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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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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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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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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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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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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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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혁 칼럼] “언브로큰” 그리고 윤동주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1 화제의 영화 “언브로큰(Unbroken)”이 지난 주말 드디어 중국에서 상영되였다. 중국에서는 영화에 앞서 지난 2011년경에 원작소설이 이미 출간되었고 이번 영화의 개봉에 맞추어 소설이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출간되었다. 할리우드의 톱스타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 대신 연출한 영화는 상영전부터 일본 극우들의 온갖 음해와 날조 왜곡으로 년초부터 화제가 되었다. “언브로큰”의 개봉 소식에 일본 극우단체들이 보이콧에 나서는가 하면, 안젤리나 졸리의 일본입국금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등 그 행태가 도를 넘어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영화에 출연한 재일 교포도 더불어 곤욕을 치르고있다고 한다. 일본 우익들이 이 영화에 발끈한 원인은 무엇일가? “언브로큰”은2010년 발간된 후 180주 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미국 작가 로라 힐렌브랜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실존 인물인 루이 잠페리니의 실화를 스크린에 담은 작품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참가한 미국의 육상선수였던 루이 잠페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작전을 수행하던중 전투기 고장으로 태평양에 추락해 표류하다가 일본 포로 수용소에 끌려가게된다. 영화는 주인공이 일본 포로 수용소에서 850일 동안 겪게되는 무자비한 역경의 과정이 담겼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소재로 했기에 영화가 상영전부터 일본우익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영화적 제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본군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만행을 대부분 다루지 않아 원작에 비해 훨씬 관대했다. 원작에 일본군의 중국 난징대학살 문제나, 십여번 나오던 위안부 얘기도 생략됐다. 일본군이 잠페리니를 비롯한 미군 포로들의 정맥에 희뿌연 코코넛주스를 놓으며 생체 실험을 한 얘기도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원작에는 전범 용의자였지만 수년 뒤에는 일본 총리가 됐던 기시 노부스케와 관련된 일화도 들어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현 아베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다. 2 2차세계대전 당시 영화에서 나오는 루이 젬페리와 비슷한 경력의 사건이 또 하나 있다. 1945년 5월, 미군 B29 폭격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11명이 추락,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이들 중 여섯명은 산 채로 해부된뒤 소각되었다. 규슈제대 의학부는 이들을 상대로 산 사람의 혈액을 뽑아낸 뒤 바다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에는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대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뜬금없는 비약일지 몰라도 바로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였다. 3 일제의 마수에 떨어진 미군포로들이 비운을 겪던 바로 같은해인 1945년 이른봄의 어느 날, 후쿠오카형무소의 한 독방 감옥에서 외마디 비명이 내질러진다. 이는 윤동주라는 한 문학청년이 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절규었다. 1943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사상범으로 피체된 윤동주와 송몽규는 “독립운동”이라는 죄목으로 후코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1945년 용정의 고향집으로 매 "2월 16일 동주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라는 비보가 날아 들었다.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촌인 윤영춘과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로 갔다. 두 사람은 먼저 살아 있는 송몽규를 면회했다.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는 간수의 눈을 피해 “저놈들이 주사를 놓아서 이 모양이 됐고, 동주도 이 주사를 맞고….”라고 간신히 한 마디를 남겼다. 후쿠오카 형무소는 규슈대학 의학부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이곳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이 이루어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윤영석이 후코오카 감옥에 갔을 때에도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명이 강제 주사를 맞기 위해 줄 서 있는것이 목격되었다. 가족이 윤동주의 유해를 찾아간지 한달도 되지 않은 3월7일 송몽규 역시 감옥에서 꼭 같은 증세로 숨을 거두었다. “언브로큰”에서 코코넛을 미군포로에게 주입했듯이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주사에 강력한 의문의 초점이 모아진다. 이에 대해 일본인 평론가 고노 에이지 는 “그 의문의 주사”는 당시 규슈제국대학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약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인체에 바다물을 주입할 경우, “바다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고 한다. 같은 시기 후쿠오카 감옥에서 수감자들이 주사를 맞은뒤 받았다는 “암산 테스트”는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실험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널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암산은 “신경기능을 통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판단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시행정실록을 보면 후쿠오카형무소에서는 1943년 64명, 1944년 131명, 그리고 1945년에는 259 명이 옥사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재소자들을 상대로 대규모의 생체실험을 했으리라는 심증을 안겨준다. 그 무간나락에서 문학청년 윤동주가 극악한 일제의 생체실험의 제물이 되었된 것이다. 올해는 일본의 패전 70주년, 민족의 해방 70주년이다. 또한 윤동주의 옥사 70주기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의 한편의 영화를 계기로 중.한·일 과거사전쟁은 이제 미·일 역사전쟁으로 확전되고 있는 가운데 다시 일제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절한 우리의 시인을 다시금 환기해 본다. 이 처럼 일본으로서는 감추고 싶은 치부와도 같은 전쟁의 역사가 우리 시인의 애닲은 죽음에도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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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05
