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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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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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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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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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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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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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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글 쓰기에 집착하는 이유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은 오늘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그 중에서 경험을 쌓고 그 과정을 총결하고 보귀한 재산을 글로써 전함으로써 살기 편하고 과학이 발전하고 문명한 사회를 건설하고 있다. 아름다운 글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수하여 정신세계를 촉진하게 하고 예리한 필치로 사회의 현상을 비판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글은 어지러운 기풍을 바로잡고 새길로 들어서게 한다. 필자의 소녀 시절은 중국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그렇듯 하고픈 공부를 일짜가 된서리를 맞았고 그한을 달래려고 자기를 찾아 헤매였고 나이 들어 가정을 이룩한 후에는 힘들고 고된 농사일에 지친 마음과 단조로운 시골 생활에 문화 생활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짧은 글이나마 마음의 빈 구석을 달래보려 썼었고 그후 <연변일보>통신원이 된 후로는 사회에 저그마한 기여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를 고무하면서 글을 쓰느라 애썼다. 한중 간의 교류도 활발하고 저도 2008년도에 무연고 방문 취업의 수혜자로 입국하여 처음에 한국 식당에서 일했다. 처음 주방에서 하는 일이라 서툴고 말도 잘 알아 듣지 못하여 사장님이 저에게 <아줌마. 초등 교육이나 받았어?>하고 한마디 말이 그때는 억울하고 분하였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분발하도록 노력하는 계기가 되였고 나에게 사고의 기회를 준 사장님이 고맙게 생각한다 글 쓰기는 힘 들때엔 힘의 원천이 되고 마음이 산란할 때에는 글로써 마음의 실 타래를 풀어 나가며 자기의 생각을 글로 적어 가노라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생각한 것을 많은 분들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 하며 기쁜 마음으로 오늘도 힘 있게 적어 내려간다. 글 쓰기는 나의 애호고 나의 천직이고 나이와 무관한 평생 직업이고 글을 쓰느라면 뇌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있어 좋은 일거리다. 이런 직업을 애호하지 않을 그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오늘도 소중한 하루로 맡은 바 일을 끝내고 주룩주룩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글로써 하루를 맺는다. 즐거운 여가 생활은 사람들에게 활력소를 주입하여 이 세상이 아름답기만 하다. 감천 2013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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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3-07-15
  • 내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3 )
