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칼럼/기고

실시간뉴스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 뉴스홈
    • 국제뉴스
    • 아시아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흔들리는 재한조선족 정체성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야, 저 봐, 신천지 때문에 또 하루 사이 확진자가 100명이 넘어 나왔대. 아이 이상하다. 중국처럼 말 안 들으면 확 족쳐버리면 될 것을 한국정부는 왜 저리 무능하냐?” “엄마, 한국은 민주주의국가라서 인권 때문에 중국처럼 강력한 조치를 취하지 못하고 있어요.” “야, 야, 인권이고 뭐고 이 비상시국에 비상조치를 취해야지. 정부가 저렇게 물렁해서야 진짜 전쟁이 나면 어쩐다냐?” “잘 대처해 나가겠지 뭐, 엄마가 걱정해서 해결될 일이 아닌데 너무 신경 쓰지 말아요.” “어이구, 답답해서 어디 보겠니! 이 긴장한 사태에 여당인지, 야당인지 힘을 합쳐도 모자랄 판에 매일 쌈박질이나 하구, 참 기가 막혀. 내일부터 뉴스 안 볼란다.” “엄마, 이게 민주주의이고, 민주주의는 본래 이렇게 시끄러운 법이예요.” 한국에 살고 있는 조선족 모녀의 대화 내용이다. 다시는 뉴스 안 본다고 선포한 엄마는 이튿날 아침 눈 뜨자마자 TV를 켠다. 예전 같으면 매일 아침 기상하기 바쁘게 드라마를 보던 엄마가 요즘에는 매일 뉴스를 틀어놓는다. 뉴스 안 본다던 엄마를 딸이 놀려대면 ‘그래도 돌아가는 형세는 알아야지’ 하면서 코로나19에 관심이 크다. 사태가 사태인 것만큼 전 인류가 관심 갖는 코로나19에 엄마가 눈과 귀를 기울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매일 한국이 제대로 대응 못한다는 볼멘소리를 한다. 처음에는 딸이 뭐라 하면 화기애애하게 대화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엄마는 신경질적으로 변해간다. 한국이 영 못 마땅하다는 기색이 역력하다. 재한조선족은 머리 한쪽에는 현재 벌어서 먹고 살아가는 고국 한국이 자리해 있고 다른 한쪽에는 나고 자라고 사회생활 해오던 고향 중국이 차지하고 있다. 마치 한국과 중국이 천평(天平) 양쪽에 올라 있는 것처럼 어느 한쪽의 무게가 커지면 다른 한쪽의 무게가 작아지고 때로는 양쪽의 무게가 비슷해질 경우가 있을 수 있겠으나 대개는 한쪽의 무게가 더 커질 때가 많다. 그것이 한국이 될 수도 있고 중국이 될 수도 있다. 딸은 올해 30대 중반이고 엄마는 60대 중반이다. 딸은 중국연변에서 태어났지만 한국에 유학 왔고 현재 한국에서 직장생활 하고 있다. 엄마는 중국 연변 시가지에서 태어났고 모택동 지시에 따라 시골에 가서 집체호 생활 경험이 있다. 딸이 사춘기에 들어설 쯤부터 엄마가 우리 땐 집체호에 가서 고생도 많이 했지만 문예선전대를 조직해 노래와 춤으로 얼마나 즐겁게 보냈는지에 대한 추억을 귀가 따갑도록 들려주었다. 지금도 노래방에 가면 그때 그 시절 노래를 아주 즐겁게 부르면서 흥이 나면 춤 솜씨까지 뽐낸다. 엄마가 한국에 와서 돈을 버느라 고생을 많이 했지만 정신적으로는 아주 건전하고 건강해 보였다. 그러던 엄마가 요즘에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난 한국생활 10여 년 동안 엄마의 심경에 도대체 어떤 변화가 있었을까? 엄마는 중국연변에서 직장 다니다가 구조조정에 의해 실직당하고 한국에 왔다. 엄마가 한국 올 때는 1990년대 말이다. 남한에 연고가 없어 수속이 어려워 가짜 공무초청장을 들고 왔다. 처음부터 불법신분으로 살아가느라 육체적인 고생보다 마음을 졸이며 정신적으로 고통이 더 심했다. 각박한 자본주의 한국은 엄마를 할아버지가 살던 고국에 찾아온 한핏줄로 대하지 않았다. 앞서 1992년 한중수교 이후 한국 유학 왔던 조선족 젊은이들이 겪었던 조선족정체성 문제를 엄마도 몸소 겪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빚지고 왔기 때문에 오로지 돈을 벌 일념으로 정체성 따위는 뒤로 하고 일에만 몰두했던 것이 그 당시 재한조선족들의 삶이었을 것이다. 2007년 3월 노무현 정부 말기 실시된 방문취업비자(H-2)에 의해 불법체류가 합법화 되었다. 엄마도 중국에서 어릴 때 떼어두고 왔던 딸애를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따라서 한국에 대해 많이 쌓였던 섭섭함도 점차 많이 사라지게 되었다. 중국과 한국이 축구하면 어디를 응원할 것이냐? 10여 년 전 한국인들이 재한조선족에 대한 가장 보편적인 궁금증이었다. 나아준 엄마의 편이냐? 키워준 엄마의 편을 들 거냐는 유치한 질문이었다. 당연히 엄마는 여느 조선족들처럼 처음엔 무조건 중국 편이었다. 단일민족, 단일국가로 살아온 한국인들의 머리로는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진리만 알았지 키운 정이 낳은 정보다 더 크다는 또 하나의 진리를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문제였고 이를 계기로 한국인들이 조선족에 대한 편견이 섰고 조선족은 믿을만한 족속이 못 된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한 짱개’들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는 인식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들어, 특히 2007년 방문취업비자 실시와 그 이듬해인 2008년부터 시행된 재외동포비자(F-4)에 의해 한국에 온 조선족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재한조선족은 한국사회로부터 차별을 당하기 시작하였다. 한국사회가 조선족을 차별하는 원인이 처음에는 양반과 상놈(常奴) 문화 때문이라는 문제의식으로 접근했는데 세월이 지남에 따라 그것이 전부가 아니었다. 예를 들어 한국에 시집온 조선족여성의 남편인 한국인 배우자가 째지게 가난해도 아내를 욕할 때면 ‘거지같은 나라에서 왔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은 것이 보편적이었기 때문에 한국인은 양반, 조선족을 못 사는 중국에서 왔다는 이유로 거지(상놈) 취급하는 행태가 바로 이를 증명하는 것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물론 지금도 이 요소를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지만 이것이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 근원적인 문제가 아니라는 것에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 근원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한국인이 조선족을 차별하는데 있어서 진보보다 보수진영이 더 심하다. 우리는 흔히 한국보수를 친일파, 있는 자, 가진 자 등등으로 낙인찍는다. 고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진보와 보수를 나누는 멋진 비유가 있다. 경상도에서는 만원을 태운 버스가 다음 정류소에서 손님이 더 오를 경우 자리를 내주면서 ‘함께 가야지’ 하고 나선 사람이 진보이고 ‘아이고 비좁아 죽겠는대 고만 태우고 빨랑 갑시다.’라고 불평을 부리는 사람은 보수라는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께서 말씀한 ‘사람이 사는 세상’이란 바로 서로 차별 없이 골고루 다 함께 더불어 살아가자는 것이다. 즉 내가 불편하더라도 손님을 태우고 함께 가려는 사람은 진보이다. 반면에 다른 손님이 더 오르면 내가 차지했던 공간을 침해당하고 따라서 나는 그만큼 불편해지기 때문에 양보를 거절하는 사람은 보수이다. 남과 북의 관계를 말하자면 진보는 북한을 돕자는 원칙이고 보수는 퍼준다고 비판하고 비난한다. 퍼준다는 것은 나의 몫을 북한에 빼앗긴다는 의식이 작동하기 때문이다. 한국인과 외국인을 비유해 말하자면 전반 한국사회에서 돈을 버는 총량이 100이고 이 전부를 한국사람, 즉 내국인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외국인이나 조선족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점차 이들 소수 집단이 10~30% 가져간다면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자신들의 몫을 빼앗겼다고 생각되어 외국인이나 조선족을 미워하게 되고 따라서 어떻게 하나 밀어내려고 차별을 하는 것이다. 거의 20년 전의 일이긴 하나 대선 때 이회창 보수당 후보가 불법체류를 1%미만으로 줄이겠다는 공약을 내걸었었다. 얼마 전에 보수당 오너인 황교안 대표가 “세금을 안 내는 외국인에게 같은 임금을 줄 수 없이 응당 차별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사회적인 논란을 일으켰다. 보수는 늘 이렇게 외국인을 차별한다. 보수가 외국인을 차별하는 것은 한국뿐만의 일이 아니다. 세계리더를 자부하는 미국은 보수당이 집권하자 멕시코 국경에 장벽을 쌓고 난민에 대한 혐오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민사의 연구에 의하면 어느 나라든 보수는 외국인이나 이민에 대해 우호적인 나라가 없다고 한다. 보수도 문제이지만 대한민국은 현재까지 차별금지법이 없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외국인이나 조선족을 차별해도 법적 처벌이 불가능하다. 국가인권위원회라는 기구가 있긴 하지만 민원이 제기되면 권고조치를 내릴 뿐 법적 해결은 하지 못한다. 그래서 가해자들이 시정하면 좋고 듣지 않아도 어찌할 방법이 없어 외국인이나 조선족 차별을 법적으로 막을 장치가 없다. 일례로 관영매체인 KBS가 1년 넘게 조선족을 비하하는 <황해>라는 개그프로를 방송해도 법적문제가 되지 않았다. 이것이 조선족이 한국에서 차별당하는 객관적인 원인이라면 그럴만한 주관적인 이유도 있다는 것을 우리는 반성해야 한다. 조선족은 중국에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중국문화가 몸에 배였고 생활관습문화도 배여서 한국생활에 적응이 어렵다. 예를 들어 직장에 근무하다가 그만두겠으면 사직서를 내고 절차를 밟고 사직해야 하는데 무조건 아무 말 없이 이튿날 근무하지 않는 것으로 사직을 무언으로 알리니 사장의 입장에서 환장할 노릇이다. 요즘에는 이런 사례가 적지만 10년 전까지만 해도 비일비재했다. 이외 쓰레기 처리, 무단횡단, 가래침을 아무데다 뱉기, 공공장소에서 떠들기 등 지금까지도 이런 공공질서의식 문제는 심각하다.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시작된 초기에 한국 언론들이 조선족 최대 밀집지역인 대림동을 취재하고 그곳을 더럽게 다루어 반발이 심했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생각하자면 대림동이나 가리봉동 혹은 조선족밀집지역 시장거리나 길 양쪽 늘어선 가게들에서 면식(面食)들이 덮는 장치가 없이 바람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어 정말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꼴불견이다. 