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사람들
Home >  사람들

실시간뉴스
  •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투사, 양이원영 의원
    [동포투데이] 탈원전 운동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양이원영 의원은 현재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 해양투기 저지 대책위원회 간사를 맡아 이 방면의 대표적인 국회의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양이 의원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를 위해 의정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이다. 양이 의원은 야당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류 저지 대응단을 조직하여 4월 6일 일본을 방문했다. 대응단은 “오염수 방출하면 우리 국민의 먹거리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 우려된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번 방문을 두고 여권에서는 ‘빈손 외교’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양이원영은 “정부가 나서지 않으니 국회가 나선 것”이라고 받아쳤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계획을 발표한 이후 줄곧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사회적으로 ‘정부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를 승인 것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자 한국 정부는 ‘지지도 찬성도 한 적이 없다.’고 변명했다. 한국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찬성한 적은 없으나 침묵해 온 것은 사실이다. ‘침묵은 오염수 방류 공범’이라는 것이 양이 의원의 생각이다. 양이 의원을 비롯한 오염수 방류 저지 대응단은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분노하여 이번에는 머나먼 유럽 영국에 날아갔다. 런던 현지 시간으로 9월 16일(토) 오후 4시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대책총괄위원회 우원식 의원, 송기호 정책기획 본부장은 국제해사기구(IMO) 방문하여 현직 임기택 사무총장과 차기 사무총장으로 내정된 아르세뇨 도민게즈 국장을 1시간 40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대응단은 “미래세대와 해양 생태계를 위해 일본 정부가 허용한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사성 폐수 투기는 런던의정서 법률 체계에 따라 즉시 중단돼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서한을 전달하고 또 다음과 같은 우려 사항을 말했다. 먼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최소 30년에서 앞으로 100년 이상 투기될 가능성이 높아 장기간 해양투기에 의한 누적 영향으로 먹이사슬을 통한 생태계 피해를 우려. 두 번째로 바다에 방사성 오염수를 투기하지 않는다는 대안 즉 육상에 보관하거나 수증기 증발 등 다양한 대안에 대해 검토하지 않고 가장 비용이 들지 않는 방법으로 바다를 오염시키는 결정을 한 것에 대한 우려. 마지막으로 원전사고로 인한 오염수 해양투기는 나쁜 선례가 되어 인류와 미래세대 모두의 자산인 바다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 대응단은 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와 관련해 가장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한국과 일본이 협의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제해사기구가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왜 양이 의원을 비롯한 오염수 해양 방류 대응단이 이렇듯 동분서주하면서 적극 나설까? 만약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왔더라면 야권 의원들이 ‘설자리’는 별로 없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양이 의원을 비롯한 야당 대응단의 동분서주는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전력 1차 오염수 방류 3개월 전쯤 한국 정부는 사회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시찰단을 일본에 보냈다. 5월 21~26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 시찰단은 단장인 유국희 원자력안전원장을 비롯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원전·방사선 전문가 19명,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해양환경 방사능 전문가 1명까지 총 21명으로 구성되었다. 정부 시찰단 인원수는 방대하나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냈는지에 대해서 국민들이 의문을 표할 정도로 말 타고 꽃구경하다 온 것 아니냐는 시선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시찰단 명단조차 밝히지 않고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어물어물 쉬쉬하면서 일본 방문을 진행했으니 국민들의 비판은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도쿄전력은 10월 5일부터 2차 방류를 시작한다는 계획을 지난 9월 28일에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1차 방류 때와 같이 지난 4일 국무조정실을 통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소속 전문가를 후쿠시마 현지로 파견한다.’고 밝혔고 “우리 정부는 지난 1차 방류 때와 마찬가지로, 방류 관련 실시간 데이터와 도쿄전력이 시료 채취 및 분석 후 공개하는 정보 등을 철저히 모니터링한다.”고 말했을 뿐 방류 자체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내지 않고 있다. 한때 윤석열 대통령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두고 “일본에서도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것은 아니다. 지진과 해일이 있어서 피해가 컸지만 원전 자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방사능 유출은 기본적으로 안 됐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는 윤석열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데 비해 한국 정부는 반대는 고사하고 야권과 일부 시민단체의 반대 목소리에 수산물 오염은 괴담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대통령과 여당 대표를 비롯한 관료들이 수산시장을 방문하여 회를 먹는 쇼까지 벌이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윤석열 정부 임기 내에는 정부 차원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하는 입장은 없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윤석열 정부에 오염수 방류 반대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호랑이와 가죽 흥정을 벌이는 것과 같이 황당한 짓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한국 전체가 손을 놓고 강 건너 불구경할 수는 없다. 양이 의원 같은 분들을 비롯해 시민사회가 적극 나서야 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긴밀한 협조와 공조가 매우 필요하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아시아
    2023-10-29
  • [단독 인터뷰] 강창일 전 주일대사 “일본은 하나를 준다고 똑같이 하나를 내주는 나라가 아니야”
    [동포투데이] 얼마 전 G7 정상회담이 마무리되었다. 개최국인 일본의 초대를 받아 한국도 참석했는데, 이를 두고 단절됐던 한일관계가 회복 및 정상화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에 쌓여있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생각하면 한일관계를 마냥 낙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생겨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약 130만 톤의 해양 방류와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을 일본 기업 없이 마련하겠다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 갈수록 도가 지나치는 독도 영유권 문제까지.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한국인이라면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이슈가 산적해 있다. 이러한 해묵은 역사문제부터 최근 있었던 G7을 주제로 일본에 정통한 강창일 전 주일대사(현 동국대 석좌교수, 4선 국회의원과 한일의원연맹 회장 역임)와 일문일답을 진행하며,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한국이 취해야 할 태도와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들어보았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검증, 피해국도 포함되어야 - 일본의 오염수 방류 문제, 어떻게 생각하나 오염수 방류는 환경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다. 그러므로 바다 환경 전문가, 세계보건기구(WHO), 국제해사기구(IMO), 그린피스 등 환경 전문가가 오염수 검증에 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객관성이 담보된다. 그런데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만 검증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시료 채취도 안 되는 시찰단을 보낸다? 결과에 대한 신뢰도 어려울 뿐더러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동남아 등 많은 국가가 피해를 입을 걸로 예상되는 국제적인 문제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일본에서는 지속적으로 오염수가 인체에 해를 줄 수준은 아니라고 하던데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는 확인 또 확인을 거쳐야 한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위험하지 않다는 신뢰 가능한 객관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 문제와 전혀 관계없는 미국, 캐나다에서 검증할 게 아니라 피해국의 전문가가 검증단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 일본은 IAEA 외에 특정 국가에 검증을 허용하지 않는데, 한국의 시찰을 수용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시찰이야 누구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료 채취도 못 하는 시찰은 의미가 없다. 시찰이 아니라 ‘검증'을 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중요한 자료를 절대 내놓지 않아서 객관적인 사실 확인이 불가한 상황이다. - 이번 시찰단 구성, 어떻게 되는지? 정부 기구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누군지 구체적으로 명단 공개도 안 한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지금 제일 문제인 건, 한국 정부가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기정사실화 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방류를 전제로 하고 시찰단 파견을 한 것 같다. 이렇게 되면 결국 한국이 일본 오염수 방류 문제에 있어 들러리 선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 그렇다면 이번 시찰, 신뢰할 만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기대하기 어렵다. 시찰 결과도 분명 큰 이상 없다고 결론지어질 것이 뻔하다. 시료 채취도 안 되는 시찰단이 다녀와서 발표하는 결과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겠나. - IAEA에서도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과정을 검증 중이다. 이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는지? 이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없다고 할 것이다. 일본 정부 발표를 보면 결과는 나온 것 같다. ▶ 강제 징용 배상 문제, 멀티 트랙 접근법 필요 - 강제 동원 피해자에게 ‘제3자변제' 방식으로 배상하기로 했다. 이러한 행보를 어떻게 보나. 잘못된 행보라고 본다. 일본 정부를 동참시켜서, 일본 기업에 사과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들의 명예가 걸린 문제다. 그런데 제3자변제 방식을 통한 배상은 피해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방식이다. 일본 가해 기업이 아닌, 제3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배상하는 방안인데 일본의 자발적 사과를 끌어내긴 커녕 우리 정부가 먼저 나서서 피해자들과 원만한 해결을 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모양새는 말이 안 된다. -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 성급한 결정이♘다. 한일관계 정상화도 좋지만 이런 역사 문제엔 절차와 과정이 중요하지 않나. 피해자 의견과 국민 여론을 수렴해 진행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없♘다. 그러니 여론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 강제 징용 배상 해법에 피해자가 빠져선 안 된다. 해법 마련,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본과 꾸준히, 계속해서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물밑 작업을 지속해 일본 기업이 동참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없던 일로 치부하는 건 매국과 다를 게 없다. - 국익과 역사 문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한국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몇십 년 동안 역사는 역사, 경제는 경제, 안보는 안보 이렇게 각각 멀티 트랙으로 접근했다. 