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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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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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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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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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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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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단풍잎이 떨어질 때의 생각
    아침에 종전과 같이 출근길에 나서면 곱게 물들었던 단풍잎이 하나,둘 미련없이 길가에 살푸시 내려 앉는 것을 심심찮게 볼수 있다. 넓은 아스팔트 길 옆의 나무들도 앙상한 줄기와 가지들을 드러내며 곧 닥쳐올 겨울의 혹독한 추위를 감당할 준비를 서서히 해나가고 있었다. . 이 정경을 바라 보노라니 저도 몰래 마음이 착잡해지며 살아 온 과정을 반성해 보게 된다.사람은 엄마의 배속에서 십개월간의 시간을 거쳐 곱게 자라 세상에 고고성을 울리며 태여날 때에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려 맹세라도 하듯,힘 있는 여정을 시작하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과 생존을 위하여 학습해야 하고 치열한 경쟁 사회에서 수 없이 도전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사람들과 의사소통하면서 세상에 위대한 사랑과 우정을 나누는 배워 가고 어려운 이웃을 동정하고 고무 격려의 말도 따뜻하게 해 줄 때도 있으며 수 많은 풍랑도 헤가르고 살아가는 법도 알게 되지 않는가? 이 세상이 이렇듯 다채롭기에 인간은 살수록 살맛나고 이렇듯 휘황한 세계를 건설하지 않았는가? 그렇다 세상은 아름답다. 이렇듯 과학이 발달하고 IT산업이 발전하여 스마트폰으로도 세계를 일주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 행운을 느끼게 된다.그리고 천태만상인 사람들 속에서 자기를 지킬 줄도 알아야 한다. 이 사회는 남을 얼리고 전문적으로 남을 꼬드겨 자기의 모종 목적을 달성하려는 사람들의 꼬임에 넘어가지 않도록 경계도 해야 한다.이는 자기 가정과 자기를 지켜야 하는 방호책이기도 하다. 사탕 발린 말에 넘어가 사기 당하고 돈을 떼우고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단풍 든 나무잎이 소리없이 내리는 정경을 보면서 언젠가는 사람도 나에게 차례진 사명을 다하고 하나의 미련도,하나의 원망도 없이 세월의 흐름에 맡긴채 소리없이 가는게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것이 인생의 길고 긴 여정이 아닐가 오늘도 되새겨 본다.감천2013년 11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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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1-10
  • 우리들의 고향은 어디인가?
    ■ (상지) 강효삼갈수 없는 곳은 고향이 아니다. 추억만 남은것도 고향이 아니다. 고향은 우리가 태줄을 묻고 살면서 고향의 흙에서 물에서 하늘에서 그 혜택을 받는것, 우리의 권리와 의무를 다 할수 있는 곳, 우리의 생명이 존중되고 우리의 존재가 인정받는 곳, 우리 삶의 력사가 있고 우리 삶의 방식이 있고 우리 삶의 개성이 있는 곳이 바로 고향이다.고향에서 꿈을 키워 고향에서 어른이 되여 부모님이 되여 고향의 땅을 다루면서 고향에서 가정을 뭇고 고향을 이어갈 아이들을 낳아 키웠다. 또한 고향에서 한 겨레들끼리 살면서 우리의 말과 글과 풍속과 습관을 자유롭게 행하며 조선족답게 살아왔으니 떠돌이후대인 나에게서 고향의 의미는 참으로 보귀한것이다. 고향이 있어 내가 이 땅에서 조선족으로 살수 있으니 고향이 있기에 우리의 말과 글이 있고 고향이 있기에 우리의 전통과 습관도 있으며 고향이 있기에 우리가 우리로 될수 있지 않았는가! 우리의 력사는 고향을 떠나 더욱 말할수 없으리. 우리 민족의 정착력사를, 우리의 삶을, 우리의 노래를, 우리의 모든 아름다운 시작을… 이제 고향을 버림으로 하여 우리는 자칫 자신을 잃을수가 있다. 고향이 없이 산지사방 흩어져 살아봤기에 우리는 안다. 고향이 우리에게서 얼마나 귀중한가를! 한국 KBS “6시 내 고향”이란 프로에서 몇십년만에 고향을 찾아 향수를 누리는 사람들을 보면 매우 부럽다. 그들에겐 아무때고 고향이 있다. 아무리 고향을 떠나있지만 이미 혈친적으로 뿌리 내려진 고향이 있기에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고향을 갈수 있는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고향이 있는가? 고향이라고 아무때고 찾으며 사랑할만한 그런 고향이 있느냐말이다. 여기저기 삶의 흔적이 있으니 추억은 있을것이다. 그렇다고 추억 그 자체가 고향은 아니다. 산천은 의구해도 인걸은 없는것처럼 고향이라 찾아가도 반겨줄 사람이 없다. 그것은 이 땅에서 우리의 “고향”은 고향이 아니라 잠시 몸을 붙이고있던 역전이나 다를바 없기때문이다. 고향은 단지 먹고 입고 잠을 잤다는 의미만 아니다. 고향은 고향으로서의 특별한 의미가 있다. 그것은 뿌리일것이다. 하지만 뿌리를 떠나 노상 떠도는 우리, 제꺽하면 고향을 버리고가는 우리에게서 어디 고향다운 고향이 있는가. 사랑을 줄 곳도 받을 곳도 없이 고향을 주머니에 넣고다니면서는 버리기가 쉽지 가지기가 어렵다. 그리고 애면글면 살다가도 쉽게 외면하고 그만 낡은 물건처럼 버려도 별 섭섭함이 없이 사는 리유는 우리들의 전통과 문화가 이곳에 심겨져있지 않다는것이다. 그만큼 한 민족에게서 문화와 전통은 귀중한것이다. 단지 그때그때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살았던 의미로밖에 남지 않은 고향, 추억은 있어도 사랑은 없고 아쉬움조차 없는 우리라면 이제 “고향”이란 말은 우리에게서 사라지고있는것이 아닌가.인류에게서 가장 따뜻하고 친절한 의미는 고향이라 했다. 때문에 고향을 잃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진정 우리가 부르고싶고 가고싶은 고향은 어디인가? 고향의 길에서 "길"을 사고한다1970년대까지만 해도 오불고불한데다 수레 한대 지나가면 비켜서기도 힘들 정도로 좁은 길, 게다가 좌우엔 엎친데 덮치기로 풀이 가득 기생해서 길인지 풀밭인지 구분하기조차 어려웠고 웬만큼 비가 와도 길이 온통 엉망이 되여 힘꼴 쓰는 황소를 메워야 겨우 빈수레도 빠져나올수 있던 락후한 농촌의 길들이 새농촌건설붐에 힘입어 하나 또 하나 시대의 문명을 상징하는 세멘트포장길로 탈바꿈하고있다. 오랜 세월 조상들의 념원이 이제 현실이 되였으니 실로 격세지감이라 할가 한국땅에 오랜 세월 가있으면서 장기간 고향에 다녀가지 않은 사람들이 한번 와 보면 놀라지 않을수 없을것이다. 이제 현성에서 향과 진으로 통하는 길은 말할것 없고 향에서 촌, 촌에서 툰까지 통하는 길도 거의가 세멘트포장길로 변한것이다, 나는 이렇게 놀라웁게 변한 농촌의 길, 특히 조선족농촌 길을 볼적마다 우선 그 옛날 고생고생하며 이 길을 걷던 우리네 조상들을 생각한다.만일 그들이 살아서 오늘의 이 길을 보았더라면 얼마나 기뻐하였을가? 덩실덩실 춤을 추며 반겼으련만 이제 그네들은 언녕 저세상 사람이 되였다. 헌데 더더욱 안타까운것은 그네들은 이미 이 세상을 떠났기때문에 이런 길에서 향수를 누리지 못한다치고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이런 길의 향수를 누리지 못한다는것이다. 그들인즉 바로 이제는 농촌을 떠나 대도시로 갔거나 아니면 장기간 한국에 가 로무에 종사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야말로 길은 멋지게 훤하게 잘 닦아졌는데 이 좋은 길을 걸으며 향수 느끼는 조선족촌민들의 모습은 거의 볼수 없어 때론 누구를 위하여 닦은 길인지 의심스럽기까지 하다는것이다. 물론 누군가는 그 옛날 낡은 길에서 빨리 탈출해나간 덕분에 언녕 이 길보다 더 넓고 좋은 길을 걸어다닐것이다. 그런것을 생각하면 다소 위안이 되기도 하지만 그래도 길에서 “길”을 련상하면 마음이 무거워진다. 길에서 “길”을 생각한다는것은 사람이 걷는 길만이 아닌 우리가 지나온 력사의 길을 뒤돌아보고싶다는것이다. 옛삶의 터전을 잃고 망향의 길 걸어 이 땅에 와서부터 우리네 족속들이 개척한 첫 정착의 길로부터 시작하여 갈래 많은 력사의 길, 곡절 많은 시대의 길을 우리는 얼마나 힘겹게 걸어왔던가. 해방을 맞아 난생 처음 제 땅이라 분배받은 그 기쁨의 길로부터 소위 공동부유의 넓은 길이라고 하여 틀린것도 무작정 고집하고 내몰았던 호조조, 합작화, 인민공사 복잡다단했던 길로부터 대채의 길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그런 길은 걷고걸어도 가난을 진정코 뿌리 뽑을수 없었기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듯 호도거리를 포함한 상품경제의 길을 걸으면서, 전면적인 개혁개방의 큰 길을 걸으면서야 가난하던 살림이 훨씬 펴이게 되였다. 길은 갈수록 넓어져 상품경제의 길이 전면적인 개혁개방의 길로 통하면서 조선족은 출국로무의 길, 대도시진출의 길을 거쳐 어제날 가난할 때 감히 상상도 못하던 획기적인 치부의 길로 들어서게 되였다. 하여 더는 락후한 시골의 흙길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지 않고 더 좋은 길을 찾아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의 이 길을 비우고 떠나버린것이다.하지만 보다 윤택한 삶을 살기 위하여 더 좋고 새로운 길을 찾아 떠나는것을 잘못된 처사라고는 할수 없지만 새롭게 변한 길을 보면 볼수록 어제날 길이 없던 곳에 남먼저 길을 내고도 오늘 길이 이렇게 좋아졌는데도 이 길에서 향수하는 겨레들이 많지 않아 아쉽고 또 아쉽다. 출국로무와 도시의 그 좋은 길을 걸을 때는 걸을지라도 이 길에 돌아와 누군가가 계속 걸으면서 명실공히 이 길을 우리의 길로 유지해나갈수는 없는것인가? 그래서 더더욱 길을 보며 길을 사고하고싶다.지금껏 우리가 걸은 길을 보면 늘 시작은 먼저 또 열렬하지만 종당에 끝까지 닿지 못하고 곧잘 중도에 버리여 누구보다 길을 개척하고 건설하느라 고생하고도 자신은 길을 잃고 길을 찾아 맴돌이친다. 이것이 어쩌면 이 땅 우리 겨레의 “길”걷기가 아닌가? 하다면 지금 우리가 가는 길은 어떤 력사의 길인가? 길에서 “길”을 사고하면서 이제 우리는 어느 길을 가야 하는것인가를 사고하는것도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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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31
  • 조선족동포들이여, 자중하자 자애하자!