해바라기 씨를 살 때면 한 줌씩 맛보는데 그 껍질을 바닥에 지저분하게 던져버려 진짜 환경이 더럽기로 말이 아니다. 우리는 늘 남이 우리를 비하한다고 불평만 부리지 말고 우리 자신이 뭘 잘못하고 있는지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한국인에게 비춰 보이면 좋을까 반성이 전혀 없다. 아무리 조선족이 한국에서 차별을 당해도 외국에서 왔으니 그러려니 하고 10여 년을 살다보면 한국사회에 대해 좋은 인상을 갖기 마련이다. 한국은 중국에 비해 전반 사회가 투명성이 높고, 공공기관이나 병원 등 서비스가 좋고, 치안이 좋고, 기후가 좋아 사람살기가 좋은 것은 사실이다. 민주주의정치가 시끄럽긴 하지만 정치에 관심을 두지 않으면 편하게 살 수 있다. 쉽게 말해서 재한조선족은 한국생활에 두루 만족하면서 어영부영 살아가고 있었는데 요즘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이런 의식이 도망 가버렸다. 이런 변화가 생긴 계기는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데 있어서 한국이 중국과의 대비에서 비롯되었던 것이고 또 일부 언론이 재한조선족을 더럽게 매도한 불상사도 있고 또한 총선을 앞두고 조선족을 매도하는 실체가 없는 유령인 ‘조선족게이트’니 ‘차이나게이트’니 황당무계한 일이 지난 3월 1일 포털사이트 실시간 검색1위에 오를 정도로 큰 이슈가 되어 조선족을 또 한 번 울렸다. 그건 그렇고 이번 코로나 사태 초기 만약 대리동이나 가리봉 및 중국인 밀집지역에서 확진자가 나왔다면 차별과 혐오를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보수의 공격으로부터 막말로 ‘개박산’을 맞을 뻔했는데 다행히 최악의 사태가 벌어지지 않았다. 지구촌에서 최고 베스트셀러(<사피엔스>란 책이 무려 1천만 부나 팔렸음)를 자랑하는 유발 하라리는 지난 3월 20일 파이낸셜타임즈에 ‘코로나바이러스 이후의 세계’라는 제하의 칼럼을 기고해서 또 세인의 주목을 받고 있다. 그는 이 칼럼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지금과 같은 위기상황에서 우리는 두 가지 힘들고 중요한 선택을 해야 한다. 첫째는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와 시민적 역량강화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두 번째는 민족주의적 고립과 글로벌 연대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유발 하라리는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방식을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누었는데 중국과 이스라엘은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였던데 비해 한국, 대만(중국 대북), 싱가포르 등은 시민적 역량강화를 발동하여 효과적으로 막아냈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중국과 이스라엘은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통제조치로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여 전체 국민이 통일행동을 취하도록 만들고 이를 어기면 강력한 형사적 처벌을 내린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는 몇 사람 모여 마작을 놀아도, 음식점에 모여식사를 해도 형사적 처벌을 안겼다. 하다못해 사사로이 아파트 구역을 벗어나도 처벌을 안겼던 것이다. 이에 비해 한국은 수백, 수천이 되는 사람들이 붐비는 장소에서 예배활동을 해도 형사적인 처벌이 없다. 만약 한국은 일부 교회가 아니었다면 진짜 청정지역으로 분류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런 사례를 목격하는 재한조선족은 한국이 무능하게 보였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의 강력한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높이 평가하고 찬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한국정부의 코로나19 ‘물렁한 대응’에 대해 조선족들이 아무리 못 마땅하게 여겨도 전 세계에서 한국이 가장 잘 대응하고 있다는 칭찬 일색이다. 선진국이라고 자랑해오던 유럽나라들이 한국 배우기에 나섰고 세계 최강인 미국도 한국에 진단카드 제공을 요청하였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한국이 줄곧 배우기만 했던 독일이 요즘 한국한테서 배우는 반전이 일어나고 있다. 한국이라면 깎아내리지 못해 안달 떠는 일본도 요즘에는 한국칭찬에 열을 올리고 있다. 한국은 76일간 환자 추적·관리한 유일한 나라라고 빌 게이츠도 엄지로 칭찬했다. 한국이 뭘 잘해서 일약 ‘세계적인 스승’이 되었고 일약 스타덤에 오르고 있는가? 선진적인 건강의료보험제도, 선진적인 방역시스템, 정보의 투명성에 따른 관과 민의 정보의 공유, 시민의 협력정신 등 요소들이 세계적으로 높게 평가받고 있다. 이것을 유발 하라리는 ‘시민적 역량강화 시스템’이라고 말한다. 아무리 한국이 잘했다고 하지만 또 유발 하라리가 말하는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좋다고 하지만 전시와 같은 비상시국을 대처하는데 있어서 중국의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에 비해 효율성이 어림없이 못 미치는 것은 사실이다. 만약 중국이 이런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를 발동하지 않았더라면 그 큰 땅덩어리에 그 많은 인구를 가진 대국이 와르르 무너질 수도 있다. 결론을 말하자면 중국식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는 중국실제에 부합하는 비상시국 대응에는 ’딱‘이다. 이에 대해선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제기할 수가 없다. 너무나도 명백한 사실이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평상시에도 테러방지 위해 국민에 대한 감시 시스템을 구축했는데 이번 코로나19 대응에 그 시스템을 그대로 옮겨 사용해서 중국과 같이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로 분류되고 있다. 물론 중국과 이스라엘처럼 코로나19 대응에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가 다른 나라에도 100% 다 맞는다든지, 혹은 한국, 대만, 싱가포르처럼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다른 나라에도 모두 배울 모델이라는 주장은 적합하지 않다. 나라마다 각기 제 나름의 실제가 있기 때문에 천편일률적인 체제나 시스템을 함께 똑 같이 적용할 필요가 없다. 문제는 코로나19가 지나간 이후의 시대에 인류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것이다. 유발 하라리는 코로나19 사태 이후 세계는 전체주의적인 감시체제가 아닌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을 선택할 것을 호소한다. 나름의 일리가 있겠으나 이 호소도 천편일률적이고 지구촌의 어디서든 맞는 것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이번 사태 이후 시민적인 역량강화 시스템이 한국국민 삶에 더 유리하거나 보탬이 된다면 마땅히 유발 하라리의 선택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유발 하라리의 두 번째 선택, 즉 협소한 민족주의보다 글로벌 연대 강화는 절대적으로 필요하고 정말 십분 맞는 주장이다. 글로벌 리더를 자칭하던 미국은 트럼프 시대를 맞아 이기적인 국수주의체제로 변화하고 있어 국제리더를 포기한 상태에 처해 있다. 미국 때문에 현재 글로벌 연대가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인류는 새롭게 글로벌 연대와 협력을 이뤄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인류는 공멸할 수도 있다. 한편 과거 아세아는 구미의 민주주의에 대해 맹신해온 것은 아닌지, 이 기회를 빌려 깊이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민주주의와 선진국을 등식화로 인식했던 아세아의 사고가 얼마나 유치한 일인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통해 여실하게 드러나고 있다. 현대문명의 본산지인 미국의 경우 코로나19 초기 중국과 한국을 비웃고 때리고 공격하고 마치 자기네는 영원한 청정지역인양 거들먹거리다가 확진자가 30만이 넘어가는 거대 역풍을 맞고 있다. 민주주의 꽃인 아메리카가 이게 웬 말인가? 미국은 건강의료보험이 엉망이어서 정부가 검사비용을 부담하지 않아 400달러 되는 돈을 서민들이 벅차 검사를 외면하고 있어 사태가 더욱 심각해졌고, 방역시스템도 엉망이어서 진단카드조차 한국에 손을 내미는 신세이고, 마스크는 범죄자나 심한 결핵을 앓는 전염병 환자나 끼고 다니는 것으로 인식하는 문화가 있어 전염이 더욱 창궐해졌던 것이다. 어찌되었던 미국은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것을 보면 과거 우리가 미국 하면 모든 것이 선진적일 것이라고 너무 맹신했다는 생각이 강열하게 느껴진다. 그럼 미국의 본가인 영국은? 그들과 거의 같은 종족인 백인 국가들인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나라는 어떨까? 이들 나라들도 미국 처지와 별로 나은 바가 없이 도진개진이다. 이탈리아는 사태가 너무 심각해 중국처럼 강력한 조치(형사 발동)를 취하고 있다. 심각한 사태 앞에서는 장사가 따로 없다. 민주주의는 허울 좋은 개살구일 수 있다. 때문에 이탈리아는 전체주의 감시체제를 취할 수밖에 없다. 일본도 수도 동경을 봉쇄하느니 마느니 딜레마에 빠져 있다. 필리핀 대통령은 말을 듣지 않는 자에게 총을 쏴도 좋다는 어명을 내렸다. 역시 전체주의 감시체제가 최후의 처방이자 유일한 처방이 될 것이다. 우리가 상식처럼 알고 있던 지구상 선진국인 미국과 유럽나라들 및 일본의 사태가 심각해짐에 따라 한국이 가장 돋보이는 스타로 떠올라 갑자기 외교가 다망해졌다. 요즘 대한민국은 갑자기 지구촌의 ‘공자’가 되어 한국인들은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 “한국국민이라는 사실이 이렇게 자랑스럽게 느껴본 적이 이번이 처음입니다.” 