잘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멀티트랙으로 진행되♘어야 했는데 갑자기 모두 일원화시키며 과거 역사를 없애버렸다. 이는 결국 역사를 팔아버린 집단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 한국 국민에겐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잠재된 어떤 정서가 있다. 물론 일본 여행도 잘 가고, 일본 문화도 좋아하지만, 과거사는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경제는 경제대로 역사는 역사대로 멀티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 ▶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 G7 정상회의 - 의장국인 일본의 초청을 받아 G7 정상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한국이 일본의 초청을 받은 배경은 무엇인가. 한국도 G7 정상회의에 4번 참석한 이력이 있다. 그만큼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래서 당연히 초대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만 초대받은 게 아니라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코모로, 쿡 제도 등 엄청 많은 국가가 초대됐더라. 이번 정상회의 주인공은 일본의 기시다 총리와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조연 그 어디쯤이었을 거다. - G7 정상회담에서 후쿠시마산 식재료가 제공됐다고 하던데. 일본에서도 후쿠시마산 농산물은 잘 안 팔린다. 아마 방사능 전부 체크해서 안전한 음식만 갖다 놨을 거다. 술은 증류수라 괜찮다고 하는 술과 안전한 음식 몇 개만 준비한 걸로 알고 있다. 후쿠시마산 물도 안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후쿠시마산 식재료가 정상회의 식탁에 올라 안전하다는 식으로 어필하고 있다. - 원폭 희생자에 대한 참배 일정도 있었다. 한일 정상 참배는 처음이라던데. 이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통령이 가는 건 당연한 건데, 기시다 총리가 간 게 중요하다. 그게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아마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을 배려해서 원폭 희생자 참배 일정을 진행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참배 일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있는 원폭 피해자 14명이 히로시마로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정부에 전달했다. 히로시마 참배 일정 때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정부 쪽에서는 회신도 없고 가타부타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히로시마로 향했던 한국 원폭 피해자들은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피해자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참배를 진행한 거였다면, 한국에서 온 원폭 피해자들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정성을 보여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G7 정상회의 후, 여당에서는 ‘국격을 높였다' 야당에서는 ‘들러리 선 꼴밖에 안 된다'라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국가의 위상을 높인 건 없고, 한미일 회담을 아주 짧게 약식으로 진행했는데 정식으로 길게 진행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 G7 정상회의 참석이 한국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하나. 딱히 변할 건 없어 보인다. 얻은 것과 손해 본 것 모두 없다. 다만 이번 회담을 통해 친미, 친일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 올해 상반기에 나타난 중국무역적자, 친일본 행보와 관련이 있나. 안보 문제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협력 관계를 다져왔다. 그런데 이번 회담과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경제마저도 친미/친일이 된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을 배제함으로써 ‘신냉전체제의 구축이다’와 같은 비판도 있었다. 다행히 이번 정상회의 때 중국에 원한 살 발언은 안 했지만, 국가 이익이 걸린 경제 문제이므로 항상 신중해야 한다. - 이에 대한 주변국의 견해는 어떤가. 주변국의 견해에 앞서 중요한 건 All of nothing이다. 경제적으로 수많은 나라가 엮여 있다는 소리다. 그러므로 앞서 계속 말한 것처럼 경제는 경제대로, 안보는 안보대로, 성격에 따라 트랙을 나눠 멀티로 접근해야 한다. ▶ 독도 문제, 과잉 대응하지 않는 것이 답 -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일본 고유영토’로 지칭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입장이 더욱 강경해지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독도 문제는 해결이 어렵다. 당장 할 수 있는 대처 방법은 독도 문제를 시끄럽게 다루지 않는 것이다. 일본이 원하는 게 바로 ‘분쟁'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이슈화해서 세계에 알림으로써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끌고 나가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한국이 독도를 지키기 위한 영유권 주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나치게 대응하지도, 예민하게 반응하지도 말아야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가 반응하길 원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 자극을 하는데, 독도 문제는 국제 분쟁으로 끌고 가면 안 된다. 독도문제가 이슈화되면 전 세계 사람들은 사실관계 확인을 떠나 ‘독도는 일본 땅인가?’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다. 그러니 독도 문제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 게 좋다. - 독도 영유권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식은 어떠한가. 다행히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 한국의 독도 영유권 강화를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잉 대응을 하지 않는 것. 무시가 답일 수도 있다. ▶ 한일관계, 큰 문제는 없을 것. 다만… - 통큰 양보를 하고도, 일본 측 태도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나. 윤 정부가 일본을 몰라서 그렇다. 일본은 하나를 준다고 똑같이 하나를 주는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배 째라 버텼더니 이것들이 깨갱하는구나' 하면서 더 큰소리를 친다. 그러므로 일본과는 논쟁과 논의를 지속하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반대로 문제를 해결할 명분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 한일 관계 전망에 대해 어떻게 보나.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고, 일본의 입장도 헤아리는 식으로 가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문제만 없으면 된다. 인적 교류는 이미 잘 이뤄지고 있고, 일본과는 기술 등 협력할 여지가 많다. 일본은 강압적으로 하지 않고, 한국도 비굴하게 굴지 않으면 된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아시아
    2023-05-29
  • [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 사람들
    2021-09-09
  • 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한 지역 모임에서 무술을 시연하는 98세 중국 “쿵푸 할머니”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44만 번 이상 조회되고 4,500개 이상의 좋아요가 쏟아지는 등 순식간에 히트를 치고 있다. “쿵푸 할머니”의 팬들은 “98세에도 걸을 수 있을까. 쿵푸가 장수의 관건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심지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 "쿵푸 정신은 늙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주목했다. 본명이 장헥셴(張鶴仙)인 “쿵푸 할머니”는 2017년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고향인 저장(浙江)성 닝하이(寧海)현 장컹(張坑)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퍼지자 조카딸은 “할머니는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키는 약 1.5미터이다. 그의 쿵푸 동작은 유창하고 걸음걸이는 꾸준하다. 할머니의 마을은 쿵푸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할머니는 5살 때 중국 남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무술 스타일인 장복싱의 6대 계승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매일 연습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 원기 왕성하다”고 말했다. “쿵푸는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농부인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막내아들인 펑은 “어머니는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돕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닝하이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닝하이현은 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2012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의 삶은 평범하지만 잘 짜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세 끼의 요리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끔 친구들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후에는 쿵푸 연습을 한다. 장컹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할머니의 집은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등산이 필요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할머니가 정력이 왕성한 원인일 수 있다. 펑은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쿵푸 할머니”는 아버지의 장복싱 스타일을 주말과 휴일에 집에 오는 손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최근 이웃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무술 수업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자원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펑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쿵푸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고 그것이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사람들
    2021-08-16
  • 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스포츠
    2021-07-28

실시간 사람들 기사

  • 외국인자율방범연합회 차재봉회장 [2014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수상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영등포경찰서 외국인자율방범연합회 차재봉 회장이 지난 27일(토) 오후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2014 글로벌 자랑스런한국인대상’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국제언론인클럽(GJCNEWS)과 사)GK희망공동체가 주최한 '2014 글로벌 자랑스런한국인대상 시상식'이 27일 오후 1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수상자와 연예인, 언론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시상식은 한국과 국제 분야에서 활동 중인 단체와 개인의 사회기여도와 공헌 정도를 심사해 그 노고를 격려하고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상이 이뤄졌다. 이번 시상에서 대상을 받은 차재봉 회장은 방범대원들을 이끌고 열악한 환경에서 살고 있는 독거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및 어려운 이웃들을 돕고 있으며 정기적으로 외국인 밀집지역인 대림동일대에서 야간 방범 순찰활동과 거리청소 등 봉사활동을 활발히 펼치고 있다. 또한 영등포구의대림 3동 소재에 사비를 털어 ‘아담하고 멋진 방범초소’를 마련하는등 지역사회 발전과 온 힘을 쏟고 있다. 차재봉 회장은 이날 “먼저 상을 받게 돼서 기쁘다. 그동안 중국동포를 위한 활동을 주로 해왔는데 최근 영등포구 안전문화운동 추진협의회 발족을 계기로 탈북민에 대한 지원활동에도 적극 나설 계획이다. 현재 영등포구에는 102명의 탈북민이 살고 있다. 이분들이 한국생활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태겠다”고 수상소감을 밝혔다. 그 외에 2014 글로벌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은 사)서울화교협회 이충헌회장, 새누리당 안홍준 국회의원, 함진규 국회의원 , 김동완 국회의원 , 조우성 경남 도의회부회장, 민주평화통일 신상수자문위원, 주)고천건설 윤영선대표, 새론기획 유병일대표, 뮤직라인 이나영, 사)아시아모델협회 조우상회장 ,고운우리옷 이춘섭대표, SM성형외과 이무영원장, 충남천안수퍼마켓 협동조합 변인석이사장, 주)한국문화촌 윤재웅대표, GWP코리아 지원욱본부장, 주)더엠에스 현종화대표, 주)싱크유건축디자인사무소 김종해소장, 미시즈월드내셔널디렉터 송지연대표, 주)뉴스와인 윤은섭대표, 주)정현 박영석대표, 기업은행 김종완센터장, 주)삼성공조 고호곤대표, 이건영세무회계사무소 이건영대표, 외국인자율방법연합회 차재봉회장, 한국다문화영상예술협회 오흔회장, 한국이주여성연합회 왕지연회장, 태허림 태허손외경, 개그우먼(방송인,교수) 정재윤, 한스엔터프라이즈(방송인) 안지민대표, 주)테크피아 서동범대표, 뉴시스헬스 최명규대표, 한국온라인홍보마케팅연구소(데일리연합) 김용두 소장이 수상하였다.