    <<로마에 가면 로마의 법 지키라>> 27일, 한국의 수도 서울의 심장지역 시청광장에서는 중국조선족동포와 로씨야를 포함한 구쏘련지역의 고려인동포 근 수천명이 참가한 집회가 거행되였다. 집회는 조직자측과 참가자들의 공동한 노력으로 소란이 없이 질서있게 무난하게 펼쳐지였다. 행사뒤끝에는 자기쓰레기를 자기가 소지하고 행사장도 말끔하게 정리하는 성숙함을 여실하게 보여 주었다. 필자는 참가자들의 높은 법의식과 높은 자질에 감복이 갔다. 수천명이 참가하여 소란이 한점도 없었고 앉은 자리가 쓰레기 하나 없이 말끔하였다. 실상 중국조선족동포들과 구쏘련지역의 고려인동포들은 그 지역에 살면서도 도덕수준, 지식수양, 법의식이 높은것으로 제 민족가운데서 우수한 민족, 모법적인 군체로 전 사회적인 승인을 받고있는것은 사실이다.자고로 고 하였다. 우리 동포들은 한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은 자유민주주의국가이다. 하기에 집회의 자유, 시위행진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헌법으로 명시되여있다. 하지만 이 세상에는 절대적인 자유, 절대적인 민주란 없다. 반드시 법과 제도의 범위안에서의 자유이고 민주인것이다. 자국인이든 외국인이든 국법을 무시하고 제 하고싶은대로 제 마음대로 하는 것은 절대 용허치 않는다. 하기에 우리 동포들은 지구촌의 그 어디에 가던지 그 나라의 법률과 제도를 우선적으로 준수하면서 법과 제도안에서 사업하고 생활하면서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소견이다.오늘날 중국조선족동포들과 구쏘련의 고려인동포들은 한국에 거주하면서 갈수록 많은 한국의 지성인들의 지지와 성원을 받고 주류사회의 동정과 관심과 배려를 받고있다. 이는 우리들이 피부로 느끼게 되는 현실이다.한국보도매체에 따르면 강지원 변호사, 김지하 시인 등 한국 각계 시민사회인사 63명은 24일 는 성명을 발표하고 "정부는 고려인 중국 동포들이 한국에 자유롭게 왕래하고 취업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포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이들은 "고려인·중국 동포는 1948년 제정된 '국적에 관한 조례'에 따라 한국 국민이 됐지만 정부는 로동시장을 보호한다며 동포 귀환을 제한해 왔다"면서 "결국 이들은 여권 위조 등 불법적인 방법으로 입국해야 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그러면서 "재외동포법 적용을 받지 못하는 고려인·중국 동포들도 재외동포로서의 자격을 가지도록 해야 하며 재외동포의 미성년 자녀에게도 양육과 교육의 혜택을 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에서 갈수록 많은 본토국민들과 지성인들이 조선족동포들에게 지지와 성원을 보내고있다. 이는 민심이고 대세의 추세에 순응하는것으로서 아주 훌륭한 흐름이라고 할수 있다.무시에도 구체적분석 요망 필자는 본칼럼시리즈의 첫번째 칼럼 에서 한국에서 중국조선족의 역할에 대하여 3개 방면으로 피력하였다. 중국동포들은 확실히 이처럼 중요한 존재로서 이는 그 누구도 부인할수 없는 철 같은 현실이다.하다면 조선족동포들이 이처럼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도 왜 무시할가? 우리는 이 문제를 랭정하게 사고할것이 절실하게 수요된다. 무시한다면 반드시 무시하는 일방과 무시당하는 일방이 있기 마련이다. 우선 무시하는 일방에 대하여 분석해 보자. 한국에서 중국조선족을 무시하고 폄하하는 이들중 적지 않은 사람들은 력사적인 원인과 국가사회제도로 인한 리념의 갈등 등으로 인한 같은 뿌리 깊은 불신과 갈등으로 하여 상대방에 대하여 잘 알지 못하고 리해하지 못하는데서 인기되였다고 본다. 이들은 실상 협애한 민족적우월감에 푹 젖어서 중국조선족들의 력사와 그 참상을 알지 못하고 맹목적으로 하등인취급을 한다. 실상 30년전까지만 하여도 한국의 실상이 우리보다 더 좋았던 것은 아니다. 한국의 국민의식이나 사회질서를 포함한 사회 전반이 더 나았던것도 아니였다. 이는 한국의 지인들도 승인하는바이다. 하지만 한강의 기적을 일구어 내면서 사회경제발전과 더불어 선진국행렬에 들어서면서 점차 국민들의 의식도 근본적인 전변을 가져왔던것이다. 필경 일정한 시간, 일정한 과정이 수요되는것이다. 이러한데도 이 오늘의 존재가 타고난것처럼 조선족동포들에 대하여 그처럼 타박하고 무시하는것이다. 그리고 일시적인 감정으로 하여 무시행위가 나타나게 되는것도 홀시할수 없다. 이는 서로간의 래왕과 소통과 함께 있으면서 사업하고 생활하는 것을 통하여 점차적으로 해결될것이다. 만사는 급하다고 하여 인츰 해결되는 것이 아니 다. 재삼재사 강조하건대 일정한 시간과 과정은 필수적이다. 이 과정을 앞당기고 빨리는것도 쌍방의 공동한 노력이 수요되지만 그래도 주로 무사당하는 일방의 주동적이고 열정적인 자태가 더욱 중요하다.조선족동포들은 무시하는 일방의 다른 한 부류는 무지와 몽매로 인하여 무턱대고 무시하거나 그렇찮으면 참다운 인간이기를 거부하는 그런 쓰레기인간들이 고의적으로 악의적으로 무시하는것이다. 이런 인간들에게는 말이 통하지 않기에 상대하지 않는 것이 좋다. 이제 무시하는 일방을 상대로 얘기는 이만하면 족하다.그렇다면 이제부터 무시당하는 일방 중국조선족동포들을 상대하여 담론해 보기로 하자.자고로 반성할줄 모르는 민족은 미래가 없다. 독일을 보라. 제2차세계대전당시 파시스트국가 히틀러의 독일은 유태민족과 동유럽국가들에 얼마만한 피해를 입혔던가? 그후 40년이 지났건만 당시 독일총리는 2차세계대전당시 가장 피해를 많이 본 이웃나라 뽈스까를 찾아가 뽈스까국립묘지에서 무릎을 꿇고 참배하면서 통절하게 사죄하였다. 그리고 수십년이 지났는데도 당시 전쟁피해배상금을 피해국에서 서운함이 없이 지불하였다. 이런 대국다운 처사는 같은 2차세계대전당시 아세아국가들에 그처럼 엄청난 피해를 주고도 반성을 모르는 바다건너 그 나라와 얼마나 선명한 대조를 이루는가?! 비록 성질이 다르고 차이는 있지만 한국에서의 우리 조선족동포들도 자기를 직시하고 수시로 자기반성할것이 수요된다고 본다. 무시를 당하고있는 중국조선족의 경우 역시 자기를 몰라서 떳떳하지 못하고 당당하지 못하여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악덕업주에 의하여 분명하게 어이없이 불리익을 당하면서도 자기앞의 발명조차 못하는것이다. 타방으로는 무식한 인간, 악의적인 인간들에 의하여 무작정 당하는것이다.자기를 아는것, 자중자애의 선결조건 조선족동포들이 한국에서 생활하고 사업하자면 항상 자중하고 자애할것이 지극히 수요된다. 자중자애하자면 우선 자기를 잘 아는 것이 선차적이다. 공자는 일찍 고 하였다. 자기를 아는데는 자기민족의 빛나는 력사와 우수성을 잘 아는 것이 우선적이다. 자기민족의 력사를 잊으면 근본을 잃는다. 중국조선족으로서의 력사를 알아야 하고 조선반도에서의 우리 고국의 력사도 잘 알아야 한다. 중국에서 우리 민족의 어린애들이 지어 고등학교를 졸업한 청소년들까지도 라고 물으면 고 하면서 중국력사교과서에서 배운 것을 달달 외우듯이 말한다. 비애가 아닐수 없다. 그래서 언녕 20년전에 연변일보는 김철호기자의 특별기행 하는 주제로 한 개면, 1만여자에 달하는 편폭으로 2년간 100여편의 시리즈기사를 보도하였다. 글짓기콩클도 경상적으로 펼치고서 는 문장에 특등상을 주기도 하였다. 그후 인츰 조선족학교들에 우리 민족력사과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중국에서 우리 민족의 지성인들은 이처럼 우리 민족 바로 알고 바로 알리기에 오늘날까지 열심히 노력하고있다. 이런 작업은 앞으로도 영원히 계속 될것이다. 이런 사업은 한국에 와서도 지속적으로 진행되여야 한다고 필자는 인정한다.조선족동포들이 자중자애하자면 동시에 우리 민족의 렬근성과 고질적인 약점도 치유하고 시정하고 극복할것이 필수적이다. 일전에 김정룡선생이 에 올린 칼럼 를 감명깊게 읽었다. 재한조선족동포사회를 잘 해부한 훌륭한 문장이라고 본다. 작자는 여기서 우리 동포들의 부족점과 고질적인 약점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우리 조선족동포들은 지성인들의 이런 충고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진심으로 시정하기에 노력해야 한다고 본다. 우리가 자기의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하고 언행을 명심하고 도처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타인을 배려하여 자기행실을 바로하는 것은 결코남한테 보이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 이는 실상 자신을 위하는것이다. ,우리는 이런 격언들을 항상 명기하고서 자기의 좌우명으로 삼아야 할줄로 안다.이는 대자연의 섭리이다. 하다면 인간사회도 마찬가지다. 한국에 진출한 우리 동포 선지선각자들, 사회의 지성인들은 매체를 통하여 특강을 통하여 혹은 이런저런 행사를 통하여 기회만 있다면 우리 동포들의 렬근성, 고질로 된 오점, 바르지 못한 행실들을 질타하고 훌륭한 본보기들은 충분히 긍정하고 널리 선전하면서 한국의 건강한 시민사회건설, 옳바른 사회기풍건설에 동참하고 일조해야 한것이다. 동포사회의 지성인들이 지난날 이렇게 하였고 지금도 이렇게 하고 있다. 하지만 고질병은 의연히 고쳐지지 않고 문제는 의연히 남아 있다. 이는 바로 우리들의 공동한 사업이 어느만큼 간고하고 막중한가를 단적으로 시사해 준다.필자는 지금까지 한국에서의 중국조선족의 존재와 역할을 주제로 한 시리즈칼럼, , , , 그리고 이번에 이렇게 4기에 거쳐 펴내였다. 상기칼럼 4편을 제가끔 뜯지 말고 하나로 통합하여 읽어 주시고 리해하여 주신다면 고맙겠다. 그리고 미흡함점이 많은것만큼 적시에 따끔한 비판과 조언을 부탁한다. 이미 많은 분들이 글을 올려 긍정도 해주고 혹은 비판도 하였고 혹은 가르침도 주었는데 몹시 고맙기도 하다. 그리고 악성댓글도 있고 듣기 거북한 욕설과 인격을 모독하고 혹독하게 폄하하는 언사도 있었는데 모두 기꺼이 받아들인다. 하기야 필경 당신의 잘못인데 그것으로 하여 내가 앙앙불락하면서 성질을 낸다면 오히려 나의 금싸락 같은 몸과 마음이 해를 입을것이다. 그럴 필요는 없지 않은가?! 장경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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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30
