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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투사, 양이원영 의원
    [동포투데이] 탈원전 운동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양이원영 의원은 현재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 해양투기 저지 대책위원회 간사를 맡아 이 방면의 대표적인 국회의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양이 의원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를 위해 의정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이다. 양이 의원은 야당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류 저지 대응단을 조직하여 4월 6일 일본을 방문했다. 대응단은 “오염수 방출하면 우리 국민의 먹거리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 우려된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번 방문을 두고 여권에서는 ‘빈손 외교’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양이원영은 “정부가 나서지 않으니 국회가 나선 것”이라고 받아쳤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계획을 발표한 이후 줄곧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사회적으로 ‘정부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를 승인 것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자 한국 정부는 ‘지지도 찬성도 한 적이 없다.’고 변명했다. 한국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찬성한 적은 없으나 침묵해 온 것은 사실이다. ‘침묵은 오염수 방류 공범’이라는 것이 양이 의원의 생각이다. 양이 의원을 비롯한 오염수 방류 저지 대응단은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분노하여 이번에는 머나먼 유럽 영국에 날아갔다. 런던 현지 시간으로 9월 16일(토) 오후 4시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대책총괄위원회 우원식 의원, 송기호 정책기획 본부장은 국제해사기구(IMO) 방문하여 현직 임기택 사무총장과 차기 사무총장으로 내정된 아르세뇨 도민게즈 국장을 1시간 40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대응단은 “미래세대와 해양 생태계를 위해 일본 정부가 허용한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사성 폐수 투기는 런던의정서 법률 체계에 따라 즉시 중단돼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서한을 전달하고 또 다음과 같은 우려 사항을 말했다. 먼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최소 30년에서 앞으로 100년 이상 투기될 가능성이 높아 장기간 해양투기에 의한 누적 영향으로 먹이사슬을 통한 생태계 피해를 우려. 두 번째로 바다에 방사성 오염수를 투기하지 않는다는 대안 즉 육상에 보관하거나 수증기 증발 등 다양한 대안에 대해 검토하지 않고 가장 비용이 들지 않는 방법으로 바다를 오염시키는 결정을 한 것에 대한 우려. 마지막으로 원전사고로 인한 오염수 해양투기는 나쁜 선례가 되어 인류와 미래세대 모두의 자산인 바다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 대응단은 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와 관련해 가장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한국과 일본이 협의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제해사기구가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왜 양이 의원을 비롯한 오염수 해양 방류 대응단이 이렇듯 동분서주하면서 적극 나설까? 만약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왔더라면 야권 의원들이 ‘설자리’는 별로 없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양이 의원을 비롯한 야당 대응단의 동분서주는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전력 1차 오염수 방류 3개월 전쯤 한국 정부는 사회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시찰단을 일본에 보냈다. 5월 21~26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 시찰단은 단장인 유국희 원자력안전원장을 비롯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원전·방사선 전문가 19명,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해양환경 방사능 전문가 1명까지 총 21명으로 구성되었다. 정부 시찰단 인원수는 방대하나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냈는지에 대해서 국민들이 의문을 표할 정도로 말 타고 꽃구경하다 온 것 아니냐는 시선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시찰단 명단조차 밝히지 않고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어물어물 쉬쉬하면서 일본 방문을 진행했으니 국민들의 비판은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도쿄전력은 10월 5일부터 2차 방류를 시작한다는 계획을 지난 9월 28일에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1차 방류 때와 같이 지난 4일 국무조정실을 통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소속 전문가를 후쿠시마 현지로 파견한다.’고 밝혔고 “우리 정부는 지난 1차 방류 때와 마찬가지로, 방류 관련 실시간 데이터와 도쿄전력이 시료 채취 및 분석 후 공개하는 정보 등을 철저히 모니터링한다.”고 말했을 뿐 방류 자체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내지 않고 있다. 한때 윤석열 대통령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두고 “일본에서도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것은 아니다. 지진과 해일이 있어서 피해가 컸지만 원전 자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방사능 유출은 기본적으로 안 됐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는 윤석열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데 비해 한국 정부는 반대는 고사하고 야권과 일부 시민단체의 반대 목소리에 수산물 오염은 괴담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대통령과 여당 대표를 비롯한 관료들이 수산시장을 방문하여 회를 먹는 쇼까지 벌이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윤석열 정부 임기 내에는 정부 차원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하는 입장은 없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윤석열 정부에 오염수 방류 반대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호랑이와 가죽 흥정을 벌이는 것과 같이 황당한 짓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한국 전체가 손을 놓고 강 건너 불구경할 수는 없다. 양이 의원 같은 분들을 비롯해 시민사회가 적극 나서야 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긴밀한 협조와 공조가 매우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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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9
  • [단독 인터뷰] 강창일 전 주일대사 “일본은 하나를 준다고 똑같이 하나를 내주는 나라가 아니야”
    [동포투데이] 얼마 전 G7 정상회담이 마무리되었다. 개최국인 일본의 초대를 받아 한국도 참석했는데, 이를 두고 단절됐던 한일관계가 회복 및 정상화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에 쌓여있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생각하면 한일관계를 마냥 낙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생겨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약 130만 톤의 해양 방류와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을 일본 기업 없이 마련하겠다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 갈수록 도가 지나치는 독도 영유권 문제까지.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한국인이라면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이슈가 산적해 있다. 이러한 해묵은 역사문제부터 최근 있었던 G7을 주제로 일본에 정통한 강창일 전 주일대사(현 동국대 석좌교수, 4선 국회의원과 한일의원연맹 회장 역임)와 일문일답을 진행하며,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한국이 취해야 할 태도와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들어보았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검증, 피해국도 포함되어야 - 일본의 오염수 방류 문제, 어떻게 생각하나 오염수 방류는 환경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다. 