     나는 나의 이번 결정이 어떠한 후과를 초래할런지 잘 알고 있다. 최악의 경우 내가 감수 해야 할 그 부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인가는 상상만 해도 끔직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을 선택한것은 그가 내 인생의 소중한것들을 전부 걸고서라도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아직도 유교적륜리도덕이 두눈을 새파랗게 뜨고 살아 있는 현 시대에 내가 일명 사랑이라고 들먹이는 이 불륜이 사회적으로 비난과 조롱을 받기는 쉽상이다. 그 누군가가 <바람난 주제에 어쩜 저렇게 뻔뻔스러울까>라고 말을 한다해도 나는 단지 내 감정에 충실하고 싶을 뿐이다. 휴대폰이 울렸다. 그 사람이였다. <잘 생각했어~ 정말 너무 고마워! 사랑한다~>흥분하다 못해 떨리기까지 하는 그의 목소리가 지척에서 들려오는듯 싶었다. 소뿔은 단김에 빼랬다고 틈만 나면 벼룩시장이며 인터넷을 뒤지면서 방을 구하기 시작했다. 사장님께 사람 구하시라고 말씀 드렸더니 요번달부터 월급을 올려주려고 했는데 그냥 하라고 사정사정하시는것이였다. 그것도 그럴것이 야간근무 하려는 사람이 별로 없었던것이다. 언니한테도 방을 얻어 나가겠다고 말했더니 펄쩍 뛰는것이였다. 여자 혼자 몸으로 어쩌냐구… 부모님도 소식을 전해들으시고 극구 말렸다. 그러나 나의 고집을 누구도 꺾을수 없었다. 다른것은 제쳐놓고라도 무엇보다도 이미 그 사람한테 약속을 했고 이미 물은 엎질러졌으니 되돌이킬수 없었다. 며칠 뒤 그의 직장에서 멀지 않은 경기도 모시에서 보증금 50만 월세 17만짜리 방 하나를 얻었다. 나는 식당일을 아무데서나 찾아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그는 연장근무할 때가 많기때문에 그렇게 결정했다. 회사에서 연장근무를 하지 않으면 돈을 벌수 없었다. 3층짜리 단독주택이였는데 맨 윗층에서 주인량주가 살고 계셨고 1, 2층은 일부러 세를 놓기 위해 기숙사식으로 지은것 같았다. 1층에 있는 방이 좀 저렴하긴 했지만 나는 굳이 햇볕이 잘 드는 2층방을 고집했다. 총 10평방메터 되나마나한 다락이 달린 작은 방이 였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서면 주방겸 샤워실이였는데 한켠에 일회용부탄가스가 놓여져 있었고 그 위로 널판으로 그릇같은것 올려놓을수 있도록 다락을 만들어놓은것이 보였다. 방은 비좁게 세사람까지는 누울 수 있을것 같았고 누우면 발끝이 닿을만한 너비였다. 화장실이 밖에 있어서 좀 불편할것 같았다. 방이 비록 작긴 했지만 주인할머니가 깨끗하게 도배를 해서 그런지 그냥 아담하다는 그 자체였다. 주인할머니는 물건 많지 않으면 부부가 살기에는 괜찮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그러면서 어느 중국부부도 이 방에서 돈 많이 벌고 나갔다고 말하는걸 잊지 않았다. 이사하는 날 언니가 몇가지 생활용품들을 트렁크에 챙겨서 넣어주고 지하철역까지 배웅을 나왔다. 쉬는 날이 아니라서 같이 와주지 못하는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면서 언니는 언제라도 괜찮으니까 혼자서 힘들면 다시 돌아오라고 당부하는걸 잊지 않았다. 언니가 안쓰러워 하거나 말거나 나는 마냥 신나기만 하는걸 주체할수 없었다. 다행이도 원래 살던 부부가 버리고 간 물건이 있어서 쓸만한것들을 골라다가 깨끗이 닦아서 얹었더니 제법 그럴듯 하였다. 우리 같은 외국인들은 한국에 와서 살림을 차리고 살다가도 귀국할 때는 다 버리고 가야 하는게 현실이기때문에 나같은 사람들이 그 덕을 보는게 아닌가 싶다. 길 건너에 있는 슈퍼에서 쌀이랑 야채 소금 간장같은것을 사왔다. 이불은 언니네 집에서 갖고 왔고 이제 그 사람이 퇴근하면 시장에서 베개랑 슬리퍼랑 당장 필요한 물건만 사기로 했다. 고작 방안 정리라고 해봤자 머 별거 없지만 그래도 이것저것 주어다가 놓은 덕분에 제법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듯 싶었다. 이렇게 나와 그 사람의 동거생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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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3-06-17
  • [연재] 내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2 )
    살다보면 사랑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수두룩하게 생겨날것인데 과연 우리 두 사람이 그런 난제들을 잘 풀어갈수 있을지도 고민이였다. 사랑도 사랑이겠지만 필경은 인생의 끝까지 갈수없는 사이인지라 살면서 나타나는 어려운 고비들을 재치있게 넘길수 있을까. 사랑은 랑만적이지만 현실은 랭정한 것이니깐. 첫번의 만남은 다음의 만남을 위한 시작이라고 하겠다. 어쨋든 그번의 만남이 있은 후로 그는 나한테 더욱더 살뜰하게 대해주었다. 핸드폰메세지는 전화통에 불이 달릴 지경으로 오갔다. 그는 자기의 일상을 시시콜콜 어느 한가지라도 빠뜨릴세라 나한테 문자로 보내주었다… 첫번의 만남은 다음의 만남을 위한 시작이라고 하겠다. 어쨋든 그번의 만남이 있은 후로 그는 나한테 더욱더 살뜰하게 대해주었다. 핸드폰메세지는 전화통에 불이 달릴 지경으로 오갔다. 그는 자기의 일상을 시시콜콜 어느 한가지라도 빠뜨릴세라 나한테 문자로 보내주었다… 오늘은 무엇때문에 부장님께 혼났다는지, 퇴근길에 사과 네알을 샀는데 2000원이나 하더라는지, 월급이 나왔는데 다음에 만날때 맛잇는거 사주겠다는지 하는등 문자메세지를 하다가 그래도 성차지 않으면 아예 전화를 걸어서 하고 싶은 말을 다 해야 시름을 놓았다. 