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한성호(韩晟昊) 프로필(简历):
1927년 8월 28일, 중국 길림성 장백현 출생
1948년 7월, 조선을 거쳐 한국에 정착
위만시기 길림사도대학 수업
한국 경희대학 한의과 수업
신동화한의원 원장
미국 캘리포니아 골든주립대학 식품영양학 명예박사
한화중국평화통일추진련합총회 회장
중국주한교민총회 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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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한성호라는 이름을 대면 아마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것이다. 그것은 한성호가 리시진의 “본초강목“ 등 의학저서들을 참고로 현대인들속에서 성행하고있는 자연식료보건료법을 발견하여 저명한 한의로 한국에서 이름을 떨친것도 있지만 중한 수교의 물고를 터치운 전기적인물이기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마가을도 막가는 어느날, 필자는 바로 한국 서울에서 중국주한교민총회 총회장 한성호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장소는 그의 사무실이였다. 그와 반나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85세라는 년세와는 달리 그는 시종 젊음의 왕성한 정력을 자랑했다.
 
60여성상 한국에서의 그의 파란만장한 생활경력을 들으면서 필자는 나서 자란 고향과 조국에 대한 한성호의 깊은 사랑을 역역히 읽을수 있었다.
 
서울 강남의 붉은 집은 그의 중국심
 
서울 최고 부자동네인 강남의 한 거리에 가면 유달리 붉은 칠을 한 3층짜리 건물이 높은 건물빌딩사이에 당당하게 앉아있다. 붉은 칠로 유다른 느낌을 주는 이 붉은집 주인이 바로 재한 화교계의 수령인 한성호다. 집색갈을 두고 크게 두번 화제가 된적이 있었다.
 
한번은 한국친구들이 붉은색이 촌티가 나는데 좀 세련되고 현대맛이 나는 색갈로 바꾸라고 건의했다. 이에 한성호는 “나는 중국사람이요. 중국사람에게서 붉은색은 길한것을 뜻하오. 또 붉은색은 심장을 상징하는데 변함없는 중국에 대한 내 마음이요.“라고 말했다. 그후부터 친구들은 더 말리지 않았다.
 
다른 한번은 중한 수교이후 일부 소위 대만독립을 웨치는 세력들이 집색갈을 떠올리면서 한성호를 비난했다. “이건 〈빨갱이(공산당이나 홍군을 비하하는 말)〉색갈이다. 한성호는 〈빨갱이〉다.“ 이에 한성호는 떳떳하게 반격했다. “그렇다. 이 한성호는 〈빨갱이〉다. 나는 중국공산당을 옹호하는 〈빨갱이〉다.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조국통일을 주장하는 〈빨갱이〉다.“  이 두번의 말썽이 있은 다음부터 한성호더러 층집 색갈을 바꾸라고 하는 사람이 더는 없었으며 한성호의 붉은 중국심은 붉은집과 더불어 한국에 더 널리 알려졌다.
 
불의와 사악에 맞서 싸우다
 
한성호는 언제 어디서나 바른 말을 하고 불의와 사악에 타협을 모르는 초인간적인 투사이다. 때문에 조상을 팔아먹는 불효, 민족을 분렬시키는 불효, 인류에 피해를 주는 불효에 대해서는 한없이 증오하고 무자비하게 배격했다.
 
1948년 7월, 한성호가 한국에 갓 발을 들여놓았을 때 중국 대만“대사관“관할하에 있는 한국 화교사회는 엉망진창이였다. 곳곳마다 기생집, 도박장, 아편관이였고 무리싸움이 끊임없었다.
 
화교자치구역의 문서조장을 맡은지 얼마 안된 한성호는 이런 루추한 꼬락서니를 보고 너무 화가 치밀었다. 이야말로 중국사람의 큰 망신이였다. 한창 혈기왕성한 그는 화교사회의 추악상을 바로잡기로 작심했다. 하여 그는 “화교기풍바로잡기위원회“를 설립하고 자기가 부회장 겸 총간사를 맡았다.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한 화교사회에서는 아편과 도박과 기생을 몰아내는 “대혁명“이 일어났다. 기실 한성호는 아편쟁이나 기생집 업주들과 원쑤진 일은 종래로 없었다. 그는 다만 티없이 맑고 끓어넘치는 정의감 그 하나로 화교사회의 추악한 현상을 바로잡고 이 땅에서 중국사람들더러 사람답게 살도록 해야 한다는 그 주장뿐이였다.
 