    • 사람들
    2014-12-28
  • 한국다문화 영상예술협회 오흔회장 [2014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수상
    ▲한국다문화영상예술협회 오흔 회장이 지난 27일(토) 오후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2014 글로벌 자랑스런한국인대상’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하고 있다.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한국다문화영상예술협회 오흔 회장이 지난 27일(토) 오후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2014 글로벌 자랑스런한국인대상’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국제언론인클럽(GJCNEWS)과 사)GK희망공동체가 주최한 '2014 글로벌 자랑스런한국인대상 시상식'이 27일 오후 1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수상자와 연예인, 언론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시상식은 한국과 국제 분야에서 활동 중인 단체와 개인의 사회기여도와 공헌 정도를 심사해 그 노고를 격려하고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상이 이뤄졌다. 이번 시상에서 대상을 받은 한국다문화영상예술협회 오흔 회장은 중국 길림성 연길시 출신으로 20여년 전 한국으로 건너와 독학으로 컴퓨터와 영상제작 기술을 익혀 지금은 이 분야의 전문가로서 자리매김했다. 훈디자인, 가연스튜디오 대표, 한국다문화영상예술협회 회장을 맏고있는 오흔 씨는 “안중근 기념100주년 축구대회” 등 100 여편의 영상물을 무료로 제작하였으며 “새로운 한국을 위한운동” 등 30여개의 홈페이지를 개설하여 해당 단체에 무료로 제공하는 등 지역사회 발전을 위해 노역하였으며 “다문화 촬영봉사단”을 조직하여 어버이날, 추석연후 등 을 이용해 소외된 이웃을 위해 효도사진촬영 봉사활동도 전개해 왔다. 오 회장은 이날 수상소감에서 “성공한 사업가로서가 아니라 열심히 노력해 온 사업가로서 일과 사회봉사에 더욱 매진하라는 의미에서 주신 상이라고 생각한다. 20대의 젊은 나이에 사업을 시작해서 성공과 실패를 거듭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어떤 분야이든 전문지식과 더불어 피나는 자기계발의 노력이 필요하다. 그것이 성공의 비결이라고 생각한다. 새해에는 자랑스런 한국인 수상자로서 부끄럽지 않게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 사람들
    2014-12-28
  • 한국이주여성연합회 왕지연회장 [2014 글로벌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수상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한국이주여성연합회 왕지연 회장이 지난 27일(토) 오후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열린 ‘2014 글로벌 자랑스런한국인대상’시상식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국제언론인클럽(GJCNEWS)과 사)GK희망공동체가 주최한 '2014 글로벌 자랑스런한국인대상 시상식'이 27일 오후 1시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수상자와 연예인, 언론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열렸다. 이날 시상식은 한국과 국제 분야에서 활동 중인 단체와 개인의 사회기여도와 공헌 정도를 심사해 그 노고를 격려하고 자긍심을 갖도록 하기 위한 목적으로 수상이 이뤄졌다. 이번 시상에서 대상을 받은 한국이주여성연합회 왕지연 회장은 중국 산동성 칭다오시 출신으로 한국인 남편과 결혼하여 슬하에 두 아이를 두고 있다. 그는 고부간의 갈등을 근면 성실과 효심으로 극복하여 안정된 가족관계를 회복한 대표적인 모범사례로 인증 받았다. 2010년 한국이주여성연합회를 결성하고 안전행정부, 지방자치단체, 사회공헌기업 등의 사회적 지원 및 공익성 지원금을 유치하여 27개 이상의 다문화가정 지원프로그램을 진행하는 현장 중심적 사회사업가로 거듭나고 있다. 왕지연 회장은 이날 “먼저 상을 받게 돼서 기쁘다. 앞으로 다양한 사회활동을 병행하면서 남다른 열정과 사명감을 가지고 다문화 사회의 성공모델이 되어 대표적인 다문화 여성 리더가 되고 싶다"고 소감과 함께 야심찬 각오를 밝혔다. 그 외에 2014 자랑스런 한국인 대상 수상자는 사)서울화교협회 이충헌회장, 새누리당 안홍준 국회의원, 함진규 국회의원 , 김동완 국회의원 , 조우성 경남 도의회부회장, 민주평화통일 신상수자문위원, 주)고천건설 윤영선대표, 새론기획 유병일대표, 뮤직라인 이나영, 사)아시아모델협회 조우상회장 ,고운우리옷 이춘섭대표, SM성형외과 이무영원장, 충남천안수퍼마켓 협동조합 변인석이사장, 주)한국문화촌 윤재웅대표, GWP코리아 지원욱본부장, 주)더엠에스 현종화대표, 주)싱크유건축디자인사무소 김종해소장, 미시즈월드내셔널디렉터 송지연대표, 주)뉴스와인 윤은섭대표, 주)정현 박영석대표, 기업은행 김종완센터장, 주)삼성공조 고호곤대표, 이건영세무회계사무소 이건영대표, 외국인자율방법연합회 차재봉회장, 한국다문화영상예술협회 오흔회장, 한국이주여성연합회 왕지연회장, 태허림 태허손외경, 개그우먼(방송인,교수) 정재윤, 한스엔터프라이즈(방송인) 안지민대표, 주)테크피아 서동범대표, 뉴시스헬스 최명규대표, 한국온라인홍보마케팅연구소(데일리연합) 김용두 소장이다.