그는 일요일을 격주로 쉬고 있었는데 쉬는 날이면 왕복 세시간씩 지하철을 타면서 나를 만나러 다녔다. 그러던 어느날 그가 <나… 너랑 같이 있고 싶다!>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나는 뜬금없는 그의 말에 말끄러미 쳐다보면서 <우리 지금 같이 잇잼까?>라고 했다. 그는 자기의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는 내가 어이없다는듯이 피씩 웃으면서 말했다. <아니, 이렇게 말고 너랑 같이 밥도 먹고 잠도 자고 뭐든지 너랑 함께 하고 싶단 말이다.> 나는 뜻밖의 그의 제안에 뭐라고 딱히 해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낑낑거렸다. <어…떻게 그렇게 함까? 누가 알게 되면 큰일 남다.> 그는 내 손을 꼬오옥 잡으면서 <어차피 너도 언니네 집에 쭈우욱 눌러있을수는 없는거 잖니? 갑작스럽겠지만 긍정적인 판단을 내려줬으면 좋겠어 … 부부의 연을 못 맺는다해도 한국에 있는 동안만이라도 너한테 잘해주고 싶고 후회없이 살아보고 싶어…> 라고 말하는것이였다. 너무도 솔직하고 절실한 고백에 잠시나마 이 남자라면 내 인생에 다시 한번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솔찍히 언니네랑 같이 한집에 산다는게 불편한점이 한두가지가 아니였다. 다른건 다 제쳐놓고라도 형부가 현장 쉬는 날이면 야근을 하고 낮잠을 자는 나때문에 낮이면 늘 친구들하고 어울리면서 술만 마셨다. 이것때문에 언니랑 형부가 다툰적도 있었다. 그리고 야근이라는것이 대낮에는 아무리 잠을 잔다고 해도 밤처럼 깊은 잠을 잘수가 없어서 지칠대로 지친 내 다크써클은 아닌게 아니라 무릎까지 내려오게 생겼다. 그래서 언니네 집에서 몇개월간 얹혀 살면서 경제적으로 여유도 좀 생겼던지라 사실은 나도 방을 얻어서 나갈 생각은 있었지만 남자랑은 절대 아니였다. 남자랑의 동거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였다. 그맘때쯤 연길에서 가깝게 지내던 언니가 자기랑 같이 지냈으면 하고 전화가 왔길래 그럴까 아니면 고시원으로 갈까 하고 고민하고 있던중이였다. 혼자서 세방을 얻기보다 누군가랑 같이 있으면 다소 불편하긴 하겠지만 서로 의지가 되고 지출은 많이 줄일수 있을것 같았다. 나의 이런 생각을 그한테 말했더니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한식경이나 아무 말도 없었다.한참이나 애꿎은 담배연기만 내뿜던 그가 꾹 닫았던 입을 열었다.<비록 우리가 가깝게 만난 시간은 몇개월 안되지만 내 마음속엔 이미 니가 꽉 들어앉아서 누가 비집고 들어올수 없게 되였다. 근데 넌 아닌가보구나… 섭섭하다. 하지만 어쩌겠니? 니 생각이 그렇다면 나도 어쩔수 없는거지. 그동안 내가 너한테 그만한 믿음을 주지 못한걸…> 그의 서운함이 가득 담긴 말을 들으면서 <아! 내가 너무 했나?>하는 자책감만 들기만 할뿐 다른 생각은 할수가 없었다. <니가 그 언니랑 같이 살게 되면 앞으로 너를 만날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는 너랑 있으면 더없이 편하고 좋아. 나 진짜 너를 너무 사랑해...자는 시간 빼고 단 일초라도 니 생각 안해본적이 없어.다시 한번 잘 생각해주면 안되겠니?> 이렇게 말하는 그의 눈빛이 간절하다못해서 거의 애원에 가까웠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이 남자가 이렇듯 간절하게 날 원하는데 나는어떡해야하지?>를 수없이 되뇌이면서 도저히 갈피를 종잡을수 없어서 그냥 고개만 숙이고 손톱눈만 뜯고 앉아있었다. 나는 A형이라서 그런지 가끔은 이렇게 우유부단 할때가 있었다 그날 그는 나한테서 아무 대답도 듣지 못한채 여름날 정오의 시든 화초마냥 추우욱 처져서 돌아갔다. 량쪽어깨가 축 처져서 지하철 플랫트홈으로 들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는 나도 마음도 편치가 않았다. 련며칠 나는 잠을 설쳐가면서 고민을 하고 또 했다. 두 사람이 만나서 좋아하고 서로 사랑하고 좋아하는건 잠시적인것이다 라고 개인적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었다. 애초의 시작에는 사랑때문에 만났다하지만 살다보면 사랑보다 끈끈한건 정이다. 나중에는 그 정때문에 울고 불고 하는것이 아니겠는가! 살다보면 사랑보다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수두룩하게 생겨날것인데 과연 우리 두 사람이 그런 난제들을 잘 풀어갈수 있을지도 고민이였다. 사랑도 사랑이겠지만 필경은 인생의 끝까지 갈수없는 사이인지라 살면서 나타나는 어려운 고비들을 재치있게 넘길수 있을까. 사랑은 랑만적이지만 현실은 랭정한것이니깐. 그때쯤 그도 한국에 온지 얼마되지 않았던지라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중이였다. 짧은 경력이였지만 이혼사가 있었고 년로하신 어머님이 한국에서 간병인으로 일하고 계셨고 연길에 있는 막내 남동생네 애기 그 집안의 유일한 후손에게 다달이 우유도 보내줘야 했고(그때쯤 중국의 우유에서 멜라민논란이 일고 있었음) 한국에 온지 10년이 넘도록 도박에 빠져서 땡전한푼 없는데다가 기계사고로 손을 다쳐서 놀고 있는 작은 동생의 생활비와 집세도 부담해야 하는 그런 처지였다. 