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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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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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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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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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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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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역사만필] 영화 “암살”의 여주인공과 “간도참변”
    ●김 혁 (재중동포, 역사칼럼니스트)   한국영화의 흥행신화를 다시 쓰면서 흥행가도를 달리고 있는 영화 “암살”에서 톱스타 전지현이 주연한 안옥윤은 “간도참변”에서 어머니를 잃는다.  또 한 부의 의열단활동을 다룬 영화 “아나키스트” (개봉: 2000.04.29, 감독: 유영식 출연: 장동건, 정준호, 김상중, 이범수, 김인권)에서도 주인공 상구는 경신년 간도 대학살에서 친지를 잃고 상해로 와서 의열단에 가입한다.   “간도참변”은 “경신간도학살사건”이라고도 불린다. 1920년 10월 21일부터 26일까지 5일간 일어났던 청산리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일본군은 그 보복으로 한인사회· 항일단체. 학교· 교회 등을 초토화시켰다. 간도참변으로 한국인 3,700여 명이 피살되었다고 전해지며, 이 참변으로 간도를 포함한 만주 지역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였던 한인 사회 및 항일단체들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간도참변”중에서도 가장 비참했던 사건은 “장암동 학살사건”이다. 한국의 “제암리 학살사건”에 비견되는 사건으로 “간도참변을 떠올리면 모두 “장암동”부터 떠올린다.  경신년간도대학살의 현장을 찾았다.    피로 물든 장암촌   청산리, 봉오동 대첩에서 연전연승한 독립군은 일본군과 맞대결을 계속하는 것이 불리하다는 판단에서 만주벌의 북쪽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일본군의 대대적인 보복전을 피하고 거듭되는 전투에서 피로해진 부하들의 건강회복이 필요해서 취한 조처였다.   한편 독립군에게 참패한 일본군은 보복의 칼날을 뽑아들었다. 일제는1920년 10월부터 3개 월 여에 걸쳐 조선인 마을들에 방화하고 민간인들을 살해했는데, 이런 만행은 1921년 5월까지 계속되었다.  그중에서도 장암동 주민들의 희생이 가장 컸다. 그 참안현장을 답사하기로 하였다. 몇몇 문학지기들과 매스컴 기자들과 함께 아침일찍 연길 동북아 터미널에서 개산툰행 버스에 탑승했다.    9시경에 용정 동성용진에서 하차해 도보로 장암촌을 향했다. 평소의 답사처럼 흔쾌히 길에 올랐는데 그렇게 먼 길일줄은 미처 예상치 못했다. 잡풀이 뒤 덮인 산자락에 난 소수레길을 따라 도보로 30여 리를 걸었다. 몇몇 대원들은 평소와는 달리 힘에 부쳐했다.   오후 한 시가 넘도록 무려 4시간이나 강행군을 해서야 세전이벌 동남쪽 끝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동명촌 제2촌민소조에 이르렀다. 좁은 골짜기를 따라 동남쪽으로 얼마간 들어가니 그곳이 바로 장암동이라고 했다.  초가집과 벽돌기와집이 섞인 오붓한 마을, 지금은 평화롭고 아름다운 시골마을 이지만 수십년 전 이 곳에서는 일제의 몸서리치는 만행이 자 행된 참변의 현장이었다. 마을 중심에 들어서니 "동명"는 표지석이 보였다.   우리는 동명촌에서 근 60년간 살아 왔다는 주병욱(75세)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에 의하면 촌민들에 의해 “노루바위 골”이라 불리는 이곳은 중국말로는 장암동, 간장암동(間獐巖洞)으로도 불렸다고 한다. 촌민들 거개가 한국으로 출국하고 지금은 마을 주민 다수가 중국인들이라고 했다.  그가 가르켜준대로 골짜기를 따라 얼마쯤 올라가니 동명촌 제3촌민소조 마을이 나타났고, 마을 앞쪽 언덕에 새로 수선한 "장암동(獐巖洞)참안유적"비가 있었다.  석비정면에 “獐巖洞慘案遺址”라고 새겨져있었다. 뒷면에는 이런 글이 새겨져있었다.    1920년10월 “경신년대토벌”때 일본침략군은 이곳에서 무고한 백성 33명을 학살하여 천고에 용납못 할 죄행을 저질렀다.    龍井3.13紀念事業會  1999年6月30日    유적비에는 몇글자로 응축 된 그날 장암동에서는 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던것일가! 청산리 전쟁에서 참패한 일제는 간도 지역 조선인들에 대한 야수적인 보복으로 혈안이 되었다 조선인들이 독립군들에게 지원의 손길을 뻗친데 대한 분풀이었다. 이 참에 독립군의 근거지를 박멸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실제로 봉오동ㆍ청산리 전역에서 독립군이 대첩을 이룰수 있었던것은 지역 동포들의 헌신적인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하였다.   독립군을 쫓아 시베리아 쪽에서 남하하는 일본군과 남에서 북상하는 일본군은 도로 변에서 조선인 마을만 보면 수색하여 청년들은 보는 대로 사살하고 녀성들을 간음하며 가옥에 방화하는 등 야수적인 만행을 저질렀다. 이른바 “삼광전략(三光戰略)” 즉 모조리 죽이고, 략탈하고, 불지르는 초토화 섬멸 작전이었다.   일제의 조선인 학살에 대해 당시 동북에서 발행했던 “길장일보(吉長日報)” 1920년 11월 7일부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고있다. “그들은 독립군이든 아니든 묻지도 않고 조선인이라면 함부로 수색하며 살해하고 있다. 례컨대 삼둔(三屯)에서 조선인 3~4명이 체포되었고, 남대고비(南大古比)ㆍ오술동(五述洞) 마을의 가옥은 몽땅 소각되었다. 그리고 빈송배(杉松背) 등에 서는 14명이 타살되었는데, 그중에는 학생이 5~6명, 교원이 1명이 있었다.   소가(小街)에서는 12명이 타살되었고 경성위자(鏡城威子)에서 타살된 남녀는 도합 200여 명에 달한다. 삼도구에서 불에 탄 화민(華民) 가옥은 2호이고 조선인 가옥은 500~600호이다. 