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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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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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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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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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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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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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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연재] 동년을 회억하여 - 머리말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머리말 나는 동년을 회억하여란 제목하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숙부들에 대하여 쓰려한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별로 큰 사회적 의의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천지개벽의 년대에 우리 집의 면모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억척같이 일하신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피타는 노력과정은 바로 연변 근대사 120 여년간에 우리민족 선배들이 연변땅에 이민하여 피땀을 흘려가며 개척하던 그 모습의 숙영이라고 생각하기에 또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력이 너무나 비장하기에 이를 우리의 후세에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였다. 그러나 당시 내가 너무 나이가 어리기에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어 유감스러운 점도 적지 않다. 시대배경: 기사년에 기근과 이민 간토(墾土)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여 나의 귀에까지 익숙한 기사년 재황과 이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려 한다. 기사년 재황은 전례없는 특대 재황으로 이 재황은 조선 이민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청나라때에 興京이동 伊通이남 두만강 이북 연변땅을 포함하여 동북의 동남 쪽 장백산 지구를 청나라가 흥기한 구역 성지라 봉쇄하여 인가가 없는 황량한 곳으로 200여년간 비어있었다. 1860년부터 1870년까지 11년사이에 조선북부에는 대 한재와 대 충재가 련이 어 들었다. 특히 1869년(기사년)에 함경도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등6읍에 덮쳐든 한재는 유사이래 보지못한 특대 한재였다. 이리하여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는 대폭 이민이 발단이었다. 10여년간 련속된 재해로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북도 사람들이 유일한 삶이 길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와 조선 조정에서는 강안에 숱한 포막을 세워놓고 월강을 금지시키며 월강하다 잡힌 사람들을 월강죄로 마구 목을 따 버렸다. 그러나 계속 이민자들이 증가하자 조선 조정에서 월강금지령을 페하고 청정부에 월강자들에게 지권을 주며 강북으로 이주를 승인하라 요구했다. 1881년에 청 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의 봉산위장을 개방하고 훈춘에 招墾總國을 설치하고 이민 실변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청정부는 연변지구에 이미 다수를 차지한 조선사람을 축출할 수 없고 개간한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 수도 없다고 여겨 집조를 발급하며 조선 이주민을 리용하여 연변을 개간하기로 하고 또 황무지 개간을 고무하기 위하여 초기에는 ‘훈춘 녕고탑조간(照垦)장정’을 반포하고 당해에 토지를 받은 호들이 땅세를 면제하고 소작료는 매상에 600문씩 받기로 하되 반드시 5년 후에 갚게하며 그 나머지는 한 푼도 풍기지 않기로 하였다. 그 밖에 간민들에게 부림 소를 대주고 기한을 정하여 빛을 갚게하는 등 우대정책을 실시하였다. 1885년에 봉금령이 취소되고 월강금지령이 페지되자 수 천 수 만이 조선인들이 터진 조수마냥 연변으로 밀려들어왔다. 하여 각지에 조선족마을이 생겨났다. 청나라 는 변방보위 수요로 군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족 이주민을 받아들이고 관리 기구인 월간국을 세우고 지금 龍井市 智新郷에 和龍峪(화룡욕) 통상국을 앉히고 두만강 이북 길이 700여 리 너비50여 리에 달하는 구역을 조선족 간민의 개간 구역 으로 확정하고 행정관리를 강화하였다. 이는 연변 역사와 조선족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간민들은 두만강 연안으로부터 해란강이북 부르하통하이북 그리고 훈춘 이북으로 끊임없이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두만강기슭의 화룡현 숭선으로부터 연길현 광제욕에 이르는 기름진200리 땅이 전부 간민들에 의하여 개간 되였을 뿐만 아니라 해란강이북 지역과 가야하 연안도 대폭 개발되기 시작했다.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로씨아는 동청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북에 처들어 왔고 잇달아 훈춘을 점령하고 연변지구와 조선북부지방을 강점했다. 이에 경황 질색한 연변 지방 관리들과 군관들은 길림으로 도망했다. 그 기회에 연변지구에 더 많은 이민들이 이주하였다. 청나라정부에서 황산지를 백성들에게 팔게 되자 외지에 관리들과 군벌 대 상인들은 파리떼처럼 달려들어 비옥하고 편리한 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였다. 그들은 권세를 등대고 청장(토지를 재주는)인원들에게 뢰물을 먹여 많은 황무지를 차지하였는데 어떤 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광활한 황무지에 말뚝을 박아가면서 토지를 점유했고 또 어떤 자들은 토지개간회사라는 빈 간판을 내걸고 한 지방의 토지를 독차지했다. 이렇게 황무지를 헐 값으로 차지하여 일약 벼락 대지주로 된 지방의 관리 군벌 대 상인들을 점산호(占山戶) 라하였는데 기실은 占山虎였다. 이 기회에 외지에 한족들이 관청과 점산호들에게 뢰물을 먹이고 점산호들이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점산호들로부터 몇 백상이 황무지를 얻어 이민들게 주어 개간하여 대 지주가 되었다. 또 지방관리들의 신임을 얻은 어떤 자들은 점산호를 대신하여 조선족 간민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소작료를 받아들이며 그 중에서 어부지리를 얻어 점차 지주로 되였다 또 일부는 부유한 조선인 상인들인데 그들은 무역과정에서 강북의 넓고 비옥한 황무지와 헐한 땅값에 유혹되여 조선의 재산을 전부 팔고 남녀 노비들까지 거느리고 이주하여 일약 수 십 상의 토지를 소유 한 지주로 되였다. 봉금령이 페지로 손에 한푼 땅도 없는 조선 농민들이 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이 “주인 없는” 땅에 몰려와 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앞에서 언급 하다 십히 외지에 한족들이 연변에 들어와 관리들에게 뢰물을 처먹이고 땅을 차지 하였다. 뢰물을 처먹은 관리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마치 자기 땅인 것처럼 저 벌판은 마씨의 땅이오 저 산골 짜기는 장씨의 땅이라 하면서 말뚝을 밖아 지역(地畔)을 정해주고 명함을 찍어주어 땅이 주인이라 하였다. 이렇게 그자들은 하루 아침에 거대한 땅을 차지한 폭팔호로 둔갑되여 적수 공권으로 고향을 버리고 생계를 찾아 온 이민들이 피땀을 빨아 먹기 시작 했다. 이 신생 지주들은 땅의 정도에 따라 6할5할4할을 정하여 이민들에게 개발권을 주었다. 례를 들어 6할이면 한상을 개간하면 60% 를 5할이면 50%를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이민들은 계속 이 땅을 개간했다. 이 신생지주들은 이민들에게서 받아들인 땅을 다시 이민들에게 팔아 먹고 또 다른 곳에가 이와 같은 만행을 계속 저질렀다. 어떤 곳에서는 이민들이 땅을 개간해도 자신의 땅은 한푼도 없이 모두 지주의 땅으로 되여 이민들은 자신이 개간한 땅에서 소작짓고 살아야 했다.이러한 폭발호(暴發戶)의 전형은 태양벌을 독점한 악패지주 한씨다. 해방 후 그놈은 인민들이 손에 처단되였다. 연변땅에 지주는 대 다수 이렇게 산생되였으며 성남의 마통새도 번씨도 장씨도 모두다 이러한 지주다. 이것이 연변에 조선족 지주가 아주 적은 원인의 하나다. 