한마디로 말해서 아들노릇 형님노릇하느라 등허리가 휘여질 지경이였다. 그의 이 모든 상황이 나의 측은 지심 또 모성애비슷한 그 무엇을 자극하여 그를 더욱더 사랑하게 했을 는지도 모른다. 매일 아침 주린 배를 안고 출근하는 그를 위해서 따뜻한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고 싶어지고 양말 한짝이라도 내 손으로 손수 빨아주고 싶었다. 며칠동안 참기름 쥐여짜듯 고민고민을 하다가 그한테 문자를 날렸다. <나 매일 해뜨는 아침을 자기랑 함께 맞이하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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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3-06-17
  • [연재]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1 )
    그는 불륜의 상대이지만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점점 삶의 의욕이 생긴다. 이유는 나에게 있어서 단 한 명의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내 님과 함께 했던 날들 ( 1 ) 언제부터 쓰려고 했던 아니, 써보고 싶었던 나의 한국생활이였다. 몇번이나 망설이다가 인제서야 결정을 하게 된것은 다름 아닌 내가 쓰고저 했던 것들이 돈을 많이 벌어서 성공한 성공사가 아니라 뭇사람들의 손가락질과 비난을 받을수 있는 불륜사였기때문이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내가 여직껏 살아오면서 처음으로 사랑했던 사람이였고 힘들고 고되였던 어려움을 함께 나누었던 사람이기때문에 나는 그 어떤 것이라도 받아들일 각오를 하고 이 글을 쓴다. 처음에 그 사람을 알게 된것은 우연이라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의 만남은 필연이 아니였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였다. 우리 두사람은 너무 우연하게 인터넷을 통하여 알게 되였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 사람도 나도 첫 방문취업제시험에 참가했고, 장춘으로 방취제시험 치러 갔을때 같은 호텔에 들었었고, 같은 날 같은 비행기를 타고 한국에 도착했었다. 내가 한국에 행장을 푼 곳은 언니네 부부가 살고 있었던 단칸 지하방이였다. 부모님도 한국에 계셨지만 아버지는 현장근처의 고시원에 계셨고 엄마는 가정집에서 일하고 계셨다. 그러니 내가 갈만한곳이 언니네 집밖에 없었다. 나는 언니네 부부와 같은 방을 써야 했기때문에 야간일을 찾았다. 마침 동네의 감자탕집에서 홀서빙을 구한다고 써붙인것을 보고 면접을 봤더니 이튿날부터 출근 하라고 했다. 야간일은 취직이 쉽게 되는것 같았다. 많은 동포분들이 한국에 금방 와서 겪었던것처럼 나도 고장의 낯설음에, 일터에서 받는 스트레스에 그리고 고향에 두고 온 어린 딸애에 대한 그리움과 미안함에 훌쩍거렸던적이 한두번이 아니였다. 그럴 때마다 그가 보내오는 핸드폰 문자메세지에서 용기를 얻고 눈물을 쓰윽 닦으면서 일을 하군 하였다. 어느날, 잠에서 깨여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그 사람이였다. 웬만해선 전화를 하지 않는 사람인데 웬일일까 하는 의혹을 품은채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나요, 나 취직했소. 자동차부품회사인데 조건이 좋소. 퇴직금도 있고 4대보험도 해준다오.> 흥분에 들뜬 그의 목소리가 그대로 전달되여 오는것 같았다.<어머나, 진짜 잘 댔슴다. 축하함다!><양, 고맙소. 면접통과됐다고 전화받자마자 제일먼저 제한테 전화하고 싶은걸 꾹 참았소. 야간하고 자고 있는 저를 깨울까바… 헤헤>그 남자의 솔직하고 소박한 고백을 듣는 순간 나의 가슴속엔 이름 못할 그 무엇이 뭉클해왔다. 나도 누구에겐가 그런 소중한 존재라는 생각에 마음 한구석이 뿌듯하다 라고 해야 하는지 말로 표현할수 없는 그런 위안감이 들면서 우리가 무척이나 가까운 사이인것처럼 느껴졌다.시간이 하루 이틀 지나면서 하루에도 수십통씩 왔다갔다 하는 문자메세지를 통해 우리 두 사람사이는 더없이 가까워지기 시작했고 서로에 대해 하나둘씩 더 많은 것들을 알게 되였다. 나도 내 처지에 걸맞지 않은 뒤늦은 사랑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한편 내가 이러면 안돼… 안돼하면서도 사랑의 유혹을 물리치려 하면 할수록 쇠붙이가 자석에 끌려가듯 보이지 않는 끈끈한 그 힘을 도저히 당해낼수가 없었다. 어느날 만나기로 약속을 잡았다. 둘다 한국은 낯설어서 장소를 잡지 못하고 있다가 우리 언니네집에서 만나기로 하고 그 사람이 쉬는 날 언니네 집으로 왔다. 그렇듯 가까워진것 같았지만 정작 만나니 좀 어색했다. 내가 아래목에 깔고있던 담요를 들면서 추운데 따뜻하게 몸 좀 덥히라고 했다. 그는 쑥스러운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내가 시키는대로 나를 마주 향해 앉았다. 