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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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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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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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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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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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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영화“국제시장”을 보지 않은 이유
    기성세대는 물질적 성과로 자만하지 말고 國家價値 퇴보에 자괴감 느껴야 시내의 극장을 지나가며 그 김에 볼 수 있는 상황이 되었는데도 일부러 그 말 많은 국제시장을 안 봤다. 언론에서는 연거푸 가난 속에 나라소득을 높인 기성세대를 젊은 세대가 이해하도록 기여했다며 찬사를 늘어놓고 있지만 사회의 가치는 쌓아놓은 물질소득이 전부가 아니다.국제시장의 배경이 되는 시대는 대한민국이 건국과정에서 이룩된 기존의 민주주의 국가제도를 하나하나 무너뜨려 오늘날의 불평등사회로 바꿔오던 기간이었다. 그 세월동안 살아왔던 기성세대는 민주사회를 말아먹은 장본인들이었다. 초기의 민주사회가 불평등사회로 바뀐 것에 대해 진보라는 자들이 큰소리칠 자격이 없는 것은 그들이 그 과정의 가장 큰 협력자이었기 때문이다.대표적인 국민기회균등파괴는 중고교평준화와 한글전용이었다. 이것은 진보라는 자들이 주도하고 보수기득권은 못이기는 척 따른 것이다. 가진 것이나 배경 아무것도 없는 집안의 아이라도 오직공부만 열심히 하면 공립의 영재학교에서 길러주는 제도를 없앴다. 조선시대와 달리 국민 모두가 知的언어를 배우고 사용할 수 있었던 시대도 얼마안가 단절되고 말았다. 자기들은 윗세대가 이뤄놓은 민주제도의 혜택 속에서 당장 가진 것은 없어도 노력과 능력만 있으면 삶을 개척할 기회를 가졌지만 자기들이 누린 민주제도를 말아먹어 노력을 해도 앞길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만든 것을 기성세대들은 과연 功致辭할수 있을까. 그렇다면 모아둔 재산을 물려줄 자식에게나 할 것이지 기회를 박탈당한 다른 젊은이들 앞에서 하지는 말아야 할 것이다. 국제시장은 민주주의 기회균등의 국가에서 국민기만적인 봉건주의 신분사회의 국가로 몰락하는 과정을 그린 영화이기에 그 괴로운 과정을 굳이 보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연변통보 朴京範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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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5-03-01
  • [김혁 칼럼] 황제의 수라상
    ●김혁 (재중동포 소설가) 1 제60회 아카데미 수상작 “마지막 황제”가 디지털 리마스터링으로 다시 개봉되었다. 여기서 리마스터링이란 과거의 영상이나 음원을 디지털로 복원하여 화질과 음질을 향상시키는 작업을 말한다. 필름에 붙어 있는 먼지를 제거하고, 파일의 색과 음향을 보정하는 과정을 거치는데, 필름이 손상된 고전 영화는 복원 작업까지 더해진다. 대부분의 극장들이 디지털 영사기로 교체돼 필름 영화는 아예 틀 수 없게 된 지금, 리마스터링은 문화재 보존의 차원과 초고화질 환경에 대한 콘텐츠 공급에 대한 차원의 작업으로 부상되고 있다. 2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인 푸이가 생전에 집필한 자서전 “나의 전반생”을 바탕으로 이딸리아 감독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에 의해 엄청난 제작비와 물량이 투입되여 제작된 영화는 1988년 제 60회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 감독, 각색, 음악, 촬영 등 9개 부문을 대거 수상, “그저 놀랄 수 밖에 없는 작품이다”, “우리가 다신 볼 수 없는 역사드라마”, “강력하고, 장엄한 역사적인 전기영화” 등 엄청난 찬사 속에 불후의 명화로 손꼽힌다. 1906년, 청나라 최고의 권력자인 80세의 서태후는 병상에 누워있는 광서제 대신 광서제의 동생 순친왕의 아들인 네살의 푸이에게 황제의 자리를 물려준다. 장엄한 황제 즉위식조차 하나의 놀이로 밖에 여기지 않는 어린 푸이는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황제의 존호와 궁전 및 사유재산만 인정받은 채 퇴위하게 된다. 자금성에서 연금생활을 하며 푸이는 16살때 완용을 황후로, 문수를 후실로 맞아들인다. 1924년, 풍옥상의 군사혁명으로 푸이는 자금성에서조차 추방된다. 중국침략의 야욕에 찬 일제의 사촉으로1934년, 푸이는 세상의 반대와 비난을 무릅쓰고 만주국을 세우고 황제의 보좌에 오른다. 하지만 일본군의 조종하에 위만주국에서 그는 허울뿐인 “꼭두각시 황제”노릇을 한다. 1945년, 일본의 항복으로 해방이 되자 일본 탈출을 시도하던 푸이는 만주에 주둔한 쏘련군에 의해 포로가 되며 중국인 전범수용소에 갇힌다. 1959년, 특사령에 의해 10년의 형기를 마치고 수용소에서 나온 푸이는 평범한 공민이 되여 만년을 보낸다. 영화는 력사의 도도한 흐름아래 몰락해가는 왕조, 그속에 굴절된 인간의 삶과 영욕을 그리고 있다 3 영화에서는 푸이가 일제의 사촉하에 지금의 창춘에 허울뿐인 위만주국을 세우고 강덕황제로 등극하는 과정이 상세하게 나온다. 그런 강덕황제에게 진상한 수라상의 쌀은 바로 간도지역에서 생산되었음을 아는 이들이 많지 않다. 당시 두만강지역은 인적이 드문 “봉금”지역으로 관헌의 눈을 피해 황무지를 개간하는것은 생명을 걸고 하는 일이었지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아사직전의 가난한 조선인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월강하여 황무지를 개척하였다. 용정시 개산툰진의 하천평은 조선인들의 벼농사가 비교적 일찍 시작된곳이었다. 이 마을에 최학출이라 부르는30여세의 조선인 농꾼이 있었다. 최학출은 1917년 2월 18일 충청북도 청주군 학사면 원평리에서 태어났다. 재해로 살길이 막연하여 지자 1935년에 이곳으로 이사하여 왔다. 그때만 하여도 이 고장의 벼농사는 주로 산종을 했고 벼모이식을 조금씩 하는 정도여서 벼의 생산량이 많지 못했다. 최학출만은 전부 모내기를 할 타산으로 당지의 한냉한 기후조건에 비추어 대담하게 온상육모를 시험했다. 1941년 봄, 유리창문처럼 간이 문창을 짜서 백지를 붙이고 콩기름을 발라 양광이 잘 들어가도록 투명도를 높인 다음 벼모판을 만들고 씨앗을 뿌렸다. 결과 모를 일찍이 키워냈을뿐만아니라 유별하게 벼모가 건실하게 자라났다. 이해 소출도 뜻밖에 아주 높았고 지어놓은 해쌀밥은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가 있어 그야말로 천하진미요, 천하진품으로 되었다. 그의 벼는 현과 간도성 농산품 전시회에 출품하게 되어 으뜸가는 호평을 받았고 점차 전 만주에 소문이 났다. 최학출은 만주국정부의 초청을 받고 신경(지금의 창춘)에 가서 만주국화페로 천원의 상금을 받았다. 그리고 특별히 강덕황제의 수라상에 오르는 쌀을 전문 생산하는 밭을 가꾸라는 임무를 맡게 되었다. 천자, 제후에 붙이는 높임말인 “어”에 곡식 “곡”자를 붙여 밭이름을 "어곡전(御谷田)"이라고 했다. 그가 맡은 "어곡전" 면적은 천평이나 되었다. “어곡전” 주위는 뺑끼칠을 한 널판자로 울타리를 하여 집짐승들이나 사람들까지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촌공서와 경찰서, 현의 관원들이 "어곡전"을 호위해 주었다. 봄에 논갈이를 할 때만 소의 힘을 빌었을 뿐 그외의 일들은 모두 사람의 힘으로 하였다. 논에 일하려 들어갈 때면 우선 손발을 깨끗이 씻어야 하였고 거름은 오직 삶은 콩과 두병만을 사용하였다. 가을이면 먼지가 없도록 까붐질을 한 다음 정미를 하고 온 마을 처녀들을 끌어다 쌀을 고르게 하였다. 처녀들은 유리판 위에 쌀을 펴놓고 한알한알씩 고르었는데 쌀알의 귀가 좀 떨어져도 안되고 쌀의 빛깔이 좀 달라도 안되었다. 황제의 수라상에 오르는 어곡을 만드는 일은 그야말로 참으로 세심한 과정이 었다. 이렇듯 만주지역의 논농사는 이곳으로 이주해온 조선인들에 의해 시작됐으며 최학출은 만주 지역 벼농사의 전설적 존재로 자리매김했다. 우리 민족의 뛰어난 벼재배 기술과 역사의 영욕을 고스란히 안고 오늘도 두만강 연안에서 나는 쌀은 당년 못지 않게 백옥같이 희고 기름기 돌며 밥맛도 참으로 구수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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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26