이렇게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버리고 이민하는 조선 사람들이 행렬은 처음에 는 기황으로 시작되였으나 그후에는 일본놈들이 착취와 압박으로 그 규모가 점점 더 크게 전국적으로 계속되였다. 함경도 사람들은 도보로 연변과 장백현 집안현 경내로, 평안도 사람들도 도보로 료녕성 동부로, 그리고 배를 타고 이민한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은 료녕성내지로, 강원도 경상도 사람들은 길림성 흑룡강 성내지에 집단 이민하고 그곳에 부락으로 정착해 살았다. 이 이민 조선 사람들은 그후 동북 항일 투쟁 최전선에서 싸우며 가송찬미할 력사의 한 페지를 썼고 또 중국 해방전쟁에서도 역시 커다란 불멸의 공적을 쌓았다. 여기서 지명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몇가지 첨가하면 이민들이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연변땅은 인연 없는 산구로 이름(지명)없는 곳이었다. 이민들이 대량 몰려 오기 시작하자 청정부는 길림성에 이민국을 설치하고 이 땅을 관리하 려고 이민국 관리 몇 명을 보냈다. 이들이 연변에 월간국을 세울 교통이 편리하 고 관리가 편리한 곳을 찾다가 ‘국자가’을 지정하고 지명을 다시 지으려고 고심하던중 한 관리가 길림성이 연장이라 연자에 길림성이 길자를 붙이여 연길이라 함이 어떠한가 하였는데 모두들 그 이름이 의미있고 신통하다 하여 연길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일설이 있다 。 그리고 연길은 그때 사방이 산으로 둘려 싸인 분지인데 바람이 불지 안는 고요한 때면 연기와 안개가 덮인 곳이라 煙集崗이라 하였는데 훈춘에 있던 招垦总局이 이곳에 오면서부터 土地局있는 거리라 하여 局子街 라 하였다가 다시 煙集을 한어의 동음자로 延吉(연길)이라 하였다는 일설도 있다. 여하튼 연길이라는 지명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름이다. 마치 최근 烟集河를 延吉河라고 하듯이 고친것이다. 또 하나 왕청이라는 이름은 그때 왕청땅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왔는데 함경도의 하천들은 모두 동이나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 왕청의 하천은 모두 서쪽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왕청같이 강하천이 흐른다 하여 왕청이라 지었다 한다. 일반적으로 지역들이 특점에 따라 지은 이름이 많은데 이런 이름로는 나의 고향에 룡정 성남 성동 회령촌 장풍동 샛골등이다. 여하튼 급시에 관리들이 기발한 생각으로 지은 이름이나 민간에서 지역의 특점에 따라 지은 이름이나 모두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다. 또 이 지명들만 들어도 이 땅의 력사에는 모두 이민들이 발자취가 고스란히 새겨져있는 비장한 땅이며 이 땅의 력사는 이민들이 력사며 이 땅의 주인 역시 이 땅의 력사를 창조한 그들이였다. 그리고 하나 더 쓰면 두만강,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내려 오다가 자신이 홍수시에 만들어낸 충적사 틈으로 새여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도망가 몇 십리 흐르다가 다시 돌틈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진면모를 자랑하며 700리 두만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최초의 두만강의 이름은 도망 갔다고 도망강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이 가상하지 않다고 여겨 한 선비가 음이 비슷한 두만강이라 지어 주었다 한다. 이러한 이름은 조선민족이 아닌 어떤 민족이 지을 수 없는 이름이다. 또 이러한 이야기는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지만 백년 남짓한 이민사에 깃든 이야기로 誤傳되거나 무중생유(無中生有)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나는 이렇게 우리 조상들이 력사가 깊이 새겨져 있는 이땅의 력사를 모두 소중이 여기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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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12-10
  • 오묘한 세계대백과(26)
    남극의 극주 남극의 극야 “극주”란 하루 24시간이 모두 낮인 것을 말하고 “극야”란 하루 24시간이 모두 밤인 것을 말한다. 지구상의 남극과 북극이 바로 아주 기이한 지방으로서 그 곳에는 극주와 극야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이는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지구가 태양을 돌 때 몸의 한쪽면만 태양과 마주하고 돌기에 태양이 지구표면을 비출 때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3월부터 9월 사이의 한동안 태양은 줄곧 북극의 낮은 곳을 비추기에 이 때의 북극은 계속 낮이 되고 남극은 매일 밤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9월부터 다음해의 3월 사이에는 태양이 남극의 낮은 곳을 비추기에 이 때면 북극지구는 매일 밤이 되고 아울러 남극은 24시간 모두 낮이 될 수밖에 없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0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6)
    쾰른대성당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독일, 지점: 쾰른시 함의: 독일에서 제일 크고 세계에서 제일 높으며 수건시간이 가장 긴 성당임 쾰른대성당(科隆大教堂)은 역사가 유구한 나일강반의 쾰른성에 위치, 성당은 세계 종교건축사상의 3개 제일 중 하나로 독일에서 가장 큰 성당이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당으로 건축역사가 가장 긴 성당이다. 쾰른대성당의 가치는 소장품이 이름나서만이 아니라 더 유명한 것은 무게가 24톤에 달하는 대형 추시계와 10세기 시대의 황금갑삼왕감(黄金匣三龛)이 있어서이다. 6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쾰른대성당은 하나의 정교한 예술품과도 같이 신성한 빛을 뿌리고 있으며 유럽의 3대 성당 중의 하나로 꼽히우고 있다. 곡절적사연이 깃든 성당 쾰른대성당은 1248년에 낡은 성당자리에 재건한 것이다. 일찍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시대에 성당의 개조공사는 중지되었었다. 중지됐던 시간은 무려 3개 세기에 거쳤다. 그 뒤 프로이센국왕 빅토르 윌렌 4세의 추동하에 이 성당은 1880년에 드디어 준공되었으며 전후의 시간은 무려 632년이 걸렸다. 뾰족한 쌍탑 쾰른대성당의 벽체는 모두 가공된 돌로 쌓여졌으며 부지면적이 약 8000평방미터이고 외관은 웅위로우면서도 그 셈세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뾰족한 쌍탑은 정문벽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높이가 157미터에 달해 유럽에서 가장 높은 뾰족탑으로 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두 자루의 예리한 검이 구름속에 꽂혀 있는듯 하고 네 주위의 무수한 작은 뾰족탑들이 서로 호응하여 이 쌍탑으로 하여금 더욱 뚜렷하게 만들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05
  • [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1)
    ■ 김철균 3 순자 옆의 식구들은 날이 갈수록 계속 하나 둘씩 떨어져 갔다. 인류생활사에 있어서 자녀가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다가 성인이 되고 또 결혼하면서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것은 자연적인 윤리라 하지만 그 당시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인 집체호로 인해 우리 중국에 나타나 수천수만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정든 도시와 부모의 곁을 떠나 농촌으로 가야 했다. 순자의 가정도 영남이와 영순이가 떠난 뒤를 이어 1970년에는 영옥이가 떠났고 1973년에는 영애, 또 그 뒤엔 경남이까지 집체호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 용환이는 비록 돈화의 “5.7” 간부학교로부터 돌아와 명예를 회복하긴 했으나 얼마 안있어 의료대 성원으로 뽑혀 몇 달씩 내몽골과 기타 지구에 가있군 하다보니 역시 생이별이나 다름이 없었고 후에는 집체호에 내려갔던 둘째 아들 경남이까지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면서 집을 떠났다. 둘째 아들 경남이가 군에 입대하게 된데는 순자의 역할이 아주 컸다. 당시 경남이는 연길시 장백공사 동풍대대에 하향하였다. 그는 하향한 이듬해에 군에 신청했다. 둘째가 군에 신청했다는 소식을 듣자 순자는 아들이 매우 대견스럽게만 느껴졌다. 엄마의 잔등에 업혀 재롱을 부리던 때가 어제 같은데 어느 덧 성인이 되어 집체호로 내려갔고 이젠 또 군에 신청하다니 그야말로 볼수록 자랑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혹시 신체검사나 기타 심사에서 탈락하지는 않을는지 슬며시 우려되기도 했다. 