숨막히는듯한 작은 공간에서 단둘이 있으니 내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고 쿵쿵하는 그의 심장박동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가 살살 내 발을 만지작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떨리는 목소리로 <키스해도 돼?>라고 내 귀가에 대고 속삭였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난생처음으로 알게 된 달콤한 키스의 황홀함에 취해서 나는 그냥 그가 하는 대로 내 몸을 맡겨버렸다. 폭풍우만 같았던 한차례의 정사가 끝나고 그는 나의 곁에 벌렁 누워 내 머리밑으로 팔을 넣어 나를 끌어안았다. 나도 모르게 주르륵 하고 한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내가 사랑하는 남자와의 섹스여서 그런지 아니면 내가 불륜을 저지른데 대한 후회의 눈물인지 나도 알수가 없었다. 사람은 때론 심정이 착잡할때도 눈물이 흐르는가보다. 뜨끈한 액체의 흐름을 느끼고 의아한듯 <왜??>하고 묻는다. <후회하니?> <아님다. 그런게 아님다.> 그는 더욱 나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면서 <사랑해~>하고 속삭였다. /김 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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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6-05
  • "연변조선족자치주 해체설"에 관하여
    ●허 훈 [동포투데이]요즘 신문이나 방송 인터넷 등 매체에서 한국 언론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해체위기”에 대한 기사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중국의 민족정책을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인구 비율 감소는 자치주 수부 도시 연길의 도시 면모를 바꾸고 있다. 원래는 연길시내의 광고판을 모두 조선어와 한어로 표기하도록 되어 있으나 관련부문의 단속에도 중국어로만 쓴 광고판으로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녕파와 온주 등 한족기업들이 육속 연길에 진입해 백화점을 설립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예 건축물 밖의 전체 벽을 모두 중국어로만 된 광고판으로 커버하고 있다.. 공항안내도 점점 조선어사용이 감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북경과 연길을 연결한 동방항공회사도 중국어와 영어를 두 가지 언어만 사용하고 있다. 또한 상가나 식당가게주인, 종업원은 조선족을 찾아보가 힘들 정도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보아온 연길의 최근 몇 년의 변화이다. 한국 언론은 “1952년 설립돼 이미 6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해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뿌린 돌멩이 하나가 일파만파를 일으킨다고 인터넷상에서도 이 소식이 광범하게 전해졌다. 중국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관계자는 기자에게 “우리는 이 소식을 모른다.”고 말했다. 기자가 알아본데 의하면 연변 조선족자치주 해체에 관한 소식은 정확하지 않은 걸로 판명났다. 하지만 조선족자치주는 그동안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한때 전체 인구의 70%에 달했던 자치주조선족 인구는 최근 36%대로 뚝 떨어져 현지 조선족인구하락세는 사실로 밝혀졌다.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1952년 자치구 설립초기만 해도 지역 총인구의 62%를 점했다. 그러나 1996년부터 시작하여 조선족인구 비율은 급한 하락세를 보였다. 2000년에는 84.2135만 명으로 자치주총인구의 38%를 점했으나 2005년에는 33%로 계속 하락세를 보이였다. 한국언론은 중국 현지 동포 언론에 게재한 문장을 인용해 “중국 국내 조선족인구가 계속하여 감소되고 있다 만약 이런 추세로 계속 내려간다면 2050년에는 50.1397만 명이 감소될 것이며 2090년에는 19,4227명으로 감소될 것이다. 22세기에 가서는 중국 국내 조선민족은 철저하게 사라질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조사에 따르면 연변 조선족자치주 인구증가율은 국내 56 개 민족 가운데서 제일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1996년부터 마이너스 증가추세가 나타났는 바 조선족이 제일 많이 집중한 룡정시, 화룡시, 도문시의 조선족인구 감소폭도가 아주 컸다. 