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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 투사, 양이원영 의원
    [동포투데이] 탈원전 운동가로 세상에 이름을 알린 양이원영 의원은 현재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 해양투기 저지 대책위원회 간사를 맡아 이 방면의 대표적인 국회의원으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양이 의원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저지를 위해 의정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지난해 8월부터이다. 양이 의원은 야당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류 저지 대응단을 조직하여 4월 6일 일본을 방문했다. 대응단은 “오염수 방출하면 우리 국민의 먹거리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을지 우려된다.”는 입장문을 발표했다. 이번 방문을 두고 여권에서는 ‘빈손 외교’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이에 양이원영은 “정부가 나서지 않으니 국회가 나선 것”이라고 받아쳤다. 실제로 한국 정부는 도쿄전력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계획을 발표한 이후 줄곧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왔다. 사회적으로 ‘정부가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를 승인 것 아니냐?’는 여론이 들끓자 한국 정부는 ‘지지도 찬성도 한 적이 없다.’고 변명했다. 한국 정부가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류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거나 찬성한 적은 없으나 침묵해 온 것은 사실이다. ‘침묵은 오염수 방류 공범’이라는 것이 양이 의원의 생각이다. 양이 의원을 비롯한 오염수 방류 저지 대응단은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에 분노하여 이번에는 머나먼 유럽 영국에 날아갔다. 런던 현지 시간으로 9월 16일(토) 오후 4시 더불어민주당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 대책총괄위원회 우원식 의원, 송기호 정책기획 본부장은 국제해사기구(IMO) 방문하여 현직 임기택 사무총장과 차기 사무총장으로 내정된 아르세뇨 도민게즈 국장을 1시간 40분 면담했다. 이 자리에서 대응단은 “미래세대와 해양 생태계를 위해 일본 정부가 허용한 후쿠시마 원전 해양 방사성 폐수 투기는 런던의정서 법률 체계에 따라 즉시 중단돼야 한다.”는 내용이 담긴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표의 서한을 전달하고 또 다음과 같은 우려 사항을 말했다. 먼저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가 최소 30년에서 앞으로 100년 이상 투기될 가능성이 높아 장기간 해양투기에 의한 누적 영향으로 먹이사슬을 통한 생태계 피해를 우려. 두 번째로 바다에 방사성 오염수를 투기하지 않는다는 대안 즉 육상에 보관하거나 수증기 증발 등 다양한 대안에 대해 검토하지 않고 가장 비용이 들지 않는 방법으로 바다를 오염시키는 결정을 한 것에 대한 우려. 마지막으로 원전사고로 인한 오염수 해양투기는 나쁜 선례가 되어 인류와 미래세대 모두의 자산인 바다를 위협하게 될 것이라는 우려. 대응단은 또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투기와 관련해 가장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부딪치는 한국과 일본이 협의가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국제해사기구가 노력해달라.”고 당부했다. 왜 양이 의원을 비롯한 오염수 해양 방류 대응단이 이렇듯 동분서주하면서 적극 나설까? 만약 한국 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해왔더라면 야권 의원들이 ‘설자리’는 별로 없을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양이 의원을 비롯한 야당 대응단의 동분서주는 한국 정부의 미온적인 태도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도쿄전력 1차 오염수 방류 3개월 전쯤 한국 정부는 사회여론의 압박이 거세지자 시찰단을 일본에 보냈다. 5월 21~26일 일정으로 일본을 방문한 시찰단은 단장인 유국희 원자력안전원장을 비롯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원전·방사선 전문가 19명, 한국해양과학기술원(KIOST) 해양환경 방사능 전문가 1명까지 총 21명으로 구성되었다. 정부 시찰단 인원수는 방대하나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해냈는지에 대해서 국민들이 의문을 표할 정도로 말 타고 꽃구경하다 온 것 아니냐는 시선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시찰단 명단조차 밝히지 않고 공명정대하지 못하고 어물어물 쉬쉬하면서 일본 방문을 진행했으니 국민들의 비판은 정부가 자초한 것이라는 지적이 지배적이다. 도쿄전력은 10월 5일부터 2차 방류를 시작한다는 계획을 지난 9월 28일에 발표했다. 한국 정부는 1차 방류 때와 같이 지난 4일 국무조정실을 통해 ‘한국원자력안전기술원(KINS) 소속 전문가를 후쿠시마 현지로 파견한다.’고 밝혔고 “우리 정부는 지난 1차 방류 때와 마찬가지로, 방류 관련 실시간 데이터와 도쿄전력이 시료 채취 및 분석 후 공개하는 정보 등을 철저히 모니터링한다.”고 말했을 뿐 방류 자체에 반대한다는 목소리는 여전히 내지 않고 있다. 한때 윤석열 대통령은 후쿠시마 원전 사고를 두고 “일본에서도 후쿠시마 원전이 폭발한 것은 아니다. 지진과 해일이 있어서 피해가 컸지만 원전 자체가 붕괴된 것은 아니다. 그러니까 방사능 유출은 기본적으로 안 됐다.”고 말했다.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대한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는 윤석열 대통령의 과거 발언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추측이 어쩌면 사실일지도 모를 일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는데 비해 한국 정부는 반대는 고사하고 야권과 일부 시민단체의 반대 목소리에 수산물 오염은 괴담이라는 프레임을 씌우고 대통령과 여당 대표를 비롯한 관료들이 수산시장을 방문하여 회를 먹는 쇼까지 벌이고 있다. 지금도 그렇거니와 앞으로도 윤석열 정부 임기 내에는 정부 차원의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해양 방류에 반대하는 입장은 없을 것이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윤석열 정부에 오염수 방류 반대를 기대하는 것은 어쩌면 호랑이와 가죽 흥정을 벌이는 것과 같이 황당한 짓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한국 전체가 손을 놓고 강 건너 불구경할 수는 없다. 양이 의원 같은 분들을 비롯해 시민사회가 적극 나서야 하고 중국과 러시아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긴밀한 협조와 공조가 매우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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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9