  • 이모와의 상봉나날 이야기
    나에게는 이모 한분이 계신다. 1934년생이시니 올해로 어느덧 79주세인 셈이다. 세월이 무정했었는지? 운명의 조화였던지? 이모에게 하나밖에 없는 이 조카딸은 세살에 엄마를 잃었고 그때 이모와 갈라져서 왕청에서 연길로 떠나왔었다. 내가 다섯살나던 해 이모가 한번 연길로 찾아오고는 오랜 세월동안 연락도 없이 서로 보지도 듣지도 못하고 살았었다. 나의 머릿속엔 이모가 그때 우리집에 찾아와서 나를 둘처업고는 밖에 나가 웬지 모르게 하염없이울기만 하던 기억만이 어렴풋하다. 이모는 왕청역에서의 그 리별이 수십년 지난 오늘에도 생각만 하면 가슴이 저려난다고 한다. 아빠품에 안긴 철없는 애기가 엄마 죽은줄도 모르고《엄마는?》하고 졸라대자《엄마는 갔다...》,《이모는?》,《이제 안녕! 해야지...》아빠의 말이다. 세 살난 나는 얼른 고사리 손으로 아빠입을 막으며 이모도 함께 가자고 울며 떼를 썼다고 한다. 그때 아빠는 25세 젊은 청년 나이로 상처를 하였었고 그후 왕청교육국에서 연변한어사범학교로 전근하게 되어 어린것을 안고 길을 떠난 것이였다. 그때 중학에 다니고 있는 이모는 어쩔 수 없이 엄마 생전의 부탁대로 반주임댁에 기거하기로 했었다. 조카딸과 형부를 눈물로 떠나보내고 이모는 몇날 몇일 가슴이 꽉 막혀서 숨도 바로쉬기 힘들었단다. 반주임은 이모더러 울고 싶으면 실컷 울어야 가슴이 풀린다고 했다. 마침 청명이 돌아와 이모는 선생님을 따라 그집 로인들의 산소에 갔었는데 곁사람들이 통곡하는 그 분위기에 이모도 덩달아 실컷 소리내여 울었단다. 그랬더니 과연 마음속에 굳어 있던 엉어리가 조금은 풀리더라는 것이다. 그 세월 사람들은 가슴속에 맺힌 한과 설음을 그렇게 밖에 풀수 없었던 것이다. 세월은 흘러 흘러 어느덧 20세기 90년대 초, 강산이 변해도 네 번이나 변한 어느 여름날, 이모는 어쩌다 또다시 나를 찾아 왔다. 그간 출가하여 딸 다섯을 키워왔고 이모부는 병으로 돌아 가셨으며 큰딸 도순화가 큰 병으로 료녕성 안산의 <천산병원>에 입원하여 앓고 있을 때였다. 그때 잠시 우리집에 오셔서 아버지도 종종 만나보시고 새 엄마와 동생들도 만나면서 얼마동안 계시다 간 후 우리들의 왕래는 다시 시작되였다. 그번에 이불장에서 나의 낡은 첫날이불을 뜯어보고 그렇게 슬피 우시던 모습이 눈앞에 선하다. 엄마나 이모가 곁에 있었다면 이렇게 헌 솜을 주어모아 새색시 이불이라고 만들어 가지고 시집갔을가 생각만 해도 마음이 아팠던 모양이다.사실 내가 결혼하던 그 70년대에는 첫날옷감도 이불등도 마음대로 살수 없어서 남의 집에 수소문하여 빌려 샀었고 15원짜리 트렁크 하나에 어록책과 하향하여 입던 검은 고리둥 옷 한벌을 넣고 시집갔었는데 이모가 그 사연까지 다 알았으면 더욱더 가슴이 아팠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혈연의 끈끈한 정이 아닌가 싶다. 그후의 어느 가을날, 나도 시간을 내여 이모가 계시는 흑룡강 계동에 찾아가서 이모와 동생들도 만났고 또 선화 련화 은화 등 동생들도 우리 집에 놀러 오군 하였다. 금년에 어쩌다 련화가 또다시 연락이 와서 내가 다시 찾아가게 되였고 오래동안 보지못한 이모와 동생들도 다시 만나고 한주간 잘 지내고 왔다. 인젠 옛날같지 않게 모두가 생활이 피였고 이모도 새 아빠트에 들어서 편히 계시고 있으니 그나마 안심이 된다. 다만 이모 다리가 너무 불편한것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아직 정신도 맑으시고 옛 이야기들도 잘하시며 몸에 큰병은 없는듯 한데 무엇이 문제인지 온기있고 펀펀한 다리가 전혀 움직일 수 없단다. 다리신경을 지배하는 소뇌에 고장이 생긴 모양이다. 년세가 많으시니 수술도 못하고 그저 그렇게 힘들게 생활하고 계셨다.같이 살고 있는 넷째딸 선화가 하도 알뜰히 챙겨드리고 잘 보살펴 드리니 식사도 잘하시고 텔레비도 잘 보시며 마음은 안정되고 계신듯 했다. 이젠 모든 고생이 다 옛말로 되고 좋은 세상 만나서 좋은 생활을 좀 더 오래 향수하셔야 할텐데 그저 멀리서 걱정뿐이다. 이번 걸음에 이모와 함께 일주간 있으면서 밤에 낮을 이어 들어 온 지난세월 이야기들이 너무도 소중하여 이렇게 하나하나 글로 엮어 본다.그 옛날 우리 엄마가 꽃다운 스므살 나이로 살아 계실 때 이모는 여나므살 되는 소학생이 였단다. 그도 그럴것이 엄마가 1928년생이니 이모와는 여섯 살이나 차이가 있었다. 워낙 늦게 섬이 들어 만날 애보다 못하다고 꾸중을 들었다는 이모는 그때 철부지 어린아이였다.한평생 농사로 뼈를 굳힌 외할아버지는 광복이 되는 해 왜놈들이 투항하여 도망가면서 동북 할빈지역에 퍼트려 놓은 그 무시무시한 731세균에 간염되여 몇일 밤낮으로 몸부림치다가 그만 돌아가시고 말았고 외할머니도 얼마 오래 계시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렸다고 한다. 이모 위로 외삼촌이 한분 계셨는데 일찍 참군하여 동북해방 전쟁과 항미원조까지 참가하셨다가 전쟁터에서 폐병을 얻고 돌아왔었다. 부모님이 안계시니 하나밖에 없는 누나인 우리엄마 손에서 살뜰히 병시중을 받았으나 얼마를 못 견디고 젊은 청춘나이에 그만 세상과 하직하고 말았다 한다.의지가지 할 곳 없는 이모는 엄마가 결혼하여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살았다. 내가 태여나니 이모에게는 이 조카딸을 돌보는 일이 당연한 의무로 되었단다. 늘 애기를 등에 업고 밭에나간 엄마를 찾아 젖을 먹이군 했다는데 이모 기억에 말못하는 애기인 내가 얼마나 령리했던지 업혀서 젖먹으로 가면서도 이모가 딴 생각에 팔려 길을 잘못가면 잔등에서 버득거리면서 손으로 앞을 가르켰다는 것이다.첫돌 생일에는 상에다 쌀 한공기, 팟 한공기 그리고 이모가 쓰던 몽다리 연필 한대와 엄마 호주머니의 잔돈 몇장을 꺼내 놓았다는데 엄마와 이모가 얼른 무엇을 잡으라고 하니 글세 제일 먼저 그 꽁다리 연필을 쥐고 다음으로는 돈을 쥐였는데 한장이 방에 떨어지니 기어이 주어서 다시 쥐더라는 것이다. 아마 그래서였는지 평생 이날까지 공부하는 것은 나의 첫째가는 취미였고 또 지금까지의 인생을 걸어오면서 크게 돈 그리운 줄 모르고 산 것도 같다.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물려 온 첫돌 생일상의 전통오락이 과연 그저 장난에만 그치는 일이 아닌 듯도 싶다. 내가 세상에 태여나던 1947년말, 그때는 아직 중화인민공화국탄생 직전인지라 지하혁명활동에 종사하는 아버지를 뒤따라 나선 엄마는 임신 때에도 막달까지 밖에서 활동하였고 애기를 낳은 후에도 아이를 돌볼 겨를이 전혀 없었다 한다. 당시 길림성 서란현 부녀 부주임(주임은 항일 녀간부인 한족녀성이였음)을 담임하고 있은 엄마는 당의 지시에 따라 전현부녀들을 동원하여 이불솜을 거두고 집집이 실을 짜서는 양발과 수갑을 손수떠서 해방군께 보내는 활동들을 하였단다.련속되는 전선지원 활동들로 엄마는 각 지방을 돌며 밤낮이 따로 없이 뛰여다니느라 애기 젖도 바로 못 먹였다. 어린 나는 항상 이모등에 업혀서 배고파 칭얼거렸다 한다. 한번은 이모가 이삭 주어온 감자를 부엌에 묻어 놓고 잠깐 소피보러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니 글쎄 방에서 놀던 두살 애기가 어느새 한길도 더 되는 부엌밑에 떨어져서 앉아 있더라는 것이다. 감자 익는 구수한 냄새를 맡고 어떻게 굴러 내려간 모양인데 어데 다치지나 않았는지 이모는 너무도 기가막혀 그만 엉엉 울어버리고 말았다 한다. 얼마나 무엇이 먹고 싶었으면 무서운 것도 모르고 그 깊은 부엌까지 떨어져 내려 갔을가? 생각만해도 아찔한 일이여서 60년이 지나간 오늘에도 이모는 그때일만 생각하면 늘 놀라군 한단다. 1949년초 당의 파견으로 아버지가 동북군정대학에 가시고 집에는 엄마와 이모 그리고 나밖에 없었는데 한번은 넷째 큰아버지가 우리집에 들려보니 녀자들만 살다나니 땔나무를 하지 못해 애기가 차디찬 방바닥에서 언 기저귀를 깔고 누워 울고 있더라는 것이다. 서란현 부근에 있는 큰집들에서는 모여서 토론하고 우리 세 식구를 셋째 큰아버지 집에 위탁하여 살게 하였다. 그때 두살도 안된 애기인 나는 벌써 남의 집인것을 알고 눈치를 보며 살았다 한다. 혹시 빛다른 음식이 생기면 자기가 먼저 먹는것이 아니라 얼른 짚어서는 큰아버지한테 달려가 목을 그러안고는 큰아버지 입에 먼저 밀어 넣더라는 것이다. 큰아버지는 너무도 귀여워 항상《요 잰내비같은 영물을 봐라! 》하면서 수염이 가득난 볼로 애기 얼굴을 마구 비벼대며 이뻐서 안고는 방을 한바퀴 돌군 했다고 한다. 아직 세상물정도 알수 없는 그 어린 생명에게 벌써부터 눈치밥을 먹으며 살아야하는 운명이 시작 되였던 것 같다. 엄마가 폐병에 걸린 외삼촌을 림종까지 붙안고 병시중하다가 결국은 자기가 그 병에 전염되여 1년도 못되게 앓다가 22세의 꽃다운 청춘나이에 그만 세상을 뜨셨다. 그후 이모는 중학교 반주임 집에서 초중을 마치고 반년 후에는 수리중등전업에 입학하였다. 군속이자 고아인 이모는 국가에서 주는 공비로 학업을 마쳤고 졸업 후에는 흑룡강 밀산현 수리국에 분배되여 사업하게 되었다. 