이지 순자는 문영의 친정 어머니인 것만은 분명했다. (다음 계속)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2)
-
-
사상 첫 중국인 특종부대- 소련군 88 국제여단
-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중국의 현대사에 있어서 동북의 항일연군, 홍군의 장정과 남방의 게릴라전쟁은 중국공산당의 “가장 간고한 3대 전쟁”이었다. 이중 항일연군의 전쟁은 말 그대로 “간고한 전쟁중의 간고한 전쟁”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러시아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88 국제여단의 군기 불완전한 집계에 따르면 항일투쟁중 동북항일연군은 군급장령 39명이 희생되었고 2명이 실종되는 등으로 아주 참혹한 대가를 치르렀다. 1940년부터 1945년 8월 사이 동북항일연군은 소련 원동지구로 전이, 소련 원동방면군에 편입되어 중국의 첫 특종병 부대로 되었다. 그리고 소련 원동군 사령원 알파나센크 대장으로부터 검열을 받을 때 이 항일연군 교도려는 소련원동홍군 제88독립여단(국제여단)란 소련군 번호를 가지게 되었다. 이 부대가 바로 중국의 첫 특종병 부대었다. 게릴라부대로부터 “특정병”으로 1940년, 동북항일연군은 점차 소련경내로 퇴각, 중소변경 소련경내의 삼림지대에 주둔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1941년 3월 하순부터 제3로군의 이조린, 김책, 왕명귀, 제2로군의 왕효명, 강신태 등은 소부대를 인솔해 자주 동북경내로 진출하여 항일투쟁에 투입하군 하였다. 소련으로 퇴각한 항일연군은 소련홍군의 방조를 받기 시작, 소련변방군은 그들에게 담배, 소고기, 빵과 통졸임 등을 보내왔고 소련경내에서 충분히 휴식하여 원기를 회복하도록 도와주었다. 일련의 휴식정돈을 거치게 한 후 소련홍군은 항일연군을 도와 숙영지를 만들어 주었고 항일연군 전사들 또한 열심히 일하고 조직규율성을 잘 지켜 소련홍군의 찬양을 받았다. 1941년 1월부터 동북항일연군은 우쑤리크(원 쌍성자)와 하바로프스키 부근의 남북 두 곳에 숙영, 소련홍군의 지도하에서 새로운 훈련을 시작했다. 당시 항일연군은 재차 동북으로 진출해 일본군과 싸울 수 있기를 희망, 때문에 훈련임무는 몹시 번중했다. 매일 8시간에 달하는 실외훈련으로 그키타기, 체조, 사격, 무선전 날리기, 박격포, 기관총 쏘기 등이었고 여병들은 간호훈련을 하였으며 남녀 장병 모두가 러시어를 배우기도 했다. 이 중 1942년 1월부터 3월까지의 통계를 보면 정치학습, 60시간, 폭파훈련 70시간, 전술교육 80시간, 사격훈련 60시간, 스키훈련 60시간, 지형관찰 훈련 20시간, 실탄훈련 38시간, 내무훈련 80시간, 총검술 훈련 24시간으로 매일 군사훈련 7시간에 달하고 러시아어 배우기 3시간에 달했으며 그리고 기타 사업 2시간까지 합치면 매일 12시간 이상의 근무를 하군 했다. 중국려의 여낙하병 1942년 7월부터 소련홍군의 지도하에 동북항일연군은 공중낙하훈련을 시작했다. 이들은 낙하산 펴기 등 기번자세로부터 비행기 모형식별과 45m 높이에서의 낙하 등으로부터 배우기 시작, 훈련을 시작하여 한달만에 실제 훈련에 들어갔으며 7월 26일에는 1000m 높이의 고공에서 직접 낙하하는데 성공하였다. 8월 2일까지 이들은 도합 8차에 달하는 실제 낙하훈련을 진행, 훈련밀도가 아주 컸다. 그리고 10월 18일부터는 왕옥환, 이계향, 송옥정 등 12명의 여병들도 낙하훈련에 참가, 2일후 이런 여병들도 1000m 고공에서 낙하하는데 성공하였다. 한편 원동 88 독립여단은 보병영외 반탱크포영, 기관창영, 자동보총영, 포병영, 교통영, 정찰련 등으로 범위가 확대되었다. 