  • [단독 인터뷰] 강창일 전 주일대사 “일본은 하나를 준다고 똑같이 하나를 내주는 나라가 아니야”
    [동포투데이] 얼마 전 G7 정상회담이 마무리되었다. 개최국인 일본의 초대를 받아 한국도 참석했는데, 이를 두고 단절됐던 한일관계가 회복 및 정상화되었다는 견해가 있다. 하지만 한국과 일본 사이에 쌓여있는,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생각하면 한일관계를 마냥 낙관적으로만 볼 수는 없다. 2011년 발생한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생겨난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 약 130만 톤의 해양 방류와 일제강점기 강제 동원 피해자들에 대한 배상금을 일본 기업 없이 마련하겠다는 강제징용 배상 문제, 갈수록 도가 지나치는 독도 영유권 문제까지. 지리적으로 역사적으로, 한국인이라면 쉬이 넘어갈 수 없는 이슈가 산적해 있다. 이러한 해묵은 역사문제부터 최근 있었던 G7을 주제로 일본에 정통한 강창일 전 주일대사(현 동국대 석좌교수, 4선 국회의원과 한일의원연맹 회장 역임)와 일문일답을 진행하며,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한국이 취해야 할 태도와 한국에 미칠 영향에 대해 들어보았다.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검증, 피해국도 포함되어야 - 일본의 오염수 방류 문제, 어떻게 생각하나 오염수 방류는 환경뿐 아니라 인간의 생명과도 직결된 문제다. 그러므로 바다 환경 전문가, 세계보건기구(WHO), 국제해사기구(IMO), 그린피스 등 환경 전문가가 오염수 검증에 관여해야 한다. 그래야만 객관성이 담보된다. 그런데 국제원자력기구(IAEA)로만 검증한다? 게다가 한국에서는 시료 채취도 안 되는 시찰단을 보낸다? 결과에 대한 신뢰도 어려울 뿐더러 한국뿐만 아니라 중국, 대만, 동남아 등 많은 국가가 피해를 입을 걸로 예상되는 국제적인 문제인데, 그렇게 간단하게 접근해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 일본에서는 지속적으로 오염수가 인체에 해를 줄 수준은 아니라고 하던데 확신할 수 없는 것이다. 생명과 직결되는 문제는 확인 또 확인을 거쳐야 한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위험하지 않다는 신뢰 가능한 객관적 증거가 있어야 한다. 게다가 이 문제와 전혀 관계없는 미국, 캐나다에서 검증할 게 아니라 피해국의 전문가가 검증단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 일본은 IAEA 외에 특정 국가에 검증을 허용하지 않는데, 한국의 시찰을 수용한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시찰이야 누구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료 채취도 못 하는 시찰은 의미가 없다. 시찰이 아니라 ‘검증'을 해야 한다. 게다가 일본에서는 중요한 자료를 절대 내놓지 않아서 객관적인 사실 확인이 불가한 상황이다. - 이번 시찰단 구성, 어떻게 되는지? 정부 기구 사람들이 있다고는 하는데 누군지 구체적으로 명단 공개도 안 한다.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지 도저히 알 수가 없다. 여기서 지금 제일 문제인 건, 한국 정부가 일본의 오염수 방류를 기정사실화 한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방류를 전제로 하고 시찰단 파견을 한 것 같다. 이렇게 되면 결국 한국이 일본 오염수 방류 문제에 있어 들러리 선다는 이야기밖에 안 된다. - 그렇다면 이번 시찰, 신뢰할 만한 결과를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은데 기대하기 어렵다. 시찰 결과도 분명 큰 이상 없다고 결론지어질 것이 뻔하다. 시료 채취도 안 되는 시찰단이 다녀와서 발표하는 결과에 대해서 신뢰할 수 있겠나. - IAEA에서도 후쿠시마 오염수 처리 과정을 검증 중이다. 이 결과는 어떻게 예상하는지? 이 역시 마찬가지다. 문제없다고 할 것이다. 일본 정부 발표를 보면 결과는 나온 것 같다. ▶ 강제 징용 배상 문제, 멀티 트랙 접근법 필요 - 강제 동원 피해자에게 ‘제3자변제' 방식으로 배상하기로 했다. 이러한 행보를 어떻게 보나. 잘못된 행보라고 본다. 일본 정부를 동참시켜서, 일본 기업에 사과를 받아야 한다. 피해자들의 명예가 걸린 문제다. 그런데 제3자변제 방식을 통한 배상은 피해자들을 고려하지 않은 방식이다. 일본 가해 기업이 아닌, 제3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이 배상하는 방안인데 일본의 자발적 사과를 끌어내긴 커녕 우리 정부가 먼저 나서서 피해자들과 원만한 해결을 보겠다는 것이다. 이런 모양새는 말이 안 된다. -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이유가 무엇인가. 너무 성급한 결정이♘다. 한일관계 정상화도 좋지만 이런 역사 문제엔 절차와 과정이 중요하지 않나. 피해자 의견과 국민 여론을 수렴해 진행해야 하는데, 그런 과정이 없♘다. 그러니 여론이 좋지 않을 수밖에 없다. - 강제 징용 배상 해법에 피해자가 빠져선 안 된다. 해법 마련, 어떻게 해야 하나. 일본과 꾸준히, 계속해서 협상을 진행해야 한다. 공식적이든 비공식적이든 물밑 작업을 지속해 일본 기업이 동참하도록 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건 과거를 직시하고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과거, 현재, 미래는 다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없던 일로 치부하는 건 매국과 다를 게 없다. - 국익과 역사 문제,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면 한국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나. 몇십 년 동안 역사는 역사, 경제는 경제, 안보는 안보 이렇게 각각 멀티 트랙으로 접근했다. 잘 유지되고 있♘고 앞으로도 멀티트랙으로 진행되♘어야 했는데 갑자기 모두 일원화시키며 과거 역사를 없애버렸다. 이는 결국 역사를 팔아버린 집단이 되는 것과 다름없다. 한국 국민에겐 일본과의 관계에 있어 잠재된 어떤 정서가 있다. 물론 일본 여행도 잘 가고, 일본 문화도 좋아하지만, 과거사는 다른 문제다. 그러므로 경제는 경제대로 역사는 역사대로 멀티트랙으로 접근해야 한다. ▶ 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는 G7 정상회의 - 의장국인 일본의 초청을 받아 G7 정상회의에 참석하게 됐다. 한국이 일본의 초청을 받은 배경은 무엇인가. 한국도 G7 정상회의에 4번 참석한 이력이 있다. 