  • [김혁 칼럼] 흑백 아카데미
    ●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1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 막을 내렸다. 영화인들의 최고의 축제이건만 어딘가 싱겁다. 그리고 시끄럽다. 이번 아커데미 시상식은 역대 가장 뻔한 시상식이었다는 조롱을 면치 못했다. 작품상과 감독상, 남녀 주연상과 조연상 등 주요 부문의 수상작과 수상자는 미국 빅데이터 분석 업체와 베팅 사이트 등이 내놓은 전망과도 어쩌면 100% 일치했다. 또한 올해 아카데미는 아카데미 역사상 “최고로 하얬던 해”인 1998년 이후 17년 만에 다시 백인 일색의 후보를 지명해 논란을 불러왔다. 이번 아카데미는 시상식이 열리기 전부터 흑인 차별 논란이 불거졌다. 미국의 인권운동가 마틴 루터 킹 목사의 일대기와 그의 유명한 연설이 있었던 1963년의 평화대행진을 재현한 전기 영화 '셀마'가 감독상과 연기 부문상 노미네이트에서 제외되자 흑인에 대한 차별이 아니냐는 논란이 제기됐다. ‘셀마’는 지난 해 퍼거슨 시 사태를 필두로 미국 곳곳에서 있었던 인종차별주의와 관련한 끊임없는 이슈들을 동반한 채로 계속해서 화제를 모았고, 여전히 무난한 흥행 성적을 지키고 있던 영화였다. 결과 '셀마'는 이번 아카데미상에서 겨우 주제가상 하나를 달랑 건졌을뿐이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을 진행한 닐 패트릭 해리스는 "오늘 'best and whitest' 작품들을 축하한다"고 말했다. 이는 '최고이자 가장 하얀' 작품들이란 뜻이다. 자신들을 향한 논란을 유머스럽게 받아들이고 이번 논란에 대해 아카데미에 일침을 가한 발언이었다. 배우 숀펜은 '버드맨'으로 감독상을 수상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스를 향해 "저 사람에게 왜 그린카드를 줬냐"고 농담을 던졌다. 그린카드는 이민자들에게 발급되는 영주권이다. 그리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는 멕시코 인이었다. 이 발언 역시 논란이 되었다. 그의 발언이 다소 경솔했다는 반응이다. 시상식에서 보통 수상소감이 길어지면 수상 소감을 끝내라는 의미로 음악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날 ‘셀마’로 주제가상을 받은 로니 린이 수상 소감을 전할 때는 음악이 등장하지 않았다. 이를 통해 주요 부문 후보에 흑인이 포함되지 않은 것에 대한 불만을 어느 정도 잠재우려는 시도로 보인다. 영화가 주역이 되는 세계 최고 영화축제이건만 아카데미 시상식은 올해에도 ‘백인 중심의 잔치’라는 오명을 털어내지 못한채 우리에게 '인종주의'의 논란을 다시 한번 화두로 던져줬다. 2 87회 아카데미 시상식이은 미국 사회의 단면을 그대로 보여준다. 지난해 8월 10일 미국 중서부 미주리주 퍼거슨시에서 18세 흑인청년 마이클 브라운이 백인 경관의 총을 맞아 숨졌다. 머리와 팔 등에 최소 여섯발을 맞았으며 숨진 뒤에도 4시간 동안 시신이 길거리에 방치되였다. 브라운이 비무장 상태에서 무고하게 사살됐다는 증언이 나왔다. 하지만 지난 11월25일, 브라운을 총으로 쏴 사망케 한 백인 경찰 대런 윌슨에 대해 대배심이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이런 가운데 뉴욕 거리에서 담배를 팔던 흑인 에릭 가너를 체포하는 과정에서 목을 졸라 숨지게 한 백인 경관에 대해서도 뉴욕시 대배심이 12월 3일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지난해 9월에는 백인인 남편에게 키스를 하던 다니엘르 왓츠라는 흑인녀성이 경찰에 붙잡혔다. 매춘녀로 오인 받은 그녀는 즉각 “이 사람이 나의 남편이다”라고 항변했으나 매춘부가 아니고 남편이 그녀의 고객이 아니라는것을 경찰이 인정할때까지 수갑을 찬 채 붙잡혀 있어야 했다. 체포당하며 그녀는 몸 곳곳에 상처를 입었다. "미국에서 백인 남성에게 키스하는 흑인 여성은 매춘부라고 봐야 하느냐"며 사건은 또 한 번 인종 차별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아이러니 적인 것은 그녀가 바로 인종차별에 대해 직격탄을 날린 영화 “장고, 분노의 추적자”에서 흑인 노예로 출연했던 녀배우였다. 영화의 감독 타란티노는 "미국은 과거의 비극적인 사건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노예제도는 미국의 원죄 중 하나다. 아직도 그 죄를 씻지 못했고 여전히 흑인과 백인이 서로를 대하는 데 영향을 끼친다"고 갈파했다. 3 퍼거슨 사태 이후, 흑인을 상대로 한 각종 증오 범죄, 스나이퍼들이 사격 연습 때 흑인 범죄자 얼굴을 표적으로 사용한 사실 등이 밝혀지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흑인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시점에서도 미국은 스크린과 현실에서 “부당한 흑백스토리”를 그냥 연출하고 있다. 뜬금없는 연상일지 모르지만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면서 해외에서 차별 받으며 3D업종에 혹사하는 수십 만에 달하는 우리 족속들의 이야기들이 그물그물 떠올랐다. 이는 비단 먼 서구나 영화에서만 자행되는 일이 아니다. 피부색이나 나라를 두고 사람을 차별하는 악습은 우리가 고국이이라는 감동과 민족적 동질감에 대한 기대를 품고 찾아갔던 그 곳에서도 낯익은 소재다. 숀펜이 ‘조크’를 던진 감독상 수상자 알레한드로 곤잘레스의 수상 소감 한 구절이 떠오른다. "지금의 이민자들이, 예전 이민자의 나라를 만든 사람들과 동등하게 살고 존중받길 기도한다". -“청우재(聽齋雨)”에서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5-02-25
  • [르포] 언덕 위의 윤동주의 집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용정.윤동주연구회 회장) 필자는 몇해전 부터 “옛 간도의 서울”이었던 용정에 대한 장편기행을 집필, 권위 간행물에 4년째 연재하고 있다. 용정의 역사에 대한 세세한 고증에 빠져 있던 중 필자는 용정에서 익숙한 인물을 다시금 새삼스럽게 만날 수 있었다. 바로 겨레 모두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였다. 2010년 가을 필자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 관심있는 지인들과 더불어 당지 역사에 해박한 향토사학자 최근갑옹을 모시고 용정의 여러 명소와 명물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와중에 유서깊은 사연들이 서린 용정의 동산에 까지 이르렀는데 그곳에서 뜻밖에도 윤동주의 마지막 길을 바래였던 용정자택 옛터를 재 확인할수 있었다. 조선족 문단에서 처음으로 윤동주의 생애를 소설화하여 장편소설 “시인 윤동주”를 “연변문학지”에 한창 연재 중이던 필자는 격동을 금치못해 했다. 답사가 끝나기 바쁘게 “용정도심에서 윤동주의 집터 확인”,이라는 기행문을 밤도와 써서 연변일보 “종합신문” 2010년 11월 22일자 신문에 발표했다. 그 기행문은 발표되자 작지않은 센세이숀을 일으켰다. 여러 간행물과 수없이 많은 사이트, 까페, 블로그들에 전재되였다. 따라서 그동안 잊혀졌던 윤동주의 또 하나의 거처는 사람들의 관심사를 끌기 시작했다. 문의가 빗발쳤고 관광객들이 하나, 둘 그곳을 찾기 시작했다. 윤동주의 집 하면 누구나 할것없이 우선 명동촌의 시인의 생가를 떠올리게 된다. “마당에는 자두나무들이 있고 지붕 얹은 큰 대문을 나서면 터밭과 타작마당, 북쪽 울밖에는 30주 가량의 살구와 자두의 과원, 동쪽 쪽대문을 나가면 우물이 있었고 그 옆에 큰 오디나무가 있었다. 그 우물 가에서는 저만치 동북쪽 언덕중턱에 교회당과 고목나무 우에 올려진 종각이 보였고 그 건너편 동남 쪽에는 이 마을에 어울리지 않도록 커 보이는 학교건물과 주일학교 건물들이 보였다. 우리는 이 생가에서 저들 또래들 같이 과수원 울타리로 되여있는 뽕나무 오디를 따 먹기도 하고 깊은 우물 물을 길어 입안을 가셔내면서 우물 속에 대고 소리치며 그 울림소리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윤동주의 동생 윤일주 선생이 그림처럼 묘사한 윤동주의 생가 풍경이다. 연변행차를 하는 외지 사람들이면 선참 찾아보는 관광코스의 일번지로 자리매김 되여있는 생가. 하지만 용정 시가지에 또 하나의 윤동주의 거처가 있고 그 곳에서 윤동주가 가는 마지막 길을 바랜 줄을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고 있다. 태어 난 명동에서 명동소학교를 졸업한뒤 윤동주는 명동에서 20리 떨어진 대랍자(大拉子)의 중국인 학교에 편입되여 계속 공부를 했다. 소학교 6학년의 나이로 말하면 매일 밟아야 하는 20여리라는 등교 길은 힘에 부치는 거리였다. 그런 아들의 처경을 안타까이 여기던 윤동주의 부친 윤영석은 자식에게 더 좋은 교육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해 당시 연변지역 사람들이면 너나가 선망하던 “서울” 격인 용정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윤동주의 친동생 윤일주씨가 생전에 잡지 ”나라사랑”에 기고한 추모문〈윤동주의 생애〉에 따르면 “1931년에 윤동주는 명동에서 북쪽으로 30여리 떨어진 용정이라는 소도시에 와서 캐나다 선교부가 설립한 은진(恩眞)중학교에 입학하였다. 