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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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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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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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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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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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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3)
    ■ 김철균 지금의 분열로 두개 나라가 된 한반도의 현실에 대해 구태어 길게 언급할 필요가 없겠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듣고 또 나름대로 분석하고 있으니 말이다. 언급하고 싶은 것은 지금의 한반도 현실 역시 다 우리 민족이 약하고 힘이 없는데다 강대국들의 욕심과 아귀다툼으로 인한 비극이란 것을 강하게 언급하고 싶다. 1945년 8월 15일 한반도는 일본천황 히로히토의 항복성명으로 광복이 됐다. 헌데 광복이란 얻어진 것이지 우리 민족이 자체의 힘으로 쟁취한 것이 아니었다. “누군가에 의해 남한테 빼앗겼던 집이나 물건을 되찾게 되면 그 사람의 말을 잘 듣기 마련이다. 이는 사람으로 생겨서의 이치이다.” 아버지의 말씀이었다. 지리적 위치를 놓고 볼 때 한반도는 중국대륙과 러시아 극동지구와 붙어있고 미국과는 세계에서 가장 큰 해양인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있다. 그러니 제 2 차 세계대전의 종말 당시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모든 방면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장악하고 발을 붙여야 할 지역이 바로 한반도였다. 하지만 제 2 차 세계대전의 종말을 앞두고 미국 혼자의 힘으로 일본을 굴복시키자면 막대한 대가를 지불해야 했다. 그 당시 미국은 또 다른 강대국으로 떠오른 소련의 힘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45년 7월 26일에 있은 포츠담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의 대일작전을 적극 요청하기까지에 이르렀다. 동시에 대일작전에 대한 스탈린의 동의를 얻어낸 후 미국대통령 투루먼은 돌이킬 수 없는 한가지 큰 과오를 저질렀음을 인차 깨달았다. 바로 이 때 투루먼은 본국으로부터 “아기는 무사히 태어났다”란 전보를 받게 됐는데 그 “아기”란 바로 원자폭탄이었다. 워낙 그 “아기” 즉 원자폭탄이 좀만 더 일찍 태어났어도 미국은 근본 소련의 힘이 필요없이 혼자서도 일본을 굴복시킨 뒤 보다 많은 이익을 챙길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1945년 8월 6일, 미국이 일본 히로시마에 첫 원자폭탄을 투하한 3일 뒤인 8월 8일 소련홍군은 도합 157만 7700여명의 막강한 병력으로 운집, 세갈래로 나뉘여 만주와 조선 지역으로 진출하며 파죽지세로 일본군에 대한 최후의 공격을 들이댔다. 소련홍군의 공세는 그해 4월 독일 본토인 베를린을 진격할 때의 속도를 초과하였다. 이는 미국도 미처 예상치 못하던 일이었다. 미국은 조선 전체를 소련홍군한테 넘겨줄 수는 없었다. 조선 전체가 소련의 지배로 넘어가면 미국은 아시아의 극동지구에서 발붙일 곳이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오는 소련홍군의 진격을 저지하는 방법이란 한반도의 중간지역에 경계선을 긋는 것이었는데 마침 그 중간지역에 38도선이 지난 것이 있었고 미국은 이 38선을 경계로 미국과 소련이 조선 남과 북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하자고 제안하기에 이르렀으며 마침 소련이 그 제안을 받아들였던 것이다. 당시 소련이 왜 미국의 이 제안을 받아들였는지는 알바가 없다. 다만 2 차 대전에서 미국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적 지원을 받아온 소련으로서는 미국의 제안을 거절할 적당한 이유가 없었던 모양이었으나 이는 다만 추측에 불과하다. 이렇게 생겨난 38선 - 그 38선을 사이에 두고 남과 북은 각각 미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기 시작했고 또 그것을 계기로 여러 가지 갈등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당시 조선은 힘이 없었다. 소련군이 ‘해방자’란 명목으로 북에 진출할 때와 미군이 ‘점령군’이란 명목으로 등륙할 때에도 모두 구경밖에 할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약소국가와 약소 민족의 운명이었다. 그리고 북쪽은 소련을 등에 업었고 남쪽은 미군을 등에 업었으니 ‘통일’이란 구호는 같았으나 목소리의 내용은 제각각이었다. 그리고 통일과는 점점 멀어져가는 정치적 이념속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버지의 말대로라면 2차대전의 종말 당시 통일된 한반도가 탄생할 기회가 없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북측의 뜻대로라면 소련이 38도선을 경계로 하자는 미국의 제안을 듣지 않고, 또한 머나먼 오키나와에 있는 미군이 “남조선”에 발붙이기 전에 한반도 전체를 점령했더라면 그때에 통일된 조선이 탄생했을 것이고 남측의 뜻대로라면 미국이 보다 일찍 원자폭탄을 만들어 소련의 힘을 요청하지 않고 혼자의 힘으로 일본을 굴복시켰더라면 역시 미국의 지배하에 있는 통일된 한국이 탄생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약소국가인 한반도는 그러한 선택권은 물론이고 그러한 요구를 미국 혹은 소련에 제기할 권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한편 중국은 달랐다. 