삼도구 내의 청산리 지방의 전 촌 조선인가옥 1,000여 호를 전부 불살랐으며, 봉자구의 조선인 가옥 70~80호도 불태워버렸다. 회경가의 50~60호의 조선인 가옥과 명동학교도 불태웠다. 최근 3주일 내에 연변일대에서 살해된 조선인은 2,000여 명에 달하며 매개 촌에 이르러서는 남녀를 한 곳에 집결시켜 놓고 함부로 총살하거나 불태워 죽였으며 혹은 집 안에 가두어 놓고 소살하였다.”   그중 가장 잔인한 학살현장의 하나가 바로 장암동이었다. 1920년 참안을 앞둔 장암동은 연길현 용지사(勇智社)에 속해 있었다. 장암동마을의 주민들은 대부분 예수교신자들이었으며 린근에서 장암동 마을을 “예수 마을”이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마을에는 영신이라는 이름의 학교가 있었다. “3,13”반일시위때 장암동주민들과 영신학교 교원들은 시위에 적극 참가하였고 남양평, 팔도하자의 일본군수비대를 습격할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장암동은 또 간도국민회 제2동부지방회 제4분회에 소속되어 있었고 촌민 대다수가 국민회 회원이었다. 1919년 후반기 장암동에서는 간도국민회 만주지방 총회장 양도헌(梁道憲)으로부터 총과 탄약을 얻어 경호대를 조직하였으며 반일단체인 최명록의 도독부와 의군부와도 연계를 갖고 있었으며 그들은 늘 장암동에 와서 활동하였다. 이에 일제는 장암동을 “불령선인의 책원지”의 하나로 간주하여 눈에 든 가시처럼 여기고있었다. (“무장독립운동비사”)  1920년10월30일 새벽 0시30분, 용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제4사단 28려단 보병 제15련대 제3대대 대대장 다이오까의 명령을 받은 스즈끼대위는 보병 70여명, 헌병 3명, 경찰관 2명으로 구성된 “토벌대”를 거느리고 장암동에 파견되었다.  4시경에 그들은 남양평수비대와 합세하여 새벽 6시30분에 장암동을 포위시킨후 청장년 33명을 반일부대와 내통했다는 이유로 포박하여 교회당안에 가두어놓고 불을 질렀다. 교회당은 즉시로 화염이 충천하였는데 놈들은 불 속에서 뛰쳐나오는 사람들을 총창으로 마구 찔러죽이고 다시 불 속에 던져넣었다.   가슴치며 절규하던 가족들은 일본군이 물러간 후에야 육친들의 시체를 찾아 장사지냈다. 며칠후였다. 유가족들의 피눈물이 아직 채 마르기도 전에 일본군이 또다시 마을에 쳐들어왔다. 놈들은 유가족들을 강요하여 무덤을 파헤쳐 시체를 한데 모아놓으라고 강요했다. 유족들이 위협에 못이겨 땅을 파 시체를 모아놓으니 놈들은 다시 파낸 시체를 조짚단 위에 놓고 석유를 쳐 재가 되도록 태워버리면서 이중살해를 감행했다. 일본군은 장암동에서 민가 11채, 영신학교와 교회당을 불태워버렸다.  그후 이중학살된 참혹한 시체가 누구의 것인지도 가릴 길이 없어서 유족들은 재를 모아 28명의 합장 무덤을 만들어 성분하였다.   일제는 장암촌에서 류례가 없는 잔악한 행위을 우리 동포에게 행하였고 그로 말미암아 장암촌은 폐허가 되고말았다.   사건 다음 날부터 장암동을 비롯해 일본군의 만행 현장을 조사한 서양 선교사들이 있었다. 용정에서 제창병원을 경영하던 영국인 선교사 마틴과 카나다 북장로회 선교사 푸트가 학살현장을 찾아보았던 것이다. 그들에 의해 일본군의 몸서리치는 잔학상이 세상에 드러났다.  마틴은 “견문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나는 10월 31일 일요일 마차로 12마일 떨어져있는 비암촌을 향해 용정에서 출발했다. 지난 10월 29일 벌어진 일을 조사해보려는 데서였다.   그날 날이 밝자마자 무장한 일본 보병 한 개 부대는 예수촌을 빈틈없이 포위하고 골안에 높이 쌓인 낟가리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전체 촌민더러 밖으로 나오라고 호령하였다. 촌민들이 밖으로 나오자 아버지고 아들이고 헤아리지 않고 눈에 띄면 사격하였다.   아직 숨이 채 떨어지지 않은 부상자도 관계치 않고 그저 총에 맞아 쓰러진 사람이면 마른 짚을 덮어놓고 식별할 수 없을 정도로 불태웠다. 이러는 사이 어머니와 처자들은 마을 청년남자 모두가 처형당하는것을 강제적으로 목격하게 하였다.   가옥을 전부 불태워 마을은 연기로 뒤덮였고 그 연기는 용정촌에서도 보였다 ...이런후에 일본군은 유유히 돌아가서 천장절을 축하했다.   마을에서 불은 36시간이 지났는데도 계속 타고있었고 사람이 타는 냄새가 나고 집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고있었다. ...알몸인 젖먹이를 업은 여인이 새 무덤앞에서 구슬프게 울고있었고... 큰 나무 아래의 교회당은 재만 남고 두채로 지은 학교의 대건축도 같은 운명이 되었다. 새로 만든 무덤을 세어보니 31개였다. ...다른 두 마을을 방문하였다. 우리들은 불 탄 집 19채와 무덤 또는 시체 36개를 목격하였다”   선교사 푸트는 그의 수기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내가 11월 4일에 간장암동에 갔더니 촌인은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10월 30일에 왜병이 내습하여 31명이 살고 있는 촌락을 방화하고 총격을 가했다’ 나는 가옥 9칸과 교회당과 학교가 잿더미로 된 것을 보고 사실임을 알았다. 또 11월 1일에는 왜군 17명, 왜경 2명 및 조선인 경찰 1명이 이 마을에 와서 남자들을 모조리 끌어 내다가 죽인 후 그들의 처를 불러내어 사자의 경력을 말하라고 고문했고, 그 다음에 촌락의 주민들 모두 모아서 일장 연설을 한 후 외국인 선교사가 이곳에 온 일이 있는가를 물었다…”   일본군의 잔인한 만행을 목격한 선교사들은 “피에 젖은 만주땅이 바로 저주받은 인간사의 한 페이지”라고 탄식하였다.  이들 선교사들에 의하여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기시가 “시카고 데일리 뉴스”와 “상하이 로투(路透)통신사”등에 보도되었다.   이렇게 만행을 저질러놓고도 일제는 상부에 바치는 보고에서 “우리 토벌대는 적도들의 음모장소로 되는 집들을 소각하고 적의 시체는 우리 나라 풍속대로 화장하고 부락의 생존자들을 모아놓고 우리 군대의 토벌취지를 말하고 장래에 있어서 불령행동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고 동지방에서 철퇴하였다.   그후 시체의 화장이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을 알고 군대, 경찰 등 인원을 파견하여 협력하게 하여 완전히 타지 않은 시체 및 유골들을 유족, 친지들 혹은 부락 대표자들에게 부탁하고 령수증을 받았다”고 진상을 왜곡하여 죄악을 덮어감추려고 했다. (김철수 “연변항일사적지연구”)  일본군은 용정의 선교사들이 조사하러 다니자 민간인 대학살이 외국에 알려질 것을 우려해 이를 경계하는 기록도 남겼다.  “특히 10월 30일 아군의 한 부대가 연길 장암동에서 불령선인 토벌에 즈음하여 36명을 죽이고 민가 12호 및 학교, 교회당을 불태운 사건을 듣고 저들 선교사는 다음 31일 그곳에 가서 사진기로 피해 상황을 촬영하고(시체에 밤 껍질을 덮어 태웠으나 반만 타서 숯이 되어있는 것을 촬영했다고 한다) 조위금 200원을 보냈으며 또한 전후 수차에 걸쳐 선교사 및 신문기자가 이를 조사한것은 사실이다.  본건을 혹은 학살사건으로서 선전의 불을 붙이는 단서가 될지도 모르므로 크게 경계를 요하기에 군대 측에 특별히 주의를 주고 있다.” (“장암동 부근의 토벌 상황”“, “장암동 소탕 상보”)  사책들에서 흔히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고 불리는 이 사건은 같은 해 훈춘에서 있었던 “훈춘 참변”과 함께 우리 민족이 만주지방에서 일제에게 당한 가장 대규모적이고 비극적인 참변이었다.  유적비에 묵념을 올리고 마을 동쪽골짜기에 자리잡고있는 노루바위를 찾아보았다. 주병근 할아버지에 의하면 “노루바위는 원래는 제법 선바위모습을 한 바위였는데 한때 군부대가 주둔하면서 바위 일부를 부셔버렸다”고 한다.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우리는 귀로에 올랐다.   온 하루 답사를 강행한지라 발을 조이는 신발이 거추장 스러워 아예 신발을 벗고 걷는 대원도 있었다. 발이 부르튼 이도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아픔이 우리들의 마음을 아릿하게 하고 있었다.   모두들 말이 없었다. 단 먼 답사길에 지쳐서가 아니였다. 수십차 답사를 이어왔지만 이번 처럼 가슴이 무거워나는 답사길은 없었다. 석양이 서산마루를 피빛으로 물들이고있었다. 어둠에 사위어 가는 노루바위 골을 다시 돌아다 보았다. 노루가 많다고 하여 노루바위골이라고 불렀다는 장암동, 하지만 답사 내내 노루는 보이지 않고 어디선가 처연히 들려오는 꿩 우는 소리만이 어젯날의 우리민족이 겪었던 아픈 수난을 이야기 하는듯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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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8-05
  • [곽재석 칼럼] 뚫어라!
    ■곽재석(한국이주・동포개발연구원, 원장) 요즘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니 世上萬事가 疏通이라는 것을 새삼 다시 절감하게 된다. 너와 내가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고 자기의 이익과 주장만을 고집하고, 甲과 乙이 서로를 이해하지 못하고 손발을 맞추지 못하는 엇박자 소통불통이 세상 모든 갈등과 불화의 원인인 것 같다. 요즘의 한국정치가 그렇고 경제가 그렇고 특히나 중국동포사회가 더욱 그런 것 같다. 요즘 한국의 중국동포사회가 돌아가는 것을 보면 도대체 이들 중국동포들이 오늘 자신들이 어느 땅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고 있는지, 또 자신들이 매일매일 얼굴을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 상대가 어떤 사람인지 도대체 제대로 알고 있기나 한 지 매우 의문이 든다. 저들이 정녕 한국사람과 더불어 함께 소통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마음과 의지가 정말 제대로 있는지 것인지 의아하기 짝이 없다. 수년 전부터 한국사회 이민자들 비율 중에 중국 조선족 동포들이 급증하게 되면서 중국동포들의 한국 주류사회 정치 참여의 필요성이 제기되게 되었다. 그러나 느닷없이 필리핀계 결혼이민자가 대한민국 다문화인구의 이익을 대변하는 대표로 뽑혀 국회에 입성하게 되면서 중국동포들의 소외감과 차별감이 매우 고조되기도 했다. 한국 국민의 일원이며 또 지역사회를 구성하는 주민이기도 한 중국동포들의 이익이 잘 대변되도록 이들 중에 적절한 인물을 한국 정치무대에 올려 놓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하여 많은 사람이 공감한 바 있다. 그러나 요즘 매우 기이한 일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 귀화하거나 국적회복한 동포 인사들이 중심이 된 단체가 전국한적화인연합총회(全國韓籍華人聯合總會)이라는 단체명을 걸고 내년 총선에서 중국동포사회를 대변하는 사람을 추천하기 위한 작업을 진행 중이라고 한다. 예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던 세계화인절(世界華人節) 축제에 중국동포단체들이 참석한다고 야단법석을 떨더니 이제 한국에 체류하는 조선족 중국동포들이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는 중국재한교민협회라는 단체 주관의 노래자랑대회가 조만간 개최된다고 한다. 도대체 한국정치판에 한국국적을 가지고는 있지만 중국인(華人)이라는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한국 입법부에서 누구를 위한 어떤 법을 만들겠다는 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참으로 정신나간 사람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중국이 세계 정치와 경제에서 G2로서 잘나간다고 하지만 여기는 엄연히 한국땅이고, 한중수교 이후 대한민국은 중국 조선족들을 명백히 중국동포로서, 우리 민족의 일원으로 한국에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어제까지도 한국 정부가 동포로서 제대로 대우해 주지 않는다고, 같은 민족을 이렇게 푸대접하면 안된다고 아우성을 치더니 이제는 급변하여 華人의 일원이라고 희희낙락하는 저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참으로 아득하기만 하다. 저들 중국 조선족 동포들이 가진 체류자격이 H-2 방문취업 비자로서 우리 민족인 중국 조선족 동포들에게만 특별히 주어지는 취업자격이며, 저들이 변경한 F-4 또한 그 이름이 재외동포 체류자격으로서 이 또한 우리 민족 동포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며, 저들이 그를 기반으로 쉽게 영주권 및 국적을 취득하여 한국에 살고 있다는 엄연한 사실을 까마귀고기 먹은 사람 마냥 정녕 까맣게 잊어 버린 것인지 되묻고 싶다. 이러한 행태가 이제는 우리도 이만하니 한국사회와 한국땅과 소통하지 않고도 우리들끼리 한판 잘해볼 수 있다는 華人의 자만심의 發露는 아닌 것인지 되묻고 싶다. 분명히 하고 싶은 것이 있다. 대한민국은 중국 조선족을 이제껏 華人으로서 받아들인 것은 결코 아니다. 대한민국 법무부는 그리고 한국이주・동포개발연구원을 포함한 많은 동포단체와 교회 그리고 그토록 헌신적이었던 사람들이 이제껏 華人들을 위해 그렇게 열심히 일해 온 것은 결코 아니다. 