  • [한국생활수기] 이제라도 배워야지
    ■ 김춘식 전에 한국으로 들어오기전 교포들에게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한국에서는 외래어를 너무 많이 써서 생활에서 상당히 불편하다는것이였다.나는 그래도 설마하고 그것을 믿지 않았는데 이번에 한국에 들어와보니 그 말이 실말이였다.일상용어에 외래어가 너무 많다보니 한국인들과 얘기를 나누다가도 알아듣지 못해 무엇할 때가 많았고 신문을 읽다가도 너무도 많은 외래어때문에 내용을 이해하지 못할 때도 많았다. 거리를 거닐다가도 알아볼 수없는 영어자모와 외래어 간판을 보면서 무식한 나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그래서 때로는 눈뜬 소경이요 말할줄하는 벙어리이기도 했다.같은 말을 쓰는 고국이지만 문화의 장벽은 상상이외로 두터웠다. 며칠전 조카가 놀러와서 했던 말이 생각난다. 외래어를 모르니 회사에서도 골탕을 먹을 때가 많다고 했던 말.이말 저말 주고받다가도 한국인 동료들이 외래어를 쓰면 무슨 소리인지 몰라 어리둥절해지는가 하면 심부름을 나갈 때도 외래어를 잘못 기억해 엉뚱한 곳에 다녀와 동료들의 조롱을 받을 때가 있고 외래어로 된 공구 이름을 잘못 기억해 다른 공구를 가져와 선배한테 혼나기도 한단다.그러면서 여기는 쉬운 우리 말을 놔두고 외래어를 너무 많이 쓰는게 참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불만을 표했던 조카다. 나도 외래어를 잘 몰라 불유쾌한 일을 겪은적이 한두번 아니다.일자리를 찾으려고 직업소개소에 갔을 때였다.이것 저것 물어보면서 소장님이 나에게 여러가지 직종을 소개하였는데 그것이 전부 외래어라 나는 하나도 알아들을수 없어 소장님께 그것이 무슨 일들을 하는것인지 한국어로 소개해달라고 하였다.그래서 소장님이 일일이 한국어로 소개하는데 다 내 마음에 드는 직종들이라 그중 아무거나 해도 괜찮다고 하니 어디 어디를 가라고 하였다 그런데 그 회사명칭 역시 외래어였다.그래서 내가 알아듣지 못하고 선자리에 어정쩡해 서있자 소장님은 어처구니 없어하는 표정을 짓더니 나에게 중국에서 무슨 일을 해봤냐고 물어보는 것이었다.내가 교사직에 종사했다고 하자 소장님은 약간 비꼬는듯한 어조로 «참, 교포들은 거짓말을 너무 한다니까.오는 사람마다 교사직에 있었다는군 ㅡ»하고 말꼬리를 길게 뽑았다. «아니.무슨 말씀을 그렇게 ?내가 거짓말을 하다니요.»내가 언성을 높이며 반문하자 소장님은«아니 ,그래 교사직에 있었다면 대학은 나왔겠는데 어찌 다들 영어를 그렇게 모른단 말이요»하며 나를 흘겨보는 것이었다.그의 말도 일리가 있었다.하지만 나는 인츰 웃으며 반박했다.«그건 소장님이 중국실정을 모르고 하는 말씀이고요.중국엔 대학을 나왔어도 영어를 모르는 사람이 얼마나 많다구요.» 나는 차근차근 그 원인을 설명했다.중국은 문화대혁명의 영향으로 한동안 중학교에선 물론 대학교에서도 외국어과를 설치하지 않았다.그래서 지금 50세부터 65세 연령대에 해당한 중국인 대부분은 외국어를 모른다. 또한 문화대혁명이 끝난후에야 중학교에서 외국어과를 설치하기 시작했는데조선족 중학교들에서는 90년대 초중반까지 기본상 일본어과를 설치했다.그러니 삼십대 후반의 조선족들이 대학을 나와도 영어를 모르는 것은 매우 정상적인 일이라며 나도 비록 대학을 나오고 고등학부에서 한국어를 수십년간 가르치긴 했지만 외국어를 전혀 모른다고 알려주었다. 나의 해석을 듣고난 소장님은 연신 머리를 끄덕이더니 허허 웃으며 아까 자기가 무례했다며 사과하였다.그날 나는 그가 써준 주소대로 회사에 면접보러 갈 때도 그놈의 외래어때문에 여기저기 길이 헛갈려 숱한 애를 먹었다. 영어를 몰라 애먹은적은 그번뿐이 아니였다.한국돈을 위안으로 바꿔 중국에 송금하려고 중국건설은행 서울지점을 찾아간 날은 건설은행이 자리잡은 호텔을 눈앞에 두고도 찾지 못해 주위에서 뱅뱅 반시간너머 헤맸다.나에게 그 호텔이름을 알려준 조카딸이 영어를 모르는데다 나역시 영어를 모르다보니 조카딸도 나에게 호텔이름을 약간 틀리게 알려주었고 나는 그것을 또 틀리게 적다나니 서울 파이낸스센터가 엉뚱한 이름으로 바뀌였던것이다.그러니 그 호텔의 경비원도 내가 말하는 호텔이 어디 있는줄 몰랐던것이다.결국 그날 나는 근처에 있는 안내소를 찾아 안내원아가씨가 가리켜 주는대로 그 호텔을 찾을수 있었다.그래서 내가 그 센터7층에 있는 중국건설은행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퇴근시간이 넘었다. 결국 그날은 헛걸음을 하고 이튿날 다시 찾아가지 않으면 안되였다. 그나저나 이미 한국에 온이상 한국생활에 적응되여야 하고 또 그러자면 한국문화에 융합되여야 하는데 영어를 전혀 모르니 어떻게 해야 할지?내가 영어를 모른다고 해서 한국인들이 영어를 너무 많이 쓴다 탓하는 것도 무리고 순수 한국말을 쓰겠다고 고집하는것도 통할리가 없다.한국에서의 외래어 사용은 이미 수십년의 역사를 거쳤고 또 많은 한국인들의 일상 용어로 변해버렸기에 그것을 굳이 우리 말로 고칠 필요도 없다.외래어 사용은 세계문화경제의 발전과 보조를 맞춘 한 나라의 경제문화발전의 필연적 결과인바 이는 누구도 막을수 없는 역사조류인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가?방법은 단 하나.이제라도 하나하나 배우는것이다.영어자모를 하나하나 배우고 문법을 하나하나 터득하고 외래어 단어를 하나하나 외워야 하는것이다.그러면 어떤 사람은 말릴것이다.말도 안되는 소리라고.오십대 중반의 나이에 그 까다로운 외래어들을 어떻게 기억한다고?하지만 나는 한번 도전해보기로 마음먹었다.우선 겁먹지 말고 경험해 보고싶었다.그래서 중국에 있는 아들에게 전에 내가 집에서 글쓸 때 가끔 펼쳐보던 <한국어외래어사전>을 부쳐보내라고 했더니 한주일도 안돼 그것을 인편에 보내왔다.하여 나는 그날부터 짬이 생기는데로 부지런히 그것을 펼쳐들고 보기 시작했는데 신문을 읽다가도 뜻을 모르는 외래어가 있으면 사전을 펼쳐들고 그 단어를 찾아보았고 텔레비를 보다가도 주인공들의 대화가운데 내가 모를 외래어가 있으면 또 사전을 펼쳐들었으며 거리를 오가다가도 모를 외래어들을 한두개씩 적어가지고 와서 사전을 펼쳤다.그럼에도 사전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외래어들이 많아 안타까울 때가 한두번이 아니였다.전날 <벼룩시장>을 읽다가 <홈플러스에서 착한 서비서를 실시한다>는 기사를 보고는 <홈플러스>란 대체 뭘 가리키는지 알아보려고 사전을 뒤져보았지만 그 단어가 없어 안타까왔고 셋방에 들어 텔레비와 컴퓨터선을 늘인 날에는 일군들이 넘겨주는 를 받아놓고 이 무엇을 뜻하는지 몰라 아무리 사전을 뒤졌으나 역시 찾지 못해 안타까왔다. 그나저나 사전을 뒤져보며 하는 외래어공부 재미는 쏠쏠하다.날마다 외래어 몇개씩 익히는데 불과하지만 전에 없었던 수확이요 또 생활에도 큰 도움이 있는지라 하면 할수록 신이 난다 .이제는 신문을 펼칠 때면 아예 외래어사전도 함께 펼쳐놓는다. 이제보니 나에게 있어서 외래어공부는 방법이나 기억의 문제보다 마음의 문제였다. 요즘은 마음을 다잡고 의식적으로 모르는 외래어를 좀 더 많이 찾고 좀 더 부지런히 사전을 펼쳤더니 외래어 장악량이 퍼그나 많아졌다.그리고 직장에서나 거리에서 때로는 남의 퇴박을 받으면서도 모를 외래어의 뜻을 부지런히 물어 기억해둔다. 공자님의 «세사람이 같이 걷게 되면 그 가운데는 반드시 나의 스승이 있도다.»란 말이 나한테 딱 들어맞는다.동료나 이웃 및 길손 모두가 지금은 나의 외래어선생으로 되고 있다. 나에게 있어서 수동적으로 생활에서 나타나는 어려움을 대하기보다는 주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생활속의 난관을 타개해 나가는것이 오늘 취해야 할 자세이다. 문제를 피하기보다는 나의 존재감을 높이기 위해 문제를 찾아 다니자.일을 하다보면 반드시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다.그땐 어려움을 피하려하지 않고 그것을 극복하기 방법을 대야겠다.뚜렷한 목표가 있어야만 꿈을 실현할수 있을게 아닌가.나에게 있어서 배움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만이 성취를 가능케한다.누군가 공부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예의자 세상에서 제일 즐거운 탐험이라 했다.배움만이 내가 다문화의 이 사회에 적응하는 가장 유용하고 확실한 방법이 아니겠는가?배움만이 생존과 발전의 지혜를 익히고 내 삶을 더욱 풍성하게 만드는 일이라 하겠다.자아는 발견하는게 아니라 만들어가는것이다. 어떻게 해야지하고 자꾸 고민하기보다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극복하는 실천에 나서고저 한다 .단술에 배부를 욕심보다는 조금 조금씩 꾸준히 실천해보면 어떨가? 오늘 <벼룩시장>신문에 부천시 소사구 송내1동 주민센터에서 <영어회화야간강좌> 를 운영한다는 보도가 실렸는데 그곳 주민들이 참 부럽다. 동네에서 공짜로 일 여가에 영어를 배울수 있으니 얼마나 좋을가?