그러므로 바다 환경 전문가, 세계보건기구(WHO), 국제해사기구(IMO), 그린피스 등 환경 전문가가 오염수 검증에 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객관성이 담보된다. 그런데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만 검증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시료 채취도 안 되는 시찰단을 보낸다? 결과에 대한 신뢰도 어려울 뿐더러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동남아 등 많은 국가가 피해를 입을 걸로 예상되는 국제적인 문제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일본에서는 지속적으로 오염수가 인체에 해를 줄 수준은 아니라고 하던데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는 확인 또 확인을 거쳐야 한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위험하지 않다는 신뢰 가능한 객관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 문제와 전혀 관계없는 미국, 캐나다에서 검증할 게 아니라 피해국의 전문가가 검증단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 일본은 IAEA 외에 특정 국가에 검증을 허용하지 않는데, 한국의 시찰을 수용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시찰이야 누구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료 채취도 못 하는 시찰은 의미가 없다. 시찰이 아니라 ‘검증'을 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중요한 자료를 절대 내놓지 않아서 객관적인 사실 확인이 불가한 상황이다. - 이번 시찰단 구성, 어떻게 되는지? 정부 기구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누군지 구체적으로 명단 공개도 안 한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지금 제일 문제인 건, 한국 정부가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기정사실화 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방류를 전제로 하고 시찰단 파견을 한 것 같다. 이렇게 되면 결국 한국이 일본 오염수 방류 문제에 있어 들러리 선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 그렇다면 이번 시찰, 신뢰할 만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기대하기 어렵다. 시찰 결과도 분명 큰 이상 없다고 결론지어질 것이 뻔하다. 시료 채취도 안 되는 시찰단이 다녀와서 발표하는 결과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겠나. - IAEA에서도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과정을 검증 중이다. 이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는지? 이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없다고 할 것이다. 일본 정부 발표를 보면 결과는 나온 것 같다. ▶ 강제 징용 배상 문제, 멀티 트랙 접근법 필요 - 강제 동원 피해자에게 ‘제3자변제' 방식으로 배상하기로 했다. 이러한 행보를 어떻게 보나. 잘못된 행보라고 본다. 일본 정부를 동참시켜서, 일본 기업에 사과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들의 명예가 걸린 문제다. 그런데 제3자변제 방식을 통한 배상은 피해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방식이다. 일본 가해 기업이 아닌, 제3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배상하는 방안인데 일본의 자발적 사과를 끌어내긴 커녕 우리 정부가 먼저 나서서 피해자들과 원만한 해결을 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모양새는 말이 안 된다. -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 성급한 결정이♘다. 한일관계 정상화도 좋지만 이런 역사 문제엔 절차와 과정이 중요하지 않나. 피해자 의견과 국민 여론을 수렴해 진행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없♘다. 그러니 여론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 강제 징용 배상 해법에 피해자가 빠져선 안 된다. 해법 마련,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본과 꾸준히, 계속해서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물밑 작업을 지속해 일본 기업이 동참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없던 일로 치부하는 건 매국과 다를 게 없다. - 국익과 역사 문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한국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몇십 년 동안 역사는 역사, 경제는 경제, 안보는 안보 이렇게 각각 멀티 트랙으로 접근했다. 잘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멀티트랙으로 진행되♘어야 했는데 갑자기 모두 일원화시키며 과거 역사를 없애버렸다. 이는 결국 역사를 팔아버린 집단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 한국 국민에겐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잠재된 어떤 정서가 있다. 물론 일본 여행도 잘 가고, 일본 문화도 좋아하지만, 과거사는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경제는 경제대로 역사는 역사대로 멀티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 ▶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 G7 정상회의 - 의장국인 일본의 초청을 받아 G7 정상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한국이 일본의 초청을 받은 배경은 무엇인가. 한국도 G7 정상회의에 4번 참석한 이력이 있다. 그만큼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래서 당연히 초대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만 초대받은 게 아니라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코모로, 쿡 제도 등 엄청 많은 국가가 초대됐더라. 이번 정상회의 주인공은 일본의 기시다 총리와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조연 그 어디쯤이었을 거다. - G7 정상회담에서 후쿠시마산 식재료가 제공됐다고 하던데. 일본에서도 후쿠시마산 농산물은 잘 안 팔린다. 아마 방사능 전부 체크해서 안전한 음식만 갖다 놨을 거다. 술은 증류수라 괜찮다고 하는 술과 안전한 음식 몇 개만 준비한 걸로 알고 있다. 후쿠시마산 물도 안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후쿠시마산 식재료가 정상회의 식탁에 올라 안전하다는 식으로 어필하고 있다. - 원폭 희생자에 대한 참배 일정도 있었다. 한일 정상 참배는 처음이라던데. 이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통령이 가는 건 당연한 건데, 기시다 총리가 간 게 중요하다. 그게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아마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을 배려해서 원폭 희생자 참배 일정을 진행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참배 일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있는 원폭 피해자 14명이 히로시마로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정부에 전달했다. 히로시마 참배 일정 때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정부 쪽에서는 회신도 없고 가타부타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히로시마로 향했던 한국 원폭 피해자들은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피해자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참배를 진행한 거였다면, 한국에서 온 원폭 피해자들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정성을 보여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G7 정상회의 후, 여당에서는 ‘국격을 높였다' 야당에서는 ‘들러리 선 꼴밖에 안 된다'라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국가의 위상을 높인 건 없고, 한미일 회담을 아주 짧게 약식으로 진행했는데 정식으로 길게 진행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 G7 정상회의 참석이 한국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하나. 딱히 변할 건 없어 보인다. 얻은 것과 손해 본 것 모두 없다. 다만 이번 회담을 통해 친미, 친일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 올해 상반기에 나타난 중국무역적자, 친일본 행보와 관련이 있나. 안보 문제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협력 관계를 다져왔다. 