모든 노력과 수고가 결국 내 혈육, 내 핏줄, 내 동포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더욱 보람있었고 자랑스러운 일이었다. 앞으로 조선족 중국동포들은 이곳 한국 땅에 살면서 정녕 내가 누구인지, 어디에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것인지, 그리고 내 자손은 어떠한 사람으로 미래를 살아갈 것인지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다면, 그리고 이를 통해 한국 사람의 마음과 정신과 원활하게 소통하지 못한다면 한국 땅에서의 중국동포사회의 정상적인 발전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한국땅에 사는 중국 조선족이 같은 민족으로서 한국사람과의 관계를 제대로 뚫을 수 있을 때 비로소 한국땅에서의 동포사회 미래도 제대로 뚫릴 수 있을 것이다. 곽재석 원장(한국이주•동포개발연구원) 대통령 비서실장 수석보좌관(2001~2002), 세종대학교 교육학과 겸임교수(2004~2009) 법무부 외국적동포과장(2006~2009) 역임, 정치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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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8
  • 광복(光復) 다음은?
    70년, 사람으로 말하면 칠순이다. 만수무강을 기원하며 고희잔치를 치른다. 70년, 올해는 한반도 광복 70주년이다. 국가적인 축제가 한창이다. 학생들에게 물었다. 왜 광복일을 기념할까요? 나라가 세워진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란다. 면상에서 틀린 대답이라고 하기는 무리이다. 광복과 건국을 혼동하는 이들은 한국에서 의무교육을 1년도 받아보지 못한 중국동포 자녀들이다. ‘광복절’은 귀화시험의 단골 문제이다. 필기시험에도 나오고 면접시험에도 나온다. 꼭 알아둬야 하고 국경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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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7
  • [김혁 칼럼] 펄럭이는 전범기(戰犯旗)
    2015 캐나다 FIFA 여자 월드컵이 막을 올렸다. 1991년에 창설되어 올해로 7회째를 맞은 이번 대회는 본선 출전국 수를 24개국으로 확대해 역대 최대 규모로 열렸다. 남자 월드컵에 비견 될 만한 전 세계인의 스포츠 축제었기에 모두들 또 한번 흥분의 도가니에 빠져 있었다. 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일본대 스위스 C조 1차전경기 관람을 하려던 중, 팬들은 뜻밖의 광경을 보게 된다. 일본 축구팬들이 전범기를 꼬나 들고 자기의 팀을 응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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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01
  • [김혁 칼럼] 진혼곡(鎭魂曲)
    물질의 풍요에 꺼둘리고 노곤해져 모두들은 일종의 카르텔(동일 업종의 사람들이 이윤의 증대를 노리고 자유 경쟁을 피하기 위한 협정을 맺는 것으로 형성되는 안일한 형태)같은 침묵과 회피의 완충지대에서 안일만을 즐기고있다. 이렇게 침중한 과거에 대한 평이와 미온적인 태도가 주는 좌시와 부재가 이 내가 펴 낼 작품이 많음에도 기어이 십 년 전 작품을 뒤적여 다시 중판본을 내는 이유이다. 첫 장편이라 설익은 작품일망정 이 작품이 시대라는 이름의 호랑이 등에 본의아니게 올라타 추썩임을 당해야만 했던 젊은 청춘들, 세상의 폭력과 반인륜적 관습, 그 형극의 틈바구니에서도 유토피아로의 열망과 생존 본능으로 몸부림 한 모든 문혁 경력자들을 위한 진혼곡으로 읽혀지기를 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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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9
  • 조선족은 중국을 얼마나 알까
    일전 한국 프로그램 "명견만리"가 조선족 공중위챗들에서 폭풍인기를 끌었다. 프로그램은 참으로 재미있고 디테일하게 중국의 발전현황을 소개했다. “우리는 중국이라는 대학에서 영원히 학위를 따지 못한다.” “세계적으로 미국 우습게 아는 나라는 북한 뿐이고 중국을 우습게 아는 나라는 한국 뿐이다.” 진행자는 이렇게 한국인들은 중국에 대해 잘 모른다며 일축하기도 했다. 여기서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 소개한다. 며칠전 한국인과 기차얘기를 하다 "중국 기차는 한국보다 몇년이나 떨어졌는가"는 질문을 받았다. 현재 중국의 고속철은 세계 1위, 300킬로메터 시속으로 씽-씽 달리고있다. "중국의 90후들한테 한국은 안중에도 없다. 미국이나 독일이나 일본을 따라잡겠다는 젊은이들은 많아도 한국을 따라잡겠다는 중국 젊은이들은 단 한사람도 없었다. 하지만 대한민국은 아직도 오만함에 빠져있다" “우리는 긍적적인 중국 90후 세대들이 만들어 나갈 앞으로의 중국이 더 무섭다" 프로그램은 이렇게 한국사회에 메시지를 날리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우리는 목숨을 걸 정도로 한국벌이에 집착했다. 물론 그덕에 가난의 때도 많이 벗을수 있었다. 한국 드라마, 오락프로 등 한국 tv에 푹 ~~빠지기도 했다. 울고 웃으면서 시간가는줄 모를때도 많았다. 또 화장품도 한국, 옷도 한국, 세련된 한국 상품에 매혹되면서 이쁘다는 말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한국문화에 푹 심취되여있는 사이 우리가 살고있는, 우리 나라 중국은 이렇게 세인들의 주목을 받고 세인들의 두려움을 받고있다. 얼마전 한국의 한 간판아나운서는 한 인터뷰에서 “저희는 중국어와 한국어를 구사하는 중국 조선족들이 너무 부럽다”고 했다. 현재 한국에서 중국어 열기는 달아오르는 더위보다 더 뜨겁다고 했다. 우리도 이젠 우리가 살고있는 나라에 좀 더 눈길을 돌려야 되지 않을가 싶다. 정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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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8
  • [연변] 민간단체 차별화 지원 안될가?