    • 오피니언
    2015-02-01
  • 세계에서 가장 위대난 문명기적 시리즈(28)
    만리장성의 자료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중국, 지점: 동쪽은 압록강으로부터 서쪽의 가욕관(嘉峪关)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북부와 중부의 9개 지구를 횡단 함의: 중화민족의 위대한 상징임 만리장성은 중국과 세계에서 수건시간이 제일 길고 공사량도 제일 방대한 고대군사의 방어공사였다. 만리장성은 기원전 8 세기부터 수건하기 시작하여 그 수건역사가 장장 2000여년이 걸렸으며 중화문명의 견증으로 불멸의 역사적 기념비로도 된다. 장성은 성벽을 주체로 성장(城障), 관성(关城), 병영, 초소, 봉화대 등 허다한 군사와 생활시설로 되어있으며 전투, 지휘, 관찰, 통신 등 종합기능을 갖고 있다. 지금 만리장성은 그 방대한 공사와 유구한 역사 및 심원한 문화적 가치로 하여 중화민족의 위대한 상징으로 되고 있다. 가장 긴 군사방어시설 장성의 건축역사는 최초로 거슬러 올라가면 서주시기라고 해야 할 것이다. 춘추전국시기 여러 열강들은 패권을 잡기 위해 서로 장성을 쌓기 시작, 기원전 220년에 이르러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은 나라의 안전을 보호하고 북방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이 방서공사들을 하나로 이어 완정한 방어체계로 구축하였으며 동시에 부대건축과 확건을 진행, 동쪽의 요동으로부터 서쪽의 임조에 이르러 만리에 달해 그 때로부터 만리장성이라 불리게 되었다. 현재 비교적 완정하게 보존되고 있는 장성은 동쪽의 압록강으로부터 서쪽의 가욕관까지 6700 킬로미터에 달하는데 그야말로 장관을 이루고 있다. 성벽, 관성과 봉화대 군사방어체계의 구성부분으로 볼 때 성벽, 관성과 봉화대는 매우 중요한 작용을 한다. 장성의 성벽은 방어체계의 주체로서 평균 두께가 7 – 8미터에 달하며 제일 넓은 곳은 말 다섯필과 사람 10명이 동행할 수 있는 규모이다. 관성은 장성 연선의 중요한 군사주둔거점으로 높은 담, 성문루 등으로 구성되었는데 위에는 관망처와 사격구멍이 있다. 봉화대는 “봉수(烽隧)”, “봉대”, “낭연대(狼烟台)” 등으로 부르기도 했다. 봉화대는 봉화와 연기로 적정을 전하는 건축물이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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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8
  • 오묘한 세계대백과(28)
    많은 사람들 심목중의 사막이란 꼭 단조롭고 무더우며 아주 밋밋하겠다고 생각될 것이다. 기실 사막은 변화다단한 “천면여랑(千面女郎)”과 같다. 사막은 끝임없이 변하고 또 변하는바 어제의 소사구 혹은 월아의 형태가 오늘은 별처럼 반짝이는 형태로 변하기도 한다. 그외 사막의 모래색갈 또한 그 전체가 황색인 것이 아니다. 만약 사막의 모래 중에 철함량이 많으면 곧 붉은색을 띠고 만약 석고 함량이 많으면 곧 백색을 띤다. 이 “천면녀랑”인 사막은 도대체 어떻게 왔을가? 기실 바람은 사막을 만드는 “마술사”이다. 바람이 불면 대지의 진흙모래을 날려보내 대지는 나체모양의 암석과 지각만이 남게 하거나 근근히 흩어진 조약돌만이 남게 하여 황량한 사막으로 되게 한다. 동시에 이런 모래알들은 저지를 당했거나 풍력이 약해지면 땅에 내려앉아 모이게 되면서 많은 서로 연결된 사구가 되게 하는데 먼 곳에서 보면 풍랑이 기복을 이루는 바다를 련상케 한다 이런 사막, 사구 거기에 대량의 유사 등이 모인 것이 곧 바로 사막의 주요 면모라고 할 수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1-28
  • [김혁 칼럼] 스크린에 오르는 정율성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1 베이징 “해안화청”텔레비드라마유한회사와 한국 동성제작사(사)가 지난 1월 16일 베이징에서 제작인과 배우들이 모인 가운데 영화 “청년 정율성” 제작사인회를 가졌다. 영화는 약관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과 혁명의 도가니에 빠져든 정율성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주선으로 다룰 예정이다. 영화에는 한국과 중국의 젊은 배우들을 기용, 이미 정율성 역을 맡을 배우와 부인 정설송을 분할 주요 배우들이 선정되였다. 영화는 3월 한국의 광주와 중국의 옌안 등지에서 곧 크랭크인 하게 된다. 영화이 제작측인 “해안화청” 회사는 지난해 1월 “파이판(派饭)”이라는 음식과 생활 소재의 코미디영화로 한국에 진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서 관객들의 호평을 얻은바 있다. 2 1914년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3.1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에 중국으로 망명한 형들을 따라 부산, 일본, 상하이를 거쳐 중국난징에 이르렀다. 난징에서 “의열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반일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러시아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1937년 열아홉 살의 정율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옌안에 도착하였다. 옌안에서 루쉰예술학원을 나왔고 “연수요(延水谣)”, “항전돌격운동가”, “팔로군대합창” 등 50여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격정과 기백이 차넘치는 그의 노래는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면서 널리 유전되였다. 그후 그의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었다. 1990년 9월22일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바로 정율성작곡의 이 노래의 연주로 시작됐다. 옌안 시절 훗날 중국 최초의여성대사로 주 덴마크, 주 네덜란드대사가 된 정설송과 결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슬하에 딸 정소제를 두었다. 옌안시기 정율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태항산근저지로 가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중가요창작활동도 펼쳐 나갔다.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등은 중국의 허베이와 둥베이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 속에서 널리 불려졌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율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가 황해도 선전부장을 지냈으며,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세웠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에 부임했다. 