기실 순자는 해방군을 몹시 흠모하였었다. 거리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볼 때마다 내 아들도 저런 모습을 하고 나섰으면 하는 부러움을 가져본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큰 아들 영남이를 군대에 신청하게 하였었는데 뜻밖으로 당시엔 남편인 김용환이 “외국특무”란 누명을 쓰고 있었기에 그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가정출신이 좋겠다, 남편도 “외국특무”란 누명도 벗었겠다 거기에 신체까지 좋은 둘째 아들 경남이가 군에 입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집에서 안절부절하던 순자는 마침내 둘째 아들 경남이가 하향한 동풍대대를 찾아갔다. 동풍대대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을 만난 순자는 찾아온 목적을 이실직고하였다. “저는 아들 셋이나 둔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아들 셋 중 군대에 간 아들은 아직 한명도 없답니다. 큰 아들은 한시기 아버지가 ‘외국특무’란 모자를 쓰고 있어 가지 못했습니다. 이젠 걔들 아버지의 모자도 벗었으니 둘째 아들만은 꼭 군대에 보내고 싶습니다.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께서 아무쪼록 저의 아들이 신체만 합격된다면 첫 사람으로 추천해 주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에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은 순자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뭔가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아니, 경남이는 집체호 지식청년이기에 몇년 안 있어도 노동자 모집으로 도시에 올라갈 수 있겠는데 왜 부디 군대에 보내겠다고 하는 겁니까? 군대에 가면 농촌 못지 않게 힘들고 고생스러울텐데요?!” “그것 때문이 아니랍니다. 남자대장부로 생겨서 나라를 지키는 일터에 가는 것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그리고 고생을 겪어봐야 더욱 견강한 남아가 될 것이 아닙니까? 또 아들 셋이나 두고 그 중 한명도 군대에 보내지 못하면 제가 어떻게 당당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은 몹시 감동돼하면서 경남이가 평소의 표현도 출중하고 신체도 좋으니 경남이를 적극 추천하겠노라고 답복을 주는 것이었다.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과 작별한 순자는 또 장백공사 무장부에도 찾아가 무장부장한테 재삼 이상과 같은 부탁을 하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경남이가 평소에 잘해서인지 아니면 순자가 아래위로 뛰어다니며 “외교활동”을 적극 벌여서인지 그 해 겨울 경남이는 자신의 뜻대로 군대에 나가게 됐다. 그것도 일반 육군이 아닌 해군으로 입대에 성공했다. 소속부대는 광서에 있는 모 해군기지의 부대였다. 당시 중국의 남부 변경지대의 형세는 몹시 복잡했다. 1975년 베트남 북방이 남부를 해방하고 통일을 실현한 후 점차 구소련의 힘을 믿고 중국과 등지는 외교를 해오다가 1976년 9월 중국의 모택동주석이 서거하자 공공연히 중국을 반대하고 중국과 엇서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당연히 변경에서의 집탈로 표현되었다. 베트남군은 쩍하면 포사격으로 중국 변경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파괴하였는가 하면 때로는 중국 쪽으로 건너와 중국주민들의 물건을 빼앗거나 중국 주민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화교들을 탄압하고 내쫓는 행위를 감행, 한시기 양국의 변경다리로는 중국으로 들어오는 화교들로 줄을 잇기도 했다. 베트남당국은 중국의 참을 수 있는 경고를 계속 무시하면서 이러한 행위를 계속했다. 두나라 관계는 일촉일발의 전쟁분위기가 짙게 감돌았다. 바로 이럴 때 경남이가 군에 입대, 그것도 중국과 베트남 변경인 광서로 가게 되었다. 드디어 경남이가 참군한 그 이듬 해인 1979년 2월 17일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자위반격전이 개시되었다. 전하는데 따르면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자위반격전에는 운남과 광서의 변방부대가 주력으로 출동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남이네가 소속한 해군부대도 출격한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아도 무시무시한 소식들이 자주 들려왔다. “장기간 전쟁이 세례를 받은 베트남 군대는 몹시 지독하다”느니 “부상당한 베트남의 여민병은 중국군대의 등에 업혔다가도 비수를 뽑아 중국군대의 목에 찌른다”느니 “인원상에서는 중국군대 측이 더 큰 손실을 입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수없이 나돌았다. (혹시 경남이네도 전선에 나가 베트남해군과 맞붙지는 않았는지? 또한 싸움 중 어떤 불상사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순자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20년간 키워오면서 남의 집 애들처럼 잘 먹이지도 잘 입히지도 못했는데 그 애가 전쟁에 참가하여 혹시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자식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는건 순자 역시 여느 어머니들과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에 불과했다. 순자는 다시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다. 모택동의 큰 아들 모안영도 전쟁터에 나가서 희생되지 않았던가. 모두들 자기 자식이 아깝다고 붙잡고 있으면 이 나라는 그래 누가 지킨단 말인가?!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니 순자는 부대에 간 아들 경남이가 자랑스럽기만 했다. 또한 혹시 그 경남이한테 어떤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자신이 아들을 부대로 보낸 것은 아주 잘된 일이라고 단정하였다. 4 순자의 막내아들 김진이는 다행히도 하향지식청년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자녀 5명이 농촌으로 하향하면 한명은 농촌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나라의 정책이 있었기에 그 혜택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17평방미터가 되는 작은 집에는 순자와 막내아들 김진 이렇게 모자 두 사람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식구가 단촐하면 살림을 조직하기가 보다 쉽다는건 살림살이를 해본 모든 주부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군 하는 이치인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순자네만은 그 예외였다. 당시 순자의 남편 용환이의 노임은 55원이었는데 의료대로 외지생활을 하는 용환이한테 매달마다 얼마씩 보내고 난 뒤 나머지로 집안의 생활을 조직해야 했다. 아니, 집체호에 내려간 영남이,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의 비누와 치약 등을 사는 생활비용도 대주어야 했다. 그것은 남편과 모든 자식들이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할 때보다 그 생활비용이 곱절 더 들었다. 생활하다 보면 돈이나 물건같은 것을 가져가는 사람은 그것이 흔히 아주 적어 눈에 차지 않고 만족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퍼주는 사람은 그것이 크게 자리나게 축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돈이나 물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집에서 여러 곳에 지원하며 살림을 조직하는 순자로서는 적은 생활비로 여기 저기에 맞춰대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달에는 남편의 노임을 받는 날로 그것이 거덜날 때도 있었으니 그런 달에는 쌀밥 한끼를 해먹는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었고 기타 배급표로 나오는 돼지고기같은 부식품을 사먹든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바로 이 때 신흥가두판사처와 제 9 거민 위원회에서는 순자네 가정의 생활형편을 요해한 뒤 토론을 거쳐 순자더러 연변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 직업이 없는 가정주부가 임시일이라도 하려면 거민 위원회에서 주민들이 선거추천하고 가두판사처의 토론과 심사비준을 거쳐야 하는 일종 “빈곤부축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다만 가정이 가난해서만 여기에 뽑혀 임시일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출신토대가 좋고 사회적인 평가도 좋은 사람만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국판 “노가다”라고 할 수 있는 건축공사장에서 임시일을 할 수 있게 된 김순자, 이는 건국전 명신여자중학교를 졸업한 순자한테 있어서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의 희롱이었다. 