조선족인구 하락세원인을 분석할 때 연변당지매체의 관계자는 기자에게 “연변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주요하게 조선족은 받은 문화교육 정도가 비교적 높고 또한 교육을 중시하고 아이를 많이 낳기 싫어하는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조선족은 자고로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다. 1949년, 중국의 첫 번째로는 되는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이 설립되였으며 자체로 모금하여 100여 개의 소학교를 건설해 1952년에 벌써 소학교육을 보급했다. 다음으로 조선족인구 유동은 계속 늘어가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조선족 거주지 중국의 제일 북쪽인 흑룡강(黑龍江省)으로부터 남쪽 끝인 해남성(海南省)까지는 S형으로 확산되어갔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동북삼성의 농촌지역 조선족들은 한국기업군단의 중국 대도시 진출을 따라 중국의 각 대도시들에 확산되여짐을 풀고 있다. 현재 내지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 음식점에 갈수록 많은 조선족 여성들이 취업하고 있다. 이런 여성들은 대부분 생육기에 처한 부녀들로 이는 조선족인구가 감소되는 한 개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90년대 이후 해마다 2000 ~ 3000명의 조선족들이 출국하던데로부터 2007년 방문 취업제가 시행됨에 따라 해마다 수만 명의 조선족이 출국하고 있다. 이중에는 조선족 여성들도 적지 않다. 일본에 유학가는 여성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현재 취업을 목적으로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58만 7천732명 가운데 방문 취업 중인 조선족 수는 28만 9천981명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해 한국언론은 소수민족 자치주내 소수민족 인구가 전체의 30%를 밑돌면 자치행정권이 취소될 수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중국에는 정말 30% 최저선이 있는가? 통상적으로 말하면 한 개 민족자치지방의 설립은 특수한 역사원인으로 인한 것이며 또 당지 소수민족결구도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 북경경제무역대학인구경제연구소 소장 황 룽칭(黄荣清)은 기자에게 중국은 30% 최저선을 보장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자치구, 자치주를 건립할 때 당연이 소수민족이 점하고 있는 인구 비례를 고려하며 역사인소, 및 기타 정황도 종합적으로 돌본다”고 말했다. 민족자치구, 민족자치주는 단순이 인구 비례만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인구가 보편적으로 많은 민족은 능이 자치를 할 수 있으며 인구가 비교적 적은 민족도 능이 자치를 할 수 있다. 즉 인구가 많은 민족만이 자치권을 향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된다. 중국의 민족자치지방은 자치구, 자치주, 자치현 3개 등급으로 나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기 전의 1947년, 중국 몽고족 거주 지역에 중국에서 첫 번째로 성급에 해당되는 내몽골 자치구가 건립되었다. 지금까지 중국은 155개의 자치정부를 건립하였는 바 여기에는 5개 자치구, 30개 자치주, 120개 자치현(기)이 포함된다. 중국 민족사무위원회관 방사이트에서 공포한 통계에 따르면 내몽고자치구의 소수민족인구는 전체 인구의 18.6%, 녕하회족자치구소수민족인구는 전체 인구의 34.1%, 광서 자치구소수민족인구는 전체 인구의 38%를 차지한다. 이 세 개 자치구 중 한족은 인구점유율에서 절대적 우세를 차지한다. 그러나 의연히 자치구로 남아 있다. 연길에서 사업하고 있는 한 한국인은 “연변의 면적은 4만여평방키로메터로서 한국국토의 절반에 해당된다. 만약 연변이 해체되면 우리 민족이 중국 동북지구에서 유구했던 역사, 근거지가 영원이 소실되고 만다.” 아마도 이것이 한국인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언론은 또 “중국 당국은 현재 자치주 수부인 연길시를 포함한 8개현시로 구성된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해체해 연길, 룡정, 도문을 연결한 ‘연룡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한적 있다. . 하지만 중국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관계자는 “연변 자치주 해체에 관한 소식을 모른다. 