    • 사람들
    2014-12-28
  • 경기소리꾼 노경미, 불교 범패 음반 "깨침의 소리" 발표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경기명창 노경미가 불교 범패(梵唄) 음반 ‘깨침의 소리’(신나라 뮤직)를 발표했다. 음반에는 범패 ‘복청게’, ‘천수바라’, ‘도량게’, ‘다게’, ‘향수나열’, 그리고 ‘사다라니바라’ 등 총 11곡이 실려 있다. 모두 홋소리로 부른 범패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21호 휘몰이잡가 이수자인 노경미는 경기소리꾼이다. 범패를 부르는 범패 소리꾼이 아니라 40년 넘는 세월 동안 민요와 잡가를 주업으로 해왔다. 그런데 그녀의 공연 무대에는 여타 경기 소리꾼들과는 다른 레퍼토리(연주곡목)가 늘 고정적으로 오른다. 하나는 범패이고, 하나는 휘몰이잡가다. 범패(梵唄)는 불가의 성악을 말한다. 범패는 말 그대로 인도 바라문(婆羅門.브라만)의 소리이지만 궁극적으로는 부처의 소리(音)를 의미한다. 범패는 가곡, 판소리와 함께 3대 성악곡으로 분류됐다. 홋소리, 짓소리, 화청으로 구분되며, 이 가운데 화청을 제외한 홋소리와 짓소리는 전문 범패승이 아니면 좀처럼 부르기 힘든 소리라서 범패승조차도 웬만하면 축약해 부르고 끝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노경미는 화청에 더해 홋소리 범패를 공연 무대에서 선보여 왔다. 그녀의 범패가 처음부터 대중들의 눈과 귀를 잡아맨 건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의 경기소리를 듣고자 했던 많은 청중의 마음을 불편하게 했다. 세속과 소통하며 대중화된 화청이나 소릿조 회심곡에 너무 익숙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원곡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들한테 원곡은 때론 낯섦 그 자체였다. 하지만 노경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원곡이 갖는 가치와 중요성을 관객들한테 전했고, 이런 노력이 결국 관객의 마음을 열게 했다. 그녀가 부르는 범패는 종묘제례악, 가곡, 판소리 등과 함께 ‘영산재’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원형 예술 보존과 창조적 계승에 대한 노경미의 남다른 열정과 고집은 여전히 진행 중이다. 노경미의 범패는 종교적인 원숙미, 불교적 신비감에 더해 수십 년 이상 지켜온 경기소리꾼만이 지닌 특유의 시김새에서 나오는 음악적 정갈함과 단아함이 잘 조화를 이루고 있다. 그런 이유로 어쩌면 범패승들이 감히 흉내 낼 수 없는 독보적인 음악이라고 할 수 있으며, 그래서 세상에 단 하나뿐인 범패라고 할 수 있다. 노경미의 불교음악이 여타 불교음악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난 이유 중 하나는 그녀의 음악성에 더해 국보급 반주자들이 대거 참여했다는 점 때문이다. 노경미는 민요나 잡가와 달리 불교음악 연주만큼은 최고의 기량을 가진 연주자만을 고집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원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연주자들의 소리에 그녀의 목소리를 태울 때 묘음(妙音)이 완성되고 그것이 사바(娑婆)의 대중들을 움직일 수 있다 믿고 있으며, 이러한 음악철학이 그녀의 불교음악에 내재해 있다. 이번 음반 작업에서도 그녀의 이 같은 음악 철학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대금과 피리는 대금산조 인간문화재인 이생강 명인과 그의 아들이자 대금산조 전수교육조교인 이광훈이, 북과 태징은 김포 승가대학교 교수이자 쌍암사 주지인 성마 스님이 각각 연주했다. 또한, 장고 및 꽹과리는 서울시 무형문화재 휘몰이잡가 인간문화재인 박상옥 명창이 반주했다. 이 밖에도 태평소에 김필홍, 장고에 이관웅, 가야금 오주영, 해금 신현석, 건반 김쥬리 등 중견급 명인들이 참여했다. 노경미가 소리꾼이 된 배경은 부친의 시조창이나 상엿소리, 할머니의 민요 가락 등을 들으며 자란 환경이 크다. 그녀는 이미 나이 20대에 대중가요 음반을 취입할 정도로 음악에 대한 열정이 뜨거웠다. 20대 중반부터 김경희 명창에게 판소리를 배웠고 박상옥 명창에게는 휘몰이잡가를 배워 이수자가 되었으며 이은주 명창에게는 경기12좌창을 사사해 경기민요 이수자로 활동하고 있다. 실기뿐 아니라 학구열도 높아 늦은 나이에 대학원을 졸업하기도 했다. 노경미의 소리는 언제 들어도 높고 시원한 발성이 인상적이며 긴 호흡으로 다이내믹을 살려 나가는 역동성이 가히 일품이다. 제25회 전주대사습놀이 민요부 장원, 전국국악경연대회 대구국악제 종합 명인부 대상, 그리고 그의 이름을 걸고 꾸준히 개최해온 개인발표회 등을 통해 그의 공력을 느낄 수 있다. <수록곡> 노경미 불교음악-깨침의 소리 No, Kyoung Mi Buddhistical Music-Enlightened Sound 범패(梵唄)와 작법무(作法舞), 회심곡(回心曲) Bumpae and Jakbeopmoo, Hoesimgok 1. 복청게(伏請偈) Bokcheonggae 03:27 소리: 노경미 2. 천수바라(千手哱囉) Cheonsubara 04:57 소리: 노경미. 북, 태징: 성마 스님. 태평소: 김필홍 3. 도량게(道場偈) Doryanggae 06:28 소리: 노경미. 북, 태징: 성마 스님. 태평소: 김필홍 4. 다게(茶偈) Dagae 06:48 소리: 노경미. 북, 태징: 성마 스님. 태평소: 김필홍 5. 향수나열(香需羅列) Hyangsunayeol 05:50 소리: 노경미 6. 사다라니바라(四陀羅尼哱囉) Sadaranibara 04:09 소리: 노경미. 북, 태징: 성마 스님. 태평소: 김필홍 7. 회심곡1(불가조) 回心曲1 (佛歌調) Hoesimgok I(Bulgajo) 09:42 소리: 노경미. 꽹과리:박상옥 8. 회심곡2(소릿조) (回心曲2) Hoesimgok II(Soritjo) 09:10 소리: 노경미. 꽹과리: 박상옥 9. 탑(塔)돌이 Tapdori 05:26 소리: 노경미. 대금, 피리: 이생강. 장고: 이관웅. 가야금:오주영. 해금: 신현석. 건반: 김쥬리 10. 산염불(山念佛) , 잦은염불(念佛) Sanyeombul, JaJeunyeombul 04:47 소리: 노경미. 피리: 이생강. 대금: 이광훈. 장고: 이관웅. 가야금: 오주영. 해금: 신현석. 건반: 김쥬리 11. 제전(祭奠) Jejeon 06:56 소리: 노경미. 장고: 박상옥 Total Time / 01:07:37 녹음 날짜: 2014년 2월 9일~2014년 10월 27일 프로필 노경미(본명 노말임) 경남 남해 출생 <사사> 이은주 선생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박상옥 선생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21호 휘몰이잡가 보유자) 故 김경희 선생 (판소리 및 남도민요) 현범수 선생(선소리 산타령 제19호 이수자) 성마 스님-승가대학 교수 (불교음악 범패) 진유림. 박근식 선생 (한국무용) <수상 경력> 제25회 전주 대사습놀이 민요부 장원 전국 경서도 민요경창대회 명창부 장원 전국 국악 경연대회 대구 국악제(종합 명인부 대상) <음반> 1969년 대중가요 갈대꽃. 돌아와 주오 독집 출반(도미도 레코드) 1999년 노경미 경기민요 독집 음반 (서울 음반) 2010년 3월 고양시 타령 음반 2012년2월 노경미 휘모리잡가 완창. 변강쇠타령 (Heritage Gramophone) 2012년 2월 노경미 경기 12잡가 완창 (Heritage Gramophone) 2012년 10월 고양 아리랑 음반 2014년 11월 노경미 불교음악-깨침의 소리 (신나라뮤직) <현재> 국가지정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 서울시 지정 무형문화재 제21호 휘몰이잡가 이수자 (사)고양시 국악협회 부지부장 (사)경기잡가 포럼 이사장 맑은 소리샘 국악연구소 소장 고양시 여성회관 민요. 장고 강사 고양 문화의 집 민요. 장고 강사
