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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정룡 칼럼] 역사의 흐름을 거스르는 한국 이념논쟁
    ●김정룡(다가치 포럼 대표) 현시대 유명 정치학자로 손꼽히는 하버드대학교 샤무엘 헌탕턴 교수는 1996년 저서 『문명의 충돌』을 출간했다. 책이 나오자마자 베스트셀러로 반응이 뜨거웠다. 그는 “1989년 베를린장벽이 무너지고 2년 후 소련이 해체됨에 따라 냉전 시대가 종말을 맞았다. 냉전 시대 인간은 대체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두 진영의 이념에 각각 속해 있었다. 냉전이 종말 된 미래사회에서는 이념이 무의미해졌고 따라서 사람들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갖게 되면서 다른 귀속처를 찾게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 귀속처가 바로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라고 제시하였다. 그가 말한 귀속처는 새로운 문명이 아니라 과거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실제로 탈냉전 후 지구촌의 인간무리들은 민족문화, 전통문화, 종교문화에로 재편되어가고 있는 추세이다. 중국의 경우 개혁개방 전 해외 화교 화인들 중 고국을 못 마땅해하는 사람들도 개혁개방 이후 즉시 돌아서서 고국에 투자를 서슴지 않았다. 아세아 최고 부자 리카싱(李佳成)이 투자에 나서자 주변에서 ‘사기당하면 어쩌냐?’고 말리자 그는 ‘사기당해도 고향사람들에게 당하는 것인데 사기라 생각하지 않고 도와주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라고 말했다. 재벌은 남다른 배포가 있는 법이다. 싱가포르 리콴유(李光曜) 전 총리는 본래 반공자였다가 개혁개방 이후 유교 전도사를 자칭하고 나서 중국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 이것이 바로 이념을 탈피하여 민족문화에로 회귀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2008년 북경올림픽 개막식 주제가 공자였는데 이것은 전통문화에로의 회귀를 뜻한다. 1990년 초 동구권에서 있었던 코소보 인종청소 전쟁은 종교문화에로의 회귀를 의미한다. 아무튼 세상은 헌팅턴 교수의 예언대로 흘러가고 있는 추세이며 이미 새로운 역사 흐름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지구촌의 흐름을 역행하는 곳이 하나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한반도이다. 동서 독일이 통일되고 남북 베트남도 통일되어 하나의 국가, 하나의 민족문화로 굴러가고 있다. 오로지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은 것은 남북한이다. 1990년 베이징아세아게임 때 한국관광객이 대량 백두산투어에 나섰다. 그때 한국여행사 에스코트 00사장이 한 말이 지금도 뇌리에서 생생하게 맴돌고 있다. “참 세월이 놀랍게 변했어요. 우리가 중국 땅을 밟으면서 백두산 구경을 할 것이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현실로 되었어요. 이 추세대로라면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남북통일도 10년이면 되지 않겠어요!” 그 후 2000년 김대중 대통령께서 북한을 방문하자 매체들이 ‘10년 안에 통일이 이뤄질 것’처럼 떠들었다. 그런데 그 후 강산이 두 번 변하고도 3년이란 세월이 흘러가고 있는 현재 남북통일이 가까워지기는커녕 점점 더 요원해지다못해 요즘은 아주 적대관계가 심각해지고 있는 중이다. “가장 중요한 게 이념이다.” 윤석열 대통령이 일전에 국무회의에서 한 발언이다. 시중에서는 모두 뜬금없는 발언이라고 하기도 하고 때아닌 이념타령이라고 공격하기고 한다. 윤석열 대통령의 이 발언이 확실히 케케묵은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킨 것은 사실이다. 이게 무슨 시대인데 아직도 이념타령이라니? 역사를 거스르는 행위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요즘 한국 사회는 홍범도 장군의 정체성을 갖고 논쟁 중이다. 양 진영으로 나뉘어 치열하게 다투고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일이다. 1943년 홍범도 장군이 사망할 당시에는 침략당한 약소국가들에서 나라마다 민족주의가 우선이지 이념과 사상이 우선 과제가 아니었다. 강대국들도 마찬가지로 이념을 떠나 미국과 소련이 협력하여 반파시스 전쟁에 돌입하였다. 홍범도 장군이 소련공산당에 가입하여 활동한 것은 사실이나 오늘날 이념논쟁을 일으킬 사안이 아니다. 한국 정치는 할 일이 하도 없어서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문제는 왜 윤석열 대통령이 이념을 최대 이슈로 들고나왔는지? 맥락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 일부 진영에서는 아직도 빨갱이타령이 심각하게 벌어지고 있다. 종북좌파타령을 70년 동안 벌여오다가 요즘에는 종북좌파 타령이 질리기도 하고 그 실체도 주목을 받기가 조금 약발이 떨어져 친중좌파 공격으로 방향을 틀고 화살을 돌리고 열을 올리고 있다. 필자는 얼마 전에 한국 지인의 소개로 한국 엘리트들이 참여하고 있는 카톡방에 가입한 적이 있다. 카톡방은 흔히 그렇듯 좋은 정보도 나누고 서로 필요한 교류도 하고 인맥도 넓히고 등등 좋은 점이 많다. 하지만 인간무리에는 취향이라는 것이 있기 마련인데 그 취향이 정치적인 성향이 강하면 골머리가 아파난다. 어느 한 분은 윤석열 대통령을 찬양하는 ‘윤비어천가’를 올렸는데 조선 창시자 이성계를 찬양한 ‘용비어천가’를 저리 가라 할 정도다. 전체주의 사회에서 수령을 찬양하는 ‘어천가’보다 훨씬 뛰어난 솜씨로 현직 대통령을 찬양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통령을 이렇게 신을 찬양하듯 하는 것을 처음 본다. 일각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문재인 전 대통령을 평가하는 기준이 극명하게 나뉘는데 요약하면 이렇다. 문재인은 빨갱이고 북한 간첩이다. 나라를 북한에 팔아 먹는다.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사고방식을 갖춘 사람이라면 아무리 좌파 성향을 지닌 대통령이라 할지라도 설마 나라를 팔아먹을 수가 있을까? 이렇게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그들은 상식을 벗어나 비합리적인 주장을 하면 이에 동조하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억지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대통령이 친미를 확실하게 하면 다른 분야가 조금 떨어지더라도 문재인처럼 나라를 팔아먹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생각이 그들에게는 굳건하게 박혀 있다. 윤석열 대통령을 신을 찬양하듯 하는 행위는 필자와는 하도 상관없는 일이라 개의치 않고 그냥 넘겨버리고 말았는데 다음 일은 도무지 지나칠 수가 없었다. 기름 개구리를 산 채로 끓는 기름에 넣어 튀기다가 물을 넣고 끓여 먹는다. 한 분은 친중좌파들을 개구리 산 채로 튀겨먹고 끓여먹듯이 해야 한다는 내용의 글을 올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지경으로 정신이 아찔해졌다.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나면 그만이라는 속담이 있다. “미친 아낙네의 악담보다 더 저질스럽다.”는 말을 남기고 나가기를 해 버렸다. 종북좌파 타령이나 새롭게 등장하고 있는 친중좌파 타령이든 모두 같은 이념타령이다. 이런 이념타령이 시중에서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고 그 세력이 만만치 않기 때문에 대통령의 이념논쟁을 때가 아닌 것이라 하거나 뜬금없는 일이라는 지적은 헛발 짚는 일이 아닐까? 생각된다. 한편 한국사회에서 아직도 공산주의 빨갱이 타령이 심각한데 진짜 공산주의가 무엇인지? 아는 자가 얼마나 될까? 의문이다. 무엇을 대상을 공격하려면 그 대상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나서 공격해야 마땅하나 한국에서 공산주의 빨갱이 공격은 실체를 모르는 막무내식이어서 안타깝다. tvn방송에 <어쩌다 어른>이라는 강연프로그램이 있다. 몇 년 동안 출연을 가장 많이 했던 최진기 강사가 있었다. 그는 자칭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이다. 액면 그대로 믿기로 하고 그가 이해하고 있는 공산주의란 무엇인지?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노동 분배 원칙은 ‘능력에 따라 일하고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이다. 최진기 강사는 이 공산주의 핵심원칙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마르크스는 아마 아버지가 돈을 벌 능력이 있고 그 돈을 자녀가 학비로 사용하는 케이스에서 힌트를 얻어 내놓은 이론일 것이다.” 이어서 그는 유명 스타 연예인 강동원의 사진을 보여주면서 “이 사람을 어떻게 수요에 의해 분배할 것인가?”고 희죽거리면서 공산주의를 형편없는 애들장난처럼 매도하고 조롱하는 것이었다. 만약 공산주의가 최진기 강사의 말처럼 그렇듯 유치한 것이라면 어떻게 지구촌 반 되는 인간무리가 추종했겠는가? 능력에 따라 일한다는 것은 인간이 고도의 의식을 갖추면 타인의 능력과 비교하지 않고 또 타인의 노동기여도와 비교하지 않고 나의 능력껏 사회에 기여하는 것을 의미한다. 수요에 의해 분배한다는 것은 공산주의사회는 물질이 풍부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되어 불필요한 물질을 탐내지 않고 사치를 탐내지 않는 전제하에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는 것을 의미한다. 요점은 물질이 풍하고 인간의 의식이 고도로 발달된 사회에서 실천가능한 원칙이라는 것이다. 빨갱이 뜻은 사상이 빨갛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필자의 부친은 평생 당지서를 맡았는데 사상이 붉다못해 둘째 아들이 휴학하는 해에 참외 밭을 대신해 보게하고는 아들이 생산대 참외를 먹었다고 하여 장부에 가을에 떼어내게 기입해 놓았다고 한다. 필자가 자랄 때 동네 어른들이 늘 저한테 이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너의 부친은 진짜 빨갛다.’는 말을 반복했다. 최진기의 자칭 최고 강사 주장을 액면 그대로 믿는다면 대한민국 최고 인문강사의 공산주의에 대한 이해도가 이 수준이라면 진짜 대한민국에서 공산주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자가 얼마나 될까? 묻지 않을 수가 없다. 한국 서강대 00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공산주의는 제도로서 실천은 실패했지만 그 이념과 사상은 여전히 유효하다.” 지구상에서 유일하게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이직도 케케묵은 이념논쟁에 빠져 있는 이 민족의 현실. 언제 가야 통일되고 하나가 되어 부질없는 다툼에서 벗어날 것인지? 민족의 운명이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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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04
  • 일본 핵폐수 해양 방류 시작과 과정 그리고 결과는?
    ● 철 민(논설위원) 한·중·일 해양 안전 문제를 둘러싸고 오랫동안 신경전을 벌였던 일본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처리 문제가 24일 일본 정부의 바다 방류 개시와 더불어 또 새로운 논쟁거리를 몰아오고 있다. 우선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행위를 두고 가장 강력하게 반대하는 나라들로는 일본의 이웃 국가들인 중국과 한국(정당과 사회단체 등), 북한 등과 거리가 멀지만, 남태평양 도서국의 반발도 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중국은 후쿠시마 오염수가 바다로 흘러들기 시작해서 240일이면 중국 연해에 도착한다며 정부로부터 국민 매 개인에 이르기까지 중국은 일본 정부의 핵 오염수 방류 결정을 국제 공공의 이익을 무시하는 극단적으로 이기적이고 무책임한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고 있다. 한편 중국 정부는 일본산 수산물 수입의 전면 중단을 발표하였다. 한국 언론도 한국의 여러 해산물 시장이 거의 텅 비어 있어 어부들은 미래의 생계를 걱정하고 있다고 보도하고 있다. 24일, 연합뉴스에 따르면 제주도 동문어시장에서 20년 넘게 해산물 장사를 해온 한 상인은 “예전에는 오전 10시경과 오후 5∼7시(두 시간대)에 장사가 안될 때도 시장은 붐볐지만, 요즘은 손님이 없는 텅 빈 고속도로”라며 “코로나19 기간에는 장사가 더 잘됐다”라고 우려했고 한국 서부 해안 도시 군산 출신의 한 어민은 “내일 해산물 경매장에 간다고 생각하니 답답하다”라며 “해산물 소비량이 4분의 1로 줄었고 가격도 더 낮아질 것 같다”라고 탄식했다. 부산종합어시장에서는 조기 한 박스가 보통 4만 원 또는 5만 원에 팔리는데, 전국 해산물의 약 30%가 이 시장에서 판매되고 있다. 이번 주 수요일(23일)에는 조기 한 박스가 정상가의 절반 이하로 판매되었으며, 한국인들의 주요 해산물인 멸치는 평소보다 10~20% 정도 가격이 저렴하게 판매되었다. 24일,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담화문을 발표하여 일본이 이날 후쿠시마 제1 원전의 핵 오염수 방류를 개시한 것은 지구 생태환경을 파괴하고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행위라고 강력히 규탄하면서 핵 오염수 방류계획을 강행하는 것은 자신들의 사욕을 위해 인류에게 핵 재앙을 초래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반인도적 범죄행위라고 주장했다. 이외 후쿠시마 핵 오염수를 바다로 방류하기로 한 일본의 결정을 알게 된 남태평양의 섬나라 피지에 있는 한 비정부기구가 공개적으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반대하는 글을 올렸으며 또 피지 수바에서 일본의 핵 오염수 방류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는 시위에 나서기로 했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은 해외의 국가와 사회단체의 규탄은 물론 일본 자국 내 어민 단체와 국민의 반발을 사고 있다. 특히 1945년 원폭 피해자 후손들이 후쿠시마 원전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강력하게 항의하고 나섰다. 교도통신은 24일 원폭 피해자 후손들로 구성된 일본-전국 원폭 피해자 2세 단체 연락 협의회가 나가사키시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후쿠시마 오염수의 바다 방류에 항의했다고 전했다. 이 단체는 원자폭탄의 피해자인 히로시마가 견딜 수 없다며 성명을 발표했고, 이 성명은 총리 관저에 우편으로 발송됐다. 성명은 “원폭 피해자 2세들은 부모들이 방사능 영향으로 고통받는 것을 오랫동안 목격했고, 자신들도 유전적 영향을 배제할 수 없어 건강을 염려하고 있다”라며 “정부와 도쿄전력이 책임을 지고 육상에서 보존·관리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이 외에도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비난하는 목소리는 이루다 나열할 수가 없을 정도로 많고도 높다.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은 국제원자력 기구(IAEA)의 감찰을 받은 것은 사실이다. 우리는 IAEA의 권위성과 전문성은 인정하지만, 이 기구의 분석과 결론 모두를 믿는 건 아니다. 특히 IAEA 역시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계획에 대해 명확한 지지 혹은 반대 의사를 표명하지도 않았다. IAEA 역시 사상 처음 겪어보는 일이라 수치나 분석을 통해서는 함부로 결론을 내릴 수 없은 것으로 보인다. 세상의 모든 일이란 시작이나 과정을 통해서는 어떤 결과가 나타나리라고는 장담할 수 없는 것이다. 그 사례로 1945년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기 전에는 그 위력이 그 정도로 강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자료도 있다. 다음 우리는 일본이란 나라에 대해 더군다나 믿을 수 없다는 추리가 나온다. 일본인을 두고 말하자면 좋게 말하면 “총명하다”하고 할 수 있지만 다른 각도로 말하면 “잔머리를 잘 굴린다” 혹은 “비열하고 간교하다”는 평가도 나온다. 역사적으로 보면 일본은 조선과 중국 그리고 기타 태평양 지역 국가와 지역에 큰 피해를 주었다. 그것도 아주 음융하고 비열하고 잔혹한 수단과 명분 등으로 말이다. 조선 왕조의 명성황후 음해 사건, 중국 대만 강점과 한일 합방 그리고 지난 세기 30~40년대 조선에서 위안부를 모집할 때는 “방직공장에 취직시켜준다”는 등 감언리설로 순진한 소녀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했고 1920년대 말의 만주에서의 황구툰(皇姑屯) 사건과 루거우차오(卢沟桥) 사건 등을 분석 조명해보면 당시 일본이 강하다기에 앞서 음흉하고 뻔뻔스럽다는 평가가 나온다. 특히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 시 일본은 한편으로는 미국과 담판함과 아울러 이 어마어마한 사건을 저질렀다는 점에서 일본을 함부로 믿어서는 큰 코 다친다는 분석도 함께 나온다. 종합적으로 일본을 평가하면 일본인의 겉면을 보면 예의가 바르고 친절하고 생활이 아주 규칙적으로 보이지만 일본인의 속은 도무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즉 겉과 속이 같은 한국인과는 달리, 웬간해서는 화를 내지 않는 중국인과는 달리 또한 거만하지만 우쭐대지는 않는 서양인들과는 달리 일본인한테는 도무지 믿음이 가지 않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피해국에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역대의 독일 총리들과는 정반대로 일본은 오늘 현재도 기나긴 침략 역사에 대해 사과하거나 반성하지 않고 있으며 심지어 교과서까지 뜯어고치면서 군국주의의 침략사를 미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을 두고 각국은 여러 가지 입장을 표명하고 있다. 강경한 반대 입장을 표명하는 중국과는 달리 미국은 지지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고 한국 정부는 “지지도 반대도 하지 않는다”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입장으로 나오고 있다. 여기서 미국은 태평양을 사이 두고 일본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속 궁리가 있는가 하면 다른 일종의 전략이 내포되어 있을 수도 있고 한국은 자국민들한테 미칠 손실보다는 일본과 정부 사이의 마찰을 우려하는 듯한 양상이다… 한편 일본의 핵 오염수 바다 방류 강행에 대해 지금 과학적이고 안심할 수 있다는 학술적 수치는 있으나 그 영원성을 장담하는 언사는 한 마디도 없다. 어찌 됐든 일본의 핵 오염수는 방류하지 않는 것이 방류하는 것보다는 ‘명지한 선택’이라 보여지며 방류하는 것으로 나쁜 결과가 있을지언정 반대로 좋은 결과는 제로라는 것만은 분명한 것이다. 가령 앞으로 방류 과정에 혹시라도 일본 자국 혹은 주변국들에 피해 사례라도 발생한다면 그때 가서 아무리 미국이나 국제원자력기구라 해도 결코 일본을 위해 대변할 수는 없을 것이며 일본이라는 이 섬나라의 위망은 일락 천장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서기 2023년 8월 24일, 이날은 인류 역사상에 영원히 기록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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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8-25
  • 독도는 ‘무주지(無主地)’ 섬이 아니었다.