그런데 이번 회담과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경제마저도 친미/친일이 된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을 배제함으로써 ‘신냉전체제의 구축이다’와 같은 비판도 있었다. 다행히 이번 정상회의 때 중국에 원한 살 발언은 안 했지만, 국가 이익이 걸린 경제 문제이므로 항상 신중해야 한다. - 이에 대한 주변국의 견해는 어떤가. 주변국의 견해에 앞서 중요한 건 All of nothing이다. 경제적으로 수많은 나라가 엮여 있다는 소리다. 그러므로 앞서 계속 말한 것처럼 경제는 경제대로, 안보는 안보대로, 성격에 따라 트랙을 나눠 멀티로 접근해야 한다. ▶ 독도 문제, 과잉 대응하지 않는 것이 답 -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일본 고유영토’로 지칭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입장이 더욱 강경해지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독도 문제는 해결이 어렵다. 당장 할 수 있는 대처 방법은 독도 문제를 시끄럽게 다루지 않는 것이다. 일본이 원하는 게 바로 ‘분쟁'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이슈화해서 세계에 알림으로써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끌고 나가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한국이 독도를 지키기 위한 영유권 주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나치게 대응하지도, 예민하게 반응하지도 말아야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가 반응하길 원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 자극을 하는데, 독도 문제는 국제 분쟁으로 끌고 가면 안 된다. 독도문제가 이슈화되면 전 세계 사람들은 사실관계 확인을 떠나 ‘독도는 일본 땅인가?’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다. 그러니 독도 문제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 게 좋다. - 독도 영유권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식은 어떠한가. 다행히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 한국의 독도 영유권 강화를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잉 대응을 하지 않는 것. 무시가 답일 수도 있다. ▶ 한일관계, 큰 문제는 없을 것. 다만… - 통큰 양보를 하고도, 일본 측 태도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나. 윤 정부가 일본을 몰라서 그렇다. 일본은 하나를 준다고 똑같이 하나를 주는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배 째라 버텼더니 이것들이 깨갱하는구나' 하면서 더 큰소리를 친다. 그러므로 일본과는 논쟁과 논의를 지속하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반대로 문제를 해결할 명분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 한일 관계 전망에 대해 어떻게 보나.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고, 일본의 입장도 헤아리는 식으로 가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문제만 없으면 된다. 인적 교류는 이미 잘 이뤄지고 있고, 일본과는 기술 등 협력할 여지가 많다. 일본은 강압적으로 하지 않고, 한국도 비굴하게 굴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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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9
  • [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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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9
  • 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한 지역 모임에서 무술을 시연하는 98세 중국 “쿵푸 할머니”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44만 번 이상 조회되고 4,500개 이상의 좋아요가 쏟아지는 등 순식간에 히트를 치고 있다. “쿵푸 할머니”의 팬들은 “98세에도 걸을 수 있을까. 쿵푸가 장수의 관건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심지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 "쿵푸 정신은 늙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주목했다. 본명이 장헥셴(張鶴仙)인 “쿵푸 할머니”는 2017년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고향인 저장(浙江)성 닝하이(寧海)현 장컹(張坑)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퍼지자 조카딸은 “할머니는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키는 약 1.5미터이다. 그의 쿵푸 동작은 유창하고 걸음걸이는 꾸준하다. 할머니의 마을은 쿵푸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할머니는 5살 때 중국 남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무술 스타일인 장복싱의 6대 계승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매일 연습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 원기 왕성하다”고 말했다. “쿵푸는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농부인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막내아들인 펑은 “어머니는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돕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닝하이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닝하이현은 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2012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의 삶은 평범하지만 잘 짜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세 끼의 요리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끔 친구들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후에는 쿵푸 연습을 한다. 장컹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할머니의 집은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등산이 필요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할머니가 정력이 왕성한 원인일 수 있다. 펑은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쿵푸 할머니”는 아버지의 장복싱 스타일을 주말과 휴일에 집에 오는 손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최근 이웃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무술 수업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자원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펑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쿵푸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고 그것이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사람들
    2021-08-16
  • 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스포츠
    2021-07-28

실시간 사람들 기사

  • “언어가 고상하면 품위 달라진다”