한시기 중국도 남북으로 분단될 위기가 있은 적이 있었다. 즉 1949년 당시 미국과의 협의를 거친 스탈린이 모택동한테 장강이북을 차지하고 장강이남을 장개석한테 양보하라고 제의했다고 한다. 하지만 모택동은 스탈린의 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왜냐하면 당시 모택동한테는 힘이 있었던 것이다. 전쟁속에서 쟁쟁 소리나게 단련된 600만명의 군대가 있었고 공산당의 세뇌교육을 받은 2억만여명의 인민들이 있었으니 스탈린의 제안을 거절할 수 있고도 남음이 있었다. 반대로 한반도는 광복조차 외세에 의해 이룩된 것이었고 소위 한국독립군, 항일빨치산과 조선의용군 등 민족의 군대가 있었지만 그들은 조선에서 일본군의 투항을 접수할 권리조차 없는 상황이었다. 아버지의 얘기처럼 남들의 신세로 광복을 맞았으니 남의 말을 고분고분 들어야 했다. 그렇게 생겨난 38선, 이는 결국 1950년의 6.25동난을 초래했고 전반 7000여만의 겨레가 지금까지 분단의 설음을 안고 사는 고통속에 몰아넣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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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4-07-26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9)
    ■ 김철균 결혼 뒤 남편은 자기의 주견이 세울 때도 있었지만 많은 방면에서 아내인 순자가 하자는대로 따라주었다. 그것은 자기한테 바친 아내의 자아희생적인 선택에 대한 “보답”이기도 했거니와 가정생활을 포함한 모든 생활에서 아내의 뜻과 주장이 그만큼 정확하고 “진리”였기 때문이었다. 우선 순자는 민족단결을 도모하는 측면에서 각별한 신경을 기울였다. 특히 당시는 연변조선족자치구가 갓 창립된만큼 민족단결을 각별히 강조해야 할 시기이기도 했다. 연변은 조선족과 한족을 비롯하여 만족, 회족, 몽고족 등 여러 민족이 어울려 사는 고장이다. 이렇게 여러 민족이 함께 사는 고장인만큼 여러 민족이 친 형제처럼 화목해야 한다. 만약 여러 민족 사이에 단합이 잘 되지 않고 서로 흉보고 물어뜯고 하는 현상이 비일비재로 나타난다면 외래침략자가 쳐들어오지 않아도 내부적으로 분열이 생겨 붕괴되기가 쉽다. 나라에서 연변에 자치권리를 부여한 것은 바로 여러 민족이 손잡고 공동으로 잘 살라는 것이지 결코 조선족들만이 특수화를 부리라는 것이 아니다. 그러기에 우리 연변지구에서는 반드시 조선족은 한족을 떠날 수 없고 한족 또한 조선족을 떠날 수 없다는 사회적 분위기가 조성되어야 한다. 이렇게 생각한 순자는 한족을 비롯한 기타 소수민족과의 민족단결을 위한 일련의 언행지침을 제정하였다. 절대적은 아니지만 한족들은 너그럽고 순박한 반면 위생지키는 면에서 좀 지저분하고도 부족함이 노출되고 있다. 우리 조선족 또한 절대적은 아니지만 친절하고 활발한 반면 사람과 사람사이, 가정과 가정사이에서 남의 험담을 늘여놓는 열근성이 노출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 조선족과 한족들 사이에서 서로 상대방의 우점을 따라배우고 자기의 열근성을 극복하면서 손을 잡아야 민족단결을 운운할 수 있고 자기 민족한테 30%의 배려를 쏟았다면 한족한테는 70% 혹은 그 이상의 배려를 쏟아야 한족들의 긍정과 신뢰를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한족들을 위해 많이 봉사하고 그들의 신뢰를 받는 것 역시 결국은 우리 조선족을 위하는 사업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순자는 민족단결이란 쉽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고 민족단결의 성과도 나무위의 배가 익어 절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듯이 그냥 자연스럽게 이룩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많은 면에서 한족들을 위해 봉사를 해주었는데 실례로 조선족가정과 한족가정에서 같은 일에 봉착하였다면 될수록 한족집부터 도와주군 했다. 여기에 한가지 에피소드가 있다. 순자네 이웃에는 성이 진씨인 한족집이 있었다. 어느 날 이집 주인 진씨가 마당을 쓸려고 문을 나섰는데 벌써 누가 말끔하게 쓸어놓은 것이 아닌가? 그래서 진씨는 한뉘 자기의 몸도 가꿀줄 모르는 마누라가 마당을 다 쓸다니 해가 서쪽에 뜰 일이라고 희한해했다. 그리고 그채로 집에 들어오면서 아직도 잠자리에 누워있는 마누라를 보며 “오래 살다보니 마누라가 마당을 쓰는 것을 다 본다”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마누라가 잠꼬대를 하듯 “내가 왜 당신을 두고 마당을 쓸어?!”하고 한마디 하고는 홱 돌아눕는 것이었다. 그럼 그렇지. 아직도 잠자리에서 일어나지도 않은 마누라가 마당을 쓸 일은 없지. 그렇다면 과연 누가 몰래 남의 마당까지 쓸어놓았단 말인가?… 다음날 아침, 2-3일에 한번씩 아침시장에 다녀오는 습관이 있는 진씨는 그날 아침도 하남시장에 나가 콩물과 기름튀기떡을 사들고 집마당에 들어서다가 이웃집 김선생네 색시가 자기 집 마당을 쓸어주는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아이유 색시, 색시가 우리 집 마당을 다 쓸어주다니 웬일이유? 나는 또 게을러빠진 우리 마누라가 마당을 쓸었다 하고 칭찬까지 해줄번 했는데…” “아주버님, 어디 아침장마당에 다녀오는 길이세요? 아침에 우리 집을 마당을 쓸겸 먼저 아주버님댁네 마당부터 쓸었어요.” “그래도 그렇지. 우리 집 마누라는 아직 꿈속에서 깨여난 것도 같지 않수다 허허허” “괜찮아요. 이웃집 마당이 깨끗해야 우리 집 마당도 깨끗하고 온 동네가 깨끗할 것이 아니예요?!” 그러자 진씨는 “당신네 조선족들은 정말 깨끗하여 항상 위생모범우다. 