    ● 김정룡 (多가치포럼' 대표) 민간속설에 ‘이웃이 먼 사촌보다 낫다.’는 말이 있다. 가령 이웃집에서 경사가 생기면 함께 기쁨을 나누고, 안 좋은 일에는 같이 슬픔을 나누고, 급한 일이 생기면 이웃이 가장 먼저 달려와 돕는 등 서로 상부상조하면서 삶을 영위해온데서 생겨난 속담일 터. 민간백성들의 삶은 대개 이웃끼리 화목한데 비해 한 사람, 한 사람으로 구성된 국가의 경우 이웃나라끼리 사이는 그다지 화목하지 못하다. 바다를 사이 두고 이웃으로 살아온 한국과 일본은 역사적으로 좋은 때도 있었지만 서로 반목하는 일들이 더 많았고 지금까지도 해묵은 갈등들이 풀지 못한 숙제로 남아있는데 그 가운데서 독도의 영유권 문제, 종군위안부 문제, 일본전범기업 강제징용 배상문제 등이 주요 쟁점으로 꼽힌다. 최근에는 후쿠시마 오염수 방류 문제가 새로운 갈등으로 부상하여 오랜 갈등들에 얹어져 가뜩이나 썰렁한 냉기를 더욱 차갑게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남아 내려온 갈등도, 새로 생겨나고 있는 갈등도 모두 일본 측의 책임이 크건만 정작 일본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책임을 상대방에게 떠넘기는 후안무치한 태도를 보이고 있어 아주 눈살을 찌푸리게 한다. 어느 한 착실한 역사학자의 통계에 의하면 한반도는 서너 차례 모자라는 1천 번의 침략을 당해왔다고 한다. 무려 1천 번이나 침략을 당해왔으나 남을 침략해본 적이 단 한 번도 없다고 하니 얼마나 착한 민족인가? 누구인가 우스갯소리로 말했다. “백의민족은 맞기만 하고 때릴 줄 모르니 선천적으로 DNA에 문제가 있다”고. 아무튼 그 1천 번 가운데서 일본의 침략이 다수였다. 일본은 지진이 많고 태풍이 많기로 지구촌에서도 이름난 곳이다. 게다가 땅이 척박하여 먹을 것이 늘 부족했다. ‘제집’ 내에서 해결책이 안 보이니 눈을 ‘옆집’에 돌릴 수밖에 없었다. 남의 것을 빼앗아오는 약탈행위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예로부터 경상도와 전라도 해안가에 왜구의 노략질이 들끓었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곡식도 빼앗고, 옷도 강탈하고, 여자도 납치해가고 등 눈에 보이는 쓸 만한 ‘물건’이면 전부 빠트리지 않고 싹쓸이해갔다. 백의민족의 전통인사말은 ‘무사한가?’인데 그 유래가 바로 빈번한 외침을 당한데서 생겨난 것이다. 일본은 왜구의 노략질도 빈번했을 뿐만 아니라 정부차원의 침략도 감행하였고 그 궁극적인 목적은 한반도 식민화였다. 1592년 풍신수길이 발동한 임진왜란이 좋은 근거이다. 명나라 조선 파병 때문에 일본이 임진왜란에서 실패했으나 그 후 결코 한반도 식민화 정책은 포기하지 않았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조선정부는 청나라와 일본을 불러들인 것이 화근이었다. 큰 전쟁을 피하고자 조선정부는 동학농민운동 측과 협상하여 평화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고 청나라 군과 일본군 모두 철회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모처럼 좋은 기회를 만난 일본이 철회할 리가 만무했다. 청나라와 군대 철회로 갈등을 빚다가 드디어 무력충돌이 발생하였고 그것이 바로 ‘중일갑오전쟁’이다. 일본을 ‘쌰오르번(小日本)’으로 하찮게 여겨왔던 청나라가 생각 밖으로 일본한테 패배한다. 조선을 청나라 속국에서 벗어나게 하고 ‘독립문’까지 세워준 일본이지만 정작 조선은 독립을 하지 못하고 일본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만다. 호랑이가 나간 자리에 승냥이가 들어온 셈이었다. 일본은 강대했던 청나라를 물리쳤으나 또 다른 강대한 적인 러시아와 맞붙어 싸워 이겨야 만주와 조선에서의 이권을 모두 독차지할 수가 있었다. 1904년 일본은 한반도에서 자기네가 마음에 드는 곳에 어디든 군사기지를 세울 권리가 있었다. 러시아와 맞붙으려면 동해바다 섬에 군사기지를 세울 필요가 있었다. 하여 일본의 레이더망에 독도가 들어왔다. 1905년 일본은 독도를 ‘무주지(無主地)’라 주장하면서 영토편입을 시도하고 시마네현(島根縣)에 지방고시를 알린다. 남의 나라 땅을 침략하고 그 땅을 ‘무주지’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드는 수법은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을 식민지화 하는 과정에서 활발하게 써 먹었던 수법이었다. 즉 일본이 유럽열강들한테서 배운 것을 조선침략에 활용했다는 뜻이다. 독도는 1905년 전에 과연 ‘무주지’였을까? 아니다. 마찬가지로 유럽열강들이 지구촌에 이르는 곳마다 모두 ‘무주지’ 땅들이었을까? 아니다. 그런데 무슨 근거로 ‘무주지’라 주장하는 것일까? ‘발견자우선주의’라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활용했던 것이다. ‘발견자우선주의’의 본뜻은 최초로 발견한 사람들이 소유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인데 백인들이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개척할 당시 수많은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다. 결코 백인들이 최초의 발견자가 아니다. 분명히 그 땅엔 인디언이라는 주인이 이미 있었다. 해가 지지 않는 식민지를 개척한 그 땅들에 주인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이미 오래 전부터 발견하고 삶을 영위해온 원주민들이 거주해왔다. 그렇다면 왜 유럽열강들이 ‘발견자우선주의’를 주장하면서 자기네 소유로 만들었을까? 주인이 이미 있었는데 ‘무주지’라 주장하고 거기다 한 술 더 떠 ‘발견자우선주의’를 떠드는 근거는? 유럽열강들은 지구촌 곳곳에 살고 있는 인류 집단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그 땅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3C’ 즉 기독교(Chrisianity), 문명(Civilization), 상업(Commerce)을 통해 식민지 정복을 정당화했다. 1455년 교황 니콜라오5세는 아프리카 서쪽 해안의 영토에 대한 포르투갈의 권리를 승인했다. 최초의 탐험시대부터 이미 그 땅에 인류가 살고 있든 말든 국가가 있든 말든 유럽열강들 중 그 누가 먼저 그 땅에 도착하면 자기네들이 주인이라는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를 적용했던 것이다. 독도는 1905년 이전에 조선의 소유이고 조선이 영유권을 갖고 있다는 역사적인 증거는 충분히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구산업혁명과 식민지개척 공부에 가장 모범생이었던 일본이 서구열강들이 식민지 개척 과정에서 정당화로 써먹었던 ‘무주지’와 ‘발견자우선주의’ 무기를 휘둘러 독도 영유권을 시마네현에 편입하는 고시를 알리는 수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샌프란시스코 조약이 있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일본 소유로 편입되었던 것들을 바로 잡는 조항에 제주도, 거문도, 울릉도 등 제도들이 조선의 영유권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조선의 지리는 육지와 3170 개 섬으로 구성되어 있어 섬마다 일일이 모두 표기할 수가 없었고 그때 독도가 빠져있었던 것을 일본이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다. 즉 이것 때문에 일본은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줄기차게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한국정부가 독도에 대한 소유권을 갖고 군대가 주둔하여 관리하고 있다. 6.25 전쟁 때 한국군 36명의 용사가 독도를 굳건하게 지켜냈고 지금까지도 한국이 독도에 주둔하고 관리하고 있다.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존재의 일차적인 이유는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다. 2016년 세월호사건과 지난해 10월 발생했던 이태원참사사건에 전체 국민이 분노하는 이유가 바로 정부가 국가의 존재이유를 방기했다는 것이다. 다음 자국의 영토를 지키는 것도 국가존재의 주요 이유이다. 영토를 잃는 것은 안전을 잃어버리는 것과 동일한 맥락이기 때문이다. 한국정부의 독도에 대한 입장은 다음과 같다. “독도는 역사적, 지리적, 국제법으로 명백한 우리 소유의 영토이다. 독도에 대한 영유권 분쟁은 존재하지 않으며 독도는 외교 교섭이나 사법적 해결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확고한 영토주권을 행사하고 있다. 우리 정부는 독도에 대한 어떠한 도발에도 단호하고 엄중하게 대응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독도에 대한 우리의 주권을 수호해 나아간다.” 다만 걱정이 하나 있다. 일본정치주류세력인 우익이 줄곧 ‘독도는 일본 땅’이라는 주장에 대해 올해만 세 번 한일 양국정상이 만난 자리에서 아무 언급도 없었다. 윤석열 정부의 과거사를 묻지도 따지지도 말자는 대일외교방침 때문일까? 일각에서는 이대로 나아간다면 일본이 독도를 완전히 빼앗아가기까지는 아니더라도 공동관리 주장을 들고 나오지 않을까, 걱정된다고 말한다. 독도분쟁은 대한민국의 자존심 문제이다. 자존심을 잃으면 나라의 존재이유가 사라질 만큼 국민의 사기가 저하된다. 그러므로 독도만은 끝까지 지켜내야 한다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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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5-31
  • [기고] 전주국제영화제 정준호-민성욱 공동집행위원장 투톱체제 성공을 바라며
    독립영화의 요람 전주국제영화제가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로 전환해 정체성 확립과 대중성 확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을지 관심을 받고 있다.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는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민성욱 부집행위원장과 정준호 영화배우를 공동집행위원장으로 의결했고, 지난 26일 조직위원장 우범기 전주시장은 시장실에서 위촉장을 전달했다. 마력은 동력의 단위로 높을수록 좋다. 이번 쌍두마차 체제가 앞으로 3년 동안 시너지 효과를 일궈낼 것으로 기대된다. 백제예술대학교 방송연예과 교수인 민성욱 신임 공동집행위원장은 전주국제영화제 출범부터 조직위의 사무국장 및 부집행위원장을 역임한 '지킴이'이고, 정준호 신임 집행위원장은 높은 인지도를 가진 대중성을 확보한 영화배우이기 때문. 어떤 조직이나 더 큰 발전과 생존을 위한 변화와 혁신이 요구되는 시점이 있다. 세계 초일류 전자제품 회사로 대한민국을 빛내는 삼성이 만일 제일제당 시절처럼 사카린을 밀수해 설탕을 팔던 그대로 운영되고 있다면 지금의 영광도 없었을 것이다. 2020년 제1회 전주국제영화제는 비경쟁 위주로 실시됐고 올해 2022년 23회 영화제는 국제경쟁, 한국경쟁, 한국단편경쟁, 특별부문(한국 장편 다큐멘터리, 지역공모작품, 비경쟁 아시아 영화)로 진행되며 업그레이드 됐다. 2023년 24회부터 3년간 시행될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기존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보다 더 대중성을 일으켜 더욱 큰 소통을 통해 영화계 발전과 주최지인 전주 지역발전에 더 크게 기여하는 영광이 실현될 지 귀추가 주목된다. 쌍두마차 체제가 된 전주국제영화제는 전주시민의 선택을 받은 우범기 시장이 조직위원장으로 이끄는 마차다. 우 조직위원장이 전주시 발전을 위한 고뇌 끝에 내놓은 묘수라고 풀이된다. 시장은 시민의 행복과 시의 발전을 도모하는 자리기 때문이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에 대해 기대가 큰 반면에 걱정과 반감도 없는 것은 아니다. 지난 14일 이사회에서 공동집행위원장 체제가 수립되자, 권해효 배우, 방은진·한승룡 감독이 이사직을 사퇴했다. 이사회에서 자신의 의견과 다르게 의결되었다고 사퇴하는 것이 영화제에 대한 진정성일 수도 있지만 무책임하게 보일 수도 있는 지점이다. 고 자니윤(고 윤종승) 코미디언은 2013년 2월28일 해외동포들과 판문점을 방문한 후 가진 뒷풀이에서 "한국 사람들은 너무 똑똑해요. 어떤 사람이 어떤 일을 하려고 하면 이XX 안돼, 저XX 안돼 하는거에요. 일을 해보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미국에서 한국계 코미디언으로 성공하고 그의 인프라를 총동원해 조국 대한민국 관광발전을 위해 기여하고 싶었으나 좌절된데 대한 의견으로 들렸다. 대한민국은 625전쟁 후 폐허에서 일어나 세계 경제 10대 강국이 되었고 민주주의를 이루어낸 나라다. 지난 80년간 대한민국이 변화가 없었다면 우리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고 억압속에서 지옥살이를 하고 있었을 게 자명하다. 공동집행위원장 체제는 전주국제영화제 조직위원회 이사회에서 결정된 사안이다. 임기는 3년이다. 3년간 응원하고 3년 후 큰 성공과 발전을 이루면 박수를 치고, 변화의 결과가 좋지 않으면 그때 가서 비판해도 늦지 않다. 한국언론인연대 박상진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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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2-30
  • "일본 Z세대 중국에 호감" 중국 호감도 세대별로 다른 원인