    “지식은 속에 있지만 말은 겉으로 드러나기마련이다. 아무리 지식보물고를 안고있어도 그것을 말로 표현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한테 전수하기 어렵고 또한 생동하고도 형상적으로전해주지 못하면 전수받는 사람이 난해하는수밖에 없다. 이것이 바로 세상의 모든 교류에서의 언어예술의중요성이다.” 서방흥– 지난 세기 70년대 초기부터 본세기초까기 연변라지오방송의 전파를 타고 항상 우리한테 친근하게 다가오던중국조선족화술계의 거장이다. TV가 없고 기타문화시설도 극히 락후하던 그 시기 우리는 라지오를 통해 세상만사를 많이 전달받을수 있었고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 그 희노애락도 감지할수 있었다. “연변인민방송국입니다.국내외뉴스입니다…” “담당에 ×××, 서방흥이였습니다.” … 당시 조선족라지오청취자들중 거의 모든 사람들의 귀에익숙한 서방흥이란 아나운서의 이름이였다. 그만큼 방송을 맡은 그의 차수가 잦았는가 하면 많은 대중들을감흥시켰던 그였다. 그럼 금일 이 지면을 통해 저명한 중국조선족화술전문가인서방흥선생의 언어세계에 들어가본다. 프로일군시대 서방흥선생의 프로필을 보면 굉장히 파격적이다. 우선 1970년대초 묵묵히 훈춘현의 한 시골에서 향선전간사로 사업하던중우연히 연변의 로아나운서의 한명이던 박홍섭선생의 눈에 들어 연변인민방송국의 마이크앞에 앉게 됐다. 도시진출이극히 어렵던 그시절, 더군다나 농촌에서 결혼까지 한 선생한테 지구급방송국의 아나운서직이란 큰 파격이아닐수 없었다. 또한 아나운서에 입문한 뒤 얼마뒤 곧바로 아나운서부 주임으로 진급, 이 역시 파격이라 할수 있었다. 이는 단지 그가 아나운서부의 유일한공산당원이라는것만은 아니였다. 남모르게, 또한 가정과 자아리익을뒤로 한채 오직 한 우물만 판 결과가 분명했다. 노력의대가는 커다란 성과로 주렁지기 마련이였다. 그뒤 몇년이 안돼 서방흥선생은 우리 연변은 물론 중국조선족화술계에서두각을 나타내기 시작, 전 성 아나운서콩클에서 련속 4년간최우수상을 획득했는가 하면 길림성 10대 최우수아나운서로 평의됐으며 그가 쓴 화술론문중 30여편이 국가급상도 받아안았다. 뿐만아니라 해외조선인화술계와 널리접촉하면서 그들이 장악한 화술기교를전수받는데도 게을리하지 않았을뿐만아니라 중국조선족화술의 자아풍격을 구축, 그때로부터 중국조선족화술계는새로운 “서방흥시대”가 바야흐로 도래했다. 엘리트 리더시대 지난 세기 80년대에들어 중국조선족화술계는 서방흥이란 존재를 떠나서는 거의 화술을 론할수 없을만큼 그는 조선족화술계의 “패왕자리”를 굳혔다. 하지만 선생은 거기에서 만족하지 않았다. 분명 자신만을 생각한것이아니였다. 언젠가는 자라나는 새일대방송인들한테 자리를 넘겨줘야 할테이고 그러자면 그들에 대한 육성사업도자신을 키울 때만큼의 노력이 필요하다는것을 감안, 길림예술학원 연변분원(지금의 연변대학 예술학원), 연변사범학교, 연변영화상영발행공사 등 조선족화술을 취급하는 학교와 단위와 련계하여 새일대 조선족화술인재를 키우기에 모든 정성을몰부었다. 특히 90년대 말부터 근 10년간 연변대학 조문학부학생과 연변대학 예술학원 방송사회반(본과)학생들의 화술교육을 맡아오면서 교수대강으로부터 화술교재에 이르기까지 자체로 편찬했다. 지금 대학을 졸업한 학생들중 서방흥선생의 많은 제자들이프로 아나운서나 사회자로 활약하고있다. 그중 중앙급 아나운서 4명과주급 아나운서 사회자만 해도 10여명, 현재 연변화술계에서 두각을 나타내고있는 김계월, 서태문과 같은 이름있는 아나운서들을 비롯하여 국내 조선족화술일군들중 거의100%로라 할수 있는 방송원, 사회자들을 육성하기도 했다. 뿐만아니라 “방송원입문”, “현대화술론” 등 저서를 펴낸외 “화술강좌”, “화술교본”등을 편찬함으로써 조선족화술을 지향하는 젊은 세대들한테 새로운 “지름길”을 개척해주고 우리 사회의 표준적인 언어생활보급에 기여했다. 서방흥이 보는 화술세계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면서 서방흥선생의 화술사상에는 새로운관념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즉 화술은 단지 프로들만이 전공하는것이 아니라는것이다. “기실 화술을 전공해서 프로가 되는 사람 몇이 되겠는가. 하지만 사회에 진출해서 언어로 남의 중용을 받을 때가 많다. 현재은행원, 판촉일군, 홍보일군 등을 모집할 때 지식도 중요하지만언어표달을 많이 본다. 즉 화술을 전공해 프로가 되는것도 좋지만 훌륭한 사회일군으로 되는것 역시 중요하다. 또한 남의 중용을 받자면 지식 먼저 언어가 남한테 감화를 주기마련이라는 생각이다.” 그 관념갱신의 첫째 행동으로 최근 10여년간 서방흥선생은 프로화술인보다는 그 육성범위를 대중화하기에 모를 박고 연변대학 조문학부학생들의 화술교육으로부터시작하여 전반 조선족사회의 화술교육에 진력하고있다. 서방흥선생은 어린이들이 “말하는 벙어리”가 되여가는것이 가픔아프다면서 그 교육을 위하여 최근 5년간 300여명의 연길시 조선어문교원들의 말하기와 읽기교육을 개시, 향후 주내 모든 교원들의 화술교육도 반드시 추진해나갈 타산이라 한다. 자라나는 새세대들의 언어교육을 위하여 10년전부터 그 중점을 연길시 10중과 연길시중앙소학교에 두고 많은학생들을 교육주고있으며 현재 그 범위를 연길실공원소학, 연길시건공소학교에까지 넓히고 학생들을 중점적으로 육성, 나아가 이를전반 연길시 학교와 사회에 보급할 타산이다. 교육을 거친 학생들중 꼬마아나운서로 활약하는 학생도 있고교육받은 학생들 모두가 말투의 변화와 읽기의 변화를 가져오고있다. 한편 지난해부터 연길시에 “학예양성원”을 개설, 소학교부터 대학교에 이르기까지에 이르는 조선족학생 및 사회 각 계층인사들을 대상으로 특강을 조직하고있으며 그내용에 들어서는 바탕말 바로잡기, 랑독, 웅변, 강연, 사회자표현 등 여러가지 쟝르가 포함돼있다. 취재를 마칠무렵 서방흥선생은 이렇게 강조했다 “말은 비록 교제의 수단이긴 하지만 지금은 그 질을 높이는것이중요하다. 전자공학이 발전하면서 말이 곧바로 글로 돼나오는 시대가 도래했다. 자기의 생각이나 주장을 거침없이 표준적으로 표달할수 있어야 함은 시대발전의 요구이다. 그러하기에 말은 바로 말하는 사람의 얼굴이자 인격이며 품위라고 한다. 이는내가 근 3달간 한국실무능력시험교육을 주면서 더욱 절실히 느낀 점이다.그분들로 말하면 곧 말의 표현이 그들의 몸값이라고 할수도 있는것이 아닌가?! 우리의사회는 말을 표준적으로 하려 하고 또 잘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존중받는 사회로 돼야 한다. 비록 아직 말의 중요성을 알지 못하고 말의 흠집을 지적하면얼굴이 붉어지며 지어 반감까지 사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그들도 얼굴의 오물을 닦아주는 사람을 고맙게 생각하듯 언젠가는 크게 깨닫게 되는 날이올것이다. 우리 모두 자기로부터 시작해 자기의 매 한마지 말을진정 규범에 맞고 자연스럽고도 친절하게 표현하기에 힘다함으로써 아름다운 우리 말을 빛내여 가야 할것이다. 이렇게될 때 우리의 말은 더욱 품위있게 되여 교제의 수단만이 아닌 전반 민족의 위용을 과시하는데 이바지하게 될것이고 따라서 우리 민족 모두가 인격적으로존중받는 민족으로 될것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 사람들
    2014-08-27
  • 반세기 조선족 역사 렌즈에 담은 산 견증자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 “역사는 사람이 기록하고 세상에 남기기 마련이다. 태항산 조선의용군 항일투쟁사가 고 김학철 선생에 의해 한국사회에 널리 알려졌다면 아직도 숨어있는 중국 조선족역사는 살아있는 우리가 가일층 발굴하여 밝혀내야 한다. 나이가 들수록 이에 대한 더욱 큰 사명감을 갖게 된다. 나와 동령의 세대마저 사라지면 중국 조선족의 부분적 역사는 세월의 흐름과 더불어 영영 자취를 감추게 되니 말이다.” 일전 연길시의 모 다방에서 커피잔을 기울이면서 이같은 얘기로 서두를 뗀 황범송 원로님이다. 장장 반세기 빛바랜 사진으로 중국 조선족 역사를 견증해온 저명한 조선족촬영가 황범송 ㅡ 그는 자신의 촬영인생을 주로 두가지 단계로 나눴다. 첫번째, 촬영업을 배우기 시작해서부터 불철주야로 사업하던 단계이다. 1930년 왕청현 팔과수(八棵树)촌에서 태어나 태를 묻은 황범송은 일찍 우급학교(지금의 소학교)시절에 첨단과학으로 불리우는 사진촬영과 접촉, 이에 대한 취미로 마음이 크게 동하게 됐다. 그래서 13살 되던 해에 촬영기술을 배운답시고 무작정 가출하여 목단강, 할빈 등 도회지를 돌면서 사진관 점원으로 취직하려 했으나 그것이 실패, 12월 엄동속의 유랑걸식 끝에 당시 흑룡강서 타래현의 만몽농업주식회사에서 개척단으로 농사를 하는 아버지한테로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그가 “8.15해방”이 되자 아버지와 함께 간난신고로 장춘을 거쳐 연길에 와서 정착, 후에 민주연군이 왕청현내의 마적을 숙청할 때 정보제공을 하면서 인생도리를 깨우치게 됐고 아버지가 일하는 연길유림상사(무역, 촬영 등을 겸영)의 주인 김몽훈의 눈에 들어 정식 촬영업에 종하하게 됐다. 그러면서 민주연군 종군기자의 신분으로 길동전선인 신개령, 로야령, 륙도하, 신참, 소구자, 강밀봉 등 많은 전투현장을 누비면서 수많은 역사적 장면을 렌즈에 담은 청년 황범송이었다. 그 후로 연길에서 열군속사진관, 복무청사 사진부 등을 경영하다가 1952년 “동북조선인민보(지금의 연변일보 전신)”에 전근되어 전업기자의 생애를 시작하면서 20대의 청년 황범송의 촬영인생에는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 때로부터 50여년간 그는 많은 예술적 가치와 역사적 의의가 있는 사진을 촬영, 선후로 300여차나 백두산을 오르내리면서 나무 한그루, 흘러가는 구름 한조각, 한줄기의 시내물 등을 그냥 지나치지 않고 부동한 각도로 렌즈에 담았고 일찍 연변을 다녀간 팽진, 등소평, 강택민, 이붕, 양상곤, 만리 등 국가급지도자와 시하누크 등 외국수뇌자들을 촬영하여 보귀한 역사적 서류로 되게 했다. 두번째, 황범송 원로가 자기가 찍은 사진과 타인이 찍은 사진을 대량 수집정리하면서 항일투쟁, 해방전쟁 및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있은 중국 조선족의 역사적 기여를 견증한 단계이다. 지난 세기 70연대초 주박물관으로 발령받은 황범송 원로는 1년간 국내의 많은 박물관과 유적지들을 순회하면서 역사적 자료를 찾는 동안 동북의 현대사에 대해 전문적으로 접촉하게 됐다. 그 과정에서 중국혁명에 대한 조선족인민들의 기여를 두눈으로 똑똑히 보아온 그는 이런 중요한 역사적 자료들이 박물관을 벗어나 더욱 폭넓게 알려줘야 함을 절실히 느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일련의 계획을 세우고 중화민국연대 및 일제와 위만주국 시대의 신문과 당시의 기존서류들을 번져가면서 주로 항일전쟁시기 조선인투사들의 활동에 대해 치중하여 수집, 심양과 무순에 있는 동북문헌보관국, 무순탄광 문헌보관국을 통해서는 19세기 말엽, 상투머리를 한 조선인 농민이 땅을 개간하는 모습을 찍은 사진, 항일전쟁시기 안도현 대사하에 주둔한 일본군수비대가 관동군사령부에 전보를 친 전보문 등을 얻어냈고 북경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보중 장군의 부인 왕일지 여사를 연속 3차나 찾아가 장군이 생전에 쓴 70여권의 일기책 중 항일투쟁에서의 조선인 지휘관들의 성명, 직무, 전투성과 등을 밝힌 부분을 몽땅 복제했으며 관련사진 251점도 얻어냈다. 역사자료를 찾아낸 뒤 그것을 정리하는 작업도 간고했다. 그 사례로 1930년 남만에서 조선혁명군 총사령으로 활동하던 양세봉 장군의 사진을 처음 찾아냈을 때 그것은 어느 한 단체사진 중에 있는 양세봉 장군의 얼굴이었는데 머리와 턱 그리고 한쪽 귀가 타인한테 가리워졌거나 선명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는 양세봉 장군의 세상에 남긴 유일한 사진이라 황범송 원로는 그걸 꼭 잘 재현해내리라 작심했다. 그래서 장군을 본 적이 있는 노인들을 통해 그의 모습을 파악하고는 장군의 머리와 귀, 턱 그리고 옷에 이르기까지 타인의 걸로 대체하면서 수십차의 가공 끝에 드디어 양세봉 장군의 원 모습을 재현시키기에 성공, 지금 연변은 물론 한반도 남과 북 모두 역사속의 양세봉 장군을 언급할 때면 황범송 원로가 가공해 제공한 사진을 이용한다고 한다… 황범송 원로님이 반세기에 거쳐 지금까지 직접 촬영했거나 다른 경로를 통해 수집한 사진은 도합 10만여점, 그 중 현재 연변박물관에 3만여점, 주당위 서류실에 2만여점이 소장돼있고 그외 “조선족백년사화”(총 3권)에 31점, “중국조선족발자취총서”(총 7권)에 577점, 대형화책 “연변조선족자치주”에 311점, “중국연변조선족역사화책”에 149점, 중화인민공화국창립 50돐에 내놓은 “당대중국조선족화책”에 23점, “연변50년화책”에 20점 이렇게 널리 수록돼있다. “내가 주보중장군의 부인 등 중국 조선족을 잘 아는 역사인물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많은 역사적 사실과 귀중한 사진들이 영영 자취를 감췄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기력이 있을 때 아직도 볕을 보지 못한 중국 조선족의 역사적 발자취를 발굴하여 세상에 알리고 싶은 마음이다. 이는 나를 포함한 아직도 살이있는 우리 조선족 원로들한테 부여된 일종 사명이기도 하다.” 이런 말을 남기는 황범송 원로님, 그이는 요즘도 아직 채 파헤치지 못한 조선족 역사의 발굴작업으로 스케쥴이 늘 빽빽한 상황이다. 원로님에 따르면 지금 그이는 연변촬영가협회 고문으로 활약하면서 10년전에는 “중국 연변”(합작)이란 책을 한국에서 출판했고 그 얼마 뒤엔 “항일전쟁과 중국조선족”(합작)이란 책을 출간하여 조선족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계속 발굴함과 아울러 이를 세계만방에 알리기 위한 사업에 크게 공헌했다.