정말 깨끗해…”라고 하며 엄지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뿐이 아니었다. 순자는 한족가정에 환자가 생겼을 때도 그러했고 한족집 가정에 반찬이 떨어졌을 때도 그러했으며 하다 못해 조선족애와 한족애가 다툼질을 하거나 싸울 때도 먼저 조선족애를 교육하고 나중에 한족애한테 타일러주군 했다. 이를 두고 한시기 많은 조선족들은 이해하지 못하거나 심지어 비난하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순자가 한 것이 옳다는 것이 증명이 되었다. 많은 한족들이 조선족들을 우러러 보게 되었고 조선족가정에 변이라도 생기면 적극적으로 도움의 손길을 보내오기도 했다. 한편 순자는 남의 마당을 쓸고 쓰레기를 쓰레기통에 갖다던지기도 하였는가 하면 위생이 좀 불결한 집은 집안청결까지 도와주면서 개인과 가정 그리고 동네와 거리의 위생을 잘 지킬데 관한 선전도 잘 하였다. 그래서인가 일단 아침만 되면 순자가 동원하지 않아도 동네사람들은 스스로 비자루를 들고 위생청결에 떨쳐나서군 하였으며 순자네가 사는 동네는 연길시의 그 어느 동네에 비해서도 위생청결이 잘되여 늘 가두판사처의 표창을 받군 하였다. 그러자 거민위원회에서 선진일군을 선거하거나 소조의 조장을 선거할 때면 모두들 한결같이 순자를 선거하였는데 거기에는 한족주민들이 거의 과반수를 차지하군 하였다. 그리고 1953년말 순자네가 연변위생학교 사업의 수요로 집을 하남가로부터 신흥가로 이사할 때 많은 사람들이 순자와 갈라지기 아쉬워하며 눈물까지 흘렸다. 그중에도 한족로인들과 한족아낙네들이 적지 않았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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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8) 루브르궁
    루브르궁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프랑스, 지점: 파리의 세느강변 함의: 인류고대예술진품을 대량 수집한 박물관임 루브르궁(卢浮宫)은 프랑스의 파리 세느강 오른쪽에 위치, 1204년에 최초로 지어졌는데 최기에는 하나의 성곽에 불과했다가 후에 재건을 거쳐 궁전으로 됐으며 지금은 세계에서 이름난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루브르궁의 총체 건물은 “U”자형으로 부지면적이 18만평방미터에 달하는데 정교한 건축예술로 하여 사람들한테 고풍스러우면서도 청신한 감을 주며 장엄하고도 숙연한 감을 주기도 한다. 루브르궁에는 대량의 인류의 고대예술진품들이 소장되여 있어 건축과 예술의 완미한 조화를 잘 이루고 있다. 그리하여 “인류 문명발전의 총색인”으로 불리우기도 한다. 루브르궁의 박물관 목전 루브르궁에는 세계 각국으로부터 가져온 도합 40여만건의 예술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박물관은 또한 나라 및 품종에 따라 분류되어 진열되어 있다. 예하면 동방예술관, 고대애급예술관 고대그리스ㅡ고대로마 예술관, 진주보석관, 그림예술관 및 조각예술관 등으로 진여되었다. 그 중 고대그리스와 고대 로마예술관이 가장 먼저 세워졌으며 고대애급예술관이 가장 특색있는 진품들로 진열되었고 그림예술관은 품종이 가장 많은 바 35개 전람청에 2200여폭의 그림진품이 소장되어 있다. 루브르궁의 세가지 보물 루브르궁에서 가장 유명한 것은 “루브르궁의 세가지 보물”로서 즉 “모나리자”, “승리의 녀신”과 “미로의 비너스” 등이다. 그 중 “모나리자”의 그림은 그 신비한 미소로 일찍 세계에 알려졌다. 그리고 “승리의 녀신”은 돌우에 세워진 여신의 조각으로 비록 머리부분과 두팔이 없어졌지만 사람들이 보는 여신조각은 의연히 가장 완미한것이다. “미로의 비너스”는 기원전 2세기 말에 창작된 것으로 조각이 단정하고도 자연스러웠으며 신체선이 우아하고도 아름답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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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1
  • 오묘한 세계대백과(18) 천태만상의 구름
    하늘의 구름은 장난기가 심한 “녀석”으로 하냥 천태만상의 변화를 일으키기 좋아하는 “성미”를 갖고 있다. 구름은 어떤 때는 얇다란 면사포 모양을 하다가도 어떤 때는 두텁고도 무겁게 전반 하늘을 뒤덮기도 한다. 대낮의 구름은 깨끗한 깃털 같다가도 아침과 저녁이면 붉게 물들기도 한다. 그럼 구름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가? 대자연을 보면 하천과 호수 및 바다와 토양의 수분 등이 끝임없이 증발해 하늘로 올라간다. 이런 수증기들은 일정한 고도로 올라간 후 공기 중의 흑먼지에 붙으면서 갈수록 많아지다가 나중에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구름으로 된다. 그리고 어떤 지방엔 수증기가 많고 또 어떤 수증기는 높게 올라가고 어떤 수증기는 낮게 올라감에 따라 구름형태도 부동하게 형성된다. 또한 일출 때와 일락 때면 태양빛이 비춰주면서 그 구름들은 아름다운 채색노을로 되기도 한다. 대기 중에서 뭉쳐진 작은 얼음 입자들은 쉽게 소실되지 않는바 물처럼 쉽게 증발하는 것도 아니다. 지면으로부터 더 높은 고공일수록 풍력도 더욱 강해지는바 그 곳에서의 구름이 일단 얼음덩어리로 되면 그것이 쉽게 소실되지 않으며 그것이 강풍에 의해 밀려가고 밀려오고 하는데 높은 하늘의 구름떼들은 바로 이렇게 형성된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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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1
  • 해외견문시리즈 젊은 마도로스의 수기(14)