순자는 억울했다. 명신여자중학교때의 동창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것을 봐도 억울했고 자갈치기, 벽돌부리기와 시멘트반죽을 나르던 몸이 데친 배추잎처럼 후줄근해진채 퇴근해서는 또 뒤죽박죽이 된 집안을 거두며 저녁밥을 지을 때도 억울했다. 하지만 순자는 이러한 억울함을 단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순자는 이 모든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위생학교 기숙사의 임시공일을 할 때도 그랬고 건축공사장의 막 일을 하는 그 때도 역시 순자는 뭐든지 하면 열심히 하였다. 한편 자기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하는 순자의 정신세계는 그 곳 건축공사장에서도 체현되었다. 당시 공사장에는 순자처럼 임시공일을 하는 ×××이란 젊은 한족여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는 공사장 책임자한테 며칠간 휴식하련다고 말미를 맏는 것이었다. 공사장에서 말미를 맡고 며칠씩 나오지 않는 일이란 흔히 있는 것으로서 당시 순자는 그녀가 말미를 맡는 것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몸이 불편하지 않으면 가정에 무슨 일이 있나보다고 여겼을뿐이었다. 헌데 며칠 뒤에 나타난 ×××이란 여인은 얼굴색이 백지장같고 몹시 부석부석한 모습이었다. (저 여인한테 무슨 일이 있었구나…) 순자는 의심쩍은 생각이 들어 그 여인이 일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외바퀴밀차에 벽돌을 실어나르는 일을 하면서 그녀는 몹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연했으며 현훈증을 느끼는지 외바퀴밀차를 밀다말고 자주 땅에 주저앉는 것이았다. 그리고 그닥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이마에서는 콩알같은 땀방울이 내돋군 하였다. “아니, 임자. 자네한테 웬 일이 있는 모양이구만.” “아니, 아무런 일도 아니예요. 괜찮아요. 언니 저한테 신경쓰지 마세요.” 그러면서도 여인은 두손으로 얼굴을 막으면서 분명 울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는 것이었다. “아니 임자, 웬 일이요? 내가 조선족이라고 거리감을 두지 말고 언니처럼 생각하오. 어서 말해보오. 대체 웬 일이요?” “언니, 기실… 기실 제가 2일전에 낙태수술을 했어요.” “뭐, 유산을 하고 일하러 나왔다고?! 쯧쯧…그 몸으로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어?! 내가 책임자한테 말할테니 집에 들어가 며칠 푹 쉬다가 나오라구.” 그러자 ×××여인은 급기야 순자의 입을 막으며 사정했다. “언니, 그러지 말아요. 기실 저의 집 생활형편이 말이 아니예요. 그러다가 책임일군이 혹시 저를 자르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 말에 순자 역시 짚이는데가 있었다. 자신 역시 가정의 생활고 때문에 건축공사장에서도 제일 힘든 임시공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 오죽했으면 이 몸을 갖고 일나오겠는가! 순자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기가 일하던 모래를 치는 곳에 가서 삽자루를 잡았다. 하지만 자꾸만 눈길이 ×××여인한테 돌려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얼마 안있어 순자는 다시 ×××여인한테로 다가왔다. “안되겠어. 임자 내가 하던 모래치는 일을 하라구. 내가 외바퀴밀차를 밀테니.” “?!…” ×××여인은 어안이 벙벙해했다. “뭘해? 어서 저 쪽에 가서 모래를 치라구?” 그제야 순자의 뜻을 알아차린 ×××여인은 “언니, 감사해요”라고 하면서 외바퀴밀차를 순자한테 넘겨주었다. 순자가 하던 모래를 치는 일을 하는 ×××는 자주 감동으로 어깨를 들먹이었다. 후에 몸이 완쾌되자 ×××여인은 호떡 2개를 사가지고 순자를 찾아왔다. 자기를 대신해 힘든 일을 맡아준 순자한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순자는 그 호떡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한족 여인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임잔 참 성질이 곧은 아낙네구려. 그럼 임자가 나의 일을 대신 해준다면 나는 조선족 찰떡을 사주어야겠구만.” 순자의 농담에 ×××여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언니도 참”하며 눈을 곱게 흘기었다. 한편 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하는 3년간 순자는 해마다 “선진사업자”와 “민족단결모범”을 되었다. 이는 임시공들 중에서는 유일한 “선진사업자”였고 “민족단결모범”이었다. 또한 건축공사와 순자와의 계약은 더는 가두판사처의 추천과 소개를 거치지 않고 건축공사에서 직접 채용하군 하였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05
  • [한국생활수기] 한국 돈벌이 변주곡
    ■천광일 한 사람의 인생에서 2년이란 세월은 매우 짧은 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종섭이가 한국에서 돈벌이를 위해 전전한745일은 그가 예순이 넘도록 살아오면서 잊지 못할 추억들을 가장 많이 남긴 나날들이기도 하다. 종섭이는 진 방송소 소장직에서 정년 퇴직을 한뒤로 몇년간 할일 없어 그냥 동네 노인들의 활동에 참가하면서 마작 치기도 하고 그것이 재미 떨어지자 무도장에 다니며 여자를 껴안고 춤도 춰봤지만 하루하루 보내는 세월이 허무했다. 그러다가 남들이 한국에 가서 돈을 벌어 와서는 새 아빠트를 사고 고급 식당에 들락거리면서 사치스런 생활을 누리는 것이 무척 부러웠고 자신도 아직 일할 수 있을 때 돈을 벌어 부자가 되고싶은 속마음이 굴뚝처럼 일어섰다. 때마침60 세이상 조선족동포 노인은 별다를 서류 없이 한국 비자를 낼 수 있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노친과 함께 심양에 있는 한국영사관에 직접 가 비자 신청을 했다.드디어 그들에게 비자가 발급되어 한국땅을 밟을 수 있게 됐다. 한국에 도착해 처음 찾은 일자리는 양계장이었는데 종섭이가 해야 할 일은 찌물쿠는 닭장 안에 들어가 외바퀴 밀차로 닭똥과 오물을 쳐내는 일이였다. 더럽고 힘든 일이었지만 이제 열심히 일하기만 하면 목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일단 시작해 보았지만 닭장 안의 냄새가 어찌나 고약한지 어지럼증이 막 날 정도였다.그런건 억지라도 견딜 수 있었지만 그 나이 먹도록 힘든 일 못해봤던 종섭이는 무거운 외바퀴 똥밀차를 밀려고 하니 중심을 바로잡지 못해 비청거리며 넘어져 닭똥 무지에 빠진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젠장 이게 무슨 꼴이람 그나저나 책상 머리에 앉아있던 국가 간부였는데 그만한 퇴직금이면 집에서 별 걱정 없이 살 수 있는데 이국땅에 와서 똥치개질 하다니……》 중국에 있을적에 한국에 갔다온 사람들이 돈 벌기 쉽지 않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지만 실제로 겪어보니 상상이외로 힘들었다. 그러나 중국에선 상상도 못할 정도의 월급을 받을 수 있으니 억지로 참고 견디면서 일을 하는 것이다. 종섭이가 그처럼 허둥대며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사장은《아저씨 중국에서 뭘 했기에 밀차도 밀줄 몰라?이게 뭐야 깔끔하게 쓸어내.》라고 버럭 소리 질렀다. 《죄송합니다 생전 이런 일을 처음 하다보니…양해해주십시오.》 《손이고 얼굴을 보니깐 일을 해본 사람은 아니구먼.》 이어 사장은 종섭이 전에도 중국동포 몇몇이 이곳에 와서 일하다가 며칠도 안돼 그만두고 가는 바람에 오물을 제때에 쳐내지 않아 이렇게 많이 쌓여 있다고 덧붙였다. 종섭이는 오로지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이를 악물고 하루에 12시간씩 일을 하면서 쌓여있던 오물들을 깨끗이 쳐냈다. 어려운 첫 고비를 넘기고 일에도 조금씩 익숙해지면서 한 20일간 일하던 도중 뜻밖의 사건이 일어났는데 글쎄 사장의 아내가 다른 남자와 바람 피우고 집에 재산을 몽땅 털어가지고 잠적해 버렸던 것이다. 이에 화가 난 사장이 약을 먹고 자살을 시도했는데 다행히 목숨은 건졌지만 사람도 알아못보는 식물인간이 되고 말았다.그후 빚군들이 달려들어 쓸만한 것들을 마구 거두어가는 바람에 양계장은 하루 아침에 풍지박산나고 말았다. 종섭이한테는 참으로 청천벽력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식물인간이 된 사장도 안타까웠지만 그동안 힘들게 일한 보수는 어디가서 받는단 말인가. 그가 속수무책으로 탄식만 하고 있을 때 그의 아내가 일하고 있는 양계장 사장이 받지 못한 임금은 자신이 줄터니 와서 같이 일하자고 했다.《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말은 바로 이를 두고한 말이 아닌가. 종섭이는 기쁜 심정으로 그 양계장에 갔다. 종섭이는 돈을 버는 것도 좋지만 이십여일간 아내와 떨어져 살아보니 아내의 따뜻한 손길이 그리워나고 편한 속 얘기를 할 수 있는 대상이 없어 많이 적적하던 차라 이젠 아내와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이 더 좋았다. 