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2(월)
 

dspdaily_com_20140325_193746.jpg장편실화

굽이굽이 인생길 하많은 사연들

□ 허길성

(전번기 계속) 연길현 태양향공소합작사는 단층벽돌집인 작은 건물이였다. 그러니 룡정이나연길같은 도회지의 백화점과는 근본 비교도 안되였다. 하지만 나는 그런대로 마음에 들었다. 우선 해볕이 쨍쨍 내리 쬐는 삼복철이나 눈보라가 쌩쌩 몰아치는 엄동철의 야외가 아닌 실내에서 근무하니 좋았고또한 항상 깨끗한 옷을 입고 출퇴근을 하니 어느 정도 신나기도 했다

그리고 로임이 27원이였으니그닥 적은편도 아니였다. 또한 나는 “첫술에 배부를수 없다”는 도리도 잘 알고 있었다.

(이 공소합작사를 발판으로 삼자. 그리고 앞으로 더 훌륭한 직업을 찾아 나의 멋진 꿈을 실현하는것이다. 그리고 오늘은 이내 인생의 새로운 리정비로 되는 날이다.)
 
공소합작사는 웃음도 많고 재미있는 장소였다. 당시 농촌공소합작사는 촌민들이 물건을 사는 장소이기도 했지만 농한기마다 촌민들이 모여서 잡담을 늘여놓는 “구락부”이기도했다. 촌민들은 소금이나 미역같은것을 산 후에도 인차 집으로 돌아가는것이 아니라 한두시간씩 잡담을 하면서“뉘집 며느리가 발이 큰것”과 “뉘집 남정이 밤일을 잘하지 못해 마누라가 바람났댜”는 등 얻어들은 소리를 다 털어놓고서야 자리를 뜨군 했다. 특히 수다를 떠는데는 아낙네들이 더했다. 그네들한테는 우물집 마누라의방구소리마저 모두 “화제거리”였고 어느 남정의 걸음걸이조차 “흥미거리”였다.
 
그네들에 따르면 일터에서 우스개를 하노라면 힘든줄도 시간이 가는줄도 모른다고했다. 그러니 그네들이 일터에서 늘여놓던 수다습관이dspdaily_com_20140325_194551.jpg 공소합작사에까지 와서 그대로 이어지는건 너무나도당연했다. 그리고 어딘가 좀 황당하고 야하기도 했지만 그네들의 입방아는 들어 줄만하기도 했다. 그런대로 재미있었던것이다.

아낙네들은 또 나를 “화제거리”로 삼는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총각은 룡정에서 왔다지? 어느월급쟁이 가정의 아드님이겠구만. 아이유 생긴것도 잘 생겨라. 내가 10살만 여렸어두 이 총각 꽉 잡고 놓아주지 않겠구만.”

“에구에구, 이 펑버짐한 아낙네야. 메주덩어리처럼 생겨갔구 욕심은 꽤 큰가베. 어떻게 임자한테 다 차례지겠다구그래. 이 총각은 우리 집 사위감이야.”

나의 진짜신분을 모르는 아낙네들은 아마 내가 룡정의 어느 높은 간부의아들쯤으로 아는 모양이였다. 그리고 딸을 둔 아낙네들은 롱담속에 어느 정도의 진담도 섞여있는것 같기도했다. 홀로 합작사에 나타났을 때는 아낙네들속에서 걸죽한 롱담을 할 때와는 달리 내앞에서 짐짓 진지한모습이였고 어조 또한 정색했다.

“총각, 혼자 생활하자니 적적하고고생스럽겠구만. 그리고 집이 그립기도 하구 말이요. 그럴때면 허물말고 우리 집에도 자주 다니오. 자식 키워본 부모의 마음이란 다 마찬가지라우.”

“빨래할것이랑 있으면 혼자 씻지 말고 우리 집에 보내오. 우리 집 앞에 개울이 있고 또 길다란 빨래줄까지 있어 씻으면 금방 마른다오.”
……
당시 그네들이 나한테 건네는 말은 대체로 이러한것들이였다.

naver_com_20140325_195047.jpg그리고 태양촌의 처녀들 또한 그 거동들이 이상했다. 크림이나 손수건 또는 손거울 하나를 사도 다른 점원들은 제쳐놓고 수집음을 보이며 꼭 나한테 말을 건네면서 사군했다. 그러고는 항상 눈에 실웃음을 지어보이며 자리를 뜨군 했다. 또한당시 밤에 조양천에서 영화를 돌린다 하면 나는 마을청년들의 무리속에 끼여들어 도보로 영화구경을 다녀오군 했는데 그때에도 나의 주위에는 처녀애들몇몇이 따라다니군 했다. 그애들은 항상 몸에 먹거리를 갖고오면서 나를 보면 곧잘 내놓군 하기도 했다. 나의 동갑내기거나 나보다 조금 어린 처녀애들의 그러한 거동, 당시에는잘 몰랐으나 후에 곰곰히 생각해 보니 어딘가 짐작이 갔다.