    ■ 김철균 (첫 부분) 요즘 들어 보도매체와 여성단체 및 전반 중국의 동포사회가 조선족인구의 마이너스장성을 두고 깊은 우려를 표시하고 있는 상황이다. 그 우려의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농촌에서는 어린이들의 생일떡을 먹어보기가 힘들다”, “학생수의 감소로 조선족학교가 문을 닫고 있다”, “이제 수십년만 지나면 연변조선족자치주란 이름도 명색일뿐일 것이다”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조선족인구보존을 위한 해결책이 하루속히 나와야 한다고 보면서 한편 우리 조선족의 현재의 삶의 환경에서 인구감소에 대한 우려보다도 조선족인구의 자질제고, 생존공간의 마련 및 삶의 자세를 바로잡아 주는 것이 선차적인 과업이 아니겠는가 하는 견해도 피로하고 싶다. 툭 까놓고 말하자면 자꾸만 아이를 낳으라고만 선동할 것이 아니라 조선족으로 하여금 자존, 자립, 자강의 정신을 키우게 한 다음 인구장성에 관심을 돌렸으면 하는 마음이다. 왜냐하면 중국조선족이 멀리는 서양인, 가까운데는 동족인 한국인과 본토의 한족들에 비해 확실히 생존력 차이가 존재하고 있으니 말이다. 그럼 아래에 한국 본토와 세계 여러 곳에 널려있는 한국인들의 생활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체의 삶의 배경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한국인들한테 주어진 삶의 배경 주지하다싶이 36년간의 일제통치시대의 뒤를 이어 지난 세기 50연대초기의 “6.25”전쟁은 갓 독립된 대한민국땅으로 하여금 쑥대밭이 되게 했다. 페허로 된 공장건물과 황폐해진 전야, 거기에 수백만을 헤아리는 이산가족과 부모를 잃은 고아들, 전쟁의 포성은 멎었지만 그 후유증은 오래갔다. 사람들은 분분히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떠났고 복지라고 모여든 곳이 바로 서울이었다. 부푼 가슴을 안고 서울을 찾아왔건만 서울은 역시 그들이 바라던 “천국”은 아니었다. 인구과잉으로 인한 공급의 부족과 실업율의 급상승, 성행하는 범죄활동과 매음업, 모든 것은 정부의 커다란 부담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하여 후에 모든 매스컴들의 추적화제로 됐지만 당시의 정부는 그 위기를 모면하려고 유럽 나라들을 중심으로 세계 각국에 “유아수출”을 시작, 그것이 바로 한국이 일으킨 이른바 첫 “산업혁명”이었다. 그 목적인즉 한 세대의 대한민국 아동들을 희생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는 중국에 사는 우리들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짐승도 새끼를 고와한다는데 천하의 어머니들의 마음이란 다 같은 법이라 어느 여인인들 자기의 살점과 같은 자식을 외국에 팔기를 원했으랴. 하지만 굶은채 드러누워있는 시부모님과 노무시장에 갔다가 한숨 쉬며 돌아온 남편, 하여 부득불 수많은 여인들은 어머니로서는 천하에서 제일 독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끼고 있어봤자 굶어죽을 것이 번연한 판에 외국에라도 보내면 어린 것도 살고 자식을 판 외화로 시부모한테 보리밥이라도 대접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그런 연고로 해서 30년이 지난 뒤 한국에는 그 때의 생활을 소재로 한 영화들도 적지 않게 나왔다. 필자가 본 “수잔”이란 영화가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하는 스토리었다. 그 줄거리를 간추려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지난 1960연대 초기 한국의 한 농촌에는 정아라고 부르는 한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가정에는 부모외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공부하는 두 오빠에 젖을 먹는 어린 남동생을 두고 있었다. 가정상황이 빈곤하기를 말이 아니어서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병으로 드러누워있고 두 오빠 또한 학비를 대지 못하여 퇴학맞을 위기가 항상 도사리고 있었다. 굶기를 하루 세끼 밥먹듯하고 병마는 그칠 사이가 없고… 바로 이렇 상황에서 어머니는 독한 마음을 먹고 오스트리아의 한 젊은 부부한테 정아를 입양보낸다. 쌀 두가마니를 살 수 있는 값으로 외화를 받고 말이다. 이렇게 오스트리아의 젊은 부부의 딸이 된 정아는 이름을 “수잔”으로 바뀌었고 한동안 이들 부부의 귀여움을 받으며 행복하게 자란다. 그러다가 이들 부부한테도 아들애가 생긴다. 아들애가 생기자 부부는 더는 수잔을 귀여워하지 않을뿐만 아니라 때로운 미개한 동양인종자라고 기시도 한다. 그러다가 수잔은 점점 크면서 자기의 모습이 그들 서양인과는 다르며 출생국가도 머나먼 한국이란 것을 알게 됐고 자기를 버린 부모와 낙후한 한국을 저주하기도 한다. 약 20년뒤 성개방이 일찍 된 유럽, 바로 수잔의 남동생이 자기의 누나를 좋아하면서 그녀와 성관계를 발생한다. 그러나 그 뒤 수잔이 남동생과의 결혼을 결심하자 그 남동생은 “널 좋아한 건 잠시뿐이고 너같은 동양인과 절대 결혼은 할 수 없다”고 등을 돌렸고 서양인 부부 역시 수잔이 결혼을 거들자 더는 집에 둘 수 없다면서 이젠 독립하라고 집에서 내몬다. 집에서 나온 수잔은 얼마 후 자기가 임신했음을 알게 되고 빈민구의 어느 한 찌그러가는 방에서 아들애를 출산한다. 그 뒤 어릴 때 서양인 부모한테서 배운 피아노의 연주로 어린 아들애를 돌보며 어렵게 살아가던 중 수잔은 오스트리아주재 한국대사관 일군을 알게 되고 그를 통해 자기가 입양될 때의 한국의 사정도 듣게 되었으며 “아리랑”이란 노래도 배우게 된다. 또한 한국대사관을 통해 오랜 수소문 끝에 한국에서 살고 있는 친 부모까지 찾게 되며 얼마 후 김포공항을 통해 한국행을 하게 된다. 한편 김포공항에서 딸과의 극적인 상봉을 한 정아의 엄마는 피부색은 한국인이 분명하나 한국말이라고는 한마디도 모르는 딸을 두고, 또 딸이 낳은 혼혈남아를 보면서 넉두리를 하며 통곡한다… 이 영화를 통해서도 우리는 그 때 한국사회의 생존환경을 한 측면이나마 알 수 있다. 그 후 두번째로 되는 한국의 산업혁명이라면 전 세계를 대상으로 한 노무송출이라 할수 있었다. 주지하다 싶이 인구가 많고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한국으로서는 정부적 차원으로부터 출발하여 잉여로력의 눈길을 해외에 돌리고 세계시장을 개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여 독일의 노천탄광과 리비아의 관개수로건설을 비롯한 해외건설과 외적송출선 선원 등 수많은 잉여로력을 외국에 송출하여 국내부담을 줄이는 한편 외화를 벌어들이도록 했다. 