그만큼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다. 그래서 당연히 초대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우리만 초대받은 게 아니라 호주, 인도, 인도네시아. 베트남, 코모로, 쿡 제도 등 엄청 많은 국가가 초대됐더라. 이번 정상회의 주인공은 일본의 기시다 총리와 우크라이나의 젤렌스키 대통령이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조연 그 어디쯤이었을 거다. - G7 정상회담에서 후쿠시마산 식재료가 제공됐다고 하던데. 일본에서도 후쿠시마산 농산물은 잘 안 팔린다. 아마 방사능 전부 체크해서 안전한 음식만 갖다 놨을 거다. 술은 증류수라 괜찮다고 하는 술과 안전한 음식 몇 개만 준비한 걸로 알고 있다. 후쿠시마산 물도 안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후쿠시마산 식재료가 정상회의 식탁에 올라 안전하다는 식으로 어필하고 있다. - 원폭 희생자에 대한 참배 일정도 있었다. 한일 정상 참배는 처음이라던데. 이건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통령이 가는 건 당연한 건데, 기시다 총리가 간 게 중요하다. 그게 큰 성과라고 생각한다. 아마 기시다 총리가 윤 대통령을 배려해서 원폭 희생자 참배 일정을 진행한 게 아닐까 싶다. 이 참배 일정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에 있는 원폭 피해자 14명이 히로시마로 방문하겠다는 의사를 정부에 전달했다. 히로시마 참배 일정 때 만날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런데 정부 쪽에서는 회신도 없고 가타부타 아무런 이야기도 없었다고 한다. 결국 히로시마로 향했던 한국 원폭 피해자들은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피해자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참배를 진행한 거였다면, 한국에서 온 원폭 피해자들도 만나고 이야기를 들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진정성을 보여줬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G7 정상회의 후, 여당에서는 ‘국격을 높였다' 야당에서는 ‘들러리 선 꼴밖에 안 된다'라고 의견이 갈리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나. 국가의 위상을 높인 건 없고, 한미일 회담을 아주 짧게 약식으로 진행했는데 정식으로 길게 진행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한다. - G7 정상회의 참석이 한국에게 어떤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하나. 딱히 변할 건 없어 보인다. 얻은 것과 손해 본 것 모두 없다. 다만 이번 회담을 통해 친미, 친일 구도가 형성되었다고 본다. - 올해 상반기에 나타난 중국무역적자, 친일본 행보와 관련이 있나. 안보 문제는 미국, 경제는 중국과 협력 관계를 다져왔다. 그런데 이번 회담과 일련의 사건을 통해 경제마저도 친미/친일이 된 것이다. 러시아와 중국을 배제함으로써 ‘신냉전체제의 구축이다’와 같은 비판도 있었다. 다행히 이번 정상회의 때 중국에 원한 살 발언은 안 했지만, 국가 이익이 걸린 경제 문제이므로 항상 신중해야 한다. - 이에 대한 주변국의 견해는 어떤가. 주변국의 견해에 앞서 중요한 건 All of nothing이다. 경제적으로 수많은 나라가 엮여 있다는 소리다. 그러므로 앞서 계속 말한 것처럼 경제는 경제대로, 안보는 안보대로, 성격에 따라 트랙을 나눠 멀티로 접근해야 한다. ▶ 독도 문제, 과잉 대응하지 않는 것이 답 - 일본이 독도를 ‘일본 영토’에서 ‘일본 고유영토’로 지칭하고 있다. 독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입장이 더욱 강경해지고 있는데,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독도 문제는 해결이 어렵다. 당장 할 수 있는 대처 방법은 독도 문제를 시끄럽게 다루지 않는 것이다. 일본이 원하는 게 바로 ‘분쟁'이기 때문이다. 일본은 독도 문제를 이슈화해서 세계에 알림으로써 유리한 쪽으로 상황을 끌고 나가려는 것이다. - 그렇다면 한국이 독도를 지키기 위한 영유권 주장은 어떻게 해야 하나. 지나치게 대응하지도, 예민하게 반응하지도 말아야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가 반응하길 원하고 있다. 그래서 계속 자극을 하는데, 독도 문제는 국제 분쟁으로 끌고 가면 안 된다. 독도문제가 이슈화되면 전 세계 사람들은 사실관계 확인을 떠나 ‘독도는 일본 땅인가?’라고 생각해버릴 수 있다. 그러니 독도 문제는 크게 반응하지 않는 게 좋다. - 독도 영유권에 대한 국제 사회의 인식은 어떠한가. 다행히 독도를 일본 땅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별로 없다. - 한국의 독도 영유권 강화를 위해 국가와 사회가 해야 할 일은.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잉 대응을 하지 않는 것. 무시가 답일 수도 있다. ▶ 한일관계, 큰 문제는 없을 것. 다만… - 통큰 양보를 하고도, 일본 측 태도 변화를 끌어내지 못했다는 평가가 있다. 왜 이런 문제가 발생한 것으로 보이나. 윤 정부가 일본을 몰라서 그렇다. 일본은 하나를 준다고 똑같이 하나를 주는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배 째라 버텼더니 이것들이 깨갱하는구나' 하면서 더 큰소리를 친다. 그러므로 일본과는 논쟁과 논의를 지속하며 문제를 풀어나가야 한다. 반대로 문제를 해결할 명분을 주는 것도 방법이다. - 한일 관계 전망에 대해 어떻게 보나. 우리의 요구를 관철하고, 일본의 입장도 헤아리는 식으로 가면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인 문제만 없으면 된다. 인적 교류는 이미 잘 이뤄지고 있고, 일본과는 기술 등 협력할 여지가 많다. 일본은 강압적으로 하지 않고, 한국도 비굴하게 굴지 않으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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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29
  • [인터뷰] 박동웅 구로구의장, “구민과 더불어 외국인 주민도 살기 좋은 구로 만들 것”