아무리 힘들어도 투쟁 견지 동북항일연군이 소련홍군 88 국제여단으로 된 뒤에도 이들의 대일작전은 멈춘적이 없었다. 1942년부터 국제여단은 도합 300여차 인원을 동북에 파견하여 정찰임무를 수행하고 군중을 발동하였다. 이런 활동기간을 보면 길게는 1년, 짧게는 10여일씩 되었다. 이 중 적지 않은 전사들은 일본군 및 위만주국군한테 추격을 받다가 다시는 88 국제여단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례가 수두룩했다. 하지만 이중 많은 전사들이 적들과 혈투를 벌이다가 작열한 최후를 마치었으며 변절자로 되었다는 기록은 단 한건도 없었다. 1945년 5월부터 소련홍군은 서방전선으로부터 대량 원동지구로 이동, 대량의 대포와 탱크 등이 모두 철길에 의거해 이동했다. 이에 따라 88 국제여단의 화식표준도 향상되었다. 검은 빵이 흰 빵으로 대체되었고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식용유도 식탁에 올랐고 육식량도 많이 증가되었다. 이는 독일과 싸우던 제2선부대의 표준과 같았다고 한다. 1945년 8월 9일, 소련은 대일선전을 선포, 동북경내로 대거 진출하였다. 이러자 88 국제여단은 대일작전에서의 선견 및 향도 부대 역할을 하였다. 기재에 따르면 당시 적어도 300명에 달하는 88 국제여단 장병들이 소련홍군의 통역, 향도 및 돌격대원으로 되었으며 어떤 전사들은 사전에 적후에 낙하하여 침투정찰을 하기도 했다. 88 국제여단 왕일지 중위의 회억에 따르면 당시 국제여단은 대량의 정보를 소련군에 제공, 이중에는 일본군의 방어공사와 병력배치, 또한 병력 및 무기 규모 등이 망라되어 있었다. 1946년 소련홍군 제88 독립여단은 그 번호가 취소되었고 이 부대의 장병들은 각각 중국공산당이 영도하는 여러 부대에 편입되었으며 일부 조선인 장병들은 조선으로 나가 조선건국사업에 투입되었다.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사상 첫 중국인 특종부대- 소련군 88 국제여단
-
-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5)
- ■ 김철균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2015춘계대회에 참가한 회원들이 전라남도 완도군 장보고기념관을 둘러보고 있다. 5월 30일, 일행은 2대의 버스에 나눠앉아 한국의 최남단에 있는 전라남도 완도군으로 향했다. 시간은 약 5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했다. 한반도의 중간지대에서 최남단까지의 노정을 5시간 30분에 달린다? 고속버스의 우월성인가? 아니면 대한민국의 땅이 그만큼 작다는 것을 의미할까? 예를 들어 한반도의 전체와 중국의 전체를 비한다고 할 때 서울에서 완도까지는 중국의 양쯔강 남쪽 난징에서 광저우까지를 말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면적과 거리는 엄청난 차이가 난다. 2004년 10월, 당시 연변축구팀이 전국을급리그 8강전에 참가할 때 우리는 버스에 앉아 북방의 연길에서 중국의 중심지대인 허난성 정저우까지 가게 되었는데 2박 3일이 걸렸었다. 한반도의 절반 땅 거리와 중국의 절반 땅 거리- 비교될 수가 없었다. 한편 고속버스에 앉아서 달리는 동안, 나는 며칠간의 서울생활을 잠시나마 정리해보았다. 거리가 깨끗하고 사람들이 문명하며 모두가 예의가 밝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고 다음의 인상은 무엇이나 엄청 비싸다고 여겼었지만 그것이 아니었다. 그 사례로 나와 박정일 선생은 가끔씩 국도호텔 주변에 있는 작은 음식점을 찾아 아침(호텔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밥을 먹군 하였다. 