한편 그 시기 나는 이성적으로 크게 눈을 뜨지 못한지라 그런 유혹에는별로 끌리지 않았다. 하긴 혼자 객지에서 생활하면서 밥해먹고 빨래까지 하면서 출근하자고 보니 불편하고도귀찮을 때가 많았다. 그리하여 마을에서 허씨성을 가진 두 녀성분과 일부러 친했는데 다름 아닌 허금자, 허정희 녀성이였다. 당시 나는 이 두 녀성분을 이성이 아닌 누님으로생각했고 나보다 나이가 이상인 그분들 역시 같은 허씨인 나를 남동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다보니두 허씨녀성은 집에 맛있는 음식이 있을 때마다 나를 청해 먹이였고 나의 숙소를 찾아와 청소를 해줄뿐만 아니라 자주 나의 빨래까지 씻어주군 하였다.

헌데 그런 나날은 오래가지 못했다. 내가그 일을 계속할수가 없었던것이다. 약 1년뒤 전 연길현적으로종업원정간사업이 시작되면서 미성년인 내가 첫부류로 정간일군대상으로 됐다. 만 18세가 되지 않은데다 기타 학력이나 조건에서도 내가 공소합작사 직원으로서의 조건이 미숙했기 때문이였다.

나는 별로 공소합작사 주임한테 지청구를 들이대지 않았다. 너무나도 쉽게 찾은 직업이라 앞으로도 직업찾기란 식은죽 먹기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내가 떠난다고 하자 많은 사람들이 아쉬워했다. 특히 40-50대의 아낙네들과 몇몇 처녀애들이 그랬다. 아낙네들은 삶은 닭알같은것을 가지고 와서 나를 위로했고 어떤 처녀애들은 수첩이나 손수건같은것을 선물로 주면서앞으로 서로 편지를 주고 받자고 제의하기도 했다.  

너무나도 쉽게 얻은 직업이자 한편 너무나도 짧았던 태양향공소합작사에서의생활, 하지만 그것은 나의 일생에서 아주 즐겁고도 소중한 추억의 한페지로 남아 있게 되였고 나는 오래도록그곳의 사람들, 특히 허씨성을 가진 허금자와 허정희 녀성을 잊을수가 없었다.

룡정으로 돌아온 뒤 나의 생활위치는 다시 원점으로 되였다. 나는 소박했으나 즐거웠던 태양향공소합작사에서의 나날들을 잊을수가 없었다. 나는다시 직업을 찾기로 했다.

그뒤 역시 현로동국마당에서 “앉아버티기” 결과 나한테는 석현제지공장에서나무껍질을 벗기는 일이 차례졌다.

헌데 희망반, 기대반으로 부푸는가슴안고 달려간 직장이였으나 태양향에서의 랑만적인 생활과는 완전히 딴판이였다. 작업장소는 야외였고 한아름씩되는 원목을 굴리며 껍질을 벗기노라니 무척 힘에 부쳤다. 그리고 직원들 또한 모두 말없이 수걱수걱 일만하는 그런 분위기였으며 대부분 한족들이라 말이 잘 통하지도 않았다. 한달이란 날자를 채우고보니 월급은 18원, 그것으로 다음달의 식권을 사고 또 기타 비누, 치약 등으로 사고 나니 남는 돈이 별반 없었다.

나는 크게 실망하고 말았다. 시일이지속됨에 따라 여름철에는 고온에 더위를 만날 지경이였고 겨울에는 추운 나머지 손발이 시리여 견딜수가 없었으며 비가 오나 눈이 내리나 작업은 계속해야했다. 그리고 힘들수록 집생각이 간절했다. 가난했지만 그래도어머니가 끓여주는 된장국이 좋았고 따뜻한 집안의 가마목 온돌이 좋았다. 게다가 이 직업은 앞날이 더욱걱정이였다. 땅을 파먹고 사는 농부보다 나은것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곳에서 계속 막로동을 하다가는 나의 꿈을 실현하기는커녕 변변한 처녀한테 장가도 갈것 같지 못했다.  