특히 1960년대까지도 한국에서는 배를 타는 직업이 매우 인기가 높았는바 당시의 선원인수가 무려 70만명에 달했으며 마도로스라 하면 돈도 많고 아가씨들도 줄쳐서 따랐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도 한국에는 마도로스에 대한 노래가 많이 유행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잘 있거라 부산항구”, “이별의 인천항구”, “원양개척가”, “아메리칸 마도로스” 등이 있는데 여기서 “원양개척가”의 가사만 읽어봐도 우리는 기세높이 바다로 진출하는 그 때의 기상을 상상해볼 수 있는 것이다. 사나이몸 태어나서 할 일도 많지만너와 나 원양개척의 사명을 받았다폭풍우 훈련속에 맺어진 동지애수평선에 해가 뜨고 해가 질 때면부모형제 나를 믿어 성원을 보낸다 … 이렇듯 고생과 역경을 두려워하지 않고 세계를 정복하려는 정신이 있었기에 후일 한국인들은 아주 빠른 시일내에 무지몽매하던 한국땅에 선진적인 물질문화의 뿌리가 내릴 수 있게 했던 것이다. 그 실례로는 낡은 흔적을 가시기 위한 새마을운동과 세인을 놀래웠던 8.8올림픽을 들 수 있으며 또한 1997년부터 있은 아시아금융위기에 휘말려들어갔어도 재빨리 헤어나와 2002년 월드컵 주최국의 하나로까지 부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 반면 이러한 한국인들에 비해 중국 조선족을 반추해본다면 한국이 가장 간고할 때 우리는 잘 살지는 못해도 나라의 덕분에 땅을 분여받을 수 있었고 나이가 차면 직장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여하튼 큰 노력을 들이지 않아도 먹고 살 수는 있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의 경쟁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갑자기 시장경제체제로 진입하니 남한테 먹히우고 갈팡질팡하는 것도 별로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보아진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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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0
  • [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8)
    ■ 김철균 순자네가 연길에 이주한 뒤 얼마 안되어 세상에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났다. 1950년 4월, 중국인민해방군 제4야전군은 나루배에 대포와 기타 중무기들을 싣고 국민당해군의 함포속을 뚫으며 11마일(33.5킬로미터)이 되는 경주해협을 강행도하하여 중국에서 두 번째로 큰 섬 해남도를 해방하였다. 그리고 그해 6월 25일에는 반도에서 남북사이의 내전이 발발하였다. 전쟁초기 북측인민군대는 3일만인 6월 28일 한국의 수도 서울을 함락하였다. 그 뒤 인민군은 파죽지세로 남진을 계속했다. 그 진격의 선두에는 중국인민해방군 출신장병 6만 5000명이 있었다. 헌데 조선의 전황은 잠시 이상적이 되지 못했다. 9월 15일, 유엔군 사령관 맥아더가 7만여명의 병력과 260여척의 함정을 지휘하여 반도 서해안의 인천에 상육했다. 그 때로부터 전황은 역전되었다. 9월 28일, 인민군은 서울서쪽 인천쪽으로 밀려드는 한국군과 유엔군을 연희고지에서 결사적으로 막으며 결사전을 벌였으나 역량대비가 너무나도 큰 차이가 있었기에 부득불 3개월간 장악하고 있던 서울을 어쩔 수 없이 내주게 되었다. 한편 한국군과 유엔군은 반도의 중간을 뭉텅 잘라 낙동강까지 진격했던 인민군부대들이 포위망에 들게 되었다. 전쟁형세는 인민군에 몹시 불리하게 전이되었으며 드디어 10월 1일 한국군과 유엔군이 38선을 넘으면서 10월 19일 북측의 수도 평양이 함락됐고 얼마 안되어 한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변까지 다달았다. 바로 이 관두에 중국의 모택동은 “항미원조 보가위국”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중국의 중국군을 반도전선에 파견했다. 그해 10월 25일, 출국후 중국군의 첫 작전이 개시, 미기병사단에 대한 지원군의 장진호 포위섬멸전을 계기로 전황은 다시 역전되기 시작했다. 한국군과 미군은 중국군의 기동성이 강한 운동전과 포위섬멸전에 말려들어 38선 이남까지 후퇴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후퇴중 미8군 사령관 워커장군이 차사고로 죽었고 유엔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 이렇듯 반도에서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계속되는 긴장한 나날에도 중앙정부는 연변의 조선족들에게 자치권리를 부여하는 민족정책을 실행했다. 1952년 9월 3일, 연변조선족자치구(창립당시에는 자치구로 명명했음) 창립대회가 연길 서광장에서 성황리에 열리었다. 그날 조선족을 포함한 연변의 여러 민족 인민들은 산뜻한 명절옷차림을 하고 거리에 떨쳐나섰다. 세상에 둘도 없는 민족자치권리를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에루와 어절씨구 좋구나 좋네/ 장백산도 노래하고 해란강도 춤을 추네// 에루와 어절씨구 장고를 울리세/ 연변조선족자치구(주) 세웠네… 춤군들 속에는 순자도 있었다. 그날 순자는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 공산당에 대한 감격을 금치 못하였다. 아, 얼마나 위대하고 영명한 공산당인가? 일제는 조선 전체를 집어삼키고 중국까지 침략하였으며 또 중국에 쳐들어와서까지 재중조선인들이 조선말을 하지 못하게 억압하였지만 중국공산당은 재중조선인들한테 나라의 주인으로 중국조선족으로 만들어주면서 조선말과 조선글을 마음대로 쓸 수 있게 하고 있을뿐더러 이제는 그것도 모자라 지방자치권리까지 부여하는 것이 아닌가! 