    ■ 박정일(연변일보) 요즘 우리 주변을 두루 살펴보면 수많은 민간단체들의 활동 행사가 빈번하다. 언제 그렇게 많은 민간단체가 생겨났는지는 모르나 아무튼 각양각색의 민간단체들이 우후죽순마냥 생겨나고 활발한 활동이 전개되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 이렇게 많은 민간단체들의 활동행사를 보면 대부분이 자금난으로 허덕이고있다. 대부분 민간단체들은 회비를 이용하거나 기업가 혹은 일부 단위의 찬조금에 의해 운영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활동행사는 왕왕 기획한대로 이루어지지않는 경우가 많아 많은 민간단체들은 이곳 저곳을 찾아다니면서 행사금을 구걸하고 있다. 얼마전 필자는 한국에 갔다가 지역 곳곳에서 펼쳐지는 민간단체행사를 본적이 있었는데 크고작은 행사 모두가 조직이 잘되고 내용도 풍부했다. 서울광장에서 본 지구촌 나눔 한마당 축제는 규모가 대단했다. 뿐만아니라 세계한인언론인단체행사도 그렇고 학생들의 다양한 행사도 그렇고 모두가 성공적으로 치뤄지고 있었다. 한국에서 이런 다양한 행사들이 성공적으로 치뤄질수 있는 관건은 정부와 다양한 재단 그리고 기업의 후원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용이 좋은 행사는 정부에서 행사비용의 80% 이상을 후원한다고 한다. 이러다보니 사회각계의 다양한 단체들의 활동이 빈번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뜻깊고 재미나는 행사가 빈번할수록 사회번영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되고 정열적인 분위기가 조성되며 사회에 대한 대중들의 행복감이 푸풀어오르게 되는 것이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의 민간단체의 활동이 빈번하면 빈번할수록 사회의 조화적인 분위기가 형성되고 대중들의 행복감도 농후해진다. 현재 우리 나라에서도 사회에 유익한 활동행사라면 국가에서도 적극 지지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정부의 자금지원이 이루어지지 않는 아쉬움이 있다. 우리는 행복사회 조화사회를 만들어감에 있어서 대중의 역할을 떠날수 없다. 발전성과를 축복하고 공유하며 사회적인 사랑과 우애를 노래하고 대중들의 기쁨을 도출해내는것은 오늘날 우리 당위와 정부가 해야 할 또 하나의 사회적책임이다. 현재 비록 민간단체들이 자발적으로 행사를 조직해나가고는 있지만 아무리 의미있는 행사라도 자금문제로 지속적으로 진행하기 어려워하고있다. 때문에 정부는 능력한도내에서 사회적으로 공인받는 민간단체에 대해 차별화적인 지원을 선도적으로 시도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시도는 하루빨리 단결되고 조화롭고 행복한 연변을 건설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하게될 것이다. 현재 이미 일부 행사들이 가두를 통해 진행되고있지만 정부가 민간단체를 선별지원해 이들의 다양한 활동행사가 성공적으로 치뤄질수 있도록 하는 것은 언젠가 우리가 해야할 중요한 사업이다. 창조성있는 사업을 강조하는 마당에 이런 선도적인 시도를 우리가 먼저 해볼 필요가 있다. 발달한 국가들 처럼 정부지원자금 사용내역을 확실하게 따지고 부당한 사용에 대해 엄벌대처한다면 부정비리도 막을수 있다고 본다. 경성환경개선도 대중을 위한 민생사업이지만 민간단체의 다양한 행사지원도 중요한 민생사업이다. 경성환경의 개선으로 연변이 갈수록 살기 좋은 도시가 되고있는 마당에 대중들에게 웃음과 행복감을 가져다주는 다양한 행사가 이루어질수 있도록 정부가 적극 나설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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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4
  • 분석해 보는 한·중 양국 여객선 침몰 '대형참사'
    ■ 김철균 6월 5일 저녁 21시경(현지 시각), 중국 양즈강에 침몰되었던 호화여객선 “둥팡즈싱(东方之星) 호”가 물위로 인양되었다. 지난 1일에 침몰되어 꼭 닷새만에 수면위로 떠오른 셈이다. 순간, 조난당한 수많은 승선객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고 또 남의 일 같지를 않지만 침몰 닷새만에 거대 여객선을 물위에 떠올려 놓고 수색작업을 벌이는 한편 사고경위를 조사하는 중국정부의 과단한 사고 뒤 조치에 탄복을 보내게 되었다. 그러면서 약 1년 전인 지난해 4월 16일, 한국 진도 부근의 해상에서 발생한 “세월호” 침몰참사를 머리속에 떠올리게 된다. 한국의 “세월호” 침몰사건은 2014년 4월 16일 오전 8시 50분경, 한국 전라남도 진도군 조도면 부근 해상에서 발생했다. 당시 “세월호”에는 도합 476명의 승선인원이 있었으며 여객선이 완전히 침몰된 날자는 4월 18일이었다.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된 뒤 오랫동안의 수색작업을 거쳐 나온 집계에 따르면 사망자가 295명에 달하고 실종자가 9명이었다. 다음 중국의 “둥팡즈싱호” 배의 항행도중 강풍을 만나 거의 어떻게 손을 쓸 사이도 없이 순식간에 번져졌으며 구조된 14명 외 기타의 모든 승선자가 조난당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국의 “세월호”참사와 중국의 “둥팡즈싱호”의 참사ㅡ 둘 다 막대한 인명피해를 낸 대형참사이지만 사건경위와 사건 뒤의 정부측의 조치 등을 보면 다른 면이 많은 것 같다. 첫째, “세월호”는 연해지만 그래도 바다에서 일어난 참사였고 “둥팡즈싱호”는 아무리 큰 강이었지만 그래도 강이지 바다는 아니었다. 둘째,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되기까지는 근 3일간의 시일이 걸렸고 “둥팡즈싱호”는 순식간에 번져지면서 침몰시간도 아주 빨랐다. 셋째, 지금까지의 분석에 따르면 “둥팡즈싱호” 참사는 순 사고라는 판단이 기본적으로 서고 있지만 “세월호” 참사는 아직도 의문점이 여러 가지로 뒤따르고 있고 많은 추측이 난무하고 있다는 그 점이다. 