    • 사람들
    2014-08-18
  • 가수 송경철씨, 거액의 치료비로 눈물 짓는다
    [동포투데이] 항상 조선족 전통민족복장차림의 듬직한 모습으로 무대에 올라 어깨춤이 절로 나는 구성진 가락으로 흥겹게 노래를 불러주던 가수 송경철씨가 몹쓸 병환에 모대기고있는 안타까운 사연이 전해져 네티즌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지난해 7월말 송경철씨는 신장쇠약증세를 보여 선후로 연변병원, 연변제2병원, 북경신장병연구소 등 의료기관에서 입원치료를 받게 되였다. 그런데 근 반년동안의 치료를 거쳤지만 병세는 도저히 호전되지 않고 점점 가중해지기만했다. 그러다가 최근 진찰결과 놀랍게도 뇨독증이란 청천벽력같은 병진단을 받게 되였다. 날이 갈수록 병세가 악화돼 일어설수조차 없는 상황에서 송경철씨는 지난 5월6일 안해의 부축임을 받으며 휠체어에 앉아 한국성모병원으로 자리를 옮겨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한국병원측 의료진의 치료방안에 따라 송경철씨는 혈액투척수술을 받으며 간신히 위험기를 넘기긴 했지만 최종 신장이식수술을 받아야만이 건강을 회복할수있는 딱한 상황이다. 그러나 치료비용과 수술비용을 다 합하면 인민페로 90만원이란 거금이 필요하다고 한다. 한 보통 가정으로 놓고 보면 90만원이란 돈은 천문학적수자와 다름이 없어 시름이 짙어지고있다. 설상가상으로 송경철씨의 안해 리영희씨마저 신장쇠약질환으로 앓고있는 장기환자이다보니 가정형편이 무척 어렵다. 지난 1년동안 송경철씨 치료비에 들어간 돈이 이미 10여만원에 달하고 치료비로 꾸어댄 10여만원도 이젠 바닥이 났다고 한다. 송경철씨와 가족은 현재 인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불행의 늪에 빠져 절망의 하루하루를 보내고있다. 올해 43세인 송경철씨는1991년도에 연길시조선족예술단에 성악배우로 입단해 성악부 부장, 단장조리 등 직무를 맡아보면서 《사계절찬가》등 대형음악공연과 전국각지 공연, 조선족근로자를 위한 한국위문공연에 여러번 참가해 깊은 인상을 남겼다. 송경철씨는 병환에 몸져눕기전에 그 어느곳에 조선족들을 위한 공연이 있다고 하면 앞장서 달려가 우렁지고 힘찬 목소리로 《보고 싶었소 듣고 싶었소》등 50여수의 민족가요를 부르며 대중들에게 힘과 신심, 희망을 불어넣어주면서 향토애와 향수를 불러일으켜주던 우리 민족의 우수한 가수이다. 연길시조선족예술단 단장 동옥선씨는 《송경철가수는 예술단의 운영과 발전에도 무척 공헌이 많은 둘도 없는 민족예술전업인재이며 누가 어려운 일에 봉착하면 가장 먼저 나서서 도움과 사랑을 주군하던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였다》고 하면서 민족성악예술면에서 인재난에 허덕이는 현실에서 송경철가수의 위독한 병상황에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옥선단장은 《우리 모두 손잡고 힘을 모아 송경철가수를 꼭 병마에서 구해냈으면 좋겠다》고 사회각계에 선처를 호소하였다. 한국병원측 의료진에 따르면 송경철씨는 혈액투척이 끝난후 신장이식수술을 받게 되면 얼마든지 몸이 완쾌해질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민족예술의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하다가 몹쓸 병에 걸려 쓰러진 송경철씨, 많은 사람들의 도움으로 하루빨리 병마를 전승하고 대중들앞에 또다시 나서서 우리 민요가락을 흥겹게 부르는 송경철씨의 밝은 모습을 다시 볼수있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다. 송경철씨 한국 연락처: 010-5596-2825 송경철씨 후원계좌번호: LIYINGJI(송경철씨부인 이영희)
    • 사람들
    2014-05-27
  • [인터뷰] 장애ㆍ비장애우가 함께하는 세상을 만들고저
    [동포투데이 김하나 기자] 일전, 김태련 아이코리아 회장을 만난 건 서울 송파구 충민로 6길 아이코리아 본사, “장애우와 비장애우가 함께 하는 베스트버디스 프로그램이 우리 사회에서 더욱 확산되기를 기대합니다. 장애우들이 우리 사회에서 소외되지 않고 당당한 사회구성원으로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올해 희수(喜壽)를 맞은 김태련 회장, 동그란 뿔테안경에 인자한 자태, 침착하고도 신념에 찬 말투는 나이를 무색하게 했다. 국내 최초로 “발달장애”란 용어를 도입하고 “여성심리학”을 가르친 김 회장은 한국 발달심리학계의 거목이다. 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며 40여년간 교육자로 살았다. 그런 김 회장이 정년퇴임 직후인 2002년, 한국어린이육영회(아이코리아의 전신) 회장을 맡아 운영하기 시작, 장애아동ㆍ평생교육에 대한 이론을 현장에 적용하겠다는 열정 및 “시대와 사회에 맞는 교육을 제공해,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드는 일에 기여할 것”이라는 이념을 가졌다. 김태련 회장은 천성적으로 회장실보다는 강단이 더 익숙한 “교육자”이다. 이화여대 심리학과를 졸업한 1964년, 김 회장은 모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전공은 발달장애심리학. 당시로선 생소한 학문이었다. 그는 국내 최초의 이화여대에 발달장애아동센터를 세우며 연구에 몰두, 이 분야의 선구자가 됐다. 강단 밖 연구활동에도 활발히 참여해 한국자폐학회, 한국발달심리학회, 한국여성심리학회 등에서 회장을 역임했다. 교육자로서 한길만을 걸어온 그에게 경영이 버겁진 않았을까. 그러나 김 회장은 아이코리아의 경영도 교육과 연장선에 있다고 말한다. “제가 진로를 바꿨다고는 생각지 않아요. 학생을 가르치고 여성단체ㆍ학회 등의 모임의 장(長)을 맡은 것도 한 조직을 운영한 거라 보거든요. 또 제가 대학에서 발달심리학 이론을 연구했다면 여긴 적용하는 현장이에요. 그래서 전 기업 경영자이지만 한편으론 계속 교육계에 몸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 회장의 관심사는 기업의(아이코리아의) 운영방향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가 취임할 당시인 2002년 아이코리아는 보육교사 양성 및 재교육 등 비장애인 교육사업을 중점적으로 펼쳤다. 하지만 각종 장애와 질병을 앓는 어린이가 늘자 아예 아이코리아로 사명을 바꾸고 사업을 확장했다. 그 때가 2006년이었다. 그가 특히 관심을 기울이는 일은 “베스트버디스코리아”였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친구가 돼주는 이 프로그램은 김 회장이 주도한 사업이다. 발달장애 자녀를 둔 학부모가 “자녀보다 하루 더 사는 게 소원”이란 말을 듣고 충격을 받은 그는 미국 태프트대학에 장애인 독립 프로그램이 있다는 정보를 알고는 2008년 이 대학을 방문한다. 1년간 이 대학과 교류하며 국제 봉사단체인 “베스트버디스”의 존재를 알게 됐다. 그는 해당단체에 직접 이메일로 협약제안을 했다. 그 뒤 베스트버디스 관계자는 2010년 아이코리아가 운영하는 한국육영학교와 아동발달교육연구원을 돌아보고는 김태련 회장과 파트너십을 맺었다. 발달심리학을 전공한 회장이 이끄는 단체라는 점도 가점 요인이 됐다. 그해 아이코리아는 베스트버디스코리아를 설립, 현재 10개 학교의 150명 청소년이 참여하는 활동작품전시회와 후원음악회를 매년 열고 있다. 김태련 회장은 장애우와 비장애우들이 친구로 만나 함께 했던 소중한 시간과 추억을 담아 완성한 세라믹페인팅과 유리공예 활동사진 등 다수의 작품들로 “2013년 베스트버디스 코리아 활동작품전”을 열어 사회의 호평을 받았다. 올해로 4년째를 맞는 베스트버디스 코리아의 활동은 장애학생과 비장애학생이 1대1 단짝이 돼 다양한 또래문화를 공유하며 우정을 쌓아가는 프로그램으로 현재 경기고를 비롯한 단대부고와 대원외고, 서울국제학교, 서울정애학교, 성남혜은학교, 잠신고, 정신여고, 한국육영학교 등 10개 고등학교에서 활발하게 실시되고 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은 친구로 사귀면서 서로 다름과 아픔을 배웁니다. 의외로 장애인보다 비장애인이 상대로부터 더 많은 걸 배워요. 장애인사업이라 학부모들이 꺼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자녀의 인생관이 바뀌었다며 둘째 자녀도 이 프로그램에 보내겠다는 학부모들이 적지 않거든요.” 김태련 회장과 그가 이끌고 펼치는 베스트버디스 코리아의 활동은 국제적인 긍정을 받고 있다. 지난달에 있은 2013 베스트버디스(본부) 리더십 컨퍼런스에서 베스트버디스 코리아는 전 세계 52개 회원국 중 가장 우수하게 활동한 국가에게 주는 “우수 프로그램 진행상(Best Outstanding Chapter Award)”을 수상, 지난 2011년에 이어 두 번째로 수상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알아본데 따르면 베스트버디스는 미국 J. F. 케네디 대통령의 조카 앤서니 케네디 슈라이버에 의해 1989년에 설립된 국제장애인지원 비영리단체로 현재 세계 52개국에서 이 프로그램을 실시하고 있으며 베스트버디스 코리아는 지난 2010년 (사)아이코리아에 의해 세계 47번째로 설립됐다. 최근 김태련 회장이 주력하는 사업은 “애도심리학” 프로그램이다. 장애인부모의 심리를 상담하고 치유하자는 목적에서 개설됐다. 