결국 석현제지공장에서 나는 1년밖에견지하지 못하고 역시 보따리를 싸게 됐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모든것이 허무했다.팔자 한번 고쳐보려고 부모의 슬하를 떠나 타향살이를 했건만 한번은 정간당하고 또 한번은 스스로naver_com_20140325_195306.jpg 직업을 포기하면서 허궁에 나앉게 되였다. 고중진학마저 팽개치고 사회를 나온 나 자신이 한심했다. 사회로 나오면하늘의 별이라도 딸것 같았지만 세상은 내가 생각했던것처럼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사회는 내가 설자리가없었다. 나는 세상을 너무나도 몰랐던것이였다. 그러자 아버지는또 “싸리나무에 싸리난다고”를 념불외우듯 했다. 이에 나는 반발심이 생겼다. 아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이내 운명에 도전을 걸어보고 싶었다. 그것인즉 때마침 군대모집이 있는지라 군에 입대하여 마지막으로 승부를 겨루는것이였다.

헌데 그것도 그렇게 쉽지 않았다. 내가무장부에 가서 군입대를 신청하자 무장부일군들은 우리 형제중 이미 한명(셋째형)이 군에 갔다는 리유로 허락하지 않았다. 그럼 어떡한단 말인가?! 사정하고 떼질쓰고 “앉아버티기”도 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무장부는 로동국과는 달랐다. “앉아버티기”가 통하지 않았던것이다.

그리고 나중에는 무장부로 찾아가도 누구 하나 나를 거들떠보지 않았고 나 역시 매일같이 하던 말만 곱씹자니나 스스로도 멋적었고 얼굴이 뜨거워났다. 계속 지청구를 들이댈수도 없고 그렇다고 포기할수도 없는 갈림길에서헤매고있던중 때마침 부대에 간 셋째형인 허응산한테서 편지가 왔다. 부대근무기가 만기되여 오래지 않아곧 제대된다는것이였다.

그러자 나는 곧바로 형님한테서 온 편지를 갖고 재차 현무장부로 찾아갔고 이어서 신체검사 및 기타의심사에서 순조롭게 통과되여 군대로 갈수 있게 되였다.

 군대생활의 시작
1

1957년 나의 군대생활은 료녕성 려순에서 시작되였다. 당시 앞가슴에 붉은 꽃을 단 우리 신병들을 태운렬차가 대련역에 들어서자 나는 눈dspdaily_com_20140325_194244.jpg앞의 황홀한 광경에 어안이 벙벙하도록 놀랐다. 도시는 호화건물이 숲을이루듯이 들어서고 량켠에 가로수가 쫙 늘어선 거리는 넓고도 깨끗했다. 그제껏 연변내도 별로 벗어나보지못한 나로서는 대도시의 화려함에 오래동안 매혹됐다.
 
대련에 이른 우리 신병들은 인차 시교에 있는 한 병영에 배치되였고 이튿날부터 3개월에 달한다는 신병훈련에 돌입했다. 신병훈련은 대렬맞추기, 포복전진, 수류탄던지기, 날창찌르기등이였다. 힘들었지만 나는 초충시절에 이런 훈련을 많이 해본지라 인차 적응될수 있었다. 특히 우리 연변에서 간 신병들이 돌출하여 훈련도중 칭찬이 자자했다. 반면에내지의 사천이나 운남 등지에서 온 신병들은 총을 제대로 잡을줄마저 몰라 늘 교관한테 훈계를 당하거나 기타 신병들의 웃음거리로 되군 했다.

우리한테 힘든것은 훈련보다는 한어말구사가 미흡한것이였다. 룡정에서 살면서 한족애들과 잘 어울리지 않았던것이 못내 후회되였다.

언어장애는 내지에서 온 신병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족이였지만 그들은 표준말구사에는 엉망이였다. 외마디말이라도 번질줄아는 우리 조선족 신병들보다도 한참은 뒤떨진 상황이였다. 그리고 군규률을 지키는 면에서도 우리 조선족신병들은모범이였다. 특히 나는 이전에 영화에서 보아왔던 팔로군처럼 아침 일찍 기상하고 그뒤엔 병영의 마당을쓸기도 하고 취사원을 도와 물을 긷고 채소를 다듬고 하면서 자아형상을 높이기에 각별히 신경을 썼다. 그러자반장은 물론 취사병에 이르기까지 나를 좋아하면서 가끔씩 나한테 한어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그러면 나는한마디를 배우면 열번씩 외우면서 한어말배우기에 게을리하지 않았다. 힘든 훈련생활이였지만 나는 저녁시간마다한두시간씩 자습하며 전우들한테서 배운 말을 영원히 잊어버리지 않을 정도로 머리속에서 소화시키군 했다.

