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8(목)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2011년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건조대에서 출해, 성공적으로항행 시험 진행했다.


2012년 9월 25일, <요녕 함(辽宁舰)>으로 명명된 중국의 첫 항공모함이 정식으로 해군에 교부, 항공모함이 없는 중국해군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었다.


2017년 12월 17일, 중앙군위의 비준을 거쳐 중국의 첫 국산항공모함이 <중국인민해방군 해군 산동함(山东舰)>으로 명명, 해남성 삼아(三亚)에 있는 모 군항에서 해군에 교부되었으며 자국산 항공모함이 없던 역사에 커다란 종지부를 찍었다.


중국에 있어서 항공모함의 꿈은 아주 오래 전부터 있었다. 1928년부터 항공모함의 건조를 계획하고 있었으니 거의 1세기 전부터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일본 항공모함.jpg

▲일본 항공모함.ⓒ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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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인들이 항공모함의 꿈을 꾼 것은 그닥 늦은 편이 아니었다. 세계 패권을 장악하려면 바다로 진출해야 하고 바다로 진출하려면 강대한 해군과 함정이 있어야 하며 이러자면 반드시 항공모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은 당시 중국도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영국과 스페인이 세계 각 대륙에 진출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강대한 해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하다면 중국이 다른 대륙으로 진출하기는커녕 자주 얻어터지는 것은 바로 강대한 해군이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민국정부는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일찍 1928년 당시 국민당 해군 서장(署长)이었던 진소관(陈绍宽)은 자기의 군사저서에서 처음으로 항공모함을 건조할 계획을 서술하였다. 이는 영국이 세계에서 처음으로 전통식(全通式) 비행갑판이 있는 <헤르메스(Hermes)>호가 건조된 지 근근히 10년밖에 되지 않았다.


그 뒤 진소관은 자기의 <항공모함 건조안>을 국민당 중앙에 건의, 1929년 8월 14일, 국민당 제2기 5중 전회에서 통과된 <군사정리안(整理军事案)>에는 다음과 같이 언급되었다.


“오국(吾国-우리나라라는 뜻)은 해안선이 길고 판도 또한 크지만 현재 해군의 실력은 미약하고…. 향 후 국방계획 중 반드시 실사구시하면서 해군을 발전시켜야 하는바… 국방계획을 완성하지 않으면 안 된다.”


2일 후 상해 강남 조선소에서 건조한 포함 <함녕(咸宁)>호 갑판에는 해군 병사들이 기립자세로 늘어선 가운데 장개석 위원장의 연설이 있었다.

 

“국가의 권리를 되찾기 위하여 우리는 반드시 강대한 해군을 건설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중화민국으로 하여금 세계에서 일류로 가는 해군을 가지게 해야 합니다. 이는 전적으로 여러 사병들한테 달려 있습니다. 예견하건대 우리는 15년 내에 배수량 60만 톤에 달하는 전함을 가진 해군력을 확보하여 세계 일류의 해군을 건설해야 할 것입니다.”

1930년 중화민국 해군부에서는 항공모함, 장가순양함, 잠수정 등을 건조할데 관한 6년 계획서를 제출했다.


그 구체적 계획으로는 다음과 같다.


항공모함 1척, 장갑순양함 2척, 순양함 2척, 대중소형 구축함 28척, 대중소형 잠수정 24척 …


이 외 각종 포함, 소해정(扫雷艇), 잠수모함, 어뢰정, 운수함 등 도합 106척도 포함되어 있었다…


하지만 당시 내전이 끊임없이 발발하고 정부의 재정이 극히 어려운 사정 등으로 이 <신기루>같은 함정건조계획은 근본적으로 실행에 옮길 가능성이 없었다. 국민정부의 해군전략사상 구축 및 구체발전 책략은 자꾸만 미루면서 최종 방안을 결정하지 못하고 있다가 1932년 1월 진소관이 해군부 부장으로 된 후에야 중앙 해군은 비로서 비교적 안정적인 발전시기에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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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국민당 육군 및 해군의 1급 상장이었던 진소관은 중국 전구를 4개의 대전구로 나뉘고 20척의 항공모함을 건조할 계획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1937년 7월 7일, <노구교 사변>의 발발로 중국이 전면 항전단계에 진입하자 진소관은 부득불 잠시 그 계획을 접고 현유의 함정으로 항일전에 투입할 준비를 포치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중국 해군의 항일전은 주로 장강 중하류에 집중되었으며 가장 치열한 전투는 강음(江阴)에서 있었다. 1937년 8월 상순, 일본함대가 강을 따라 서쪽으로 올라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하여 국민정부는 적지 않은 선박을 강에 침몰시켜 강음에 봉쇄선을 구축하였다. 이러자 일본군은 이 봉쇄선을 돌파하기 위하여 항공모함 <호쇼(Hōshō)>호에 있던 비행기를 출격하여 대규모로 되는 폭격을 감행, 봉쇄선에서 방어하던 국민당 해군 제1함대는 거의 모두가 폭격으로 침몰되었다.