하기에 무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행정구역의 변동은 모두 국무원에 보고하여 동의를 받아야만 진행할 수 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알다 싶이 1983년, 연길현을 룡정현으로 개명할 때, 그리고 1985년, 돈화현을 돈화시로 개명할 때 모두 국무원의 심사비준을 거쳤다. 연변 자치주를 해체하는 것은 아주 큰 대사이다 “연룡도 통합” 프로젝트 추진은 또한 아주 큰 대사이다. 연변 한 지명인사는 기자에게 “연룡도 통합 프로젝트는 벌써 10여 년 전부터 구상해 왔으며 주요하게 지역경제발전을 촉진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며 자원을 합리하게 이용하고 작은 것을 크게 만들어 경쟁력을 강화해 대기업의 투자를 흡인하려는 데 있다”고 밝혔다. 연변 자치주 당위원회에서는 “11.5” 계획을 연구 토의할 때 “11.5” 기간 연룡도를 통합해 하나의 경제연합체를 만든다고 명확하게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연길, 도문, 룡정은 원래 하나의 행정단위였으며 3 개시의 인구결구도 조선족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 집거지이다. 연길, 룡정, 도문의 조선족인구는 각각 전시 인구의 58.4%, 67.6%, 57%를 점한다. 조선족들의 자치주에 대한 감정은 아주 깊다. 조선족인구 하락세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당지의 노인들도 있다. 민족 감정상으로 보아도 자치주를 해체하는 것은 현실적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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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5
  • 중국동포의 “주폭”,이대로 가선 안돼
    중국동포의 “주폭”,이대로 가선 안돼 [동포투데이]지난 6월20일,서울 지방경찰청에서 열린 “중국동포 언론사 대표 및 단체장 초청 간담회”에서 중국동포를 포함한 외국인들의 “주폭”으로 인한 범죄 실정과 대책이 주로 논의됐다. 물론 한국내에서 '중국인 혐오증'로 확산될 수도 있는 우려를 차단하자는 취지에서 열린 간담회로 중국 동포들이 한국에 체류 함에 있어서 삶의 질을 높이고 한국 국민들과 더 불어 한국에서 열심히 살아 갈 수 있게 하려는데 목적을 뒀다. 우선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이날 경찰청이 발표한 자료 수치에서 나타난 중국동포의 “주폭”문제는 매우 심각하다는 점이다. 자료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전체5대 외국인 범죄의 38.5%가 살인․강도․폭력 등 강폭력범죄로서 폭력범죄가 대부분 차지하는 가운데 중국인 범죄가 63.8%를 차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외국인의 주취상태 범죄가 내국인보다 높은 편인 가운데 경찰관서 상대 주폭은 많지 않지만 외국인 밀집지역을 중심으로 이웃이나 주점 등에서 행패부리는 주폭은 상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주목할 것은 출신지역별 규합이나 각종 이권다툼에 간여하는 소규모 폭력배도 일부 존재하지만 대부분 주취중 사소한 시비로 인한 우발범이라는 점이다. 이날 동포세계신문 김용필편집국장은 중국 동포들의 음주 폭력은 우발적인 만큼 상습적인 내국인 음주폭력과 다른바 인권침해 등 요소를 고려하여 조심스레 접근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간담회에서 참석한 중국동포 단체장들도 임금 체불. 장기간 가족과의 이별로 독신으로 살아가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고독감, 고용주와의 마찰 등의 스트레스가 싸인 결과라고 입을 모았다. 이밖에 다른 한 참석자는 중국동포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가리봉 주변에 ‘주폭’자가 많다면서 “소주병 깨고 서로 머리 까는 거 하루에도 수없이 본다. 술은 이성을 무디게 하고 순간적인 초조함에서 벗어나게 한다. 하지만 장기화하면 주폭이 되고, 이들이 범죄자가 되지 않으리란 법 없다. 이들에게 법제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우발적인 ‘주폭’자라도 상습적인 “주폭”자가 될 수 있고 아울러 강폭력 범죄를 저질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날 간담회에 참석한 중국동포 단체장들과 중국동포 주요 언론사 대표들의 가장 궁금한 문제는 외국인범죄 처벌 기준이었지만 아쉽게도 경찰측은 명확한 답안을 주지 못했다. 지난 5월10일, 서울지방경찰청은 주민의 입장에서 주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치안복지’구현의 일환으로 ‘주폭수사전담팀’을 편성한 이래 서울에서만 116명의 ‘주폭’자를 구속했고 그중에는 중국 동포도 몇몇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에 거주하는 외국인이 범죄에 관련되면 경찰에 입건될지라도 이내 각 지역 출입국관리소로 인계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간담회 한 참석자는 술먹고 사람을 때리면 감옥을 간다든가 강도 짓을 하면 강제추방을 준다든가 등의 구체적인 방안이 나와야 한다면서 “주폭”자에 대한 모호한 처벌 기준을 꼬집었다. 