요즘 한국인들의 정서를 나타내는 말이다. 재한조선족사회는 이와 같은 세상이 돌아가는 심원(深遠)하고 심오한 이치와는 거리가 멀게 한국과 중국 단순한 비교에 물젖어 있다. 요즘 엄마의 위챗이나 카카오톡방에는 온통 ‘인민전쟁 승리’ ‘봐라 대국은 대국이다’ ‘중국이 얼마나 통 큰 나라인가!’ ‘영웅의 도시 우한!’ ‘조국을 빛낸 우한 지원 영웅적인 의료일군들!’ 등등의 중국 찬양으로 가득 차 있다. 중국에서 나고 자랐고 중국에서 성인이 되어 한국에 왔기 때문에 재한조선족은 중국 찬양이 당연한 일이다. 문제는 천평 한쪽에 중국 찬양이 무게를 너무 눌러 다른 한쪽의 천평 그릇의 한국비하(비하까지는 아니더라도 못마땅함)가 허망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이다. 왜 이런 현상이 생겨날까? 인간은 세 살 때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말이 있다. 또 독립적인 세계관이 형성되기 전에 받은 교육은 성인이 되어도 쉽게 바뀌지 않는다. 가령 성인이 된 후라도 강력한 이념과 사상교육 앞에는 장사가 따로 없다. 재한조선족이 이번 코로나19 사태를 대응하는 중국과 한국을 바라보는 시선이 완전히 전체주의적인 일원화 교육을 받았던 영향이 다시 작동되어 이런 현상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엄마가 집체호 시절 불렀던 노래와 추었던 춤은 대개 이념과 사상이 짙은 ‘문예선전’이었다. 요즘 엄마를 바라보는 딸의 생각을 ‘우리 엄마는 집체호 시절로 돌아갔어요’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재한조선족은 부모의 품을 떠나 새로운 상대를 맞아 새롭게 생활하고 있다. 시집 간 딸이 친정에 대한 연민은 당연한 일이다. 친정 부모에 대한 미련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또 잊어서는 절대 안 된다. 한편 새로운 대상을 만나 살면서 친정 부모의 장점만 생각하고 상대의 환경에 적응할 노력은 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상대의 허물만 보고 살아간다면 얼마나 피곤할까! 피곤할 정도가 아니라 얼마나 괴로울까! 이슬람 국가가 싫으면서도 하나님의 복음 전파라는 사명을 지닌 열혈 전도사라면 모를까, 절이 싫다면서 계속 버티는 중의 행위는 결국 자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산에 가면 산에 맞는 노래 부르고, 강에 가면 강에 맞는 노래를 부르라는 속담에 굳이 치우칠 필요가 없더라도 천평 양쪽에 한국과 중국의 무게가 비슷하게 올려놓고 지혜로운 삶을 살아갔으면 좋겠다. 필자/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칼럼니스트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0-04-19
  • [김혁 칼럼] 열반(涅槃)의 황학루
    ● 김 혁(재중동포소설가) 요즘 세간의 모든 이목은 온통 무한에 쏠려 있다. 혹한과 함께 덮쳐든 바이러스 병독에 사상 초유 도시봉쇄의 비극을 맞이한 무한, 그 바이러스의 병명은 “코로나” 혹은 “무한 폐염”이라고도 부른다. 병마와 간거한 고전을 치르고 있는 시민들과 의무일군들을 위한 비원과 성원이 담겨진 포스터들에는 무한의 절경이자 징표인 황학루가 자주 등장한다. 천하절경 황학루. 강서성 남창의 등왕각(滕王阁), 호남성 악양의 악양루(岳阳楼)와 함께 “강남 3대 루각”으로 꼽히는 루각이다. 루각을 세운 시기는 저 유명한 삼국 시대로 거슬러 오른다. 이 루각은 오나라의 왕 손권이 초나라 류비와의 전쟁을 대비해서 세운 망루이다. 지금도 황학루에는 손권의 강한 의지가 남아있어 “초천극목(楚天极目)”이라고 적힌 편액이 루각의 처마에 걸려 있다. 초나라의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뜻의 성구이다. 황학루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전쟁과 화재의 세례속에 7차례나 소실되고 중건되기를 반복하면서 군사들이 망을 보던 장소에서 아름다운 경치를 관망하는 루각으로 거듭났다. 그리고 당대와 송대에 내로라하는 문사들이 황학루에 대해 례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 중 당나라 시인 최호(崔颢)가 쓴 시 “황학루”가 최고의 걸작으로 꼽힌다. 昔人已乘黄鹤去/옛 선인은 누른 학 타고 가버리고, 此地空余黄鹤楼。/이곳 황학루만 텅 빈 채 남아있네. 黄鹤一去不复返/학은 한번 가서 다시 돌아오지 아니하고, 白云千载空悠悠/흰 구름은 천년 동안 한가히 떠도네 시성이라 일컫는 리백도 그의 작품을 보고 황학루에 대해서는 이보다 더 훌륭한 시를 쓸 수 없다며 붓을 내려 놓았다는 일화가 있다. 황학루 초입에서 만나는 각필정(搁笔亭)이 바로 리백이 붓을 내려 놓았다하여 이름 지어진 곳이다. 시 짓기를 즐겼던 모택동 주석도 역시 황학루를 두고 지은 률시가 있다. 황학루에는 자자한 명성만큼 재미난 전설이 깃들어 있다. 옛날 어떤 주막이 있었는데 주인장은 어느 날 찾아와 공짜 술을 퍼마시는 도사를 싫어하는 기색없이 환대해 주었다. 거나하게 걸치고 길을 떠나게 된 도사가 밀린 술값이라며 주막의 바람벽에 누른 빛갈의 학 한 마리를 그려주었다. "손님이 오면 손뼉을 치며 노래를 부르시오. 그러면 황학이 나와서 춤을 추며 주흥을 돋울 거요." 도사는 이런 말을 남기고 홀연히 사라졌다. 아닌게 아니라 주인장이 노래를 할 때마다 학이 나와 춤을 추었는데, 이것이 입소문을 타고 널리 알려지면서 주막이 크게 번성하였다. 10년 뒤 도사가 다시 찾아와서는 피리를 불어 학을 불러내더니 그 학을 타고 하늘로 날아갔다고 한다. 그후 부자가 된 주인이 도사와 학에게 고마운 마음을 담아 주막을 헐고 “황학루”라는 이름의 루각을 세웠다는 전설이다. 리백, 백거이, 최호(崔顥), 륙유(陸遊), 장거정(张居正) 등이 황학루를 읊었고, 황학루에 자신의 작품을 거는것으로 그 인끔을 뽐냈다. 그 기라성 같은 문인문사들의 자취가 서린 곳에 조선족 화가이자 혁명가인 한락연도 족적을 남겼다. 1937년 초겨울, 한락연은 십여년 만에 류학을 갔던 프랑스로부터 귀국했다. 당시 외국류학을 다녀온 미술가들은 대부분 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는 것이 상례였다. 하지만 일제의 침략이 우심화되는 상황에서 구국의 일념으로 불탔던 한락연은 일신과 가족의 안위를 돌볼 사이가 없이 전운이 감도는 무한으로 성큼 발걸음을 내딛었다. 누른 빛의 장강과 푸른 빛의 한수가 만나는 이 곳에서 한락연은 공산당의 령도아래 결성된 항일민족통일전선조직인 동북구망총회(东北抗日救亡总会)를 찾아갔다. 주은래의 동의를 거쳐 한락연은 “동북구망총회”의 선전과 련락사업을 담당하게 되였다. 이 시기 “총회”에서 발행하는 “반공(反攻)”이라는 반월간 잡지의 표지에는 한락연의 그림이 자주 등장했고 그가 창작한 “노예살이를 원치 않는 이들은 일떠나 일제를 소멸하자!”라는유화도 한구(汉口)의 표지성 건물인 세관청사에 걸렸고 “전민항전” 이라는 거폭의 유화는 황학루(黃鹤楼)에 높이 걸렸다. 황학루, 그 고풍어린 루각에 높이 걸린 한락연의 그림은 민중들의 항일의지를 크게 격려했다. 황학루 루각에 오르면 무한 3진이 한눈에 들어 온다. 한수강과 양자강의 합수목에 자리한 중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도시 무한은 한구, 한양, 무창 등 린접 된 3개 도시가 합쳐져 이루어진 대도시이다. 고도(古都) 무한은 중국 력사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삼국연의”에 나오는 적벽(赤壁), 형주(荊州) 등 력사 현장의 대부분이 무한 주위에 모여 있다. 19세기 중반 이후 무한은 장강 수운의 리점을 활용해 발전을 구가하며 한때 상해에 버금가는 경제 규모를 자랑하기도 했다. 이 곳은 또 중국현대사의 주무대로 되여 두드러진 역할을 해왔다. 중국민주혁명의 발상지로서 신해혁명의 기폭제가 된 무창봉기도 이 지역에서 시작되였다. 1911년 10월 10일, 무창에서 거둔 혁명군의 첫번째 성공은 중국 전토로 확산되며 청조의 멸망을 불러왔다. 무한에는 지난 세기 30년대 우리의 겨레들의 반일의 자취도 력력히 서려 있다. 1938년 일제는 상해 남경을 거쳐 화중의 중심지 무한을 겁박(劫迫)하려 들었다. “항전의 수도 무한을 보위하자!” 절체절명의 순간 무한군민들의 함성이 터져올랐고 무한 삼진이 산악같이 일떠섰다. 1938년 10월10일 무한시 무창(武昌)구 자양로(紫阳路) 234호 대공중학교 강당에는 120여명의 건장한 청년들이 군청색 군복을 입고 비장하게 창립식을 올리고 있었다. "조선의용대의 기발을 높이 들고 용감한 중국 형제들과 손을 맞잡아 필승의 신념으로 정의의 항일전선으로 용감히 전진하자." 주먹을 불끈 쥐고 비장하게 선서하는 대원들은 모두가 황포군관학교 조선인 졸업생들이였다. 창립식에 특별히 중공의 대표들이 참석해, 주은래는 동방 피압박 약소민족의 해방에 대해 호소하는 연설을 했고, 곽말약은 문호답게 축시로 조선의용대의 무운장구를 기원했다. 창립식이 끝난 뒤 경축행사도 열렸다. “아리랑” 합창과 “두만강변” 연극이 무대에 올랐다. 창립식이 열리는 동안 밖에서 가끔 포성이 들려왔다. 무한에서 한민족의 반일독립운동사에 큰 족적을 남긴 단체- 조선의용대가 세상을 향해 우렁찬 고고성을 지르는 순간이였다. 조선의용대 대원들은 즉각 포탄이 터지고 초연이 자오록이 피여오르는 무한 시내로 투입됐다. 무한 중심가에서 반일 선전전을 벌렸다. 그들은 사다리를 메고 다니며 담벽과 길바닥에 콜타르로 선전구호를 쓰기 시작했다. “일본 형제들이여, 착취자들을 위해 목숨을 버리지 말라”“총구를 상관에게 돌려라” 이 광경이 그후 중국문학사에서 문호의 반렬에 오른 곽말약의 뇌리에 강렬한 인상으로 남았다. "의용대원들은 네댓명 씩 한조가 돼 콜타르나 페인트로 거리나 벽에 대적 표어를 쓰고 다녔다. 모두 조선의용대뿐이였다. 무한함락 직전 대적표어를 쓰고있는 것은 조선의 벗들뿐이였다" 곽말약이 저서 “홍파곡(洪波曲. 1979년 발간)”에서 묘술한 무한 함락시의 조선의용대에 관한 생동한 묘사의 한 구절이다. 조선의용군 최후의 분대장이였던 조선족 문단의 거목- 김학철도 조선의용대의 창설과 무한, 태항산에서의 항일력정을 세세히 기록해 후세에 남겼다. 한시나 고사에서 곧잘 등장하는 루각은 흔히 세월과 력사의 견증물로 사람들의 시선 속에 간주되여 있다. 세상사의 뜬 구름과 전란의 초연을 지켜 본 황학루는 또 한번 세기의 증언자로 이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 “초천극목(楚天极目)”. 하늘을 끝까지 보겠다는 호매로운 성구의 편액이 루각의 처마에 걸려 있는 황학루, 그어떤 역경도 이겨내며 세월의 행간에서 넘어지지 않고 우뚝 선 황학루는 고사와 희망을 우리에게 전언해 준다. 이제 검은 구름은 걷히고 더욱 명징(明澄)해진 하늘아래 학은 다시 돌아 올것이며, 다시 돌아 온 학은 열반을 거친 루각우에서 너울거리며 새로운 전설을 춤사위에 담아 이야기 해 줄 것이다. 필자/김 혁(재중동포소설가)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0-04-19
  • 아프도록 아까운 나의 옛날이여!