당시 그 현성에는 중등전업을 졸업한 지식인 녀성간부가 하나도 없었음으로 이모는 대단히 중용되였다고 한다. 현에서 큰 대회를 할때면 항상 현장 옆에 앉혔다고 하니 알만한 일이 아닌가.그 직장에서 이모부를 만나 1남 1녀를 낳았댔는데 대약진때 아들애가 그만 병으로 요절하고 말았단다. 이모는 너무도 상심하여 신병을 얻었고 그 타격으로 직장도 그만 두었다고 한다. 그후 또 아들을 바라고 딸 넷을 련이어 낳아 딸 다섯을 키워 왔다. 그래도 이 조카딸이 항상 그리워서 큰딸 이름을 아예 나와 똑같게 순화라고 짓고 항상 불러 보았지만 그 세월 그 곤난한 생활형편에 언제 숫한 애들을 버리고 조카딸을 찾아 떠날 겨를이 있었겠는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모두가 이해할만도 한 일이다.이모부는 원래 가정이 있는 전업군인이였는데 일찍 상처하였고 광복후 애들은 부모님들이 데리고 한반도에 있는 고향에 돌아갔다고 한다. 이모부 생전에 부모님 고향땅의 주소를 알았었지만 남한길이 막혀 있었던지라 수십년간 이산가족으로 서로 찾지 못하고 있다가 80년대 말에야 이모가 나서서 한국의 신문과 방송을 통하여 그분들을 끝내 찾아내고 말았다. 그후 이모는 두차례나 한국에 초청되여 시집식구와 남편의 자녀들을 만나 뵈였다고 한다. 그곳에서 목사로 일하는 시삼촌의 영향으로 이모는 다시 기독교를 신앙하게 되었고 또 그들의 도움으로 중국에다 교회를 세곳이나 세우기도 했었다. 어찌나 헌신적으로 교회를 위해 일했던지 이모는 한국측의 신용을 얻어서 몇년간 많은 경제적 후원도 받았고 점차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또 계동판에서는 이름있는 권사로까지 승진하게 되었다. 한평생《주》를 믿고《주》에 혼신을 바쳤으니 인제는 정녕《하느님》의 딸인듯 싶다. 이번에 내가 가기 전날 이모는 꿈속에서《천당》에 가 보았단다. 그렇게 눈부시고 찬란한《천국》이였고 많은 성도들이 이모를 기다리고 있더란다. 인생 로년에 더욱더 깊이깊이 믿고 있는 그 신앙, 우리 유물론자들과는 달리《저세상에 또 다른 하나의 평화로운 세계가 분명 있다》고 믿고 있으니 어찌보면 이모한테는 유일한 정신적 의탁이요, 마음의 마지막 안신처인듯 싶다. 어릴때 갈라진 이 조카딸이 혁명가、교육가의 자식답게 훌륭한 교육을 받고 성인이 되어 가정을 이루고 자식들도 잘 키워 왔으며 크게 근심없이 살고 있으니 이모도 인젠 마음을 놓을 것이다. 나도 인젠 예순을 넘긴 나이가 되고 보니 지나간 세월 모두가 이 세상에 태여난 모두에게 비켜갈 수 없는 운명이였던 것 같다. 어릴때의 그 슬픔도 설음도, 커가면서의 그 억울함도 고달품도 모두가 한생의 잊혀가는 악몽이듯이 나는 그 모든 것을 그냥 그 세월에 묻어두고 용서하기로 마음 먹었다.《이모와의 상봉 이야기》을 한단락 마무리 하면서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 한 인간의 운명을 좌우지했던 그 어린시절의 그 불행한 환경이 나를 키우지 않았다면 나는 아마 오늘의 만족과 행복을 진정 느끼지 못할 것이며 흐르는 세월과 함께 식어가고 잊혀가는 희노애락의 추억과 감성을 오늘처럼 이렇게 생생하게 느껴보지 못할 것이다. 그 격전의 나날, 조국해방의 포소리속에서 이 세상에 태여 난 한 갸날픈 생명이 이 나라가 걸어온 60여년과 동반하여 온갖 시련과 역경을 다 견디여 냈으며 자신의 신근한 노력과 분투로 후회없는 한생을 살아 왔으니 인제는 만족 할만도 한것 같다. 세 살에 엄마 잃은 그 불쌍한 아이, 그 여리고 순진한 눈물의 소녀, 그 천진랑만한 장미꽃 청춘이 어느덧 벌써 지천명(知天命)을 다 지났고 이순(耳順)길에서 달리고 있으니 세월은 참으로 류수와 같다.추억은 아름답고 추억은 모든 것을 용서하며 추억은 영원한 것이라 하지 않는가? 오직 지나온 인생 경력을 소중히 여기고 오늘의 뜻깊은 삶에 최선을 다하며 제2의 인생길에서 끝까지 열심히, 지혜롭게 살아가는 것이 우리 모두의 소임이요, 희망이 아닌가 생각한다.강순화2013년 10월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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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8
  • 2013노벨문학상, 단편소설의 귀환
    해마다 시월이면 한차례의 이채로운 문학수업을 받는 기분이다. 수확의 계절인 이 달이면 세계가 주목하는 노벨문학상 수상자가 얼굴을 드러내기 때문이다.TV, 인터넷, 핸드폰을 풀가동해놓고 그 소식을 기다리노라면 그야말로 월드컵시즌최강전의 결과를 기다리는것같은 마음이다.올해 후보로는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가 가장 유력했다. 문학도시절 부터 그의 전부의 작품을 소장하고 읽을지경으로 그에 대한 광팬인 나 역시 그의 수상을 진심으로 바랐다. 하지만 지난해 중국 작가 막언에게 밀렸듯이 이번에도 그는 고배를 마셨다. 여섯번이나 노벨상후보에 추천되였던 그에 대해 평단은 “가장 비장한 후보”라는 수식까지 달아주었다. 우리말 언어권에서 모두가 기대하던 한국의 원로시인 고은 역시 락방했다. 우리시간으로 10일 저녁 7시경, 스웨덴 한림원은2013 노벨문학상 수상자는 카나다의 녀류작가 앨리스 먼로라고 선포했다.우리에게는 많이 생소한 작가, 중국에서도 그의 작품은 “떠남 (逃离)”이라는 단편소설집 한부가 달랑 소개 되였을뿐이다. 앨리스 먼로는 녀성으로서는 13번째, 카나다에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특기할만한 점은 북미권에서 수상자가 나온것은 1993년 미국의 소설가 토니 모리슨 이후 20년 만의 일이라는 점 그리고 무엇보다 노벨문학상 사상 처음으로 단편소설로 상을 거머쥐였다는 점이다.스웨덴 한림원은 “스토리텔링이 정교하다. 명료하고, 심리적인 리얼리즘을 담아냈다”고 시상 배경을 설명했다.“섬세한 관찰력과 빼여난 구성으로 짧은 이야기속에 복잡하고 미묘한 삶의 한순간을 아름답게 그려낸” 앨리스 먼로는 그동안 세계 주요 언론과 평론가들로부터 “단편소설의 정수를 보여주는 우리 시대의 체호브”,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단편소설 전문작가”, “북미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라 불려왔다. 1931년 캐나다 토론토 서부의 보수적인 시골마을에서 태여난 그녀는 1968년 단편소설집으로 등단, 이어 그 단편집 “행복한 그림자들의 춤”으로 총독상을 받았고 1970년대 미국의 정예 잡지 “뉴요커”에 주로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문명(文名)을 얻었다. 세계3대문학상인 맨 부커 국제상을 비롯, 유수의 국제 문학상을 받았다. 먼로는 그간 “왜 장편을 쓰지 않느냐”는 질문을 지겹도록 받아 왔다고한다. 하지만 그의 단편에 농축된 성찰과 감동은 웬만한 장편에 못지않았다.노벨문학상 선정위원회인 스웨덴 한림원의 엥룬트 종신 사무총장은 "그녀는 장편소설의 그림자에 가려진 감이 없지 않은 단편소설이라는 예술 형식을 택했고 그것을 거의 완벽에 가깝게 갈고 닦았다"고 말했다. 더불어 "그녀는 단 20 페이지 작품을 통해 보통 장편소설 한 편보다 훨씬 더 많은것을 말할수 있다. 그녀는 단편소설 하나에다 수십년간을 성공적으로 집어넣을수 있다"라고 극찬했다.앨리스 먼로는 수상 발표 직후 카나다 관방TV의 전화인터뷰에서 “단편이란게 단순히 장편을 쓰기 위해 끄적거리는게 아니라, 그 자체로 중요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계기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 중국에 유일하게 소개된 앨리스의 단편집 "떠남" 금번의 노벨상 수상작가 앨리스 먼로의 창작성향이 우리 작가들에게 시사하는 점은 크다.흔히들 어느 정도 량적으로 작품을 내놓은 작가이고 보면 호흡이 긴 장편을 쓰려는 은근한 심욕(心欲)을 갖게 된다. 하지만 그런 지나친 욕심, 혹은 부담감에 현혹되여 단편작품에 대해 그 창작초지를 잃거나 홀시하는 경향이 보인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신진들보다는 많은 중견작가들의 경우 근년래 긴 편폭의 작품, 혹은 타쟝르에 매달려 수년이 지나도록 단편소설 한편도 내놓지 못하는 현상이 그 점을 말해준다. 단숨에 읽힌다는 점에서, 쟝르의 격을 유지한다는 점에서 단편소설은 그만의 매력을 가지고 있다. 글은 짧지만 긴 여운을 주는 작품, 짧은 글에 핵심을 담으면서 촌철살인의 재치를 보여준 작품을 접했을때 독자들의 반응은 뜨겁다. 때문에 세계의 대문호들은 단편소설창작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현실의 편린을 포착한 생생한 감각에 력사적, 사회적 스케일을 담은 단편명작들을 량적으로 남겨 수세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앨리스 먼로가 닮았다고 하는 단편소설의 대가 안똔 체호브만 봐도 무려 600편의 단편소설을 세상에 남겼다.길지않고 론리적이면서 매력 있는 콘텐츠가 더 필요하고 각광받는 시대다. 작고 평범한 일상에서 번뜩이는 웅숭깊은 맛의 이야기를 길어올리는 힘. 문학작품에서 독자들이 기대하는것은 그런 재치와 감동의 맛일것이다. /김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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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6
  • 어머니를 추억하여...