    ●오카다 미츠루(일본 저널리스트)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가 17일 방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3년 만에 처음으로 중·일 정상회담을 갖고 악화된 양국 관계를 '재조정'하기 시작했다. 기시다는 대중 관계 개선에서 반중 여론과 대중 강경 자민당 우파의 제약을 받고 있지만 반중 여론을 거론하면 일본의 Z세대(18~29세)의 중국에 대한 호감도는 40% 이상으로 다른 연령층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Z세대의 정치적 의지가 선거의 키를 쥐고 있는 세계적 흐름을 보면 '반중 여론'과 '우파'에만 의존하는 기시다 외교가 위태롭다. 45분 동안 진행된 이번 일-중 정상회담은 3시간여에 걸친 중-미 정상회담에 비해 일본의 대중국 중요성이 떨어진다는 점을 부인할 수 없다. 일·중 정상은 회담에서 국방부 해상 및 항공 연락 메커니즘의 직통 전화선 조기 개통, 새로운 중일 고위급 경제 대화의 조기 개최, 새로운 중일 고위급 문화교류 협의 메커니즘 회의 조기 개최 등 몇 가지 공감대를 형성했다. 향후 중일관계 개선의 지표 중 하나로 정상 간 상호 방문을 실현하는 것이다. 하지만 기시다 총리의 대중 관계 개선의 한 가지 저항은 '반중(反中)' 여론 고조다. 일본의 대중(對中) 인식 악화에도 불구하고 일본 내각부가 매년 발표하는 '외교에 관한 여론조사'에는 흥미로운 수치가 나온다. 예를 들어 지난 1월 발표된 조사에서 응답자의 20.66%가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지난해보다 1.4% 증가)고 답했다.그러나 연령별로는 Z세대 중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비율이 41.6%로 전체보다 배 이상 많았다. 60~69세 13.4%, 70세 이상 13.2%에 비해 Z세대는 중국에 대한 친근감이 높다. 그렇다면 왜 연령대에 따라 중국에 대한 태도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일까.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분석하고 싶다. 나는 젊었을 때(저자는 1948년생) 중국의 사회주의에 대한 동경심을 갖고 있었고, 일본이 침략전쟁을 일으켰기 때문에 중국에 대한 속죄의식을 갖고 있었다. 중국이라는 '타자' 위에 자신의 생각을 투영해 기대를 부풀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일본이나 구미의 통치체계를 중국의 정치와 사회에 투영해 일본이나 구미의 기준으로 중국을 관찰하고 판단한다. 요즘 60~70대 일본인들이 중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끼지 못하는 이유다. 그러나 Z세대는 생각이 다르다. 내가 가르친 대학생의 경우 태어나기도 전에 일본 경제가 침체에 빠졌고, 일본 경제의 고도성장기를 경험하지 못했다. 이들이 철들었을 때 중국은 이미 미국을 추격하는 대국이 됐고 IT 기술에서 일본을 앞섰으며 애니메이션과 게임 품질에서도 일본을 추월하고 있다. 또 Z세대가 다니거나 아르바이트를 하는 많은 곳에서 중국 유학생과 접촉할 기회가 종종 있다. 다시 말해 Z세대는 중국을 일종의 '대등한'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중국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없기 때문에 특별한 환상은 없다. Z세대와 밀레니얼 세대가 사회의 버팀목이 될 때 일본인 전체의 대중국 관념도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쇠락이라는 역사적 변화, '탈아입구((脫亞入歐)'의식을 심리적으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세대가 '2선 후퇴'하면 일본의 '반중' 여론도 달라질 것이다. 기시다 정권도 언제까지 반중 익찬 여론에 의존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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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11-23

실시간 칼럼/기고 기사

  • 조선족 국회의원? 아직은 천방야담
    ■ 김정룡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 소장) “비례대표 이야기가 정치권에서 먼저 나오진 않았을 거다. 여당도 야당도 쉽사리 중국동포를 공천하는 일이 쉽지 않다. 당장 선거구에서 동포들에게 과도하게 친화적인 정책을 실시했을 경우 내국인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전략상으로 보면 망하는 수가 있다. 동포들이 다수 거주하는 지역의 여론이 꼭 좋지는 않다. 지역구가 슬럼화 된다고 해서 떠난 분들도 많다. 다문화 사회라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만 그 시점이 지금이냐고 물으면 ‘아직 시기상조다’고 말할 수 있다. 냉정하게 들리겠지만 이게 현실이다.” 한국00언론 기사의 한 대목이다. 여기서 말하는 정치권은 여당과 야당의 공식적인 입장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20대 총선에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국회의원 공천 얘기는 여당과 야당이 공식적으로 발표한 것도 없고 또 발표할 가능성이 매우 희박하다. 이것이 현실이지만 재한조선족사회에서 비례대표 얘기가 들끓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지난해 말부터 올해 들어 4.13총선을 앞두고 여당이든 야당이든 일부 후보들(후보들이 직접 나서는 것이 아니라 조선족사회와 인맥이 닿는 한국인을 지정)이 재한조선족사회 표를 의식하여 개별단체장들을 찾아 이런저런 약속을 하고 또 귀가 솔깃한 공약을 던져준다. 일부 단체장들이 확인을 거치지 않고 확정되지 않는 공약(公約)이 아닌 공약(空約)을 떠들고 다닌다. 많은 내용의 空約 가운데 20대 총선에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국회의원 공천문제도 포함되어 있다. 아직 당 차원에서 거론조차도 되지 않은 일을 마치 이미 확정된 것처럼 공공연하게 ‘홍보’한다. 한 표라도 더 얻으려는 얄팍한 전략에 의해 생겨난 풍문이 사실처럼 되어가고 있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이 空約이 公約처럼 잘 먹혀드는 이유가 있다. 이자스민 때문이다. 수십 분의 1밖에 되지 않는 필리핀 출신 이자스민이 19대 국회의원이 되었으니 4년이 지난 지금 70만 조선족사회에 당연히 국회의원이 한 명쯤은 공천되어야 한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일각에서는 이를 기정사실로 보는 경향이 짙다. 미안한 일이지만 재한조선족사회는 한국정치권의 중시를 받지 못하고 있다. 왜일까? 적지 않는 사람들은 그 이유를 필리핀 사람들은 적지만 단합이 잘 되어서 국회의원을 배출한데 비해 조선족은 머릿수만 많았지 단합이 되지 않아 국회의원을 배출 못한다고 떠들고 있다. 필자는 이렇게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되묻는다. 당신들 언제 필리핀 사람들을 만나보았다고 그들이 단합된 것을 눈으로 보았느냐?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는 근거도 없고 사실도 아닌 어처구니없는 주장이다. 19대 총선에서 여당이 이자스민을 비례대표로 공천한 것은 당시 한국정부가 다문화에 지원한 예산이 연간 2,800억원이 배경이었다. 천문학 숫자이다. 재한조선족사회에 지원한 예산은 서민 한 사람의 연봉의 반밖에 안 되는 1,200만원이었다. 정부의 입장에서 또 여당의 입장에서 천문학적인 정부예산을 퍼부으니 당연히 이를 대변할 국회의원이 절실히 필요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자스민이 공천 받은 것이지 단합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이방인’ 대표를 국회에 입성시키려면 명분이 필요한데 이자스민은 명분이 있었던데 비해 조선족출신 비례대표 공천은 명분이 없었다는 것이다. 4년 후 지금에 와서 조선족출신을 비례대표로 공천하는 것이 전혀 명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숫자적으로 70만 명이니 정부차원에서 해결해야 할 현안이 많고도 많다. 따라서 국회에 한 명쯤 입성하여 목소리를 대변해야 할 때가 되었다. 그렇지만 정치는 단순히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다. 힘의 논리로 움직일 수도 있고 국민을 설득시킬 확실한 명분이 필요할 수도 있다. 어떠한 방식을 떠나 조선족출신 비례대표를 공천했다가 내국인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게 된다면 당 차원에서 믿지는 장사이다. 그러므로 조선족출신 비례대표 공천을 받으려면 가만히 앉아서 되는 일이 아니다. 피동적으로 기다리면 되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능동적으로 움직여야 한다. 한국 언론에서 떠들고 있는 것처럼 60여개 단체가 뭉치고 있다는 움직임으로만 되는 것이 아니다(실제로 뭉치지도 않고 또 뭉칠 수도 없다). 또 더욱이 한국정치권이 자기들의 이해관계로 중시하는 일부 조직들은 마치 4.13총선용으로 존재하는 듯이 한국정치권에 비취지고 한국 언론에 오르내리는 것은 곤란하다. 00후보를 지지하고 그 대가를 바라는 식의 조직은 더욱 곤란하다. 조선족출신 비례대표는 이런 임시적이고 단기적인 눈앞의 이익을 쫓는 움직임에 의해 공천되는 것이 아니다. 능동적인 움직임은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힘을 발휘할 수 있다. 힘의 형성은 단순히 숫자로만 생기는 것이 아니다. 영향력이 있는 조선족사회 단체장들과 엘리트들이 한 자리에 모여 왜 조선족출신국회의원이 필요한지? 국회에 입성하면 무엇을 대변할 것인지? 재한조선족사회 현안이 무엇이고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재한조선족사회 중장기적인 발전을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할지? 충분히 논의하고 연구를 거쳐 문자화 해 갖고 여당과 야당을 찾아다니며 설득 작업을 발이 닿도록 해야 한다. 한편 재한조선족사회에 국회의원이 될 자격을 갖춘 인물이 있는가?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할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국회의원 자격 기준에 대해 정해진 것은 없지만 대체적으로 한국역사문화를 비롯해 다방면 지식수준을 갖춰야하고, 도덕적으로 검증되어야 하고, 일정한 자금력도 있어야 하고 재한조선족사회발전과 한국사회에 기여가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언변능력도 있어야 하고 리더십도 있어야 하고······ 등등, 가장 중요한 것은 정치 감각이다. 정치란 ‘ㅈ'자도 모르는 조선족이 국회의원이 된다면 재앙이 될 수 있다. 정치 감각을 익히려면 좋기는 구의원, 시의원을 거치면서 경험을 쌓는 것이 자산이 될 수 있고 또 이를 바탕으로 국회에 입성하면 더 큰 일을 해낼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초등학교도 다녀보지 못한 사람이 대학생이 되는 꼴이 되면 의정활동을 제대로 못해내는 것은 물론이고 동네망신만 남기게 될 것이다. 혹자는 한국문화에 서툰 이자스민도 국회의원을 맡고 있는데 조선족이 못해내겠는가고 반문할 수 있는데 사실 한국인은 외국인에 비해 동족인 조선족에 대해 모든 면에서 기대치가 훨씬 높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국회의원이 되고자 하는 조선족은 다른 외국인에 비하지 말고 스스로 자질제고에 힘써야 한다. 상술한 바와 같이 객관적으로 또 주관적으로 철저한 준비 과정이 없이 가령 운이 좋게 비례대표가 된다한들 안 되기만도 못하다. 어떤 루트의 라인을 타서 자격이 되지 않는 속이 텅 빈 00가 비례대표로 공천되면(물론 그럴 리가 없겠지만, 그러나 100% 배제할 수는 없다) 조선족 수준과 자질이 도마 위에 올라 여론의 물매를 맞을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그 한 사람의 수준과 자질이 전체 조선족을 대변하는 것이므로 동네 망신만 남길 것이고 추후 총선에선 비례대표는 더는 바랄 수가 없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재한조선족사회를 대변하는 일군인 비례대표를 바라겠으면 조직적인 준비도 반드시 이뤄져야 하고 후보가 되려는 사람들도 자신의 자격을 스스로 검증하고 또 객관적인 검증도 거치고 나서 철저한 준비가 마련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조선족 국회의원 얘기는 천방야담으로 흐지부지하게 끝나고 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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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8
  • 조선족 ‘이민정책’ 가능한가
    ■ 김범송 (칼럼니스트) 한국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의 ‘조선족’ 관련 발언이 세간화제로 부상했다. 저출산대책을 논의하는당회의에서 대표가 ‘조선족을 대거 아들여야한다’고 말한 것이 큰 파장을일으킨 것이다. 네티즌들은 ‘중국동포비하’발언,야당은 ‘황당무계한 저출산 대책’이라고 공격했다. 실제로 김대표의 발언은 맥락상 출산대책보다 조선족 유입을 통해 생산인구감소문제에 대처할 이민정책을 뜻한 것이다. 따라서 일각에서 ‘조선족이 애 낳는 기계냐’고 비난한 것은 김대표의 발언 취지를 다소 곡해한 측면이 있다.김무성 대표의 발언 문제점은 ‘조선족 이민’을 통한 저출산 문제 해결, 생산인구 감소 대비책으로서의 ‘이민정책’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측면이 매우 강하다는 것이다.1992년 한중 수교 이후 양국관계가 정상화되면서 중국 조선족이 ‘코리안 드림’을 위해 한국에 진출한지도 어언간 20년이 넘는다. 특히 2007년 방문취업제의 실시로 조선족의 유입이 본격화되었다. 2015년 10월 기준 한국체류 조선족은 65만명, 여기에 국적취득자 13만명을 합치면 그 수가 80만명에 달한다. 그들은 서울 대림동 등지에 ‘차이나타운’을 형성해 생활하고 있고, 2010년 이후 ‘정주(定住)화’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비록 처우가 많이 좋아졌지만 여전히 일상차별, 오해와 편견 속에서 이방인으로 생활하고 있다.현재 재한조선족들은 서울 영등포구, 구로구 등지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차이나타운’을 형성하여 가족친지 위주로 생활하고 있다. “서울대림동지하철 2·7호선대림역인근의조선족 주거지는한국속중국마을이다. 대림역인근거리에 한글과 중국어가 병기된 상점 간판이 어지럽게 들어서 있다. 중국 음식점과 옷가게부터 여행사, 휴대폰매장, 부동산알선업체, 장례업체까지구비돼 재중동포들의 생활에 큰 어려움이없다.” 한국언론에 비춰진‘차아나타운’의 모습이다. 아직도 중국식 생활방식을 고수하는 재한조선족은 한국인들에겐 ‘불편한 이웃’이며, 최근 조선족 강력범죄 발생으로 이들을 바라보는 한국인들의 시선은 차겁기만 하고 오해와 편견은 더 쌓여간다. 조선족들이 ‘중국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끼리끼리 살아가는 이유다.‘차이나타운’은 80만 재한조선족의 사회생활 축소판이다. 중국인 냄새가 물씬 풍기는 ‘차이나타운’의 주인공들은 ‘한국계 중국인’이라는 외국인등록증을 소지한 중국동포들이다. ‘차이나타운’에는 한국 특유의 스트레스가 없다. 