그것을 계기로 우리는 농토와 집을 소작인에게 맡기고 용정으로 이사하였다” 고 밝히고 있다. 윤동주 일가의 용정 이주는 어찌보면 일대 변혁이였다. 명동에서 일껏 이룬 터전을 버린 것은 당시 36세의 나이였던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의 도시로 향한 새로운 열망도 있었지만 주로는 파평 윤씨 가문의 장남이였던 윤동주에게 더 좋은 환경을 마련해 주기 위함이였다. 윤동주 일가는 용정에서 두 번의 이사를 거친다. 1931년 늦가을, 맨처음 이사 온곳은 “용정가 제2구 1동 36호”였다. 바로 지금의 길승가로서 용정시 정부 서쪽 용성초대소 부근으로 추정된다. 막상 이사를 단행했지만 거주환경은 크게 변했다. 일가가 이사온 집은 20평방메터 정도의 초가집이였다. 명동에서 터밭과 타작마당, 깊은 우물과 작은 과수원까지 달리고 지붕을 얹은 큰 대문이 있어 마을에서 제일 큰 기와집에서 한껏 넉넉하게 살다가 20평방메터 정도 밖에 되지 않는 초가집으로 옮겨온 것이다.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윤동주, 일주, 광주 3형제, 거기에다 큰 고모의 아들인 송몽규까지 합류한 8명의 식구가 20평방미터의 초가집에서 옹색하게 붐벼야 하는 환경 속에서 윤동주의 용정생활이 시작되었다. 얼마안되어 윤동주 일가는 또 한번 이사를 하게 되는데 그곳이 바로 룡정 동산의 언덕이었다. (그 언덕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구릉으로 4,5리 가량 더 가면 윤동주의 묘소가 있다.) 용정의 정안구(靖安區) 제창로(濟昌路) 1- 20. 최근갑옹의 회억에 의하면 용정의 동남쪽, 그곳에 일제가 차린 야구니스 진쟈(靖国神社)가 있었다고한다. 정안구란 야구니스의 앞자 정(靖)과 안락할 안(安)자를 붙여 지은 구역이름이고 제창로는 바로 “영국더기”에 제창병원이 서면서 지어진 거리 이름이라고 한다. 2003년 일본 신간사(新幹社)에서 출간된 침략신쟈(侵略神社)라는 책자에서 필자는 당시 용정에 세워졌던 야구니스진쟈의 사진 한장을 발견했다. 간도신사 구만주간도신사 (旧満洲間島神社)라는 이름의 그 진냐사진에서 소재지는 동만총성구간도성용정가제1구 (東満総省旧間島省龍井街第1区)라고 밝혀져 있었다. 제신(祭神)은 천조대신(天照大神) , 창립년(創立年)은 대정(大正) 14년. 이라고 밝혀있었다. 그러고 보면 일본의 식민지화정책이 악랄하게 진행되고 있던 시기 새로운 심안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한 윤동주의 당시의 처경을 더듬어 볼수 있다. 일제의 신사참배를 거부해 동맹휴학에 가담했던 우리의 저항시인은 일본의 야구니스 진쟈와 멀지 않은곳에 자리한 환경에서 부득불 지낼수 밖에 없었다. 윤동주의 작품중에 “이런 날”이라는 시가 있다. “사이좋은 정문(正門)의 두 돌기둥 끝에서 오색기(五色旗)와, 태양기(太陽旗)가 춤을 추는 날 시의 앞구절이다. 여기서 오색기는 위만주국의 기발, 태양기는 일본의 국기를 말한다. 일제의 식민지나라인 위만주국의 기발과 일제의 국기가 휘날리는 지역에서 윤동주는 심히 수상스러운 시대를 조소하듯 그리고 있다. 시대의 고통을 명민하게 바라보기 시작한 윤동주의 세계관이 엿보이는 시라하겠다. 명동의 생가에 비해 환경은 여의치 못했지만 윤동주는 그에 구애되지 않았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버릇된 바른 신앙과 좋은 성격으로 학업에 열중해 나갔다. 지금 남아있는 은진중학교 학생시절의 윤동주에 관한 증언들을 보면 그 모습이 풋풋하고 싱그럽다. 다시 윤일주 교수의 “윤동주의 생애”에 있는 증언을 보면- “은진중학교때의 그의 취미는 다방면이였다. 축구선수로 뛰기도 하고 밤에는 늦게까지 교내잡지를 꾸리느라고 등사글씨를 쓰기도 하였다. 기성복을 맵시있게 고쳐서 허리를 잘룩하게 한다든가 나팔바지를 만든다든지 하는 일은 어머니의 손을 빌지 않고 혼자서 재봉기에 앉아서 하기도 하였다. 그는 수학도 잘하였다. 특히 기하를 잘하였다.” 윤동주와 명동소학교와 은진중학교 또 숭실중학교 그리고 광명학원 중학부를 같이 다닌 절친한 친구인 문익환 목사는”월간중앙”(1976년 4월)에 실린〈하늘, 바람, 별의 시인 윤동주〉라는 글에서 윤동주와 관련된 재미있는 에피소드를 떠올리고 있다. “동주는 재봉틀질을 참 잘했어요. 그래서 학교 축구선수들의 유니폼에 넘버를 다는 것을 모두 동주가 집에 갖고 가서 제 손으로 직접 박아왔었지.” 익환 목사는 이어 그들의 은진중학교 학창시절의 모습을 이렇게 증언한다. “1932년 봄에 동주, 몽규와 나는 용정 은진중학교에서 다시 만났다. 은진중학교는 한때 모윤숙(毛允淑)씨가 교편을 잡았던 명신여학교와 한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그 곳에는 또 캐나다 선교부가 경영하는 제창병원이 있고 선교사들 집이 4채가 있었다. 이 언덕은 용정 동남쪽에 있는 언덕으로서 우리는 그 언덕을 “영국더기” 라고 불렀다. 그 지경은 만주국이 서기까지 치외법권지대여서 일본 순경이나 중국관원들이 허락 없이 들어갈수 없는 곳이였다.” 간도일본영사관과 가까이 상거한 이 자택에서 윤동주는 근 8년 간이나 지냈다. 집과 불과 200메터 떨어진 은진중학교에 다니면서 윤동주는 급우들과 함께 학교 내 문예지를 발간하여 문예작품을 발표하는 한편 축구선수로 활약하기도 하였으며 교내 웅변대회에서 “땀 한 방울” 이라는 제목으로 1등상을 따내는 등 영광을 지니기도 하였다. 몇해전 타계한 윤동주의 여동생 윤혜원 여사는 2007년 필자의 취재를 접하면서 윤동주의 용정에서의 나날을 떠올렸다. “절구통 위에 귤 궤짝을 올려놓고 웅변 련습을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오빠의 손가락에는 늘 등사잉크가 묻어 있었다” 고 윤 녀사는 회상했다. 친지와 친구들의 증언을 따라가며 용정 은진중학에서의 윤동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축구선수인 문학소년, 잘생긴 외모에 옷차림에도 관심이 커 손수 재봉질을 해서 옷을 맵시나게 고쳐 입는 멋쟁이, 웅변대회에서 1등상을 수상한 경력에다가 문학소년 치고는 의외로 수학마저 잘하고…. 1940년 은진중학 졸업 후 윤동주는 서울의 연희전문을 지망해 고종사촌 송몽규와 당시 간도지역에서는 단 두 사람이 합격했다. 1942년 연희전문을 나와 윤동주는 일본으로 유학, 선후로 도쿄 립교대학 영문과, 도쿄 도지샤대학 영문과에서 수학했다. 그러다 이른바 “사상범” 으로 체포되어 일본 규슈의 후쿠오카형무소에 갇혔고 생체실험으로 추정되는 의문의 주사를 맞고 옥사한다. 윤동주가 비명에 간뒤 근 한달이 지나 아버지에 의해 일본에서부터 그의 골회가 제창로에 위치한 윤동주의 집으로 운송되여 왔다. 1945년 3월 6일 눈보라가 몹시 치는 날 집 앞뜰에서 윤동주의 장례가 치러졌다. 윤동주의 절친한 친구 문익환의 부친 문재린 목사가 영결을 집도했다. 장례식에서 연희전문”문우”잡지에 실렸던 윤동주의 시〈자화상〉과〈새로운 길〉이 랑독되였다. 봄이였지만 추위는 가시지 않고 그날따라 눈보라가 몹시 날려서 동주를 보내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춥게 했다고 한다. 윤동주의 장례식광경을 담은 사진이 보존되여 내려오고있는데 그 사진속에서 애통함에 빠진 윤동주의 친지들을 헤아려 볼수 있다. 윤동주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윤동주의 영정 오른쪽에 서있고 아버지 윤영석은 그 두번째, 동생 일주는 세번째, 어머니 김용은 다섯번째, 녀동생 혜원은 여섯번째, 막내동생 광주는 왼쪽으로 네번째에 서있다. 영정 바로 왼편에 선 이는 장례를 집도했던 문재린 목사이다. 사연많은 윤동주의 용정자택에 대한 확인은 역사의 행간에 묻혀졌던 윤동주가 일본 와세다 대학의 오오무라 마스오 교수에 의해 연변에서 처음 알려지던 1985년에 또 다른 이에 의해 이루어졌다. 윤동주의 은진중학 동기생이었던 서화숙의 동생 서대숙이 용정을 찾으면서 용정에서의 윤동주의 또 하나의 자택이 확인된것이다. 1930∼40년대 용정에 거주했던 서대숙 일가는 윤동주의 용정 자택과 불과 100여 메터 떨어진 길 하나를 사이 두고 살았고 명동학교 설립자인 윤동주의 외삼촌 김약연 선생의 자택과도 역시 길 하나를 사이 두고 있었다. 서대숙은 그 후 미국 꼴롬비아대학교 정치학 박사, 연세대학교 석좌교수, 서울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 일본 게이오대학교 정치학 초빙교수를 거쳐 미국 하와이대학교 정치학 석좌교수를 지내면서 조선 문제 연구 분야에서 세계적인 석학으로 발돋움했다. 그는 명동의 정초인이며 이주민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김약연에 대한 위인전기를 집필해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형인 서화숙뉴욕 한인교회 장로)이 1932년 은진중학에서 재학하고 있었는데 바로 윤동주와 동기생으로 되고 있다. 1985년 이들 일행은 용정으로 행차, 옛날 기거하고있던 용정의 동산 언덕을 찾으면서 더불어 용정에서의 윤동주의 자택을 확인했다. 