이는 해방전 일제의 노화교육을 받았고 근로봉사대에 끌려가 전염병에 시달리며 곤욕을 치르던 순자한테도 그렇고 그제날 의지가지 없는 고아를 공부시켜 나라의 인재로 중등전문학교의 교단에 서게 한 용환이한테 있어서도 더욱 크나큰 감격이 아닐 수 없었다. 한편 순자는 다음과 같이 생각하기도 했다. “연변조선족자치구(주)라고 해서 조선족만 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한족 등 여러 민족이 더불어 살고 있다. 우리의 자치구(주)가 화목하고도 무궁하게 발전장대해지자면 여러 민족과의 단결을 잘 도모해야 한다. 그렇다면 조선족은 한족과 손을 잘 잡아야 하고 한족 또한 조선족과 손을 잘 잡아야 한다. 즉 연변이란 지역사회에서 조선족은 한족을 떠날 수 없고 한족 또한 조선족을 떠날 수 없도록 똘똘 뭉치게 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사회를 만들자면 조선족인 우리가 먼저 한족들한테 손을 내밀면서 그들을 돕고 아껴주고 사랑해줘야 한다…” “자기 민족한테 30%의 배려를 쏟았다면 한족한테는 70% 혹은 그 이상의 배려를 쏟아야 한족들의 긍정과 신뢰를 받을 수 있다. 이렇게 되어야 연변의 민족단결사업은 새로운 차원으로 거듭 발전할 수 있다.” 자치구(주)가 창립되던 날 저녁이 되어 순자가 남편한테 자기의 생각을 털어놓자 남편도 참 좋은 생각을 하였다면서 칭찬해 주었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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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18
  • 오묘한 세계대백과(17) 성미가 괴벽한 바람
    바람의 성격은 말 그대로 괴벽하여 어떤 때는 미풍처럼 살살 얼굴을 스쳐 지나가다가도 어떤 때는 조폭하게 광풍을 몰아치며 멈추지도 않는다. 바람은 공기의 유동으로 형성되는 것으로서 우리는 볼 수도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일종 우리가 볼 수 있을뿐만 아니라 강대한 살상력을 갖고 있는 바람이 있는데 그것인즉 용권풍(휘오리바람? 선풍?)이다. 용권풍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흡진기처럼 그것이 육지를 지날 때면 흔히 도시를 석권하면서 가옥을 훼멸시키고 전주대를 잘라버리는가 하면 심지어 사람까지 공중으로 휘말아올리기도 한다. 이 바람은 또한 사람을 공중으로 휘말아올렸다가 안전하게 지면에 돌려보내는가 하면 어떤 경우에는 가정의 찬장을 이 곳에서 저 곳으로 하나의 손상도 없이 갖다놓기도 한다……용권풍은 이렇게 괴벽한 강선풍을 일으키는 바람의 일종이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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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14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17)
    웨스트민스터궁전 서류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영국, 지점: 런던 서구의 중앙지역 함의: 세계상에서 가장 큰 고트식 건축물임 웨스트민스터궁전은 11세기에 지어졌는데 템즈강변에 우뚝 솟아있으며 영국의 최고의 입법기구인 국회의 상의원과 하의원의 소재지로서 국회청사로도 불리우고 있다. 이 건물은 세계에서 가장 큰 고트식 건축물로서 영국의 가장 저명한 궁전 중 하나이며 독특한 문화적 가치가 있는바 영국의 가장 대표성적인 풍경을 자랑하고 있다. 웨스트민스터궁전은 부지면적이 아주 큰 바 대청만 해도 14개가 있고 400여개의 방이 있으며 남북으로 각각 상의원과 하의원으로 갈라져 있다. 상의원과 하의원 웨스트민스터궁전은 중앙대청을 중심으로 남북 두개 부분으로 나누는데 남쪽 부분이 상의원의 귀족원으로 붉은색을 위주로 색상포치가 되였다. 다음 북쪽 부문은 하의원 즉 중의원으로 록색을 색상표지로 하고있다. 그 중 하의원 정문의 량측에는 각각 2명의 영국수상의 조각상이 세워져있는데 한쪽의 조각상은 제 1 차 세계대전시기의 수상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劳合·乔治)고 다른 한쪽의 조각상은 제 2 차 세계대전시기의 수상 윈스턴(温斯顿)처칠이다. 웨스트민스터궁전의 다기능대청1834년의 한차례 큰 화재로 웨스트민스터궁전의 대부분 건물이 재더미가 되고 유독 웨스트민스터대청만이 보존돼 남게 되었다. 이 대청은 11세기에 지어졌는데 영국의 진정한 역사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청은 길이가 60여미터이고 높이가 27.5미터로 당시 국왕이 성대한 연회를 베풀던 장소로 쓰인 외 일찍 정치범 거두들을 심판하는 법정으로 쓰이기도 했다. 20세기 이래 이 대청은 또 국장(国葬)을 치르던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동포투데이 리포터 김철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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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14
  • 그제날 아버지한테서 들은 얘기들(12) 한반도, 한반도의 고대역사