순대국으로 인당 한화로 5000원, 중국의 인민폐로 말하면 55위안 정도로 연길에서 아침밥을 먹자고 해도 이 정도는 들어야 한다. 거기에 밑반찬이 맛있고도 깔끔했으며 식사후 커피 또한 무료로 제공되군 했다. 그리고 뼈다귀해장국은 인당 3000원, 결코 비싼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 연길의 음식값이 비싸도 너무너무 비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외 박정일 선생은 서울의 시장에서 옷 몇견지를 샀다고 하면서 연길 서시장의 옷들에 비해 싸다며 연길 서시상에서 한국옷을 가져다 몇배씩 비싸게 팔아 먹는다는 것이었다. 서울에서 비싸다고 생각되는 것이 없는건 아니었다. 바로 택시요금이었다. 기본금이3000위안으로 연길에 비해 많이 비쌌다. 서울지도에 대해 익숙하지 못한 우리는 주로 택시를 많이 이용, 만원을 벗어날 때까가 허다했다. 하지만 서울의 면적과 연길의 면적을 비해볼 때 이해되기도 했다. 중국도 베이징이나 상하이로 가면 교통비가 엄청든다는 것은 나 역시 잘 알고 있으니 말이덨다. 다음 서울 종로구는 서울의 중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헌데 종로 4가 큰길가의 골목들을 보면 길이 몹시 좁았다. 사람이 다니는데는 큰 불편이 없겠으나 가령 화재가 발생할 경우 소방차가 어떻게 들어가겠는가 하는 우려가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또한 서울의 구석들을 돌아 보노라니 이전에 한국인들이 연길을 돌아보며 하는 말들이 불쑥 머리에 떠올랐다. “연길은 마치 한국의 60연대 초기를 방불케 해요.” “연길은 한국 어느 한 군수준에 미칠까?” … 헌데 서울의 구석구석을 살펴보니 피차일반이었다. 골목 양측의 건물들을 보면 해방전 용정거리나 연길 아래개방지 지역을 방불케 하는 곳들이 많았으며 가리봉동 시장은 화룡시 투도진 시장보다도 헐망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사람이 사는 곳이면 장단점이 다 있다는 생각으로 그러한 것을 비꼬고는 싶지 않았다. 다른 한편 이 날 버스에서 나는 사이판에서 언론사업을 하고 있다는 김홍균이라고 부르는 분과 나란히 앉게 되었다. 그분의 명함은 김홍균, 나의 이름은 김철균- 거기에 우리 둘은 모두 김해김씨어서 어딘가 통하는 것 같았다. 국적은 달라도 “피는 못속인다”는 말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순간이었다. 이 날 김홍균씨는 자기는 김해김씨 몇대 후손이고 김해김씨네가 몇개 파인데 자기는 어느 파에 속하며 등등에 대해 설명했지만 나는 김홍균씨의 앞에서 할 말이 궁금해졌다. 같은 김수로왕의 후손이고 김해김씨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기실 우리가 몇대인 것은 몰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뿐 아니라 김홍균씨는 진나라시대부터의 중국의 역사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책을 많이 읽었겠다는 감이 들었다. 하긴 좀 자기가 박식하다는 것을 “자랑한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그래도 아는 것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하긴 중국 역사에 대한 그와 우리의 견해가 일정하게 다른 것도 있었다. 이러는 사이에 누군가 “완도에 거의 도착했어요”하고 소리를 질렀다. (다음 계속)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5)