    • 사람들
    2014-12-10
  • 기업교육 전문가 이희선, 대학 교수 대상 취업 마인드 주제 발표 강연
    [동포투데이] 현직 대학 교수들이 기업교육 전문가에게 '취업 마인드 문제해결 능력 특강'을 받아 화제다. 행동훈련 전문기업 교육그룹 더필드 이희선(사진·46) 훈련본부장은 5일 수원·안산지역 학·학 컨소시엄협의회 정기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했다고 밝혔다.이 본부장은 이날 오전 라마다 프라자 수원 호텔에서 개최된 안산대학교, 장안대학교, 수원여자대학교 등 3개 대학 총장과 교수, 산학협력단, 취업 관계자 등 15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사위일체 취업 마인드 문제해결 전략'의 주제발표를 했다. 이희선 훈련본부장은 "기업은 '인재가 없다'하고 학교는 '취업이 바늘구멍'이라는 기업과 대학 간 미스매치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특히 기업체 인사담당자와 HRD(인재계발) 담당자들은 대학이 기업에서 원하는 인재를 키워내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대학이 기업을 너무 모른다' ▲해당 기업의 비전과 철학은 무엇인지 ▲기업의 인재상은 ▲기업의 핵심가치와 기업문화 등에 대해 기업정보를 학생들에게 제공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기업은 신입사원을 채용해 회사에 이익을 낼 수 있는 '경력같은 신입사원을 원한다'"고 덧붙였다.이 본부장은 이어 ▲인성 ▲도전정신 ▲스토리▲협업(팀워크) '사위일체'를 참석한 교수들에게 주문했다. 이 본부장은 "'인성'의 구체적 사례로 학교에서 슬리퍼 등교와 보행중 흡연, 입수 보행, 교내 식당에서 배식하는 분들께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감사의 예절과 배려, 다리를 꼬고 듣는 강의를 듣는 수강생의 태도 등에 대해 고쳐야 할점"이다, 기업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고 학생들의 기초적인 인성교육을 주문했다.두번째 주제발표로 안산대학교 김성중 학생복지처 부처장은 '챌린지 취업지원 정책'에 대해 소개했다. 세번째로 장안대학교 신성수 서비스경영학과 교수는 '산학협력 및 취업 활성화- 주문식교육 운영 사례'를 발표했다. 마지막으로 수원여자대학교 고혜정 미용예술과 교수는 '창의성 산학협력 맞춤형 인력 양성'에 대해 전달했다.이희선 본부장은 15년 간 대기업을 비롯한 중견기업 300여 기업의 직원교육을 진행하고 있으며, 200여 학학과 특성화고의 취업 캠프와 특강을 진행한 바 있다.한편 이 본부장은 공업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에 진학한 '선 취업, 후 진학'의 독특한 이력의 성공한 기업인으로 특성화고와 전문계고 취업과 진로 교육의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그는 지난 '2011 대한민국대표강사 33인'에 선정된 바 있으며, 지난 10월말 현재 1010번의 강의를 진행했다.이 본부장은 매일경제 MBN-TV 창업&취업 스페셜리스트, 한국경제TV 취업컨설턴트, 서울시교육청 지식나눔명예교사, 나비미디어 대표, 아하취업아카데미 대표로 재직중이다.
    • 사람들
    2014-12-08
  • 문화적 차이 극복한 조한 두 민족의 둥근 사랑
    [동포투데이] 지난 9월 연변팀이 중경역범과 원정경기를 치르던 시기 중경에서 한 연변 조선족 사나이와 중경 토배기출신 주란란 여성이 가정을 뭇고 생활하면서 현지에서 유명한 “한성불고기집(한성관-汉城馆)”까지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포착되었다. 경기장에서 만난 이들 부부, 알고 보니 남편인 이국룡씨는 길림신문사에서 퇴직한 이선근 선배님의 조카벌 되는 사람이어서 취재는 더욱 쉬워졌다. 조한 두 민족이 한가정을 이루고 거기에 중경에서도 유명한 “한성불고기집”을 운영하여 중경라드오방송국 생방송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까지 됐다는 이들 부부의 스토리를 듣노라니 감동되기도 하고 부럽기도 하였다. (1) 워낙 북경의 어느 한 한국회사에서 근무하던 이국룡씨가 중경의 지회사로 자리를 옮긴 것은 2002년이었다. 당시 중경에서 출근하던 이국룡씨는 문득 중경도 지난 세기 80연대의 심수와 같다는 생각이 들어 자아창업을 목적으로 회사를 정리한 뒤 자체로 당지에서 “길림신문” 부간인 “동북저널”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조선족과 한국인이 적은 그 곳에서 “동북저널”을 발행하자고 보니 몹시 힘들었다. 게다가 음식마저 입에 맞지 않아 고생이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당시 그가 버티어낼 수 있었던 것은 친절하고 예의가 바른 중경사람들 때문이었다. 그 과정에서 이국룡씨는 중경토배기출신의 처녀 주란란을 만나게 되었다. 어느 한 청사의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라 얼핏 눈길이 마주쳤으며 둘 다 “저 사람이야말로 나 이상속의 반려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었다. 그 뒤 그들 남녀는 서로 인터넷 채팅도 하고 전화연락도 자주 하면서 사랑을 무르익히다 결국 결혼에까지 골인하게 되었다. 결혼한 후 그들의 신혼생활 역시 평온한 것은 아니었다. 특히 조선족 가정에서 가무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이국룡씨가 집안일에 등한하여 아내 난란의 불평을 자주 샀다. 난란은 남편인 국룡씨한테 주로 남정들이 집안일을 하는 한족문화를 주입시키려고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그런 설득은 국룡씨한테 있어서 “소귀에 해금켜기”에 불과했다. 그러던 중 언제인가 연길에 있는 시집에 와보고는 난란씨 역시 그 마음을 접었다 한다. 시어머니는 새벽부터 저녁까지 팽이처럼 돌아치면서 집안일에 열중하지만 시아버지는 늘 쏘파에 앉아 안경 걸고 신문이나 보는 전통적인 조선족 가정문화에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녀 역시 남편을 가무일에 붙잡아 매놓고 싶지도 않았다. 남자란 밖에 나가 큰 일을 해야 한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임신7개월이 되자 난란은 남산만한 배때문에 더 이상 엎드려 장판을 닦는 일만은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남편 국룡씨한테 장판만이라도 닦아 달라고 지청구를 들이댔더니 국룡씨는 밖에 나가 서서 장판을 닦을 수 있는 밀걸레를 사왔단다. “어쩔 수 없는 남자로구나!” 난란씨는 그냥 도리질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2) 그 뒤 이들 부부는 중경에서 한식을 위주로 하는 “천리향”이란 작으마한 음식점을 차렸다. 한국인이 차린 대형음식점에서 경리로 일하며 잘 나가던 이국룡씨가 회사를 정리하고 개인창업에 나섰던 것이다. 인건비를 절약하기 위해 음식점은 이들 부부 둘이서만 운영했다. 어린애는 난란의 친정어머니가 봐주었다. 그러던 중 그 어느 해엔가 중경에서 동양 4개국 축구경기대회가 있었다. 