독한 배갈에 느끼한 중국요리, 중국어가 섞인 한국어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다. 반면에 ‘주류사회 진출’과는 거리가 퍽 멀다. 한국언론이 재한조선족의 ‘사회적 융화’를 ‘제자리 걸음’이라고 지적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차이나타운’이 유지되는 한 중국동포들의 ‘한국인 동화’는 요원한 일이다.2010년 이후 조선족들의 한국 진출이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전개되면서 재한조선족의 체류수는 급격히 늘어났다. 또 돌아가는 경우는 적어진 반면, 중국에 남아있는 가족까지 불러들이면서 ‘정주화’의 경향이 뚜렷해지고 있다. 일각에서 재한조선족을 ‘이주민’이라고 주장하는 이유이다. 재한조선족의 ‘정주화’가 단기적 현상인지 아니면 장기적인 국면으로 발전해 명실상부한 한국인으로 동화될지는 향후 두고봐야 알겠지만, 이는 중국 조선족의 존폐와 직결되는 문제로서 ‘정주화’가 미치는 영향력을 매우 클 것으로 전망된다.현재로서는 재한조선족의 ‘정주화’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는 데 여러 가지 어려운 점 및 변수가 상존한다. ① ‘정주화’가 지속되는 가장 중요한 전제조건은 조선족을 위한 강력한 이민정책이 뒷받침돼야 한다. ② ‘차이나타운’의 ‘중국인’ 정체성 유지와 주류사회 진출을 통한 한국인 동화는 자가당착, 이율배반적으로 양립이 불가능하다. ③ 작금의 ‘정주화’는 입국정책 완화에 따른 중도입국 청소년 증가에 기인된, ‘부모와의 화합’ 성격이 짙다. ④ 많은 재한조선족은 중국(고향)에 ‘돌아가 살’ 살림집을 마련했고, 노후보험과 부모자식간 인연이 중국에 남아있다. ⑤ ‘중국인’ 정체성이 강한 조선족 3~4세대는 향후 중국경제의 발전으로 많은 일자리가 창출되면, 언제든지 돌아갈 개연성이 존재한다. 조선족 젊은층의‘중국인’ 정체성과 중국 변수는 ‘이민정책’의 효과적 추진에 걸림돌이 될 것이다.한국정부가 단기간 내 재한조선족 전체(65만명)에게 한국국적 혹은 영주권을 부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하다. 즉 ‘이민정책’을 추진할 동기부여가 결여되어 있다. 재한조선족의 96%가 한국인들이 기피하는 일자리에 집중, 저임금·저숙련 단순기능직에 근무하고 있다. 기술개발 등 성장동력의 확보에 도움이 되는 고급인력은 거의 없다. 또한 한국인 인상 속의 재한조선족은 ‘돈 벌러’ 한국에 온 외국인 염가노동력, 사회적 안정을 ‘위협’하는 사회적 집단으로 각인돼 있다. 또 이민정책은 전체 외국인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며, 조선족에게만 따로 적용할 수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실제로 한국정부의 이민정책이 절박한 ‘약세군체’가 존재한다. 즉 사실상 이주민으로서 장기간 한국에서 생활해온 재한조선족 1세대들이다. 이들 대다수는 하루살이 일용직으로 열악한 생활환경에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고, 바야흐로 빈민층으로 전락하고 있다. 따라서 한국정부는 사회통합의 과제로서 이들 빈민층을 위한 ‘댓가없는’ 이민정책을 본격적으로 추진할 필요가 있다. 재한조선족을 위한 이민정책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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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13
  •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대표’ 반드시 배정돼야
    ▲이동렬 (동북아신문, 재한동포문인협 회장) 4월 총선을 한 달반 정도 앞두고 재한동포사회는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표를 반드시 배정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더욱이 새누리당이 ‘다문화 1호 국회의원’인 이자스민 의원의 비례대표 재선 불가 방침을 내놓은 상황에서 김무성 대표까지 “조선족을 대거 받아들여야 한다”고 조선족 이민 당위성을 강조한 상태라서 그 귀추가 더욱 주목된다. 일각에서는 중국동포의 자질과 동포사회풍토 등을 거론하며 아직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대표’ 출현이 시기상조란 의견을 내놓기도 한다. 어쩌면 현실을 냉철히 분석한 결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관점에서 볼 때 나는 20대 총선에서는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대표’ 반드시 배정돼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이유는 우선, 재한중국동포사회가 성장을 거듭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한국 거주 중국동포의 수는 약 70만이다. 한국 국적 취득자가 10만을 넘긴 가운데, 영주권, 재외동포비자, 방문취업제 비자 등 다양한 비자를 갖고 한국에 거주 체류하며 한국 체류 외국인의 33% 숫자를 기록하고 있다. 1980년대 중반기부터 현재까지 거의 30년간의 거주 체류 역사를 기록하며 무역, 상업, 건설업, 서비스업 등 각 분야에서 ‘없어서는 안 될 역할’을 해오고 있다. 한국 다문화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당위성을 예로 들 수가 있다. 다음, 재한동포사회가 하나로 결집되지 못했으나 나름대로 단체들이 역할을 해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유명무실한 단체가 많기는 하다. 그러나 사회봉사를 내국인들보다 더 열심히 하는 동포단체나 개인들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사회, 문화, 예술, 언론 등 분야에서 보면 국내 체류 여느 외국인들보다 활동이 빈번하고 단체도 잘 짜여 져 있는 셈이다. 다문화를 중시하는 한국에서 중국동포를 배제하고 다문화 운운하는 것은 잘못된 처사이다. 따라서 중국동포의 입장을 대변할 국회의원 하나를 비례대표로 배정하는 것은 다문화발전의 새로운 전략이 될 수 있다. 셋째, 중국동포는 한국도 잘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도 잘 알고, 북한도 잘 알고 있는 나름대로의 장점을 가지고 있다. 연변은 한반도 통일을 도울 수 있는 중요한 지정학적 위치를 갖고 있다. 북한과 냉전으로 돌아간 상황에서 중국과의 껄끄러운 마찰을 피하고 두 나라의 정서를 서로 전하며 윤활유 역할을 할 수 있는 게 바로 중국동포들이다. 넷째, “그럼 국회의원 비례대표로 나설 인물이 있느냐”고 많은 사람들이 묻고 있다. 풍토도 어지럽고 인물도 보이지 않는다는 주장이다. 나는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대표가 한국 국회의원과 똑같은 수준의 정치적 식견과 혜안을 갖고 나서야 한다고 보지 않는다. 물론 그만큼 ‘똑똑’하고 ‘바르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러나 중국동포 국회의원의 기능과 역할은 다른 곳, 다른 분야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한국 정치인들이 할 수 없는 일을 하는 적임자가 될 수가 있다. 비례대표 제도의 취지가 바로 그런 것 아닌가? 따라서 일정 분야에서 학식과 예의를 갖추고 비교적 세력화 되고 힘이 있는 동포를 찾아 맡기면 역할을 잘 해낼 수가 있다고 본다. 이 자스민 의원이 한국사회를 여느 국회의원만 알지 못했지만 결혼 이주자를 대표하는 국회의원의 역할을 충분히 잘 한 것도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시대가 인물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중국동포들 가운데 일단 국회의원이 출현하면, 흩어진 동포사회의 힘이 결집되고 한국사회와 더불어 동포사회의 발전을 더욱 가속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뒤에서 헐뜯는 동포들도 적지 않겠지만, 그런 것쯤은 무시해도 괜찮다. 그 사람의 뒤에는 든든한 정부가 있으므로 급속한 결집력을 형성할 수 있는 토대가 있다. 잡음은 금방 사라지리라고 본다. 현재 동포사회가 하나로 결집되지 못하는 원인은 동포사회 자체가 ‘함께 해야 한다’는 풍토가 박약한데도 있지만, 한국정부의 후원과 지지가 너무 미약한데도 큰 원인이 있는 것이다. 20대 총선을 그대로 지나쳐 보내고 21대 총선을 기다려서는 안 된다. 그만큼 동포사회가 절박하다. 바로 지금이 재한 중국동포사회가 모든 역량을 결집해 ‘중국동포 국회의원 비례대표’를 반드시 배정받아야할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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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9
  • 뜨거워지는 ‘한풍’, 냉랭해지는 ‘한류’
    ■ 김진곤(주중한국문화원 원장) 중국 드라마가 한국에 ‘한풍(漢風, 중국문화 열풍)’을 몰고 왔다. <견환전(甄嬛傳)>, <여상육정(陸貞傳奇)>, <난릉왕(蘭陵王)>처럼 한국에서 많은 호평을 받은 중국 드라마에 이어 최근에는 <랑야방(瑯琊榜)>이 한국 누리꾼들의 이슈로 떠올랐다. 앞서 한국 드라마가 중국에서 큰 열풍을 끌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양국 사이에 상통하는 문화적 정서를 바탕으로 한 중국 드라마가 한국 대중들의 공감대를 형성한다는 것은 더없이 반가운 일이다. 한국에서 중국 드라마가 이처럼 대중적인 인기를 끄는 데는 크게 세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양국 간 문화적 공통점과 유사성. 둘째, 중국 드라마의 제작 수준과 퀄리티의 향상. 마지막으로는 나날이 늘어가는 중국에 대한 한국인들의 관심이다. 중국과 중국 문화를 더 잘 이해하고자 하는 한국인들의 열망은 양국 간 문화 교류에 희소식이자 국민들 간의 상호 이해와 인식, 우호적인 정서 제고에도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한 중국 영상물이 한국 영상시장에 대대적으로 진출하고 있는 데 비해, 한국 드라마는 2015년 들어 중국 시장에서 다소 ‘시들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별에서 온 그대> 이후로는 이렇다 할 화제작도 나오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중국 시장에서 한국 드라마의 열기가 식어가는 것을 보면서도 딱히 이렇다 할 묘안이 없다. 여기에는 한국 드라마 특유의 촬영방식 탓도 있고, 올해 초 중국 국가신문출판광전총국(中國國家新聞出版廣電總局, 광전총국)에서 공포한 <온라인 해외 시청각물 관리 관련 규정에 관한 통지(關於進一步落實網上境外影視劇管理有關規定的通知)>(이하 <규정>)와도 연관이 있다. 한국 드라마는 보통 방영과 촬영이 동시에 이루어진다. 대본은 시청자들의 반응에 따라 수정되기도 한다. 말하자면 ‘살아있는’ 대본인 셈이다. 한국 드라마는 중국에서 주로 온라인 경로를 통해 방영되었기 때문에 <규정>이 나오기 전에는 별다른 제한이 없었다. 중국의 일반인 자막팀이 한국 드라마를 빠르게 업데이트한 덕에 한국에서 밤 시간 방영된 드라마가 다음날이면 중국에서 다운로드를 받을 수 있었고, 이와 같은 실시간 방영은 상당수의 시청자를 끌어 모았다. 하지만 <규정>이 발표되고 드라마 촬영 종료 후 당국의 심의를 거쳐야만 중국 온라인 사이트에서 방영이 될 수 있게 되자, 이 과정에서 생긴 대략 6개월의 긴 시간차 동안 드라마에 대한 시청자의 관심이 분산되어 버려 예전처럼 열풍이 형성되기 어렵게 되었다. 한국 드라마의 ‘인기’가 사그라든 또 다른 원인은 바로 수적 규제이다. <규정>에서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서 방영할 수 있는 수입 드라마의 비중이 사이트 총 방영횟수의 30%를 넘지 못하도록 규제하고 있다.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발효되고 양국 간 상품무역 규제가 빠르게 사라지고 있는 만큼 중국 영상시장도 앞으로 점점 더 개방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물론 아직 성숙하지 못한 중국의 드라마 시장을 보호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알린다는 중국 측의 입장도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한중 양국 간의 문화교류 촉진을 위해서는 앞으로 중국 영상시장의 규제를 지속적으로 줄여나가야만 할 것이다. 이와 함께 중국은 인터넷상의 해외드라마 불법 업로드를 단속하는 등 저작권에 대한 보호를 강화할 필요가 있다. 저작권에 대한 보호없이 문화 발전을 이룩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중국정부 차원에서 저작권 보호를 위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긴 하지만, 아직도 해야 할 일이 많다. 또한 문화 산업투자기금을 설립해 한중 합작영화나 드라마, 프로그램 등에 대한 투자가 더욱 전문화된 경로와 업계를 통해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전문 합작프로젝트 연구센터를 설립해 심층적으로 연구하고, 동시에 양국 문화산업정책연구협의회를 설립해 한중문화교류 관련 정책에 대한 합의를 이끌어 낼 필요가 있다. 이런 가운데 제각각 진행되던 양국의 영상제작이 공동제작을 하는 방향으로 전환되는 것은 매우 큰 발전이라 할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은 영상물 제작과 관련한 각기 나름의 장점을 지니고 있다. 중국은 천년이 넘게 전해 내려온 문화적 전통, 고사와 전설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으며 인적자원과 자금력도 풍부하다. 또 거대한 문화시장도 자리하고 있다. 한국은 한류로 대표되는 세계적인 한국문화 열풍의 경험과 전문 매니지먼트사, 트레이닝 시스템, 그리고 한국인들만의 독특한 문화적 기질과 창의력을 갖추고 있다. 특히 한국과 중국은 서로 가까운 문화와 정서로 인해 영상 분야에서의 합작이 여타 국가들보다 더욱 수월해 손발이 ‘척척’ 맞을 가능성이 높다. 각자의 장점을 결합해 동아시아를 기반으로 세계로 뻗어갈 수 있는 경쟁력 있는 문화상품을 만드는 것이야말로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 할 올바른 방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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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2-28
  • 북핵문제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 할까?