    ● 훈 이 남에게 맡기고 한국가서 거의 십년세월을 지우고 오니 옛집이 얼마나 많이 망가져 버렸는지 맘놓고 발들여 놓을 자리도 없을 지경이 되였다. 남편과 둘이서 어렵던 세월에 오순도순 세아이들을 키우면서 꿈도 많았던 내 보금자리, 비록 초라하게 붉은 기와를 얹은 옛스런 단층 벽돌집이지만 늘 윤기가 돌던 내집! 쇠줄로 엮은 넓고 예쁜 초롱에 닭, 오리,게사니 키워서 고기먹고 알먹고 담장을 의지해서 벽돌로 아담한 개집을 지어 네눈박이 귀여운 “보초군” 살게하고 얼마 안되는 둘의 월급을 쪼개가면서 다들 부러워하게 총명했던 아이들 공부 뒷바라지 하던 재미, 구석구석 먼지 티끌이 쌓일세라 쓸고 닦으면서 만석부자 부러워하지 않고 살았던 알뜰한 내 살림! 복숭아,사과, 오얏나무가 사이좋게 둘러서 있던 앞뜰 우물터, 과일꽃 향기와 록음이 무지 은혜롭던 봄 여름이 지나 가을이 오면 주렁진 과일나무 밑으로 이웃집 아낙네들과 아이들이 줄레줄레 모여들어서 넉넉한 내 인심을 바구니에 가득 담아들고 흐뭇해했던 기억들… 갖가지 풋남새들이 흐드러지게 자라서 이웃에 나누어 주면서 맛있게 먹던 뒤뜰 채소밭…..아! 그때가 너무도 그리워서 난 미칠것만 같고 하염없는 눈물이 앞을 가린다. 그처럼 알뜰했던 내 보금자리 살림집을 게으름뱅이 어떤 부부가 들어와 살면서 십년세월 아예 엉망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과일나무는 다 죽어 버리고 숱한 닭오리 게 사니를 키웠던 예쁜 쇠줄 초롱마저 쇠붙이라고 다 팔아먹은건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다. 성스런 우물터에다는 더러운 널판자를 깔고 닭을 치고 있어서 우물터가 아예 닭똥터가 되었고 집안 구석구석 때와 먼지에 찌들어서 내가 살았던 깔끔했고 윤기돌던 흔적이란 찾아볼수도 없으리만치 돼지우리도 그런 돼지우리가 없다. 아! 가슴이 찢어지고 억장이 무너진다. 사람이 어찌 이렇게도 더러울수가 있을까리해가 안된다. 너무도 화가 나서 몇 날 며칠을 새벽 세시쯤 시작해서 해가 떴다지고 달이 뜨고 그래서 어두워 보이지 않을때까지 닦아내고 쓸어내고 정리하고 가담가담 잔소리도 해가면서 애쓴 보람에 원상 복구를 어느 정도 시켰다. 물론 재개발을 기다리고 있는집이고 이미 고향에 아파트를 따로 마련해서 살고 있으니 우리가 거기에 다시 살 가망은 거의 없지만 내 사랑 내 꿈이 깃들어 있었고 우리 다섯식구가 지지고 볶고 진한 정을 나누면서 긴 세월을 같이했던 알뜰한 옛 보금자리가 그렇게 망가져 가는걸 그냥 보고 있으려니까 아기자기 살갑던 우리가족의 정마저 엉성하니 변해가는게 아닌가 싶어서 너무나도 가슴아픈 일이였다. 예로부터 메토끼 잡으러 가면 집토끼가 잃어진다 했던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한국가서 돈 번다고 살림을 팽개치고 설쳐대는 사이 나는 돈으로는 도저히 살수 없는 많은 소중한 것들을 잃은 것 같다. 지금은 동서남북 여기저기에 다 흩어져 버린 우리집 식구들, 십년 리별에 아예 습관이 되어 버려서 만나면 오히려 서로가 서먹해진 이상한 느낌! 다시 한데 모여 오순도순 화기애애하게 살던 그 옛날로 되돌아 갈수만 있다면 내가 무엇인들 아낄까? 되돌릴래야 되돌릴수 없이 된 지금에야 그 옛날의 소중함을 알게 되였으니 이보다 통분한 일이 다시 없는데 돈에 속아서 보이지 않는 건강까지 잃은점 또한 더더구나 통분한 일이 아닐수가 없다. 한국가기전에 그처럼 짱짱했던 내 몸이다, 기껏해서 어쩌다 걸리군 하던 경한 감기가 제일 무서운 병이였고 웬간히 무거운 물건은 겁없이 다루던 나, 지금은 껍질만 남았다. 열근쯤되는 물건도 아예 깔려 죽을듯이 무겁게 느껴지는 등신이 되었고 엄중한 풍습성관절염에 심한 골다공증과 빈혈에 저혈압에 영양부족에…그리고 나 스스로는 별로 못 느끼는건데 언니들의 말을 빈다면 난 또 심한 강박증 증세까지 보인다는가? 그새 그렇게 그냥 나는 사람이 아닌 돈버는 기계로만 산 것이였다. 귀국후 일년 반 동안을 북경 청도 흑룡강의 여러지역과 여기 연변지구까지 많이 돌아다니면서 새삼스레 느낀건데 우리 중국에서는 사람들이 너무 신 나게 한가하게 놀면서도 잘먹고 잘 살고 있는것 같다. 어디를 가도 공원이나 아파트 단지 넓은 공터나 이름모를 어느 광장이나 운동장같은 그런 곳엔 아침저녁으로 늘 숱한 사람들이 모여서 음악을 틀어놓고 춤추고 신체 단련을 하고 그렇게 시름없이 신 나게 노는 사람들 천지다. 거기에 비해 크고 작은 공원에 아파트단지마다 있는 작은 휴식터에 간단한 체육시설이나 기구들이 널려있는 한국이지만 누구나 먹고살기 바쁜 한국인들이라 그런 곳에서 한가하게 춤이나 추고 그네타고 있는 모습들을 난 본적이 없다. 그렇게 중국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한국인의 생활리듬에 물 젖은 탓이였던지 지금와서 생각하면 굳이 그렇게 악을 쓰고 일하지 않아도 되였을 것을 하루라도 놀게 되면 큰 죄라도 짓고 있는듯이 난 늘 불안했던것 같다. 그래서 거의 십년 세월 여관의 청소아줌마로 일했던 내가 휴식한 날짜는 손으로 꼽을 정도인데 영 아파서 도저히 일할수가 없는 그런 날에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그냥 아침부터 저녁까지 자고자고 또 자고 저녁부터 다시 새벽까지 자고자고 또 자고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서 그 다음날 머리를 들 수 있는정도 다리를 끌지 않고 걸을수 있는 그런 정도면 다시 일을하고…. 그렇게 보낸 세월이 하루 이틀도 아니고 십년이나 되였으니 내 몸이 쇠덩인들 당할 수 있을까? 그래도 은행에 저금이 늘어나는 재미에 빠져서 몸이 썩어 가는 줄을 모르고 있다가 지난해 삼월 중순의 어느 날, 내가 이러다가 앉은뱅이가 되는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두다리가 갑자기 심하게 아파서 화장실도벽을 밞으면서 기어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하늘이 노랗게 보이고 눈앞이 캄캄해났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 것이다. 돈을 많이 벌어 금산은 산을 쌓아 놓은들 내가 걸음도 못걷는 병신이 되어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서 몇 번이나 전전긍긍을 하면서 미루어 왔던 귀국을 갑자기 결심하게 된 나였다. 이제 하늘이 두 쪽이 나더라도 집에가고 싶었다. 아프고 보니 그처럼 목숨 같던 돈이 원쑤같았다. 그립던 내 식구들을 만나보지도 못하고 그냥 한국에서 이대로 죽을 것만 같았다. 나의 귀국은 그렇게 갑자기 이루어졌고 귀국과 함께 열심히 벌어 모았다고 여겼던 “큰돈”도 실감이 나지 않게 여기저기 반년도 되기전에 다 날아나 버렸다. 결국 출국전이나 똑같이 난 또다시 빈털털이가 된 것이다. 돈이란 돌게 생긴 물건이라서 아무리 벌어도 손에 남아 있는 법은 없다고 했던가? 그것이 누구의 명언인지는 몰라도 진짜로 100%진리임을 실감했다. 이리 될줄 내가 미리 조금이라도 알았다면 왜 그 긴 세월 제몸을 혹사하며 기를 써 왔을까? 실로 후회막급이다. 그렇게 내딴엔 대단히 적시적이고 명지한 결심이고 행동이였다고 여겼던 나의 귀국, 하지만 이미 늦었다! 심심히 느끼건대 지금 남아 있지도 않고 이미 다 없어져 버린 돈을 다 끌어모아 처넣어도, 아니 그보다 백배 더 되는 돈을 처넣는대도 목숨보다 더 소중했던 많은 것들은 이미 되돌릴수 없이 나한테서 영영 떠나가 버리고 말았다. 아, 그리운 옛날이여! 소중했던 내 건강이여!!!! 돈에 미쳐서 그리 허망하게 잃어버리기엔 너무도 아깝고 아픈 내것들이였건만...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0-04-18
  • [김정룡 칼럼] 코로나19와 '침묵의 봄'
    ●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천만이 넘어 사는 도시 서울의 삶은 여러모로 답답했는데 올해의 봄은 더욱 답답하기 그지없다. 설을 쇠고 나면 새해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하는데 2월 초부터 모든 행사와 모임이 줄줄이 취소되어 우리에 갇힌 동물과 같다. 나의 주업은 신문발행이고 ‘부업(副業)’으로서 강연 다니고 세미나를 조직하고 다른 기관에서 마련한 세미나에 발제나 토론자로 나서는 경우가 많다. 내가 대표를 맡은 ‘多가치포럼’은 2020년 첫 행사로 본래 ‘3.8 여성의 날’을 맞아 조선족, 새터민, 고려인, 한국인 여성들이 모여 세미나를 개최하려고 했는데 코로나19 때문에 역시 취소되었다. 이외 ‘부업’이 또 있다. 서울시청을 비롯해 여러 관공서 회의에 참석하고 법무부회의도 참석한다. 가끔 작품 심사, 언어발표 심사, 기관 직원 채용 심사도 맡아본다. 법무부 제1기 이민자 맨토단 멘토로 합격되어 본래 2월 27일 법무부 장관 위촉장을 받고 사회통합프로그램과 조기적응프로그램 강의를 진행하기로 했는데 코로나19 사태 때문에 무기한 연기되었다가 4월 22일 회의를 개최한다는 공지가 있긴 한데 그때 가봐야 확실하다는 전제가 달려 있다. 할지 말지 아직 확실한 결론이 아니라는 말이다. 보름에 한 번씩 나가던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독서모임도 취소되고 있어 어디도 나갈 곳이 없다. 설 쇠고 나서 나의 책상 위에 놓인 달력은 두 달 넘게 아무 메모도 없이 깨끗하다. ‘일 년 계획은 봄에 달렸다’는 속담이 있듯이 해마다 설을 쇠고 나면 사회가 온통 분주하다. 이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나의 달력도 왕년 같으면 한주 평균 두 개 정도 ‘행사’가 메모 되었었는데 올해는 전혀 메모가 없이 깨끗하다. 깨끗하다는 것은 아무 활동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나의 ‘활동’은 ‘부업(副業)’이고 나의 ‘부업(副業)’은 곧 나의 ‘부업(富業)’이다. ‘부업(副業)’이 없으니 ‘부업(富業)’도 따라서 사라졌다. 주머니가 늘어야 되는데 줄어들고 있다. 경제적인 손해도 손해거니와 두 달 넘어가니 정신적으로 지치고 슬슬 폐인이 되는 느낌이다.