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우리의 정신세계는 기억으로 구성되고 그 기억은 또 다시 망각으로 이어진다.

 

언젠가 자신의 기억이 다른 사람에 의해 조작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당신은 ‘당신’ 자신을 ‘자신’이라고 믿을 수 있을까?


이는 어느 공상과학 공포소설의 설정이 아니라 70년 전 CIA(미 중앙정보부)가 시도한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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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2월 27일 덴마크에서 방영된 ‘자아를 찾아서’라는 다큐멘터리는 CIA가 1950년대부터 ‘의료실험’을 빌미로 덴마크 어린이 311명에게서 ‘MK 울트라’라는 코드네임의 ‘정신통제’ 실험을 체계적으로 파헤쳤다.


공상과학(SF) 영화에 등장했던 ‘정신통제’가 미국인들의 실생활에 쓰이고 있다는 사실에 세계는 충격을 받았다.


“그들이 우리 다리와 팔·가슴에 전선을 거칠게 연결한 뒤 이어폰을 씌워주니 내 귀는 어떤 날카롭고 시끄러운 소음으로 가득 차면서 괴로웠다.


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74세의 폴 위닉은 그때를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위닉은 코펜하겐의 한 고아원에서 자랐다. 1960년 몇몇 낯선 사람들이 고아원을 찾아 11살인 위닉에게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지 않느냐”고 하면서 “고아원 생활이 너무 지루하고 더구나 16크로나를(현재의 160크로나)를 보수로 주겠다”고 했다.

 

이에 위닉과 몇몇 친구들은 즉시 승낙했다. 당시 위닉은 나중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다.


위닉은 이후 동료들과 함께 며칠 동안 강제로 전기의자에 묶여 소음과 비명, 각종 불편한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옆에 있던 ‘의사’는 괴로워하는 아이들은 무시하고 아이들의 반응만 기록했다고 한다.


실험이 끝난 후 위닉은 고아원으로 돌아갔으며 그의 삶도 완전히 바뀌어 기억상실이 잦아지고 특히 소리에 대해 민감했다. 밤이면 자주 가느다란 소리에도 놀라던 그의 증상은 중년이 돼서야 좀 나아지는 듯 했다.


위닉은 그동안 어린 시절의 처우가 자신에게 상처를 줬다는 의심을 갖고 그 실험들에 대해 설명해 달라고 병원에 여러 차례 요구했지만 당시 아무도 그를 상대해 주지 않았다.


2018년 위닉은 70세를 바라보는 나이에 이 실험의 실체를 찾아내기로 결심했다.


이후 몇 년간 수사팀과 함께 ‘실험’에 참여했던 덴마크인 311명을 찾아냈으며 그중에는 당시 고아였던 이도 적지 않았다. 한편 이와 함께 덴마크의 냉전시대 비밀문서가 비밀 해제되면서 그 ‘실험’의 실체가 밝혀졌다.


위닉 등이 참가한 실험은 미국의 MK 울트라(뇌 제어 실험) 프로그램이었다. 미국인들은 이런 인체실험을 통해 정신분열증의 형성과 발달 과정을 알고 싶어 했던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당시 일부 미국 의료기관의 지원을 받기로 했으며 첫해에만 약 30만~40만 크로나를 지원받았다. 이 돈은 오늘날 460만 크로나에 해당된다. 또 CIA가 막후에서 운영하는 한 재단도 이 MK울트라에 많은 자금을 지원할 계획이었다.


덴마크 측이 공개한 실험기록에 따르면 위닉이 들려준 ‘소음자극 실험’외에도 아동마다 폭력적이고 피비린내 나는 성향을 가진 ‘심리 설문지’에 대한 답변을 강요당했다고 한다. 이 설문지는 애초 미군 내부에 나치즘 성향의 병사들이 있는지를 조사할 때 사용됐던 것이다.


결국 위닉은 이 조사해낸 자료를 토대로 2021년 다큐멘터리 ‘자아를 찾아서’를 내놓으면서 이 끔찍한 역사를 직접 이야기했다. 하지만 병원 측이 실험 자료를 대량 폐기한지 오래됐기에 덴마크 어린이들이 얼마나 많은 MK울트라 프로그램의 피해자가 됐는지는 확실치 않았다고 한다.


사실 이번에 드러난 어린이 인체실험은 MK울트라 프로젝트 중 ‘빙산의 일각’일 뿐이다. 이 실험에 대한 실을 뽑으려면 한 학자의 신비로운 죽음부터 이야기해야 한다.


1953년 11월 28일 새벽 2시. 미국 뉴욕의 맨해튼 섬은 환히 밝아 대낮 같았다. 그 가운데 뉴욕에서 가장 호화로운 펜슈호텔 10층에서 한 속옷만 입은 중년 남성이 발코니에서 훌쩍 뛰어오르더니 곧 추락해 숨졌다.


이 남성은 프랭크 올슨이라는 젊은 생물학자로 당시 나이는 43세였다. 경찰은 가정도 행복한 올슨이 왜 갑자기 죽음을 선택했는지 의문을 품고 있었다. 오랜 수사 끝에 단서를 찾지 못한 경찰은 유족들에게 올슨이 숨지기 전 갑자기 정신이 붕괴되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려줬다.


1975년 록펠러 당시 미국 부통령이 이끄는 중앙정보국(CIA)의 행동을 조사하는 위원회는 올슨이 사망 직전 CIA 요원들에 의해 정신적 약물을 투여 받은 사실을 발견했다. 포드 대통령은 CIA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자 그제야 CIA는 가족을 만나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했지만 MK울트라 계획에 대해서는 극력 말을 아꼈다.