    [동포투데이 허훈 기자] 한국은 노동력 공백에 따른 이주노동자와 국제결혼에 의한 결혼이민자의 증가로 사실상 다문화 사회로 진입했다. 법무부 출입국·외국인정책 통계월보를 보면 장단기 체류 외국인은 2021년 6월 말 기준 1,981,035명이다. 그중 서울시 구로구에 체류하고 있는 25,316명 외국인 주민 중 18,190명이 중국동포이다. 기자는 지난 4일 구로구의회 7대 후반기 부의장으로 또한 3선 의원으로서 지역발전과 의정활동에 열정을 바치고 이번 제8대 의회에서도 후반기 의장으로 지역주민은 물론 외국인 주민 민원이 발생한 곳은 어디든지 달려가 함께 고민하고 해결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는 박동웅 의장을 만나 그동안 의정활동 그리고 앞으로의 중국동포 및 외국인 주민 관련 정책과 지원계획에 대해 들어 봤다. 다음은 박동웅 구로구의회 의장과의 인터뷰 내용이다. Q. 현재 시행 중에 있거나 계획 중인 중국동포 관련 사업은? A. 한국 국적을 가진 아이들은 보육료를 국가에서 지원을 해주는데 대한민국 국적이 아닌 중국동포 아이들은 어린이집을 다닐 때 보육료를 전액 자비로 부담을 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 안산에서는 아마 시행을 하고 있다고 들었는데 이제 구로구도 내년부터 보육료 20%가량 지원해주는 사업을 하려고 한다. 현재 한국에 있는 어린이집에 다니는 외국인 주민 자녀들을 조사해보니 약 천명 조금 넘는데 그 아이들에 대해 우선 보육료 20% 정도 지원해주고 차후에는 그냥 100% 지원하는 쪽으로 준비해 나갈 예정이다. 그래서 올해 최초로 이와 관련한 예산 편성을 준비하려고 한다. 한 해에 7억 정도 예산이 들어갈 것으로 예상된다. Q. 구민들이 반발할 것 같은데? A. 그런 분들도 있지만 우리끼리만 살 수 있는 시대는 지나갔다. 글로벌시대, 글로벌 시장에서 한국만으로 먹고사는 것이 아니고 대한민국에서 서울에서 구로만, 구로구 사람들만 뭉치는 것도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이곳에 체류하고 있는 중국동포분들도 다 같은 한민족이고 외국인이던 한국인이던 차별 없이 함께 사회에 흡수돼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본다. 주민들에게 잘 이해시키려고 노력할 것이다. Q. 지역주민과 중국동포 간 소통과 화합에 대한 모범 답안이 있다면? A. 가리봉을 중심으로 구로구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다. 구로구에는 다문화 정책과가 있는데 중국동포들뿐만 아니라 베트남이라든가 필리핀 일본 등 이주민 정책을 총괄하고 있다. 우리 동포들도 명예 통장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고 또 구로구에는 봉사단이 매우 많다. 이를테면 구로 4동 같은 경우는 다문화 봉사자들이 야간 순찰도 하고 있고 다문화 경노당도 만들었다. 그런 면에서는 구로구가 소통을 많이 하고 있는 편이다. 근래 산발적으로 좀 많이 하고 있는데 향후에는 체계적인 시스템 상에서 동포들과 구청 간에 소통이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Q. 현재 가장 시급한 현안과 해결책은? A. 현재 구로구에는 이주민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중에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분들이 중국동포들이다. 과거 코로나 이전에는 우리 동포들이 열심히 활동하는 모습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지금은 장사가 잘 안되는 등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그 변화에 대한 것은 우리가 추정할 수 있지만 정책은 정확한 수치를 갖고 하는 것이기에 다문화 정책과에서 우리 동포사회 실태 파악을 다시 해서 제도 적으로 뒷받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 . Q. 상호우호도시 연변조선족자치주와 문화교류 계획은? A. 한국의 수출 규모를 보면 중국과의 교역이 미국을 앞서 나가고 있다. 그리고 중국에는 우리 동포들이 많이 살고 계시고 또한 중국과 한국 사이에 문화적인 차이가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문화적인 이해를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연변과 교류(공무원 교류)를 했지만 사실 문화 교류라고 볼 수는 없는 것 같다. 그래서 향후에는 여러 중국 도시와 자매결연을 맺어서 서로 간 문화를 교류하고 우리 축제 때 해당 국가 도시의 전통적인 문화행사를 유치할 수 있도록 하고 또 거꾸로 중국에서도 마찬가지로 어떤 축제라든가 행사가 있을 때 우리 구로구에서도 문화예술단이 가서 공연을 할 수 있는 그런 교류도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Q. 임기 내 꼭 이루고 싶은 것은? A. 현재로서는 일단 코로나19 사태가 빨리 안정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대한민국 자체도 K-방역을 통해서 그냥 열심히 뛰고 있지만 우리 구로구에서도 구로구만의 어떤 방향 시스템을 잘 구축해 구로구가 코로나19에서 좀 더 안전한 도시가 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목표라 할 수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안정돼야 구로에서 사업하시는 분들도 안정적으로 사업을 할 수 있고 지역경제도 활성화 될 것이다. Q. 중국동포에 대한 이해정도는? A. 한 예로 아마 한국사람 중에서 가장 양꼬치와 고량주를 많이 먹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정말 좋아한다. 젊었을 때 사실 한국에서 투자 목적으로 중국에 들어가려고 했었는데 여러 가지 어떤 사정 때문에 결국 못 들어간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도시계획 전공이다 보니 연변은 물론 선양, 광저우, 칭다오, 상하이, 홍콩, 마카오 등 중국의 많은 도시들을 다녀봤다. 그래서 누구보다도 중국에 대한 이해도는 많다고 생각하고 중국 양꼬치를 중국동포보다도 내가 더 많이 먹는다고 감히 이렇게 얘기할 수 있다. Q. 중국동포에 한 말씀 부탁한다면? A. 한국에서 돈을 벌어서 고향으로 가는 것은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한국에서는 함께 어우러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대충 그냥 돈을 벌고 살다가 중국으로 가면 된다는 인식보다도 역시 우리 조상의 뿌리는 한국이기 때문에 한국이 잘 돼야 동포사회도 잘 될 수 있다는 생각과 같은 목표를 가지고 같은 한민족으로 역할을 한다면 지역주민들과 잘 화합할 수 있고 이제 동포들이 중국에 들어가서도 한민족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열심히 생활할 수 있다고 본다. 구로구의장으로서 향후 그 어떤 정책이나 개인적인 꿈도 있겠지만 중국 동포들이 구로구에 와서 잘 살고 여기에서 내가 보람을 찾을 수 있는 그런 도시가 구로구라는 생각을 가질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지원할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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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09