당시 함께 했던 최근갑 옹은 에서 당시 벌채조합의 조합장으로 있는 일본인 오오마가리(大曲)네 집의 급사로 종살이를 한적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개혁개방으로 국문을 열어젖힌 중국에서 자주 만날수 있었고 조선족역사에 관한 어제의 “산 증인”으로 학술계에 많은 의거 있는 자료를 제공했다. 그들은 김약연 목사의 용정 자택도 더불어 확인할수 있었는데 1930년대 김약연 목사의 자택은 현재 용정 안민가 “해란의 별” 아파트 접수실자리에 위치해 있었다. 최근갑 옹이 확인하는 윤동주의 자택 옛터는 지금의 안민가 동산사회구역의 용정시 기계수리공장의 뜨락으로 변모해 있다. 동산 아파트 단지의 노인네들을 찾아 기계수리공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60년대부터 이 지역에서 살아왔다는 김정호76세)씨에 의하면 이 공장은 50년대에는 고아원이였다가 “항미원조”전쟁이 일자 전쟁에서 부상입은 병사들을 위한 의족공장으로 변모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의족공장이 1978년 연길로 이사를 가고 지금의 기계공장으로 되였다고한다. 기계수리공장은 성이 조씨인 한족 공장장이 경영하는 작은 규모의 공장으로서 주로 지체장애인을 위해 민정국계통에서 차린 기계 부품을 생산하는 공장이였다. 지금은 그 공장마저 조업을 중단하고 그 곳에 주차장이 닦여져 있었다. 주차장 남쪽켠에 지어진 공터가 바로 윤동주의 용정 집터라고 한다. 시인을 꿈꾸는 문학청년 윤동주를 보듬어 안고 그의 시상을 유발시킨 동생 광주가 뛰여놀았을 곳, 처음으로 “동주”라는 필명으로 연길에서 발행하는 “카톨릭소년” 에 동시를 발표했던 곳, 그 유명한 동시”오줌싸개 지도” 를 산출시킨 곳, “초 한 대”등 자신의 시 작품에 처음으로 이름과 날자를 명기한 곳, 문학에 뜻을 두고 연희전문을 지망하면서도 아버지와 설전을 벌린 유명한 일화를 남긴 곳이 바로 이 용정의 자택에서였다. 연변이 낳은 걸출한 민족시인, 이제 한국, 지어 그를 숨지게 한 “적국” 일본 그리고 아세아를 넘나들며 그의 위상이 재조명되고 있지만 그의 생전 거처를 밝히는 표지석 하나 조차 없어 우리의 마음을 아릿하게 했다. 연변으로 관광 오는 한국 유람객들의 자취를 보면 거의 모두가 장백산, 일송정 그리고 윤동주생가로 루트가 이어져 있다. 그중에서 윤동주생가는 관광객들의 필수루트이다. 요즘 용정시 정부의 관심과 투자에 힘 입어 윤동주생가가 위치한 명동촌은 오래만에 새롭게 거듭났다. 윤동주 생가 한 켠에는 기념관이 서고 뜨락에는 시인의 얼굴과 대표작품들을 새긴 석조물들이 세워졌다. 윤동주 송몽규 등이 다녔던 명동학교도 그 원모습대로 복구되었다. 사실 용정에서 윤동주의 자취는 생가외에도 또 여러군데 찾아볼 수 있다. 용정시 제4중이 위치한곳의 은진중학, 지금의 북안소학이 자리한곳의 광명중학, 윤동주 시비가 섰는 용정중학 그 외에도 동산 언덕아래에 있는 시인의 마지막 길을 바랬던 자택등이다. 이 곳들을 발굴하고 명동촌처럼 관심을 몰붓는다면 그야말로 “윤동주 전문코스”를 기대해봐도 좋을듯하다. 따라서 해내외에서 관심높은 우리의 시인에 대한 기념과 그로 인한 관광산업의 시너지 효과를 거둘지 있지 않을가 하는 생각을 윤동주의 용정자택 옛터에서 가져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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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15
  • [연변FC] “천재일우”의 기회, “동산재기”의 청신호
    ■ 김철균 연변대지에 봄이 서서히 다가서고 있다. 단지 자연계의 봄만이 아닌 연변축구에도 “새봄”이 오는 것 같다. 바로 연변천양천팀의 갑급권 복귀가 연변축구의 “새봄”인 것이 아닐까? 지난해 연변천양천팀이 갑급에서 강등한 것이 너무나도 억울하여 세상은 돌고 돌아 연변팀한테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를 준 것 같다. 연변축구ㅡ 돌이켜보면 이렇쿵 저렇쿵 할 얘기들이 많고도 많다. 어떻게 보면 조선인들이 쪽박 차고 두만강을 건너왔을 때부터 당시 청국(清国)이라 불렸던 이 땅에는 축구란 것이 있었다고 한다. 누군가 한민족(韩民族)을 놓고 너무 한(恨)이 많아 한민족이 됐다며 농담삼아 말했다 한다. 당시에도 아마 그러했던가 싶다. 한(恨)이 많아 그 걸 해소할 곳을 찾다가 축구란 놀이가 생기자 발끝에 힘을 주어 어금이빨을 옥물면서 공을 찼다는 설도 있다. 그러던 연변축구가 지난 세기 20년대에 들어서는 다른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무쇠골격 돌근육 소년남아야/ 황황한 대한넋 발휘하여라// 다달았네 다달았네 우리 나라에/ 소년의 활동시대 다달았네// 반일대적 연습하세 후일 공훈 세우세/ 절세영웅 대사업이 우리 목적 아니더냐… 이 때의 연변축구는 반일이 목적이였다. 지금 국가간의 축구경기를 놓고 볼 때 한국대표팀은 일본대표팀한테만은 질 수 없다는 굴강함이 알게 모르게 나타나군 한다. 이는 아마도 지난 세기 20~30년대부터 조선인들한테 형성된 일종의 민족적 오기일 수도 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만주국축구대회와 일만(日满)축구경기에서 늘 간도성축구팀이 우승을 차지, 이 중 일만축구경기시에는 일본이 형편없이 패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 경찰이 권총을 쥐고 심판을 봤다는 설도 있었다. 중국의 현대축구에 “헤이소(黑哨)”라는 것이 있었다면 당시의 축구경기장에는 “권총심판”이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러한 연변축구 ㅡ 연변축구는 “8.15” 광복과 더불어 비로서 조선민족축구로서의 기틀을 잡고 볕을 보게 시작, 1949년 공화국의 창립되면서부터는 광활한 중국대지를 주름잡으며 조선민족축구의 위력을 떨치기도 했다. 1952년 상해에서 있는 전국축구선수권에서 준우승, 1957년 길림성 전업축구팀(연변조선족 위주)의 고고성, 1965년 중국축구 갑급리그(1부 리그)에서의 우승고지 점령… 이렇듯 승승장구하던 연변축구는 몇차례의 큰 좌절을 겪기도 했다. 가장 큰 재난은 “문화대혁명”이었다. 당시 “우승신화”를 엮었던 공신들이 모두 농촌과 공장으로 쫓겨갔다. 이들 중 훈춘시 어느 한족부락으로 하향했던 이광수 선생은 연변대학 체육학부로 올라오기까지 거의 10년이란 세월을 농촌에서 땅과 씨름해야 했다. 문화대혁명의 10년, 이는 연변조선족 축구인들한테 있어서도 힘들고 가슴아픈 10년이였다. 그리고 연변축구가 중국의 1부리그 갑급권(지금의 슈퍼리그)에 복귀하여 입지를 굳히기까지 거의 30년(1994년)이란 노력의 과정을 거쳤다. 그 뒤엔 또 경제상의 어려움으로 2000년엔 강등되어 타성에 선수진 전체가 매각되는 재난을 겪었고 다시 2004년에 갑급권에 복귀했다가 2014년에 재강등하는 등을 번복했다. 지난해 우리 연변축구는 다년간에 거쳐 누적되며 “곪고 곪아 오던 것”이 끝내 성적부진, 선수들의 사기저락, 단조로운 감독의 기전술 등이 강등이란 현실로 노출이 되었다. 하지만 이것이 꼭 나쁜 효과를 나타낸 것만은 아니었다. 피고름을 짜내고 심장이 마르는듯한 고통과 뼈저리는 교훈앞에서 연변의 축구인들은 정신을 차리었다. 연변축구가 지난 세기 50~60연대처럼 중국축구무대를 쥐락펴락하던 시대는 진작 역사로 되었다는 것을 알게 하였고 구단운영시스템이 내지의 규범화된 구단에 비해 떨어져도 한참은 떨어졌다는 것과 또한 본토감독들의 기전술운영술도 재삼 검토해봐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도록 하였다. 연변의 축구인들은 “산전진통)과 비슷한 몸부림속에서 연변축구의 현유페단을 진단했고 향후 진로를 모색하였다. 또한 국가 및 성 해당부문의 어르신들도 연변축구가 천애절벽 낭떨어지에 추락하는 것을 그냥 두고 보지는 않았다. 지난해 말 국가체육총국 유붕(刘鹏) 국장이 동북광야의 강추위도 무릎쓰고 연변을 찾아 연변축구를 부활시킬 대책을 강구하면서 많은 관심을 보이었고 성과 주의 지도일군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 연변축구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리기도 하였다. 희소식은 연속 뒤를 따랐다. 침체되어 있던 연변 장백산천양천팀에 “기적”이 나타났다. 이는 필경 흔하지 않은 중국축구계에서의 “기적”이었다. 지난 1월부터 연변구단의 갑급복귀설이 솔솔 우리의 귀를 즐겁게 “희롱”하더니 드디어 그것이 현실로 되었다. 말그대로 “하느님”이 연변구단에 하사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기회었고 “동산재기”의 청신호였다… 올해 연변구단은 일찍2007년부터 2011까지 한국국가축구대표팀의 수석코치었던 박태하 감독이 사령탑을 맡게 되었다. 쟁쟁한 경력의 소유자 박태하 감독이다. 올해는 양띠해다. 필자는 “사자가 이끄는 양떼는 사자무리로 될 수 있다”는 말을 자주 써왔다. 한국대표팀을 맡았던 히딩크가 그랬는가 하면 연변팀을 맡았던 최은택과 고훈이 그랬다. 100%는 아니었지만 대체적으로 그랬다. 하다면 호랑이가 이끄는 양떼 역시 호랑이무리로 될 수 있다는 말로 정리된다. “호랑이가 이끄는 호랑이무리”ㅡ 참 그럴듯한 표현이다. 2015년 중국갑급시즌에서의 연변팀이 명실에 부합되는 “호랑이구단”으로 군림하기를 기대해본다.