넷째, “둥팡즈싱호”는 침몰 닷새만에 물위로 인양되었지만 “세월호”는 사고발생 1년여가 지난 오늘까지도 차일피일 미뤄지고 있다. 이상의 몇가지를 통해 분석해 보노라면 다같은 참사에 대한 한중 양국 정부측의 후속조치에도 의문점이 적지 않게 생긴다. 즉 중국측은 사고가 발생한 즉시로 발빠른 움직임을 보였지만 한국정부측의 사고발생 뒤 움직임은 많은 의문점을 보이고 있다. 우선 “세월호”가 완전히 침몰된 시일이 4월 18일이라면 한국의 구조선박들과 헬기 등이 집중동원되어 구조에 진력해야 할 것이고 또한 그러노라면 피해인명을 최저한도로 줄일 수 있었을 것이나 그럼에도 295명의 피해자가 나왔다는 것은 의문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바다이기에 육지보다 구조작업이 힘들고 늦어질 수는 있으나 그래도 한국정부측으로부터 구조행동에 동요하거나 늦장을 부렸다는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현재 한국정계에서는 “세월호”의 인양을 놓고 공방이 치열해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세월호”의 인양작업으로 말하면 해상에서의 작업이기에 중국 양쯔강에서 “둥팡즈싱”을 건져올리는 것처럼 쉬운 일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사건의 진실규명을 위해서는 “세월호”를 반드시 인양해야 하며 또한 인양된 “세월호”의 모습으로 국민들한테 진실을 밝혀야 함이 마땅할 것이다. (본 기사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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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09
  • 연변 부동산 시장은 유가무시
    ■ 박정일 요즘 부동산시장을 보면서 서글픈 웃음만 나온다. 서글픈 웃음이 나오는 까닭은 주요하게 부동산개방상들과 일부 부동산 중개상들 때문이다. 부동산 가격은 계속해 오르는데 사는 사람은 없고 또 중개상들이 투기를 목적으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으나 중고 주택을 사는 사람은 없고…그럼에서 불구하고 중고 주택을 포함한 부동산가격은 오르면 올랐지 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 기이한 현상 때문에 서글픈 웃음을 짓지 않을 수가 없다. 부동산 가격이 인상하는 원인중에 가장 중요한 원인은 부동산 개발의 성본 가격의 인상이다. 개혁개방 30여년 동안 물가인상에 의한 원인으로 부동산 개발에 필요한 원자재가 오르지 않은 것이 없다. 지금도 부동산 개발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로 되는 토지가격이 계속해 인상하고 원자재 가격도 계속 인상하고 있어 물가인상은 부동산 가격인상의 주범이 되고 있다. 게다가 노동력 부족으로 인한 로임인상이 계속되면서 부동산 가격은 지속적으로 오르고 있다. 부동산 가격 인상으로 집을 사는 사람이 날로 적어지는 것이 더 문제다. 그럼에도 주택상품은 계속 생산되고 있는게 오늘의 부동산 시장의 현실이다. 시장이 없으면 상품생산을 중단해야 하는데 이상하게도 부동산개발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보면 부동산 개발에 아직도 리윤공간이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문제는 수요자가 줄면서 우리 부동산시장에 유가무시(有价无市)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시장이 없는데 가격이 계속해 오르는 상황이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나 단언할수 있는 것은 주민들의 수입증가가 없이는 현재 부동산업계에 불고있는 유가무시의 현상이 사라질 수 없다. 집을 사라고 이런 정책 저런 정책이 쏟아져 나오지만 값이 치솟을대로 치솟은 집을 살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이젠 한국에 가서 10년을 일해도 집한채 마련할 정도로 집값이 올랐는데 누가 감히 그돈으로 집을 사겠는가? 또한 경기불황에 의한 수입저하로 집구매는 꿈에 불과하게 되였는데 누가 집을 산다는 말인가? 부동산업계에서 나타나고 있는 유가무시의 현상을 보면 생산자나 구매자나 서글플 수밖에 없다. 팔아야 하는데 팔수는 없고 그리고 사고싶은데 살수는 없고...요즘 부동산시장은 참으로 서글픈 현상이 연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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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02
  • [김혁 칼럼] 전설의 춤사위
    ● 김 혁(재중동포 소설가) ▲최승희 중년시절 일전 상하이에서 발매 된 매란방 기념카드가 전에 없던 구매 열조를 일으켰다. 기념카드가 발매되는 광장에는 구입하려는 사람들이 장사진을 이루었고, 암시장에서 카드는 하루 새에 28위안으로부터 150 위안으로, 몇달 후에는 330위안으로 폭등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왜 열한 배나 폭등한 가격일망정 한 무용배우의 기념 카드를 사들이고 있는 것일가? 한편 한국에서는 무용가 최승희의 가장 오래 된 영상기록물이 공개되어 화제다. 최근 발굴된 영상에는 1926년 10월 3일 이시이바쿠무용단 일원으로 작품에 출연한 15세의 최승희의 춤추는 모습이 담겨있다. 1926년 3월 일본에 유학간 최승희가 무용 입문 7개월 만에 스승 이시이바쿠무용단의 주역이 된 셈이다. 이 영상은 1926년 10월 3일 도쿄 베비 시네마 구락부 아사이 클럽 주최로 미쓰코시백화점 옥상에서 열린 촬영회에 이시이바쿠무용단이 초청돼 공연 당시 촬영한 것이다. 경극예술의 대부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중국의 경극200년사에서 최고로 지칭 되는 천재 경극배우 매란방. 18세기 청나라후반에 처음 등장한 이후 19세기 과도기를 거쳐 20세기 중, 후반까지 경극은 화려한 무대와 의상으로 관중을 사로 잡으며 중국의 대표 예술로 자리 매김했다. 