    ■ 베문태 (한반도통일지도자총연합 공동회장/서울시연합회장) 새해에 접어들어 북한의 4차 핵실험(1월6일)으로 미지근하던 남북통일의 열기가 점점 식어들기 시작하는 이때 DMZ 대북확성기 방송재개로 남북관계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 느낌이다. 이러한 때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 한 미 일 3자회담, 한 중 2자회담, 한 러 2자회담이 각각 열리면서 해법 찾기에 급급하지만 중국과 러시아의 동향이 엇박자로 진행되는 가운데 이란이 핵개발을 포기하고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복귀한 것을 두고 국제사회가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에 젖어들고 있다. 북한은 그동안 한반도 비핵화는 김일성 주석의 유언이라 호들갑을 떨며 한국과 국제사회를 안심시키는 척하면서 뒤로는 핵개발을 서둘러 제4차 핵실험까지 강행해온 북한의 이중성에 놀아나면서 언제까지 북한의 비핵화를 이끌어 내려고 무장해제 상태에 있어야 하는지 의문된다. 북한의 비핵화는 이미 루비콘 강을 건너 간 사항이고 결코 돌아올수 없는 다리를 건너갔습니다. 그런데 언제까지 북한을 상대로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해 6자회담 당사국들이 신사회담을 통해 대화로 해결하자는 중국의 태도에 기대야 하며, 중국의 눈치를 보며 이에 편승하려는 러시아의 태도 변화에 기대를 걸고 시간만 보내려는 전략에 언제까지 놀아나려고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 북핵 문제해결의 해법은 이미 공론화 과정을 통해 그 해답이 나와 있지 않는가? 유엔 안보리는 금번 기회에 중국과 러시아가 유엔안보리의 강력한 대북제재조치와 한, 미, 일, 중, 러 5자회담을 통해 강력한 대북 설득력으로 북한의 NPT복귀와 핵 불능화 조치를 취하는데 동참하지 않을 경우 중국과 러시아와 맺은 전략적 동반자 관계 등은 허구에 불과 하며 제5,6차 핵실험을 강행하더라도 막을 길이 없게 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선택을 해야할까? 국가는 우리국민들의 생존권 보장과 국토방위를 위해 부득히 자위적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국제사회에 공포하고 이에 따른 대처방안에 착수해야 한다고 본다. 북한은 하늘이 무너져도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고 이미 밝힌바 있다. 그런데도 6자회담 국이 핵 포기를 종용하며 언제까지 허송세월을 보내야 하며 지금까지 유엔안보리와 함께 너무 안일하고 느슨하게 대처한 관계로 제4차 핵실험도 막아내지 못한 상태에서 핵실험이나 미사일 발사때 마다 태평양 괌 미 공군기지에서 B29폭격기나 띄우고 핵잠수함으로 한국영공과 해상을 통해 무력시위 한번 하고 돌아가는 것이 북핵 억제해법이라고 본다면 큰 오산일 뿐이다. 북한은 한 미연합사의 이러한 엄포를 십분 활용하며 즐기고 있는것 같습니다. 따라서 이번만은 북한의 심장부를 겨냥해 5자회담 국의 강력한 경제제재조치와 대북압박으로 북한의 핵개발을 포기시키는 길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에도 중국이 예전처럼 유엔안보리 대북경제제재조치에 미온적으로 접근할 경우 더 이상 중국의 눈치를 보며 기다릴 필요 없이 한, 미 양국은 주한미군의 사드(THAAD) 배치문제와 동시에 우리의 핵 개발 착수문제 등을 전향적으로 검토해 나가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은 세계229개국 중 군사력 순위 7위 국가로서 우리국민들의 생존권을 우리스스로 지켜야 할 책무가 있는 주권국가임으로 한미동맹을 더욱 강화함과 동시에 중국의 눈치를 볼 것도 없이 인도, 이란 등으로 경제권역을 확대하면서 우리의 생존전략을 확실히 짜야 할 이때를 결코 놓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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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31
  • 조선족의 정체성
    ●김문일 지난주 일요일날 큰 매형과 둘째 매형이 낚시질을 다녀왔다고 한다. 그냥 인근 교외의 강변에서 한 겨울 낚시였는데도 퍼그나 잡은듯 했다. 큰 고기는 아니였지만 손가락만한 붕어들이 대부분이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낚시는 잔인한 취미라고 생각하기에 그런 취미생활을 하지 않는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의 취미야 어떻게 막겠는가. 아이들이 물고기를 키우고 싶어해서 일부 달라고 해서 남생이를 키우던 자그마한 어항속에 물을 부어넣고 넣어 주었더니 서서히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반 이상이 죽어있었다. 남생이는 아직 작아서 물고기를 잡아먹을수 없으니 물고기들 자체가 낚시코에 걸렸던 상처때문에 죽은듯 했다. 그렇게 하루가 더 지나니 한두마리 따라서 죽어가던것이 이윽고 네마리밖에 남지 않았다. 그 네마리를 살리기 위해서 정기적으로 먹이를 주고 물을 갈아주었더니 이제는 활기를 찾아서 잘 자라고 있다. 오히려 거부기에게 주려는 먹이를 빼앗아 먹을 정도로 싱싱하게 살아났다. 처음에는 사람이 어항 가까이 가면 놀라서 이리저리 흩어지던것이 이제는 정기적으로 먹이를 주어서 그런지 사람이 가까이가도 제법 태연하게 헤염을 치며 유유작작하다. 비록 강에 있을 때처럼 자유롭지는 못하지만 다시는 먹이 걱정 잡힐 걱정은 없을듯 싶다. 중국말 속담에 새는 먹이때문에 잡히고 사람은 재물때문에 망한다는 말이 있다. 물고기 역시 그런 자연의 섭리를 벗어날수 없는가 싶다. 물고기를 낚는 사람은 낚인 물고기를 보면서 득의양양하겠지만 그 자신 역시 다른 사람의 돈과 물질의 미끼에 걸려든 물고기인줄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다. 중,한 수교가 이루어진 92년 그때부터 조선족은 남한이라는 나라를 다시 알게 됐다. 88올림픽을 통하여 한강의 기적을 알리고 중국에 있는 동포사회에 고국에 대한 자부심을 심어주었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다. 조선족 사회에는 서울바람이 불었고 십배가 넘는 월급을 바라보며 가족과 친지를 버리고 외화벌이에 나섰다. 그래서 생긴 여러가지 사회적인 문제가 오래동안 조선족 사회의 아픔과 상처로 남을듯 싶다. 한국에서는 또 조선족을 불법체류자로서 잡아서 가두고 반송해 보낸다. 그래서 잡혀온 사람들은 한국에 강한 반한감정을 가지고 돌아오고 한국사람들을 적대시 했다. 불법체류때문에 돌아오지 못하는 사람들은 사랑하는 안해와, 남편과 아이들과 생 이별하고 몇년 지어는 십년가까이 그 땅에서 돈벌어 부쳤다. 이로 인해 조선족 사회도 한국 사회도 모두 서로 상처를 주고 상처를 입게 됐다. 중국에 와서 사기를 치고 범죄를 저지르는 한국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국에서 법을 위반하고 쫒기는 조선족 또한 많았다. 불법체류자 추방을 반대하는 운동을 서울에서 진행하던 때가 거퍼 2, 3년도 채 안된 전의 일이다. 많은 조선족 작가들과 지인들이 황페된 조선족 마을과 시들어가는 조선족의 가족관계를 되 살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애를 써왔다. 신문에서 말하고 방송에서 이야기 했지만 돈과 물질의 충격에 이성을 잃은 조선족에게는 어떤 충고도 들리지 않았다. 한국나가도록 알선하는 브로커들이 판을 치고 돈과 금전에 자존심도 팔고 가족도 팔고 심지어 사랑마저 팔았다. 그렇게 벌써 20년이 넘게 흘렀다. 한국에서는 재외동포법이 바뀌기 시작했고 이제는 무연고 취업비자로 제법 쉽게 한국에 다녀올수 있도록 되였다. 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것은 조선족의 경제적인 수준이 어느정도 상승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십년전 한국에 가서 일하다 불법체류자란 딱지로 한국의 감옥에 갇혀있다 송환돼 돌아온 한 조선족 청년은 나한테 울분을 토로하기도 했다. “라디오에서는 고국이고, 동포고 떠들더니 이게 뭐야? 중국에서 살면서 한번도 감옥 들가본 일 없는 내가 도적질 했냐 어쨌냐, 내 손으로 돈벌어서 살겠다는데 감옥에 넣어 온갖 수모를 주고 쫒아보내다니.” 그런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고 수백, 수천, 수만에 이르자 문제는 커졌고 오히려 한국에 대한 나쁜 감정이 가득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당시 한국법으로는 역시 그들도 어쩔수 없는 상황이였을 것이다. 조선족이라고 해봐야 옛날에 일본과 싸우기 위해서 간도땅을 건너간 독립군 후예정도로만 알고 있었지 진정 조선족의 미래를 한국의 미래와 연결시켜본 한국인은 얼마 되지 않았을 것이다. 세상 어디에서나, 어느 시기에서나 통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대부분 사람들은 이기적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잘살고 능력있고 힘센 사람옆에서는 온갖 아첨과 아양을 떨면서 빌붙으려 하고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은 업신여기고 무시하는 경향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서 불법체류한 조선족에게 일을 실컷 시키고는 몇달씩, 심지어는 몇년의 월급을 제때에 주지 않고 불법체류자라고 법무부에 고발해서 중국에 잡아보낸 악덕 업자들 때문에 전체 한국의 이미지와 조선족이 한국인을 보는 태도가 변하게 되였다. 그러나 그런 모든것은 바로 돈과 이익때문이지 민족성과 고국애 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다. 한국내에서도 가난한 친척은 잘사는 친척에게 무시당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연변의 조선족은 자기 주변의 가난한 친척들을 한번도 무시한적 없는가? 당연히 그럴리가 없다. 잘살고 힘있으면 대접받고 못살고 가난하면 무시당하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다. 오래전에 한국 출장다녀오면서 느낀 것이 있는데 한국 사람들은 중국의 대륙사람들은 무시하는 경향이 있으나 대만이나 홍콩에서 온 중국인들에게는 여간 살갑게 맞아주는 것이 아니다. 바로 돈의 힘 때문이다. 대부분 사람들에게는 고국이나 동포보다도 현실적인 것이 더 중요하다. 조선족들이 한국은 우리 고국이고 한 핏줄인데 어찌 이다지도 못살게 구느냐고 한때 아우성을 쳤지만 그것은 경제의 원칙을 몰라서이다. 한국사람들이 동포를 싫어서도 아니고 동포가 고국을 찾아온줄을 몰라서도 아니다. 답은 간단하다. 조선족이 가난하기 때문이다. 조선족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그리고 조선족의 당위성이 무엇인지? 세미나가 열리고 포럼이 열리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은 할일없는 사람들의 소일거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조선족들이 한국을 욕하고 한국사람을 욕하지만 조선족은 다 잘하기만 하는가? 한국의 잘못을 보고 한국인의 잘못을 보았다면 우리는 그것을 고치고 바꾸어나가야 겠는데 그렇지 못해서 안타깝다. 조선족들보다 아직 상대적으로 못사는 조선 (북한)에 가서는 한국인들이 중국에 와서 하던 똑 같은 짓거리를 하고 다닌다. 돈 있는척 거들먹거리고 도박, 오입질하고 벼라별짓을 다하고 다니면서 무슨 낯으로 한국을 꾸짖고 한국인을 욕한단 말인가. 지금까지는 대부분 한국인들의 인상속의 조선족은 가난의 대명사이다. 한국에서 허드레일만 하고 아직 먹고살기 어려운 그런 모습으로 각인돼 있다. 한국인들 앞에서 조선족하면 식당에서 일하는 아줌마, 노가다판에서 막일하는 아저씨의 모습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이제는 서서히 바뀌여 가고 있다. 조선족의 경제적인 위치가 계속 올라가고 있기 때문이다. 서울 가리봉동의 많은 가게들이 조선족들의 손에 넘어갔다고 한다. 조선족들도 더는 그냥 단순 노무로 돈을 벌려고 하지 않는다. 무역과 사업을 벌려서 크게 성공한 조선족 기업들이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글로벌 경영으로 전 세계로 그 영향력을 미치는 조선족 기업인들이 점점 늘어난다. 조선족을 위한 행사때면 천만원씩 일억씩(한화)선뜻 내놓는다. 옛날 미국국적을 가진 한인들이 서울에 오면 대접을 깍듯이 받았다. 지금도 그럴지 모르지만 그것은 그들이 돈에 대한 예우이고 서비스일 뿐이지 지역 감정하고는 별개의 문제다. 