종섭이가《여보 당신을 만나니 살것같소 이제부터는 당신이 끓여주는 밥을 먹으면서 일도하고 말동무도 하며 의지할곳도 있어 시름이 놓이오》라고 하니 아내도《그래요 인젠 돈을 좀 적게 벌더라도 이곳에서 함께 일합시다.》라고 기뻐하는 것이였다. 그들은 사장이 얻어준 자그마한 방에 자리를 정하고 자체로 때시걱을 끓여 먹으면서 아침 일찍부터 저녁 늦게까지 휴식일이 따로 없이 설날도 추석날에도 돈을 버는 재미에 열심히 일했다. 이 양계장의 사장은 오십대의 중년 여성이었는데 마을사람들은 로처녀라고 했다. 그게 사실인지 여부는 모르지만 확실히 남편도 없고 자식도 없었다. 젊었을 때 혼인 문제로 좌절을 당하여 크게 감정을 상했던 탓인지 아니면 “로처녀” 과부로 나이 오십 먹도록 싱글로 살아오면서 성격이 이상하게 변했는지 저녁마다 “참이슬”표 소주 한병씩은 랭수 마이듯 굽을 내고는 노래 기계를 틀고 노래하고 춤추며 혼자 놀군 했다. 그러던차 종섭이가 오게 되자 “로처녀” 사장님은 술동무가 생겼다면서 저녁 이면 술상을 차려놓고 청해들여서는 함께 술을 마시군 하였는데《중국 아저씨 술친구가 있어 참 좋아요 우리 함께 술마시고 재미있게 놀자요.》라고 하면서 자꾸 술을 권하는것이였다.종섭이도 원래 술도 착착하고 놀기도 좋아하는지라 사장님과 함께 술도 마시고 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다. 《야 아저씨 닭똥을 쳐내는 일을 시키기는 아까운 사람이네요 아저씨 노래는 온 밤을 들어도 실증이 안나요 앵콜 》 “로처녀”사장님은 저절로 흥분에 들떠 종섭의 아내가 곁에 있건 말건 그의 목을 그러 안고 뽀뽀를 해대고 혀꼬부라진 소리로 외치면서 자꾸 노래를 시키는 것이였다. 그렇게 며칠간 저녁마다 술마시고 노래하면서 사장님의 구미에 맞춰 놀아 댔지만 《듣기좋은 륙자배기도 한두번》이지 한달이 넘는 장놀음에 싫증이 났고 낮에는 아침 5시에 시작하여 저녁 늦게까지 고된 일을 하고는 저녁이면 “로처녀”사장한테 붙들려 술만 마시다보니 체력이 급격하게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내도 술상 끝날 때까지 시중들다나니 피곤해 몸살까지 와 낮에는 일을 할래야 할 수 없다. 종섭이가 아내보고《여보 계속 이러다가는 나는 술에 잘못되고 당신은 지쳐서 드러누울 것 같소 임금이나 받아 가지고 자리를 뜨기오》라고 하니 아내도 같은 생각이라며 내일이라도 당장 뜨자고 맞장구쳤다. 그런데 막상 떠나자니 어덴가 아쉽기도 하고 마음 한구석에 미안한 감도 들었지만 언제 그런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들은 첫달 월급을 받은 이튿날 “로처녀”사장을 찾아가서 집에 급한 일이 생겨 중국으로 돌아가야 한다면서 거짓말을 둘러대고 곧바로 나왔다. 양계장을 나온후 그들 부부가 찾은 일자리는 경기도 하남시에 있는 콩 나물을 생산하는 공장이었다.공장이라고는 하지만 기실80메터 길이 하우스였는데 해빛을 가리우기 위해 두터운 탄자로 덮다보니 한낮에도 하우스 안은 어두컴컴했고 중간으로는 소형 레루장위로 네바퀴 밀차가 오가는데 마치도 탄광의 갱도를 방불케했다.일터는 비록 깨끗하고 먼지 한알 없었지만 습도가 많고 늘 장화를 신어야 했고 하루종일 해빛을 볼 수가 없어 풍습병 환자는 견뎌내기 힘들 것 같았다. 종섭이는 무릎 관절이 부실한 아내가 걱정되어《여보 이런 쥐굴 같은데서 당신이 삐쳐 낼만하오?》라고 물었더니 《돈을 벌려면 언제 이런것까지 가리겠습니까?일을 하다가 안되면 그때 다시 봅시다.》하고 대답하는것이다. 그래서 일을 시작했지만 생각밖으로 많이 힘들었다. 아침이면 사장님이 하루 임무량을 칠판에 적어놓군 하였는데 나이가 많고 일손이 굼뜬 그들 솜씨로는 그것을 완수하려면 아침5시부터 밤11까지 16시간 넘게 기계처럼 돌아치며 쉴새없이 일을 해야했다 설상가상으로 하루종일 윙윙 돌아가는 물펌프소리,웅웅 거리는 대형 냉장고 소리에 온 하루 머리가 뻥해나고 숙소마저 지척에 있다보니 밤이면 기계소리에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일이 힘드니 종섭이는 저도 모르게 코피를 흘린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고 아내도 풍습이 도져 여간 고통스러워 하지 않았다.이렇게 겨우 한달간 견지한후 임금을 받아쥐고 또 일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번에는 나이에 맞게 쉽게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찾겠다고 생각하고 며칠간 수소문한 끝에 경기도 평택에 있는 양계장을 찾아갔는데 8만여마리의 닭이 낳은 달걀들이 흐름선을 따라 밀물처럼 밀려드는 것을 골라서 포장을 하고 트럭에 싣는 일이었다. 젊은이들도 힘들어 못하는 일을 육십이 넘는 그들 부부가 어찌 할 수 있으랴.그래도 결국 이틀도 못견디고 떠나고 말았다. 일자리 찾기에 실패를 거듭하면서 그들 부부는 불운한 운수를 탓하면서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는데 전생에 양계장과 무슨 인연이 있었는지 다섯번째로 찾은 일자리 역시 양계장이었다.충청북도 음성군에 위치한 그 양계장은 하루 노동 시간이 길지도 않고 사장님도 마음씨가 착해 보였지만 일감이 적다는 이유로 임금을 적게 준다고 해서 역시 며칠 안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또 어디로 가야 하는가?》 종섭이는 한치도 내다볼수 없는 앞날이 묘연하기만 했다. 한국에 오기전 돈 많이 벌어갖고 아빠트도 새로 사고 자식들한테 돈도 푼푼히 나눠주려 했지만 돈 벌기가 이처럼 힘들줄은 꿈에도 생각못했다. 중국에서도 이만큼 힘을 내서 일한다면 한국에서 버는만큼은 안돼도 어지간한 월급쟁이들보다는 더 많이 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 부부는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들 부부가 여섯번째로 찾은 곳은 경기도 예주군의 한 메추리 사양장이었는데 시골에 위치해 세상과 동떨어지긴 했지만 양계장보다 훨씬 깨끗하고 노동시간도 길지 않아 오래 해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더욱이 사장님 내외는 년세가 많지만 매우 인자하신 분이었다. 환경이 좋고 마음도 편한 곳에서 일을 하게 되니 그들 부부는 힘든 줄도 모르고 돈을 버는 재미에 뭍혀 하루하루를 지냈다. 《닭도 먹이를 주어야 알을 낳는다》고 터놓고말해 그곳 일도 그리 쉬운것은 아니였다.봄,가을에 하우스안의 메추리 똥을 쳐낼 때면 마치 사막 폭풍이 불어치는듯한 수만마리 파리떼 습격을 받기도 하는데 입,귀,코,눈등 구멍이 있는 곳이면 사정없이 날아들었고 아무리 옷단추를 꽁꽁 채우고 모자를 눌러써도 어디라 할것없이 기여들군 하였는데 두손이 밀차 손잡이를 쥐고 있다보니 그저 파리떼에 고스란히 당하기만 하였다. 그리고 메추리알이 잘 팔릴 때면 하루에600상자가 넘게 나가는데 그것을 포장하고 차에 싣는 시간이 길어지고 힘에 부쳐 조금이라도 굼떠지면 사장님은《아줌마 빨리빨리해요 그렇게 하면 70만원도 못 받아》라고 재촉하군 하였다. 그럭저럭 그들 부부는 그곳에서 2년 거의 부지런히 일을 했다.《나이가 원쑤》라고 종섭이는 어깨 쭉지가 물러 나는듯 하였고 허리 통증으로 어떤 날은 일어못날 때도 있었다. 아내도 이몸이 붓기고 치아가 빠지면서 음식을 씹기 힘들어 했고 촉수가 높은 전등불 밑에서 일을 하다보니 눈도 잘 보이지 않았다. 종섭이는《여보 이제 더 있다가는 앓아누워 담가에 들리워 갈지도 모르겠소 인젠 돌아 가기요.》라고 하니 아내도《2년간 벌면서 먹구살만한 돈은 벌었으니 돌아갑시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튿늘 그들은 사장님을 찾아가서《사장님 인제는 몸이 너무 아파서 계속 일할수 없군요 아무래도 집으로 돌아가야겠어요》라고 하였더니 사장님은 그동안 많은 고생을 시켜 미안하다면서 임금 이외 따로 5만원 더 주는 것이었다.이에 종섭이는 저도 모르게 눈물이 핑 돌았다 그도 그럴것이 그분은 욕은 욕대로 하면서도 한 핏줄을 타고난 동포라고 외우며 늘 살펴주고 인정이 넘치는 분이였다. 그들은 떠나면서 2년 거의 정이 들었던 그곳을 뒤돌아 보았다. 《잘 있거라 정든 메추리야!》 《잘 있거라 고국이여!》 그들은 귀국한후 한채의 아파트를 사서 새집에 들게 되였는데 정작 집에 들고보니 이국 타향에서 눈물나게 고생하던 지나간 일들이 삼삼하게 떠올랐다. 그래서 늘상 《돈은 더럽게 벌고 깨끗이 쓰면 된다》면서 그만큼 고생을 겪었기때문에 아빠트를 살 수 있고 피땀을 흘리며 번 돈이라 더없이 귀중함을 뼈속으로 느낀다고 외운다. <중국조선족대모임 한국생활수기 공모 작품>
    • 오피니언
    2014-12-03
  • 나의 주방 보조 생애
    ■ 이봉순 한국정부의 무연고동포방문취업제가 탄생하면서 나에게도 “행운”이 떨어졌다. 2008년 3월 9일, 나는 부풀어 오르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오매에도 그리던 한국땅에 들어섰다. 외조카의 집에 머무르면서 외국인 등록증과 취업교육을 받고 나니 3월은 훌쩍 지나가버렸다. 취직을 하자고 교차로 벼룩시장을 뒤져보니 모텔청소 일이 그래도 내 적성에 맞을 듯 했다. 그런데 대부분 모텔에서 경험자만 요구하거나 나이를 제한,아니면 외국인을 채용하지 않는다면서 조선족을 거부하는 바람에 할수 없이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곳이라면 그 어떤 일도 마다하지 않고 닥치는대로 하고싶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처음 취직한 곳이 경기도 화성시 마도면의 한 구내식당이였다. 이 곳은 편벽한 곳이라 버스정류소와도 멀리 떨어졌고 이 식당에서 식사하는 고정 인원이외오가는 사람 하나 볼 수 없었다. 내가 자는 곳은 주방 옆 칸이었는데 습한데다 냉장고 소음이 요란히 들려 처음에는 잠도 잘 수 없었다. 여기서 나는 주방보조로서 사모님과 둘이서 매일 240인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였다.중국에 있을 때는 출근하느라 바쁘다는 핑계로 남편과 둘이 먹는 끼니도 대충 해먹다 보니 주방 일 솜씨는 매우 서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든 겸손히 배우고 열심히 하리라고 다졌다. 