  • 中, 98세 “쿵푸 할머니” 온라인 돌풍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최근 한 지역 모임에서 무술을 시연하는 98세 중국 “쿵푸 할머니”의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44만 번 이상 조회되고 4,500개 이상의 좋아요가 쏟아지는 등 순식간에 히트를 치고 있다. “쿵푸 할머니”의 팬들은 “98세에도 걸을 수 있을까. 쿵푸가 장수의 관건일지도 모른다”는 메시지를 올렸다. 심지어 자오리젠 중국 외교부 대변인도 유튜브에 올린 동영상에 대해 "쿵푸 정신은 늙지 않는다"고 언급하며 주목했다. 본명이 장헥셴(張鶴仙)인 “쿵푸 할머니”는 2017년에 이미 명성을 얻었지만 거의 10년 동안 고향인 저장(浙江)성 닝하이(寧海)현 장컹(張坑) 마을을 떠나지 않았다. 이 영상이 유튜브에 퍼지자 조카딸은 “할머니는 이제 중국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유명하시다”고 말했다. 할머니의 키는 약 1.5미터이다. 그의 쿵푸 동작은 유창하고 걸음걸이는 꾸준하다. 할머니의 마을은 쿵푸와 오랜 관계를 맺어왔고 할머니는 5살 때 중국 남부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무술 스타일인 장복싱의 6대 계승자였던 아버지로부터 배우기 시작했다. 그는 “어릴 때는 매일 연습했다. 지금은 나이도 들고 힘도 예전보다 줄었지만 아직 원기 왕성하다”고 말했다. “쿵푸는 폭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보호하고 필요할 때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이다”라고 덧붙였다. 따뜻한 마음을 가진 평생 농부인 할머니는 이웃들과도 잘 지낸다. 막내아들인 펑은 “어머니는 항상 도울 준비가 되어 있다. 어머니는 마을에서 결혼을 앞둔 사람들을 돕고 바느질도 하고 요리도 한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3남 1녀를 두고 있으며 모두 닝하이현에서 근무하고 있다. 닝하이현은 마을에서 차로 약 40분 거리에 있다. 할머니는 남편이 사망한 2012년부터 혼자 살고 있다. 할머니의 삶은 평범하지만 잘 짜여져 있다. 할머니는 아침 5시에 일어나서 매일 세 끼의 요리를 하는데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해산물이다. 점심을 먹고 나서 가끔 친구들을 찾아가서 수다를 떨기도 한다. 오후에는 쿵푸 연습을 한다. 장컹 마을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고 할머니의 집은 산비탈에 있기 때문에 식료품을 사러 나가거나 친구를 만나러 갈 때 등산이 필요하다. 언덕을 오르면서 꾸준히 하는 운동이 할머니가 정력이 왕성한 원인일 수 있다. 펑은 “어머니에게 도시에서 함께 살기를 요청했지만 어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즐겼다”라고 말했다. 그것은 어쩌면 할머니를 자유롭고 편안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쿵푸 할머니”는 아버지의 장복싱 스타일을 주말과 휴일에 집에 오는 손주들에게 전수하고 있다. 최근 이웃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무술 수업을 개설했다는 소식을 접한 할머니는 자원해서 아이들을 지도하고 할 수 있는 모든 도움을 제공하고 있다. 펑은 어머니와 가족들은 “쿵푸 정신을 젊은 세대에게 물려주고 싶고 그것이 그들의 건강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 사람들
    2021-08-16
  • 중국에서 캉테로 불리는 조선족 축구선수 김경도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1992년 11월 18일, 김경도(진징다오·金敬道)는 길림성 연변조선족자치주 연길시에서 태어났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김경도도 매우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 김경도는 축구에 대해 잘 몰랐고 친구들과 어울리며 뛰어 노는 과정에서 축구에도 약간의 관심을 갖게 되었고 약간의 재능을 보였다. 연변은 축구의 전반적인 환경이 다른 곳과 다르다. 거의 모든 아이들이 방과 후 첫 오락으로 축구를 한다. 이러한 축구 환경에서 많은 우수한 축구인재들이 배출되었다. 김경도는 2003년 옌볜(延邊)의 쑹칭링(宋慶嶺) 축구학교에 입학해 본격적인 축구 전문 훈련을 시작했다. 진징다오의 부모는 아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한국으로 떠났으며 이러한 환경에서 김경도는 독립적이고 힘든 일을 잘 견디는 품성을 키웠다. 2008년 청소년대표팀에 뽑혀 첫 국제대회를 치른 김경도는 눈부신 활약으로 그해 U-20 대표팀에 발탁됐다. 2009년에는 U-20 대표팀 주장을 맡아 사상 두 번째로 국가대표팀 소수민족 주장 자리에 올랐다. U-20 대표팀 시절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있었다. 2009년 김경도는 시리아와의 경기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포지션에서 2골을 넣으며 팀의 다음 라운드 진출을 도왔다. 김경도는 경기전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선수는 이니에스타라고 밝혔다. 결과적으로 경기가 끝난 뒤 기자가 이니에스타와 연락해 상대방이 사인 유니폼을 선물한 것도 김경도를 오랫동안 기쁘게 했다고 한다. 2010년 김경도는 연변FC에 입단해 클럽 생활을 시작했다. 부모님도 곁에 안 계시고 이제 막 입단한 뒤라 주머니 사정이 여의치 않은 김경도는 늘 팀 동료들이 맛있게 먹는 것을 물끄러미 바라봐야 만 했다. 마침 외사촌형인 박성(퍄오청·樸成)이 있었기에 다행이었다. 동생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퍄오청은 이때로부터 김경도를 돌보기 시작했다. “내가 어렸을 때 부모님은 한국에 일하러 갔고 나는 연변FC에서 선수로 뛰었지만 돈을 많이 벌지 못했다. 박성은 오래 전부터 축구를 했다. 그는 돈을 괜찮게 벌었고 보너스도 받았다. 그때 나는 그의 집에 짐을 풀었다. 그는 나를 위해 많은 것을 사주었고 체육관에 갈 수 있도록 돈도 대주었다. 그리고 내가 U-20 대표팀에 합류했을 때 그는 다른 선수들이 좋은 휴대폰과 명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에게 그것을 다 사주었다. 나중에는 또 휴대폰과 아이패드까지 사주며 축구를 잘하라고 격려 했다” 이는 사촌형인 박성에 대한 김경도의 평가다. 오늘도 두 사람은 여전히 절친한 사이로, 중국 슈퍼리그에서 미담으로 전해지고 있다. 2011년 코스타리카와의 평가전에서 김경도는 벤치에서 나와 성인 남자 국가대표팀 데뷔를 알렸다. 이번 국가 대표팀 경험으로 김경도는 중국 슈퍼리그에서 쟁탈하는 인기 선수로 됐다. 2013년 이 쟁탈전에서 승리한 산둥 루넝(山東魯能)은 연봉 100만 위안, 이적료 800만 위안에 김경도를 영입했다. 하지만 루넝 합류 이후 김경도는 그렇다 할 기량을 보여주지 못했고, 궈안과의 첫 경기에서 비정상적인 플레이로 결국 팬들의 욕설이 쏟아졌다. 다행히 동료들이 그를 격려했고 그가 힘을 낼 수 있기를 바랐다. 그러나 익숙한 포지션이 아니다 보니 김경도의 플레이는 매우 어색했다. 김경도의 가장 좋은 포지션은 미드필더와 풀백이다. 하지만 그런 위치에서도 김경도는 팀과 감독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의 지칠 줄 모르는 달리기와 부상 스틸을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많은 칭찬을 받았고, 팬들은 점차 그를 받아들였다. 그해 그는 좋은 활약을 펼쳤고 '최우수 신인'상을 수상했다. 2016년, 마가트 감독은 김경도를 완전히 재탄생시켰다. 마가트는 유명한 "악마 감독"이다. 그는 선수들의 세부 사항에 대한 요구 사항이 매우 높았다. 그는 김경도가 수비형 미드필더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그를 풀백으로 변경 시켰다. 