그 뒤 일본의 항공모함은 경상적으로 중국의 영해로 출몰하면서 육에서의 행동과 배합하군 했다.


강음해전 중 일본군의 공중우세는 진소관으로 하여금 항공모함의 작용을 더욱 중시하게 했다. 강음해전은 1937년 8월 16일, 강음대전의 개시와 더불어 12월 1일 강음에서의 철퇴(강음 포대 12월 3일 함락)에 이르기까지 도합 108일간 진행되었다. 강음해전은 항일전쟁 중에서의 보기 드문 육해공 3군 입체작전이었으며 항일전쟁기간의 유일한 해군전역이었다.


오랫동안 중국의 해안에서 위풍을 떨치던 함대는 일부는 산동의 연태에서 침몰되었고 주력의 전부는 강음에서 복멸되었다. 이는 중일 갑오전쟁이래의 가장 중대한 손실이었다. 강음 보위전에서 일본군은 도합 4척의 항공모함을 출격하여 당시 중국해군의 거의 모든 주력 전함을 격침시켰고 강음요새를 초토화시켰으며 당시의 중국해군부대로 하여금 거의 재기불능에 가깝게 만들었다.


1943년 11월, 진소관은 해군부를 대표하여 재차 해군건설 계획을 제출, 이 계획 중에서 그는 이미 몇 척의 항공모함에는 더 이상 만족하지 않고 몇 개의 항공모함 군을 제조할 야망으로 차 있었다. 당시 그는 중국 연해를 4개의 해군 역할 구역으로 획분, 제 1 구역은 요녕의 안동(지금의 단동)으로부터 산동반도의 성산도(成山头)에 이르고 제 2 구역은 성산도로부터 장강 하구까지에 이르렀으며 제 3 구역으로부터 광동의 산두(汕头)까지, 제 4 구역은 산두로부터 중국 – 베트남 변경에까지 이르고 있었다.


다음 매 해군 구역마다 1개 지대의 해안방선 함대를 창립, 항공모함 5척씩 4개 해군 구역에 도합 20척의 항공모함을 두기로 하였으며 매 한척의 제조 원가는 18억 원에 달했다. 이 계획서를 보고 당시 장개석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으나 진소관은 “이 돈은 아낄 필요가 없다”고 역점을 찍어 강조하였다.


당시 전시상태에 처한 중국의 상황으로 놓고 볼 때 이 계획은 현실적 가능성이 거의 없는 <탁상공론>이나 다름이 없었다. 진소관 역시 이 점에 대해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먼저 장개석한테 주의력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도 매우 뜻깊다고 인정했다.


1945년 8월, 항일 전쟁이 곧 승리하게 될 무렵이 되자 진소관은 진짜로 행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당시의 군정 부장 진성(陈诚), 전서청(铨叙厅-주관 인사의 청) 청장 전탁륜(钱卓伦) 등을 설복하여 <해군 분담방위 계획(海军分防计划)>을 제정, 이 계획은 몇 년 전의 계획을 수정한 것으로 원래 20척으로 계획했던 항공모함을 12척으로 적게 계획한 것이었다. 이는 더욱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이 방안을 접수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진소관의 해석에 따르면 이 12척의 항공모함 역시 1차적으로 건조하는 것이 아니고 그 기한을 30년으로 하였다. 첫 10년 계획으로 1만 톤짜리와 8000 톤 짜리 항공모함 각각 1척씩 건조, 매 1척의 건조원가는 각각 6280만 달러였다.(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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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장장 1세기에 거친 ‘항공모함의 꿈’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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