    • 스포츠
    2015-02-14
  • [김혁 칼럼] “드래곤” 신채호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일제강점기 사학자․언론인․독립운동가 신채호(1880~1936). 1 애니메이션 “드래곤 길들이기2”가 제72회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장편 애니메이션상을 수상하는 영예를 안았다. 또 한번 드래곤 소재가 애니메이션 영역에서 어필한 것이다. 중국에서도 며칠전 드래곤을 소재로 한3D 애니메이션 “드래곤네스트 (龍之谷)” 가 개봉, 흥행을 보이고있다. 드래곤 소설도 다시 강세를 보여 판타지 소설 “드래곤 라자”의 해외 인세 수입이 5억원을 돌파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1998년 출간돼 한국 판타지 문학 붐을 주도, 지금까지 모두 130만부 이상 팔려나간 이 드래곤 소설 은2005년 일본에서 출간돼 50만부, 2007년 타이완에 출간돼 30만부가 팔렸으며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K 롤링과 함께 “올해의 해외 인기작가 20인”에 선정되였다. 게임, 만화, 라디오 드라마로 제작된 데 이어 고등학교 교과서에 수록되기도 했다. 드래곤은 소설과 영화에서는 자주 등장하는 소재이다. "이용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기 쉽다는 특징으로 최근에는 모바일 게임에까지도 단골소재로 등장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분석한다. 2 80여 년전에 이미 우리 작가가 쓴 드래곤 소설이 있다. “용과 용의 대격전”이라는 제목의 신채호(申采浩)의 장편소설, 1928년에 창작되었다. 신채호가 베이징에서 망명 생활 말기에 유고로 남긴 이 작품은 우화형태의 혁명소설로아나키즘(개인을 지배하는 모든 정치 조직이나 권력, 사회적 권위를 부정하고 개인의 자유와 평등, 정의, 형제애를 실현하고자 하는 사상이나 운동)의 교본(敎本)으로 알려져 있다. 동양의 드래곤과 서양의 드래곤이 격투를 벌이는 내용이다. 민중의 편에서 동양의 용 미리와 맞서 싸우는 서양의 용 드래곤. 미리가 끊임없이 민중을 억누르는 봉건주의 압제자의 대표라면, 드래곤은 지상의 민중혁명을 구현해 가는 지도자로 상징된다. 조선 말기의 무력한 봉건왕조와 사대부에 실망한 단재 선생은 룡의 꿈틀임에 빗대어 민족의 활로를 소망하였던 듯하다. 3 오는 2월 21일은 일제강점기 역사학자, 독립운동가, 언론인, 문학인 등 팔방에서 이름을 떨친 단재 신채호선생의 79주기가 되는 날이다. 그이의 일대기를 반추해 보았다. 신채호는 1880년 12월 8일 충청남도 대덕군 산내면 어남리에서 신광식과 밀양 박씨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호는 단재(丹齋), 한놈, 연시몽인 등을 필명으로 사용하였다. 8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할아버지 신성우 슬하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9세에 자치통감을 배우고, 14세에는 사서삼경을 모두 마쳐 신동이라는 소리를 들었다. 삼국지와 수호지를 애독하고 한시를 읊을 정도로 한문실력이 높아졌다. 19세에 나던 해인1898년 성균관에 입학하였으며 독립협회 활동을 하여 투옥을 당하기도 하는 등 이 무렵부터 애국계몽활동을 시작하였다. 1905년, 황성신문의 논설위원으로 위촉되어 장지연이 을사늑약에 반대하는 “시일야방성대곡”의 집필을 도왔으며 장지연이 투옥되자 그를 대신해서 황성신문을 이끌었다. 이후 황성신문이 폐간되자 1906년에 박은식의 도움으로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 초빙되었다. 이 시기 신채호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펼쳐 많은 논설과 전기를 다수 출판하는 등 활발하게 언론 활동을 하였다. 1907년에는 안창호가 주도하여 비밀리에 결성한 신민회에 가입하여 신민회 취지문을 작성하였으며,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국권의 피탈이 확실시되자 신채호는 애국지사들과 협의하여 1910년 4월,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중국 칭다오에서 안창호, 이갑 등 신민회의 간부들과 독립군 기지 창건 문제를 논의하여 만주 밀산현에 신한민촌을 만들어 “독립군기지로 활용하자”는 계획을 세웠다. 9월, 러시아 제국의 블라디보스토크 인근에서 신한촌이 형성되는데 참여하였으며 연해주에서 발간된 한글 신문인 해조신문의 발행에도 참여했다. 1911년 12월 권업회라는 교민단체를 조직하고 권업신문을 발행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1912년에는 광복회를 만들어 활동하였다. 1915년 이회영의 권고로 북경으로 옮겨 1919년까지 4년간 체류하였다. 북경에 체류하면서 “조선사통론”, “조선사문화편”, “사상변천편”, “강역고”, “인물고” 등을 집필하였다. 또한 신규식과 함께 신한청년단을 조직하고 박달학원을 설립하여 한인 청년들의 단결과 교육에 힘썼다. 1919년 2월에 일명 “무오독립선언서”에 서명하였으며, 3.1 운동이 일어나자, 상해로 가서 “29인 모임”에 참석하여 임시정부를 발기하기 위한 회의인 임시의정원을 4월 11일 개회하였다. 1921년 1월, 북경에서 독립운동 잡지 월간 “천고”를 창간하였다. 1922년 그는 상하이에 와서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에도 참석하였다. 1923년 창조파 임시정부가 러시아에서 해체되자, 신채호는 실의와 좌절에 빠져 무정부주의와 불교에 관심을 더 깊이 보이게 되었고, 북경의 순치문 안에 있는 석등암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이후 국사연구에 뜻을 더 깊게 두고 연구에 전념하였다. 1922년 중국역사연구법을 쓴 양계초의 역사연구 방법에 영향을 받아 “조선상고사”를 집필하였다. 1923년 신채호는 의열단장 김원봉의 요청에 따라 상하이로 와서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의열단 선언, 즉 “조선혁명선언”을 집필했다. 1928년 4월 그는 북경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 북경회의”를 조직하였고, 이 회의에서 무정부주의동방연맹의 선전기관을 설립하고 일제의 관공서를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제조소를 설립하기로 결의하였다. 잡지발행을 위한 자금을 가지러 5월 8일 대만의 기륭항에 상륙하다가 체포되어 7개월간 구속되었으며 재판에서는 “나라를 찾기 위하여 취하는 수단은 모두 정당한 것이니 사기가 아니며 민족을 위하여 도둑질을 할지라도 부끄럼이나 거리낌이 없다”고 갈파하였다. 1929년 5월, 신채호는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언도를 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 1936년 2월 18일, 감옥 독방에서 뇌일혈로 쓰러졌고 사흘 뒤 사망하였다. 용띠로 태어나 평생 민족을 위한 용틀임을 했던 단재 신채호 선생, 그의 행동과 오래된 판타지 작품 속에서 우리는 이 시대 우리가 나아가야 할 한 방향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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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05