일하는 첫날 아침, 사모님은 쌀은 창고에 있고 밑반찬은 여기 있고 된장은 저기 있고 냉장고엔 무엇이 있고 하면서 염불하듯 쭉 소개하는데 사모님이 가리키는 주방 옆간을 보니 거기에는 커다란 냉장고 6개가 어마어마하게 서있었고 옆에는 무엇이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크고 작은 통과 박스들이 줄줄이 놓여있었다. 사모님은 맨 먼저 점심밥을 할 쌀을 씻으라면서 큰 소래 3개에다 쌀을 쏟아 부었다, 나는 물을 붓고 두 팔에 힘을 주어 쌀을 문지르며 씻기 시작했다. 내가 하는 것을 본 사모님은 못마땅한듯 나를 한 켠으로 밀어내더니 밥주걱으로 쌀을 몇 번 휘젓더니 물을 찌워내고는 그렇게 둬 번 하면 된다는 것이었다. 그렇다. 일도 많고 쌀도 많은데 단 둘이 먹는 밥을 하듯이 할 순 없다. 한가지를 배운 셈이다. 그런데 쌀을 다 씻기도 전에 옆칸에 가서 가지., 미나리 감자를 가져다 다듬고 껍질을 벗겨 씻어 썰어놓으란다. 금방 가지 미나리를 다듬질했는데 또 가스 불에 나물 데울 물을 얹어놓으란다.나는 물을 가득 담은 알루미늄 솥을 가스불우에 놓고 솥뚜껑을 덮고 하던 일을 계속 하려는데 사모님은 “물 끓이는데 솥뚜껑은 왜 덮냐? 어디서 그렇게 하는걸 보았냐? 누가 그렇게 하라더냐.” .하며 연신 나무람했다. 물을 빨리 끓이려고 뚜껑 덮었는데 그것도 잘못인가? 내키지 않았지만 뚜껑을 열어놓고 하던 일을 또 하려는데 이번엔 옆칸에 가 김치를 가져다 썰란다. 지금까지 벌려 놓은 것만으로도 정신 못 차리겠는데 또 김치까지 가져다 벌려 놓아? 나는 대답해놓고 하던 일을 해치우고 김치를 썰려고 일손을 다그치는데 “김치 가져다 썰라는데 뭘 해? 내 말 못 들었어?” 하고 꽥 소리 지르는 것이었다. 그래서 하던 일을 다 하고 썰면 안 되냐고 한마디 여쭸더니 “금방 온 사람이 뭘 안다고 그래? 하라는 대로 그냥 하라.” 며 내 말을 들을 생각 하지 않았다 나는 사모님 뜻대로 김치를 가져다 썰어놓을 수밖에 없었다. 김치를 한창 썰고 있는데 또. 이걸 제자리에 놓아라 저걸 원래 자리로 가져가라 하고 연신 분부하신다. 처음부터 모든 물건의 제자리를 다 알리 만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만 지체되면 사모님은 “빨리, 뭘 해?” 하고 소리를 지르며 “먼저 하던 아줌마는 무엇이나 빨리 했는데 아줌마는 왜 그리 굼떠”하고 푸념한다. 사모님의 잔소리를 들으며 무조건 복종하고 무조건 빨리 하기 훈련부터 했다. 순서 없이 이일 저일 다 해보면서 한참 바삐 돌아 치니 어느덧 점심 때가 되여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사모님은 손님에게 밥을 떠 주면서 꼭 “맛있게 드세요.” 라고 말하란다. (200여 번이나?), 귀찮았지만 그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십여분 지나니 빈 그릇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것을 다 모아 퐁퐁 물에 씻고 세척기로 한번 더 씻은 후 제자리로 날라갔다. 손님이 다 간 뒤에야 우리는 점심을 먹었는데 입맛도 맞지 않고 주인들과 같이 먹는 것도 조심스러웠다. 설거지를 끝내니 두시반. 딱 반시간만 쉬고 또 저녁 준비를 해야 한단다, 오후에도 바쁜 가운데 잔소리는 끝없었다. 저녁 8 시에야 하루 일이 끝났는데 팔다리가 나른하고 허리가 시큰했다 이튿날 점심엔 고구마튀김을 하니 먼저 고구마를 씻어 손가락만큼 크기로 썰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곳의 칼 또한 집에서 쓰던 칼과는 달리 길고 끝이 뾰족해 쓰기에 불편해 보였고 큼직한 고구마들도 썰기 힘든 딱딱한 품종 들이었다. 고구마를 다 씻은 후 울며 겨자 먹기로 칼을 들었다. 처음 몇개는 그런대로 썰었지만 결국은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고구마를 썬다고 힘주었던 칼이 빗나가면서 면 바로 왼손 식지로 깊숙이 건너갔다. 흠칫하며 손을 뺐는데 손가락에서는 벌써 검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를 목격한 사모님은 “칼질도 어찌 그렇게 서투냐”고 또 핀잔이었다. 나는 미리 준비했던 밴드로 지혈 처치를 간단히 하고 하던 일을 계속 했다. 그러나 피는 멈추지 않고 계속 흘러나왔다. 잠시 후에 장갑 속이 너무 끈적끈적하고 불편해서 장갑을 벗고 보니 손목까지 피가 묻어 있었다. 피투성이가 된 손을 바라보는 순간 저도 모르게 뜨거운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손이 아프기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자본주의사회의 냉혹함과 무정함이 뼈저리게 느껴졌다. 그래도 돈 벌러 온 이상 모든 것을 참고 견디자며 이를 악물고 일에 달라붙었다. 그렇지만 몸은 내 의지를 따라주지 않았다. 이튿날부터 손가락이 쿡쿡 쏘기 시작했다. 그런 손에 큰 고무장갑을 끼고 일하려니 손은 더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럴수록 사모님의 꾸지람은 더 모질고 심해졌고 나 또한 모든 감각기관이 고장 난 듯 일을 더 엉망으로 해나갔다. 1, 사모님이 옆칸에 가서 된장을 가져오라는데 몇 번을 둘러보고도 찾지 못해 빈손으로 돌아왔는데 사실은 아주 잘 보이는 곳에 있었다. 2, 마요네즈 (듣지 않던 단어) 가지러 창고까지 가서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무엇을 가져오라 했던지 그 이름이 생각나지 않아 가져오지 못했다. 역시 잘 보이는 곳에 있었는데. 3, 냉장고에 있는 마늘을 가져오라 해서 6개의 냉장고를 다 열고 찾아보고서도 마늘이 없어 못 가져왔다. 나는 통마늘이거나 껍질 벗긴 알 마늘인 줄 알았는데 결국은 다진 마늘봉지를 말한 것이었다. 그럴 때마다 사모님은 “한글 모르냐? 눈은 어디 두었냐?” 라며 야단친다. 4. 바가지를 가져오라 하는데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어 또 그대로 왔다, (나는 집에서 심은 그런 바가지만 어디 있는가 살폈다.) 그런데 사모님이 가지고 온 것은 플라스틱으로 만든 작은 대야였다. 한국에서 그런 것을 바가지라 하는 줄 누가 알았나? 너무 민망해 몸 둘 바를 몰라 하는데 사모님은 또 사정없이 “바보야? 머저리야? 바가지도 몰라?” 하고 연방 내쏘는 것이었다. 5. 또 한번은 일하다가 x문 열라 하기에 보니 창문은 열려있었다. 그래서 나는 닫으라는 말을 열라는 말로 잘못 들었나 싶어 달려가 창문을 닫았다.. 그랬더니 사모님은 “열라는 문은 안 열고 열어놓은 창문은 왜 닫아? 왜 점점 더 멍청해지는 거야!”하고 많은 손님들앞에서 또 한바탕 꾸짖었다.” 자신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은 잘 알지만 사모님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너무 날카롭게 가슴을 찔렀다. 며칠 동안 하루 14시간을 그냥 이런 꾸짖음속에서 일을 했다. 어떤 때는 정말 쥐 구멍이라도 찾아 숨고 싶었다. 처음에는 그래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참고 견디며 열심히 일하려 하였지만 이런 수모를 받으며 일을 계속 하려니 자존심이 더 이상 허락하질 않았다. 6일째 되던 날, 꾸지람과 잔소리를 견디다 못해 끝내 “내가 그렇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여기서 나갈테니 다른 사람을 구하세요”라고 한마디 했다. 뜻밖에도 이 말을 듣는 순간 사모님은 놀라운 표정을 지으며 하던 꾸중을 뚝 멈추는 것이었다. 한참 동안 말없더니 “안 할 것이면 일찍 말하지, 구인광고는 어제 취소 했는데 …” 하고 제법 부드러워진 어투로 원망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사실 나도 여기서 오래 할 예산이었으나 내가 일을 너무 못해 사모님께 미안해서 더 있을 수 없어요. 그러나 다른 사람 구할 때까지는 열심히 할게요.” 했다. 이 말을 뱉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 했다. 사모님도 더는 말이 없었다. 그래도 그때쯤은 웬만큼 적응된 셈이어서 나도 눈치를 보아가며 스스로 일을 찾아 했다. 이날은 처음으로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일한 하루였다. 이튿날 사모님은 내가 사모님께 미안해서 가련다는 말에서 내 인품을 보아냈다며 가지 말고 계속 하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한주일만에 사모님한테서 처음 들은 기분좋은 말이었다. 이날부터는 저도 모르게 사모님에 대한 거부감도 없어진 듯 마음이 많이 편해졌다. 주방 일을 하는 외에 틈을 타서 여기저기 청소도 했다. 며칠 만에 찬장과 냉장고, 세척기와 솥벽의 타일까지 어데라 없이 오래 묵은 기름때를 죽 벗겨놓았다. 여기저기를 다 살펴보던 사모님은 흐뭇해하며 내가 전에 있던 아줌마보다 깔끔하게 일한다고 하였다. 처음 듣는 칭찬이었다. 그 후부터는 꾸중과 잔소리가 많이 뜸해졌고 나에 대한 말투가 퍽 부드러워졌다.. 가끔 내가 실수해도 예전처럼 핀잔을 주는 것이 아니라 유머를 섞어가면서 잘못을 지적해주고 때때로 칭찬도 해주었다.그러면서 여기서 계속 일해라면서 월급도 올려주겠다고 했다.그러나 이미 내뱉은 말인지라 사절했지만 내 기분은 많이 좋아져 가끔씩은 일하면서 흥얼흥얼 콧노래까지 흘러 나오군 했다.. 이렇게 며칠 지나고 14일 째 되는 날 저녁 연변에서 온 아줌마가 면접을 와 합의가 되여 나의 주방보조 생애는 끝났다. 떠날 때 사모님은 금방 정들었는데 가는 것이 서운하다며 옷견지며 화장품을 선물로 주는 것이었다. 나도 서운했다. 그래도 일하는 동안 나쁜 인상만 남기고 가는 것이 아니란 점에 위안이 갔다. 나의 첫 취직 기간은 비록 짧았지만 한국사회를 요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줬고 다음의 취직을 위해 양호한 기초를 닦았다.