    어느덧 엄마가 우리곁을 떠난지도 2년이란 시간이 거의 흐르지만 불효자식인 이 막내 아들은 이제야 천국가신 어머님께 이 편지를 올립니다. 어머니는 10남매중 맏딸로 태여나시고 아래로 줄줄이 태여난 아홉 동생들을 위해 그토록 가고싶은 학교도 못 다니시며 동생들 뒤바라지 하면서 고생하셨죠. 어머니는 한해 건너 태여나는 동생들 업어 키우면서도 잠시라도 쉴틈이 있으시면 그 시간을 리용하여 조선어 공부와 수학 공부를 자습했었다죠? 그토록 배움에 불타는 어머니의 모습에 감동된 외할아버지께서 어머니를 학교에 입학 시키셨다죠. 학교에 입학한어머니는 뛰여난 성적으로 전 학년에서 1등을 차지했었죠. 우수한 성적으로 상급학교 시험에 합격되였지만 소아마비인 어머니는 그 당시 장애자들은 상급학교에서 받지않는다는 리유로 아쉽고 쓸쓸한 마음으로 학업을 포기하고 남평진 방송소 방송원으로 취직하셨죠. 어머니는 남평에 조그마한 세집을 맡고 열심히 맡은바 사업을 하시면서 동생들 뒤바라지 하셨죠. 남의집 부모들은 자식들이 상급 학교에 붙지못해 한숨만 풀풀 쉬는데 원래부터 총명한 집안탓인지 엄마의 동생들은 시험을 치기만해도 척척 잘도 붙어서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고민에 빠지셨습니다. 그때 화룡현 고중에 다니던 큰외삼촌이 배고픔에 못이겨 다 헤진옷과 거의다 째진신을 신고 화룡으로부터 도보로 걸어서 남평의 엄마집으로 오자 너무나도 초라한 동생을 보신 어머니는 우선 큰삼촌을 배불리 먹여놓고 아껴 저축해 두었던 얼마안되는 로임과 그시기엔 젤로 값비싸고 고급 외투라는 니즈옷을 팔아 삼촌의 웃옷과 아래옷, 그리고 신까지 사 신겨놓고 멋지게 때벗이한 큰삼촌을 보시고 "어......내 큰동생 원래부터 이렇게 멋지나?" 하시면서 농담까지 하셨다면서요? 그시절 배고픔에 못이긴 삼촌들과 이모들은 방학만 되면 적은 로임타면서 사업하는 엄마한테 그래도 월급쟁이라고 자그마한 집에 오구작작 모여들면 어머니는 의젓하고도 이쁘게 성장해가는 삼촌들과 이모들를 위해 날마다 개학때까지 한가마의 이밥과 두부를 앗아서 방학동안 만포식 시키셨답니다. 고난의 대약진 시기가 오자 어머니는 그 시대의 승진으로 인한 야망으로 하여 백성들을 못살게 굴며 늑대 잡았다면 호랑이 잡았다고 몇갑절 부풀려 방송 하라는 공사 간부들의 핍박에 못이겨 단연히 정든 일터를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와서 촌 부녀주임 사업을 맡아하시다가 부지런하고 마음착한 우리 아버지를 만나서 결혼하고 다 찌그러져가는 오막살이 집에서 우리 4남매를낳아 키우면서 낮이면 어린시절 동생들을 위해 배워두었던 재봉기술로 온동네사람들의 옷을 도맡아싶이 재봉틀에 앉아 하시고 밤이면 새끼꼬는 기계로 아픈다리 통증을 참아가면서 열심이 돈을 벌어 우리를 키우셨습니다. 그런데 하늘이 엄마를 조롱하듯 그토록 건강하시던 아버지가 생산대 목재 나르는 트랙터에 나무운반하다 그만 까막골 고개에서 차가 넘어지는 바람에 적재함의 나무우에 타셨던 아버지는 목재통에 머리깔려 나어린 우리 4남매를 남겨두고 44세의 젊은 나이로 너무나도 일찍히 이세상을 떠나셨죠. 청천벽력같은 이소식에 어머니는 너무도 놀라 심장마비로 까무러 치셨다가 아버지를 잃고 슬피 우는 나어린 우리 4남매.를 바라보시고 비장한 각오로, 가냘픈 여자의 혼자몸으로 우리 4남매의 공부뒤바라지를 하느라 낮에는 소아마비의 지친 다리를 이끌면서 도거리맡은 수전과 한전을 다루시고 형님 누나들 공부뒤바라지 위하여 돼지치기와 닭치기도 하셨고 밤에는 새끼꼬는 기계와 재봉침과 씨름하며 우리들을 키우셨습니다. 어머니, 지금도 생각납니다. 소학교시절 그때 전 학교 학생들 모두 줄뛰기줄을 갗췄는데 유독 누나만이 사지못했던일을, 줄뛰기 시합하는날, 줄뛰기 사달라고 칭얼거리는 누나에게 자신이 꼬던 새끼줄을 썩뚝 끊어 주시던 일을, 누나는 그때 그 새끼줄로 300여개를 뛰고 전교 일등을 했엇죠. 더뛸수도 있는것을 새끼줄이 닳아 끊어지는 바람에.... 끊어만 안졌었다면 더 뛸수도 있었겠죠. 누나의 그때 그 말에 엄마의 마음은 얼마나 아프셨겠습니까? 형님 누나가 중학교에 입학하고 제가소학교에 다니게되자 늘어만 가는 학잡비 때문에 어머니는 로과 두메산골로부터 머나먼 심양과 길림을 오가면서 장애자의 몸으로 보따리 장사, 약장사와 명태장사 하시면서 우리 뒤바라지 해주시며 열차칸에서 단돈 5전씩하는 얼음과자도 아까워 안사드셨죠? 그리고 뇌성마비로 태여난 저에게 항상 생활에관한 신심과 용기를 주시고 형님이 학교 필업하고 은행에 안배 받으니 화룡시가지에다 조그마한 상점도 꾸려 주시고 또 음악을 좋아하는 저에게 아글타글 모아두었던 주머니돈을 털어 전자풍금도 사주어 저더러 작곡의 길에 들어서게 하셨죠? 누나가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에 붙게되자 엄마는 누나의 학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조선의 마른명태를 넘겨받아 심양시 해청시장에 갖다팔고 올때에는 옷을 되넘겨 가지고 화룡에다 팔아서 겨우 돈 마련하셨죠. 다른집에서는 자식들 대학에 붙었다면 새이불이요 새옷이요 하면서 요구되는건 다 사주지만 일찍 헴이든 누나는 원래 덮던 이불과 입던 옷을 깨끗이 빨고 헤진 옷과 양말은 저절로 바느실로 한뜸한뜸 깁는것을 보고 엄마는 누나몰래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셨죠. 어머니는 가냘픈 여자의 몸으로 억센 남정들도 감히 엄두도 못내는 곰사양도 하셨고 .두부장사. 고기 장사도 하시면서 우리 형제들을 시집장가 보내시고 아파트까지 마련해 주셨습니다. 어쩌다 제작품이 당선되면 어머니는 동네방네 다니면서 이 못난 막내자랑도 하셨고 또 제가 장가 가서 두자식을 보게되자 고목에 핀 꽃이라면서 유난히 형님누나들의 자식보다도 제 자식들을 특별히 귀여워하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어느 생일집이나 군일집에 가셨다가도 맛좋은 음식들이 생기면 포장해 와서는 "네 형들은 단위 행사때나 동료들과의 회식에서 이런 고급 료리는 흔하게 먹어보지만 무직업인 너희들부부 어디가서 먹어 보겠니? 그래서 내가 이런거 생기면 너희들 줄려고 가져오는거란다." 라고 하시면서 보잘것없는 이 막내자식을 형들보다 몇갑절 더 사랑해 주시고 관심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토록 고생하시면서 아들딸들 효성과 손자손녀들을 다 키워놓고 한창 복받을 나이에 어머니는 그만 암이란 진단을 받으셨습니다. 어머니는 그 힘든 수술과 항암 치료를 받으시면서도 항상 불구자로 태여나게한 저에게 미안하다 하시면서 형님누나들 엄마 보러 올때면 항상 이 못난 막내를 잘 돌보라고 부탁하셨죠. 어머니. 그 아프신 몸으로 식사때면 어머니 드시라고 마련한 색다른 료리들을 절로 짚어서 제 밥공기에 친히 담아주시고 제가 안해에게 주눅들가봐 애 엄마를 조용히불러 앞으로 내가 없어도 우리 부부 두자식 거느리고 앞으로 들이닥칠 어떠한 난관도 꿋꿋이 이겨내며 잘 살아라고 신신당부 하시던일. 어머니는 1년 4개월 병마와 싸우다가 끝내 효험을 보지못하시고 2012년 5월 4일 한많은 이 세상을 하직하셨습니다. 어머니 유물을 정리하던날 침대밑에 몰래 치워두웠던 돈봉투를 꺼내보고 우리는 또 목메여오는 설음을 참지못하고 소리내여 천국가신 어머니를 부르며 통곡하였습니다. 세상떠나는 날까지도 이 못난 막내아들 위해 단돈 몇푼이라도 아껴 저에게 주려한 바보같지만 이세상 어느 어머니와도 비할수 없는 위대한 어머니. 양봉업을 하시다 벌떼들 습격을 받아 인사불성이 되셨던 어머니. 도거리 맡은 논밭에 농약을 치다가 농약 중독에 걸려 논밭에 까무러치셨던 불쌍한 우리 어머니. 과도의 피로와 간경화로 쓰러지셨다가도 자신이 쓰러지면 우리 네자식 굶주리고 공부못한다며 억센 의지로,오또기 정신으로 꿋꿋이 다시 일어나셨던 불쌍한 내 엄마. 한마디로 어머니는 구쏘련의 청년영웅 빠웰와도 더 강한분이시며 일본의 오신보다도 더 지혜롭고 총명한분이시고 중국의 장해적보다도 더 억세고 담대한 분이십니다. 어린 시절 그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아버지 없는 우리 형제들이 같은 또래의 친구들에게 주눅들가봐 밤낮으로 고된일에 지친 피곤한 상황에서도 언제나 천사와도 같이 환한 미소 지으시며 우리를 대하시던 자애로운 우리 엄마, 남의집 부모들은 고생끝에 락을 보지만 한평생 이 못난 막내 자식위해 그토록 고생하시다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 어머니는 분명 천국에서 오늘도 우리를 굽어 보시겠죠? 정말로 진정 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면 이땅에서 누리지 못한 락을 영원한 그곳에서 영생복락 누리시길 바라면서 오늘도 다시 돌아오지 못할 어머니를 그리면서 나훈아의 홍시를 목메여 불러봅니다 생각이 난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생각이 난다 자장가대신 젖가슴을 내주던 울엄마가 생각이난다눈이오면 눈맞을세라 비가 오면 비젖을세라 험한세상 넘어질세라 사랑땜에 울먹일세라. 그리워진다 홍시가 열리면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겠다던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생각만 해도 가슴이 찡하는 울엄마가 그리워진다. 어머니. 다음 생애란것이 있을가요? 정말 있다면 저는 다시 한번, 이번엔 엄마의 건강한 아들로 태여나서 이세상에서 하지 못했던 효도 실컷 하면서 어머니와함께 살고 싶습니다 <장태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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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0-14
  • 다문화병에 걸린 재한조선족
    [김정룡] 인간이 이름이 있듯이 모든 ‘업체’는 간판이 있다. 간판은 하고자 하는 사업의 취지와 내용에 맞아야 하는 것은 상식적인 문제이다. 간판은 또 대중성을 띄기 때문에 더구나 상식에 맞아야 한다. 상식에 맞지 않는 간판은 그 업체 존재의 의미를 떨어뜨린다.지금 재한조선족사회는 춘추전국시대이다. 언론이 많고 단체 또한 자고 깨면 생겨나듯이 우후죽순마냥 나타나고 있다. 대충 손을 꼽아보아도 30개 ‘업체’가 쉽게 잡힌다. 뚜렷한 취지나 목표의식이 없이 남들이 하니 나도 한다는 식으로 ‘업체’를 설립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질적인 내용이 없이 허세에 매달려 회장님이랍시고 폼을 잡는 일 또한 비일비재하다.어찌되었든 언론이 많고 단체가 많은 것은 나쁜 일이 아니다. 많을수록 경쟁이 심할 것이고 경쟁이 심하면 적자생존법칙에 의해 자연도태를 거쳐 우수한 ‘업체’만 남게 될 것이다.문제는 남이 하니 나도 따라하는 사례가 많다보니 웃지도 울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다.지난해부터 재한조선족사회에 다문화바람이 불고 있다. 조선족이 다문화에 속하느냐, 마느냐는 논쟁이 끊이지 않는 와중에 논쟁에는 관심이 없고 다문화간판에만 관심이 있다. 2천8백억원(다문화) 대 1천2백만원(조선족)의 정부 지원, 다문화에 유혹이 클 만도 하다. 조선족간판은 메리트가 없다. 다문화간판을 걸어야 메리트가 크다. 그래서 경쟁하듯이 다문화란 간판에 매달린다.사정이 이렇다보니 상식을 벗어나는 다문화간판이 나타나고 있어 사회의 웃음거리를 지어내고 있다.며칠 전 필자가 대림동을 지나다가 우연히 조선족행사에 마련된 화환에 ‘재한다문화’ 00협회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재한다문화’란 존재하지 않는 개념이다. 재한중국인 혹은 재한조선족이라 말하는 것은 중국에 이미 중국인집단이 있고 조선족집단의 존재가 있고 그 집단의 일부가 한국에 왔기 때문에 재한중국인 혹은 재한조선족이라 말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말하자면 다문화란 어느 나라에 실체로 존재했던 것이 한국에 온 것이 아니라 여러 나라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다문화가 이뤄졌기 때문에 ‘재한다문화’는 존재하지 않는 상식에 어긋나는 표현이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자면 뿌리가 있는 집단의 일부가 한국에 오면 재한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있지만 뿌리가 없는 집단이 한국에 와서 새롭게 이뤄진 것은 재한이란 표현을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그건 그렇고 재한조선족사회가 다문화에 매달리고 있는데 다문화란 도대체 무슨 뜻인지? 의미를 제대로 알게 된다면 다문화간판을 남용하지 않을 것이다.다문화란 말은 1957년 스위스에서 먼저 생겨났고 1970년대 캐나다를 거쳐 지구촌에 퍼졌다. 다문화, 그 뜻은 한 개 나라에서 여러 가지 언어를 사용하고 저마다 갖지 않는 생활양식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여러 민족이 합쳐 전체 인구 중 30%를 넘으면 다문화사회로 인정된다. 스위스의 경우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로망슈어 등 언어가 국가공용어인데 진짜 다문화사회이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스위스, 캐나다, 미국 같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공유한 국가들만이 다문화사회이다.중국은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법적으로 공존해 있지만 다문화란 표현을 사용하지 않고 다민족국가라고 말한다.현재 한국에 외국인 수가 150만 명(조선족 포함)이며 전체인구의 3%밖에 되지 않고 다양한 국가 사람들이 한국에 살고 있지만 언어적으로 문화적으로 한국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하고 있어 진정 다문화사회라고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날로 증가하고 있는 외국인과의 화합과 공존을 위해, 특히 결혼이민자와 그 2세들의 한국생활정착을 돕기 위해 다문화란 개념을 도입하기는 했지만 우리가 알아야할 것은 한국에서의 다문화는 결혼이민가족에 초점이 맞춰지고 그에 따라 상응한 지원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결혼이민자 중심으로 이뤄진 한국다문화에 조선족사회가 명분도 없고 상식에도 맞지 않게 매달리는 것이 과연 타당한 일인지?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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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8