    ■ 김철균 아버지는 반문맹이었다. 지난 세기 30연대초(?)엔가 조선에서 건너온 독립활동가들이 세운 야학에서 한글 정도를 좀 익혔을 따름이지 거의 문맹이나 다름이 없었다. 헌데 아버지는 이야기를 참 재미있게 잘 엮었다. 아마 머리가 좋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제날 아버지가 하는 얘기들을 듣노라니 참 재밋다는 생각뿐이었지만 지금 와서 곰곰히 분석해보면 어떤 얘기들은 진짜로 일리가 있었고 역사적으로도 맞아떨어지는 것들이었다. 특히 한반도 역사에 대해서 그랬다. 아버지가 보는 한반도는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훌륭한 곳에서 가장 살기 힘들 수밖에 없는 곳이 한반도라 했다. 가장 아름답고도 가장 훌륭한 곳이란 것은 이른바 산좋고 물맑으며 사계절이 분명하고도 3면이 바다여서 어업자원과 지하자원이 아주 풍부하다는 뜻에서였다. 그리고 가장 살기 힘들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은 지리적 위치상 약소민족으로서 대국의 변두리에서 붙어 살다보니 알게 모르게 눈치를 봐가며 처신할 때가 자주 있고 본의 아니게 자존심을 꺾을 때가 있다는 뜻이었다. 지도를 봐도 알다 싶이 한반도는 중국대륙의 동북쪽의 한쪽 변두리에 붙어 있으며 일본과는 바다를 사이두고 있다. 역사적으로 보면 왜구(현재의 일본)가 늘 조선을 건드릴까 했고 그럴 때마다 조선은 중국의 도움을 크게 적게 받군 했다. 왜구의 욕심은 단지 작은 반도에 불과한 조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중국대륙에 눈독을 들이고 있었고 중국 또한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해서도 조선을 지원했고 또한 여러모로 보호해주기도 했다. 그러다보니 조선은 알게 모르게 중국의 “속국”처럼 되기 마련이었다. 속국이란 뭔가? 대국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들어야 하고 정기적으로 곡물과 여인 등을 갖다바쳐야 하는 것이 속국으로서 반드시 이행해야 할 것들이었다. 하긴 중국의 수나라가 조선을 침략한적이 있고 조선의 고구려 역시 중국 동북지방을 차지한적도 있었으나 양국간의 수천년 역사상 이런 일은 아주 적었으며 전반을 보면 중국이 조선을 지켜주고 보호해준 한편 조선은 중국의 아부하며 굽신거린 역사가 더 길었다 할 수 있었다. “사람도 약하면 강하거나 큰 사람한테 빌붙어갖고 자신을 보호하기 마련이다. 약하면 자존심이란게 생길 수가 없다. 이는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이다.” 이렇게 얘기한 아버지의 이론처럼 조선의 반만년 역사에서 조선은 고구려, 신라, 백제 등 반도내 동족간의 군사충돌은 비교적 심했으나 아주 오랫동안 외래침략자에 의해 점령당한적은 없었다. 중국한테 아부했으니 중국의 보호를 받았으며 이러한 중국의 보호벽이 있으니 왜구의 크고 작은 침략에도 버티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조선의 근대사에 와서는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수천년동안 보호벽이 돼주던 청국(중국)이 조선을 지켜주기는커녕 자기 자신도 건사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서기 18세기에 있은 아편전쟁을 계기로 서방의 8국연합군이 바다 건너 중국으로 쳐들어와 서로 뜯어먹기를 했는가 하면 청일전쟁에서도 청국은 패전국이 됐다. 그리고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그 틈바구니에서 조선이 입은 피해도 상당했다. 이렇게 청국이란 이 보호벽이 허물어지면서 조선은 더는 자체의 힘으로 자기의 나라를 지켜낼 수 없었으며 결국 1910년 “한일합방”과 더불어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되고 말았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의 이러한 얘기들을 들으면서 아버지가 왜 이러한 얘기들을 어린 나한테 들려주는지에 대해 거의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아버지가 아는 것이 많구나 하고 감탄할 때가 많을뿐이었다. 하지만 한반도의 지난 역사와 오늘의 현실, 그리고 중국 조선족을 포함한 세계 각 나라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한민족의 현실을 정시하노라니 아버지가 한 얘기들은 그 구절구절마다 심오한 그 무엇인가를 담고 있은 것이 분명했다. 우선 우리 한민족은 자아정체를 감추고 사는 경우가 많다. 한반도의 상황을 놓고만 봐도 옛날에는 중국문화의 전파로 마치 한문을 많이 알면 가장 박식한 사람으로 취급되었으나 일제시대에는 일제의 강압정치로 자기의 글과 말마저 빼앗기었으며 지금은 또 미국문화의 영향으로 남측 한국사회는 미국식 영어가 난무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 사는 재일동포, 러시아에 사는 고려인과 재미동포 및 우리 중국조선족의 문화는 제각각이다. 점점 한민족이라는 정체를 잃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이는 그 어디에 가서 살아도 중화의 전통을 잃지 않는 화교나 소화문화의 맥을 이어가는 일본인과는 선명한 대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다음기 계속) 주: 본문은 본지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07-13
  • 해외견문 시리즈(13) 그해 설날은 춥지 않았다
    ■ 김철균 그해 설날은 춥지 않았다. 지구촌 서반구에 위치해 있는 스페인땅, 카나리아군도의 라스팔마스, 그 땅은 세밑이 다가 옴에도 대서양 난류의 영향을 받아 따스한 날씨가 계속되었다. 또한 12월 25일 크르스마스 명절의 뒤를 이어 인차 새해를 맞는 라스팔마스는 짙은 명절의 분위기속에 휩싸여 있었다. 길가의 화단에는 이름모를 갖가지 화초들이 활짝 피어 있었고 명절옷차림을 현란하게 한 신사숙녀들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가득 어리어 있었으며 싼타까타리나 해변가의 해수욕장도 각양각색의 피부를 가진 남녀들로 붐비였었다. 마침 아프리카의 앙골라 해상에서 냉동물고기를 싣고온 우리네 선박 “코리안스타”호도 라스팔마스 빤따랑부두에 정박해 있었다. 그것은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24명 선원외 다른 사람은 단 한명도 구경할 수 바다에서 설명절을 쇤다면 우리 모두의 심정이 과연 어떻겠가 하는 것은 누구도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더구나 여자가 없는 한바다에서 설명절을 쇤다고 할 때, 이러한 단조롭고 적적함은 한국선원들을 놓고 말하면 일종 재수 없는 일이요. 