-
-
오묘한 세계 대백과(34)
- 사람으로 하여금 분발하게 하는 “사자왕”, 창의력이 풍부한 “국왕과 작은 새”, 자극이 강한 탐험편 “괴물공사”… 꼬마 친구들, 이미 신기한 영화왕국에 취해버렸나요? 하다면 친구는 영화란 어떻게 제작되는지를 아는가요? 그럼 우리 함께 그 세계에로 들어가 봅시다. 영화란 조상화학과 광학 등 다문학과의 지식과 원리를 이용, 그 중 가장 중요한 원리는 “시각잔류”로서 모 영화화면이 소실된 후 사람들의 눈의 시망막에는 여전히 그 화면이 0.1-0.4초 좌우 남아있군 한다. 영화필름은 매초 24개 화면의 속도로 돌아가는데 일련의 정태적 화면은 시각잔류의 작용으로 일종 연속적인 시각인상을 조성한다. 이렇게 우리는 연속적인 영화화면을 볼 수 있다. 영화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입체영화는 날이 갈수록 사람들의 환영을 받고 있다. 친구가 일단 특수 제작한 편광안경을 끼면 곧 입체영화 스크린의 모든 장면들이 매우 직관적이고도 진실감이 나게 하는바 예하면 모 일종의 물체가 친구를 향해 쾌속적으로 돌진해올 때 친구는 그 물체가 자기의 머리를 맹렬히 습격하는 감이 들면서 잠시 어쩔 바를 모를 수도 있을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오묘한 세계 대백과(34)
-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3)
- 곡부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산동성 서남부의의: 동방의 성지임 곡부는 중국의 역사문화의 명승도시로 지금까지 5000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황제와 공자가 여기서 탄생했고 염황도 여기를 서울로 정했다고 한다. 곡부는 유규한 역사문명과 찬란한 동방 고대문화로 중외에 알려진 외 중국의 기나긴 역사 중 사람들의 마음속의 성지이고 명승도시로 서양인사들은 곡부를 “동방의 예루살림”이라고 부른다. 1998년 곡부의 공자묘, 공자부, 공자림은 유엔 교육과학문화조직의 “세계문화재명록”에 들어갔다. 공자묘 곡부의 공자묘는 기원전 478년에 수건, 공자가 사망한 이듬해에 섰다. 공자묘는 거대한 궁전식 건축물로서 북경의 고궁 및 하북성 승덕의 피서산장과 더불어 중국의 3대 고대건축군에 속한다. 공자묘는 남북의 길이가 800m, 부지면적이 13만제곱미터이며 주요 건축물로는 대성전, 규문각(奎文阁), 행단(杏坛), 비정(碑亭) 등이 있는데 배치가 엄숙하고 자세가 웅위롭다. 그 중 대성전은 공자묘의 주체건물로서 대성전 내에는 높이가 303미터에 달하는 공자의 조각상 및 황제의 어필친서가 소장돼 있다. 공자부와 공자림 공자부의 원명은 연성공자부(衍圣孔府)으로 1038년에 세워졌으며 북경고궁의 귀족부의 버금으로 “천하제일의 집”으로 불리우고 있다. 공자부의 배치는 중국전통의 전당후침(前堂后寢)제로 앞은 관아이고 뒤울안이 주택이 있다. 공자림은 공자와 기타 가족성원의 묘지로 세계에서 지속 연대가 가장 오래고 보존이 가장 완벽하며 규모도 가장 방대한 종족묘지군으로 공자의 묘가 공자림의 중심에 위치, 묘앞에는 큰 비석이 서있고 거기에는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圣文宣王墓)”라고 씌여져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3)
-
-
[기획]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4)