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지쳐가고 있어 비정상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 매일 매일 하루, 하루를 마치 중이 종치듯 무의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지옥이란 무엇이더냐? 단테는 <신곡>에서 “희망이 없고, 꿈이 없고, 비전이 없는 곳이 곧 지옥이다.”고 했다. 지금의 나의 삶이 어쩌면 지옥일지 모르겠다. 어떻게 하면 이 어렵고 힘든 고비를 무사히 넘길 수 있을까? 고민하던 끝에 지방에 3박4일쯤 여행을 다녀오기로 했다. 모든 걸 다 내려놓고 부담 없이 한가한 며칠을 보내면 나아질 것 같았다. 왕년 같으면 이때쯤이면 거의 주말마다 지방 관광지를 부지런히 돌아다녔을 터인데 올해는 관관을 엄두도 내지 못했다. 사태가 사태인지라 괜히 타인에게 피해를 입힐까봐 걱정되어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의 인내성이 한계가 있는 법이다. 도무지 안 되겠다싶어 지난주에 대한민국에서 청정지역인 완도로 가기로 맘먹었다. 한국 관광지들은 중국처럼 스케일이 크지 않고 일본처럼 정교하지도 못하지만 나름대로 아기자기하게 잘 꾸며놓아 구경할 재미가 쏠쏠하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떠나는 김에 먼 곳으로 가고 싶었다. 먼 곳 중에 부산, 포항, 경주 등 경상도 지역에는 여러 차례 다녀왔기 때문에 이번에는 전라도로 가기로 했다. 전라도 중에 찾다보니 가장 먼 곳이 완도였다. 여수도 멀기는 하지만 수년 전 ‘여수엑스포’ 때 가보았기 때문에 완도를 택했다. 완도에서 1박, 목포에서 1박, 땅끝 마을 해남에서 1박하기로 스케줄을 짰다. 완도는 서울에서 440킬로미터 거리다. 서해안 고속도로 타면 330킬로쯤 직진이어서 운전하기 편하다. 목포에 거의 도착할 지점에서 해남으로 빠져나가는 국도를 타고 에돌아 100킬로쯤 더 간다. 가는 날 장날이라고 날씨를 잘 선택한 탓인지, 타고난 운이 좋은 건지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청정했고 바람 한 점 없이 제법 훌륭한 봄날이었다. 도중에 개나리도 피고 목련도 피고 버들가지들이 뾰족뾰족 싹을 내미는 것을 구경할 수 있어 기분이 좋았다. 200킬로쯤 달린 지점에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벌판을 만나 가슴이 확 뚫린 느낌이었다. 경상도 쪽에 여러 번 운전하고 다녀 봐도 김제 벌처럼 넓은 벌을 보지 못했다. 충청도도 마찬가지 넓은 벌을 별로 보지 못했다. 북쪽 강원도에 가면 가는 도중에 산이 너무 많아 터널을 수없이 만난다. 충청도를 지나 전라도 지역에 들어서면 터널이 별로 없다. 나는 터널이 2킬로 넘으면 공포증이 생겨나 운전에 지장이 있다. 전라도에 터널이 매우 적고 있다 해도 길이가 짧아서 기분이 좋았다. 이래저래 여러 가지 환경이 좋아 440킬로 먼 길이지만 운전을 신나게 할 수 있었다. 완도 목적지 앞두고 30킬로 지점에서 방역검사가 한 차례 있었다. 일행이 네 사람 모두 정상 체온이어서 무사히 통과했다. 먼저 도착한 곳은 완도타워였다. 오후 2시경이었다. 기분 좋게 갔건만 정작 도착해서 기분이 이상해났다. 주차장에 차가 몇 대 없지 않는가. 타워 올라가는 길에 한 사람도 왕래하는 길손이 없다. 타워 앞에 올라가니 관광객이란 우리 일행뿐이었다. 타워 정상에 올라가면 전체 완도풍경이 한눈에 안겨올 것 같은데 문은 굳게 닫혀 있어 올라갈 수가 없었다. 갔던 김에 샤터를 눌러 기념으로 남기는 수밖에 없었다. 사진이나마 다녀왔다는 흔적이기 때문에. 정상에 올라갈 수가 없으니 더 구경할 멋이 없어 시간도 매우 단축되어 발길을 장보고 기념관으로 돌렸다. 장보고 기념관도 굳게 닫히기는 마찬가지였다. 신라 때 한반도 완도에서 출발하여 중국에로 일본에로 해상무역으로 명성을 휘날린 해상왕 장보고를 만나자던 기대가 다 사라져버렸다. 대충 말 타고 꽃구경, 변두리를 돌다가 사진이나 몇 장 찍고 떠났다. 역시 안으로 들어갈 수 없으니 시간이 단축되었다. 이번에는 완도수목원으로 가기로 했다. 설마 수목원은 닫지 않았겠지 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찾아 갔건만 역시나 문이 닫혀 있어 몹시 썰렁했다. 바닷가에서 신선한 바닷바람을 마시면서 시간을 보내느라 서성이다가 저녁이나 일찍 먹기로 했다. 보는 재미가 없으면 먹는 재미라도 즐겨야지. 완도읍에 전복거리가 있다. 전라남도에서 세 번째로 크다는 전복전문음식점에 들어갔다. “이 어려운 시국에 찾아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수더분하고 푼더분해 보이는 매너 좋은 주인의 인사말이다. 시국이 시국인지라 그 큰 음식점이 썰렁했다. 단체모임 손님 20명 있어도 워낙 큰 장소라 기분을 채우기는 역부족이었다. 아무튼 조용한 분위기에서 저녁을 먹었다. 본래 음식은 기다려서 먹더라도 사람이 문정성시를 이루는 가게에서 먹어야 한다는 말이 있긴 하지만 이 시국에 문전성시는 한 물 건너간 얘기가 아닌가. 저녁 메뉴는 전복집이라 전복풀코스 요리였다. 일인당 5만원, 좀 비싸기는 하지만 ‘싼 것은 좋은 물건이 아니고 좋은 물건은 절대 싸지 않다.’는 중국속담이 있듯이 음식가치가 그만큼 풍부했다. 작년부터 터득한 것인데 지방에 관광 가면 호텔에 묵지 않고 한옥단지에 묵는 것이 나름대로 좋았다. 작년 8월 중순 고열 때 정선 한옥마을에 묵었는데 앞에는 계곡이고 뒤에는 산이어서 경치가 좋을뿐더러 너무 시원하다 못해 조금 추워서 잠잘 때 이불을 덮고 잔 기억이 있다. 피서를 제대로 하고 돌아왔다. 이번에는 청해진한옥마을에 숙소를 잡았다. 앞에는 완도 바다가 눈에 안겨오고 뒤에는 역시 산이다. 한옥은 여럿이 가면 잠자기도 편하고 음식도 해 먹을 수 있고 밖에서 바비큐도 해서 먹을 수 있고 불고기도 해 먹을 수 있어 그 재미가 쏠쏠하다. 이튿날 아침 청해진포구 촬영지를 가보기로 했다. 역시 문을 닫았을 것이라는 생각이었으나 가보지도 않고 미리 예단하고 포기하는 행위는 후회를 불러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안고 설마 설마하면서 찾아갔는데 우리 일행의 성의를 알았는지 문이 열려 있었다. 정말 천만다행이었다. 이곳마저 닫혀 있었으면 진짜 이번 완도여행은 추억을 남길 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관광은 6대 요소로 이뤄진다. 중국식대로 말하자면 먹는 것(吃)이 첫 자리이고 잠자는 것(住), 이동하는 것(行), 관광지 구경하는 것(遊), 토산품(기념품)을 구매하는 것(購), 오락 구경하는 것(娛)의 순서이다. 이 6대 요소 중에서 일단 대한민국에서 귀한 음식으로 취급하는 전복을 먹었으니 괜찮은 편이고, 경치 놓은 한옥에서 잠을 잤으니 역시 합격점이라고 말할 수 있지만 다른 것은 말짱 꽝이었다. 그리고 먹는 것과 자는 것은 다른 지방에 가도 거기서 그것이기 때문에 손바닥 만한 한국 내에서는 별로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관건은 관광지 구경이다. 어느 지역이든 어디를 가던 똑 같은 음식과 똑 같은 숙소는 흔하지만 똑 같은 관광지는 없는 법이다. 그래서 여행에 있어서는 관광지가 가장 중요한 포인트가 되는 것이다. 이번 완도 여행에서 관광지(청해진포구 촬영지 제외하고)가 모두 닫혀 있어 관광의 의미를 상실해 버렸다. 한마디로 실패한 여행이었다. 목포에 가려다가 그곳도 역시 관광지가 모두 닫혀 있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다 도망가 버렸다. 해남도 마찬가지. 아무 의미도 없는 여행을 억지로 돌아다닐 필요가 없지 않는가. 그래서 3박4일로 잡은 여행이 1박 만에 끝나고 이튿날 청해진포구 촬영지에서 직접 가리봉을 찍고 돌아와 버렸다. 완도는 3월 말이면 관광객으로 붐비는 곳이다. 왕년 같으면 미리 숙소를 예약하지 않으면 잠자리 구하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올해는 숙소도 텅 비어 있었다. 겨울이 가고나면 어김없이 기온이 따뜻해지고 봄이 온다. 들에는 뭇꽃들이 만발하고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 이 곳 완도도 틀림없이 자연은 봄이 왔다. 그런데 봄이 왔는데 봄이 같지 않다(春來不似春)는 말이 있다. 완도를 두고 하는 말이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자연에 맞춰 인간사회에도 봄이 와서 북적대야 하는데 그놈의 코로나19 때문에 이르는 곳마다 적막감에 휩싸여 있어 봄은 봄이 아니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 수년 전에 읽었던 책 한 권이 생각난다. 미국 생물학자 레이첼 카슨이 1961년 지은 <침묵의 봄(2011년 김은령 역 에코리브르 출간)>이다. 동양인들은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들이 대충 꽃, 아지랑이, 제비 등등이다. 미국인들은 봄에 대해 동양인에 비해 다른 문화적인 패턴이 있는데 그것은 봄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곧 새의 지저귐이라고 한다. 해마다 봄이 오면 새들이 기가 차게 시끄러울 정도로 지저귀였는데 어느 해인가. 새들이 도시 거리에 죽음으로 나타나고 쥐들도 죽어서 거리에 널려 있었다고 한다. 그러더니 그 해부터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새가 지저귀지 않으니 봄은 침묵했다. 저자는 새의 지저귐이 사라진 이유는 지구온난화에 의해 생태계가 파괴되어 새들의 먹을거리가 사라졌기 때문이고 인류가 화학비료를 생산하고 사용함에 따라 다수의 생물들이 죽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일례로 북미 지역에서만 참새가 35억 마리 죽었으니 봄을 알리는 지저귐이 사라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새의 지저귐이 사라진 것을 ‘침묵의 봄’으로 표현한다면 이번 봄 인류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모든 활동이 사라진 것도 역시 ‘침묵의 봄’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앞으로 이와 비슷한 바이러스 때문에 봄이 오면 봄 같지 않은 봄, 즉 ‘침묵의 봄’이 또 올까 두렵다. 필자/김정룡/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장, 칼럼니스트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0-04-01