한편 경찰측은 경찰관 기동대를 동원한 외국인 폭력범죄에 대한 특별 단속과 예방활동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또한 기능별 전문 경찰관을 강사로 지정, 결혼이주여성ㆍ외국인 노동자 등을 대상으로 국내법규 및 한국생활 적응교육 실시하고 산업인력공단 등 협의, 범죄에 취약한 외국인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국내법규 교육을 실시하는 등의 내실화 방안을 모색중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중국동포들을 위한 ‘문화공간’ 및 ‘여가 프로그램’을 마련해 잠재적 불안요인을 해소하는 목적에서 구청 등 지자체와 협의해 중국동포들이 놀이・오락을 즐길 수 있는 문화공간 확충에 주력하겠다고 밝혔다. <허영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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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6-23
  • 결혼사진에 맺힌 한
    오늘도 구질 구질 싸늘한 가을비가 내리는날 저는 어머님 생각을하면서 속으로 이렇게 조용이 되뇌입니다. " 어머님 하늘 나라에서 부디 평안하시고 더는 가난때문에 속끓이지 마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며느리도 이젠 결혼 사직을 찍어주지못한 어머님의 아픈 마음을 충분이 이해할 수 있으며 더는 이 일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지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도 고래등 같은 기와집을 짓고 잘 살고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요. 어머님 늘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보고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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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06
  • [수필]시어머니의 자식사랑
    양로원에 당도하니 호리원인듯한 아주머니 한분이 우리를 안내해주시는것이였다. 퍼그나 널직한 주방겸 활동실인듯한 방에 머리결이 하얀 노인들이 앉아서 한담을 하고 계셨다. 그 속에서 체구가 왜소한 어머님을 대뜸 알아보고 뛰여가서 부둥켜 안으면서 하고 불렀다. 예고도 없이 찾아간 나를 두고 꿈이냐 생시냐 싶은듯 라고 하시면서 원래 노화되여 잘 보이지 않은 눈을 부비고 또 부비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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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06
  • [수필]옥이할머니
    어느날, 학교에서 돌아온 옥이와 내가 우리 집에서 숙제를 하는데 불시에 밖에서 징소리, 꽹꽈리소리와 사람들의 웨침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우리는 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옥이네 마당에 홍위병완장을 두른 사람들이 몰려와있었고 옥이 할아버지가 그 사람들의 손에 붙잡혀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옥이 할아버지 목에는 "자위단 단장 박중삼을 타도하자!" 라고 쓴 개패가 걸려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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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06
  • [수필]잃었던 나를 찾아
    싸늘한 바람이 옷속을 파고드는 계절에 다급하게 쫓겨가는 마가을, 락엽이 산만하게 뒹구는 스산한 거리를 사람들은 잔뜩 목을 움츠리고 총총히 오간다. 붙잡아둘수 없는것이 세월인가보다.거리의 가로수들에 파란 물이 오르며 여린 새잎들이 뽀족뽀족 돋던것이 바로 어제 같은데 어느덧 그잎들은 락엽이 되여 한잎두잎 정처없이 흩날리고 사람들의 발길아래 이리저리 짓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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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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