그 와중에 경극에서 여자역할을 맡는 남자 배우를 지칭하는 화단(花旦)연기의 일인자로 중국대륙은 물론 전 세계에 경극의 아름다움을 알린 신화적 존재가 바로 매란방이다. 매란방은 1894년10월, 강소성 양주에서 할아버지, 아버지, 큰아버지 모두가 경극계의 명배우들인 경극세가(世家)에서 태여어 다. 여덟 살 때부터 경극을 배웠고 열 한 살 때 처음 무대에 오른다. 각종 배역을 훌륭히 소화를 해내며 경극계의 기대주로 부상한 그는 매끄러운 목소리, 깔끔한 무대매너 그리고 중후한 연기력을 과시하며 재빨리 명실상부한 경극의 대표 배우로 성장한다. 1929년 미국의 초청을 받아 중국인 최초로 뉴욕 브로드웨이(뉴욕의 맨해튼을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큰길에 조성된 극장가)에서 공연을 하는 쾌거를 이룩하기도 한다. 매란방은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일본, 미국, 쏘련등지를 순회하며 문화 교류에 앞장섰고 경극의 존재와 그 진가를 세계에 널리 인식시킨다. 이 기간에 그는 저명한 희극대가 채플린, 소련의 문호 고리키, 유명한 배우 스타니슬라프스키 등 저명한 문호, 예술가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미국 공연시, 촬영을 중단하고 달려와 매란방을 만난 찰리 채플린은 “그는 나의 예술적 소울 메이트였다!” 고 매란방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일본의 마수가 중국을 유린하던 기간에는 일본치하에서 공연하기를 완강히 거부하여 화단(花旦)연기자로서 수염을 기른 사건은 예술가의 곧은 오골(傲骨)을 보여 주는 전례로 유명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후에도 경극의 전통적 체계를 보전하면서 그 개혁과 발전에 힘쓴다. 배우로 활약하는 한편, 중국 희곡연구원 원장을 맡아 후배 육성에 힘쓰고 많은 배우를 배출한다. 나아가 전국인민대표, 중화전국문학예술계련합회 부주석 등 요직에 있으면서 문화적, 정치적으로 많은 공적을 남긴다. 매란방을 경극계의 “공전절후(空前绝后)한 대부”라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여기 그의 인기를 실감하는 작은 일화를 곁들어 본다. 매란방의 출연료는 금괴(金塊) 즉 금덩이 10개에 상당했다고 한다. 해방 후 부자가 사라진 중국, 당시 최고 노임을 받는 사람이 바로 매란방이었다. 50년대 국가 주석 모택동의 노임은 408.8위안(인민폐), 매란방은 자유직업자인만큼 출연료가 순 수입이었는데 1956년 매란방이 주동적으로 월급을 낮춘 후의 노임이 2100위안(인민폐)에 이르렀다. 당시 명문대 청화대학의 교수가 매달 식사비 8 위안(인민폐)으로 산해진미를 먹을 수 있었다는 상황으로 보아 당시 매란방의 노임 2100원은 어떤 개념인지 가히 가늠할 수 있다. 때문에 전쟁이 일자 대포도 아닌 비행기를 직접 기증할 수 있었다는 매란방의 경제력이 더 이상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매란방은 전통을 존중하면서도 무대의 혁신을 과감히 꾀하여 경극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으며 연기의 폭을 넓혀서 모든 단역을 완벽하게 소화해낸 최초의 배우였다. 50 여년의 무대생활을 통해서 그는 경극의 전통적 레퍼토리 가운데 100개 이상의 역을 소화해냈다. 그가 무대에서 표현했던 부드러우면서도 올곧은 인물들처럼 그 자신도 그러한 품성을 일생 간직했다. 이점이 그의 인간성의 매력 포인트라고 할 수 있다. 매란방은 그를 따르는 후학들이 그의 성을 따서 “매파(梅派)”라는 경극의 한 유파를 이루었을 정도로 경극세계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 “매파”예술은 이미 세계 예술보물고의 정신적인 재부가 되었으며 매씨희극이론도 세계3대 희극예술체계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춤으로 세상에 군림한 여자 여기 또 한 분의 춤의 대가가 있다. 바로 민족 신무용의 개척자- 최승희이다. 최승희는 한일합방 이듬해인 1911년 서울에서 4남매 가운데 막내로 출생한다. (그의 큰 오빠 최승일은 1922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문학단체인 가입한 좌파 소설가이다.) 그녀가 자신의 한생을 무용의 외길로 가려 마음먹은 것은 1926년 오빠의 권유로 일본 근대무용의 선구자무용가인 이시이 바쿠의 공연을 보러갔던 뒤의 일인 듯 싶다. 그날 공연된 작품은 한결 같이 전위적인 양식의 신무용들이었다. 오빠 손을 잡고 이 공연을 보러 왔던 열 여섯 소녀 눈에서는 광채가 번뜩이었다. 그날 한 조선 소녀의 운명은 비단 찢어지는 소리를 내며 뒤바뀌고 있었다. 그녀는 곧 이시이를 따라 일본으로 갔고 3년이 못 되어 이시이 무용연구소 간판 스타가 되었을뿐 아니라 전 일본 열도를 흔들어 놓게 된다. 그러나 오성(悟性)이 강했던 그녀는 곧 얼마 후 스승의 춤에 혼이 사라지고 있다고 느끼고 일본을 떠나 조선으로 돌아 온다. 그녀는 이시이뿐아니라 “이사도라 던컨이나 니진스키류의 음악에 종속화한 무용”아닌, “조선의 전통과 풍물로써 새로운 것을 만들어 세계로 나갈” 당찬 생각을 뼈물게 된다. 그녀는 민족적인 것으로서 세계적인 것을 이루려는 야심에 차 있었다. 그리고 결국 모든 예술가의 지상 명제인 그 야심을 이루고 만다. 1929년 귀국하여 서울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차리고 1930년 2월 경성공회당에서 처음으로 신작발표회를 가진다. 이 공연은 한국인 최초의 독자적인 춤 공연이었다. 두 차례 일본 유학이후에 국내에서 독자적인 근대 무용 공연을 가지면서 대중적으로 큰 인기를 모으게 되었고 영화에 출연하고 자서전을 출간 할 정도로 유명해 진다. 1930년대 후반부터 유럽과 전미를 감동의 물결로 휩쓸며 “동양의 진주” “금강산의 화신”이라는 갈채를 받는다. 피카소, 장 콕토, 로맹 롤랑, 가와바타 야스나리 등 당대 최고의 명사들도 그에게 반했다고한다. 