  • [허성운 칼럼] 화룡과 고래
    ●허성운(칼럼니스트) 첩첩이 가로막힌 산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두만강 연안 화룡일대 산골짜기는 과거 선인들 삶의 주된 활동무대였다. 1860년대 함경도지역에 들이닥친 끔찍한 재해와 역병은 마침내 수많은 함경도 사람들이 국경을 박차고 두만강을 넘어 눈 덮인 산악지대로 스며들어 왔다. 이들은 접근이 힘든 산골짜기와 데걱지에서 숨어살면서 따뜻한 벌판으로 내려오지 못하였다. 산악 민족 대부분 그러하듯이 타자를 적대적으로 여겨 골짜기 입구까지 막아가며 철저하게 폐쇄적인 삶을 살아왔기에 이들의 역사는 오늘날까지도 어둠속에 묻혀있다. 거기에 도로 발달이 더디고 왕래가 많지 않았던 그 시기 두만강 유역 화전민의 거주지와 수치는 애초에 알려지지 않은 부분이 훨씬 더 많았다. 그 옛날 주린 배를 움켜쥐고 군데군데 화전 밭을 일구며 새로운 삶을 일구어야만 했던 선인들의 그 고단한 삶의 흔적은 화룡 땅 산골짜기마다 고스란히 묻혀있다. 함경도 방언에는 산골짜기를 뜻하여 고래라는 말이 있다. 파밭고래 불붙이고래 삼밭고래 싸리밭고래 봇밭고래 감자고래 누베고래 빼래밭고래 등이다. 이런 고래에는 어구지, 여불대기, 막치기, 진고래 독고래와 같은 다양한 낱말들이 흔하게 써왔다. 해와 달을 거듭하면서 이런 크고 작은 고래에서 얼기설기 실핏줄처럼 뻗어 나와 혈관처럼 화룡 땅 곳곳에 스며들며 삶의 보금자리를 마련하게 되었다. 그 후 광복이 되면서 조 보리 메밀 감자가 자라는 산골찌기로부터 벼가 자라는 수전벌판으로 그리고 다시 농촌에서 시가지로 사람들이 이동하는 세월동안 화룡 땅 골짜기마다에 숨겨진 피눈물로 얼룩진 지명들은 서서히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오늘날에 와서 두만강 유역 옛 화룡지역 중국어 지명들을 꼼꼼히 살펴보면 이도구 삼도구 육도구 등 수자 나열식으로 지명을 명명한데 반해 조선어 지명은 마치 큰 나무줄기에서 뻗어나간 가지처럼 하나의 골짜기에서 펼쳐나간 곁 고래들을 빠짐없이 고유어로 지명을 붙여왔다. 홀몸으로 화룡일대를 들어왔던 한족들과 달리 온 가족을 거느리고 들어선 조선인들은 지팡살이를 하면서 보리밭데기 석마돌어귀 개치기 등 토박이 땅이름으로 지칭하였는데 나중에 이런 지명이 한자를 음차해서 표기된다. 이를테면 골짜기 막치기 뜻을 지닌 개치기를 개척리開拓里으로 적은 것들이다. 오늘날 세간에 알려진 것은 화룡 지명이 달라자 화룡욕에서 기원되었고 만주어 호로holo에서 유래되었다는 게 통설로 되었다. 누구도 부인하지 않을 만큼 정설로 굳어져 가고 있지만 사실 이런 해석은 정확한 풀이가 될 수 없다. 만주어 호로holo를 엄밀하게 따지고 보면 함경도방언 고래와 일맥상통된다. 하나의 언어밑층에서 파생되어 고래와 호로holo로 나뉘었지만 산골짜기라는 뜻에는 그 맥락이 하나로 이어지고 있다. 오랜 세월을 내려오면서 두만강 지역이 다양한 문화의 용광로라는 점을 감안하여 보면 우리말과 만주어가 융합되는 과정에서 생겨난 화룡지명은 역사가 깊은 지명이다. 실제로 사책에서도 고라이령古羅耳嶺이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만주어 호로holo는 골짜기와 거짓말 밭고랑이라는 여러 가지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거짓말은 표준어 홀리다로 나타나고 함경도 방언에서 후랄친다 홀리붓기로 파생되어 있고 한국과 일본에서는 구라친다로 변이되어 있다. 함경도방언 고래는 구들고래 술고래와 같은 낱말을 낳았다. 화룡和龍 지명은 함경도 방언 고래와 만주어 호로holo 소리를 바탕으로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언뜻 보면 화和와 룡龍 두 글자를 따서 붙인 이름으로 생각할 수 있지만 일본문화 냄새가 진하게 풍겨 꺼림칙하다. 시초에 한자지명 火狐狸 火龍으로 새겨왔지만 19세기 말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화룡和龍으로 표기가 굳어졌다. 여기에서 화和자는 단순히 야마토 시대를 지칭하는 차원을 넘어 일본을 가리키는 말로서 와후쿠(和服), 와시(和紙)처럼 와和자는 일본이 고유전통이라는 의미가 숨겨져 있다. 지명은 한번 불리어지기 시작하면 다시 바꾸기 어렵다. 우리 선인들이 살다간 흔적으로서 지명은 우리의 귀중한 문화유산이만 오랜 세월 속에서 이처럼 타자에 의하여 제멋대로 찢어지고 구겨지고 비틀어지여 오늘까지도 반듯하게 정리되지 못한 채 올바르게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봄이 오면 선인들의 피눈물이 방울방울 맺힌 화룡 땅 골짜기마다에는 연분홍 천지꽃이 어김없이 떨기떨기 피여 난다. 골짜기마다에는 극한으로 연소되어 살다간 함경도 사람들의 뜨거운 삶을 닮아 천지꽃이 핏빛처럼 붉게 타오르고 있다. 오늘도 산골짜기를 가득 메우는 산새들 피타는 울음소리는 천지꽃을 붙들고 화룡지명에 맺힌 한 많은 이야기를 애타게 하소연하고 있다. 필자/ 허성운 (칼럼니스트)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0-03-29
  • [허성운 칼럼] 아바이와 커라바이
    ● 허성운(칼럼니스트) 지금까지 많은 방언학자들은 표준어 할아버지에 대응되는 함경도방언을아바이로만 거론하여 왔다. 함경도에서의 아바이(abai)는 부모의 아버지와 같은 항렬에 있는 남자들을 이르는 말에 반해 부모의 아버지에만 한정된 호칭인 커라바이(khabai)라는 토박이말이 널리 사용되어 왔다는 사실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다 아바이는 역사가 깊은 단어이다. 함경도에서는 할아버지를 의미하나 커라바이 맏아바이 아즈바이 오라바이 등 친족어 계열을 이루고 있으며 이들 모두가 연장자 의미가 내포되어 경상북도와 평안도 일부에서 아버지를 아바이로 부르는 호칭과도 일맥상통된다. 아바이(abai)이 방언은 만주어에서 하늘을 뜻하는 아바카(abka) 그리고 북방언어계통에서 신성한 사람 하느님을 뜻하는 안파견 아바칸과 하나의 맥락에서 짚어볼 수 있다. 실제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두만강과 압록강 유역에서 인명으로도 불리어왔다. 고유어의 화석 같은 존재인 아바이 단어는 생물유기체와도 같은 진화를 거듭하며 함경도 방언에서 커라바이 제주도 방언에서 할아방 강원도와 경상도방언에서 할배로 나타나고 있다. 몽골과 흉노 중앙아세아에서 지도자를 지칭할 때에는 한 (han) 또는 칸(khan)으로 부르며 “ㅎ”발음과 “ㅋ” 발음이 상호전환 되는 규칙을 감안해 보면 사실 함경도방언 커라바이와 타지방의 할아방 할배 등 방언들은 쌍둥이처럼 하나의 뿌리에서 나와 여러 줄기로 노출되어 있는 모양새이다. 예전에 늘 쓰고 들어왔던 “커라바이”라는 말은 오늘날에 와서 “할아버지”라는 표준어에 밀리여 아주 제한된 세대에서 사용되고 있어 이제는 영어 일어 러시아어를 술술 배워내는 우리 아래 세대들에게 있어서는 선인들이 써왔던 이런 모어가 울고 들어가서 울고 나오는 외래어로 전락되고 있다. 연변과 함경도 그리고 러시아 연해주 넓은 땅에서 살아온 수많은 사람들의 뼛속깊이 뿌리내린 함경도방언은 조상들이 살고 간 역사의 흔적으로서 마치 앙금처럼 숱한 역사가 누적된 우리문화유산이나 이제 이런 말들은 바야흐로 흔적조차 없이 사라질 위기에 놓여있다. 오늘날에 와서도 일부 방언학자들은 연변과 함경도지역에서 남편을 나그네라고 부르는 언어현상을 마치 바깥세상과 동떨어진 외딴 섬나라 미개인의 언어로 풀이하고 있지만 그 어원을 깊이 따지고 보면 중세 몽골어에서는 남편 혹은 친구 의미를 가진 너헤nehers라는 어휘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함경도 방언 올찌세미를 올케의 그릇된 표현으로 섣불리 해석하고 있지만 여진어와 만주어에서 올케는 단수 형태를 지니고 올찌세미는 복수 형태를 지닌다. 함경도의 안까이는 표준어 아내라는 말과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쌍둥이 단어이다. 여러 쪽으로 갈라진 구리거울이 하나로 이어지며 눈부신 빛을 뿜어내는 옛날이야기처럼 지역마다 스며있는 방언가치를 깊이 발굴하고 동질성과 정체성을 확립하여야 만이 의사소통을 가로막는 언어의 장벽이 허물어 질수 있는 것이다. 우리언어의 가시밭길을 더듬어보면 근대에 들어와서 허다한 문명은 남에서 북으로 들어왔지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보면 강력한 북방문명은 두만강과 압록강을 거쳐 끊임없이 남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우리는 자신이 부르기 좋고 기억하기 쉬운 개성이 있는 방언을 사용할 수 있는 권리가 있음을 스스로 깨달아야 한다. 우리 방언의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말을 마음속에 새길 때 장기간 밀폐된 언어의 창고에서 우리 방언도 역사를 새롭게 조명하는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연변과 함경도 방언은 우리 과거 역사를 풀어내는 블랙박스이며 또 미래를 헤쳐 나가는 내비게이션이기도하다. 필자/허성운(칼럼니스트)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0-03-16
  • 조선족을 도구화하는 한국정쟁,그만하라!