그 몇 년사이 ”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을 창작, 그중 “조선인민군군가”를 작곡했다. 이로서 정율성은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긴다. 1952년부터 정율성은 중국에 돌아와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중국의 윈난, 따리등 오지를 찾아다니며 민요수집에 전력하였고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등 명동요를 창작하였으며 또 중국국가주석 모택동의 시사 34수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창작의 봄을 맞이했던 정율성은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교외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뇌익혈로 쓰러졌다. 향년 62세였다. 1978년 베이징음악출판사에서 “정율성가곡선”이 출판되였고 2009년 9월 “새 중국창립에 기여가 돌출한 영웅모범인물 100명”중의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쟝르의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한 정율성은 중국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있다. 3 지난해7월 초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정율성을 언급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정율성의 위상은 높다. 정율성의 일대기는 중국에서 일찍 영화로 제작되어 스크린에 오른바 있다. 1992년 북한의 “2.8”예술영화촬영소에서 “음악가 정율성”을 전, 후편 긴 편폭으로 제작했다. 영화는 1950년대 북한으로 간 정율성이 조선인민군협주단의 첫 단장으로 되여 음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실재한 사실에 기초하여 그려내였다. 2002년 중국에서도 정율성 관련 영화 “태양을 향하여”를 출품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성립 50주년을 기념해2002년에 제작된 영화에는 중국영화계의 쟁쟁한 일군들이 대거 투입되였다. 감독으로는 중국드라마부분 최고의 상인 “금독수리”상과 “비천”상을 석권한 장춘영화촬영소의 송강파 감독과 조선족 감독인 박준희가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영화계 최고의 상인 “금계상”과 “백화상” 수상자들이 정율성과 부인 부인 정설송역을 맡았다. 영화는 옌안에서 뿐만 아니라 베이징, 텐진, 창춘 그리고 연변지역을 폭넓게 전전하면서 외경을 찍었다. 영화는 만들어진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한국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었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정율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정율성의 활동한 주무대가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율성선생이 한국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반일에 투신했고 음악을 무기로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음악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새롭게 제작되는 또 한부의 정율성 관련 영화가 중국 나아가 남북이 모두 애대하는 음악가에 대한 오마주(다른 작가나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특정 대사나 장면 등을 인용하는 일)영화로 스크린을 수놓기를 바라며, 그이의 생애 그리고 그이의 음악이 하루 빨리 한국에서도 알려 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5-01-27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4)
    ■ 김철균 남편 김용환과 결혼할 때부터였다고 할까? 아니 퍽 그전인 소시적 오빠의 색시가 물동이를 깼을 때 자기가 한 것이라고 덤터기를 쓴 것, 추운 겨울 추워하는 옥단이와 옷을 바꾸어 입은 것 등을 비롯하여 순자가 수십년간 살아온 인생사를 보면 한마디로 남을 동정하고 아껴주고 베풀면서 살아왔다는데 총적으로 귀납된다. 또한 그것은 자식들과 며느리와 사위한테만 향해진 것이 아닌 타남한테까지, 심지어 많은 부분이 한족들한테까지 베풀어졌다는데서 더욱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되게 만든다. 김순자의 생활노트를 펼쳐 보노라면 동네의 별의별 일에 다 참여하였다는 것을 알 수 된다. …… ◎ 동네의 한 한족남정이 임신한 안해를 때리는 것을 보고 말리다가 어깨를 크게 다쳤고 그 것 때문에 오래동안 고생했음. ◎ 동네에 도둑질에 이골이 튼 한 남정이 있었음. 남들은 다 그 집을 온역을 피하듯 꺼려했으나 경상적으로 그집에 드나들면서 “사람은 자기의 노력으로 살아야 하지 무작정 남의 것을 탐내서는 안된다”며 교육하는 한편 그 가정을 돕기 시작, 그 집에 아이를 볼 사람이 없자 딸들을 윤번으로 보내어 아기를 돌보게 해 그들 내외가 시름을 놓고 출근할 수 있게 하였음. ◎ 남편의 친어머니가 사망하고 이복형제가 많은 한 여인의 가정에 석탄이 떨어지자 집에 있는 석탄을 날라다 주었으며 그 집 애들한테 공책을 사주었음. 그리고 문화혁명시기 그 집 아들이 상대방 조직원들한테서 맞아서 거의 죽어가는 것을 구해서는 밀차에 실어 집까지 데려 왔으며 후에 또 그 집 딸이 시집가게 되자 소조주민들과 함께 가서 첫날 이불과 요 그리고 기타 베개같은 것을 해주었음. ◎ 남편과 시어머니 사이에서 구속을 받으며 속을 많이 태우는 한동네의 한 여인을 늘 위로해 주었음. 문화혁명때 아들이 맞아서 죽고 남편도 술로 세월을 보내면서 집에 잘 들어오지 않자 이 여인을 위로해 주면서 돈도 손에 쥐어 주었음. ◎ 몹시 가난한 집이 있었는데 콩장같은 색다른 음식을 할 때마다 이 집에 먼저 맛보라고 가져다 주었고 이 집 큰 아들이 결혼하자 한번도 쓰지 않은 큰 늄대야, 사발과 접시 등을 가져다주면서 살림에 보태게 하였음. ◎ 가정식구가 9명이 되고 아버지가 장기환자인 가정에 경상적으로 생선, 김치와 된장같은 것을 가져다주었을 뿐만 아니라 이 집에 베개가 없는 것을 보자 일부러 천을 사다가 베개를 만들어 주었음. ◎ 동네에서 자주 말썽을 일으켜 따돌림을 당하는 늙은 양주가 있었지만 늘 그 집에 드나들면서 약도 사다 드리고 골난도 해결해 주면서 연세가 들수록 동네의 화목을 도모해야 한다면서 설복하여 끝내 늙은 양주가 더는 말썽을 부리지 않게 했음. ◎ 용정에서 온 한 학생이 부모가 늙고 집이 가난하기 때문에 위생학교에서 퇴학하러 하자 돈 10위안(그 때는 명태 한근에 19전씩 했음)을 손에 쥐여주며 “힘을 내라”고 신심을 북돋아 주었으며 후에도 여러모로 도와주었음. ◎ 비가 오는 날 이웃집 바깥에 있는 석탄이 비에 젖자 자기 집 석탄우에 씌웠던 비닐방막을 벗겨다가 이웃집 석탄더미에 씌워 주었음. 