- ◐ 김철균 그 이튿날 아침, 박정일 선생은 국도호텔 근처에 있는 “할머니순대국집”에 가서 순대국이나 한그릇씩 하자고 했다. 전날 저녁에 호텔에서 먹은 서양음식이 입에 맞지 않아서였다. 순대국은 일인분에 한화로 5000원씩이었다. 그릇에는 돼지머리고기도 적지 않게 담겨져 있었고 맛도 별맛이었다. 중국에 있을 때 들어오던 “한국의 순대국은 맛이 없다”는 것과는 딴판인 것 같았다. 그리고 우리 연길에서도 두사람이 아침식사를 간단히 하려 하면 인민폐 50원 정도는 거의 소비하는 것과 비교해볼 때 크게 비싼 것도 아니었다. 그외 한국에서는 식당에서 식사를 해도 커피가 무료로 공급, 이는 커피에 거의 인이 박힐 정도로 좋아하는 나한테 있어서 아주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제14회 세계한인언론인 대회 만찬회. 이 날부터 제14회 세계한인언론인대회는 본격적으로 시작이 되었다. 이날 대회의 첫 순서는 한국 한글학회 김승곤 회장으로부터 한글의 세계화에 관한 특강을 들었다. 특강에서 김승곤 회장은 우리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강조하여 지적하면서 그 비교로 한국인은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한글을 거의 소화해 낼 수 있지만 중국인들은 한문을 익히기에 평생의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으며 또한 현재 “그루마”가 일본어로 기재되고 있지만 이는 기실 한국어라고 주장했다. 그 이유로“굴러다니는 말”이라는 뜻에서 “그루마”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는 몰라도 아주 그럴듯한 주장이라는 생각이었다. 이어 한국선거관리위 일군으로부터 한국 중앙선거관리위 재외동포선거에 관한 특강이 있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 필자와 박정일 선생은 마이동풍으로 듣는둥 마는 둥 했다. 한국에서 지방선거나 대통령 대선을 한다고 해도 우리한테는 선거권리가 없기에 아무런 관계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 날 점심시간은 한국시간으로 12시부터 13시까지 딱 1시간이었다. 빽빽한 스켓쥴이었다. ↑사진 : 한국프레스센터 앞에서 필자 그리고 오후에는 역시 특강으로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 사업내용 공지가 있었다. 사업내용 공지발표는 마라톤식으로 아주 오랜시간동안 진행이 되었다. 하긴 그 동안 세계한인언론인연합회에서 퇴출당했던 부분적 회원사 대표들이 회의장에 진입해 항의를 제출하는 등 계획외 일이 발생하기도 하여 지체된 것도 사실이었다. 뒤이어 우리는 버스를 이용하여 한국 프레스센터로 이동하여 그 곳에서 제14회 세계한인언론인 대회 개회식을 가졌으며 동시에 한국 연합뉴스 사장님이 베푼 연회에 참가하기도 했다. 개회식은 몇몇 고위 인사들의 축하발언이 있는 뒤 2015년도의 사업계획발표가 있었다. 이는 요란하고도 규모가 엄청난 중국의 개회식과는 달리 조용했으며 축하공연으로 몇명의 클래식 가수들의 공연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연회에서 우리는 그제야 한 식탁에 앉은 사람들과 서로 인사를 나누었고 건배를 부르며 의사소통을 하는 시간을 주로 가질 수 있었다. (다음 계속)
-
- 뉴스홈
- 고국소식
-
[기획]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4)
-
-
[장편실화]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1)