한국만큼 조그마한 땅덩어리서 지역감정 운운하는 나라도 없겠지만 지역이 어디든 나한테 돈을 벌어주고 도움을 주겠다는 사람을 싫어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조선족은 가장 우수한 핏줄을 가지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조선족이여 자부심을 가져라 글 참조) 그들은 고생을 두려워할줄 모르고 부지런하며 지혜롭다. 일부 부족한 사람들이 사고를 치기도 하지만 사람 사는 동네에 문제 없는 곳이 어디에 있을가? 조선족은 이제 서서히 발전하고 있고 언젠가는 미국에 있는 한인이나 일본에 있는 한인보다도 훨씬 더 크게 한국의 경제성장과 한국인의 사회에 그리고 한반도 통일에 기여하게 될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한국사람들은 아직도 옛날 생각을 하면서 중국을 무시하고 있지만 중국의 경제 성장은 놀라울 지경이다. 빈부격차와 사회적은 문제점도 있지만 년 2만불 소득을 넘긴 사람이 이미 1억 2천만명을 넘겼다는 통계자료가 나왔다. 한국이 2만불 시대에 들어간것이 이제 몇년이 안됐는데 중국이 어떻게 그럴수가? 하면서 놀랄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현실이다. 전반적인 국민 평균소득은 한국보다 낮을수 있겠지만 이 1억2천만명의 고소득층은 매일, 매달, 매년 늘어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의 전체 인구를 합한 세배에 가까운 수치다. 게다가 중국에서 벌어들이는 2만불은 한국에서 벌어들이는 2만불의 열배에 해당하는 가치가 있다. 그만큼 기본 물가가 싸기 때문이다. 이런 중국에서 중국어 잘하고 한국어도 능통한 신 조선족은 비약한 발전을 가져오고 있다. 현재 삼십대 좌우의 젋은 층들은 거개가 한국어, 중국어, 영어 혹은 일본어등 삼개국어 이상을 자유로이 사용할수 있다. 그들은 중국의 광동, 상해, 북경 등지에 진출하여 번역, 가이드 등을 하던데로 부터 이제는 여행사, 무역회사 사장으로 발돋움 하고 있는 것이다. 일부는 국제적인 그룹을 설립하기까지 했다. 한국의 국민들은 반도땅에서 좀 더 크게 좀더 멀리 미래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우는 준비를 해야한다. 그러려면 겸손해지고 낮아지는 자세가 필요하다. 중국에서 반한 감정이 생기고 일본보다 미운 나라가 한국이 된데는 한국민의 자존심 때문이다. 한국의 KBS나 기타 TV프로를 보게되면 중국을 보도하는 거의 대부분 내용이 부정적인 부분만 보여준다. 가난해서 찢어지는 가족들 아니면 부정부패의 관원들, 아니면 환경오염을 만들고 짝퉁 저질 상품을 만드는 기업들을 소개한다. 그러나 삼십년전 한국도 짝퉁을 만들었고 서울 인사동에는 아직도 짝퉁이 팔리고 있다. 서울의 달동네에서도 소년소녀 가장들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누굴 욕하고 웃을 상황이 아니다. 그런걸 찍어서 한국민의 자존심이나 세우련다면 큰 오산이다. 중국의 발전과 거대한 경제력을 직시하고 위기 의식을 가지고 도전적인 자세로 준비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국은 살아남을 수 있다. 또한 조선족이 지금까지 그래도 중국땅에서 그만큼 대접을 받은 것은 그나마 자신의 고국이 있기 때문이리라. 가난한 북한보다는 그래도 조금이나마 잘사는 한국이 있었기에 민족자부심도 가질수 있었다. 이제 한국이 경제가 떨어지면 조선족이 중국에서 아무리 잘 살아도 자부심은 없다. 가난한 친척이 밉다가도 그 친척이 잘살게 되면 다시 고와지는 것이 세상 인심이다. 한국이 중국을 제대로 인식하고 중국 경제와 정치를 통하여 새로운 세기 더 큰 발전을 원한다면 조선족에게 투자할줄 알아야 한다. 이런 이야기가 있다. 미국의 플로리다 주에 ‘윈터 헤븐리’라는 마을이 있었다. 해변도 , 높은 산도 없는 그곳은 도시 사람들을 매료시킬 만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마을 주변은 대부분이 농지였고 약간 솟아오른 작은 언덕들과 골짜기 사이에 있는 호수, 그리고 측백나무가 자라는 늪지대가 있을 뿐이였다. 이처럼 세상과 단절된 마을을 완전히 바꿔 놓은 사람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리처드 포프로 농기구를 팔려고 마을에 우연히 들어온 사람이였다. 그는 마을 사람 한명과 측백나무가 자라고 있는 소택지를 보게 됐다. “대단한 곳이군요. 측백나무가 정말 인상적입니다.” 그는 같이 따라온 마을 사람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심드렁한 말투로 대답했다. “무엇이 그리 대단하단 말입니까? 저희들은 항상 보는 이곳이 그저 지긋지긋할 뿐입니다.” “저는 선생님이나 마을분들과는 조금 다른 시각으로 볼 수 있습니다. 조경 사업을 한 적이 있거든요. 측백나무가 군락을 이뤄 자라는 모습은 전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볼수 없는 장관 중의 장관이지요.” “그게 무슨 말씀이죠?” 마을 사람들의 물음에 리처드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이 마을을 아주 유명한 곳으로 만들어 드릴수 있을것 같습니다. 제겐 이 마을, 이 측백나무들의 미래가 보이는군요. 그래서인지 좋은 아이디어가 마구 떠오르네요.” 이후 그는 전 재산을 투자해 측백나무 소택지를 구입했다. 그리고 울타리를 쳐 숲 사이로 산책로와 휴게소를 만들었다. 측백나무 정원이였다. 만들어 놨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었지만 중요한 건 세상에 정원의 존재를 알리는 일이었다. 그는 광고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가장 좋은 수단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기존의 광고는 비용이 많이 들기 때문에 다른 홍보 전략을 펼치기로 했다. 그가 먼저 이용한것은 사진이었다. 그는 공원에 사진 재료 전문점을 열고 관광객들에게 필름을 팔았다. 그런 다음 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하도록 시켰다. “측백나무 정원의 빼어난 경치를 담고 싶지 않으세요? 저희가 멋지게 찍는 방법을 가르쳐 드리죠.” 또 수상스키 선수를 고용해 역시 같은 방법을 썼다. “정말 멋진 동작이죠? 어떤 구도로 찍어야 하는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관광객들은 그 덕에 멋진 사진을 집에 가져갔고 이들이 가지고 간 사진이 측백나무 정원의 가장 좋은 광고물이 됐다. 전 세계적으로 희귀했던 측백나무 정원은 금세 입소문을 탔고 관광객들은 여기저기서 몰려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은 예약을 하지 않으면 구경하기 힘들 정도로 유명한 관광지가 됐다. 100만달러를 내고 그 땅을 사려는 사람도 있었다. 물론 리처드 포프는 거절했다. 현재 ‘윈터 헤븐리’ 마을의 이 측백나무 정원은 세계 최초이자 최대규모의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리처드 포프가 없었다면 ‘윈터 헤븐리’ 마을은, 그리고 측백나무 숲은 어떤 모습이였을까? 통찰력이 없는 사람은 코앞의 것만 바라볼뿐, 멀리 내다 볼줄 모른다. 통찰력이 없는 리더들이 모인 조직이나 국가도 그렇다. 깊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은 미래를 예측하는 능력이 탁월하다. 하루 이틀 사는것이 아닌 우리의 삶에서 미래를 내다볼줄 아는 통찰력은 아주 중요하다. 긴 인생의 굴곡을 대비 할수 있도록 도와줄뿐 아니라 성공적으로 현재를 이끌어 갈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표현을 쓰면 자존심 강하고 감성이 예민한 한국인들은 발칵할 것이다. 그러나 내가 볼때 한국인들은 우리집 어항속의 고기떼와 같다. 여기 저기 대국에서 넣어주는 먹이에 의존하고 언제 낚시코에 걸릴지 모른는 상황에서 살고 있으면서도 매일 떨어지는 먹이에 안주하며 사는듯 싶다. 현재 중국은 14억이 넘는 거대한 인구로 내수 시장을 활성화 시키고 있고 탄탄한 기술력으로 새로운 세계시장 판도를 만들려고 애쓰고 있다. 앞으로 세계경제의 견인차 역할을 할 나라는 미국도 러시아도 아닌 중국이 될 것이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것은 통찰력을 조금이라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다 알고 인정하는 사실이다. 조선족사회는 연변의 작은 농촌에서 서울로 이동하던데로부터 이제는 다시 북경, 상해, 광주등 중국의 대도시로 각자의 사업과 실업을 발전시키고 있다. 중국국적을 가지고 있지만 한민족의 핏줄을 가지고 있는 조선족의 새로운 시대가 열린 것이다. 나는 그들을 새 조선족이라고 부르고 싶다. 그들이 새 조선족의 리더들이고 대표들이기 때문이다. 한국은 이제 더 이상 조선족의 정체성과 당위성을 의논할 필요가 없다. 지금 한국과 한국민이 해야할 일은 조선족의 지금 보이는 모습보다 그 내면에 숨겨진 잠재력을 살펴보는 것이다. 그것이 사물의 본질을 보는 것이고 통찰력을 키우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한국을 구할 사람들은 한국인 자신이지만 미래 한반도의 통일과 경제성장의 가장 큰 힘이 될 주역은 미국의 한인도 일본의 한인도 아닌 바로 새 조선족이 될 것이다. 그게 역사의 필연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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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9
  • [역사칼럼] “서프라이즈”, 간도 15만원 탈취사건
    ●김 혁 (재중동포 소설가, 역사칼럼니스트) 17일 방송된 MBC '신비한 TV 서프라이즈'에서는 일본 밀정의 배신으로 인해 거사가 실패로 돌아가고 만 독립지사들의 일화에 대해 소개했다. 그 일화가 바로 당시 간도 나아가 일본과 한반도를 들썽케 했던 “간도 15만원 탈취사건”이다. 1915년전 후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반일열혈청년은 비밀결사조직인 “철혈광복단”을 결성했다. 그 후 이 단체의 대부분의 단원들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에 통합되어 항일투쟁에 힘을 보태었다. 식지를 깨물어 혈서를 쓰고 일제와의 사투를 맹세했던 광복단 단원들은 희생된 동지들의 원쑤를 갚고 민족독립을 쟁취하자면 무기가 있어야 한다는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바로 이 당시 러시아에서는 홍군과 백군이 내전을 벌이고 있었는데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시베리아 원정에 나선 체코 군단이 패배를 직감하고 헐값에 무기를 처분하려고 서두르던 시점이었다. 단원들은 빠른 시일 내에 군자금을 얻으려면 일본은행을 습격하는 방법 밖에 없다고 책략을 모았다. 용정에서 거사를 기획 한 사람들로는 임국정, 윤준희, 한상호, 김준, 박웅세, 최봉설등 여섯 명이었다. 이들은 일제 금융기관의 활동을 면밀히 조사하는 가운데서 전홍섭(全洪燮)이 조선은행 용정 출장소 서기로 일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은 전홍섭에게 독립무장을 위한 행동에 참여하자고 건의 했다. 이에 일본기관에서 일보고 있지만 역시 일제괴수들에 민족적 의분을 품고있던 전홍섭은 인차 그 제의를 받아들였다. 전홍섭은 자기는 놈들의 은행권 수송에 몇번 참가한 적 있다면서 “왜놈들이 회령에서 용정 은행으로 보내는 은행권수송금액과 그구체 시간만 알수 있다면 군자금모집은 해결할 수 있지 않을까”하고 자신의 생각을 터놓았다. 이에 영웅들은 일제의 수송자금을 중도에서 탈환하기로 하였다. 전홍섭은 정보를 수집하는 즉시로 연락을 취하겠다고 했다. 1919년 12월 그믐 날 전홍섭은 용정 출장소 소장 시부다 고로우에게서 새해 1월 4일 아니면 5일쯤에 회령으로부터 약 30만원의 현금을 수송 해 오게 된다는 비빌을 알아내었다. 전홍섭은 즉각 철혈광복단에게 이 비밀행동에 대해 쪽지로 전달했다. 쪽지에는 “먼저번 귀형으로부터 부탁받은 일이 1월 4-5일에 있게 될 것이요. 수송대에 내가 편입될 수 도 있으니 가차없이 나의 다리를 총으로 쏘아달라.”고 씌어있었다. 4,5일이면 시간이 이틀 밖에 없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 최봉설, 한상호, 임국정등 6명은 명동에 집결하여 면밀하게 습격계획을 짰다. 거액의 현금을 운송하는 일이니 놈들은 전신무장한 순사들로 호위로 경비가 삼엄할것이다. 인적이 적고 산발이 험하고 나무가 무성한 오랑캐 령이나 선바위 밑에서는 더욱 경각성을 높힐 것이다. 그러나 등잔 밑이 어둡다고 총령사관이 있는 용정촌 근처에서는 상대적으로 경비가 느슨해 질수도 있다. 드디여 그들은 습격지점을 동량리 어구(지금의 승지촌으로부터 100여메터 상거한 길)로 정했다. 행동의 편리를 위하여 여섯 사람을 두 개조로 나누었다. 윤준희, 김준, 박웅세가 한조가 되고 나머지 셋이 한조가 되었다. 