이 때문에 집의 석탄이 비에 젖어 이날 저녁 부엌아궁이에 불도 지피지 못했음. …… 이렇게 순자의 노트를 대충 훑어보노라면 일종 감각이 확 든다. 그것을 좋게 말하면 “뢰봉정신”이라 할 수 있었고 거기서 좀 다르게 붙이면 “걱정도감”이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대부분 사람들이 이를 보면 “바보”같은 짓으로 취급하기가 일쑤일 것이다. 바보같은 짓, 이렇게 보는 사람들 앞에서 순자는 “나 스스로도 내가 바보처럼 여겨질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하지만 이 사회는 나같은 바보를 필요로 할 때가 늘 있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는 내가 바보로 나서지 않아도 누군가는 꼭 바보로 나서야 할 것이 아닌가” 라고 일축해 버리군 했다. 어떤 위태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누군가는 꼭 바보로 나서야 한다는 말, 그런 경우가 가끔씩 있은 것도 사실이었다. 어느 해엔가 순자는 연길개발구에 있는 셋째 딸 영애네 집으로 가있게 되었다. 당시 개발구에 있는 딸 집 근처에는 항주에서 왔다는 한족 노부부가 작고 헐망한 가게를 차려놓고 아들 며느리와 함께 음식장사를 하면서 매우 힘들게 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어느날이었다. 이 날도 순자가 밖에 나가 바람을 쏘이려는데 불현듯 항주에서 온 그 노부부네 가게 쪽에서 왁작지껄 크게 떠들어 대는 것이었다. 이에 순자가 웬일이 일어났다 싶어하면서 그 쪽으로 가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가 그 노부부네 아들과 며느리가 대판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아들은 식칼을 쥐고 며느리는 돌멩이를 집어들었는데 당장이라도 살인사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얘 영순아, 영애야! 큰일이 났다. 빨리 110에 전화를 걸어라. 이러다간 살인사건이 나겠다.” 큰 소리로 딸들한테 알린 순자는 무작정 식칼을 쥔 아들의 허리를 끌어안은 한편 빨리 돌멩이를 쥔 사람을 제지시켜 달라고 주위의 사람들한테 요청했다. 하지만 모두들 구경만 할뿐 누구도 선뜻 나서주지 않았다. 자기와 상관없는 일에는 참견하고 싶지 않다는 자세였다. 다행히도 얼마 뒤 110특경들이 차를 몰고 나타났고 특경들에 의해 싸움은 인차 제지됐다. 110특경들은 싸움당사자들한테 한바탕 교육을 하면서 그들한테서 더는 싸우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는 차를 몰고 돌아갔다. 하지만 그래도 시름이 놓이지 않아 순자는 그 노부부의 아들한테서 빼앗은 식칼 2자루를 딸의 집에 감추어 두었다가 퍽 후에야 돌려주었다. 이날 저녁 크게 놀란 순자는 하루종일 심장이 떨려서 밥술도 제대로 들 수가 없었다. 10년 감수란 말의 진수를 맛보는듯 하기도 했다. 이날 밤 순자는 잠자리에서 이리 뒤척, 저리 뒤척 하면서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는 위태로운 사태가 벌어질 때마다 그것이 왜 유독 자기의 눈에 띄우는가에 대해 생각을 굴려보았다. 예하면 동네에서 한족남정이 임신한 안해한테 폭력을 휘두를 때도 그랬고 여름날 길가에 쓰러진 전간병이 있는 젊은이와 겨울날 저녁 술취한 남성이 길가에 쓰러져있을 때도 그랬으며 낮에 젊은 한족부부가 싸움을 벌였을 때도 그러했듯이 이런 일은 흔히 순자의 눈에 잘 띄웠다. 그렇다면 순자한테 진짜 그가 생각한것처럼 위태로운 사태가 눈에 잘 띄워서였을까. 아니면 순자 본인 스스로 그런 위태한 사태를 목격하면 자기를 돌보지 않고 나서는 습관이 있어서였을까? 그것은 그 후자가 맞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왜냐하면 딱 이런 경우가 아니더라도 순자는 이른바 부질없는 일에 참여할 때가 많았으니 말이다. 1993년엔가 셋째 딸 영애네가 집수리를 하게 되었다. 당시 영애가 한국으로 가고 없었기에 순자가 딸 대신 사위를 도와 집수리를 하는 13명 인부들의 밥을 해주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하루 인부들 중 나이가 비교적 어린 인부 한명이 부주의로 상해 머리가 터졌으며 얼마간의 피도 흘렀다. 그러자 이를 본 순자는 너무 가슴이 아파하며 자기의 옷을 찢어서는 그 인부의 머리를 동여주었다. 그러고도 “머리가 터져 피를 흘렸으니 닭걀과 돼지고기같은 것을 많이 먹어야 한다”며 돼지고기 요리 등 맛있는 것을 가득 만들어서는 그 머리를 상한 인부는 물론 다른 인부들의 음식그릇에까지 듬뿍듬뿍 담아주었다. 헌데 일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순자가 사위와 외손주가 먹을 밥과 반찬을 따로 챙겨두지 않고 있는 것 그대로 인부들한테 퍼먹이다 보니 밖에서 들어온 사위 이연규와 외손주는 인부들이 먹다 남긴 찌꺼기로 때를 에우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 다른 사람들 같으면 장모의 소행에 속으로 고까운 생각을 했을 수도 있었겠으나 장모의 성미를 너무나도 잘 아는 셋째 사위 이연규는 “이러지 않으면 우리의 장모님이 아니지”라고 우스개로 넘겨버렸다고 한다. 이 외 순자는 그 12명 인부들의 빨래까지 도맡아 해주었다. 아무리 세탁기로 빨래를 한다지만 당시 60세가 넘은 노인이 된 순자로서는 여간만 힘든 일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 인부들이 입던 작업복은 두껍고도 무거운지라 더욱 힘들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인부들이 높은 곳에서 작업할 때면 밖에 나서서 몸을 조심하라고 항상 걱정해 주었고 날씨가 좀 무덥기라도 하면 자기의 돈으로 광천수나 얼음과자 같은 것을 사서는 인부들의 손에 한두개씩 쥐어 주고야 시름을 놓군 하였다. 순자의 이러한 소행은 외지에서 떠돌이생활을 하면서 품팔이를 하는 인부들한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집수리가 마무리되어 떠나게 되던 날 그 13명의 인부들은 “수십개 지방으로 다니면서 집수리를 하면서도 이렇게 인부들을 친자식처럼 대해준 분은 어머니밖에 없었다”면서 눈물까지 흘렸고 자동차에 앉아서는 오래도록 순자한테 손을 저었다고 한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5-01-26
  • “미꾸라지”의 악행과 우리의 책임