- ■김철균 결혼한 뒤 문영이는 극력 “친정 어머니”인 순자한테 손을 내밀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아무리 순자어머니가 무던하고 둘 사이가 극진하다지만 필경은 생모가 아닌 “양어머니”었고 거기에 민족도 다른 조선족 어머니었으니 말이다. 거기에 외국에서는 만 18세만 되면 친 자식들도 부모의 도움에서 벗어나 자립한다는데 결혼할 때까지 “친정어머니”의 신세를 크게 지고 보니 심리적 부담과 압력이 생겼던 것이다. 하물며 순자어머니도 이젠 년로하기 시작한 몸이었으니 더욱 그랬다. 한편 순자가 문영이의 효도를 어느 정도 받아들었더라면 그녀의 이러한 심리적 부담도 좀 가벼워질 수도 있었다. 하지만 문영이가 간혹 용돈이라도 드리면 순자는 도리어 크게 성을 내기가 일쑤였고 돈 대신 부식품이나 보건품을 사갈 때면 마지 못해 그것을 받더라도 돌아올 때에는 그 가치보다 몇배에 달하는 돈을 억지로 넣어주는 순자였다. 문영이는 심정이 착잡했다. 그렇다고 오랫동안 이어온 “모녀의 정”을 끊을 수도 없었다. 그것은 그녀의 양심이 도무지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채찍질했다. 결혼 뒤 얼마 안되어 문영이는 임신하게 되었다. 임신 역시 여인한테 있어서는 결혼에 못지 않는 희사로서 자신이 드디어 어머니로 된다는 자부심으로 들뜨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문영이는 임신사실을 일부러 순자한테 알리지 않았다. 알리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알리면 또 만사를 제쳐놓고 달려올 “친정어머니”였겠으니 말이었다. 이렇듯 기쁜 일을 순자어머니한테 알릴 수 없는 문영이는 자주 깊은 고민에 빠지기도 했다. 문영의 배는 하루가 다르게 불러갔다. 이와 더불어 누가 돈화로 다녀오거나 편지를 쓸 때마다 순자는 “넌 왜 아직도 소식이 없느냐?”, “손주를 안아 보고 싶구나” 하며 독촉이 불같았다. 또한 “너 어릴 때 고생하며 자라 혹시 냉병에라도 걸린거 아니냐? 의사인 네가 알아서 잘 처사하겠지만 그래도 이 엄마는 시름을 놓을 수 없단다”하고 염려하며 여러 모로 문영이한테 탐문하는 순자였다. 알리지 않으면 불효 같았고 알리면 어머니한테 부담을 끼치는 것 같아 문영이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문영이가 이렇게 모순속에서 모대기고 있을 때 한 단위에서 근무하는 창범이가 일보러 연길로 갔다가 “문영이가 임신이고 벌써 몇 개월째 잡고 있다”고 순자한테 전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순자는 그 말을 들은 이튿날로 돈화로 올라왔다. 문영이를 만나자 순자는 제법 크게 성을 냈다. “내가 널 낳지 않았다고 네가 그러는 게 아니다. 이런 일을 알리지 않은 것도 역시 불효란다. 그리고 딸자식이 결혼하여 자식을 낳는 것을 보는 것도 부모로서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단다.” 문영이는 한동안 대답거리를 찾지 못했다. 그저 쿨적거리며 울뿐이었다. 그러자 순자는 다시 문영이를 끌어 안으며 위안했다. “문영아, 네 맘을 몰라서가 아니다. 네가 나한테 부담을 준다고 그러겠지. 하지만 이제 너도 자식을 낳아 키워보면 알겠지만 부모란 자식이 결혼해도 여전히 어린애처럼 여겨지기 마련이고 늘 걱정하기 마련이란다.” “알겠어요. 어머니, 다신 안그 럴게요.” 순자는 문영이를 이끌고 임신부와 태아의 건강상태를 병원검진을 통해 확실하게 알아 보고서야 시름을 놓으며 연길로 돌아갔다. 이듬해 1월말 문영이의 출산날자가 다가오자 순자는 갓난아기의 기저귀, 아기이불, 아기옷과 닭, 토마트 같은 영양식품 그리고 문영의 옷들을 사들고 재차 돈화행을 하였다. 그 당시에도 순자네 가정생활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여의치 않아 순자는 서시장매대에 친구가 있는 셋째딸 영애의 담보로 이러한 물건들을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출산을 앞둔 문영이는 몸이 몹시 부어 있었다. 