  • [김혁 칼럼] “언브로큰” 그리고 윤동주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1 화제의 영화 “언브로큰(Unbroken)”이 지난 주말 드디어 중국에서 상영되였다. 중국에서는 영화에 앞서 지난 2011년경에 원작소설이 이미 출간되었고 이번 영화의 개봉에 맞추어 소설이 새로운 디자인으로 재출간되었다. 할리우드의 톱스타 안젤리나 졸리가 출연 대신 연출한 영화는 상영전부터 일본 극우들의 온갖 음해와 날조 왜곡으로 년초부터 화제가 되었다. “언브로큰”의 개봉 소식에 일본 극우단체들이 보이콧에 나서는가 하면, 안젤리나 졸리의 일본입국금지를 요구하는 서명운동을 벌이는 등등 그 행태가 도를 넘어 상식을 벗어난 행동으로 이어지고 있다. 게다가 영화에 출연한 재일 교포도 더불어 곤욕을 치르고있다고 한다. 일본 우익들이 이 영화에 발끈한 원인은 무엇일가? “언브로큰”은2010년 발간된 후 180주 동안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록에 올랐던 미국 작가 로라 힐렌브랜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실존 인물인 루이 잠페리니의 실화를 스크린에 담은 작품이다. 1936년 베를린 올림픽에 역대 최연소 국가대표로 참가한 미국의 육상선수였던 루이 잠페리니는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해 작전을 수행하던중 전투기 고장으로 태평양에 추락해 표류하다가 일본 포로 수용소에 끌려가게된다. 영화는 주인공이 일본 포로 수용소에서 850일 동안 겪게되는 무자비한 역경의 과정이 담겼다. 제2차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소재로 했기에 영화가 상영전부터 일본우익의 심기를 건드렸던 것이다. 하지만 막상 영화를 보니 영화적 제약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일본군이 저지른 비인간적인 만행을 대부분 다루지 않아 원작에 비해 훨씬 관대했다. 원작에 일본군의 중국 난징대학살 문제나, 십여번 나오던 위안부 얘기도 생략됐다. 일본군이 잠페리니를 비롯한 미군 포로들의 정맥에 희뿌연 코코넛주스를 놓으며 생체 실험을 한 얘기도 영화에는 나오지 않는다. 원작에는 전범 용의자였지만 수년 뒤에는 일본 총리가 됐던 기시 노부스케와 관련된 일화도 들어있다. 기시 노부스케는 현 아베 일본 총리의 외조부이다. 2 2차세계대전 당시 영화에서 나오는 루이 젬페리와 비슷한 경력의 사건이 또 하나 있다. 1945년 5월, 미군 B29 폭격기에 타고 있던 승무원 11명이 추락, 일본군에 체포되었고 이들 중 여섯명은 산 채로 해부된뒤 소각되었다. 규슈제대 의학부는 이들을 상대로 산 사람의 혈액을 뽑아낸 뒤 바다물을 주입하는 생체실험을 진행했다. 미국 정부기록보존소(NARA)에서 요코하마 전범 재판 기록에는 후쿠오카에 있는 규슈제대에서 실시한 미군 대상 생체실험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영화를 보면서 내내 떠오르는 인물이 있었다. 뜬금없는 비약일지 몰라도 바로 겨레가 애대하는 민족시인 윤동주였다. 3 일제의 마수에 떨어진 미군포로들이 비운을 겪던 바로 같은해인 1945년 이른봄의 어느 날, 후쿠오카형무소의 한 독방 감옥에서 외마디 비명이 내질러진다. 이는 윤동주라는 한 문학청년이 이 지상에 남긴 마지막 절규었다. 1943년 여름방학을 앞두고 사상범으로 피체된 윤동주와 송몽규는 “독립운동”이라는 죄목으로 후코오카 형무소에 갇혔다. 1945년 용정의 고향집으로 매 "2월 16일 동주사망. 시체를 가져가라."라는 비보가 날아 들었다. 윤동주의 시신을 거두기 위해 아버지 윤영석은 일본으로 건너가 사촌인 윤영춘과 함께 후쿠오카 형무소로 갔다. 두 사람은 먼저 살아 있는 송몽규를 면회했다. 피골이 상접한 송몽규는 간수의 눈을 피해 “저놈들이 주사를 놓아서 이 모양이 됐고, 동주도 이 주사를 맞고….”라고 간신히 한 마디를 남겼다. 후쿠오카 형무소는 규슈대학 의학부와 관련이 있는 곳으로 이곳 형무소에서 생체실험이 이루어졌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윤영석이 후코오카 감옥에 갔을 때에도 푸른 죄수복을 입은 조선인 청년 50여명이 강제 주사를 맞기 위해 줄 서 있는것이 목격되었다. 가족이 윤동주의 유해를 찾아간지 한달도 되지 않은 3월7일 송몽규 역시 감옥에서 꼭 같은 증세로 숨을 거두었다. “언브로큰”에서 코코넛을 미군포로에게 주입했듯이 윤동주와 송몽규가 맞았다는 주사에 강력한 의문의 초점이 모아진다. 이에 대해 일본인 평론가 고노 에이지 는 “그 의문의 주사”는 당시 규슈제국대학에서 실험하고 있던 “혈장 대용 생리식염수”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 당시 힘겹게 전쟁을 치르고 있던 일제는 부족한 수혈용 혈액을 대신할 물질을 찾고 있었다는 것이다. 약리학자의 의견에 따르면 인체에 바다물을 주입할 경우, “바다물에 포함된 동물성 플랑크톤 등으로 인한 세균 감염이 발생할 수 있고, 뇌까지 혈액이 전달되면 혈액이 뇌로 빠져나오게 되는데 이 때의 증상이 뇌일혈과 같다.”고 한다. 같은 시기 후쿠오카 감옥에서 수감자들이 주사를 맞은뒤 받았다는 “암산 테스트”는 현대의학에서도 임상실험의 부작용을 알아보기 위해 널리 사용하는 방법이라고 한다. 암산은 “신경기능을 통합적으로 판단하기 위한 판단 도구”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의 전시행정실록을 보면 후쿠오카형무소에서는 1943년 64명, 1944년 131명, 그리고 1945년에는 259 명이 옥사하였다. 이러한 수치는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재소자들을 상대로 대규모의 생체실험을 했으리라는 심증을 안겨준다. 그 무간나락에서 문학청년 윤동주가 극악한 일제의 생체실험의 제물이 되었된 것이다. 올해는 일본의 패전 70주년, 민족의 해방 70주년이다. 또한 윤동주의 옥사 70주기이기도 하다. 할리우드의 한편의 영화를 계기로 중.한·일 과거사전쟁은 이제 미·일 역사전쟁으로 확전되고 있는 가운데 다시 일제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절한 우리의 시인을 다시금 환기해 본다. 이 처럼 일본으로서는 감추고 싶은 치부와도 같은 전쟁의 역사가 우리 시인의 애닲은 죽음에도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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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2-05
  • [김혁 칼럼] 스크린에 오르는 정율성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1 베이징 “해안화청”텔레비드라마유한회사와 한국 동성제작사(사)가 지난 1월 16일 베이징에서 제작인과 배우들이 모인 가운데 영화 “청년 정율성” 제작사인회를 가졌다. 영화는 약관의 나이에 중국으로 건너가 음악과 혁명의 도가니에 빠져든 정율성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주선으로 다룰 예정이다. 영화에는 한국과 중국의 젊은 배우들을 기용, 이미 정율성 역을 맡을 배우와 부인 정설송을 분할 주요 배우들이 선정되였다. 영화는 3월 한국의 광주와 중국의 옌안 등지에서 곧 크랭크인 하게 된다. 영화이 제작측인 “해안화청” 회사는 지난해 1월 “파이판(派饭)”이라는 음식과 생활 소재의 코미디영화로 한국에 진출, 서울국제청소년영화제에서 관객들의 호평을 얻은바 있다. 2 1914년 7월 7일, 한국 전라남도 광주남구 양림정에서 태여났다. 1933년, 3.1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가 일제의 탄압에 중국으로 망명한 형들을 따라 부산, 일본, 상하이를 거쳐 중국난징에 이르렀다. 난징에서 “의열단”이 꾸린 조선혁명간부학교에 입학하여 군사학과를 배우고 이어 조선민족혁명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반일활동을 하는 한편 시간을 짜내 러시아인 크리노와교수에게서 성악을 배웠다. 1937년 열아홉 살의 정율성은 바이올린과 만돌린 그리고 “세계명곡집”을 지니고 간난신고를 겪으며 옌안에 도착하였다. 옌안에서 루쉰예술학원을 나왔고 “연수요(延水谣)”, “항전돌격운동가”, “팔로군대합창” 등 50여수의 악곡을 창작하였다. 격정과 기백이 차넘치는 그의 노래는 군민의 항일의지를 북돋우어주면서 널리 유전되였다. 그후 그의 노래는 “중국인민해방군행진곡”으로, 1988년에 이르러서는 “중국인민해방군군가”로 채택되었다. 1990년 9월22일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개막식은 바로 정율성작곡의 이 노래의 연주로 시작됐다. 옌안 시절 훗날 중국 최초의여성대사로 주 덴마크, 주 네덜란드대사가 된 정설송과 결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슬하에 딸 정소제를 두었다. 옌안시기 정율성은 무정장군을 따라 조선의용군 소재지인 태항산근저지로 가서 조선혁명군사학교 교육장을 담임하였다. 그는 학생들을 이끌고 탄우가 비발치는 전쟁터에서 선전을 벌리기도 하고 대중가요창작활동도 펼쳐 나갔다. 그가 창작한 “조선의용군행진곡”과 ”혁명가”등은 중국의 허베이와 둥베이 항일근거지의 조선의용군들 속에서 널리 불려졌다. 1945년 8.15해방을 맞은 뒤 정율성은 조선의용군과 함께 조선으로 나가 황해도 선전부장을 지냈으며, 해주음악전문학교를 세웠다. 보안간부훈련대대부협주단(조선인민군협주단의 전신)을 창건하여 초대 단장을 역임했으며 조선국립음악대학 작곡학부장에 부임했다. 