    ■ 채영춘 연길호적의 재한조선족노무자 박모가 조선족내연녀를 토막 살인하고 유기해버린 끔찍한 범행이 터진지 불과 한달도 안돼 사귀던 탈북녀성을 살해한 참사가 또 다른 한 조선족노무자에 의해 저질러져 한국사회를 경악케하고 있다.재작년, 내몽골호적의 조선족 오모가 빚어낸 토막살인사건 후 조선족에 대해 부정적시각을 가졌던 한국인이 47%로부터 70%로 급증했다고 들었다. 당시 일부 한국네티즌들은 그 무슨 중국동포추방운동마저 들먹이는 헤프닝까지 벌렸던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파가 가라앉기도 전에 조선족에 의한 범행이 연달아 재연된 것이다. 연일 한국네티즌들이 쏟아내는 댓글이 인터넷 게시판을 난무하면서 조선족은 이제 비난의 대상보다 공포의 대상으로 요괴화된다는 느낌이다.미꾸라지 한마리가 한강물을 다 흐린다. 부레이크없는 한두 마리 “미꾸라지”의 저돌적인 악행, 이럴 때마다 재한조선족은 물론 중국본토의 조선족들은 그야말로 골치거리 악동을 자식으로 잘못 둔 부모가 학교에 불려가 문책당하는 그런 고약한 기분이다.필자는 2년 전 내몽골조선족노무자가 한국에서 저지른 범행을 두고 쓴 칼럼에서 우리에게는 “결코 먼산의 불이 아니다”는 점을 지적했던바 있다. 재한연변조선족노무자들이 향후 계속 늘어나게 될 추세를 감안할 때 문제의 “미꾸라지”악행이 번질 공간은 어쩌면 더 넓어질수도 있다. 악한이 조선족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에서 애꿏은 재한조선족과 중국본토의 조선족 전체가 타매당하고 문책을 받을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적어도 조선족 전체 이미지의 추락은 불보듯 뻔하다. 우리는 대응책이 있어야 한다.“미꾸라지”의 악행때문에 “석고대죄의 피해망상증”이나 “수수방관의 무책임합병증”에 시달리는 것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광범한 조선족의 권익과 이미지를 수호하는 그같은 책임논적 차원에서 우리는 어설픈 관객이 아니라 소신있는 감당자의 존재감을 보여야한다는게 필자의 소견이다.문제의 “미꾸라지”현상에서 두가지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그 하나는 이미 본토에서 성체로 된 “미꾸라지”의 해외침투에 대비한 원천봉쇄이다. 마약, 밀매, 다단계판매, 사기행각 등 범죄행위로 나라의 법질서와는 담을 쌓고 성실한 노동은 념두에 없으며 노무자자격이 전무한 이런”불량기록”자들의 한국입국 자체가 50여만 재한조선족들에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이런자들에 대한 해관의 철저한 검색은 물론 가짜 위조여권거래를 원천차단하는 단호함이 절박하다. 얼마전 토막살인사건 조선족용의자가 휴대한 여권도 가짜였다는 점, 이미 구치소 수감경력이 있는 전과자였다는 점들은 주시해야할 대목이다. 우리 나라 하천에서 성체로 자란 “미꾸라지”가 이국 하천으로 침투하여 재한조선족들을 골탕먹이지 못하게 사전에 막아야 한다.다음 하나는 아직은 성체의 “미꾸라지”가 아니더라도 그쪽으로 번질 소지가 다분한 노무자들 성향에 대비한 건강한 해외생활풍조의 구축으로 “미꾸라지”바이러스가 재한조선족 사회에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재한조선족들은 하루빨리 가난의 때를 벗고 잘살아 보려는 꿈을 안고서 부모와 안해(남편), 자식을 떠나 한국이라는 이 낯선 땅을 밟았다. 대다수 조선족들은 가족을 위하여 인욕부중 (忍辱负重)의 헌신적인 노동으로 재부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일부 로무자들이 한국입국시의 초심을 잃고 피땀으로 번 돈을 탕진하면서 방탕한 생활풍조의 포로가 돼간다는 메시지도 간단없이 들려와 안타깝다. 이는 대체로 “미꾸라지”바이러스감염의 초기증상으로 되고있기 때문이다.한 조선족노무자의 말이다.“중국동포 밀집지역인 서울시의 대림동부근과 안산시의 원곡동일대에서는 재한조선족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중국식당과 노래방을 누비며 2차, 3차를 즐기는 것을 볼수 있다. 이들 대부분이 하루종일 숙취 상태여서 걸음걸이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웃고 떠들어대고 노상방뇨를 하는 등 추태를 새벽까지 연출한다”요즘 재한조선족동창생들의 삶을 다룬 문학작품을 읽고 커다란 충격에 빠졌던적이 있다. 작품에 등장한“애인을 수없이 바꾸는 ×××, 집에는 일전한푼 보내지 않고 이발 두대를 하는데 천오백만원을 썼다는 ××, 중국에 처자를 두고도 한국에서 녀자를 얻어 아들을 보았다는 ×××, 사흘저녁에 삼백만원의 돈을 날린 ××” 등 조선족 “반편”들을 어찌 터무니없는 허구 인물이라고만 할수 있겠는가?물론 일부의 조선족노무자 현상이라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이같은 상황이 지속되도록 방치한다면 “미꾸라지”바이러스감염자들의 무서운 광기로 이어지는것은 시간문제이다. 이런 상황에 부레이크를 걸어야 할 사람은 우리 재한조선족 자신일수밖에 없다.중한수교 20여년, 그 동안 재한조선족사회는 30여개 민간단체의 결성으로 조선족권익수호와 조선족이미지 향상이라는 무거운 화제를 풀어나가면서 조선족 구심점의 형성을 위해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몇몇 “미꾸라지”의 악행으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같은 시련을 헤쳐나가기 위한 출로모색과 고민으로 몹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공청단연변주위에서 발족시킨 재한차세대사업위, 주정부 한국대표처, 중국본토 및 재한조선족동포언론사와 재한조선족민간단체 사이의 폭넓은 소통과 협력이 절실할 때라고 생각한다. 특히 내외 언론의 여론리더역할이 각별히 요청된다. 조선족의 선행(善行)보다 악행(恶行)에 집착하는 일부 한국언론의 선정적 보도관행에 대응하여 조선족을 정확히 알리고 조선족사회의 긍정적이고 건강한 모습을 부각시키는 사명을 우리 조선족언론이 짊어져야 한다. 황소와 같은 근면함으로 역경을 이겨내면서 한국사회의 인정을 받고 점차 한국사회 경제엔진의 한축으로 되고있는 조선족노무자들이야말로 재한조선족의 주류가 아닐가? 이들의 감동을 한국사회에 널리 파급시키는 우리 언론의 노력이 당면 “미꾸라지”가 흐려놓은 물을 정화시키는 해법의 하나로 생각한다.개별적인 ”미꾸라지”의 저돌적인 악행에 대한 사전협동 제압, 재한조선족사회에 독버섯으로 만연될 “미꾸라지”바이러스에 대비한 건강한 해외생활풍토구축 등은 재한조선족사회와 중국본토의 조선족사회가 손잡고 풀어나가야 할 무거운 과제임은 틀림없다. 이 과정에서 한국주류사회의 이해와 동조, 협력을 이끌어내는것도 우리가 적극 감당해야 할 몫이다.문제의 “미꾸라지”들에 의해 추락되는 재한조선족의 이미지를 재건하고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비뚠 시각을 교정하며 중한전략적파트너협력관계에 걸맞는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재한조선족사회를 출범시키는 일, 바로 지금부터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5-01-23