대통령 밀사로 중한 수교 물고 터치워
 
1988년 3월 1일, 한성호는 갓 취임한 당시 한국 대통령 노태우의 초청을 받고 청와대 대통령관저로 갔다. 노태우는 자기의 뜻을 밝혔다.
세계에서의 중국의 영향은 날따라 커지고있다. 한국은 비교적 발달한 나라이지만 국내자원이 결핍하기에 장기적으로 발전하자면 반드시 국제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중국은 한창 발전하고있는 거대한 국제시장이다. 경제발전의 각도에서 보면 속히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경제합작을 강화해야 한다.
 
한성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중한 양국이 서로 거래하지 않고 우호적이 아닌 국면은 반드시 개변되여야 합니다.““양국의 우호관계를 맺는 일을 한선생님께서 맡아주시길 바랍니다.“
 
노태우의 뜻에 따라 한성호는 대통령의 밀사로 그해 4월에 산동에 가서 당시 산동성당위 부서기이며 성장이였던 강춘운(그후 중국 국무원 부총리로 발탁)을 만나 중국 중앙정부의 비준을 얻은 상황에서 쌍방이 한국과 산동을 기지로 중한 양국의 경제교류를 시작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988년 6월 16일과 8월 25일, 한성호의 조률하에 40년간 등지고 살아온 중국인과 한국인이 선후로 산동과 서울에서 조심스럽고도 우호적인 태도로 경제교류담판석에 마주앉았다.
 
겉보기엔 한 나라와 한개 성의 교류인듯했으나 실상은 중한 쌍방의 경제무역 교류와 합작이 정식으로 시작되였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것으로 중한 수교의 토대가 닦아졌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한국은 동시에 외교성명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수교를 달성했다. 중한 수교로 한국주재 중국 대만“대사관“은 대표부로 내려앉고 중국대사관으로부터 밀려나갔다.
 
중국 외교관들이 대사관에 입주하는 날, 한폭의 붉디붉은 오성붉은기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주악속에서 서울의 맑고 푸른 하늘로 서서히 솟아올랐다. 그때 한성호의 두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오래동안 갈망해오던 이날이였던가!
 
살아서는 중국인이 되고 죽어서는 중국혼이 되리라
 
1993년 2월 19일, 한국정부는 중한 수교 추진 및 경제무역발전, 한의학연구에 특수한 기여를 한 한성호에게 한국국민훈장을 수여했다. 국민훈장은 한국의 최고영예이다. 한성호는 한국 건국 40여년래 국민훈장을 수여받은 유일한 외국인이였다.
 
한국의 법률에는 한국국민이 국민훈장을 수여받으면 30여종의 대우를 받을수 있지만 외국인으로서 한국국적에 가입하지 않으면 국민훈장을 받은후의 각종 대우는 자연 포기된다고 규정되여있다. 하여 많은 친구들이 그더러 한국국적에 가입하라고 극구 권고했지만 한성호는 한사코 사절했다. 그는 다만 중국인의 존엄과 중한 양국의 우호만을 소중히 여겼을뿐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서는 중국인으로 살고 죽어서는 중국혼이 되리라.“
 
중국은 강대해져야만 한다
 
2005년 10월의 어느날, 한성호는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의 초청을 받았다. 강연할 때 한 대학생이 지금 어떤 나라들에서는 “중국위협론“을 꾸미고있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고 질문했다.
 
“그들이 〈중국위협론〉을 운운하는것은 중국이 아직도 강대하지 못하다는것을 증명할따름입니다. 앞으로 중국이 진정 강대해진 다음에는 그들이 “중국위협“이란 말은 입밖에 내지도 못할것입니다. 때문에 지금은 빈 구호를 웨칠 때가 아니라 각자 모두 자기의 일을 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애국행위입니다.“
 
강연이 끝나자 북경대학에서는 한성호를 MBA연합회 자문고문으로 초빙했다. 백여명의 대학생들이 삽시에 애국화교 한성호를 에워싸고 저마다 싸인을 기다렸다.
 
그날따라 북경의 밤하늘은 유난히도 눈부셨다. 한성호의 웃음 띤 얼굴은 광채로 빛났고 마음은 희망으로 한껏 부풀어올랐다. 이같이 한성호는 60여년 이국생활에서 아무런 가식도 없이 중국인의 기개와 양심을 굳게 지키면서 떳떳이 살아왔다. 오늘도 한성호는 조국의 평화와 부강을 위해, 중한 교류와 합작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있다.
 
/길림신문 홍길남 전춘봉 김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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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재한 노화교의 중국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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