김경도는 당시 마가트 감독이 자신에 대한 요구사항이 높았다고 밝혔다. 그는 "내가 공을 빨리 잡아 다른 사람이 못 따라온다며 볼을 잡으면 상대 측면 수비수를 상대로 돌파하라고 했다. 처음에 나는 할 수 없다고 말했다. 나는 우싱한(吳興涵)이나 류빈빈(劉彬彬) 같은 빠른 스피드 돌파가 없었다. 나중에 하오준민(蒿俊閔)의 도움으로 자신감이 생겼다"고 말했다. 그해 시즌 김경도는 윙백 포지션에서 좋은 활약을 펼쳤고 루넝에서 가장 빛나는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은사 마가트 감독은 안타깝게도 팀의 부진한 경기력으로 인해 해고되었다. 김경도 역시 그의 축구 인생에서 가장 암울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ACL 8강 1차전 서울 방문경기를 앞두고 몸에 살코기 성분이 들어 있는 것으로 밝혀져 소변검사 양성 판정을 받아 60일 자격정지 징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고기는 거의 먹지 않고 음식에 신경을 썼던 김경도는 충격도 컸지만 선수 생활과 컨디션 유지에는 큰 힘이 됐다. 그 해 김경도는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을 맞았다. 2016년 11월 13일 김경도가 한국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왕융퍼(王永珀), 왕통(王彤), 송룡(宋龍) 등 동료들이 대거 참석해 축하하였으며 루넝도 공식 홈페지를 통해 결혼 축하와 함께 김경도 부부의 백년해로를 기원했다. 김경도의 감정 또한 매우 로맨틱하다. 그와 그의 아내는 서로를 수년간 알아왔다. 그들은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들은 학교 다닐 때 사귀지 않았지만 나중에 그들은 우연한 기회에 다시 만났고 서로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 함께하게 되었다. 2017년 김경도는 징계에서 풀려나 팀에 복귀했고 루넝은 리샤오펑(李霄鵬)감독을 영입했다. 리샤오펑이 부임한 뒤 팀은 파격적인 변신을 하지 않고 마가트 감독의 플레이 스타일을 이어갔다. 김경도 역시 익숙한 윙백 포지션을 유지했다. 이후 두 시즌 동안 김경도는 좋은 활약을 펼치며 타르델리 및 펠레와 매우 묵계적인 관계를 형성했으며 종종 도움을 주거나 득점하며 루넝의 측면에서 날카로운 킬러가 되었다.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2018시즌 김경도의 수치는 폭발적으로 늘었다. 시즌 29경기에 출전해 6골 6도움을 기록하며 경기당 평균 고강도 달리기, 스퍼트 횟수 1위, 경기당 평균 거리 2위, 가로채기 3위, 경기당 4위라는 맹활약으로 시즌 최고 인기 본토 선수상을 거머쥐었다. 이로써 김경도는 대표팀의 단골손님이 됐고 리피는 물론 가오훙보(高洪波), 리톄(李鐵) 등 본토 감독들에게도 없어서는 안 될 존재로 되었다. 다만 리피 시절에는 김경도에 대한 요해가 부족해 기술적인 특성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했고 김경도 역시 월드컵 예선경기에서 자신의 기량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리피 감독 후임으로 2021년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리톄 감독은 카타르 월드컵 2차예선 40강전 몇몇 경기에서 김경도의 활용에 신경을 썼다. 김경도는 움직임이 좋고 수비 면적이 넓으며 공격은 날카롭다. 현재 김경도는 대표팀 10번 역할을 톡톡히 해내며 자격을 갖춘 '프리 맨'이 됐다. 곧 카타르 월드컵 3차예선인 12강전이 시작된다. 12강전에서 절대 주전으로 나설 수밖에 없는 김경도는 계속 자신의 색깔을 살려 대표팀을 위해 몇 골을 더 넣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스포츠
    2021-07-28

실시간 사람들 기사

  • 조선족동포들과 동포신문에 바친 12년의 젊음
    [동포투데이] 서울 구로동의 7호선을 타고 남구로역에 내려 4번 출입구로 나오면 한자로 된 간판들이 두 집 건너 하나일 정도로 즐비하게 걸려 있다. 그중 ‘동포세계신문’ 한글 간판이 유난히 눈에 띈다. 2층으로 올라가면 약 40평의 K&C회관에 간소하게 차려진 편집실이 있다. 편집실에서 재한조선족사회 뿐만 아니라 중국조선족사회에서도 널리 알려진, 40대 초반의 한국인 김용필 편집국장이 기사작성에 여념이 없다. 매달 10일, 25일 격주로 정기 발행되는 <동포세계신문>은 ‘동포세계’라는 말 그대로 국내에 거주하는 중국동포들을 위한 기사를 다룬다. 국내에서 조선족동포를 대상으로 하는 신문은 많지만, <동포세계신문>은 다른 동포신문들과 달리 자체로 기사를 작성하는 신문으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역사 등 알찬 내용으로 독자들을 사로잡는다. 중국동포들이 가장 궁금해하거나 관심을 가질만한 내용의 기사를 시기적절하게 게재하여 동종 신문 가운데서 중국동포들이 가장 선호하는 신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구로동을 중심으로 중국동포 밀집지역인 건대입구, 가리봉동, 영등포구, 대림동, 수원 등 지역뿐만 아니라 공공기관 더 나아가서 전국적으로 무료 배포되며, 인터넷을 통해서도 신문지면보기를 할 수 있어 온라인 독자도 적지 않다.가리봉동, 그 잊을 수 없는 곳 김용필 편집국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동포세계신문이 창간된 지는 2주년이 되지만, 실제 제가 중국동포들을 위한 신문을 내겠다고 가리봉동에 첫발을 내디딘 지는 12년째입니다,”라고 말하며 당시를 떠올렸다. 2000년 말, 서울의 한 교회에서 부목사로 활동하던 목사가 조선족동포를 위한 정론지(신문)가 필요하다며 도움과 아울러 함께 참여해줄 것을 요청했을 때 김용필씨는 제의를 거절하지 못하고 틈틈이 신문기사 작성에 도움을 주기로 했다. 그로부터 그는 교회를 배경으로 조선족동포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렇게 2001년 초, “동북아신문”이 4기의 준비호를 내며 창간됐다. 신문이 나올 때마다 중국동포들이 교회를 더 많이 찾아왔고 신문은 불법체류 중인 조선족동포들의 희망이 되기 시작했다. 김용필씨가 조선족동포들을 위한 신문에 전적으로 투신하게 된 것은 2001년 하반기부터였다. 한국에 온 중국조선족동포 대부분이 불법체류자로서 언제 강제추방을 당할지 모르는 불안감을 안고 고국생활을 하고 있었고 특히, 한국에서 태어나 일제시대에 부모를 따라 만주로 가 한평생 고향 땅을 그려오다가 한중수교로 입국길이 열려 인생의 황혼길에 고국을 찾아온 동포 1세대들, 고국사회는 이들을 따듯하게 맞아주지 못했고 이들은 이러한 현실에 직면해 한(恨)을 안고 가리봉 쪽방에서 어렵게 생활하고 있었다.김용필씨는 가리봉동에서 중국동포들을 볼 때마다 안타깝고 가슴 아프고 한국인으로서 부끄러웠다. 처음 가리봉동을 돌며 동포들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하면 동포들은 김용필씨를 한국인이라며 외면했다. 그러나 차츰 동포들을 위한 신문기자라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동포들은 굳게 닫힌 마음의 문을 열었고 함께 독한 배갈(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때 김용필씨는 자신만의 행복과 보람을 느꼈다고 회고했다. 