  •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에 관하여
    ● 정신철 (중국사회과학원) 목 차 1. 민족정체성이란? 2.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 3. 조선족사회의 형성 4.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5. 조선족의 미래전망 요약문: 개혁개방이후 중국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가져왔다. 활발한 조선족인구의 도시진출과 한국을 비롯한 해외진출은 민족적 경제기반을 구축하는데 큰 기여를 하였다. 동시에 급속한 인구이동은 인구분산화를 초래하였는바 이는 민족적 정체성유지와 강화에 불리한 환경을 조성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민족이 살아남려으면 정체성을 상실하여서는 않된다. 그러면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은 어떻게 형성되고 변화되었으며 현재는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 있고 또 앞으로는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겠는지? 본 문은 바로 이러한 문제에 대한 간략한 답이라고 할수 있다. 주제어: 조선족, 조선반도, 민족정체성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에서 온 이민자 및 그들의 후손으로 구성되었다. 따라서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은 원천적인 것으로부터 이민 온 지역의 상황에 의하며 일정한 변의과정을 겪었다. 그 결과 중국적 요소가 많이 첨가된 탈조선반도적인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이 수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반도주민과의 “同源”이라는 전통적인 연대성은 무시할 수 없다. 1. 민족정체성이란? 정체성이란 심리학적 개념으로 영어 “identity”와 중국어 “認同”과 서로 통한다. 이에 대한 해석은 많으나 주요하게 신분 및 자아동일성으로 많이 사용한다. 그 뜻인즉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와 또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물음과 동시에 이에 대한 긍정적인 답으로 한마디로 귀납하면 자신이 누구인가를 깨닫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민족정체성이란 무엇인가? J.Carla와 J.Reginald는 민족정체성은 개인이 자기민족에 대한 신념, 태도 및 민족신분에 대한 긍정이라고 한다. [①]J.Phinney는 민족정체성은 복잡한 구조의 하나로 민족에 대한 귀속감와 승낙, 민족에 대한 적극적인 평가 및 민족활동에 참여 등이 포함된다고 하였다.[②] 종합하면 보면 민족정체성이란 인간들이 자기가 속한 민족에 대한 깨달음과 자아민족에 대한 귀속감과 믿음이라고 할수 있다. 인간세상은 종족, 민족 등 여러 인간공동체로 구성되어 있는바 민족은 여러 공동체가운데서 제일 상위적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족은 혈통적인 연대감과 같은 언어, 같은 경제, 같은 지역 그리고 동일한 문화기초위의 같은 의식 등 여러 공동적 요소를 구비한 인간공동체이다. 그리고 민족이 형성되기까지는 오래 역사를 경과하였기때문에 민족은 상대적인 안정성을 갖고 있다. 매개 민족은 자아민족이 소유한 특징으로 기타 민족과 구별된다. 여기서 민족정체성이 거론되는데 그 뜻인즉 주요하게 자아민족에 대한 깨달음으로 소속 성원들이 본인은 어느 민족에 귀속한다는 의식 또는 태도을 말한다. 민족정체성은 타민족과의 만남과 부딪침에서 더욱 뚜렷해지기 마련이다. 민족정체성은 자아민족에 대한 신념과 귀속감이 커가면서 더욱 강해진다. 그리고 민족정체성은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므로 사회발전과 민족이 처한 상황의 변화함에 따라 어느 정도 변화되고 해체되어 새롭게 생성될 수도 있다. 2.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 국가정체성은 국민들이 국가에 대한 인정과 귀속감이고 민족정체성은 민족성원들이 자아민족에 대한 인정과 귀속감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 우리가 말하는 국가는 민족을 단위로 한 근대적 국가를 의미한다. 이러한 근대 국가는 서방 자산계급의 힘에 의하여 처음 수립되었다. 당시 봉건사회말기에 산생하여 성장한 자산계급은 “자유”, “민주”, “박애” 등 정치적 구호로 민중들을 동원하여 봉건세력을 뒤엎고 근대적 국가건립에 성공하였다. 이 때 출현한 국가는 근대 민족주의기치하에 세운 단일민족의 국가로 민족국가라고도 한다. 이러한 민족국가정체성은 민족정체성과 통일되어 있다. 제국주의 시대이후 아세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등 식민지, 반식민지 국가에서 폭발한 민주, 민족혁명과 더불어 새로운 국가들이 많이 출현하였다. 이 가운데 대부분이 단일민족국가가 아닌 다민족국가이었다. 다민족 국가에서는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이 꼭 일치하다고 할 수 없다. 국민으로서 그 국가에 대한 소속의식 등은 여러 민족들이 모두 소유하고 있으나 개별 민족으로서는 그 민족에 대한 귀속감 또한 무시하지 못한다. 이론적으로 말하면 국가정체성은 상위이고 민족정체성은 하위이며 민족정체성은 반드시 국가정체성에 복종하여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을 때는 다민족국가의 분열 또는 동란 등이 생길 수도 있다. 다민족국가에서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사이의 갈등으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는 것도 지금의 현실이다. 현재 중국의 상황을 보아도 일부 민족내부의 민족주의와 분리주의의 경향하에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모순양상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다민족국가의 차원에서는 국가정체성을 강화하고 민족정체성을 약화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외에 국가정체성과 민족정체성의 관계에 대한 연구도 많아지고 있다.[③] 3. 조선족사회의 형성 중국조선족은 조선반도 이민에 의하여 형성된 조선민족의 한 갈래이다. 지연적 관계로 중국과 조선반도국가와의 왕래는 오래전부터 진행해 왔다. 이 가운데 인적교류도 아주 활발하였으며 많은 경우는 그들이 상대방지역에서 오래 생활하면서 점차 그 지역 민족공동체에 동화되어 원래 소속된 민족공동체의 흔적이 사라지기도 하였다. 현재 조선족의 대부분은 19세기 중엽이후 중국동북에 이동,이주와 더불어 정착한 조선인 및 그들의 후손들이다. 특히 청나라의 봉금정책해제와 일본제국주의 조선침략은 더 많은 조선인들의 중국진출을 부추겼다. 하여 중국재류의 조선인이 제일 많을 때 200만명을 초과하였다. 1945년 8월 일본패전이후 광복의 환희속에서 수십만명의 조선인들이 조선반도로 귀환하였다. 동시에 여러가지 원인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계속 남게되었다. 이 부분의 조선인들이 중국 국내해방전쟁과 토지개혁을 겪어면서 중국정착의 경향이 날로 강해졌다. 당시 그들은 토지를 배분받았고 지방정부의 관리간부로 많이 발탁받았다. 예컨대 중화인민공화국설립직전에 “동북조선인민의 95%이상을 차지한 농민은 모두 마찬가지로 토지 마소와 가옥을 나누어가지었다.” 그리고 “전동북조선인민의 74%을 차지한 길림연변지구에 있어서 전원공서로부터 구촌에 이르기까지 절대 대부분이 모두 조선인민이 자기로 선거한 조선간부이다.”[④]이와같이 동북재류의 조선인들은 중화인민공화국건립과 더불어 법적으로 중국조선족에로의 전환을 완성하였다. 조선족 선조들은 중국에 이주, 정착하는 과정에서 중국동북변강지역을 개척하였고 일본제국주의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에 앞섰으며 국내해방전쟁에서도 큰 기여를 하였다. 이러한 과정은 조선족이 중국 다민족국가의 일원으로 되는 과정이기도 하였다. 즉 “중화인민공화국의 구성원의 하나인 동북조선민족은 바로 간고한 30-40년 반침략의 혁명역사투쟁의 과정에서 수 많은 피를 흘렸고 수 많은 생명을 희생하였으며 부지런히 생산하고 열심히 전선을 지원하여 항일전쟁과 인민해방전쟁의 승리를 이룩하면서 자연히 형성된 것이다.”[⑤] 4. 조선족의 민족정체성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의 형성과 확립은 일정한 과정을 겪었다. 그 과정이란 불안정한 이동, 이주에서 중화인민공화국건립과 더불어 실현된 안정적인 정착까지를 말할수 있다. (1) 이동, 이주와 정착과정에서 조선족정체성의 형성 조선족선조들이 두망강과 압록강을 건너 중국에 오기 시작한 중요한 계기는 우선 생활난이었다. 당시 만주의 넓은 땅과 풍부한 물산이 그들을 유혹했을 뿐 언제는 꼭 조선반도로 돌아간다는 생각은 조금도 변함이 없었을 것이다. 이 때의 정체성은 원천적인 조선반도적인 성향, 즉 “나는 조선인이다”는 관념이 아주 농후하였다. 그 후 황무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삶의 터전을 마련하면서 중국에 “귀화입적”한 경우도 있어 점차 정착성향도 뚜렷해 졌다.[⑥] 하지만 민족정체성은 여전히 조선반도적인 것이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중국땅에서 생활터전을 마련하고 항일투쟁을 진행하면서도 자신을 중국인으로 보지 않고 언제가 조선반도로 돌아가려는 마음을 항상 품고 있었다. 하여 일제가 패망한 이후 중국 재류조선인들의 절반에 달하는 사람들이 조국광복의 기쁨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안고 조선반도로 돌아간 것이다. 동시에 중국에 체류한 조선인들의 중국적인 요소도 점차 뿌리내리기 시작하였다. 먼저 신문기사을 통하여 중국체류 조선인들의 중화인민공화국 설립전의 중국정착취향을 볼 수 있었다.[⑦] 특히 일본패망이후 귀환하지 않은 조선인들은 중국국내해방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동시에 토지개혁과정에서 토지를 부여받으면서 중국정착을 고정화시켰으며 민족정체성도 탈조선반도적인 중국적 경향으로 변화하기 시작하였다. 일찍이 조선족 국적문제를 주목하기 시작한 중공중앙 東北局은 1945년 9월말에 조선족의 상황을 역사적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분석하고 이 곳의 조선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이며 그들은 한족과 같이 평등한 권리와 의무를 향유한다고 인정하였다.[⑧] 1946년1월1일, 당시 연변전원공서 부 전원인 동곤일은 새해《신년헌사》에서 “현재 우리 연변지역의 민주정권은 이미 건립되었다. 의심할 바없이 연변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한인은 반드시 정부의 법령을 준수하여야 하며 동시에 정부의 법률적 보호를 받는다. 중국국적에 가입하려는 한국인은 입적할수 있으며 중화민국 국민으로 될수 있다. 이렇게 조족(朝族)은 중화민족가운데 하나의 소수민족으로 될수 있다. 우리정부는 민족평등원칙에 근거하여 조선족으로 하여금 정치, 경제와 문화상에서 해방과 발전의 권리를 향유하도록 하며 민족언어문자, 풍속습관, 종교신앙 등도 똑같이 존중을 받는다”고 강조하였다.