그는 이 프로그램이 세월호 피해자의 상처를 치유하는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길 바란다고 했다. 인터뷰에서 김태련 회장은 베스트버디스 코리아 활동에 한국교회의 관심과 지지를 요청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3대째 모태신앙이다. 그의 외조부는 강화도 내리교회 설립자인 윤명삼 장로이다. 신심(신앙심)이 각별한 가풍에서 태어났기에 신앙을 “삶의 중심”이라 정의한다. 그는 회사 경영뿐 아니라 인생 전반에 신앙이 미친 영향이 크다고 했다. “어려울 때마다 힘을 얻었던 순간은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였던 것 같아요. 회사 등 여러 일에 의논하고 응답받을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던지요. 하나님이 있었기에 성장할 수 있었고 여러 어려움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는 신앙을 가진 여성 기업인들에게 삶 속에서 신앙을 실천하고 섬기는 리더십을 발휘하라 당부했다. “신앙은 삶 속에서 실천하는 것입니다. 주변인들에게 ‘네가 믿는 하나님을 믿고 싶다’는 사람이 먼저 되길 바랍니다. 이를 위해 먼저 섬기고 나누는 리더십을 갖추십시오. 21세기 리더십의 핵심은 섬김과 봉사입니다. 군림하지 않는 유연함이 시대를 앞서가는 리더를 만든다는 점을 잊지 말길 바랍니다.”김태련 회장 소개1937년 경북 안동 출생 이화여대 심리학 학사 및 석사 성균관대학원 심리학 박사이화여대 심리학과 교수 이화여대 발달장애치료교육센터장 미국 UCLA대 파견교수 한국어린이교육협회, 한국자폐학회, 한국발달심리학회, 한국여성심리학회 등 학회장 역임 아이코리아 회장.
    • 사람들
    2014-05-12
  • 잔디밭의 조선족 3자매 스토리
    [동포투데이] 장어금: 1964년 연길 출생, 키 1.58m, 선수위치 미드필더, 이화련: 1966년 화룡 출생, 키 1.60m, 선수위치 미드필더, 안영실: 1964년 화룡 출생, 키 1.64m, 선수위치 수비. 이 3명의 여성이 바로 지난 세기 80년대 잔디밭에서 축구로 조선족 처녀들의 날랜 모습을 자랑하며 전국 우승을 뽐내던 원 연변 여자축구팀의 주력선수들이며 한시기 중국 여자축구팀에까지 입선됐던 잔디밭 3자매이다. 지금 이 3명의 선수 중 장어금은 가정주부로, 이화련은 상해의 모 외자기업에서, 안영실은 개인사업으로 각각 평범한 일터에서 수수한 삶을 살고 있지만, 역사는 그녀들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1980년대 초에 여자축구붐이 광활한 중국 대지에 휩쓸면서 연변에도 1982년에 여자축구팀이 설립되었다. 당시 연길시 2중에서 공부하던 장어금은 화룡에서 온 이화련, 안영실 등과 함께 연변 여자축구팀에 입선됐다. 당시 연변 여자축구팀은 길림성 축구팀 등 5개의 축구팀과 훈련장 하나를 두고 훈련했는데 늘 남성팀들에 훈련장을 양보하다 보니 언제나 날씨가 가장 더운 오후 2시에 훈련을 했기에 그 조건이 매우 간고했다. 생리가 와도 당시 그녀들은 그 어떤 내색을 내지 않고 다른 선수들과 마찬가지로 훈련을 견지했다. 약 한 달 반의 시일밖에 없기 때문이었다. 결과 40여 일 후에 펼쳐진 전국여자축구경기에서 연변 여자축구팀은 3등을 쟁취했고 이어서 그 이듬해인 1983년에는 서안에서 진행된 중국 전국여자축구경기에서 전국 우승의 영예도 만끽했다. 당시 연변 여자축구팀 선수들한테도 그들의 장기에 걸맞은 “별명”이 있었다. 예하면 장어금은 속도가 빠르고 대인방어에 능하면서 이악스러웠기에 “개고기”란 별명이 있었고 안영실은 공차단이 적중했고 장거리 패스에 능했기에 “장벽”이란 별명을, 이화연은 가동작을 잘하고 헤더 슈팅에 능했기에 “공중 능수”란 별명을 갖게 됐다. 전국 우승 후 장어금, 이화련, 안영실 등은 중국 여자축구팀에 입선하기도 했다. 한시기 연변 여자축구팀의 감독직을 맡은 적이 있던 동경춘 축구원로에 따르면 그 당시 연변 여자축구팀의 약점은 보편적으로 키가 작고 속도가 늦었으며 수비도 약했다. 하지만 팀의 풍격이 하도 이악스러웠기에 어느 팀이나 다 두려워하는 팀으로 전국적으로도 소문이 높았다. 하지만 후기에 들어 팀을 맡고 있던 방정훈 감독이 훈련지도에는 능했으나 선수들에 대한 요구가 높지 못했기에 1983년 전국 우승을 따낸 후인 1984년부터는 팀 성적이 하강 선을 긋기 시작했다. 이렇게 된 데는 선수(특히 농촌 처녀) 들이 너무 일찍 연애하면서 훈련과 경기에서 최선을 다하지 않은 데 있다고 그때의 주력이었던 장어금씨가 피로했다. 연변여자축구팀 선수 대부분이 농촌에서 온 처녀 들었기에 그들은 도시진출이 목적이었으며 일단 그것이 해결되자 최신 유행 옷, 화장품 따위에 신경을 쏟으면서 훈련에 별로 정진하지 않았다. 팀 성적은 그렇게 하강 선을 긋다가 결국 1986년에 이르러 해산되고 말았다. 현재는 연변에 없는 여자축구 하지만 역사는 한시가 휘황했던 연변의 여자축구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 사람들
    2014-05-12
  • 세계여자격투기 챔피언과 중국 조선족 여성
    [동포투데이 리포터 철민] 인간운명에 있어서 선택이란 아주 중요한 것 같다. 어제의 약자가 오늘의 강자 되고 오늘의 거지가 내일의 부자로 될 수 있는 세상, 여기서 물론 노력과 분투가 중요하고 결정적인 것이겠지만 선택 역시 노력과 분투를 토대로 하는 것이라 해야겠다. 심영희 - 태평양 건너 세계의 최강국이며 제일 부유하다는 아메리카란 나라에서 여자이종격투기 세계챔피언이 된 여인이다. 워낙 중국 연변의 일개 수수한 조선족 여인에 불과했던 그녀, 어릴 적 스포츠에 신체적 소질이 있었고 육상같은 종목에 재질을 과시한 적이 있었으나 가령 후날 여자격투기계에 투신하지 않았더라면, 여자의 세계와는 어울리지 않는 치고 차고 깔아뭉개는 혈투에 끈질긴 노력을 경주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오늘의 그 녀가 없었을 것이다. 심영희 – 그녀의 이름은 워낙 이영희었다. 1963년 중국 연길시 철남 동광촌에서 태어난 그녀는 일찍 8살 적부터 체육에 재질이 있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체육운동에서 남다른 싹수를 보이기 시작했다. 당시만도 연변의 스포츠 분야는 그 종목별로 아주 단조로왔던 상황, 영희가 선택한 것은 육상종목이었다. 다리가 길고 동년배들에 비해 5센치메터가량 키가 더 큰 영희로 놓고 볼 때 이는 정확한 선택이라 할 수 있었다. 영희의 아버지는 늘 “육상은 모든 체육의 기초이므로 체육선수라면 반드시 이 관문을 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녀는 아버지의 뜻을 잘 알았고 기량연마에 땀동이 쏟기를 아끼지 않았다. 결과 소학교시절에는 육상경기의 1500미터와 3000미터 달리기에서 늘 우승해 어릴 때부터 저력을 보여줬고 중학교 시절에는 배구, 농구 등 구기종목에서도 두각을 자주 나타냈다. 그녀가 무술에 취미를 느낀 것은 고중을 졸업해서부터였다. 그 때인즉 중국의 영화관과 극장가에서 무술영화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헌데 당시만 해도 연변에서 무술을 배울만한 체육관과 무술지도가 별로 없었던 상황어서 무술계에 입문하고 싶어도 생각뿐이었다. 또한 아버지를 비롯한 가정에서도 “하필이면 여자가 무슨 무술인가”고 하면서 내켜하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그 생각을 접어두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또 몇년간 세월이 훌쩍 지나갔다. 그러던차 1986년 서울아시아게임을 계기로 중한 사이가 급기야 가까와졌다. 그러자 오래동안 품었던 영희의 꿈도 실현될 희망이 보였다. “그렇다. 남조선(한국)으로 가서 무술을 배운다.” 그래서 1988년 무작정 한국행을 한 그녀였다. 새롭고도 커다란 꿈을 갖고 한국땅에 발을 들여 놓은 이영희, 하지만 그녀를 맞은 한국사회는 이전에 그렇게도 동경하던 “무릉도원”이 아니었다. 우선 동포라고 하면서도 동족취급을 하지 않았고 인격과 대우면에서도 차별이 심했다. 우선 그녀가 취직해 일하던 음식점 주인부터가 중국조선족에 대한 태도가 확연히 달랐다. 같은 일을 하는 한국인보다 봉급을 적게 주는가 하면 나중엔 차일피일 미루더니 3개월치까지 체불했다. 그래서 왜 “나의 봉급만을 체불하는가”고 따졌더니 “너 불법체류신세에 뭘 따지느냐”면서 파출소로 가자며 협박하는 것이었다. 그녀의 인내력은 한계에 이르렀다. “그래 가자. 파출소로 가면 무서워하는 줄 아느냐. 너 오늘 사람 잘못 선택했다. 난 여기서 안하고 중국에 가면 그만이지만 너 어떻게 되나 좀 보자.” 영희는 수많은 중국조선족이 한국땅에서 기시받는 것을 막기 위해서도 그 음식점 주인을 엄벌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멱살을 잡자 키가 작은 음식점주인은 영희가 흔드는대로 휘친거렸다. “너 파출소로 갈래 아니면 여기 2층에서 떨어져 볼래?!” 음식점 주인여자는 영희앞에 무릎을 꿇면서 빌었다. “안돼, 오늘 파출소로 간다. 너 이제 사정하긴 이미 늦었어. 너와 나 오늘 판을 깬다. 나 보따리 싸고 강제귀국 당하고, 넌 내 봉급 지불하고 벌금까지 당해야 해.” 좀 지나치긴 했다. 하지만 영희의 거동은 당시 현장에서 목격한 많은 한국인들의 동정을 자아냈다. 그들은 “미스리의 봉급은 자기들이 조해시켜 해결해 주겠다”고 하면서 파출소행만은 극구 만류했다. 그러자 가까스로 참았던 영희의 눈물이 쏟아졌다. “저도 중국에서는 잘 나가는 여자였어요. 제가 왜 한국에 와서 저런 저질적 여자한테서 기시를 받아야 되죠?!…” 후에 영희는 그 음식점이 있는 동의 동장과 주위사람들의 도움으로 체불됐던 봉급도 다 받고는 보다 일당이 많은 건설현장으로 일자리를 옮겨 남자들도 힘들다는 “노가다판”에 뛰어 들었다 … 한국에 체류하는 2년간 그녀는 음식점과 건설현장 등을 전전긍긍하면서 막노동에 투신하는 한편 체육관을 찾아다니며 무술기능을 연마하기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하지만 한국의 무술계 역시 한계가 있었다. 아니 중국조선족인 영희로서는 한국정상급의 무인들과 만날 수가 없었고 혹시 만난다 해도 그들이 그녀를 받아 줄런지도 미지수였다. 그 기간 영희한테는 육체적으로 가장 힘들고 정신적으로도 피곤하고 방방하던 시기였다. 당시 그녀는 하마트면 무술연마를 포기할 번하기도 했다. 1990년 마음속으로부터 일종 실망의 그림자를 지니고 귀국했던 그녀는 인차 결혼했고 그 이듬해엔 아들 김영국이를 낳으면서 일약 가정주부로 됐다. 헌데 인간이란 자기가 희망했던 것을 쉽게 포기할수 없는 법, 때마침 중국의 스포츠 격투기분야에서는 미국 권투계의 타이센이 새별로 떠올랐다. 이는 거의 사그라지던 영희의 가슴속에 새로운 욕망이 불타오르게 했다. 새로운 꿈을 찾아 미국으로 간다? 하지만 미국은 가까이에 있는 한국이 아니었다. 언어도 통하지 않고 또한 멀리에 있는 나라이다. 