소통과 화합의 장을 만들기 위해 그러나 2003년 3월, <동북아신문>을 그만둘 수밖에 없게 됐다. 30대 초반 나이에 경제적으로 불투명한 일을 계속해 나간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또 교회 내에서 발행되는 신문이었기 때문에 목회자가 아닌 일반인으로서 한계도 느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는 동포신문 기자, 동포활동가의 길을 접고 새로운 길을 가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동포에 대한 애착심은 끊을 수가 없었다. 이때 1998년부터 월간지 기자로 활동해온 김용필씨를 지켜보아 오던 지인들은 <동북아신문>으로 이루지 못한 꿈을 새로운 신문을 발행해 이루어보라고 권유했다. 김용필씨는 서울 구로구 가리봉동에서 새 신문을 창간해 다시 시작하기로 마음먹고 2003년 8월, 중국인교회의 작은 방을 빌려 <가리봉중동포타운>이라는 한 장짜리 신문을 발행했다. 가리봉동을 선택한 것은 가리봉동은 당시 조선족동포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었고, 동포들의 중심지와 같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리봉동은 중국 동북 3성으로부터 온 동포들이 한국 지역민들과 어울려 살고 있으면서 동포들 간의 싸움도 잦아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김용필 씨는 가리봉동을 시작으로 지역민과 동포들이 화합하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지역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실제적인 동포운동이고 필수적인 활동이라고 생각했다. 또 가리봉동을 동북아의 축소판으로 간주, 민족통일의 실험마을이라는 의미를 부여해 지역민과 조선족동포들이 공존 공생하는 마을로 만들어가기로 했다. 그러한 의미에서 신문의 이름을 <중국동포타운>이라 정하고 고속 프린터를 구입해 A3 한 장짜리 신문을 매주 제작해 배포하기 시작했다. 당시 동포들에게 있어 그 한 장 짜리 신문은 희망을 주는 신문이었고 <중국동포타운신문>을 통해 가리봉 지역민과 상인들은 조선족동포들을 이해해 가기 시작했으며 이곳에서 지역상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모금한 돈으로 설명절, 추석명절 문화잔치가 열렸고 다양한 행사들이 진행되었다. 차츰 가리봉동 중심가에 ‘중국동포타운센터’를 설립하고 동포들을 위한 각종 상담과 체류지원 업무를 펼쳐나가기 시작했다. 방문취업제가 도입된 2007년 9월에는 ‘쉼터’도 설립해 운영했다. 김용필 편집국장의 30대 젊음은 거의 가리봉동 신문사 사무실에서 쪽잠을 자며 동포활동에 빠져 보냈다. 그가 그렇게 조선족동포활동에 열성을 다 할 수 있었던 것은 조선족동포들에 대한 그만의 희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가리봉동이라는 작은 지역에서 조선족동포들의 희망을 위해 그같이 몸부림을 쳤지만 결국 2005년 이후부터 재개발이라는 덫에 걸려들게 되었다. 지역민과 상인들은 재개발문제에 더 관심을 가졌고 조선족동포들도 제2의 고향인 가리봉동에 정(情)을 붙이지 못하고 떠나기 시작했다. 결국, 김용필씨는 2011년 7월, 가리봉동에서 나오게 되었으며 그로부터 개인적인 사유로 인해 <중국동포타운신문>에서마저 손을 떼게 되었다. 지금까지 달려온 그 이상의 노력으로 하지만 중국동포에 대한 사랑의 감정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그는 2011년 8월, <동포세계신문>을 창간하면서 편집국장으로 활동하게 된다. 금년에 2주년을 맞고 사무실이전까지 한 <동포세계신문> 김용필 편집국장은 신문의 취지와 앞으로의 사업에 대한 포부를 밝혔다. “본지는 독자와 함께 만드는 신문을 표방하고 독자 여러분들이 시민기자가 되어 글도 쓰고 동포들을 도와주며 열린 마음으로 독자와 함께 동고동락하는 신문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는 또 자신의 신조에 대해 밝혔다. “저는 이 땅에 정의와 진실이 이루어지길 소망하며 민족과 인간의 기본권을 지키기 위해 뛰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인과 중국동포에게는 같은 뿌리라는 민족공동체가 있으며 그 속에는 순수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2000년 초부터 중국동포의 어려움을 몸소 체험하면서 이들을 돕는 일에 나섰는데 결국 그것이 저 자신을 돕는 일이 되었습니다.” “특히 우리 신문은 조선족동포와 한국사회 소통의 장이 되려고 합니다. 지난 10년간 동포들과 함께 어울리면서 신뢰를 쌓아가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았습니다. 일반 한국시민이 동포들과 접하자면 어려움이 많을 것이고 마찬가지로 동포들도 한국인과 어울려 한국생활을 해나가는 것이 부담되고 힘들 때가 많을 겁니다.” “앞으로 좀 더 책임감을 갖고 성숙된 자세로 화해와 소통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데 매진하렵니다. 지금까지 달려온 그 이상의 노력으로…” 누가 시켜서가 아니다. 중국조선족동포들에 대한 사랑과 연민! 그것이 김용필 편집국장이 조선족동포들을 위한 일에 발 벗고 나서고, 소통과 화해의 문화와 사회분위기를 만들어 가는 일에 자신의 젊음을 다 바치는 이유다. 김용필 프로필 1994년 한국 중앙대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6년 6월 육군장교로 전역. 신문기자 진출을 위해 여의도의 한 신문지국에서 2년간 새벽신문을 돌리며 공부. 1997년 9월―1999년 8월, “신문고” 기자겸 환경운동가로 활동. 2009년 9월―2001년 4월, 시사잡지 “사상21세기” 편집부장으로 근무. 2000년 재한 중국동포에 관심을 갖고 “동북아신문” 기자로 활동. 2003년 8월―2011년 7월, “중국동포타운신문”을 창간하고 활동. 2011년 8월 “동포세계신문”을 창간하고 현재 편집국장으로 활동. 중국 중앙인민방송국(2008~2009년), KBS한민족라디오 방송 정기출연(2005.5~) 관련 뉴스: 지난 6월 1일 오픈한 동포세계 K&C회관은 단체들이 회의나 모임을 갖는데 장소를 제공해 주고 모임시 자체로 필요한 음식재료를 사갖고 와 직접 음식을 만들어 모임후 회식을 즐길수 있도록 편리를 제공해 준다. 그날 오픈식에 중국 베이징에서도 축하문을 보내왔다. 지난해 “동포세계신문”과 MOU(양해각서)를 체결하고 활발하게 교류활동을 해온 중국대외우호협회 복무중심에서 동포세계 K&C회관 오픈식을 축하해준 것이다. 동포세계 K&C는 열린 공간으로 향후 중국동포들을 중심으로 한중교류의 장, 만남의 장으로 만들어간다는 방침이다. 북카페를 운영하고 전시회 겸 특강, 설명회 장소로도 활용하며 동포단체들에도 장소를 제공해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도록 하고있다.
    • 사람들
    2013-10-24
  • 한 재한 노화교의 중국심