[⑨] 1948년 8월 중공 연변지역 위원회에서는 <연변민족문제>결의문을 작성하고 연변 조선민족인민에 대한 방침과 정책을 제정하였다. 이 결의문에서 “우리 당과 정부가 연변조선민족인민을 중국경내의 소수민족 지위를 비준한 이 정책은 어디까지나 옳다”고 강조함과 동시에 “이 민족은 조국이 있는 소수민족의 특점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승인하여야 한다”고 하였다.[⑩] 그리고 조선족과 조선 僑民간의 구별점을 다음과 같이 밝히였다. “연변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인민으로서 호적이 있는 사람은 공민이며 잠시 내왕하는 처지로서 호적이 없는 사람은 교민이다. 정부의 허가를 거쳐 이주해 갔다가 다시돌아 온 사람, 우리측 고급정부의 허가를 거치지 않고 (최근에) 이주해온 자는 교민이다. 가족이 조선에 있지만 가장과 재산이 연변에 있는자는 정부의 허가를 거쳐 공민으로 승인을 받을 수 있다. 공민과 교민은 권리 및 의무상에서 구별되어야 한다.”[11] 결의문에서 중국조선족과 조선교민의 표준에 대한 명확한 지적은 중국조선족정체성에 중요한 의의를 부여하였다. (2) 중화인민공화국 건국과 조선족정체성의 확립 1949년 10월1일 북경천안문성루에서 모택동주석은 전세계를 향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공포하였다. 이 직전에 중국공산당 연변지구위원회 서기, 연변전원공서 전원 주덕해가 동북조선인민대표로 1949년9월 제1기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당시 전국인민대표대회 권리대행 기구) 제1차회의에서 위원으로 당선되었고 중화인민공화국 개국대전까지 참석하였다. 동시에 동북지역의 조선인 사회도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동북의 조선족집거지역에는 조선족간부들이 많이 발탁되었고 연변대학, 연변조선족 고급중학교 등 조선족학교가 많이 세워졌다. 더우기 1952년 “연변조선민족 자치구”설립과 더불어 기타 조선족집거지역에는 조선민족 자치향, 자치촌들이 많이 설립되었다. 이 모든 것은 조선족이 이미 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일원이라는 것을 확정하였다. 하지만 법적 확립은 되었으나 관념적으로나 실지적으로는 좀 늦었다. 당시 조선과의 연계도 밀접하였고 “조선인”, “조선인민”, “조선민족” 등 칭호가 “조선족”보다 더 많이 사용하였다. 1948년 11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건립을 경축하기 위하여 평양에 간 중국동북조선인민대표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김일성주석은 “멀리 해외에서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기원하는 중국동북 재류동포들의 성원과 대표단일행의 래조를 환영”한다고 하였고[12] 12월에 연길에서 개최된 “조선민주건설사진전”을 보도하는 기사에서는 “조선관중들은 조국의 승리적 발전에 무한한 감격과 흥분을 느끼게 되었고 중국관중들도 세계민주진영의 일환으로소 조선의 비약적 발전에 경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13] 연변대학을 창설할 때 이를 “동북조선인민대학”으로 가칭하였고 “동북경내 재주조선인 최고학부”라고 일컸다. [14] 그리고 조선을 “동북에 있는 조선민족의 민족조국이면 세계화평민주진영의 일환”이라는 기사보도가 있었고[15]조선전쟁시기 “동북의 수많은 조선인민들 조국의 자유독립을 보위키 위해 조선전장에 자동적으로 떠났다”[16]는 기사도 우리말 신문에 보였다. 여기서 보다시피 당시 조선족은 “조국”문제에서 약간의 혼란을 겪었다. 특히 조선전쟁시기 중, 조 양국의 조선민족사이에 있은 빈번한 이동은 “고국”, “모국”과 “조국”의 구별을 모호하게 하였고 “중국은 인민 조국이요 조선은 민족조국이다”말도 있었다. 하지만1955년 연변조선족자치주에서는 조국문제에 관한 공개토론을 통하여 조선족가운데 존재하는 “다 조국론”, “민족조국”, “법률조국” 등 모호한 이해를 기본상 해결하였고[17] 기타 조선족지역에서도 조국에 대한 모호한 인식을 비판함에 따라 조국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정립하였다.[18] 이러한 것은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확립의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중국조선족은 중국의 농업합작화 운동, 사회주의 개조와 문화대혁명 등을 겪어면서 자신의 중국국민성과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을 더욱 명확히 수립하게 되었다. 다시 말하면 조선족에게는 탈조선반도적인 중국국민의식과 중국다민족가정의 일원인 조선족이라는 의식이 보다 강하여졌다. 물론 그렇다고 조선반도주민과의 “同一源流”의 전통적인 연대감을 완전히 털어버릴수는 없다. 20세기 90년대말 필자의 설문조사에 따르면 96%이상의 응답자가 조국을 “중국”이라고 적었고 “중국 조선족의 귀속”이란 물음에서는 응답자의 73%가 “중국”이라고 하였다.그리고 “기타 민족과의 교류에서 자신을 조선족이라고 점을 표명하는가”하는 물음에서 79%의 응답자가 “떳떳히 밝힌다”다고 하였고 신문매체에서 기타 민족이 조선족의 우수성을 언급할 때 응답자의 97%이상이 “자긍심을 느낀다”고 답하였다. [19] 이와 같이 조선족에게는 중국국민이란 의식과 조선족이라는 의식이 이미 깊어졌다. 이러한 의식속에서 조선족은 중국국민으로 중국사회흐름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주류사회진출에도 게으러지 않았다. 조선족가운데 중국국가급 영도자가 나오고 정부장관이 나왔으며 중국인민해방군 상장, 중장, 소장 등 장군계급을 지닌 사람들도 10여명 산생하였고 또 10여명의 정부 차관급과 수 백명의 국장급 인물들이 나왔으며 또 수천, 수만명의 대학 교수 등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의 연구자와 기술인원들이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우주선발사, 위성발사 등 과정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한 조선족과학자도 있었다. 조선족은 민족적 긍지감를 갖고 중국에서 생활하였다. 그리고 조선족은 평등한 중국의 민족정책하에 민족언어, 민족문화를 보존하고 활용하면서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키워왔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장백조선족자치현에서는 공식사용문자를 조선어로 규정하였고 수 십개 민족향에서도 민족자치의 혜택을 받고 있다. 그리고 조선족이 집결한 동북 3성과 내몽골에서 수백, 수천개의 조선족 중학교와 소학교가 있으며 조선글 출판사, 조선어 방송국, 조선족 문화관 등이 설립되 있다. 이러한 것은 민족언어 유지와 민족문화 전승에 큰 기여를 하였으며 민족정체성 강화에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와같이 중국조선족은 중국사회의 흐름에 따라 개혁개방까지 민족정체성을 굳건히 지켜왔다고 할 수 있다. (3)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정체성의 변화양상 개혁개방이후 조선족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맞이하였다. 인구이동에 따른 거주 분산화, 민족집거지역의 슬럼화, 민족교육의 급속한 축소, 한국과의 교류 등은 조선족의 민족정체성에 많은 변수를 초래하여 다중양상을 보였으며 이러한 정체성은 시기에 따라, 대상에 따라 강화-약화-강화의 교체가 반복되었다. 하나는 민족집거지역을 떠나 중국 기타지역으로 진출한 경우 그 당사자들의 기타 민족들과 접촉하면서 자신이 조선족이라는 것을 더욱 체감하였고 또 사업과정에서는 민족적 차별감도 느끼게 되면서 민족정체성이 강화되는 한 면 의식적으로 민족성을 감추려는 생각 또한 없지 않았다. 이러한 갈등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민족정체성은 강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한편 한국의 성장과 중국진출은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강화에 도움이 되기도 하였다. 민족정체성 약화의 돌출한 현상은 산해관이남 도시지역에 진출한 조선족가정의 자녀들에게 나타나고 있다. 이들은 민족교육을 받을 여건과 기회가 없어 민족언어과 민족문화를 터득하지 못하고 민족의식이 점차 희미해짐에 따라 민족에 대한 애착이 날로 멀어져 가고 민족정체성도 약화의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다음은 중한수교이후 조선족들이 한국에 많이 진출하였다. 이들에게 처음에는 중국국민의식보다 한 민족이라는 의식이 앞섰고 코리안 드림에 많이 기대하였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한국에서 한국사회와 한국인의 심각한 차별과 편견을 느끼면서 한국에 대한 기대는 날로 약해지고 한민족이라는 의식보다 중국인, 그리고 중국조선족이라는 의식이 더욱 강해지기도 하였다. 또 다른 한 경우 일부 사람들은 한국에서 차별을 느끼면서 돈을 벌려고, 좀 더 자유로이 한국에서 일을 하고 친척들을 초청하기 위하여 한국국적가입에도 적극적이었다. 이들에게는 중국국민과 조선족이라는 정체성보다 생존과 이익이 더 우선위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민족정체성이라는 것도 매 개인의 실제적 이익앞에서는 한순간 무력감을 느끼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조선족이 갖고 있는 조선반도적인 특징과 중국적인 특징으로 조선족의 민족적 정체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에 대하여 현재 논란도 일고 있다.[20] 일부에서는 조선족정체성의 이중성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소위 조선족은 “중국공민이면서 조선민족이라는 이중성을 갖고 있다”는 주장에서 언급한 “중국공민”과 “조선민족”의 개념은 동차원의 개념이 아니며 특히 중국에서는 상하위 개념으로 보인다. 이러한 대등하지 않은 두 개념을 합쳐서 조선족의 “이중성”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만약 이것이 성립되면 중국의 56개 민족이 모두 “이중성”민족이라고 할 수 있는 않겠는가? 5. 조선족의 미래전망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은 민족의 생존과도 연관된다. 조선족이 타민족에게 동화되지 않고 민족적 입지를 튼튼히 하려면 반드시 민족정체성을 강화하여야 한다. 여기에는 민족적 지혜가 필요하면 민족적 힘을 키워야 한다. 미래지향적인 안목으로 볼 때 조선반도주민들과의 연대감도 강화하여야 한다. 도시화와 세계화의 흐름은 막을 수 없다. 이미 중국에 뿌리를 내린 조선족은 중국의 도시화과정에 발맞추어 과거 농경민족에서 도시민족으로 탈바꿈하여야 하고 세계화의 흐름속에 고국인 한국과의 유대성을 더욱 강화하여야 할 것이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는 서로의 이해와 신뢰를 쌓고 힘을 합쳐야 할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회의 많은 부정적 결과는 한국을 향한 코리안 드림이 아주 큰 화근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 하나는 한국정부의 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이고 또 하나는 한국사회의 부정적 또는 차별적 태도에서 비롯되었다. 때문에 한국정부는 명확하고 무차별적인 해외동포정책을 제정하여야 하며 (현재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조선족입지를 튼튼히 하는데 힘을 기우려야 한다. 다음 조선족자신도 경제력을 빨리 키워야 한다. 경제력에 커짐에 따라 도시의 집거지역도 조성할 수도 있고 민족학교도 세울수 있으며 문화활동장소도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것 모두가 민족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꼭 필요한 여건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는 우리 모두 “한 민족”이라는 미래지향적인 의식을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것은 조선족의 정체성, 한국과 조선의 민족정체성, 제일 조선인의 정체성 등을 떠나서 “한민족” 또는 “조선민족”의 정체성을 수립하고 세계적인 민족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세계화의 흐름에 따라 재외동포들이 더욱 많이 한국에 진출하게 될 것이고 더 많은 한국인들이 중국을 포함한 여러 국가로 진출할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너는 “한국인”이고 나는 “조선족” 또는 “재일 korean”이다고 따지지 말고 현지에서 서로 교류하고 화합하여 공통적인 민족전통문화를 살려서 한 민족의 정체성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중국의 예로 현재 한국에서 중국진출한 사람들이 수십만이 된다. 앞으로 더욱 많아 질 것이다. 그리고 조선족도 동북 집거지역을 떠나 산해관이남으로 수 십만명이 진출하였다. 도시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하는데는 민족집거지역 형성이 아주 중요하다. 일정한 민족인구의 집거지역이 생기면 민족교육의 장소가 점차 형성될 것이고 민족교육이 가능하면 더 많은 조선족이 몰려 올 것이 당연하고 한국인들도 선호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도시에서도 민족문화를 꽃피우고 한 민족의 동질성을 더욱 돈득이 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조선족사회발전은 심각한 도전을 맞고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더욱 기회가 있고 미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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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8-05