    • 오피니언
    2014-11-30
  • 저우언라이가 마지막 남긴 싸인과 말 한마디
    (위인 저우언라이는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1975년 9월 20일, 병이 위독한 저우언라이(周恩来)는 부득불 병원입원 후의 4번째로 되는 대수술을 받게 되었다. 당시 저우언라이는 그 수술결과가 예측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저우언라이는 사업일군을 불러서는 1972년 6월 중앙의 비림정풍(批林整风) 회보회의에서 한 “‘몽골 언더르한 사건’에 관한 국민당의 여론날조 문제”란 보고의 녹음기록을 적은 문건을 한번 읽은 뒤 떨리는 손으로 거기에 싸인하면서 그 싸인 날짜와 환경에 대해 “1975년 9월 20일,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이라고 적었다. 이는 저우언라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한 싸인이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저우언라이는 가까스로 목청을 높여 한마디 맘속의 말을 하였다. “나는 당과 인민에 충성하였다! 나는 절대 투항파가 아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덩잉초우(邓颖超)는 후에 왕둥싱(汪东兴)을 통해 이 모든 것이 모우저둥(毛泽东)한테 전달되게 하였다. 1976년 1월 5일 새벽, 병원의 의료진은 병이 위독한 저우언라이한테 마지막 한차례의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저우언라의 병이 위독하다는 통지를 받은 베이징의 중앙정치국 성원 및 국무원 책임자들이 육속 병원으로 찾아와 병문안을 했다. 1월 7일, 저우언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숨소리는 매우 미약하였고 장기간 혼미상태에 있었다. 의료진 성원과 간호일군들은 주야로 병실을 지키면서 수시로 구급준비를 했다. 그날 밤 11시경, 저우런라이는 혼미상태에서 깨어나서는 두 눈을 간신이 뜨며 신변의 우제핑 의사한테 부탁했다. “나 여기는 별문제가 없을테니 당신들은 다른 환자들을 돌보시오. 당신들은 다른 환자들한테 더욱 수요될 것이오…” 이는 저우언라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 말이었다. 중국의 부강을 위해 평생의 노력을 다 바친 총리 저우언라이는 생명의 경각에 이는 마지막 순간에도 타인의 병치료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중국과 세계 많은 나라의 존경을 받던 세기적 위인 저우언라이는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향년 72세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1-30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0)
    ■ 김철균 제9회 역경의 지속 1968년 말에 접어들면서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문화혁명의 기세는 한풀 꺾이는듯 싶었다. 거리에서 조직과 조직사이의 무단적 폭력투쟁은 가라 앉았고 “독재대상”이 되었던 김용환도 풀려나왔다. 사회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듯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문화혁명의 동난은 계속됐다. 김용환은 일단 구금생활에서 풀려나왔지만 얼마 안있어 돈화의 어느 한 산골로 노동개조를 가야 했다. 말로는 “5.7간부학교”라고 했으나 기실 정배살이와 다름이 없었다. 이어서 초고중을 졸업한 큰 아들 영남이와 큰 딸 영순이가 같은 날 동시에 농촌으로 내려가 집체호생활을 하게 되었다. 문화혁명은 순자네 부부와 자녀를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그 때 그 세월, 이렇게 한집식구가 흩어져사는 가정이 어찌 순자네 가정 한집뿐이었으련만 그 당시 정신상, 경제상에서 순자가 받는 압력은 여느 가정과는 비할 수도 없었다. 한가지 실례를 들고 봐도 한꺼번에 식구 3명이 집에서 나가니 적어도 이불과 요 3채씩은 있어야 했다. 당시 집에 이불이라고는 고작 3채뿐이었다. 그러면 남편과 두 자녀한테 새 이불을 해주어 보내는 것이 마땅한 도리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다른 집들에서는 자식이 농촌집체호로 간다고 하니 모두 새 이불을 해주는 바람이 일다싶이 했다. 그러다보니 연길시내의 몇몇 백화상점들에는 이불등과 이불안감 그리고 이불솜이 거덜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많은 집들에서는 자식들한테 이불을 해주어야겠는데 천표와 솜표가 없어서 긍긍 속을 앓기도 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순자네는 천표와 솜표가 남아돌았으나 돈이 없어 새 이불 3채씩이나 할 수 없었다. 순자는 남들이나 자식들한테 새 이불을 해줄 수 있게 하기 위해 집에 있는 천표와 솜표를 몽땅 남들더러 쓰라고 줘버렸다. 이를 두고 남들이 “다문 얼마씩이라도 돈을 받고 천표와 솜표를 팔 것이지 왜 그냥 주고 말았느냐?”, “나 같으면 찢어버리거나 부억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릴지언정 남한테 그냥 공짜로 안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썩 후에 있은 일이다. 집에 있는 이불 3채는 남편과 영남, 영순이가 각각 한채씩 가지고 갔다. 그러자 집에는 이불 한채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구 누님, 집에 이불 한채도 없이 밤에 어떻게 잔다고 그러오?!” 어느 날 순자네 집에 왔던 남동생이 기가 막혀하며 혀를 끌끌 차다가 이불천과 솜을 사줄터니 천표와 솜표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순자가 하는 말이 천표와 솜표는 또 남들한테 몽땅 줬다는 것이 아닌가. 남동생은 너무 한심하여 머리를 흔들었다. “누님, 그 것까지 남들한테 줘버리면 어떡하겠다는거요? 그렇게 마음이 헐하니 가난밖에 차례지지 않는거요.” 남동생은 누나를 책망하면서도 자기의 집에 가서 천표와 솜표를 가져다서는 돈과 함께 이불감을 사라면서 순자앞에 내놓았다. 그날 순자는 반나절 눈물을 흘렸다. 남동생의 소행이 고마워서 울었고 자식과 남편한테 잘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울었다. 하지만 그토록 인심이 헤푼 자신을 탓하면서도 밤만 자면 또 남한테 뭔가를 주지 못해 속을 앓군 하는 순자였으니 이는 곧바로 그의 천성이었다. 2 착한 순자한테 세월은 무정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영남이가 하향한 안도현의 ××산골과 영순이가 하향한 의란공사 ××촌은 째지게 가난한 고장이었다. 죽도록 일해도 한공에 20여전밖에 가지 않는 고장이라 벌어서 집을 돕기는커녕 자립조차 할 수 없었다. 영남이와 영순이는 “돈 5원만 보내주오”, “털모자가 없어서 겨울에 일할 수가 없소”,“신이 다 판났는데 발이 시려서 일하러 다닐 수가 없소” 하며 한달이 멀다하게 찾아와서는 손을 내밀었다. 자식들뿐이 아니었다. 돈화에서 노동개조를 하는 남편 김용환도 인편에 신과 장갑을 보내달라고 부탁해왔다. 당시 집에서는 순자는 물론 영옥이, 영애와 경남이, 김진 모두가 동복과 겨울신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석탄을 절약하느라고 불을 적게 때다 보니 집이 춥기로 말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독의 물에 살얼음이 낄 지경이었다. 남편과 자식 모두가 헐벗는 판에 과연 누구부터 돌봐야 하는가? 결국 순자는 손수 자기의 손으로 손장갑 몇컬레를 만들고 아끼고 아꼈던 생활비로 겨울신과 두꺼운 양말 등을 사서는 남편한테부터 보내주었다. 왜서였던가! 당시 순자는 그저 가정의 세대주인 남편만은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뿐이었다. 남편이 건강하게 살면서 역경을 이겨내고 무사히 돌아와야 이 가정의 앞날도 운운할 수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순자는 역경일수록 힘을 낼 수 있도록 자식들한테 자신감을 주기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순자의 말마따나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니 정신적으로 힘을 북돋우어주는 것이었다. 1968년 12월 19일, 순자가 큰 아들 영남이한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 아들 지식청년 영남아,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의 간고한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겠구나. 어머니는 농촌에서 살아보았기에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간고분투하는 뇌봉정신을 본받아야 하느니라. 영남아, “뇌봉일기”의 77페지에는 다음과 같은 몇개 구절이 씌어져있다. 가장 곤난하고 간고한 사업을 할 때에 황계광을 생각하면 온몸에 힘이 솟구치고 투지가 억세어진다. 임무를 수행할 때 구소운을 생각하면 자기한테 엄격히 요구하게 되고 규율을 잘 지키게 된다. 향수를 받게 될 때마다 베쮼동지를 생각하기만 하면 먼저 남을 돌보고 후에 자기를 생각하게 된다. …… 영남아, 이러한 영웅들의 일기를 잘 학습하여라. 영웅들이 한 말들은 흔히 평소에 사람들한테 많은 힘을 주고 살아감에 있어서의 거울이 되고 등대로 될 때가 많으니 이를 항상 명심하거라. …… 순자는 이런 편지를 큰 아들 영남이한테만 쓴 것이 아니라 선후로 집체호에 나간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 등 모든 자녀들에게 써보냈다. 그 당시 순자는 모든 자녀들의 “거울”이였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하는 일은 모두 옳다고 여겼고 어머니의 말씀이라면 100%로 잘 따라주었다. 농촌에 내려간 자녀 3명은 비록 생활적으로는 아주 가난하게 보냈지만 농촌의 각종 활동에서 모범을 보였다. 큰 아들 영남이는 아버지한테서 배운 의학지식을 토대로 생산대 사원들의 병을 떼주기도 하여 “맨발의사”라며 큰 호평을 받았고 영순이도 아주 부지런하게 일한 결과 집체호에 나간지 얼마 안되어 생산대의 부녀대장과 총 보도원으로 되었다. 이렇듯 어머니인 순자한테서 남다른 교양을 받아서인지 영남이와 영순이는 물론 후에 집체로로 내려간 영옥이와 영애 또한 부지런하고도 착하고 남을 잘 도와주어 항상 사원들의 입에 올라 칭찬을 받군 했다. 그중 1973년에 연길시 흥안공사 대성촌의 집체호로 내려간 영애한테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번은 영애가 판난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본 순자는 그 것이 가슴아파 큰 결심을 내리고 새신 한컬레를 사주면서 시내로 오거나 집에 들어올 때마다 싣으라고 했다. 헌데 후에 집으로 온 영애를 보니 여전히 그 해진 신을 신고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영애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다음과 같았다. “어머니, 욕하지 말아주세요. 기실 우리 생산대에 저보다도 엄청 더 가난하게 보내는 가정이 있어요. 그래서 그집에 있는 제 또래의 친구한테 그만 그 새신을 주고 말았어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순간 순자는 어이가 없었다. 큰 결심을 내리고 사준 새신을 남한테 훌쩍 줘버렸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영애를 탓할 수도 없었다. 자기 자신이 자식한테 늘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자녀들한테 교양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녀들 또한 모두 자기를 닮아 저렇게 마음이 헐하고 착한데야 어찌하랴. 한편 당시 돈이 없어 영애한테 재차 신을 사주지 못한 것으로 하여 순자는 지금까지 그 때의 일을 가슴아파하며 늘 입에 올리군 한다. 1969년의 음력설전야, 남편 김용환은 “5.7간부학교”에서 특별허가를 해주었기에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영남이와 영순이도 음력설을 쇠러 집으로 왔다. 음력설 날 아침, 순자는 돼지고기에 감자를 섞어서 볶은 채와 통채로 덥힌 두부 등을 밥상에 차려놓고 전날 줄을 서서 받아온 술도 주전자에 덥혀갖고 남편한테 내놓았다. 아내가 부어준 술을 서너잔 마시더니 남편은 급기야 낙루하는 것이었다. “내가 나쁜 놈이지 당신한테 뭐가 있다고 손을 내밀었담. 아무렴 내가 나쁜 놈이구 말구…” 그도 그럴 것이 설전날 집이라고 찾아온 영남이와 영순이가 입은 모습을 보니 남루하기가 말이 아니었다. 둘 다 판나서 솜이 삐죽히 나온 솜바지에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험하게 판난 솜신을 신고 나타났던 것이다. 억이 막힌 용환이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보지 않았지만 그 동안 아내가 얼마나 고생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기한테 죄가 있어서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 모두가 고생한다는 것을 용환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참고 참았던 모든 것이 음력설 아침 술이 몇잔 들어가자 울컥 치밀어올랐던 것이다. “여보, 미안하오. 당신한테 부담만 가득 안겨준 내가 정말 당신을 볼 면목이 없구려. 아이구 내가 못난 놈이지.” “여보, 설날인데 왜 눈물을 보이는거예요. 골란은 잠시적인 것이예요. 당신은 청백한 사람이고 앞으로 꼭 모든 것이 좋아질 날이 있을거예요.” “아버지, 저희들도 아버지를 믿어요. 아버진 훌륭하고 양심있는 인민교원이예요. 저희들도 잠시 고생하는 건 모두 참을 수 있어요.” 아들 영남이와 딸 영순이와 영옥이도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래 그래 고맙다. 이 아비는 청백하다.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당과 국가에 미안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만하자. 자, 설날인데 우리 함께 설음식을 먹자구나. 그리고 영남아, 너도 이젠 사회로 나왔으니 어른이 되었다. 자, 이 아비가 부어주는 술 한잔 받거라.”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1-28
  • 송미령과 월키 사이에 진짜 부당관계 있었을까?