    한성호(韩晟昊) 프로필(简历): 1927년 8월 28일, 중국 길림성 장백현 출생 1948년 7월, 조선을 거쳐 한국에 정착 위만시기 길림사도대학 수업 한국 경희대학 한의과 수업 신동화한의원 원장 미국 캘리포니아 골든주립대학 식품영양학 명예박사 한화중국평화통일추진련합총회 회장 중국주한교민총회 총회장 한국에서 한성호라는 이름을 대면 아마 거의 모르는 사람이 없을것이다. 그것은 한성호가 리시진의 “본초강목“ 등 의학저서들을 참고로 현대인들속에서 성행하고있는 자연식료보건료법을 발견하여 저명한 한의로 한국에서 이름을 떨친것도 있지만 중한 수교의 물고를 터치운 전기적인물이기때문이다. 지난해 11월, 마가을도 막가는 어느날, 필자는 바로 한국 서울에서 중국주한교민총회 총회장 한성호를 만날 기회를 가졌다. 장소는 그의 사무실이였다. 그와 반나절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85세라는 년세와는 달리 그는 시종 젊음의 왕성한 정력을 자랑했다. 60여성상 한국에서의 그의 파란만장한 생활경력을 들으면서 필자는 나서 자란 고향과 조국에 대한 한성호의 깊은 사랑을 역역히 읽을수 있었다. 서울 강남의 붉은 집은 그의 중국심 서울 최고 부자동네인 강남의 한 거리에 가면 유달리 붉은 칠을 한 3층짜리 건물이 높은 건물빌딩사이에 당당하게 앉아있다. 붉은 칠로 유다른 느낌을 주는 이 붉은집 주인이 바로 재한 화교계의 수령인 한성호다. 집색갈을 두고 크게 두번 화제가 된적이 있었다. 한번은 한국친구들이 붉은색이 촌티가 나는데 좀 세련되고 현대맛이 나는 색갈로 바꾸라고 건의했다. 이에 한성호는 “나는 중국사람이요. 중국사람에게서 붉은색은 길한것을 뜻하오. 또 붉은색은 심장을 상징하는데 변함없는 중국에 대한 내 마음이요.“라고 말했다. 그후부터 친구들은 더 말리지 않았다. 다른 한번은 중한 수교이후 일부 소위 대만독립을 웨치는 세력들이 집색갈을 떠올리면서 한성호를 비난했다. “이건 〈빨갱이(공산당이나 홍군을 비하하는 말)〉색갈이다. 한성호는 〈빨갱이〉다.“ 이에 한성호는 떳떳하게 반격했다. “그렇다. 이 한성호는 〈빨갱이〉다. 나는 중국공산당을 옹호하는 〈빨갱이〉다. 대만독립을 반대하고 조국통일을 주장하는 〈빨갱이〉다.“ 이 두번의 말썽이 있은 다음부터 한성호더러 층집 색갈을 바꾸라고 하는 사람이 더는 없었으며 한성호의 붉은 중국심은 붉은집과 더불어 한국에 더 널리 알려졌다. 불의와 사악에 맞서 싸우다 한성호는 언제 어디서나 바른 말을 하고 불의와 사악에 타협을 모르는 초인간적인 투사이다. 때문에 조상을 팔아먹는 불효, 민족을 분렬시키는 불효, 인류에 피해를 주는 불효에 대해서는 한없이 증오하고 무자비하게 배격했다. 1948년 7월, 한성호가 한국에 갓 발을 들여놓았을 때 중국 대만“대사관“관할하에 있는 한국 화교사회는 엉망진창이였다. 곳곳마다 기생집, 도박장, 아편관이였고 무리싸움이 끊임없었다. 화교자치구역의 문서조장을 맡은지 얼마 안된 한성호는 이런 루추한 꼬락서니를 보고 너무 화가 치밀었다. 이야말로 중국사람의 큰 망신이였다. 한창 혈기왕성한 그는 화교사회의 추악상을 바로잡기로 작심했다. 하여 그는 “화교기풍바로잡기위원회“를 설립하고 자기가 부회장 겸 총간사를 맡았다.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한 화교사회에서는 아편과 도박과 기생을 몰아내는 “대혁명“이 일어났다. 기실 한성호는 아편쟁이나 기생집 업주들과 원쑤진 일은 종래로 없었다. 그는 다만 티없이 맑고 끓어넘치는 정의감 그 하나로 화교사회의 추악한 현상을 바로잡고 이 땅에서 중국사람들더러 사람답게 살도록 해야 한다는 그 주장뿐이였다. 대통령 밀사로 중한 수교 물고 터치워 1988년 3월 1일, 한성호는 갓 취임한 당시 한국 대통령 노태우의 초청을 받고 청와대 대통령관저로 갔다. 노태우는 자기의 뜻을 밝혔다. 세계에서의 중국의 영향은 날따라 커지고있다. 한국은 비교적 발달한 나라이지만 국내자원이 결핍하기에 장기적으로 발전하자면 반드시 국제시장을 개척해야 한다. 중국은 한창 발전하고있는 거대한 국제시장이다. 경제발전의 각도에서 보면 속히 중국과 우호관계를 맺고 경제합작을 강화해야 한다. 한성호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중한 양국이 서로 거래하지 않고 우호적이 아닌 국면은 반드시 개변되여야 합니다.““양국의 우호관계를 맺는 일을 한선생님께서 맡아주시길 바랍니다.“ 노태우의 뜻에 따라 한성호는 대통령의 밀사로 그해 4월에 산동에 가서 당시 산동성당위 부서기이며 성장이였던 강춘운(그후 중국 국무원 부총리로 발탁)을 만나 중국 중앙정부의 비준을 얻은 상황에서 쌍방이 한국과 산동을 기지로 중한 양국의 경제교류를 시작하기로 합의를 보았다. 1988년 6월 16일과 8월 25일, 한성호의 조률하에 40년간 등지고 살아온 중국인과 한국인이 선후로 산동과 서울에서 조심스럽고도 우호적인 태도로 경제교류담판석에 마주앉았다. 겉보기엔 한 나라와 한개 성의 교류인듯했으나 실상은 중한 쌍방의 경제무역 교류와 합작이 정식으로 시작되였음을 알리는 신호였다. 이것으로 중한 수교의 토대가 닦아졌다. 1992년 8월 24일, 중국과 한국은 동시에 외교성명을 발표하고 정식으로 수교를 달성했다. 중한 수교로 한국주재 중국 대만“대사관“은 대표부로 내려앉고 중국대사관으로부터 밀려나갔다. 중국 외교관들이 대사관에 입주하는 날, 한폭의 붉디붉은 오성붉은기가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의 주악속에서 서울의 맑고 푸른 하늘로 서서히 솟아올랐다. 그때 한성호의 두눈에서는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얼마나 오래동안 갈망해오던 이날이였던가! 살아서는 중국인이 되고 죽어서는 중국혼이 되리라 1993년 2월 19일, 한국정부는 중한 수교 추진 및 경제무역발전, 한의학연구에 특수한 기여를 한 한성호에게 한국국민훈장을 수여했다. 국민훈장은 한국의 최고영예이다. 한성호는 한국 건국 40여년래 국민훈장을 수여받은 유일한 외국인이였다. 한국의 법률에는 한국국민이 국민훈장을 수여받으면 30여종의 대우를 받을수 있지만 외국인으로서 한국국적에 가입하지 않으면 국민훈장을 받은후의 각종 대우는 자연 포기된다고 규정되여있다. 하여 많은 친구들이 그더러 한국국적에 가입하라고 극구 권고했지만 한성호는 한사코 사절했다. 그는 다만 중국인의 존엄과 중한 양국의 우호만을 소중히 여겼을뿐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살아서는 중국인으로 살고 죽어서는 중국혼이 되리라.“ 중국은 강대해져야만 한다 2005년 10월의 어느날, 한성호는 북경대학 광화관리학원의 초청을 받았다. 강연할 때 한 대학생이 지금 어떤 나라들에서는 “중국위협론“을 꾸미고있는데 여기에 대해 어떻게 보느냐고 질문했다. “그들이 〈중국위협론〉을 운운하는것은 중국이 아직도 강대하지 못하다는것을 증명할따름입니다. 앞으로 중국이 진정 강대해진 다음에는 그들이 “중국위협“이란 말은 입밖에 내지도 못할것입니다. 때문에 지금은 빈 구호를 웨칠 때가 아니라 각자 모두 자기의 일을 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참다운 애국행위입니다.“ 강연이 끝나자 북경대학에서는 한성호를 MBA연합회 자문고문으로 초빙했다. 백여명의 대학생들이 삽시에 애국화교 한성호를 에워싸고 저마다 싸인을 기다렸다. 그날따라 북경의 밤하늘은 유난히도 눈부셨다. 한성호의 웃음 띤 얼굴은 광채로 빛났고 마음은 희망으로 한껏 부풀어올랐다. 이같이 한성호는 60여년 이국생활에서 아무런 가식도 없이 중국인의 기개와 양심을 굳게 지키면서 떳떳이 살아왔다. 오늘도 한성호는 조국의 평화와 부강을 위해, 중한 교류와 합작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있다. /길림신문 홍길남 전춘봉 김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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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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