  • 글 쓰기에 집착하는 이유
    세상에서 제일 위대한 사람은 오늘도 새로운 일에 도전하고 그 중에서 경험을 쌓고 그 과정을 총결하고 보귀한 재산을 글로써 전함으로써 살기 편하고 과학이 발전하고 문명한 사회를 건설하고 있다. 아름다운 글은 사람들에게 힘을 주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지식을 전수하여 정신세계를 촉진하게 하고 예리한 필치로 사회의 현상을 비판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글은 어지러운 기풍을 바로잡고 새길로 들어서게 한다. 필자의 소녀 시절은 중국의 무산계급 문화대혁명의 여파로 그렇듯 하고픈 공부를 일짜가 된서리를 맞았고 그한을 달래려고 자기를 찾아 헤매였고 나이 들어 가정을 이룩한 후에는 힘들고 고된 농사일에 지친 마음과 단조로운 시골 생활에 문화 생활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며 짧은 글이나마 마음의 빈 구석을 달래보려 썼었고 그후 <연변일보>통신원이 된 후로는 사회에 저그마한 기여라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자기를 고무하면서 글을 쓰느라 애썼다. 한중 간의 교류도 활발하고 저도 2008년도에 무연고 방문 취업의 수혜자로 입국하여 처음에 한국 식당에서 일했다. 처음 주방에서 하는 일이라 서툴고 말도 잘 알아 듣지 못하여 사장님이 저에게 <아줌마. 초등 교육이나 받았어?>하고 한마디 말이 그때는 억울하고 분하였으나 지금 생각해보니 나에게 분발하도록 노력하는 계기가 되였고 나에게 사고의 기회를 준 사장님이 고맙게 생각한다 글 쓰기는 힘 들때엔 힘의 원천이 되고 마음이 산란할 때에는 글로써 마음의 실 타래를 풀어 나가며 자기의 생각을 글로 적어 가노라면 마음이 즐거워지고 생각한 것을 많은 분들과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 하며 기쁜 마음으로 오늘도 힘 있게 적어 내려간다. 글 쓰기는 나의 애호고 나의 천직이고 나이와 무관한 평생 직업이고 글을 쓰느라면 뇌 활동을 게을리 하지 않을 수 있어 좋은 일거리다. 이런 직업을 애호하지 않을 그 무슨 이유가 있겠는가? 오늘도 소중한 하루로 맡은 바 일을 끝내고 주룩주룩 비 내리는 소리를 들으며 글로써 하루를 맺는다. 즐거운 여가 생활은 사람들에게 활력소를 주입하여 이 세상이 아름답기만 하다. 감천 2013년 7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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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07-15
  • "연변조선족자치주 해체설"에 관하여
    ●허 훈 [동포투데이]요즘 신문이나 방송 인터넷 등 매체에서 한국 언론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해체위기”에 대한 기사를 쉽게 볼 수 있다. 이는 중국의 민족정책을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의 조선족인구 비율 감소는 자치주 수부 도시 연길의 도시 면모를 바꾸고 있다. 원래는 연길시내의 광고판을 모두 조선어와 한어로 표기하도록 되어 있으나 관련부문의 단속에도 중국어로만 쓴 광고판으로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최근녕파와 온주 등 한족기업들이 육속 연길에 진입해 백화점을 설립하고 있는데 그들은 아예 건축물 밖의 전체 벽을 모두 중국어로만 된 광고판으로 커버하고 있다.. 공항안내도 점점 조선어사용이 감소되고 있는 상황이다. 북경과 연길을 연결한 동방항공회사도 중국어와 영어를 두 가지 언어만 사용하고 있다. 또한 상가나 식당가게주인, 종업원은 조선족을 찾아보가 힘들 정도이다. 이것은 한국인들이 보아온 연길의 최근 몇 년의 변화이다. 한국 언론은 “1952년 설립돼 이미 60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연변조선족자치주가 해체될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뿌린 돌멩이 하나가 일파만파를 일으킨다고 인터넷상에서도 이 소식이 광범하게 전해졌다. 중국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관계자는 기자에게 “우리는 이 소식을 모른다.”고 말했다. 기자가 알아본데 의하면 연변 조선족자치주 해체에 관한 소식은 정확하지 않은 걸로 판명났다. 하지만 조선족자치주는 그동안 눈부신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한때 전체 인구의 70%에 달했던 자치주조선족 인구는 최근 36%대로 뚝 떨어져 현지 조선족인구하락세는 사실로 밝혀졌다. 연변의 조선족인구는 1952년 자치구 설립초기만 해도 지역 총인구의 62%를 점했다. 그러나 1996년부터 시작하여 조선족인구 비율은 급한 하락세를 보였다. 2000년에는 84.2135만 명으로 자치주총인구의 38%를 점했으나 2005년에는 33%로 계속 하락세를 보이였다. 한국언론은 중국 현지 동포 언론에 게재한 문장을 인용해 “중국 국내 조선족인구가 계속하여 감소되고 있다 만약 이런 추세로 계속 내려간다면 2050년에는 50.1397만 명이 감소될 것이며 2090년에는 19,4227명으로 감소될 것이다. 22세기에 가서는 중국 국내 조선민족은 철저하게 사라질 것이다.”라고 보도했다. 조사에 따르면 연변 조선족자치주 인구증가율은 국내 56 개 민족 가운데서 제일 낮은 것으로 드러났다. 1996년부터 마이너스 증가추세가 나타났는 바 조선족이 제일 많이 집중한 룡정시, 화룡시, 도문시의 조선족인구 감소폭도가 아주 컸다. 조선족인구 하락세원인을 분석할 때 연변당지매체의 관계자는 기자에게 “연변에 이러한 현상이 나타나는 것은 주요하게 조선족은 받은 문화교육 정도가 비교적 높고 또한 교육을 중시하고 아이를 많이 낳기 싫어하는데도 그 원인이 있다”고 말했다. 조선족은 자고로 교육을 중시하는 전통이 있다. 1949년, 중국의 첫 번째로는 되는 민족대학인 연변대학이 설립되였으며 자체로 모금하여 100여 개의 소학교를 건설해 1952년에 벌써 소학교육을 보급했다. 다음으로 조선족인구 유동은 계속 늘어가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조선족 거주지 중국의 제일 북쪽인 흑룡강(黑龍江省)으로부터 남쪽 끝인 해남성(海南省)까지는 S형으로 확산되어갔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를 중심으로 동북삼성의 농촌지역 조선족들은 한국기업군단의 중국 대도시 진출을 따라 중국의 각 대도시들에 확산되여짐을 풀고 있다. 현재 내지의 한국인이 경영하는 호텔, 음식점에 갈수록 많은 조선족 여성들이 취업하고 있다. 이런 여성들은 대부분 생육기에 처한 부녀들로 이는 조선족인구가 감소되는 한 개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90년대 이후 해마다 2000 ~ 3000명의 조선족들이 출국하던데로부터 2007년 방문 취업제가 시행됨에 따라 해마다 수만 명의 조선족이 출국하고 있다. 이중에는 조선족 여성들도 적지 않다. 일본에 유학가는 여성들도 늘어나는 추세다. 한국 법무부 통계에 따르면 지난 4월 기준 현재 취업을 목적으로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 58만 7천732명 가운데 방문 취업 중인 조선족 수는 28만 9천981명이다. 조선일보를 비롯해 한국언론은 소수민족 자치주내 소수민족 인구가 전체의 30%를 밑돌면 자치행정권이 취소될 수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중국에는 정말 30% 최저선이 있는가? 통상적으로 말하면 한 개 민족자치지방의 설립은 특수한 역사원인으로 인한 것이며 또 당지 소수민족결구도 아주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 북경경제무역대학인구경제연구소 소장 황 룽칭(黄荣清)은 기자에게 중국은 30% 최저선을 보장해야 한다는 규정이 없다. 자치구, 자치주를 건립할 때 당연이 소수민족이 점하고 있는 인구 비례를 고려하며 역사인소, 및 기타 정황도 종합적으로 돌본다”고 말했다. 민족자치구, 민족자치주는 단순이 인구 비례만을 근거로 하지 않는다. 인구가 보편적으로 많은 민족은 능이 자치를 할 수 있으며 인구가 비교적 적은 민족도 능이 자치를 할 수 있다. 즉 인구가 많은 민족만이 자치권을 향수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로 된다. 중국의 민족자치지방은 자치구, 자치주, 자치현 3개 등급으로 나뉜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설립되기 전의 1947년, 중국 몽고족 거주 지역에 중국에서 첫 번째로 성급에 해당되는 내몽골 자치구가 건립되었다. 지금까지 중국은 155개의 자치정부를 건립하였는 바 여기에는 5개 자치구, 30개 자치주, 120개 자치현(기)이 포함된다. 중국 민족사무위원회관 방사이트에서 공포한 통계에 따르면 내몽고자치구의 소수민족인구는 전체 인구의 18.6%, 녕하회족자치구소수민족인구는 전체 인구의 34.1%, 광서 자치구소수민족인구는 전체 인구의 38%를 차지한다. 이 세 개 자치구 중 한족은 인구점유율에서 절대적 우세를 차지한다. 그러나 의연히 자치구로 남아 있다. 연길에서 사업하고 있는 한 한국인은 “연변의 면적은 4만여평방키로메터로서 한국국토의 절반에 해당된다. 만약 연변이 해체되면 우리 민족이 중국 동북지구에서 유구했던 역사, 근거지가 영원이 소실되고 만다.” 아마도 이것이 한국인이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 언론은 또 “중국 당국은 현재 자치주 수부인 연길시를 포함한 8개현시로 구성된 연변 조선족자치주를 해체해 연길, 룡정, 도문을 연결한 ‘연룡도시”를 계획하고 있다”고 보도한적 있다. . 하지만 중국 국가 민족사무위원회 관계자는 “연변 자치주 해체에 관한 소식을 모른다. 하기에 무어라고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행정구역의 변동은 모두 국무원에 보고하여 동의를 받아야만 진행할 수 있다”고 기자에게 말했다. 돌이켜보면 알다 싶이 1983년, 연길현을 룡정현으로 개명할 때, 그리고 1985년, 돈화현을 돈화시로 개명할 때 모두 국무원의 심사비준을 거쳤다. 연변 자치주를 해체하는 것은 아주 큰 대사이다 “연룡도 통합” 프로젝트 추진은 또한 아주 큰 대사이다. 연변 한 지명인사는 기자에게 “연룡도 통합 프로젝트는 벌써 10여 년 전부터 구상해 왔으며 주요하게 지역경제발전을 촉진하려는 의도에서 출발한 것이며 자원을 합리하게 이용하고 작은 것을 크게 만들어 경쟁력을 강화해 대기업의 투자를 흡인하려는 데 있다”고 밝혔다. 연변 자치주 당위원회에서는 “11.5” 계획을 연구 토의할 때 “11.5” 기간 연룡도를 통합해 하나의 경제연합체를 만든다고 명확하게 지적했다. 역사적으로 연길, 도문, 룡정은 원래 하나의 행정단위였으며 3 개시의 인구결구도 조선족을 위주로 하는 소수민족 집거지이다. 연길, 룡정, 도문의 조선족인구는 각각 전시 인구의 58.4%, 67.6%, 57%를 점한다. 조선족들의 자치주에 대한 감정은 아주 깊다. 조선족인구 하락세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당지의 노인들도 있다. 민족 감정상으로 보아도 자치주를 해체하는 것은 현실적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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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2-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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