두 개 조는 동량리어구에 매복해있다가 은행권 수송대가 오면 행인으로 가장하고 먼저 호송대를 처단한 후 은행권을 탈취하기로 했다. 일제를 향한 증오의 총칼을 서슬푸르게 벼르고 있던 철혈광복단은 즉각 행동에 들어 갔다. 1920년 1월 4일, 권총, 포승, 철봉을 휴대하고 여섯 명의 철혈광복단 대원들은 결전의 길에 올랐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수림 속을 꿰질렀는데 발이 푹푹 빠지는 눈밭을 헤가르며 반달음으로 급행군하여 저녁무렵에야 동량리 어구에 도착하게 되었다. 동량리 어구는 용정시 남쪽으로 흐르는 륙도하를 따라 동남쪽으로 뻗은 골짜기좌안의 도로를 따라 약 4㎞ 가량을 가면 닿게 된다. 동량리 어구에서 그들은 큰 길옆 버들 방천에 숨어서는 오로지 수송대가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디어 적들의 수송대가 나타났다. 수송대는 느릿느릿 동량리어구에 들어섰다. 100메터, 50메터, 30메터... 수송대행렬의 륜곽이 점점 똑똑히 알렸다. “땅!” 어스름의 정적을 깨뜨리면서 총소리가 되알지게 울렸다. 윤준희의 사격신호였다. 그 신호와 같이하여 대원들은 일제히 호송대를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맨앞에서 말을 타고 오던 일본순사가 총에 맞아 말우에서 굴러 떨어졌다. 습격대원들은 맹호같이 버들방천에서 뛰쳐나와 혼비백산해 어쩔줄 모르는 적들을 몰아 세웠다. 그런데 이때 총소리에 놀란 맨 앞장 선 말이 네굽을 박차고 앞으로 내달렸다. “저 말을 붙들라!” 윤준희와 최봉설은 15리나 쫓아가서 어느 산중 턱에서 간신히 말을 멈춰 세웠다. 말에 실은 주머니를 헤치는 순간 그들의 입에서는 환성이 터져 올랐다. 주머니 속에는 도합 15만원의 새 지폐가 꽉 차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돈을 나누어 지니고 오도구를 거쳐 해란강을 건넌 후 삼봉동, 조양천을 경유하여 부르하통하를 건너 회합지점인 와룡동에 도착하기로 합의했다. 그들은 와룡동의 최봉설네 집에서 저녁 8시까지 휴식을 취한후 소달구지에 돈을 싣고 출발했다. 일제의 검거를 피하여 두 주일 의란구에 숨어있다가 블라지보스토크를 향해 떠났다. 러시아 모구위(毛口崴)에서 배를 타고 블라지보스토크로 향발, 23일 블라지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도착하였다. 신한촌에서 그들은 당지의 반일지사인 채성하의 집에 류숙하였다. 사건이 일자 온 간도가 발칵 뒤집혔다. 사건이 발생한 이튿 날인 1월 5일, 용정 주재 일본령사관에서는 수백 명의 중일경찰들을 동원 해 평강일대에서 조선인들은 검거 체포했다. 그중에는 최봉설의 아버지와 동생도 들어있었다. 일제가 우리의 반일지사들을 잡으려고 악에 바쳐 광분하고있을 때 무기구입을 책임진 임국정은 친분이 있는 엄인섭을 찾아가 무기구입을 두고 상논했다. 하지만 이것이 화근으로 될줄이야. 임국정이 찾았던 엄인섭은 언녕 변절하여 일제의 끄나불 노릇을 하고있었던 것이다. 엄인섭은 1908년 동의회(同義會)를 조직하여 이범윤의 의병부대에서 좌영장(左營將)을 맡아 국내 진공작전을 지휘한 사람이었다. 봉오동 전투를 진두 지휘한 반일명장 홍범도와도 의형제 사이로서 일제가 한 때 가장 위험한 인물로 꼽았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측 한국어 통역관의 증언에 의하면 엄인섭은 요수를 잘 부리고 투전 꾼이며 본처 외에 몇 명의 첩을 거느리고 품행이 아주 좋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또 성격이 포악하여 살상을 자기마음대로 하였다고 한다. 철혈광복단이 부푸는 꿈을 안고 엄인섭을 찾아갔을 때 그는 이미 변절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무기상이자 일본의 첩자로 되어 있었다. 엄인섭은 겉으로는 무기를 사는 일은 근심말고 자기에게 맡기라고 호언하면서 서둘러 블라지보스토크에 있는 일본헌병대에 상황을 밀고 해 버렸다. 헌병대의 정보를 받은 일제는 즉각 출동했다. 조선 나진항구로부터 일본해군 군함까지 블라지보스토크에 파견할 정도로 신속한 대응을 벌렸다. 1월 31일 밤 신한촌에 대한 일제의 피비린 대검거가 시작됐다. 꿈나라에서 무기교섭의 성공을 꿈꾸던 그들은 한밤 중 개들이 자지러지게 짖어대자 잠을 털고 일어났다. 바깥동정을 느끼고 서둘렀나 때는 이미 늦었다. 전신무장을 한 일제군경들이 이미 그들이 투숙하고있던 집을 물샐틈없이 포위해 버렸던 것이다. 앞뒤문이 벌컥벌컥 열리면서 시커면 총아구리들이 이들을 향해 들이닥쳤다. 뒤문으로 빠져나가려던 윤준희, 한상호, 임국정은 미처 손쓸사이도 없이 체포되고말았다. 뒷방 문 곁에서 자고있던 최봉설이 사태의 엄중성을 느끼고 맨발로 문을 박차고 뛰쳐나갔다. 앞을 가로 막는 일본군헌병을 발길로 걷어차 넘어 뜨리고 키넘는 담장을 훌쩍 뛰여넘었다. 헌병들이 최봉설을 향해 집중사격을 퍼부었다. 오른쪽 어깨에 총탄을 맞았지만 최봉설은 상처를 한 손으로 감싸면서 계속 앞으로 뛰였다. 얼마 못뛰여 이번엔 왼쪽 발에 또 총알을 맞았다. 가물가물해지는 의식을 추슬리며 최봉설은 단말마로 뛰고 또 뛰였다. 일제의 검거로 단원들이 목숨걸고 탈취했 던 15만원중에서 12만8천여원을 압수당했다. 아울러 블라지보스토크에 주둔하고있던 500명의 조선족반일투사들도 몽땅 체포되는 대가를 치렀다. 1921년 8월 25일 윤준희 등 세 사람은 서대문형무소에서 사형에 언도되었다. 윤준희는 30살, 임국정은 27살, 한상호는 23살의 애젊은 나이었다. 당시 최신 소총 한 정이 30원 이었다고 하니 15만원은 반일독립군 5000명을 단번에 중무장시킬 수 있을 정도의 거금이었다. 간발의 차이로 비장하게 마무리 된15만원 탈취사건이 있은 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대첩이 일었다. 15만원 탈취거사가 무기구입 성사로 마무리 되었더라다면 전반 한민족 항일무장투쟁의 판도를 바꿔놓았을 것은 물론일 것이다. 일제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전설처럼 살아남은 최봉설(崔鳳卨)은 상처를 치료한후 홍범도장군이 이끄는 독립군부대를 찾았고 원동공화국인민군부대와 빨찌산들과 함께 원동출병 일본군대와 러시아 백파군과 맞서 싸웠다. “15만원탈취사건”이 발생한지도 이젠 90여년 세월을 경과했다. 그동안 사건경위에 대해 각이한 기술이 있지만 유일한 생존자 최봉설씨의 증언과 관련자료들이 아직도 그냥 발굴되면서 사건의 진상은 진실에 한걸음 가까와졌다. 한편 밀고자 엄인섭의 행방을 보면 그후 원산에서 손영극이란 사람과 술자리에서 힘 자랑을 하다가 주먹깨나 하는 손씨의 주먹 한방에 복부를 맞고 그것이 원인이 되어 병들어 죽었다고 한다. 손씨는 “너, 이새끼 왜놈 앞잡이지”하는 괘씸한 생각으로 혼신의 힘을 다해 때렸다고 한다. (“동북지역 독립운동사”, 동북동지회 엮음, 코람데오, 2009. 105페지) 지금 용정지역에는 “15만원탈취사건”의 유적지가 남아있다. 당년 일제의 군자금 조달지점이었던 조선은행 건물은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도 원모습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지금의 용정 시정부 서쪽문, 신화서점 사거리에서 용정 서시장쪽으로 빠지는 골목 바로 오른 편의 회색 2층건물이 바로 그 곳이다. 한때 용정시 공상은행 영업청으로 사용되었다. “15만원 탈취사건”의 흔적을 남긴 또 하나의 유적지로는 탈취사건 지점에 세워진 거사 기념비이다. 용정 시에서 동남쪽으로 7.5킬로메터 떨어진 지신진 승지촌, 그 부근에 거사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포장도로 오른 편 육도하가 흐르는 강언덕, 돌로 3메터 가량 쌓은 축대 언덕주변은 세멘트로 단을 쌓고 오르는 계단도 만들었다. 석비 정면에 한자로 “탈취십오만원사건유지(奪取十五萬元事件遺址)”라고 새겨져 있다. “15만원탈취사건은 민족의 항일투쟁사에 중요한 장을 장식하면서 아주 큰 역사 적 의미를 가진다.” 학계는 15만원 탈취사건은 용정 3•13 만세운동으로 대표되 던 비폭력 항일운동에서 1920년 6월 홍범도 장군의 봉오동전투, 같은 해 10월 김좌진 장군의 청산리전투 등 무장 독립투쟁을 이어주는 중요한 의미를 띠는 거사라고 정평하고 있다. 몇해 전 칸 국제영화제 초청, 200억원이라는 억대의 제작비에 정우성, 이병헌등 최고스타의 열연으로 화제를 모으며 당년 한국영화의 최고의 흥행작으로 떠 오른 영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모티브가 된 사건이 바로 “간도15만원 탈취의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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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기고
    2016-01-13
  • [김희수 칼럼] 조선족 지금은 아플 때
    ● 김희수 어느 장례식에 참석했을 때 고인의 맏아들이 보이지 않아서 사정을 알아보니 한국에 간지 2년째라는 것이다. 고인은 전날 저녁에 갑자기 사망했기에 한국에 가있는 맏아들은 부고를 전해 듣고도 이튿날 오전에 치르게 될 장례식에 도착하지 못할 것은 뻔했다. 예전에 7일장까지 치르면서 외지에 간 아들을 기다리던 생각을 하면 가슴이 아프다. 부모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돌아가지 못한다. 자녀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도 돌아가지 못한다. 팔소매로 눈물을 훔치고는 다시 일하러 나갈 뿐이다. 보다 나은 미래의 삶을 위해 벌어야 하기때문이다. 여기서는 눈물도 사치이다. 아무리 슬프고 고독하고 아파도 참아야 한다. 차별화를 당하고 냉대를 받고 무시를 당해도 참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재한조선족들의 현주소이다. 장기간의 고된 일에 몸이 지친데다가 쌓이고 쌓인 스트레스, 이런저런 고민에 마음까지 피로해져 몸에 병이 생긴다. 하지만 웬간한 경우에는 참고 계속 일하기에 나중에 병이 깊어져 사망한 경우도 있고 중병에 걸린 경우도 있다. 잔병은 누구나 다 가지고 있다. 몸이 지쳐서 아프다. 마음도 상처를 입어 아프다. 이것 또한 재한조선족들의 현주소이다. 하지만 이들은 희망을 안고 살면서 새로운 기적과 부를 창조하고 있다. 조선족사회는 지금 아플 때이다. 대도시 진출과 끊임없는 대규모의 한국행으로 이산가족이 늘면서 조선족 대부분이 이산의 아픔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온가족이 모여 명절을 쇠는 그런 풍경은 이젠 옛말이 되였다. 조선족마을에서 아기의 울음소리와 아이들이 글읽는 소리를 들을수 없고 조선족이 농사짓는 모습도 보기 힘들게 되었다. 2015년 12월 19일자 한국일보는 “조선족의 터전인 중국 동북3성 거주 조선족은 한때 200만 명에 달했지만 현재는 불과 40만~60만명 정도로 급감했을 것으로 전문가들은 추산한다. 이농현상으로 중국 대도시와 연안도시로 50만명 정도가 빠져나갔고, 한국으로도 이미 75만명(국내 체류 조선족에 한국국적 회복인원 포함) 이상 건너왔다. 한국 이외의 다른 외국으로도 15만~20만명이 이동하면서 조선족 마을은 붕괴 직전이다.”고 보도했다. 이런 가슴 아픈 현실을 두고 조선족사회의 미래가 암담하다고 두손 놓고 앉아서 비관할 수 만은 없다. 일루의 희망이라도 있다면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 게다가 조선족공동체가 무너진다는 것은 시기상조이다. 조선족사회가 해체될 위기에 처해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위기는 고비만 잘 넘기면 더 발전할 수 있는 기회로 될 수 있다. 조선족 전통사회는 해체되고 있지만 그 해체와 더불어 새로운 조선족 집거구가 형성되고 있다. 농촌에서 도시로 이동하고 소도시에서 대도시, 연해도시 또는 해외(주로 한국)로 이동하고 있지만 흩어지면서도 다시 모인다. 결국엔 다시 모일 것이다. 대도시, 연애도시에 가있건 한국에 나가있건 우리 모두가 중국조선족이다. 조선족은 모래알처럼 흩어진것이 아니다. 새로운 집거구를 형성하고 조선족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아무리 장기간 헤여져 있어도 우리는 스마트폰 하나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아프면서 성장한다는 말이 있다. 아이들은 아프면서 크면 더욱 단단하고 건강해진다. 조선족사회도 진통을 경험하는 성장과정을 거치면 앞으로 더욱 성숙하고 더욱 건강해질 것이란 희망을 가져본다. 우리 다 같이 희망을 가지고 함께 고민하고 함께 위기를 해결해 넘기면서 포기하지 않고 조선족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한 도라지 노래는 계속 울려퍼질 것이고 아리랑 선율은 영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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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10
  • 중한 FTA 우리에게는 어떤 기회인가?