그 몇 년사이 ”두만강”, “동해어부” 등 30수의 가곡을 창작, 그중 “조선인민군군가”를 작곡했다. 이로서 정율성은 두 나라 군가 작곡자로 세계에 유례없는 기록을 남긴다. 1952년부터 정율성은 중국에 돌아와 베이징인민예술극원, 중앙악단에서 전업작곡가로 있었다. 이 시기 그는 중국의 윈난, 따리등 오지를 찾아다니며 민요수집에 전력하였고 아이들을 위하여 ”평화의 비둘기”등 명동요를 창작하였으며 또 중국국가주석 모택동의 시사 34수에 곡을 붙이기도 했다. 10년의 “문화대혁명”이 결속되자 창작의 봄을 맞이했던 정율성은1976년 12월 7일 베이징 교외의 강에서 물고기를 낚다가 뇌익혈로 쓰러졌다. 향년 62세였다. 1978년 베이징음악출판사에서 “정율성가곡선”이 출판되였고 2009년 9월 “새 중국창립에 기여가 돌출한 영웅모범인물 100명”중의 한 사람으로 당선되었다. 40여년의 음악생애에서 각종 쟝르의 음악작품 360여수를 창작한 정율성은 중국현대음악사의 한 획을 그으면서 영원한 “인민음악가”로 추앙받고있다. 3 지난해7월 초 방한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서울대 강연에서 중·한 우의의 상징으로 정율성을 언급하다시피 중국에서의 정율성의 위상은 높다. 정율성의 일대기는 중국에서 일찍 영화로 제작되어 스크린에 오른바 있다. 1992년 북한의 “2.8”예술영화촬영소에서 “음악가 정율성”을 전, 후편 긴 편폭으로 제작했다. 영화는 1950년대 북한으로 간 정율성이 조선인민군협주단의 첫 단장으로 되여 음악가로 성장하는 과정을 실재한 사실에 기초하여 그려내였다. 2002년 중국에서도 정율성 관련 영화 “태양을 향하여”를 출품했다. 연변 조선족 자치주 성립 50주년을 기념해2002년에 제작된 영화에는 중국영화계의 쟁쟁한 일군들이 대거 투입되였다. 감독으로는 중국드라마부분 최고의 상인 “금독수리”상과 “비천”상을 석권한 장춘영화촬영소의 송강파 감독과 조선족 감독인 박준희가 메가폰을 잡았고 중국영화계 최고의 상인 “금계상”과 “백화상” 수상자들이 정율성과 부인 부인 정설송역을 맡았다. 영화는 옌안에서 뿐만 아니라 베이징, 텐진, 창춘 그리고 연변지역을 폭넓게 전전하면서 외경을 찍었다. 영화는 만들어진후 평양국제영화제에서 특별상을 받았고 한국광주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되었다. 한국에서는 지금도 정율성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 정율성의 활동한 주무대가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율성선생이 한국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반일에 투신했고 음악을 무기로 우리 민족의 혼을 전해 세계인을 감동 시킨 음악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새롭게 제작되는 또 한부의 정율성 관련 영화가 중국 나아가 남북이 모두 애대하는 음악가에 대한 오마주(다른 작가나 감독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 특정 대사나 장면 등을 인용하는 일)영화로 스크린을 수놓기를 바라며, 그이의 생애 그리고 그이의 음악이 하루 빨리 한국에서도 알려 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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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7
  • “미꾸라지”의 악행과 우리의 책임
    ■ 채영춘 연길호적의 재한조선족노무자 박모가 조선족내연녀를 토막 살인하고 유기해버린 끔찍한 범행이 터진지 불과 한달도 안돼 사귀던 탈북녀성을 살해한 참사가 또 다른 한 조선족노무자에 의해 저질러져 한국사회를 경악케하고 있다.재작년, 내몽골호적의 조선족 오모가 빚어낸 토막살인사건 후 조선족에 대해 부정적시각을 가졌던 한국인이 47%로부터 70%로 급증했다고 들었다. 당시 일부 한국네티즌들은 그 무슨 중국동포추방운동마저 들먹이는 헤프닝까지 벌렸던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 여파가 가라앉기도 전에 조선족에 의한 범행이 연달아 재연된 것이다. 연일 한국네티즌들이 쏟아내는 댓글이 인터넷 게시판을 난무하면서 조선족은 이제 비난의 대상보다 공포의 대상으로 요괴화된다는 느낌이다.미꾸라지 한마리가 한강물을 다 흐린다. 부레이크없는 한두 마리 “미꾸라지”의 저돌적인 악행, 이럴 때마다 재한조선족은 물론 중국본토의 조선족들은 그야말로 골치거리 악동을 자식으로 잘못 둔 부모가 학교에 불려가 문책당하는 그런 고약한 기분이다.필자는 2년 전 내몽골조선족노무자가 한국에서 저지른 범행을 두고 쓴 칼럼에서 우리에게는 “결코 먼산의 불이 아니다”는 점을 지적했던바 있다. 재한연변조선족노무자들이 향후 계속 늘어나게 될 추세를 감안할 때 문제의 “미꾸라지”악행이 번질 공간은 어쩌면 더 넓어질수도 있다. 악한이 조선족이라는 단 한가지 이유에서 애꿏은 재한조선족과 중국본토의 조선족 전체가 타매당하고 문책을 받을수는 없다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일 뿐, 적어도 조선족 전체 이미지의 추락은 불보듯 뻔하다. 우리는 대응책이 있어야 한다.“미꾸라지”의 악행때문에 “석고대죄의 피해망상증”이나 “수수방관의 무책임합병증”에 시달리는 것은 모두 바람직하지 않다. 광범한 조선족의 권익과 이미지를 수호하는 그같은 책임논적 차원에서 우리는 어설픈 관객이 아니라 소신있는 감당자의 존재감을 보여야한다는게 필자의 소견이다.문제의 “미꾸라지”현상에서 두가지 상황에 주목해야 한다. 그 하나는 이미 본토에서 성체로 된 “미꾸라지”의 해외침투에 대비한 원천봉쇄이다. 마약, 밀매, 다단계판매, 사기행각 등 범죄행위로 나라의 법질서와는 담을 쌓고 성실한 노동은 념두에 없으며 노무자자격이 전무한 이런”불량기록”자들의 한국입국 자체가 50여만 재한조선족들에게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다. 이런자들에 대한 해관의 철저한 검색은 물론 가짜 위조여권거래를 원천차단하는 단호함이 절박하다. 얼마전 토막살인사건 조선족용의자가 휴대한 여권도 가짜였다는 점, 이미 구치소 수감경력이 있는 전과자였다는 점들은 주시해야할 대목이다. 우리 나라 하천에서 성체로 자란 “미꾸라지”가 이국 하천으로 침투하여 재한조선족들을 골탕먹이지 못하게 사전에 막아야 한다.다음 하나는 아직은 성체의 “미꾸라지”가 아니더라도 그쪽으로 번질 소지가 다분한 노무자들 성향에 대비한 건강한 해외생활풍조의 구축으로 “미꾸라지”바이러스가 재한조선족 사회에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는 것이다.재한조선족들은 하루빨리 가난의 때를 벗고 잘살아 보려는 꿈을 안고서 부모와 안해(남편), 자식을 떠나 한국이라는 이 낯선 땅을 밟았다. 대다수 조선족들은 가족을 위하여 인욕부중 (忍辱负重)의 헌신적인 노동으로 재부를 모으고 있다. 하지만 일부 로무자들이 한국입국시의 초심을 잃고 피땀으로 번 돈을 탕진하면서 방탕한 생활풍조의 포로가 돼간다는 메시지도 간단없이 들려와 안타깝다. 이는 대체로 “미꾸라지”바이러스감염의 초기증상으로 되고있기 때문이다.한 조선족노무자의 말이다.“중국동포 밀집지역인 서울시의 대림동부근과 안산시의 원곡동일대에서는 재한조선족들이 삼삼오오 떼를 지어 중국식당과 노래방을 누비며 2차, 3차를 즐기는 것을 볼수 있다. 이들 대부분이 하루종일 숙취 상태여서 걸음걸이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웃고 떠들어대고 노상방뇨를 하는 등 추태를 새벽까지 연출한다”요즘 재한조선족동창생들의 삶을 다룬 문학작품을 읽고 커다란 충격에 빠졌던적이 있다. 작품에 등장한“애인을 수없이 바꾸는 ×××, 집에는 일전한푼 보내지 않고 이발 두대를 하는데 천오백만원을 썼다는 ××, 중국에 처자를 두고도 한국에서 녀자를 얻어 아들을 보았다는 ×××, 사흘저녁에 삼백만원의 돈을 날린 ××” 등 조선족 “반편”들을 어찌 터무니없는 허구 인물이라고만 할수 있겠는가?물론 일부의 조선족노무자 현상이라지만 문제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있다. 만약 이같은 상황이 지속되도록 방치한다면 “미꾸라지”바이러스감염자들의 무서운 광기로 이어지는것은 시간문제이다. 이런 상황에 부레이크를 걸어야 할 사람은 우리 재한조선족 자신일수밖에 없다.중한수교 20여년, 그 동안 재한조선족사회는 30여개 민간단체의 결성으로 조선족권익수호와 조선족이미지 향상이라는 무거운 화제를 풀어나가면서 조선족 구심점의 형성을 위해 뼈를 깎는 각고의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최근 몇몇 “미꾸라지”의 악행으로 큰 곤욕을 치르고 있다. 