1947년 북한으로 건너가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세워 소장에 취임하고 조선 춤을 체계화하며 무용극 창작에 힘 쓰다가1969년 타계한다. 조선 최초의 월드스타였던 최승희,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 그리고 분단의 고착화라는 시대의 진공 속으로 속수무책으로 빨려 들어 간 최승희, 최승희의 삶은 그야말로 “격동의 20세기”를 관통해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가 오히려 비좁았던 그에게는 그러나 정작 고향이 없었다. 남에서는 친일파요, 북에서는 자본주의 성향의 반혁명 예술가라고 버림받았던 그, 하지만 땅의 나뉨도 분단의 이데올로기도 그의 예술혼은 묶어둘 수는 없었다. 그는 춤에 대한 천부적 자질을 안고 쉼없는 춤사위를 통해 아시아인으로는 중국의 매란방, 인도의 우디샹카와 더불어 세계적인 무용가로 인정받으며 춤으로 세상에 군림한 신화적 존재로 남았다. 거장들의 악수 사실 최승희와 중국과의 인연은 일찍부터 이어졌고 놀랍게도 많은 중국 문학예술계의 쟁쟁한 거장들과 만남과 교류의 일화를 남기고 있었다. 중국 현대문학의 최고의 녀류작가 장애령(张爱玲. 동방의 제인 오스틴이라고 불리는 유명 여류소설가. 쟁명을 빚고 있는 영화 “색계”의 원작자)도 일찍 최승희와 만남을 가졌었다. 1945년4월,신중국보(新中国报) 편집부는 상하이에서 무용가 최승희를 위한 간담회를 열었는데 무용계 인사들외에도 장애령 등 상해의 유명 여류작가들이 간담회에 동참했다. 그날 간담회 석상에서 최승희는 “우리의 무용예술은 고대나 서방에 대한 모방에만 그치지 말고 그 장점을 따서 현대적이고 진정 자신에게 속하는 동방적인것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장애령은 바로 문학에서도 그러한 고견은 적용된다며 동감을 표했다고 한다. 사실 장애령 역시 최승희의 무용에 심취되어 있었다. “서방의 무용, 그리고 중국명사파들의 표현은 최승희에 짝지는 것이 많다. “며 최승희의 예술체계에 대한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인 작품인 쓴“태양은 쌍간하를 비춘다”의 작가 정령(丁玲), 그녀도 최승희와 묘한 인연의 끈을 가지고 있었다. 1948년 정령은 쏘련에서 돌아와 로신예술학원에서 창작에 전념하고 있었다. 쏘련에 체류하던 기간 보았던 무극은 그녀에게 강령한 인상을 남겼다. 하여 그녀는 연안 “보육원”에서 자란 딸 장조혜(蒋祖慧)가 춤을 배우기를 권장했다. 이공과에 흥취가 있는 딸애를 설복하여 조선으로 보내어 다름 아닌 최승희의 문하에서 춤을 배우게 했다. 최승희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은 장조혜는 유명 뮤용수로 성장, 그후 유명한 현대경극 “홍색랑자군”의 제작을 맡아 그 유명세를 떨쳤다. 최승희는 세계 공연을 마치고 중국으로 와서 1941년부터 1946년까지 차원 높은 예술무용을 공연하여 중국예술계에서 커다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1944년 북경의 북해부근에 “동방무용연구소”를 차리고 중국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중국 예술전통을 익혀나갔다. 바로 이 시기 매란방과 최승희는 역사적인 조우를 가진다. 매란방등 경극계의 명배우들은 최승희를 수차 방문했고 그와 함께 무대예술에 대한 교감을 나누었다. 최승희의 높은 무용예술표현, 견해는 매란방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당시 중국의 “화경일보”는 “노래를 위주로 하는 옛 경극은 최승희 무용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종국에 가서 변혁을 일으킬 것 같다”는 소식까지 실으며 최승희의 실력과 역할을 강조했다. 경극대사 매란방과 교류하면서 최승희는 경극을 토대로 한 무용 창작론과 기본 동작을 모형화하고 교수체계를 정립해 중국 무용을 현대화하는데 기여 했다. 그러한 정론을 최승희는 인민일보에 “중국무용예술의 무용예술의 미래”라는 서명문장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연변대학 예술학원 이애순교수는 일찍 발표 한 논문 “중국무용의 현대화와 최승희의 역할” 에서 최승희가 중국에 예술무용을 전파하며 중국무용사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해 체계적으로 소개한바 있다.) 한편 자신의 무용세계를 살찌우는데서 최승희는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최승희는 실제 중국무용의 실험적 창작에도 참여해 여러 유형의 창작물을 탄생 시켰다. 그중 중국의 고전문학과 경극의 검무를 소재로 만든 “패왕별희”와 당나라 양귀비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양귀비 연무지도”가 대표적이다. 어젯날 양귀비를 소재로 한 매란방의 대표작 “귀비취주”와 역시 양귀비의 춤사위를 재 해석 한 최승희의 “양귀비 연무지도”가 농도와 줄기가 다른 현란한 모습을 뽐내며 한 무대에서 어우러졌다. 살얼음과도 같은 시대에 오로지 타오르는 예술혼을 고이 껴안고 험난한 근현대사를 가로질러 세계로 발돋움하면서 민족적인것을 세상에 알리는데 혼신을 던진 매란방 그리고 최승희, 새로운 시대의 변화와 운명의 질곡에 어떻게 접근하고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하는지를 거장들의 앞선 행보는 보여주고있다. 새로운 매체를 통해 새로운 형식으로 다시 조명되고있는 예술대가들의 모습들, 다시 한 번 경모를 머금고 보고 듣고 읽어 본다. - “청우재(聽齋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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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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