  • [김혁 칼럼] 731 닷컴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1 731이라는 숫자가 악마의 기호처럼 우리들의 마음 속에 섬찟하게 각인 된 건 지난 1980년대의 일이다. 헤이룽장성 조선족출판사에서 “악마의 낙원”이라는 책자를 출간,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신작은 조선족 독자들중에서 그야말로 토네이도 급 반응을 일으켰다. 당시 조선족 독자층에서는 추리물이 상당히 유행되었는데 모든 조선족 간행물에서는 다투어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추리소설을 싣곤했다. 그의 대표작 “인간의 증명”을 각색한 영화도 전국각지 영화관에서 상영되었고 영화의 삽곡 “초모자의 노래”가 네 거리의 스피카를 타고 울려퍼졌다. 어찌보면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이 잡지발행의 보증수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독자들 중에서는 “모리무라 붐”이 일었었다. 또 한 편의 정채로운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악마의 낙원”을 펼쳤지만 이번의 작품은 추리물이 아니라 다큐물이었다. 처음에는 좀 실망한듯 했지만 독자들은 인차 책에 빠져들었다. 커다란 공포와 경악 속에 그 책을 접했다. 작품은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서 드러난 일본군731 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이라는 경악한 실상을 다루고있었다. 작품은 일본에서1982년에 연재되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가 중문으로 번역, 1985년경에 조선족독자들에게도 알려 졌으니 당시 낙후한 우리 말 출판풍토에서 보면 그야말로 신속히 나온 책이었다. 일본판본의 원제는 “악마의 포식”, 중문으로 번역하면서 “악마의 낙원”으로 개칭되여 나왔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 731 부대나 일본군의 생체실험에 대해서는 일제에 의해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아세아 여러나라에서 일반에 까지 알려지지 않은 극비(極秘)의 실상이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731 부대가 저지른 반인륜적인 만행이 세상에 공개되었고 세상은 경악으로 입을 ‘하누라지’가 다 보이게 딱 벌리고 말았다. 2 악명 높은 ‘731부대’의 만행을 폭로하기 위한 인터넷 박물관(www.731yz.com)이 중국에서 개설되었다. 중국 헤이룽장성 정부가 하얼빈시에 있는 ‘일본군 731부대 죄증(罪證) 진열관’에 의뢰해 개설 한 사이트는 하얼빈에 남아 있는 731부대 사령부 등 유적 현황과 이 부대가 자행한 만행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1천700여 점의 문서자료와 1000여장의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2015년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앞두고 일제가 포로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 유적을 최고 등급인 ‘AAAAA급’까지 5단계로 격상시킨 뒤에 이어 731부대의 생체실험 만행을 입증하는 증거물을 새해 녀초부터 추가로 육속 공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의 정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헤이룽장성 할빈 지역에 주둔하며 생체 해부실험과 냉동실험등을 자행했다. 중국 학계는 현재까지 발견된 일본 측 과거 기록물 등을 토대로 731부대의 생체 실험 희생자가 최소 3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당시 20개 이상 성(省), 시(市)에서 161차례에 걸쳐 세균무기 공격을 감행해 237만명을 감염시킨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생체실험 희생자들 중에는 조선인도 적지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린성 기록보관소는 일제 관동군이 패주하면서 미처 소각하지 못하고 땅 속에 묻은 이들 문서를 분석한 결과 최소한 372명의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 등이 731부대로 “특별이송” 돼 생체실험 등 세균 무기 개발의 도구로 씌였다고 발표했다. 관동군헌병대가 1938년 1월 제정한 “특별이송에 관한 통첩”은 이송 대상자인 범죄자를 크게 간첩(파괴분자)과 사상범(민족해방운동가 및 공산주의운동가)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어 일제가 독립투사 등을 생체 실험도구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이 중 조선인 4명을 포함한 318명에 관해서는 이름과 별명 공작명 원적 출생지 나이 직업 주소 활동범위 수집정보 학력 체포장소 및 시간, 731부대 이송시기 등이 상세히 밝혀졌다. 조선인 6명중 신원이 나타난 4명은- 이기수(李基洙)ㆍ28ㆍ함북 신흥군 동흥면ㆍ1941년 7월20일 체포) 한성진(韓成鎭. 30ㆍ함북 경성군ㆍ1943년 6월25일 체포) 김성서(金聖瑞. 함북 길주군ㆍ1943년 7월31일 체포) 고창율(高昌律ㆍ42 강원 회양군 난곡면ㆍ1941년 7월25일 체포) 등이다. 이들은 모두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琿春)에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됐다. 이 문건은 731문제 중국전문가들과 김성민(조선족) 731연구소장이 20여년에 걸쳐 중앙과 헤이룽장성, 지린성 등의 문서 보관소에서 찾아 냈다. 이 문서는 일본 관동군 헌병사령부 사령관이 서명해 발송한 것으로 표지에는 “특별이송”과 “절밀(絶密)”이라고 적혀 있다. 3 지난해 731 이라는 숫자가 적힌 자위대 훈련기에 올라타 중국, 한국등 동북 아시안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던 아베의 나락을 향한 국우행보는 계속 되고 있다. 신세대 정치 주역이라는 아베는 앞장서서 자신들의 침략 력사를 부인하고 각가지 기행과 망언으로 아시아의 상처를 들쑤신다. 731이라는 숫자가 적혀진 훈련기를 타고 웃고있는 아베는 그 수자에 얼마나 많은 아시아인들의 피와 눈물이 배어있는지 모를가? 중국 외교부에서 일침을 가하고 있다싶이 “진상을 감추려고 하다가 도리여 드러 난다, 닦으면 닦을수록 검어질 뿐이다'(欲盖彌彰 越抹越黑)” 아베는 정계에 금방 나온 황구지작(黃口之雀. 입술이 노란 새끼 참새, 풋내기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그는 731부대가 중국 및 아시아 여러개 국에 대해 저지른 악행에 대해 분명 알고 있다. 하지만 진상을 덮어 감추려 하면서 인류양심과 국제적 도리와 위배된 잘못된 역사관을 완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아베의 행각은 그야말로 인류의 이성과 양심에 대한 새로운 “생체실험”이다. 생체실험 희생자들의 원혼(寃魂)이 아직도 거치른 만주의 옛 벌판에서 떠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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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2
  • [김혁 칼럼] 어느 화백의 실크로드