    ●박광성 한국역사를 보면 구한말 나라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하여 있을 때 조정의 대신들이 여러 당파로 나뉘어 권력쟁탈을 위한 정치싸움에 골몰하다가 결국 나라를 빼앗기는 비운을 맞았다. 외적을 앞에 두고 내부 떡 싸움을 하다가 다 같이 망한 셈이다. 일제에 나라를 뺏았기고 타국에 와서 독립운동을 하면서도 그 고질병은 고쳐지지 않았다. 하루멀다 하게 새로운 당파가 생기고 서로 헤게모니 싸움만 하다가 결국 결국 대국들에 의하여 광복되었으며 나라가 분열되는 비운을 맞았다. 이렇듯 역사를 보면 당쟁과 내부분열은 한국의 망국의 병페였다. 오늘날의 한국은 반드시 이를 역사의 거울로 삼아 얼굴을 자주 비춰보고 다시 이런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한국사회를 보면 그러한 망령이 또다시 얼른거린다. 세계사적인 또 한번의 거대한 전환이 시작되고 그것이 한반도에 여러모로 큰 도전을 가져다 주고 있는 오늘날의 중요한 역사시기에 온 국민이 좌, 우로 나뉘어 다수 국민에게 별로 실익도 없는 논쟁에 젖먹던 힘까지 빼고 있다. 이번 코로나 19사태만 봐도 그렇다. 집안에 불이 붙었으니 원인을 막론하고 일단 불부터 꺼야 한다. 그러나 국민을 이끌고 불끄는 일에 집중해야 할 정치권이 그보다 정치싸움에 더 골몰하는 듯하다. 그것도 엉뚱하게 이 마당에 친미와 친중의 논쟁으로까지 번져 에 온 나라가 시끌벅적 하다. 아전투구의 싸움이 되다보니 급기야 어느 극우 사이트를 통하여 “조선족들이 한국의 모든 여론을 조작”한다는 어느 가짜 조선족의 양심선언이 이어졌고 언론에서 이를 “차이나 게이트, 조선족 게이트”란 이름을 부쳐 대서특필하는 상황까지 번졌다. 이를 더는 방치할 수 없어 결국 청와대까지 나서서 국가별 인터넷 접속 숫치까지 밝혀가며 사실무근임을 밝혔다. 사이트에 올린 소위 조선족의 양심선언을 보면, 문맥이나 표현방식, 사고에 있어 분명히 어느 정치에 열중하는 한국인에 위하여 조작된 것이다. 현재 도시화로 세계 각국에 유동 중인 조선족이 무슨 정신으로 한국여론을 좌지우지 하며, 무슨 동기로 그렇게 한국정치에 열중하겠는가? 매일 세계 선진국타령을 하면서 다른 나라의 평가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고국에서 이와 같은 비상식적인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재외동포 한사람으로서 부끄러움 느끼지 않을 수 없다. 지난날 조선족에 대한 한국의 부정적인 인식은 “계급편견”에서 유래한 일면이 많았다. 돈 벌려고 온 노동자들이니 그 설음을 참아야 했다. 그러나 최근에 들어 그 양상이 변하고 있다. 국제적으로 미중간에 마찰이 늘면서 한국 내에서 줄타기 고민이 시작되었고,그것이 이데올로기 영역까지 확대되면서 보수집단이 친미경향이 더욱 강화되고, 이를 위하여 중국을 견제하기 여론을 조직적으로 조성하면서 조선족을 그 희생물로 삼고 있다. 다시 말해서 현재의 조선족에 대한 부정적 여론은 자연발생적이 아닌 정치적 목적에 의하여 이용되는 일면이 있다. 고국에 희망한다. 작은 나라가 큰 나라들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하면 꼭 자신이 당한다. 어느 나라에 자기의 명운을 걸기보다 인류공동체에 스스로만이 공헌할 수 있는 독자적인 존재로서 모든 인류가 소망하는 평등과 평화의 공동번영의 길로 힘차게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세계 10위권에 올랐다고 자부하는 나라답게 이주역사가 100여년 넘는 해외동포사회를 정쟁의 수단으로 이용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글을 마치면서 품격 없는 정치에 의하여 고국이 다시 풍파에 빠지는 일이 없기를 바란다. 필자/칼럼니스트 박광성 (중앙민족대학 사회학학원 부교수)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0-03-04
  • [허성운 칼럼] 국시장과 후지동
    연필을 뜻하는 함경도 옛말은 “가름다시”인데 국내외 방언학자들은 러시아어에서 들어온 외래어로 섣불리 못박아 놓고 있다. 허나 그 어원을 따지고 보면 북방언어계통인 몽골어와 돌궐어에서 검은 돌이라는 의미로 풀이가 가능하다. 여기에서 가름은 검다 의 의미를 지닌 가라말이라는 가라 음과 뜻이 일맥상통되며 다시는 표준어 돌과 달리 함경도 사투리 돌잭이라는 음과 뜻이 근접된다. 근대에 들어서서 러시아연해주와 연변일대로 진출한 선인들의 탈출 노정을 추적하여 보면 황야 길에 검은 돌을 쌓아올린 국시장이 도로표지처럼 등장한다. 이런 국시장은 거개가 평지의 세질어부름 (함경도 방언 삼거리)과 산 데걱기(함경방언 산마루)에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평지와 산마루사이를 이어놓는 고래를 (함경도 방언 골짜기) 국시장골로 불러왔다. 북방언어계통에서는 ‘ㅎ’음과 ‘ㅋ’ 음이 상호전환 된다. 왕을 지칭할 때 한 (han)을 칸(khan)이라고도 부른다. 연변과 함경도에서는 할아버지 혹은 할배를 “커라배”라고 부르듯이 국시장골은 어음변화를 거쳐 한자 지명 표기로 후동厚洞 후지동厚之洞으로 마을 지명들이 굳어졌다. 삼굿구이는 예로부터 두만강 일대에서 널리 성행했는데 삼 껍질을 벗기려고 구덩이를 파고 돌을 달구어 삼을 찌는 일을 말한다. 삼굿구이는 단순한 노동행사가 아니라 김과 연기를 피워 하늘에 메시지를 보내고 신과 소통하여 가물과 장마를 피하며 초목이 푸르고 가축이 늘어나는 자연생태 선순환을 기원하는 민속풍속이기도 하였다. 오늘날 와서 삼을 가공하여 진정제효과가 강한 마약으로 쓰이는 것을 보면 환각상태에서 복술과 무당들이 푸닥이며 구명하고 굿을 올리는 것을 단순한 미신 행위의 잣대로 판단할 일이 아니라 고유한 문화자원으로 바라보는 것이 정확하다. 삼굿구이에서 까맣게 구운 돌들을 선별하여 국시장에 쌓아 올린 돌탑은 선인들이 탈출 길에 쌓아올린 독특한 역사풍경이다. 돌 쌓는 풍습은 조선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전역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하지만 선인들의 국시장 돌탑은 하늘과 감응하는 까만 삼굿구이 돌로 선별하여 해묵은 가둑나무(함경도방언 참나무일종) 옆에 수북하게 쌓아놓는 것이 특징이다. 하늘이 내린 운수라는 뜻으로 몽골어에서 kut 만주어에서 kesi라 적고 있다. 만주어에서 kesi은 우리말의 굿과 그 뜻과 음이 유사하며 몽골어에서 kut은 우리말의 가둑나무의 가둑 음과 근접되어 하늘과 감응하는 매개체로서 가둑나무는 하늘에서 굿이 내려오는 성스러운 곳으로 풀이된다. 그리고 함경도 사투리 후투산 소리하다는 굿에서 운수가 붙는 좋은 징조가 있다는 말이다. 200년 전 선인들이 함경도대탈출은 유례없는 기적의 역사이다. 1867년 5월 길림장군 부명아는 러시아 연해주 지신허와 연추를 돌아보고 함경도에서 탈출해온 1000여명이 집을 짓고 살고 있으며 만주인 러시아인 조선인 옷차림을 하였다고 적고 있다. 각이한 옷차림을 한 사람들을 하나하나 데려다가 물어보니 모두가 토박이 함경도 말을 하였다고 덧붙이고 있다. 청나라 봉금시기로부터 이어진 선인들의 이런 대탈출 역사는 일제시기의 집단이주와 확연히 구별되는 역사이다. 문둥이병 기아 살육 수탈 온갖 끔찍한 재난 속에서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인 운명을 박차고 얼기설기 실핏줄처럼 거칠게 끓어지였다가 다시 이어지며 러시아와 연변 땅까지 뚫고 들어온다. 그 암울한 시대 만약 국경이란 거미줄에 목이 매여 온갖 가난의 실타래를 감고 그 굴레에 벗어나지 못했다면 선인들의 위대한 대탈출역사는 결코 있을 수 없다. 치발복역한 양자 양녀로 시늉만하는 벙어리로 지울군으로 지팡살이군으로 살아남기 위한 이들의 처절한 몸부림은 마침내 위대한 탈출 역사를 촉발시킨다. 첩첩이 가로막힌 산들이 파도처럼 일렁이는 두만강지역 그 울울창창한 원시림을 뚫고 나가는 탈출 길은 말 그대로 저승길이었다. 엎어지고 넘어지고 수천만 번 끝내는 기어가는 몸의 형태는 이미 스러지고 없다. 질긴 목숨을 이어가는 추운겨울 머리 위엔 피눈물같이 마른 나뭇잎만이 뚝뚝 떨어진다. 육신이 닳고 닳아 뼈가 부서진 손으로 마지막 간절함을 빌어 국시장 돌탑에 까만 돌을 얹혀놓는 그 찰나에 신의 목소리가 들린다. 신의 빛이 내려오고 해와 달 전설처럼 구원의 동아줄이 드리워지고 아라비얀나이트 그 행운의 바위돌문이 열린 것이다. 오늘도 천년역사가 바윗돌로 굳어져 눈 뜨고 앉아서 세상을 굽어본다. 그 위대한 침묵위에 석불처럼 조용히 앉아 잃어버린 국시돌 전설을 하나하나 조심스럽게 주어본다. 타자에 의하여 굳게 닫힌 선인들의 위대한 탈출역사의 빗장을 벗기고 그 진실 된 역사를 열어놓아야 만이 우리의 과거사는 더 많은 미래 세대들이 들어왔다가 나가는 드넓은 역사문화의 장으로 거듭 날 수가 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20-02-03
  • [허성운 칼럼] 연길서역과 연천대교