이같은 시련을 헤쳐나가기 위한 출로모색과 고민으로 몹시 힘들어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힘을 실어주어야 한다.공청단연변주위에서 발족시킨 재한차세대사업위, 주정부 한국대표처, 중국본토 및 재한조선족동포언론사와 재한조선족민간단체 사이의 폭넓은 소통과 협력이 절실할 때라고 생각한다. 특히 내외 언론의 여론리더역할이 각별히 요청된다. 조선족의 선행(善行)보다 악행(恶行)에 집착하는 일부 한국언론의 선정적 보도관행에 대응하여 조선족을 정확히 알리고 조선족사회의 긍정적이고 건강한 모습을 부각시키는 사명을 우리 조선족언론이 짊어져야 한다. 황소와 같은 근면함으로 역경을 이겨내면서 한국사회의 인정을 받고 점차 한국사회 경제엔진의 한축으로 되고있는 조선족노무자들이야말로 재한조선족의 주류가 아닐가? 이들의 감동을 한국사회에 널리 파급시키는 우리 언론의 노력이 당면 “미꾸라지”가 흐려놓은 물을 정화시키는 해법의 하나로 생각한다.개별적인 ”미꾸라지”의 저돌적인 악행에 대한 사전협동 제압, 재한조선족사회에 독버섯으로 만연될 “미꾸라지”바이러스에 대비한 건강한 해외생활풍토구축 등은 재한조선족사회와 중국본토의 조선족사회가 손잡고 풀어나가야 할 무거운 과제임은 틀림없다. 이 과정에서 한국주류사회의 이해와 동조, 협력을 이끌어내는것도 우리가 적극 감당해야 할 몫이다.문제의 “미꾸라지”들에 의해 추락되는 재한조선족의 이미지를 재건하고 조선족에 대한 한국인들의 비뚠 시각을 교정하며 중한전략적파트너협력관계에 걸맞는 건강하고 활력이 넘치는 재한조선족사회를 출범시키는 일, 바로 지금부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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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1-23
  • [김혁 칼럼] 731 닷컴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1 731이라는 숫자가 악마의 기호처럼 우리들의 마음 속에 섬찟하게 각인 된 건 지난 1980년대의 일이다. 헤이룽장성 조선족출판사에서 “악마의 낙원”이라는 책자를 출간,일본작가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신작은 조선족 독자들중에서 그야말로 토네이도 급 반응을 일으켰다. 당시 조선족 독자층에서는 추리물이 상당히 유행되었는데 모든 조선족 간행물에서는 다투어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추리소설을 싣곤했다. 그의 대표작 “인간의 증명”을 각색한 영화도 전국각지 영화관에서 상영되었고 영화의 삽곡 “초모자의 노래”가 네 거리의 스피카를 타고 울려퍼졌다. 어찌보면 모리무라 세이이치의 작품이 잡지발행의 보증수표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동안 독자들 중에서는 “모리무라 붐”이 일었었다. 또 한 편의 정채로운 추리소설을 기대하고 “악마의 낙원”을 펼쳤지만 이번의 작품은 추리물이 아니라 다큐물이었다. 처음에는 좀 실망한듯 했지만 독자들은 인차 책에 빠져들었다. 커다란 공포와 경악 속에 그 책을 접했다. 작품은 하바로프스크 전범 재판에서 드러난 일본군731 부대가 자행한 생체실험이라는 경악한 실상을 다루고있었다. 작품은 일본에서1982년에 연재되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다가 중문으로 번역, 1985년경에 조선족독자들에게도 알려 졌으니 당시 낙후한 우리 말 출판풍토에서 보면 그야말로 신속히 나온 책이었다. 일본판본의 원제는 “악마의 포식”, 중문으로 번역하면서 “악마의 낙원”으로 개칭되여 나왔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일본 731 부대나 일본군의 생체실험에 대해서는 일제에 의해 가장 큰 상처를 입은 아세아 여러나라에서 일반에 까지 알려지지 않은 극비(極秘)의 실상이었다. 이 책의 출간을 계기로731 부대가 저지른 반인륜적인 만행이 세상에 공개되었고 세상은 경악으로 입을 ‘하누라지’가 다 보이게 딱 벌리고 말았다. 2 악명 높은 ‘731부대’의 만행을 폭로하기 위한 인터넷 박물관(www.731yz.com)이 중국에서 개설되었다. 중국 헤이룽장성 정부가 하얼빈시에 있는 ‘일본군 731부대 죄증(罪證) 진열관’에 의뢰해 개설 한 사이트는 하얼빈에 남아 있는 731부대 사령부 등 유적 현황과 이 부대가 자행한 만행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을 1천700여 점의 문서자료와 1000여장의 사진으로 소개하고 있다. 중국 당국은 2015년 “항일전쟁 승리” 70주년, 2차 세계대전 종전 70주년을 앞두고 일제가 포로들을 상대로 생체실험을 자행했던 ‘731부대’ 유적을 최고 등급인 ‘AAAAA급’까지 5단계로 격상시킨 뒤에 이어 731부대의 생체실험 만행을 입증하는 증거물을 새해 녀초부터 추가로 육속 공개하고 있다. 대표적인 세균전 부대인 731부대의 정식 명칭은 “관동군 방역급수부”로, 1936년부터 1945년까지 중국 헤이룽장성 할빈 지역에 주둔하며 생체 해부실험과 냉동실험등을 자행했다. 중국 학계는 현재까지 발견된 일본 측 과거 기록물 등을 토대로 731부대의 생체 실험 희생자가 최소 30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보고 있으며 당시 20개 이상 성(省), 시(市)에서 161차례에 걸쳐 세균무기 공격을 감행해 237만명을 감염시킨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생체실험 희생자들 중에는 조선인도 적지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지린성 기록보관소는 일제 관동군이 패주하면서 미처 소각하지 못하고 땅 속에 묻은 이들 문서를 분석한 결과 최소한 372명의 중국인, 조선인, 러시아인 등이 731부대로 “특별이송” 돼 생체실험 등 세균 무기 개발의 도구로 씌였다고 발표했다. 관동군헌병대가 1938년 1월 제정한 “특별이송에 관한 통첩”은 이송 대상자인 범죄자를 크게 간첩(파괴분자)과 사상범(민족해방운동가 및 공산주의운동가) 두 종류로 구분하고 있어 일제가 독립투사 등을 생체 실험도구로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이 중 조선인 4명을 포함한 318명에 관해서는 이름과 별명 공작명 원적 출생지 나이 직업 주소 활동범위 수집정보 학력 체포장소 및 시간, 731부대 이송시기 등이 상세히 밝혀졌다. 조선인 6명중 신원이 나타난 4명은- 이기수(李基洙)ㆍ28ㆍ함북 신흥군 동흥면ㆍ1941년 7월20일 체포) 한성진(韓成鎭. 30ㆍ함북 경성군ㆍ1943년 6월25일 체포) 김성서(金聖瑞. 함북 길주군ㆍ1943년 7월31일 체포) 고창율(高昌律ㆍ42 강원 회양군 난곡면ㆍ1941년 7월25일 체포) 등이다. 이들은 모두 지금의 연변조선족자치주 훈춘(琿春)에서 체포된 것으로 기록됐다. 이 문건은 731문제 중국전문가들과 김성민(조선족) 731연구소장이 20여년에 걸쳐 중앙과 헤이룽장성, 지린성 등의 문서 보관소에서 찾아 냈다. 이 문서는 일본 관동군 헌병사령부 사령관이 서명해 발송한 것으로 표지에는 “특별이송”과 “절밀(絶密)”이라고 적혀 있다. 3 지난해 731 이라는 숫자가 적힌 자위대 훈련기에 올라타 중국, 한국등 동북 아시안들의 공분을 불러 일으켰던 아베의 나락을 향한 국우행보는 계속 되고 있다. 신세대 정치 주역이라는 아베는 앞장서서 자신들의 침략 력사를 부인하고 각가지 기행과 망언으로 아시아의 상처를 들쑤신다. 731이라는 숫자가 적혀진 훈련기를 타고 웃고있는 아베는 그 수자에 얼마나 많은 아시아인들의 피와 눈물이 배어있는지 모를가? 중국 외교부에서 일침을 가하고 있다싶이 “진상을 감추려고 하다가 도리여 드러 난다, 닦으면 닦을수록 검어질 뿐이다'(欲盖彌彰 越抹越黑)” 아베는 정계에 금방 나온 황구지작(黃口之雀. 입술이 노란 새끼 참새, 풋내기를 이르는 말)이 아니다. 그는 731부대가 중국 및 아시아 여러개 국에 대해 저지른 악행에 대해 분명 알고 있다. 하지만 진상을 덮어 감추려 하면서 인류양심과 국제적 도리와 위배된 잘못된 역사관을 완고하게 견지하고 있다. 아베의 행각은 그야말로 인류의 이성과 양심에 대한 새로운 “생체실험”이다. 생체실험 희생자들의 원혼(寃魂)이 아직도 거치른 만주의 옛 벌판에서 떠돌고 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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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5-0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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