그리고 남편외 옆에서 크게 돌봐주는 이도 없었다. 그것 역시 순자로서는 무척 가슴아픈 일이었다. 문영이가 가슴이 저려 나도록 불쌍했다. “문영아, 몸이 무거울수록 가벼운 운동을 하여야 몸을 풀 때 힘들지 않고 순리롭단다.” 순자는 매일 아침마다 문영이를 데리고 보행운동을 하기 시작했다. 한편 살다보면 별의별 희한한 일을 다 겪어보게 된다. 순자가 바로 그랬다. 어느 하루였다. 그날도 순자가 문영이와 함께 돈화역 부근에서 산보삼아 가벼운 운동을 하고 있는데 짠지와 김치를 팔던 몇몇 조선족 아낙네들이 순자네 “모녀”를 보고 중얼대는 것이 순자의 귀에 들려왔다. “저 로친네가 딸이 쉽게 해산하라고 저렇게 매일 걷게 한다우다.” “글쎄, 딸이라지만 좀 이상한 것 아니우? 딸은 한족이고 저 할머니는 조선말을 하는데 혹시 저 할머니가 한족 영감한테 재가해 사는 거나 아이우?” “그러게 말이웨다. 그래서 나도 별로 이상스럽다 여겼다니까.” 그 아낙네들의 수군대는 소리에 순자는 너무 어이가 없었다. 순자는 못들은걸로 그냥 지나치려다가 다리쉼도 할겸 그 아낙네들한테 돌아서며 한마디 했다. “왜, 저 애가 한족이니 내가 한족영감을 해서 함께 살림을 하는 것 같수?” “글쎄 그럼 그게 아니란 말입니까?” “저 애가 한족이고 내 딸인건 맞지만 내가 한족영감한테 재가한건 아니우다. 몇년전 저 애가 연변위생학교에 다닐 때부터 내가 양딸로 삼았던 애 올시다.” 그러면서 순자는 그들한테 문영이가 자라온 이왕지사와 자기의 양딸로 된 자초지종 등을 알려주었다. 그러자 장사군아낙네들은 “그랬구나”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한편 한족양딸의 출산을 돕기 위해 연길에서 돈화로 찾아온 순자의 소행에 못내 감탄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문영이한테는 또 “너 정말 복이 있는 아이니 앞으로 이 조선족 어머니한테 잘해주라”고 부탁하는 것도 빼놓지 않았다. ↑문영이네 부부와 함께 붕곤이를 안고서 며칠 후 문영이는 돈화시 부유보건원에서 출산했다. 순산으로 아들을 낳았다. 너부죽한 얼굴에 아주 건실한 아들애었다. 문영이가 출산했다고 하자 그 이튿날로 순자의 남편 용환 영감도 너무도 기뻐 어쩔바를 몰라하며 한달음에 돈화로 찾아왔다. 장인어른이 오자 문영의 남편은 이 때라 하고 아기의 이름을 지어달라고 했다. “아니, 자네 교원사업을 한다는 사람이 애 이름을 지을줄 몰라서 나한테 지어 달라고 하나?” “아닙니다. 애들의 이름은 한대를 거슬어 올라가 할아버지가 지으면 좋다고 해서요.” “어허, 이 사람아! 그러면 친 할아버지가 지어야지 나 이 외할아버지가 무슨 자격이 있는가?!” “그래도 일자무식인 저의 부친보다도 학식이 높은 장인어른이 지으면 더 멋지게 지을 것이 아닙니까?” 이 말에 용환 영감은 슬며시 흐뭇해하며 아주 흥미가 동해하였다. 하지만 이에 순자가 견결히 반대였다. “영감 무슨 망녕이시우? 멀쩡한 바깥사돈을 두고 왜 령감이 외손군의 이름을 짓는다구 그러우?!” 그렇게 되여 결국 후날 문영이의 시아버지가 아기의 이름을 짓게 되었다. 아기의 이름은 바로 심붕곤(沈鹏坤)으로 지어졌다. 한편 실로 웃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하는 일이 생겼다. 해산한 이튿날 진통이 어느 정도 가셔지고 혼자서 변소출입도 하게 된 문영이가 아기를 누워서 쌔근쌔근 잠들어있는 아기를 보면서 머리를 이리저리 갸우뚱거리더니 불현듯 소리쳤다. “어머니 어머니, 이리 와봐요.” “왜 그러느냐?” “어머니 그리고 아버지 아기를 와봐요. 이 애가 어쩐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뭐라구?! 