    ◑칼럼니스트 허성운 고속철도가 뚫리면서 연길서부지역은 교통도로망이 새롭게 구축되어가고 있다. 이와 동시에 연천대교 연천북로 연천남로 등 새로운 도로명과 다리이름들이 하나둘 표기되고 있다. 그런데 이런 명칭은 본래 이 고장에 깃들어있는 역사와 전설을 품어야 마땅하나 이런 연원을 전혀 따져보지도 않고 한자로 두리뭉실하게 이름을 붙이는 폐단은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 이해가 가지 않는다. 연길서역 고속철도역은 인민공사시절 광석10대가 위치한 구역으로서 최초에는 러시아 연해주 지역에서 이주한 이들이 많아 아래깡동 사람들이 모여 사는 오래(함경도 방언 마을)라는 지명으로 광동이라고 불러오다가 마을 산기슭 흙이 적색을 띠었기에 행정문서에는 적암평이라는 땅이름으로 새겨있으며 민간에서는 동네가 둔덕 위에 자리 잡았다고 닭이덕대라고 불러왔다. 오늘날 와서 많은 사람들은 1919년 일제 강점기에 있었던 조선독립을 선언한 서울 독립 선언서는 잘 기억하고 있지만 이와 별도로 적암평과 인근 왜랑동 소완자 사람들이 주축으로 독립선언서를 작성하고 발표한 일은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고 있다. 지금의 연천대교는 조양천으로부터 흘러내려오던 부르하통하 물줄기가 강 건너편 소완자쪽에서 중데기(일명 절당데기)쪽에로 물곬을 틀어 크게 휘돌아 흐르는 곳에 세워졌다. 그 시기 적암평에서 부르하통하를 바라보면 거대한 물줄기가 아름다운 호형으로 그리어 있고 나루터가 자리하여 재비가 오가는 푸른 강물 위에 버들방천이 비낀 풍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오래 동안 타향에서 향수병에 젖어있는 이들이 어쩌다 고향을 찾아 연길서역에 발길을 들여놓을 때 낯설어 보이는 건물 앞에서도 옛 고향 추억을 더듬어 정서적 공감을 이끌어내는 마중물 같은 땅이름과 고장역사를 적은 기념시설이 연길 서역에 갖추어 있어야 마땅하다. 연천대교 남쪽 소영진 인평촌은 오늘날에 와서 부근의 신풍촌 그리고 문화촌을 아울러 부르는 지명이다. 얼핏 보면 유교문화를 지향하는 명칭으로 바라 볼 수도 있으나 사실은 일본 쇼와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인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 원래 소완자로 불러왔던 땅이름을 일본인들이 들어오면서 인평으로 바꿔어 표기하였다. 인평 서쪽 동불사 로투구 일대를 유서촌(裕庶)으로 새기고 동쪽 마을이름을 메이지천황 이름을 따서 명신(일본어 메이지)촌으로 적기 시작하였다. 신풍촌은 원래 땅 밑바닥이 매우 물렁물렁하여 빠지면 나오기 어려운 진펄이여서 사득촌이라고 불렸고 지세가 낮고 습지가 많은 한랭한 곳이었다. 벼 재배에서 이름난 최죽송과 마을 촌민들은 늪지대를 석탄재로 메꾸고 둔덕을 깎아내리며 논밭을 일궈냈다. 당시 중국대지에 널리 알려지었던 “남진북최”란 말은 벼 재배에서 남방에는 강소성의 진영강이 있고 북방에는 길림성의 최죽송이 있다는 뜻이다. 오늘날 강소성에 가보면 진영강의 동상이 세워지어 있는데 연변에는 최죽송 동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지금에 와서 연길시인민체육장은 소완자 인평에 들어앉아 있지만 원래는 연길시인민공원에 자리하여 있었다. 그 옛날 고목들이 울울창창하게 들어서고 비석거리 도가집 국시장 터들이 있어 선인들의 삶의 문화가 오롯이 피어났던 동산인데 일본인들이 들어서면서 긴자를 세우고 공원을 앉히며 수도탱크시설을 설치하여 본래의 모습이 말끔히 지워졌다. 해방 후 연변의 각종 크고 작은 행사를 맞으며 수많은 사람들과 가족들이 찾던 매력적인 공간으로 부상한 명소인데 오늘날에 와서는 이런 역사 기록 한줄 남긴 기념시설물조차 세워지지 않고 있다. 일찍 최초의 간도 벼재배 실험전과 연길수원지가 자리한 웅뎅개 마을은 한때 소시장이 흥성하였고 아바이아매 시라지국 음식점들이 피아노 건반처럼 촘촘히 들어앉았던 곳이었는데 고층빌딩들이 스카이라인을 장식한 오늘날에 와서는 웅뎅개 마을이라는 기념시설물과 골목이름은 찾아 볼 수가 없다. 역사를 품었던 장소들이 이처럼 너무나 빠른 속도로 바뀌고 사라지여 이제는 연길이 우리에게도 생소한 도시로 변해가고 있다. 민족 특색이 있는 도시로 건설하자는 표어는 곳곳에 나부끼고 있으나 타지방에서 수입한 설계도에 따라 건축물을 찍어내듯 늘려가고 허다한 아파트 빌딩 명칭은 건설업체 이름 그대로 달아 걸고 있으며 도로와 골목간판에는 민속과 역사를 품은 곱씹어 볼만한 명칭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현대감각을 자랑하는 화려한 시설과 달리 우리가 발굴 발전시킨 문화 유적과 유적지 보존, 기념시설 조성은 아직도 말 그대로 제자리걸음이다. 그 사이 오랜 세월을 두고 우리 땅을 묵묵히 일궈왔던 선인들의 진실 된 역사와 그들의 발자취는 하나둘 지워지고 줄어들고 있으며 고향을 떠나 타향에서 사는 탈고향 현상은 늘어나고 민족 공동체의식 감정적 유대관계 자아 동질성을 잃어가고 있다. 이제는 이 땅에 짧게는 70년 길게는 150여 년이라는 긴 세월이 내려앉는다. 수천만 사람들의 인생도 그만큼 차곡차곡 이 땅에 쌓였다. 마땅히 되살려야 할 기록. 역사에 대한 기억은 과거가 아닌 현실적으로 지금 시급히 해결해야 할 과제로 우리앞에 나서고 있다.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9-12-18
  • 중국 축구협회 추진 사항 '약' 혹은 '독'?
    ● 리병천 중국 축구협회에서 국내 각 단계 리그 구단수의 전면 확장을 계획하고 있다. 축구협회에서 발표한 초보적인 타산에 따르면 돌아오는 2025년 시즌까지 슈퍼리그는 18개 팀, 갑급리그는 20개 팀, 을급리그는 48개 팀으로 확장해 경쟁을 펼치게 하는 체제를 구축한다고 한다…. 중국 축구협회는 지난 25일, 상하이에서 프로리그 투자인 회의를 개최했고 리그 확장과 새로운 체제를 구축할 데 관해 토론을 벌였다. 이날 회의 때 축구협회에서는 현행 16개 팀 체제인 슈퍼리그는 2025년에는 18개 팀 체제로 바꾸고 또 갑급리그는 20개 팀으로, 을급리그는 48개 팀으로 구성하게 하는 체제로 구축하려는 계획을 밝혔다. 그뿐만 아니라 축구협회에서는 향후 몇 년간 30살 이상의 국내 선수들의 이적을 제한, 어린 선수들의 재능을 보호하기 위해 귀화 선수를 포함한 외국인 수 역시 제한할 계획을 내비쳤다. 귀화 선수에 대해서도 매 팀이 2명을 보유, 경기에 단 1명만 출전할 것을 제안했다. 이 외에도 축구협회에서는 국내 선수들의 연봉을 제한하는 방안으로 1000만 원이라는 상한제를 도입할 것을 제기하기도 했다. 실제 이는 국내 프로리그가 최근 과도한 투자에 비해 실력이 크게 떨어지자 축구협회에서 긴급하게 이번 프로리그 쇄신안을 마련해 질적 발전을 도모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하지만 이번에 축구협회에서 구축하고 있는 정책들에 대해 항간에서는 더욱 큰 비판과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가고 있다. 축구협회에서 이번에 추진하려는 방안들은 아직 최종 결정된 것이 아니다. 알려진데 의하면 이와 관련한 세부안은 내년 초에 나올 전망이다. 하지만 국내 선수들의 연봉 상한제 도입, 30살 이상 국내 선수들의 이적 제한 등 정책들이 실제로 시행된다면 중국 축구에 치명적인 타격하다 줄 수 있다는 판단이 강하게 느껴진다. 연봉 상한제 같은 경우 이미 중국 귀화를 마친 선수들이 앞으로 어떻게 작용할지가 매우 궁금하다. 광저우헝다 엘케손을 예를 들면 브라질 국적을 유지했을 때만 하더라도 연봉 5000만 원을 받았다. 하지만 귀화까지 한 이상 엘케손은 더는 외국인 선수가 아니기에 연봉이 대폭 삭감될 가능성이 크다. 국가팀 선수로 뛰는 것은 영광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반 토막 이상 연봉밖에 받지 못하는 상태에서 과연 귀화할 외국인 선수가 있을지 의문스럽다. 이외에도 30살 이상 국내 선수들의 이적을 제한하는 정책도 극히 비합리적이고 시장 경제 발전 법칙에 맞지 않는 정책으로 판단된다. 유소년 선수들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이라고는 하지만 30살 이상 선수들의 앞날을 파괴하는 것을 전제로 해서는 절대 안 된다. 특히 축구선수 중 30살 좌우에야 경험적인 우세를 토대로 최상의 컨디션을 보이는 선수들이 매우 많다. 이들이 자신의 최상의 경기력을 가진 상황에서 어린 선수들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또 기타 구단으로 이적을 할 수 없어 일찌감치 퇴역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까지 발생할 가능성이 우려된다. 지난달 까지만 해도 귀화를 추진하던 축구협회에서 단 한 달 만에 국가팀의 부진을 이유로 귀화를 사실상 막고 있다. 이처럼 그때그때 다르고 번복되고 있는 정책들은 사실상 정책이 아니라 '장난'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국내리그에 매년 수십억대 투입을 하는 구단주들은 축구협회의 번복되는 정책 때문에 살얼음판을 걷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오늘의 정책 때문에 몇억 원을 투입하고 내일이면 또 이 정책의 폐지 때문에 더 많은 돈을 써야 하기 때문이다. 프로리그도 시장 경제인 만큼 자금을 무시하고는 절대 지속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 중국 축구가 정책이 없어서 실력이 떨어지는 것이 절대 아니다. 다만 세계 그 어느 나라 보다 더욱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정책들이 너무 많은 것이 문제다. 중국 축구 발전을 위해 간단하고 최소 십 년간은 지속할 수 있는 장기적이고 또 시장 발전 법칙에 맞는 정책을 만들어 그 정책을 확고하게 실시할 수 있는 토대를 만드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필자/리병천(연변)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9-11-2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