신병훈련이 끝나는 날 교관은 신병내의 조선족병사들을 표창했다.

“지난 국내해방전쟁시기 인민해방군중에서 제4야전군의 장병들이 가장 용맹했다. 당시 제4야전군에는 조선족장병들이 많았다. 그들은 소문난 흑산저격전, 천진해방전투와 남창해방전투 및 유명한 해남도 도하작전중에서 그 용맹과 슬기로움을 남김없이 발휘했다. 조선족전사들의 우수성은 이번의 신병훈련에서도 여실히 보여주었다. 모든신병들은 조선족전사들의 자각성과 모범성을 따라배워야 한다.”
……
신병훈련이 끝난 후 부대는 곧바로 이동됐다. 우리는 각각 군용트럭에 올라앉아 어디론가 향했다. 물론 우리는 어디로이동하고 뭘하러 가는지조차 몰랐다. 인솔하는 군관이 우리한테 알려주지 않았거니와 우리 역시 알려고 하지도않았다. 물론 알 권리도 없었다.

약 한시간뒤 우리를 실은 군용트럭은 바다가의 항구에 이르렀다. 바다를 보는 순간 나는 막 탄성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눈뿌리가 모자라도록일망무제한 바다의 수평선 그리고 날아예는 갈매기와 가끔씩 오가는 선박의 쌍고동소리 – 모든것이 그림같았고꿈에도 상상해 보지 못하던 화려한 정경들이였다.

항구에서 부대는 어느 한 중형전함에 올랐다. 전함에 올라보는것 역시 나로서는 처음이였다. 나는 전함의 모든것이신기했다. 전함에 탑재된 함포와 기타 전투장비 그리고 기타의 함내시설들… 하지만 이러한것들을 오래동안둘러볼수 없었다. 인차 집합명령이 떨어졌고 이어 우리는 갑판우에 모인채 노래를 부르며 집단행동에 들어갔다.

미구하여 전함은 머리를 돌리더니 항구를 떠났다.

뒤이어 전함이 몹시 흔들리더니 여기저기서 꽥질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다경험이 적거나 전혀 없는 전사들이 멀미를 하는것이였다. 나 역시속이 메쓱거리는것을 애써 참으려 했지만 나중에는 전함의 란간쪽으로 달려가며 “왝”하며 먹었던것을 바다물에 몽땅 토해버렸다.
 
dspdaily_com_20140325_194013.jpg전함의 항행은 다행히 오래 걸리지 않았다. 얼마후 전함은 약 200메터 가량 상거한 섬을 앞에 두고 닻을 내렸고부대는 여러개의 진영으로 나뉘여 바줄사다리를 타고 전함에서 내려서는 다시 뽀트에 올라 앞에 보이는 섬으로 향했다.
앞에 보이는 외딴섬 그 섬인즉 바로 려순앞바다의 소평도였다.
소평도에 상륙한 부대는 본격적인 땅굴파기작업에 돌입했다. 
 
 2

소평도에서 우리는 약 1년간순 땅굴만 파는것으로 나날을 보냈다.

당시 소평도는 려순앞바다의 전초기지이자 중국 동해의 중요한 바다요충지대였으며한척의 대형항공모함과도 같은 존재였다. 전략적으로 볼 때 만약 적들이 일본이나 한국쪽으로부터 중국본토에대한 상륙을 시도한다고 하면 이 섬을 반드시 공략해야 했고 우리 중국으로 놓고 보면 이 섬을 지켜내는가 못내는가에 따라서 적들의 상륙을 저지하는성공여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였다.
 
부대지휘관의 설명에 따르면 이 섬을 효과적으로 지켜내려면 지면에 있는방어시설도 중요하지만 유사시에 따르는 갱도의 방어시설 역시dspdaily_com_20140325_195700.jpg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것이였다. 부대지휘관은조선전쟁때 인천 앞바다의 월미도의 사례를 들면서 1950년 9월월미도를 지키던 조선인민군 해안포병련대에 갱도시설만 충분했더라면 그렇게는 하루 아침새에 점령당하지 않았을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현재의 소평도 갱도시설은 원자탄의 폭격을 당해도 끄떡없는 그런 견고한 시설로 될것이라고 했다. …