아기가 나를 닮다니. 소웃다 꾸러기가 터지겠다.” 하지만 아기의 얼굴을 뜯어보니 이마와 눈부위며가 어쩐지 순자를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용환 영감도 아기를 뜯어보더니 “하하하”하며 웃음보를 터뜨렸다. “이게 웬일이요? 아기는 분명 문영가 낳았는데 당신을 닮다니?! 이상한 일이 아니요?” 이에 문영이네 부부와 순자네 내외는 물론 사돈내외까지 이상하다는듯 어안이 벙벙하던 중 불현듯 문영이가 무릎을 탁 치며 탄성을 질렀다. “아, 맞아요. 임산부가 누구를 생각하면 아기는 흔히 그를 닮는다고 했거든요. 제가 임신 때 내내 어머니를 생각했기에 아기가 어머니를 닮은 것 같아요.” 그 말을 들어 보니 이는 아주 그럴듯했다. 이 때 문영의 신랑 심엽군도 맞장구를 치면서 “그리고 임산부가 누구를 미워하면 또 그를 닮을 확률이 크다”면서 한마디 참견했다. 이어 문영의 신랑은 언젠가 돈화의 한집에서 며느리가 임신 중에 벌름코인 시동생을 몹시 미워했는데 후에 아기를 낳고보니 아기가 글쎄 벌름코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시동생은 남자여서 벌름코래도 괜찮았으나 그 아기는 여자애여서 참 꼴불견이었다고 덧붙였다. 이 말에 일동은 재차 폭소를 터뜨렸다. ↑온 가족이 문영의 아들 붕곤이를 놓고 담소하고 있다 다른 한편 문영이가 아들을 낳자 영순이를 비롯한 딸들은 “같은 값에 분홍치마라고 딸을 낳았더면 더 좋았을텐데”하고 좀 서운해하였다. 그러자 순자는 딸들을 호되게 꾸짖었다. “너희들이 뭘 알아서 그러느냐?! 만약 외래 침략자들이 쳐들어 오면 그래도 남자들이 나가서 그걸 막지 치마를 두른 너희들이 막겠느냐? 지금 젊은이들은 진짜 하나를 알고 둘은 모른단 말이다. 그래 집안에 남자가 없어봐라. 집안꼴이 어떻게 되겠느냐? 우리 집도 너희들 아버지가 계셨으니 망정이지 그렇지 않으면 너희들도 오늘같은 날이 없다 없어. 난 문영이가 아들을 낳은 것이 아주 자랑스럽다.” 이는 결코 문영이가 낳은 아들애가 순자 자신을 많이 닮았다고 해서 하는 유치스러운 항변이 아니었다. 순자가 남자를 잘 받들어야 가정과 사회가 안정하고 태평하다는 것도 결코 봉건사상에서 나오는 이론은 아니었다. “남자가 밖에서 잘 벌어들이고 여자가 집안일을 하는 가정은 말썽이 없이 화목하지만 여자가 밖에서 벌고 남자가 집에서 노는 가정은 하루 건너 말썽과 싸움이 생기기 마련이다”, “마누라가 남정을 존경하지 않으면 자식들도 따라서 예의범절이 엉망이 되기 쉬우며 그런 가정은 망나니 가정이다”, “우리 집도 아버지란 든든한 존재가 있으니 이 어미도 시름을 놓고 가정운영과 사회봉사에 뛰어들 수 있었다”는 등 논법은 어디까지나 생활이치에 맞는 언사였지 봉건사상은 절대 아니었다. 그러면서 순자는 항일전쟁시기 여자 유격대장이 출현하고 문화혁명 때 “무쇠처녀”가 등장해 메를 휘두르는 등 모습은 중국여성이 강하다는 것을 설명할뿐이지 결코 정상적인 인륜법칙은 아니라고 했다. 또한 반대로 남자가 해해거리며 상점이나 식당의 접대원을 한다면 그보다 더 이상의 꼴불견은 없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그렇다고 순자한테 남존녀비사상이 농후한 것도 아니었다. 3명의 되는 아들들한테는 여자들이란 남편을 믿고 사는만큼 항상 색시한테 잘해주고 색시들이 잘못한 일이 있더라도 웬간해서는 이해해 주어야 한다고 당부하던 순자였다. 다만 요즘 세월처럼 여자애들을 더 이뻐하고 또 어딘가 모르게 여자애들이 더 우쭐렁거리는 기풍에 어딘가 못마땅해하는 순자였지 여자를 하대해서는 더욱 아니었다. (다음 계속)
-
- 오피니언
- 기획/연재
-
[장편실화]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