그러자 당시 내지에서 활동하는 조선족 기자 송청운씨가 한국기자 23명을 데리고 “천리향”으로 식사하러 왔고 그 때로부터 50평방미터도 되나마나한 이 음식점은 대뜸 소문을 놓게 되어 한국손님, 조선손님 및 중경에서 근무하는 조선족 사업가들과 유학생들이 즐겨찾는 가게로 발돋음했다. 이들 부부는 열심히 일하면서 매일마다 짭짤한 수입을 올리군 하였다. 그러나 창업의 길도 순탄치만은 않았다. 난란씨의 오빠가 결혼하여 어린애가 생기자 친청어머니는 계속 그들의 아이를 돌볼 수가 없었다. 이들 부부는 가게의 영업 때문에 어린 것을 머나먼 연변의 시부모한테 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헌데 가게의 영업도 중요했지만 어린 것의 빈자리가 너무 컸다. 어린 것이 보고 싶다못해 난란씨는 밤에 자다가도 꿈을 꾸면서 어린 것을 부르며 운적도 수없이 되었고 우울증 증세로 앓기까지 했다. 결국 이들 부부는 2년만에 “천리향” 음식점을 처분하고 아이가 있는 연변으로 나와 버렸다. 하지만 연변에서 이들이 할 일은 없었다. 이국룡씨가 시장조사를 한바퀴 했지만 파악있는 영업항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들 부부는 재차 중경으로 들어갔다. 다르다면 이번에는 어린 것을 데리고 들어간 것이었다. 중경에 들어간 뒤 보다 통이 크게 음식업을 벌였다. 그것은 지금까지 견지하고 있는 “한성불고기집”이였다. 이들은 원래 “천리향”음식점을 할 때의 경험을 살린 한식불고기집이었지만 중경 현지인들의 입에 맞게 음식을 개발하여 큰 호평을 받았다. 당지인들은 한국식불고기라 하니 그냥 체험식으로 먹어보다가는 입에 맞는다며 모두들 기뻐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군 하였다. (3) 이국룡씨는 축구운동을 몹시 즐긴다. 중경에 발을 어느 정도 붙이게 되자 2005년 중경에 있는 조선족 축구애호가들로 축구동아리를 무었다. 이름은 “장백호랑이 축구동아리”었다. 초기에는 몇명 안되었지만 시일이 지나면서 “장백호랑이 축구동아리”는 점점 구성원이 늘어나 현재는 28명이 된다. 이들은 주로 토요일과 일요일에 집중훈련 혹은 친선경기를 치르며 중경에서 펼쳐지는 갑급리그의 경기관람도 단체로 다닌다. 그리고 지난 9월 연변팀의 중경원정경기시엔 축구단 감독진과 선수 30여명을 “한성불고기집”에 초대하는 것으로 고향축구팀에 대한 사랑을 전달하기도 했다. 한편 축구동아리에서의 경비는 이국룡씨가 협찬할 때가 많다. 유니폼 역시 그의 협찬으로 사온다. 유니폼 얘기가 나왔으니 말이지만 국룡씨가 운영하는 “한성불고기집”의 직원 모두 축구유니폼을 착용한채 근무한다. 남편이 축구를 혹애하고 축구동아리까지 무은데 대해 아내인 난란이가 전적으로 지지하는건 아니다. 어떤 날에는 아침에 나갔다 한밤중에야 돌아오군 하기에 영업에 지장이 크다. 우선 남편이 없으니 가게일이 그만큼 밀리고 또 열심히 모은 돈도 자리가 나게 축나기도 했다. 또한 그것보다 더욱 걱정되는건 남편이 축구하러 가면 번마다 술에 거의 절어서 돌아온다. 남편의 건강에 관심이 갈 수밖에 없는 난란이다. 하지만 난란은 남편을 이해한다. 남편한테도 취미가 있고 사생활이 있어야 한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녀는 남편을 그저 돈만 버는 “일벌레”나 “일중독자”로는 만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라는걸까? 지청구를 들이대고 바가지도 긁고 하지만 결국은 남편한테 숙어들고 남편을 지극히 아끼는 난란이다. × × × × × × 취재는 끝났다. 연변에 있으면 그냥 수수한 인생을 보낼 수도 있는 조선족남자 이국룡 ㅡ 하지만 중경이란 낯선땅에 가서 그 곳의 토배기 처녀를 만나 고생도 많았지만 이젠 그 곳에 뿌리를 내리고 멋진 삶을 수놓아가는 부러움이 큰 사나이가 됐다. 난란도 마찬가지였다. 그녀 역시 조선족 리국룡씨를 만나 당당한 지금은 음식점 녀보스가 되고 말이다. 조선족 이국룡과 중경의 토배기 한족 주란란의 만남은 그들의 운명이었고 100% 만점의 결합이라 할까? 취재는 끝났다. 하지만 이들 부부의 스토리는 계속된다. <필자는 중국 길림신문 스포츠 전문기자 김룡 입니다.>
    • 사람들
    2014-10-22
  • 동포투데이 정경화 대표, 재한중국동포 발전 기여로 공로상 수상
    정경화 <동포투데이> 대표가 지난 14일(일) 오후 서울 중구 외환은행 본점 대강당에서 열린 ‘도전 골든벨! 한중 청소년 문화페스티벌’ 행사에서 새정치민주연합 김성곤 의원으로부터 공로상을 수상했다. 이날 공로상은 중국동포단체인 중국조선대모임(대표 허을진)이 주최하는 행사를 맞아 새정치민주연합 세계한인민족회의 수석부의장직을 맡고 있는 김성곤 의원이 특별히 마련한 상으로 재한중국동포사회 발전에 기여한 중국동포 출신의 단체장과 기업 대표들에게 수여되었다. 중국동포 출신의 한국 귀화자인 정 대표는 현재 실시간으로 중국현지 소식을 전하는 인터넷언론 <동포투데이>를 운영하고 있으며, 바쁜 시간을 쪼개 이주여성들을 위한 봉사활동도 활발히 펼치고 있어 중국동포사회에서는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여성이다. 또한, 권오훈법률사무소 사무장직도 맡고 있는 정 대표는 재한중국동포들의 인권보호를 위해 그들이 억울한 형사사건이나 임금체불, 산재재해 등 어려움에 처하면 발 벗고 현장으로 달려가 문제해결을 위해 힘을 보태고 있다. 김성곤 의원은 “800만 해외동포들 중 중국에 있는 조선족동포들이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아쉽게도 그동안 일본이나 미국동포들에 비해서 조선족동포들이 소외되고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했다. 앞으로 한중 관계가 깊어질수록 조선족동포들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라고 말하며 수상자들을 격려했다. 한국인권신문
    • 사람들
    2014-10-18
  • 중국조선족 미스 진 박홍희, KBS 아침마당에 출연
    길림신문 1일자 보도에 의하면 지난 8월 27일, 제 1회 미스월드코리아 중국조선족미인선발대회에서 진선미로 선발되었던 박홍희, 전려홍, 서문령 등 세명이 9월 26일 미스월드코리아 본선 대회 참가 차 한국으로 향했다. 한국에 도착한 박홍희, 전려홍, 서문령은 중국조선족 미인대표로 각종 행사에 참가하고 바쁜 일정을 보냈다. 보도에 따르면 그중 박홍희(진)는 미스월드코리아 박정아 회장과 함께 9월 30일에 방송된 한국 KBS 아침마당프로에 출연했다. 아침마당프로에서 박홍희는 사회자로부터 한국의 미스월드코리아 본선 대회에 어떤 자세로 림하는가의 물음에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다. 미스월드코리아 중국선발이 제1회인것만큼, 그리고 진의 명예를 얻은것만큼 어깨의 무게는 낮추되 민족심에 대한 마음의 무게에 중점을 두겠다. 비록 떨어져 있지만 우리 모두가 한민족이다. (미스월드코리아 본선) 합숙훈련동안 더 많은 친구들과 함께 하며 많이 배우고 경험을 쌓는것이 목표다. 그리고 입상을 떠나 우리 민족의 얼과 자태를 널리 알리고싶다.》라고 망설임 없이 당당하고 자신감 있게 말하였다. 중국조선족을 대표하는 세명을 연길에서부터 동행한 최송옥 미스월드코리아 중국지사 총괄리사의 말에 의하면 10월 1일부터 한국 강원도 평창에서 열흘간의 합숙후 11일 최종 본선에 참가하게 되며 특히 박정아 회장님의 배려로 본선 경연중 박홍희 등 세명은 그동안 남몰래 갈고 닦은 장고춤을 특별프로그램으로 공연하게 되며 대회가 끝난후 방송국 견학을 통하여 자신들의 꿈인 전문방송인의 경험을 쌓을 소중한 기회도 갖는다고 한다. 그리고 그들은 18일 귀국할 예정이라고 한다. 미스월드코리아 한국 본선전 합숙이 시작되였다. 중국조선족을 대표하여 미스월드코리아 본선에 참여하는 우리 미녀들에게 뜨거운 응원의 박수를 보내자.