비자를 받기가 힘들거니와 간다 해도 어떻게 자리를 잡는가 하는 것도 문제였다. 하지만 미국으로 가야겠다고 결심한 이상 그녀는 갖은 경로를 통해 끝내 미국행비자를 손에 쥐고야 말았다. 1999년 그녀가 태평양상공을 날아 넘어 미국으로 향할 때 그녀는 이미 이영희가 아닌 심영희로 탈바꿈한 뒤였다. 그리고 그 때의 그녀의 나이 36세, 여자로서 격투기프로로 되자면 늦어도 한참 늦은 나이였다. 심영희씨는 지꿎은 노력과 강훈련으로 나이가 많은 것을 미봉했다. 합기도외 유술과 킥복싱도 익혔고 하루 잠자는 시간은 3 ∼4기간에 불과했다. 일종 행운이랄까. 당시 그녀가 찾은 체육관은 덴젤 워싱톤, 제니퍼러그 휴이트와 마이클 타이센 등 세계정상급 스타를 탄생시킨 “할리우드 짐”이었다. 그렇듯 유명한 체육관인만큼 개인지도료도 엄청났다. 미국생활초기 미용원에서 아르바이트로 받는 800달러의 절반 이상이 그 비용으로 나갔다. 그 뒤 그녀는 월세 1500달러씩 하던 세집에서 300달러씩 하는 단칸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나이를 미봉하기 위한 그녀의 훈련은 계속됐고 그러는 사이에 수년간 세월이 훌쩍 지나갔으며 그녀는 어느 덧 합기도 5단, 중국무술 5단, 검도 5단 등 무술 종합 15단에 달하는 헤비급 무인으로 발돋음했다. 그 뒤 부시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4차례의 감사장을 받으면서 심영희란 이름은 미국 로스안젤레스의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얼마 안돼 그녀는 로스안젤레스 웰셔 경찰서로부터 평생회원배지을 발급 받았으며 또한 미국사상 처음으로 여자경호원증을 수여받기도 했다. 심영희씨가 미국 이종격투기계에서 소문을 놓기 시작한 것은 2006년 미국 로스안젤레스를 방문한 당시 한국 한나라당의 박근혜 대표의 경호를 맡아해서부터였다. 당시 로스안젤레스의 한인사회에도 한다하는 무술인들이 많았다. 특히 거의 본질적으로 중국 조선족이라면 색안경을 끼고 보거나 기시부터 하는 한인사회에서 심영희씨가 한국의 유명한 정치인의 경호를 맡을 수 있었다는 것은 그녀의 무술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충분히 설명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그만큼 심영희씨는 미국사회의 도처에서 무술시범을 보여 그 실력을 인정받은 중국무술, 합기도와 검도 등에 정통한 조선족 여중호걸이었으며 또한 5톤 짜리 자동차가 배우로 지나가도 끄떡없는 기합도 가진 그런 “철의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한테는 무술시범을 하여 돈을 많이 버는 것이나 어느 한 정치인의 경호를 맡아하는 것이 최종 목적이 아니었다. 그녀의 목표는 여자이종격투기계의 챔피언이 되어 이 분야를 제패하는 것이었다. 드디어 그 날이 왔다. 그 이듬해 4월, 그녀와 맞붙은 상대는 먼저 번 세계여자이종격투기 챔피언으로 등극했던 멕시코의 이사벨 마르테네즈였다. 당시 심영희는 이미 44세가 되는 중년층이었지만 상대는 22살이 되는 프로로는 한창 나이라 할 수 있었으며 특기 또한 발차기로 세계에서 유명했다. 심영희씨는 사전에 마르테네즈의 특기에 대해 깊히 연구했다. 몸이 날래고 특히 발차기를 잘한다는 것, 그 것을 잘 피하고 자기의 특기인 둘러 메여치기를 잘 활용해야 했다. 겨루기가 시작되자 아니나 다를가 눈깜짝할 사이에 상대의 발길이 수시로 날아왔다. 만약 그녀의 발길에 요해 부위만 맞았더라면 나의 챔피언꿈은 수포로 됐을 것이었다… 하지만 심영희는 마르테네즈의 발길을 잘 피했고 수차에 거쳐 상대를 둘러 메치기에 성공했으며 그 뒤엔 마르테네즈가 일어나지 못하도록 팔로 상대의 목부위를 휘감아 머리를 들 수 없도록 만들었다. 심영희의 전술은 과연 효과를 봤다. 이종격투기에 있어서 밑에 깔린 측이 항상 힘을 더 빠져 버리기 마련이었다. 2회전에 거쳐 수차씩이나 심영희한테 깔려 일어나기에 실패한 마르테네즈는 3회전을 앞두고는 아예 기권해 버렸다. 믿기 어려운 기적이 이역만리 아메리카땅에서 일어났다. 중국 조선족여인이 여자이종격투기 세계챔피언이 됐다. 세계가 열광했다. 세계챔피언상과 금띠를 받는 순간 심영희는 울었다. 오, 얼마나 큰 대가로 얻어낸 챔피언 등극이었던가?! 한편 심영희씨한테 챔피언보좌를 빼앗긴 멕시코의 마르테네즈는 목과 어깨부위에 심한 타격을 입은 듯 한쪽 켠에 밀려 의사의 치료를 요청했다. 치명타를 당한 것이 분명했다. 심영희씨는 미국에서 수차의 이종격투기 경기에 참가, 지금까지 43차의 경기에서 무려 41차나 우승을 했다.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심영희씨는 미국대통령으로부터 수차 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지니게 되었던 것이다. 미국에서의 대통령상 인선 및 추천은 대통령상을 수상한 시민들에게 우선권을 준다는 게 심영희씨의 설명이다. 또한 미국에서는 대통령상을 미국 국민만 따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세계 각지, 그 어느 국가의 국민도 미국대통령상을 받을 수 있다는 게 심영희씨의 설명이다. 얼마전 그 심영희씨가 재차 고향행을 했다. 오바마 미국대통령상을 받은 연길 윤세미용성형병원 윤경애 원장한테 대통령상을 전해주러 왔다. 그 상 역시 심영희씨가 미국사회에 추천하여 이뤄진 것이었다. 그렇듯 세계를 놀래운 여인이었지만 필자와 만났을 때 그녀는 아주 차분한 자세였다. “2007년 저한테 당한 마르테네즈가 몇해전 또 재 도전을 해 왔어요. 두번째에도 보기 좋게 제압해 버렸죠. 어렵게 딴 챔피언띠를 다시 그녀한테 돌려줄 순 없잖아요. 이는 단지 저의 영예뿐이 아닌 우리 연변의 영예를 지키는 일이라고 해야겠죠?!” 한편 그녀는 미국 로스안젤레스에서 “유나이티드 유스 파운데이션”이란 도관도 경영, 청소년육성에 성의를 아끼지 않고있다. 그리고 무료시범과 모금활동을 통해 지역사회봉사에도 한몫 크게 기여하고있는걸로 알려지고있다. 심영희씨가 무르익히고있는 또 하나의 꿈이라면 미국 할리우드에 진출하여 자기의 재능을 영화에 재현시키는 것, 현재 할리우드측과도 여러번 접촉이 잦았고 협상도 바야흐로 이뤄지고 있는 상황이다. 심영희 – 중국조선족이 낳은 “철의 여인” 심영희! 이제 그녀가 할리우드로 진출하는 그날이면 심영희는 미국영화계에 발을 들여놓는 첫 중국조선족이 될 것이다.
    • 사람들
    2014-04-30
  • 서예대가 최원택 작품전 창춘서
    지난 15일, 중국 조선족 서예대가 최원택 선생의작품전이 중국 지린성 창춘시 쑹왠호텔에서 개막됐다. “필묵속에 펼쳐진 중국 꿈”을 전시하기 위해 진행된 이번 전람회에는 중국 8•1서예원 동북 분원의 주최로 최원택 서예가의 작품 200여폭이 전시됐다. 작품은 “중국 꿈”과 관련해 해석, 진술 등을 묵향으로전하면서 시대의 목소리와 함께 생활, 예술에 대한 작자의 열정을 보여주고 있었다. 전람회 첫날 지린성 및 창춘시 지도자외 노간부, 창춘시 각 지역 간부, 서예애호가, 시민 등 각계 인사 수백명이 참석했다. 이들은 현시대 서예대가의 작품감상과 함께 새로운 형식으로 “중국 꿈”에대해 이해하게 되었다. “적수천석”작품으로 서예대가 반열에 중국 서예원 1급 서예가인 최원택 선생은 2011년적수천석(滴水穿石)이란 작품으로 국내외 서예계에 이름을 날렸으며당당히 중국내 서예대가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3년에 거쳐 완성된 “적수천석”은 예서(隶书), 해서(楷书), 전서(篆书), 초서(草书), 행서(行书) 글자체외 현재 발전하고 있는 형의서체(象意书体)로 글자를 연결해 조화를 이룬 작품으로 역대 첫 시도이기도 하다. 최원택 서예가는 “예술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 복무해야 한다”고 말한다. 조화사회건설과 함께 서예작품에 여섯 가지 글자체를 모두 넣에 조화를 표달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작품 창작동기였던것이다. “조화서체(书体)”를 통해 그는 “중국내 56개 민족의 단결, 조화사회, 중국 꿈 실현”이라는염원과 “세계 5대 주 평화로운 대가정 실현”이라는 염원을 담았다. 중국과 국제의 유명 서예가들은 이 작품을 6체 합일(六体合一)의창조물이라고 절찬을 아끼지 않는다. 전람회에 전시된 또 하나의 “기적작품”은 바로 2011년기네스 기록에 등재된 “천자문”이다. 이는 세계에서 제일긴 “한자와 조선어 대조서법”작품으로 그 길이는 46미터에 달한다. 당날 많은 참가자들은 “천자문”작품을 책으로 펴낼 것을 희망했으며 몇몇 출판사 역시 출판의향을보이기도 했다. 민족에 대한 긍지 공익사업에도 적극 일찍 1942년 중국 헤이룽장성 미산현에서 태어난 최원택 선생은 어려서부터 서예를 무척 즐겼고특히 모스크바대학 졸업생이었던 큰 아버지에게서 많은 지도를 받았으며 중국 서예대학을 졸업한 뒤부터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한다. 재직 시 애호로 여러 전람회, 서예전에 참가해 인정을 받았지만 서예 황금기에 들어선 것은 퇴직 후였다. 미산시정부에서 사업하다 퇴직한 후 그는 아내와 함께 두 딸이 거주하고 있는 베이징으로 향한다. 수도에서생활하면서 전람회에 참가하던 그는 조선족도 중국내서예계 최고 수준에 오를수 있음을 증명하려고 결심한다. 그후 각종 전람회, 서예원을 다니면서 공력을 닦기 시작, 끈질긴노력으로 북경에 간지 6년 만에 중국내 최정상에 오르게 된다. 현 최원택 서예가는 중국 “국무원 국가(손님)선물특별제공예술가”, 중국 서예원 1급 서예가, 유엔 국제미술가 연합총회 부주석, 세계 명가서예원 부원장 등 묵직한사회직무로 활약하고 있다. 2011년 그는 중국 해협양안 서예가협회로부터 “덕예겸비 서예가”훈장을, 2012년 “당창건 90주년경축중국서예전”에서 금상 등 수두룩한 성과를 거두었으며 그의 수많은 작품은 중국주재 조선대사관과 프랑스대사관등에 수장돼 있다. 현재 중국공익사업 형상대사이기도 한 최원택 서예가는 공익사업에도 적극 참가, 대량의 작품 경매를통해 빈곤학교, 재해지역 등을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요해에 따르면 “최원택 서예전”은 장춘에 이어 오는 5월 중순 연길에서 개최하게 된다. 《길림신문》
    • 사람들
    2014-04-17
  • 영등포구청장 예비후보 박진수… “교육 강구 영등포, 살고 싶은 영등포 만들터”