이렇게 올슨의 사인은 묻혀졌다. 그러다가 2019년 영국 일간 가디언이 ‘올슨의 죽음’에 대한 심층 기사를 처음으로 실으면서 그의 사망 배후에 대한 비밀이 밝혀졌다.


1944년 미군에서 퇴역한 올슨은 악명 높은 드트릭부르크에 입사해 대기생물 연구를 했다. 그곳은 미군 최대의 생물학무기 개발센터였다. 올슨은 1950년 세균전이 도시에 미치는 영향을 측정하기 위해 ‘바다 비말(Sea droplets)’이란 암호명을 가진 작전에 참여했다.

 

당시 미군이 연일 샌프란시스코 해안가에 병원체 독 안개를 풀어주면서 이 도시에는 폐렴 사례가 크게 늘었고 심각한 요로감염에 걸린 사람은 더 많았다. 그리고 ‘바다 비말’ 작전 이후 올슨은 데트릭부르크의 생물전쟁 전문가로 급부상했다.


그러나 가족들 앞에서 그는 자신의 업무내용을 전혀 밝히지 않고 미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과학자라고만 말했다.

 

올슨은 1953년 초 CIA 산하에 MK 울트라 프로그램에 합류했다. 당시 이 실험의 책임자는 미국 화학자 고틀리브로 CIA의 ‘수석 독사’로 불렸다.


고틀리브와 함께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올슨은 자신이 매우 위험한 실험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고틀리브는 인체에 충분한 용량을 투여하면 그 사람의 생각과 기억을 파괴하고 붕괴시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CIA는 고틀리브의 견해를 받아들여 이 실험이 성공하면 인간사상을 통제하고 간첩을 훈련시킨 뒤 다른 나라의 수사를 막는 것은 물론 고문수단으로도 활용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었다.


CIA의 MK 울트라 실험실에서 올슨은 매일 무고한 사람들이 실험품이 되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서독의 ‘검은 감옥’에서 미국 요원들이 약물과 형구를 능숙하게 다루면서 실험 당하는 사람의 의지를 조금씩 무너뜨리는 것을 보았다.


이런 인간성 훼손 실험은 결국 올슨의 심리적 저지선을 돌파했고 파탄 직전에 몰렸던 그는 물러서기 위해 사표를 제출했다.


하지만 올슨이 몰랐던 것은 자신도 CIA의 감시 대상이라는 점이었다. 이들은 곧 올슨이 “너무 많이 알고 있다”면서 일상으로 돌아갈 자격이 없다고 결정했다.


어느 날 저녁, 고틀리브는 추수감사절 모임을 주선했다. CIA 요원이 신형 환타지제를 올슨의 음료에 부었다. 이어서 닷새 뒤 그 약효가 나타나면서 올슨은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고 아내와 아이도 기억하지 못했다.


올슨의 사정을 알게 된 고틀리브는 요원에게 실험실로 보내 연구를 진행하도록 했다. 결국 올슨은 환각제의 약효를 받아 투신해 자신의 손에 의해 죽게 되었다.


CIA는 MK울트라 프로젝트의 원활한 진행을 위해 소름끼치는 사악한 실험을 많이 수행했다.


스티븐 킨젤 미국 기자는 오랫동안 MK 울트라 프로젝트를 연구해 오면서 수석독사 고틀리브 그리고 CIA가 정신적 통제를 모색한다는 저서를 썼다.


킨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나치가 3대 중심 수용소 중 하나인 다하우 수용소에서 환각제 메스칼린을 실험했으며 전후 CIA는 나치 의사를 데트릭부르크로 초빙해 CIA 관리들에게 사린가스에 대한 지식을 가르치면서 사린가스가 사람을 죽음에 이르게 하는 데 얼마나 걸릴지에 대해 알려 줬다고 폭로했다. 또 CIA는 중국에서 도도한 범죄를 저질렀던 731부대 전범을 데트릭부르크로 불러 함께 연구하기도 했다면서 MK울트라는 본질적으로 일본과 나치 강제 수용소 근무의 연장선상에 있었다고 덧붙였다.


킨젤에 따르면 CIA는 실험 실패로 인한 인명피해를 막기 위해 해외에 비밀구금센터를 설치하고 더 극단적인 실험을 했다.

 

이런 기지들은 대부분 독일, 일본과 필리핀 등 나라에 퍼져 있었으며 현지 CIA 관리들은 적의 공작원이나 용의자를 체포한 뒤 곧바로 비밀 구금센터에 보내 온갖 실험으로 이들을 괴롭히고 심지어 치명적일 정도로 정신을 붕괴시키려고 했던 것이다.


워싱턴포스트(WP)는 CIA가 1954년 한 유닛을 해외에 보내 ‘공산주의 국가’를 대표할 수 있는 개체들을 대상으로 실험에 나섰다고 보도한 바 있다.


그러나 수백만 달러를 들인 MK울트라 프로젝트는 CIA가 의도한 대로 성공하지 못했고 심지어 상당히 실패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 실험 대상자들은 기억을 잃기도 하고 식물인간이 되기도 하였으며 설령 누군가가 자백했다고 하더라도 그 증언의 진실성은 증명할 수도 없었다.


올슨 사태 이후 MK울트라는 하마터면 관련 서류와 실험기록을 훼손할 뻔 했다. 후속 조사에서 일부 CIA 관계자들은 이 계획의 세부 사항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주장했고 처벌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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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뇌·마약 투약… CIA, 수백 명 어린이 실험에 전 세계 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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