    • 사람들
    2014-10-01
  • 알로에 재개발에 인생을 건 녀인
    [동포투데이 철민 기자]불과 30여년 전까지만도 우리는 기업을 하는 사람은 잘 먹고 잘 입으며 돈을 종이장처럼 뿌리고 다니는가 하면 아무런 근심걱정이 없이 여유작작한 인생을 보낼 것이라고 인정해왔다. 정말로 그럴까? 시간이 지나고 세월이 흐르면서 우리는 점차 그런 시각을 버리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연한 기회에 “벼락부자”로 된 사람이라면 돈을 마구 뿌리며 다닐지는 몰라도 우리가 보아온 많은 기업인들은 극력 아꼈고 사업이라면 밤을 패가며 일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럼 오늘 소개되는 주인공 연길 카이시자양품공장 박옥련 공장장이 바로 그런 부류의 기업인이었다. 알로에와 우연하게 인연맺아 박옥련 공장장이 알로에와 인연을 맺은 것은 그럴만한 사연이 있었다. 어릴 때 그녀는 몸에 이러저러한 질병이 많았다. 수술만 해도 6차나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수술이란 말만 들어도 진절머리가 났고 삶에 짜증이 날 때도 한두번이 아니었다. 몸을 춰세우기 위해 좋다는 보약도 많이 써봤지만 별로 이상적이 되지 못했다. 그러던 중 1988년 그녀는 우연히 의학서적을 통해 알로에가 질병치료에 좋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 당시로서는 얻기 힘든 알로에 두포기를 겨우 얻어 화분통에 심고는 정성들여 키운 뒤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복용하였더니 상상외로 지겹게 몸을 괴롭히던 질병들이 자취를 감추는 것이었다. 알로에를 통해 되찾은 건강ㅡ 그녀는 그것을 혼자서만 향수하기엔 너무나도 아까왔다. 원체 시원시원한 성격에 통이 큰 그녀는 1996년에 4000여평방미터가 되는 땅을 사서 알로에재배기지를 세우고는 본격적으로 알로에생산에 들어갔다. 헌데 세상일이란 생각대로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모양이다. 우선 열대식물로 집안의 화분통에서만 자랄 수 있던 알로에를 대면적으로 재배하니 애로사항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특히 아무리 비닐하우스안에서 일정한 온도를 보장했으나 1년에 수개월씩 되는 과동기를 넘긴다는 것이 여간만 여러운 것이 아니었다. 1999년 겨울 한차례 내린 폭설로 그녀의 비닐하우스 전체가 그대로 내려앉았으며 몇년간 정성스레 키웠던 수많은 알로에가 하루 사이에 꽁꽁 얼어 아무런 쓸모도 없게 되었다. 치명적인 좌절이었다. 실패의 정도가 아니었고 절망적이었다. 이렇듯 엄혹한 현실앞에서 웬간한 여인들 같으면 그 자리에서 기혼해넘어가지 않으면 병원에 실려갈 정도였겠으나 박옥련 여인만은 입술을 옥물었다. 다시 대규모의 알로에재배를 할만한 자금이 없으니 작은 영업길에 나섰다. 식당, 세탁소 등을 운여하면서 돈을 모으다보니 어느덧 4년이란 시간이 흘러갔다. 어느 정도 계획이 잡히자 그녀는 알로에로부터 병치료효과를 본 8명의 사람들한테서 이자를 주기로 하고 100만원이란 자금을 빌려서는 알로에생산 재창업에 나섰다. 알로에의 제품화에 성공 재창업에 달라붙자 박옥련 공장장은 모든것을 깐지고도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일명 “식물의사”, “만병초”로 불리우는 알로에는 80여가지의 유효성분을 갖고 있다. 알로에의 탁월한 효능은 동서양의학계에서 모두 공인하는 사실로서 수천년래 세계의 많은 나라들에서 광범위하게 응용해온 걸로 알려지고 있다. 알로에에는 살균작용, 항궤양, 세포부활 작용, 강심, 혈액순환 촉진, 동맥경화 연화, 혈관생성 촉진, 모세혈관 확장, 내분비 안정 및 추진 작용이 있다. 그리고 뛰어난 소염작용이 있어 항암, 이상세포파괴, 피부개선, 해독작용이 있으며 신장염, 방광염, 기관지염 등도 치료될 수 있고 항알레르기 작용도 있다. 한편 알로에는 그냥 그대로 먹기가 쓰고 떫은 식물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좋다고는 하면서도 그것을 선택하지 않을 때가 많다. 알로에재배에 성공하자 박옥련 공장장은 그것을 그냥 그채로 시장에 내놓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것의 독특한 기능에 초점을 맞추고는 제품화하기로 결심, 근 4년간의 꾸준한 연구개발 끝에 국가발명특허권까지 따낸 자양제품 “카이시알로에엿”을 시장에 내놓아 폭발적인 인기를 몰아왔다. 이어 그녀는 알로에 계열제품들인 알로에사탕, 알로에캡슐, 알로에된장, 알로에간장 등 연속 개발해냈는데 그 중 알로에된장은 환자들뿐만 아니라 광범한 대중들 가정들에서도 즐겨먹은 보건품이자 식료품으로 늘 가정의 식탁에 오르군 했다. 박옥련 공장장이 개발생산해낸 알로에계열제품들이 시장에서 각광을 받아 수요자가 많아지자 “공급이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는 국면”이 나타났다. 그녀가 갖고 있는 1만 6000여평방미터에 달하는 재배기지로는 생산라인에 원료를 공급하기가 태부족이었다. 하지만 박옥련 공장장은 원재료의 질에 대해 절대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녀는 아무리 원료공급이 딸려도 5년생이 되지 않는 알로에는 절대 쓰지 않았고 알로에재배에 있어서도 화학비료 대신 유기농비료를 썼고 살초제를 일절 쓰지 않고 풀도 몽땅 손으로 뽑게 했다. 뿐만 아니라 이 공장의 알로에계열제품에는 절대 방부제가 들어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금은보석은 녹쓸지 않아” “현재 시장에 저의 공장제품과 양식이 비슷한 모조품이 쏟아져 나오고 있어요. 하지만 저는 그것에 별로 신경도 쓰지 않아요. 금은보석은 녹쓸지 않는다고 소비자들은 언제나 그것의 진가를 알아볼 것이 아닌가요?! 저는 소비자들을 믿고 그저 저의 공장제품에 대해 책임지고 생산할뿐이죠.” 박옥련공장장의 말마따나 현재 세상에서 어느 제품이 인기를 몰아온다고 하면 며칠 안가 그 모조품이 생겨나는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모조품이란 그것이 들통나기 마련이고 생명력도 길지 못하다는 것이 박옥련 공장장의 설명이다. 알로에계열제품만 봐도 아무리 근사하게 모방한다고 하더라도 재배기지가 없이 시장에서 파는 알로에를 마구 사들여 제품을 만든다면 그 원료의 질을 보장할 수 없는건 물론 생산라인 또한 10여년간 품들인 연길카이시자양품공장을 따를 수 없다는 것이 박옥련 공장장의 굳은 신념이었다. × × × 연길시카이시장양품공장은 1996년의 창업스타트로부터 현재까지 10여년동안의 창업과 실패와 재성공의 길을 더듬으면서 걸어왔다. 그동안 이 공장은 1만 6000평방미터의 알로에재배기지를 확보하고있으며 직원 총수의 37%가 기술인원진영으로 재배기지, 생산과 판매 등이 일체화로 된 우리 길림성에서 최고의 알로에전문기업으로 발돋음했다. 하지만 박옥련 공장장은 사업의 대성공으로 거부로 되는 것보다는 먼 후날 장백산지구 알로에제품개발의 선두자로 남고 싶다고 솔직하게 그 소망을 털어놓았다.