    ■ 박정일 (중국조선족중학생신문사 사장/연변일보 논설부 부장) 중한 FTA(자유무역협정)체결로 국가간의 무역에서 관세를 줄이거나 아예 철페하게 된다. 규정에 따라 상품 품목수 기준으로 중국 측은 91%의 관세가 20년내에 철페되고 한국측은 92%의 관세가 철페되며 수입액 기준으로 중국 측은 20년내에 85%의 관세가 취소되고 한국 측은 91%의 관세가 취소되면서 중한 량국의 소비자들의 선택범위가 넓어지게 되는데 이는 우리 조선족들에게 새로운 기회로 작용할 것이라는 판단이다. 우선 중한자유무역협정으로 한국상품선호도가 높기로 정평난 우리 조선족 소비자들이 싸고 질좋은 다양한 한국상품을 구매할수 있게 된다. 현재 연변을 포함한 국내 조선족들의 가가호호마다 한국제품을 사용하지 않는 집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집에서 쓰는 그릇에서부터 복장에 이르기까지 연변사람들의 한국제품 선호도는 너무나 높다. 이번 중한자유무역협정이 효력을 발생한후 한국상품에 대한 선호도는 더욱 높아질 것이다. 중한자유무역협정은 수많은 품목의 자유거래와 세금철페로 수많은 일자리를 창출하게 된다. 이런 혜택은 중국도 한국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조선족들의 활약할수 있는 기회가 된다. 중한자유무역협정으로 앞으로 한국무역인들이 중국진출에서 가장 쉽게 활용할 사람들이 중국 조선족들이고 중국인들이 한국진출에서 가장 쉽게 활용할 수 있는 사람이 중국 조선족들이다.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생활습관마저 동일한 조선족들이 할일은 갈수록 많아질 것이다. 중국에는 아직도 한국어에 능한 사람이 극히 적다. 한국의 문화에도 익숙하지 못하다. 반면 중국에는 중국어와 한국어에 통하는 조선족젊은이들이 수없이 많다. 언어가 통하고 습관이 비슷한 우리 조선족들이 이번 중한자유무역협정을 잘 이용한다면 경제적으로도 리익을 창출할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언어의 소통우세는 무역정책과 무역정보수집에 우세적이고 무역거래와 상업경영 및 선진적인 서비스업의 도입에도 유리하다. 이러한 우세는 대부분 조선족들을 통해 이루어지기에 이를 잘 이용한다면 무역, 도매, 판매 등 수많은 영역에서 활약을 기반으로 새로운 창업을 시도할수도 있는 기회가 된다. 뿐만아니라 조선족들이 많이 집거한 지역에서도 이득이다. 한국상품에 대한 소비가 늘면 늘수롤 그 지역의 징수액도 높아질 수 있다는 점에서 보면 지역사회에도 이득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백두산지역의 일부 농산품들도 한국시장에 무관세수출을 할 수 있어 연변내의 많은 지역에서도 혜택을 보게된다. 또한 좋은 물건이 들어오면서 제조기업들에게 경쟁력이 있는 우질상품을 생산하도록 압박하는 효과도 있어 소비자들에게는 득이다. 자유무역협정을 통한 상호 무역은 필경 소비자를 대상으로 이루어지기에 상품의 소비자 만족도가 제품판매의 승부를 가늠하는 지레대가 되여 소비자만족의 상품이 생산되고 시장에 진출할 수 있도록 생산기업을 압박하고 생산기업은 이런 과정을 통해 성장한다. 현재 우리 조선족들은 연변을 포함한 여러 지역에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다. 우리 조선족들은 국내적으로 북경, 상해, 청도 등 지역에 대거 진출해 있는가 하면 한국에도 이젠 70여 만명의 조선족들이 집거해 있다고 한다. 이렇게 국내외적으로 분산돼 있는 우리 조선족들에게는 이번에 체결된 중한자유무역협정은 하나의 기회가 아닐 수 없다. 특히 더욱 낫은 삶의 터전을 찾아 세상 곳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조선족들이 자신들만이 가지고 있는 우세를 살려 한국과의 교류를 더욱 밀접하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봐도 중한자유무역협정은 우리 조선족들이 자신들의 삶을 한층 윤택하게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총적으로 중한 자유무역협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적극적인 요소들은 결과적으로 우리에게는 혜택으로 돌아오고 이런 혜택은 우리 조선족사회에 새로운 경제활력을 주입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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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9
  • 고향을 버리는 것이 출세였다
    ■ 김정룡 (중국동포사회문제연구소 소장) 우리 조선족역사가 각 가문의 이주시간이 보편적으로 100년도 채 되지 않지만 1세대·2세대들의 뼈를 묻은 정든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던 조선족농촌마을이 개혁개방의 거센 파도에 의해 농민들이 뿔뿔이 도시로 해외로 진출하는 바람에 해체되고 있다. 조선인1세대들이 만주에 와서 피땀으로 토지를 개간하고 삶의 터전을 이뤄놓았던 고향이 사라져가고 있으니 매우 안타깝고 따라서 공동체 해체위기이니 뭐니 하면서 대서특필하고 떠들고 있지만 이농에 따른 농촌의 황폐는 새로운 경제시대에 필연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며 이젠 고향이란 개념과 고향에 대한 의식 및 관념을 바꿔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고향은 농경문화의 산물 고향이란 자신이 태어난 곳, 혹은 조상이 살던 곳을 의미하며 과거 전통사회에서 90%이상 사람들이 농경에 종사해왔기 때문에 고향은 흔히 농촌을 뜻한다고 보아야 한다(전통문화 맥락에서 하는 말). 고향의 다른 표현인 고구(故丘), 고리(故里), 고산(故山), 고원(故園), 구리(舊里), 모향(母鄕), 전리(田里), 향관(鄕關), 향리(鄕里) 등등의 어휘가 시골을 뜻하는 것으로 보아 고향은 곧 농촌을 의미하고 농촌은 곧 우리 선조들의, 아니 불과 30년 전의 우리의 삶의 터전이었다. 유목문화의 특징이 이동이라면 농경문화의 특징은 정착이다. 전통사회에서 절대다수 사람들은 세세대대로 한곳에서 정착하여 살아왔다. 농촌마을문화는 아침에 본 사람 점심에 만나고 점심에 만났던 사람 저녁에 또 마주치고 오늘 본 사람 내일 또 부딪힌다. 매일 반복되는 이와 같은 삶 속에서 자연스레 마을 구성원들 사이 서로 유대감이 강해진다. 농경을 바탕으로 하는 마을문화는 서로 한우물의 물을 마시고, 농번기에는 서로 일을 돕고, 색다른 먹을 것이 생기면 서로 나눠 먹고, 서로 허물없이 마실 다니고, 누구네 집 두지에 쌀 얼마 있고를 알고, 기쁨과 슬픔을 함께 나누는 등 정(情)의 문화가 발달하게 된다. 한반도의 아기자기한 아름다운 삼천리금수강산 지리적인 환경특징 때문에 우리민족은 지구촌에서 정의 문화가 가장 발달되었고 따라서 고향문화가 가장 발달되었으며 가장 끈끈해졌다. 한국전통노래가사에 고향이란 어휘가 매우 많이 등장하는 사실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 고향을 버리는 것이 출세였다. 우리는 고향을 말할 때 흔히 정든 고향이라고 표현한다. 농경문화를 바탕으로 된 고향은 정이 많아 살맛이 나지만 농사일이 그 어느 일 보다 고되다. 일의 고달픔도 심각하지만 주나라 이래 3천년 동안 백성이 농사일에 종사하여 부자가 된 사례가 가뭄에 콩 나 듯 매우 드문 일이었다. 일도 고달프고 게다가 가난하고, 이것이 우리 전통농촌의 현실이었다. 현대문화에서는 都와 市, 혹은 城과 市를 하나로 묶어 都市 혹은 城市라고 말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市는 都 혹은 城과 鄕 사이에 설치하여 시골농산품을 도시에 판매하는 장소였다. 都와 城은 고귀하고 鄕은 비천하고 시는 잡배들이 모이는 곳으로 취급했다. 그리고 전통사회에서 士農工商 신분서열문화가 수천년 동안 지속되어 왔으나 예로부터 농부가 대접받아 본 역사는 없다. 농촌현실이 이러했기 때문에 농촌을 벗어나면 출세했다고 온 동네 사람들의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먼 전통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개혁개방 전까지 도시진출이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에 농촌미녀들이 5전짜리 공인(노동자)이라도 도시총각한테 시집 갈수만 있다면 역시 온 마을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 공부하여 농촌을 벗어나든, 군대 갔다가 도시에 진출하든, 병신 같은 도시총각한테 시집가든 듣기 좋게 말하면 출세였고 나쁘게 말하면 고향을 버리는 행위였다. 바꿔 말하자면 고향을 버려야 출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왜 고향을 그리는가? 인간은 그토록 고향을 버리기 위해 발버둥 치고는 돌아서서 고향을 그리는 간사함이 강하다. 인간이 고향을 그리는 것은 추억 때문이다. 어릴 적 먹던 음식, 어릴 적 다니던 유치원과 학교 모두 추억의 대상이다. 임어당은 “애국주의란 듣기엔 거창하지만 따지고 보면 개개인이 어릴 적 먹던 음식의 기호를 지켜내려는 행위에 불과하다.”는 명언을 남겼다. 도시에 진출했거나 특히 외국에 나가 있으면 어릴 적 먹던 음식이 더 그리워난다. 한국에 와 있는 조선족들은 살고 있는 집이 한국 집이냐, 중국집이냐 의식하지 않고 생활한다. 옷도 굳이 한국복장이냐, 중국옷이냐를 의식하지 않고 거부감이 없다. 하지만 먹는 것만은 다르다. 한국에 오래 있어도 중국음식이 생각나고 조선족밀집지역 사무실에 근무하는 조선족은 매일 점심 거의 중국음식점에 다닌다. 저녁 회식도 기본상 중국음식점을 찾는다. 중국개혁개방 전까지 도시에 진출했던 사람이 가끔 고향에 가면 고향을 떠날 때 살고 있던 사람들이 거의 다 떠나지 않고 있어 반갑게 맞아준다. 게다가 동네 사람들의 음식대접을 받는데 어릴 적 먹었던 음식 맛이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진짜 고향을 그리는 멋이고 맛이다. 그런데 요즘은 고향에 가면 얼굴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떠나가고 없고 타지에서 이사 온 사람들, 혹은 한족들이 이주해 와서 고향을 찾아간 사람은 매우 생경하다. 반갑게 맞아줄 사람도 없고 맛있는 음식대접은 먼 옛말이 되어버렸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고향에 갈 멋이 없다. 한국 실향민들이 아직도 고향을 몹시 그리는데 그들은 고향을 갈 수 없기 때문에 꿈의 고향으로 남아 있어 더욱이 사무치게 그리게 되지만 조선족은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고향에 갈 수 있다. 하지만 고향에 가면 아무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발길을 돌려야 하고 남은 것은 허탈한 한숨뿐이다. 두 번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확 사라져버리고 만다. 필자는 용정시 동불사 요구촌 출신인데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 엄마 및 삼촌들의 묘가 있어 가끔 가는데 예전에는 온 동네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주고 이집 저집 음식을 권하여 고향 맛이 났었는데 요즘은 청명에 보토(補土)하고 추석에 벌초하려고 해도 아는 사람이 없어 삽을 빌기가 힘들고 낫을 얻기가 어려워 연길에서 갖춰갖고 가야하는 상황이다 보니 ‘고향’의 맛을 느끼지 못한다. 20·30대 조선족에게 있어서 고향의 의미는? 1990년대 초반 한국인관광객이 백두산투어에 나섰을 때 가이드가 전부 조선족이었다. 한국인관광객들이 같은 핏줄 젊은이들을 만나 몹시 반가워했고 흔히 “고향이 어딘가?”고 물었다. ‘왕청’, ‘화룡’이라고 대답하면 한국인은 고개를 갸우뚱한다. 들어보지 못했던 지명이기 때문이다. “거기가 어디냐?”고 물으면 연길에서 얼마 가고 어떤 방향이라고 말하면 그때서야 알아차리고 “아니 할아버지 고향 어딘가?”라고 다시 재차 묻는다. 한반도 조상의 뿌리를 알고 싶은 것이다. 한국인들의 이와 같은 질문은 아직도 농경문화의 산물인 고향의식이 굳건히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조선족젊은이들에게 있어서 자신이 태어난 곳이 고향인 줄 로 만 알고 조상고향이 곧 나의 고향이라는 의식이 없다. 그래서 할아버지 고향을 물으면 다수가 모른다. 개혁개방 전까지 도시 아이들이 방학하기를 손꼽아 기다렸다가 시골할아버지 집 혹은 시골외갓집에 가서 방학을 보냈다. 도시에서 태어난 이들 세대까지는 조상고향의식이 있었는데 나의 딸애가 소학교 다닐 때 방학에 시골할아버지 집에 가라면 죽어라 가지 않았다. 아무리 어떻게 달래도 가지 않았다. 나의 딸애 세대 조선족젊은이들에게 조상고향이라는 개념이 아예 머리에 존재하지 않는 것 같다. 나의 딸애가 연길에서 태어나 자랐는데 이웃집에 누가 살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삭막한 도시생활이 과연 그들에게 전통고향의 의미가 존재할까? 이 세대들은 기껏해야 타도시 사람들이 연길 흉을 보면 화날 정도이다. 그 이상 이하도 아니다. 마치 한국 사람들이 재한조선족들 앞에서 중국 흉을 보면 화내는 것처럼 말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있어서 고향이란 별로 의미가 없다. 그리고 중국 내 타성이거나 해외에 출국해 있는 조선족들은 이젠 어디가 살기 편하면 그곳이 곧 ‘고향’이란 생각이 굳어져 가고 있다. 고향을 버려야 잘 살 수 있다. 과거 고향을 버리는 사람이 출세였고 모두 농민에 비해 생활이 윤택했던 건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세월 도시진출이 어렵다 보니 고향을 버리고 싶어도 버리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요즘은 고향을 버리는 행위가 매우 쉽다. 쉽다 못해 식은 죽 먹기이다. 도시에 진출해 짠지 팔아도 살 수 있고 자전거수리해도 먹고 살 수 있고 하다못해 인력거를 끌어도 생계는 유지할 수 있다. 아무 일 해도 농사일만 덜 고달프고 수입이 더 좋을 수 있다. 도시에 진출해 창업하면 금상첨화이고 해외에 출국하면 더욱 ‘출세’이다. 재한조선족 70만 중에 농촌출신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들은 자식을 공부시키고 중국에 집 사놓고 노후를 준비하고 있다. 이들의 생활을 ‘소강’수준에 이르렀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한국바람이 아니었다면 현재의 부를 상상조차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일각에서는 한국바람에 자녀공부문제 어떻고, 이혼문제가 어떻고 하면서 만약 한국이 아니었다면 조선족사회가 잘 살 것처럼 심각하게 떠들고 있는데 이것은 정말 웃기는 일이다. 만약 한국에 오지 않고 돈을 벌지 않았더라면 빈곤한 처지에서 자녀공부는 저절로 잘 될까? 돈이 없어도 부부가 여전히 이혼하지 않고 화목하게 가정을 잘 지킬 수 있을까? 농촌공동체는 사라져가고 있으나 조선족은 사라지지 않는다. 개혁개방 전까지 농촌공동체마을이 조선족전통문화의 근거지였다. 이 근거지가 사라져가고 있는 것은 정말 안타까운 일이지만 새로운 경제시대에 어쩔 수 없는 추세였다. 농촌을 떠나 중국 내 도시생활하거나 한국을 비롯해 해외에 출국해 있거나 하는 조선족들에게 농촌에 돌아가라고 호소하는 행위는 소귀에 경 읽기이다. 최근 중국에서 도시호구보다 농촌호구를 더 선호하는 바람이 불고 있는데 이는 토지를 확보하여 예측불허의 미래에 보증수표를 만들어 놓으려는 목적일 뿐 정작 지금 농촌에 가서 농사지으라면 지을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아무리 농촌을 중시하고 혜택을 베풀어도 조선족공동체마을 해체는 막을 수 없는 추세이다. 일각에서는 전통조선족공동체마을해체를 조선족사회 실종과 등식화하고 있는데 글쎄 이런 결론은 아직 시기상조가 아닐까? 중국 내 도시에 진출해 있는 조선족사회는 각종 협회와 동호회 및 이런저런 모임을 통해 조선족공동체가 새롭게 형성되고 있다. 게다가 조선족이 많이 살고 있는 도시는 한국인이 그만큼 많이 살고 있는 것이 정비례 되어 함께 하나의 새로운 문화공동체를 형성해가고 있다. 미국이나 일본을 비롯해 기타나라에 출국해 있는 조선족사회도 마찬가지로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어가고 있다. 이와 같은 공동체들은 조선족들로 하여금 나는 조선족이란 끈을 유지하게끔 만들고 있다. 나의 딸애가 대학 졸업하고 광주에서 취직하게 되어 아빠인 나는 은근히 한족남자를 신랑감으로 데려오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걱정은 기우였다. 광주에도 조선족모임이 있는데 거기서 연길총각을 만나 연애하고 결혼하였다. 요 몇 년래 한국에 오는 조선족젊은이들 중 적지 않은 자가 우리말을 모른다. 안다 해도 매우 서툴다. 한족이나 다름없던 이들이 한국생활 수년을 거쳐 우리말뿐만 아니라 우리전통문화를 알아가고 있다. 가장 전형적인 실례는 우리민족의 조상도 모르고 살아온 조선족이 다수였던 것이 한국생활 통해 조상을 알게 되었고 가문의 뿌리도 알게 되었다. 처음엔 부모가 한국에 있으니 어쩔 수 없어 한국에 오긴 하였으나 한국생활 수년을 거치고 나면 한국을 떠나려고 하지 않는다. 이들 부류는 중국에 있을 때는 90% 한족처럼 생활해 와서 무늬만 조선족일 뿐이었는데 한국에서 체류하면서 점차 ‘조선족’으로 회복되어가고 있다. 위 사례들을 살펴보면 전통조선족공동체마을은 해체되어도 또 다른 새로운 공동체가 생겨나고 고국이란 끈이 존재하는 한 조선족은 사라지지 않을 것으로 짐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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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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