    1942년 늦여름, 당시 동맹군은 많은 전쟁터에서 저조기를 겪고 있었다. 미국의 루즈벨트는 미국인은 전쟁중에서 반드시 단결해야 한다고 여러번 강력하게 강조하였다. 그는 1940년에 대통령 선거에서 낙선된 월키 루이스를 여러 나라들을 방문시키면서 미국은 반드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준엄한 전쟁시련을 겪고 있는 나라들에 알리려 계획하였다. 그 당시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송미령은 어느 날 공상희의 거처에서 중국을 돕고 있는 미국에 감사를 표하기 위해 연회를 차렸다. 연회에서 월키는 송미령과 송경령의 중간에 앉았다. 연회가 한창 무르익을 무렵 송미령은 월키의 팔을 잡으면서 “제가 당신한테 나의 다른 한 언니를 만나게 할게요. 언니는 신경통이 있기에 오늘 연회에 오지 못했어요.” 연회도중 송미령과 월키가 자리를 뜨자 사람들은 의론이 분분했다. 연회에서 공상희는 송미령과 월키가 없어지자 매우 황당해하며 두 남녀의 행방을 추궁하였다. 그 해 10월 중순, 장개석은 중국방문을 마친 월키를 위해 송별모임을 조직했다. 송별모임은 수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예당에서 진행되었다. 이날 장개석과 송미령이 모임에 나타나자 모임의식이 시작되었고 장개석과 송미령은 특별의자에 앉았다. 축사가 끝나나 장개석과 송미령은 월키와 기타 내빈들을 접대하기 시작, 약 1시간 뒤 월키는 헨리 챈들러(당시의 수행인원)를 불렀다. 그는 몰래 헨리한테 잠시후 자기가 송미령과 함께 모임장소를 떠날테니 자신을 대신해 장개석의 곁에 있어달라고 부탁했다. 이어 월키와 송미령이 몰래 장소를 떠나자 헨리는 장개석의 곁을 떠나지 않고 이것 저것 물음을 제기하면서 장개석의 주의력을 분산시키기에 노력했다. 행사를 마치고 헨리가 거처에 돌아온 뒤 한밤중이 되자 장개석이 노기등등해 들어왔으며 자동소총을 잡은 3명의 사병이 뒤를 따랐다. 장개석은 가까스로 노기를 억제하며 헨리한테 물었다. “헨리선생, 당신 빌기가 어디에 있는지 알지요?” “전 모르는데요.” 헨리가 머리를 가로 저었다. 장개석은 방안의 모든 것을 수색했다. 침대밑을 들여다 보고 옷궤도 열어본 뒤 맨 나중에 방안에서 나갔다. 월키는 새벽 4시경에야 거처로 돌아왔다. 그는 방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송미령과 함께 있었던 일을 털어놓으면서 이미 송미령을 미국으로 초청하였다고 자랑했다. 이에 헨리는 “바보!” 라고 월키를 꾸중한 뒤 이제 귀국하면 부인과 아들이 공항에 마중나올텐데 장부인과 함께 비행기에서 내리면 서로 입장만 곤난하게 된다면서 또한 이제 1944년이 되면 재차 대통령 선거경쟁에 나서야 할 것이 아니냐며 충고하기도 했다. 그 이튿날 헨리와 송미령은 어느 한 비밀거처에서 만났다. 이는 이전에 그들이 자주 만나던 거처였다. 이날 헨리는 송미령한테 월키와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는 안된다고 일침을 놓았다. “누가 안된다고 해요?” “바로 나요.” 이러자 송미령은 즉각 손톱을 날카롭게 살려서는 헨리의 얼굴을 긁어놓았다. 그 뒤 송미령은 미국인 클라라한테 쓴 편지에서 “당시 나는 진짜 월키 선생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고 싶었으나 남편(장개석)이 내가 인차 미국으로 가는걸 원하지 않았다”고 고백하였다. 월키와 헨리가 떠나는 날, 그들은 송미령이 차린 한 자선기구에서 송미령과 작별, 이날 송미령의 사무실로 들어간 월키는 인차 문을 닫았고 헨리가 문밖에서 1시간 20분 가량 기다려서야 이들이 함께 나왔다. 이날 송미령은 이들 두사람과 함께 공항까지 갔다. 월키는 비행기에 오르기전에 송미령을 한번 포옹하면서 얼굴에 미묘한 키스자욱을 남겼다. 출처: 신화넷 김철균 편역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1-26
  • 中 연변 유명 소품배우 김문혁씨 투병 중...자살도 시도한 적 있어
    [동포투데이] 연변의 유명한 소품배우(코미디) 김문혁 씨(49세)가 2010년부터 4년간 투병 중이었던 안타까운 사실이 뒤늦게 알려졌다.1992년 연길시 조선족구연단에 입단한 김문혁 씨는 근 20년간 ‘술친구’,‘이웃사이’ 등 80여편의 소품과 ‘사랑의 품’, ‘샘’ 등 드라마에 출연한 중견 배우이다. 때로는 두 오누이를 둔 삼륜차몰이 조선족 아버지를 진솔하게 그려낸 연기자로, 때로는 조선족들 특유의 일상을 재치 있게 무대에 녹여낸 소품배우로 많은 사랑을 받았다. 2010년부터 투병중..중풍에 신장결핵에 악재 겹쳐.. 지난 2010년 3월, 중풍으로 연변병원에 입원하며 김문혁 씨의 기나긴 투병 생활이 시작되었다. 연변병원에서 짧은 치료와 함께 “적절한 휴식과 운동을 하면 괜찮다”는 결과를 받고 퇴원했지만 얼마 뒤 신장결핵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1년간 신장을 지키기 위해 갖은 노력을 했지만 2011년 김문혁 씨는 끝내 신장제거 수술을 받았다. 중풍치료와 신장제거수술로 인해 심신이 지친 김문혁 씨는 유서 한 장 써놓고 자살을 시도했다. 다행히 어머니가 인사불성이 되어있는 김문혁 씨를 발견하고 병원에 연락을 취해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지인들이 왜 그랬냐고 안타까움에 묻자 정신을 차린 김문혁 씨는 “정말 살기 싫어서 그랬다”고 담담하게 대답했다. 김문혁씨는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하는데 신장수술로 인해 허리가 상상 못할 정도로 아프고, 손발이 말을 잘 안 듣고, 숨을 쉬는 것마저 어려워 말하는 것도 힘겹다. 현재는 전립선까지 문제가 생겨 하루에 열대여섯 번은 화장실을 들락날락해야 하니 잠도 제대로 잘 수가 없다.”고 말했다. ‘큰 병원에서 제대로 진찰받는 것이 마지막 희망’ 딱히 호전 될 기미는 보이지 않지만 동료들과 동창생들의 물질적, 정신적 격려에 힘입어 매일을 전쟁 치르듯 운동과 약, 영양제, 물리치료로 가까스로 버티고 있는 김문혁 씨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 신물이 난다. 점점 더 막막하고 답답하다. 무대가 그립다”고 고통을 호소했다. 오랜 투병으로 치료비는 거덜 났다. 현재는 다달이 약값과 물리치료비를 제외하고 집세 천원을 지불하는 것도 버겁다. 그동안 큰 병원에서 진찰과 치료를 받을 엄두도 못 내고 연변병원, 연변뇌과병원, 연변조이병원 등 연변지역의 병원들만 전전했다. 현재 연변뇌과병원에 입원중인 김문혁씨는 “만약 그 동안 여러 동창생들, 동료들과 친구들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버티기 힘들었을 것이다.“ 라며 고마움을 전했다. “김문혁씨의 한 열광팬으로써 그냥 지켜보고만 있기가 안타까워 딱 한번이라도 큰 병원에 가서 진찰을 받아봤으면 어떨까 하는 바램 때문에 한국에 거주 중인 동포들에게 지원 요청을 하게 됐다”며 제보자는 말했다. 지난 날 우리에게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큰 웃음과 추억을 선물했던 배우 김문혁 씨, 이제 우리가 그에게 작은 힘으로 보답 할 수 있는 순간이 왔다. 소주 한 잔 값 3000원, 응원의 문자 한 통이라도 김문혁 씨에게 희망이 되고 인생역전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한 때다. 김문혁 씨 전화번호: 151-4335-1118 계좌번호: 4563510600024527007 (중국은행) 한국 연락처: 김문혁 씨 후배 신명숙 010-9127-7767 한국 후원계좌: 09340104113529(국민은행) 후원하시는 분은 입금 후 꼭 문자로 응원메세지를 보내 주세요
    • 오피니언
    2014-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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