    [동포투데이 서울]낙후된 영등포를 선진 영등포로 탈바꿈하기 위해 뛰는 독특한 구청장 예비후보가 있다. 6월 지방선거에서 구민의 삶의 질을 지금보다 15단계 끌어올리겠다고 큰소리치는 박진수(48, 새정치민주연합) 씨가 바로 그 사람이다. 지난 26일(수) 오후 1시 여의도 사무실에서 박 예비후보를 만났다. 박 씨는 풍부한 독서력에서 나오는 무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거듭나는 영등포를 창조하겠다고 역설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독창적 교육복지 박 예비후보는 교육전문가이다. 영등포구 여러 초중학교 운영위원장과 영등포교육환경개선학부모포럼 회장을 역임하며 공교육 발전에 기여했다. 성심학원 대표로서 지역사회 교육의 질을 높이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이런 다양한 경험이 독창적 교육복지공약을 탄생시킬 수 있었다. 박 씨는 구청장에 당선되면 연립주택을 임대해 기숙사형 공부방을 만들 것이라고 했다. 이곳을 주거환경이 열악한 중·고생들에게 무료로 제공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한, 공부환경 개선을 통해 이들의 인성을 함양시키고 학력을 신장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사회적 약자들에게 교육희망사다리를 나눠주겠다고 말할 때는 목에 힘이 들어갔다. 박 씨는 “우리 학생들에게 1:1 대학생 멘토를 붙일 것입니다. 멘토는 지방 출신 명문대 재학생들 중에서 엄격히 선발할 것이고요. 이들로부터 월 25만 원 정도만 받으면서 숙식과 함께 다양한 혜택을 제공할 것입니다. 이 멘토들 때문에 젊은 대학생들이 우리 지역으로 몰릴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지역에 생기가 돌고 경제가 활성화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독창적인 교육복지 정책이었다. 양질의 공교육, 저렴한 등록금, 차별화된 특목고와 국제학교 유치 박 예비후보는 우리 사회 저출산 고령화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점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영등포구 인구가 조선족이 증가했음에도 불구하고 41만 명에서 38만 명으로 감소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대책을 교육전문가답게 명확히 밝혔다. 박 씨는 “여의도 소재 기존 학교 중 하나를 리모델링해 국제고로 전환시키겠습니다. 국제고 신입생 모집 시 정원의 30~40% 범위 내에서 영등포구 출신을 우선 선발하겠습니다. 그리고 적당한 부지를 선정해 조선족을 위한 초·중·고 과정의 국제학교를 유치하겠습니다. 우리 구가 입지를 추천하면 그것을 포함해 투자하겠다는 곳이 곧 나타날 것입니다.”라고 희망의 영등포를 설계하면서 떠나는 영등포에서 이사를 오는 영등포로 바꾸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반값 학원, 질 높은 사교육, 경력단절여성 재취업 영등포구는 재정자립도가 서울 25개 자치구 중 5위로 상위권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미지, 대학진학률, CCTV 보급률 등 많은 부문에서 20위로 최하위권에 쳐져 있다고 했다. 영등포구 주민들은 다른 모임 장소에서 ‘영등포’ 출신이라는 말을 사용하기를 꺼린다고도 했다. 그 대신 ‘여의도’나 ‘목동’ 출신이라고 말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박 예비후보는 “영등포구민이 자긍심을 갖도록 만들겠습니다. 목동이 언제부터 목동이었습니까? 영등포구는 목동과 달리 양질의 교육을 저렴한 가격에 공급하는 사교육 특구를 조성하겠습니다. 동 단위로 반값 영어 학원을 만들겠습니다. 주민자치센터나 관공서를 활용하겠습니다. 낮에는 이곳을 경로당으로, 밤에는 학원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경쟁 입찰을 통해 인근에 자리하고 있는 우수 사교육업체에 기회를 제공할 것입니다. 낮에는 어르신복지, 밤에는 교육복지 혜택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교육의 질을 높여 학력을 향상시키기 위해 보조교사를 채용할 것입니다. 이들이 수강생들을 엄격히 관리할 것입니다. 보조교사들은 우리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경력단절 여성들 중에서 재교육을 통해 선발할 것입니다. 또한, 교육의 질을 평가하는 전문가위원회를 구성할 것입니다. 교수학습 전문가들로 이루어진 평가위원들이 매월 이들 반값학원들을 점검하고 심사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양질의 교육을 제공하고 경쟁력을 높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박 씨는 청소년과 어른이 공존하는 어울림 공간을 통해 효의 도시 영등포를 구현하겠다고 했다. 이를 통해 우리 모두가 함께하는 영등포를 만들겠다는 의지를 나타냈다. 영등포구민인 것을 떳떳하게 밝힐 수 있도록 하겠다는 것이었다. 벤처벨리 조성과 면세점 유치로 일자리 창출 여의도와 신길동 뉴타운, 구로구를 연결하는 벤처벨리를 조성하겠다고 했다. 이를 통해 신규 일자리를 확충하겠는 것이었다. 더불어 대림동에 면세점을 유치하겠다고 역설했다. 고학력 유능한 조선족에게 양질의 일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박 예비후보는 “여의도는 국제금융지구로 지정돼 있습니다. 이를 신길동 뉴타운과 구로구로 연결하는 벤처벨리 조성에 잘 활용할 수 있습니다. 서울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은 28만 5천여 명입니다. 그중에서 영등포구에 4만 5천여 명, 구로구에 3만 3천여 명이 살고 있습니다. 대림2동은 원주민보다 조선족 비율이 더 높습니다. 60~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곳에 중국인 대상 면세점용 빌딩을 건축해 분양하겠습니다. 그러면 조선족 고급인력들이 양질의 일터에서 안정적으로 근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범죄의 온상인 조선족 마작 노름은 발본색원할 것 박 예비후보는 “조선족들이 영등포구에서 안정적으로 정착하는 데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마작을 일삼는 일당은 반드시 잡아들일 것입니다.”라고 강조하며 “경찰서장의 의지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꼭 뿌리를 뽑을 것입니다.”라고 단호한 결의를 밝혔다. 그러면서 박 예비후보는 한 가지 위트 있는 아이디어를 내놨다. “판문점에 외국인 전용 카지노를 설치하면 남북평화를 유지하는 데 보탬이 될 것입니다. 대림동에서 마작을 일삼는 조선족들도 거기에 가서 하면 됩니다.”<한국인권신문>
    • 사람들
    2014-03-27
  • 장백현 진미림 조선족노래와 춤으로 전국 들썽
    장백조선족자치현 제일실험소학교의 진미림(한족)어린이는 일전에 있은 중앙텔레비죤 "비상 6+1"무대에 올라 전국 관중들과 대면, 민족특색이 짙은 조선족민요 "도라지"선률에 맞추어 조선족무용 "북춤"을 곱게 춤과 동시에 또 아버지 진효빈과 함께 조선족노래 "아버지의 축복"을 멋지게 불러 평심위원회와 관중들의 호평을 받았다. 평심위원이며 저명한 군인가수인 류화강는 진미림의 조선족노래와 무용표현을 보고 격동된 나머지 이렇게 평가했다. "다년간 나의 노래는 줄곧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하지만 오늘 진미림과 그의 아버지의 노래는 나를 크게 감동시켰다. 진미림은 이처럼 어린나이에 조선족노래를 잘 불렀을 뿐만아니라 춤도 아주 잘 췄다. 실로 장하다. 나라에서는 문화예술인재에 대해 아주 중시하고있다. 더욱 많은 문화예술인재를 양성하는것이 나의 직책이다. 나는 해방군예술학원과 공군정치문공단을 대표해 진미림을 나의 학생으로 받아드리련다." 무대에서 진미림어린이는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저명한 사회자 주신의 현지 취재를 받았으며 또 평심위원회의 요청으로 사회자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남겼다. 알아본데 따르면 진미림은 얼마전에 있었던 길림성의 가무표현 총결승전에서 우승을 쟁취한후 중앙텔레비죤《비상 6+1》연출단의 면답시험과 심사 및 선발을 거쳐 마침내 중앙텔레비죤《비상 6+1》무대에 오르게 된것이다(인민넷).
    • 사람들
    2014-02-24
  • "연변 좋은사람" 화룡시 동성진 광동촌 김순철
    연변인터넷방송에 따르면 연변에는 촌민들의 치부와 고향의 번영발전을 위해 열정을 불태우고 있는 한 촌서기가 있다. 그가 바로 지난해 <연변 좋은 사람>으로 선정된 화룡시 동성진 광동촌 당지부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인 김순철이다. 1988년 광동촌의 장애인, 특수빈곤호들로 구성된 생산복리원을 경영하면서 뛰여난 관리능력을 보여준 김순철은 2004년 촌 당지부서기 겸 촌민위원회 주임으로 당선됐다. 당시 김순철은 촌 환경정돈부터 착수해 촌민들의 신임을 차곡차곡 쌓아나갔다. 2008년 김순철의 제안으로 광동촌에서는 유기쌀 전문합작사를 설립했는데 1년후 전문농장으로 승격하면서 현재 연간 생산량이 천여톤에 달해 이 촌의 기둥산업으로 됐다. 이 촌에서는 관광업도 적극 발전시켰는데 지난해만 연인수로 7만명에 달하는 관광객들이 이 촌을 찾았다. 관광수입까지 더해 지난해 이 촌 농민 일인당 순수입은 만 위안에 달했다. 이 마을의 김남수 농민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김순철 주임이 주택과 도로건설, 녹화조성과 빈곤퇴치 등 촌민들을 위해 실제적인 일을 많이 하면서 숱한 고생을 했다. 김서기가 한 일에 대해서 모든 촌민들이 인정한다."고 말했다. 작년부터 김순철 주임은 또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일반 유기쌀보다 더 많은 부가가치를 창출할수 있는 새 품종 무공해쌀 개발에 진력하고 있다. 김순철 주임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본에서 기술을 가져와 실험을 했다. 지난해 4헥타르 재배했는데 없어서 못 팔았다. 잔류농약이 없다는 인증을 관련부문으로부터 받았고 킬로당 30 위안에서 40 위안씩 팔수 있다. 앞으로 40에서 50헥타르 정도 재배할 예정인데 이렇게 된다면 일인당 수입을 2만 위안까지 올릴수 있을 것 같다."고 소개했다. 비록 몸은 불편하지만 항상 불타는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촌민들을 위해 일 해온 사나이, 광동촌을 일류의 새농촌으로 건설하기 위한 길에서 그의 도전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 사람들
    2014-0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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