    • 사람들
    2014-09-01
  • 성공은 노력하는 자에게 주는 “하느님”의 선물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연변국제무역빌딩 3층, 수많은 옷가게를 지나다가 보면 “서울토탈허창호패션”이란 글발이 유표하게 안겨온다. 그리고 아래에서 열심히 또한 까근하게 옷을 재단하는 한 남성을 볼 수 있다. 일정한 규모를 갖고 있는 옷가공회사 사장이지만 손수 손님들의 옷을 재단하면서 하루종일 가게앞을 지키는 사나이, 그가 바로 오늘 이 글의 주인공 허창호 사장이다. 어렵던 동년, 황홀했던 꿈 허창호 사장의 고향은 지금의 연길시 조양천진 팔도촌이다. 허창호가 태어나 세상물정에 대해 눈을 뜨기 시작했을 때 그의 가정은 몹시 가난한 모습이었다. 할머니까지 모신 9명 식솔의 가정, 그리고 6형제의 막내인 허창호는 그야말로 형들이 입다가 물려준 옷을 받아입을 때가 많았다. 그 때 어린 나이에도 허창호는 어쩌다 옷을 잘 입은 사람을 보기만 하면 부럽기가 그지 없었다. (나도 언제면 저런 옷을 입어볼 수 있을까?!) 당시 어린 허창호의 가장 간절한 소망이라면 멋진 옷 한번 입어보는 것이였다고 할까?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허창호가 종이를 갖고 숱한 옷견본을 만들었다고 하니 어느 정도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런 허창호한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은 바로 앞으로 어른이 되면 출중한 재단사가 되려는 꿈이 있었던 것이다. (재단사 – 멋진 사람이다. 재단사가 되어 고급옷을 직접 만들어입고 동네사람들한테도 지어드리리라!) 어릴 때 일시적 충동으로 가졌던 그 꿈, 허창호는 고중을 졸업할 때까지도 그 꿈을 머리속에 담고 있었다. 창업과 시련 1986년 고중을 졸업한 허창호는 여느 농촌청년들과 마찬가지로 농업생산에 투신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허무했다. 낮에는 삼복철 땡볕에 땅에 허리를 굽히고 기음을 매고 저녁이면 밥술이 떨이지게 바쁘게 곯아떨어져야만 하는 삶, 허창호는 그런 삶이 지겹기만 했다. 아니 그한테 남다른 꿈이 있었으니 더욱 그러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꿈이란 절로 이룩되지 않는다는 걸 잘 알았다. 그것이 명지했다. 그는 농사일이 그 힘든 나날에도 서점에 가서 복장재단기술서적을 구입해서 탐독하는 한편 짬짬의 시간을 이용해서는 각종 복장재단강습반에 참가, 당시 그처럼 복장기술을 탐닉하는 남성치고는 허창호씨가 거의 유일한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 뒤 그는 친구들한테서 돈 500위안을 빌려서는 용정시안에 복장점을 차렸는데 세집돈을 내고 보니 유동자금이 전혀 없어 재봉침 외 기타 설비와 부분적 원단 등은 외상으로 들여오는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여성도 아니고 남성청년이 경영하는 복장점이라 처음에는 옷가공을 맡기는 손님이 거의 없었다. 모두들 시작이 절반이라고 했지만 정작 복장점을 개업하고 보니 골치아픈 일이 더욱 많았다. 하지만 그는 물러설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어릴적부터 품어온 꿈이 바로 복장디자이너가 되는 것이 아니었던가. 버티어야 했다. 한동안 마이너스경영을 하더라도 버티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허창호의 오기이기도 했다. 허창호는 자신의 이미지를 올리기 위한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사회구역 노인들한테 무료로 재단해줬고 부분적 독거노인들한테는 무상으로 옷을 지어드리기도 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고 과연 수개월이 지나니 용정시안의 멋쟁이들은 허창호의 재단기술을 인정하기 시작했고 사회구역의 노인들도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러자 몇몇 그의 친지들은 “그러한 기술이면 연길 가서도 얼마든지 두각을 나타낼 수 있다”면서 연길진출을 권장했다. 헌데 연길에로의 진출 결과, 가뜩이나 복장업토대가 박약한 허창호는 큰 좌절을 맛봐야 했다. 하긴 연길시 서시장부근의 노천가게를 운영하다가 그것이 도시관리집법대대에 의해 모든 노천가게를 철거하게 됐으니 그의 무능함도 아니요, 해당 부문을 탓할 일도 아니었다. 그 뒤 허창호는 잠시 개인창업을 포기하고 연길시 모 복장회사로 출근하면서 기회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한국행 1988년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중한관계의 물코가 터지면서 한국손님들도 중국으로 대거 쓸어들게 되었다. 그 때 본 한국사람들이 입은 양복, 그것이 그렇게도 멋질 수가 없었다. (바로 저 것이다. 복장기술을 진정으로 배우려면 한국에 가야 한다.) 일이 될라고 그러는지 허창호의 한국행은 그렇게도 쉽게 이루어졌다. 한국에서의 나날, 그는 월생활비 20만원(한화)씩 받으면서 한 한국내 유명디자인의 제자로 일했다. 당시 한국행을 한 많은 친구들은 일당 5만원짜리 일자리를 수차 소개했지만 허창호는 번번히 거절했다. 그의 한국행이 돈을 벌려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것은 번연했다. 당시 그의 생활은 몹시 간고했다. 회사내 책상위에서 쪽잠을 자야 했고 자작음식으로 끼니마다 라면으로 대부분 에때워야 했다. 그러다보니 “무릉도원”과도 같은 서울의 야경이나 친구들과의 흥이 도도한 명승지 관광 등은 그와는 조금도 인연이 없었다. …… 서울에서의 3년생활도 어느덧 종지부를 찍을 때가 됐다. 1993년말의 어느 날 허창호를 제자로 삼았던 한국사장님은 자기가 쓰던 디자이너용 가위 네개와 옷 40여벌을 지을 수 있는 원단을 내놓으면서 허창호를 불렀다. “자네 열심히 잘 배웠어. 자네의 그 수준이면 중국의 그 어느 곳에 가도 밥벌이는 얼마든지 할 수 있을거야.” 이에 허창호는 감격했다. 보수없이 디자이너기술을 배워준 것도 고마웠는데 그렇게 자기가 아끼던 가위와 원단까지 선물로 내놓았으니 그 은정에 더욱 목이 메였다. 동산재기 한국에서 돌아온 허창호는 일정한 준비사업을 거친 후 본격적인 복장산업에 투신, 연길백화청사에 첫 서울토탈패션을 차릴 때가 1994년이었다. “내가 연길백화에 패션가게를 차릴 때만 해도 연길시안에는 복장업회사가 100여개나 됐다. 경쟁이 치열했다. 그 뒤 기성복브랜드가 연변에 쓸어들어오면서 그 경쟁은 더욱 더 심했다. 그러면서 자금력이 약한 회사는 도태되고 자금력이 강한 회사가 살아남는 시대도 도래했다. 이는 하나의 준엄한 도전이었다.” 자금력으로 볼 때 큰 회사에 비하면 허창호는 “고래무리속의 새우”에 불과했다. 허창호는 기술과 서비스로 큰 회사들과 경쟁을 걸었다. 옷 한벌을 지어도 그것이 손님이 갖고 온 원단질에 상관없이 멋진 신식으로 지었고 바느질도 꼼꼼히 절대 옷이 따지거나 삐뚤게 박힌 곳이 없게 했다. 그리고 손님들이 패선가게의 원단을 선택하면 될수록 질좋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지어드리군 했다. 한편 사회의 공익사업에도 한몫 담당하는 걸 잊지 않았다. 2002년부터 연변 주적십자회와 연변TV방송국에서 공동주최하는 “사랑으로 가는 길” 프로그램에 참여, 거기에 오르는 불쌍한 애들에게 무료로 옷을 해주군 했는데 그것이 지금까지 수백벌이 되며 가치로는 인민폐로 1여만위안에 달한다. 또한 연길시안의 “어머니협회”의 장애인여성들한테도 10여년전부터 옷을 무료로 해드리는 프로그램을 가동했으며 2008년에 들어서는 연변일보 창립 60주년을 맞으며 연변일보 종합신문 전체 직원들한테도 양복 한벌씩 해주었다. 올해는 허창호사장이 연길에 “서울토탈패션”을 세운지 21주년이 되는 해이다. 현재 국내의 복장업계는 여전히 경쟁이 치렬한 상황, 그럼 허창호사장의 “서울토탈패션”은 대체 무엇으로 승부를 거는가? “복장업계의 생존수단은 새로운 기술과 새로운 설비의 인입밖에 없다.” 그렇다. 허창호 사장의 자우명은 바로 항상 새로운 기술영지를 개척하는 것, 그래서 그는 해마다 2 - 3차의 한국행을 하며 그럴 때마다 그의 “서울토탈패션”은 새로운 기술교체를 하군 한다.
    • 사람들
    2014-08-29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