    ●김 혁 (재中동포 소설가) 1 인류는 길을 따라 소통하고 교류하며 문명을 꽃피워 왔다. 그 대표적인 길이 중국 장안에서 시작돼 중앙아시아를 관통, 유럽 지중해까지 연결 된 실크로드다. 중국의 고전 “서유기”에서 등장하는 당승의 원형인 현장법사가 1,300년 전 기록으로 남긴 귀중한 자료 “대당서역기”에 대서특필했던 곳이 바로 그 실크로드다. 고구려 고선지 장군의 활약과 “왕오천축국전”을 남긴 신라의 혜초 스님의 법경이 바람소리로 남아 있기도 한 길이 바로 그 실크로드다. 이 길을 통하여 도자기, 향신료, 유리, 보석, 옥, 직물, 쌀, 밀 등 인류가 생산해 낸 모든 물건들이 거래 되었으며 동방에서 서방으로 간 대표적인 상품이 비단이라는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됐다. 길을 따라 물건만 오고 간것이 아니라 종교와 문화도 함께 주고받았다. 동서양의 교역과 문화의 네트워크 역할을 톡톡히 하면서 약 6400 킬로미터에 이르는 방대한 육로 교통망이 구축되었다. 2 최근 실크로드는 또 한번 굳잠에서 깨어 나고있다. 중앙아시아의 경제성장 잠재력이 부각되면서 주변국인 일본에서는 실크로드 루트의 동방의 종점은 일본이라고 역사를 왜곡하고 있는가 하면, 중국을 비롯한 한국, 러시아 등 인접국들은 그 경제협력 진출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도 있다. 따라서 한국이 중국의 동부 도시들과만 교류에 그치지 말고 특색있는 서부지역과 교류의 다변화를 꾀해 새로운 “한중-로드”를 구축 할 필요가 있다는 제안도 나오고있다. 한반도 종단 철도를 중앙아시아와 유럽으로 확장하겠다는 한국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구상에서 실크로드는 “장밋빛” 환상의 길목이며 그 길 위에서 한국과 중국은 경쟁자이자 동반자인 셈이다. 3 그 길위에 혼을 묻은 화가가 있다. 1898년 이주민들이 일군 북간도의 용정촌에서 태어 난 그의 원명은 한광우, 한낙연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져 있다.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의 행동반경은 실로 종횡무진이였다 . 1914년 용정에서 헤이그 밀사 이상설이 창설한 “서전서숙”이 전신이었던 용정보통학교를 마쳤고 용정에서 3 ·1운동의 추동을 받은 독립시위에 가담하였다. 일경의 리스트에 오르자 1919년 상하이로 갔고 임정의 초기 멤버로 활약하였다. 상하이에서 중국 최초의 미술전문학교를 나왔다. 1923년 선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고, 1929년 프랑스로 가서 루브르예술학원을 졸업했다. 재학 당시 유럽 각국을 돌며 개인전을 열어 호평을 받았다. 세상의 모습을 올곧게 그려내는 한편 그는 그림에만 매달리는 다른 화가와 달리 좁은 화폭안에서 살아가는 화가로 만족하지 않았다. 1937년 중일전쟁이 일자 그는 곧 중국으로 돌아와 우한, 충칭 등지에서 항일투쟁에 적극 투신하였다. 그는1943년부터 중국에서 처음으로 서역의 벽화모사와 유물 고찰작업에 착수한 사람이다. 이때 티베트, 몽골, 위구르족 등 중국 소수민족의 생활풍습 등을 생동감 있는 화법으로 그려냈는데, 이는 당시 중국화단에 큰 충격을 주었다. 중국의 이름난 석학 성성(盛成)선생은 1980년대 한낙연의 그림전을 보고 이런 글발을 남긴적 있다. “그는 피카소와 어깨를 나란히 하며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고 초현실주의적이었다. 또한 그는 예술사학자이자 탐험가로서 쿠차 천불동에서 당나라 초기의 투시화와 인체해부도를 발견했다. 그의 성은 한씨, 이름은 낙연. 이름이 그 사람을 닮았고 사람은 그의 예술을 닮았으며 그의 예술은 그곳, 그때를 발견했다. 그는 변경 동포로서, 변경 지역의 생활과 문화를 가장 사랑했다…” 1947년 다시 벽화모사와 유물고찰을 마치고 둔황에서 란저우로 돌아오던 중 비행기 추락사고로 한낙연은 실크로드 위에 육신을 바쳤다. 한국에서는 광복 60주년을 맞으며 덕수궁미술관 한낙연 특별전을 가졌고 이어 “대통령상”이 추서(追敍)되었다. 2010년 고향인 용정에 그의 이름을 딴 공원이 조성되었다. 피카소등 세계화단의 불세출의 인물들과 실크로드에 깃들어있는 인류의 보귀한 유산들이 한낙연의 꿈을 키울 모판이 되었고 그의 화법에 그러한 심력이 녹아 들어있다. 조선인 이주민의 후예로서, 예술가로서, 열렬한 사회활동가로서, 굳건한 “역사문물의 지킴이”로서 그는 조선독립과 민족해방의 사명을 짊어지고 젊음을 불살랐고 반일투쟁을 위해 거대한 중국대륙을 무대로 혼신을 던졌으며 무엇보다도 인류의 찬란한 문화유산인 서역의 문화재발굴에 주력하여 선구자적인 업적을 남겼다. 전기적 색채가 짙은 한낙연의 경력은 깊은 잠에서 깨어 난 실크로드와 더불어 뒤늦게 나마 중국과 한국 화단의 주목을 모으고 있다. 2015년 1월 15일 -“청우재(听雨斋)”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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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8
  • “흑토지”의 희와 비- 소련이 지배하던 중국 동북의 나날
    1945년 8월 9일, 소련홍군은 유럽전장이 결속된지 3개월만에 중국 동북으로 진출해 위 만주국땅에 주둔해 있던 일본 관동군을 격멸시키면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한 미군의 원자폭탄과 더불어 일본의 무조건 투항을 앞당겼다. 최초 동북으로 진출한 소련군은 군 규율을 엄격하게 준수하는 부대였다. 하지만 전쟁 중 상망이 많아지자 소련군은 범죄자 혹은 군입대 조건에 부합되지 않는 남자들한테 총을 쥐어주며 참군하게 하였다. 그런 소련군은 군규율이란 전혀 없었다. 그들은 거리를 쏘다니면서 술에 취해 물건을 강탈하는가 하면 제멋대로 살인하기도 하였다. 그 외 부녀자들을 능욕하고 강간하고 하여 당시 백성들은 공포에 질려 집문도 감히 열지 못했다고 한다. 위 사진은 당시 중화민국 대표 팽벽생과 심양주둔 소련군 장교가 악수하고 있는 장면이다. 당시의 심양역이다. 역청사 꼭대기에는 중화민국국기와 소련국기가 걸려 있고 출입문 옆의 문주에는 “소련홍군의 영수 스탈린 대원수 만세!”, “소련 노농홍군 창립 28주년 기념 만세!”란 구호가 걸려져 있다. 당시 심양역뿐만 아니라 장춘, 할빈, 여순, 안동 등 대도시의 기차역 청사에는 모두 이런 구호들이 걸려 있었다. 당시 소련홍군은 전패한 일본인에 대해서만 난폭하게 굴었을뿐만 아니라 동시에 동맹국이라는 중국의 백성들한테도 횡포무도하게 굴었다. 위 사진은 심양 거리의 벽에 붙여 있는 소련과 스탈린을 선양하는 포스터이다. 1946년 3월, 심양 제국판점 출입문 위에는 소련과 중화민국의 국기가 걸려 있고 그 위는 스탈린, 레닌, 손중산, 장개석의 초상화가 걸려 있다. 그리고 그 밑에 중국문과 러시아문으로 “중소 양대 민족은 연합하라!”고 씌어져 있다. 소련 홍군이 동북에 주둔해 있는 몇년간 물건을 강탈하고 부녀를 강간하는 행위로 하여 당지의 백성들은 공포에 떨었으며 아주 나쁜 후과와 영향을 초래하였다. 사진은 미군의 협조대표와 중화민국 정부 및 국군장령이 심양을 접수하기 위하여 심양비행장에 도착한 장면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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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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