섬에 오른 이튿날부터 부대는 작업조를 구성하고는 3교대별로 작업속도를 다그쳤다. 이 작업을 다그치는걸로 보아 당시국제정세의 복잡성도 어느 정도 알수 있었다. 력사적으로 보면 제2차세계대전후 미국은 일본 오끼나와에 군사기지를 갖고 있었고 조선전쟁 당시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기지가 전쟁에서의 절대적인 공중우세와 해상우세를 차지했었다. 그러니 일본 오끼나와에 있는 미군기지가 중국의 동해쪽을 크게 위협하고 있는 셈이였으며 거기에 미국이 일본을재무장시킬 경우 그 위협은 더욱 컸다. 그리고 남쪽으로는 장개석의 대만이 있고 북쪽에 있는 중국의 우방이던쏘련도 그때로부터 중국과의 관계가 파렬되기 시작했기에 형세가 긴장할수밖에 없었다. 그만큼 우리 중국은전쟁준비를 다그쳐야 했다. 따라서 후근부문에서는 소평도 갱도파기공사에 대한 모든 물자공급을 아끼지 않았다. 폭파약도 넉넉했고 운수도구도 구전했다.

바위돌과 싱갱이질을 하는 힘든 작업이였으므로 몸은 항상 고되였다. 그만큼 후근부문의 부식공급도 잘되였다. 신병훈련을 할 때는 수수밥에채소가 위주였고 육류는 매주 1 – 2차 정도나 맛볼수 있었으나 여기로 온후엔 끼니마다 이밥이였고 돼지고기나닭고기같은 육류가 매일 공급되였으며 어느 정도 질릴 지경이였다.

좀 참기 어려운것은 외딴 섬이라 구경거리가 적고 단조롭고도 적적한 생활환경이랄가. 하지만 다른 장병들한테는 어떠했을지는 모르나 나한테는 그런 환경이 오히려 다행이였다. 시간이 날 때마다 책을 읽고 한어공부도 여유롭게 할수 있었으니 말이다.

한편 단조로운 생활은 나의 인생에 있어서 큰 변화가 일게 했다. 당시 나의 생활은 일하고 잠을 자는것 외에는 주로 책을 읽으며 한문을 배우는것이였는데 일이 아무리 힘들고 피곤해도나는 매일 잠자기전에 한두시간씩 한어문책을 읽는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면서 책을 읽다가 그것을 얼굴에가리우지 않으면 그대로 손에서 땅에 떨어뜨린채 곯아떨어질 때도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렇게 몇달간 지나자 나는 혼자 스스로도 자신이 진보하는것이 뚜렷하게알리는것 같았다. 그때로부터 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해서도 자신심이 생기기 시작했다. 단지 글공부뿐 아니라 다른 뭔가도 결심을 내리고 시작하면 될것 같은 자신심이였다. 그 때문이였을가 나는 아무리 힘든 작업도 힘들고 무섭지를 아니했다. 나는뭐든지 최선을 다했다. 글공부는 물론 일을 할라치면 몸을 내번지고 했다. 또한 전우들의 생명안전을 위해 수차 위험제거를 하기도 하여 3등공 1차 세우기도 했다.

군대에 갔다온 사람들은 알겠지만 군인이람 명령에 복종하는것을 천직으로삼아야 했다. 례하면 부대가 이동해도 어디로 가는가, 왜가는가, 가서는 그 어떤 일에 종사하는가 등등에 대해서는 일절 캐물을수가 없다. 그것은 소평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소평도에서의 땅굴파기작업도 1년남짓이 되여가던 어느날 부대에서는 갑자기 집합명령이 떨어졌다. 교대별로 일하던 군인들도, 잠을 자던 dspdaily_com_20140325_194100.jpg군인들과 취사칸에서 밥을 짓던 군인들도 모두 작으마한 군영마당에 모였다.

“상급의 명령에 의해 우리 부대는 곧 이동한다. 부대는 각 련급을 단위로 움직이며 작업도구들은 몽땅 남겨두고 이불짐과 개인의 생활필수품만 챙겨 가지고 이동한다…”

우리는 역시 섬으로 나올 때처럼 뽀트를 타고는 대기하고 있는 전함에 올라탔으며다시 륙지로 향했다. 이어 부대는 한밤중에 차창도 없는 화물차바곤에 앉아 어디론가 향했다.

이튿날 부대가 도착한 곳은 길림성의 교하역이였다.

교하에 도착한 나는 기타 전우들과 함께 중국인민해방군 제46군 136사단 고사포부대의 전사로 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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