곤혹같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입항해서 육지에 올라 설명절을 쇤다는 것, 그것은 당시 본선의 주방장이었던 나한테 있어서도 해방이나 다름이 없었다. 만약 모든 여건이 허락치 않는 해상에서 설을 쇤다면 선원 24명이 먹고 마실 음식은 주방장인 내가 손수 도맡아 장만해야 했으니 말이다. 또한 평소에도 곁에 여자가 없으면 선원들은 그 쌓였던 스트레스를 몽땅 나한테 음식투정을 하는 것으로 풀군 했는데 더군다나 설명절 때 집생각과 여자생각에 그들이 어떻게 나오겠는가? 보나마나 실컷 일하고도 나중에 욕보는건 나뿐이라는 것이 뻔했다. 한편 본선 선원들의 편리를 위하여 라스팔마스 주재 한국 선일해운의 이탈만 대리점에서는 우리한테 “호텔강촌” 식당과 호텔방을 미리 예약해주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선박에서 고독하고 짜증난 생활을 하였으니 하루밤이나마 편하게 즐기라는 특별혜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날 선박의 경비를 부두당직일군들한테 맡긴 우리는 봉고차에 나누어 앉아 “호텔강촌”으로 향했다. “호텔강촌”에 도착하자 진작 대기하고 있던 그곳의 이횡권 사장님과 유혁선 여사 그리고 접대원아가씨들이 반갑게 맞아주는 것이었다. 헌데 선박근무시 집행되어 오던 그 분명한 계급차이, 그것이 육지의 식당에서까지 계속될줄이야. 아니, 같은 계급장인 조기장과 갑판장 그리고 주방장도 한국선원과 중국선원 사이에는 차이가 있었는바 중국선원이며 중방장인 나도 한국선원인 조기장, 갑판장과 동석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우리 중국 조선족선원 4명은 당연히 계급차이를 논하지 않고 함께 앉게 됐다. 식당안의 한구석만 차지한 우리 4명은 설날이란 즐거움을 별로 느낄 수가 없었다. 부모처자에 대한 그리움, 인간보다 금전과 계급과 인종 및 국적을 더 봐주는 한국인세상, 우리는 터져 나오는 울화를 가까스로 참으며 애꿎은 술만을 들이켰다. 한잔, 두잔, 또 한잔… 나중에 우리 4명은 제각각 “진로”표 소주를 한병씩 거꾸로 추켜들고 입안에 쏟아넣었다. 울려고 내가 왔던가 웃으려고 왔던가/ 비내리는 부두가에 이슬맺힌 백일홍// 그대와 둘이서 꽃씨를 심던 그날 밤도… 어느새 한국선원들은 가라오케반주기를 이용하여 오락판을 벌였다. 허리를 비꼬며 희스테리처럼 괴상한 소리를 질러대는 선원들, 순간 나는 있는체하고 우쭐거리지만 허무하기 짝이 없는 그들의 내심세계를 얼마든지 엿볼 수가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가? 기껏 흔들어대고 나니 지쳤는지 그제야 그중 누군가 우리 쪽을 보더니 무작정 나의 손목을 잡아끄는 것이었다. 나는 워낙 노래를 부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거니와 그닥 노래를 잘 부르는 축도 못되었다. 하지만 그 순간 나는 꼭 노래를 불러야 하겠고 또한 부를바엔 그들이 부르는 노래보다 더 차원이 높는 노래를 불러야겠다고 생각했다.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줄기 해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음악반주도, 음향시설도 이용하지 않고 그냥 그대로 부른 그 노래, 한국선원들은 물론 중국조선족선원들까지도 눈이 휘둥그래졌다. “주방장, 이는 아주 유명한 가곡으로 웬간한 가수들도 부르기 힘들어 하는데 주방장 노래실력이 진짜 넘버원인거얘요.” 어느새 다가와서 엄지손가락을 내미는 통신장 이덕수씨, 이에 나는 아직은 시작에 불과하다는듯 손을 홱 내젓고는 벽에 걸려있는 동관악기 트럼벳을 갖다가는 세계명곡 “拉德斯基进行曲”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있는 선원들은 물론 주방인원들까지 나와 선율에 맞춰 박수로 호응하는 것이었다… 나의 연주가 끝나자 역시 통신장 이덕수씨가 다가와 박수를 치면서 한곡 더 연주하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술을 많이 마셔 더는 트럼벳을 불기 힘들다는 이유로 깍듯이 거절했다. 뿐만 아니라 아예 식당홀을 나와버렸다. 이렇게 한국인 선원들한테 본때를 보이고 밖으로 나왔으나 어딘가 허무하기 짝이 없었다. 그것은 설날이어서 더욱 그랬다. 내가 밖으로 나오자 기타 중국 조선족선원 3명도 따라 나왔다. 그들도 그 자리에 계속 앉아있기 멋적었던 모양이었다. 이때 누군가 마침 “호텔강촌”에서 멀지 않은 싼타까타리나 공원 노천무대에서 설맞이공연이 한창이라고 했다. 우리는 그리로 욱 ㅡ 하고 몰려갔다. 진작 시작한 공연은 독특한 스페인민족의 노래와 춤으로 클라이막스에 치달아올랐다. 남성독창 “베사메무쵸”, 민속춤 “스페인세뇨리따(아가씨)” 등 종목들은 그 예술적 감화력과 설명절의 분위기로 우리를 황홀경으로 이끌어갔으며 식당에서 있었던 언짢았던 감정도 일시적이나마 잊을 수 있게 하였다. 이때 불현듯 그렇게 도 익숙했던 중국말이 이내 등뒤로부터 들려왔다. 다시 귀를 기울렸으나 그것은 중국말이 분명했다. 이에 돌아서서 그 말소리 주인공들과 마주선 나. “아, 닌호우? 워예쓰 쭝궈런, 쭝궈더 초센주(啊, 您好?. 我也是中国人. 中国的朝鲜族).” 뒤이어 우리는 대뚬 서로를 부둥켜 안았다. 알고 보니 그들 역시 중국선박 “안월강 2호”의 선원들이었는데 본부의 지시에 의해 라스팔마스에서 설명절을 쇤다는 것이었다. 미구하여 그들은 우리의 손목을 잡아끌면서 자기네 선박으로 돌아가 설날 밤을 함께 보내자는 것이었다. 국내에서는 그저 스쳐지날 수도 있는 사람들, 하지만 머나먼 해외에서 그것도 설날에 만나고 보니 우리들 서로가 고향의 친지를 만난 것처럼 그토록 반가웠다. 순간 우리는 “호텔강촌”으로 다시 가고 싶은 생각이 꼬물만치도 없어졌다. 호화로운 호텔방도, 요염한 아가씨들도 역겨워났다. 해외에서의 또 하나의 중국의 세계 ㅡ 우리는 그 세계로 그렇게도 가보고 싶었다. 중국선박 “안월강 2호”에 도착하자 우리는 곧바로 선내음식청에 안내되었다. 벽에 드리워져 있는 오성홍기 그리고 그 양옆에 걸려있는 만리장성 그림과 계림의 산수화, 아 그것은 정녕 우리가 오매에도 그리던 중국땅이나 다름이 없었다. 뒤이어 음식들이 나왔고 “안월강 2호”의 당서기와 선장이 직접 세계명주인 모태주병을 들고 나와 우리한테 한잔씩 부어주는 것이었다. 한없이 도량이 넓은 중국인들의 관심, 그 순간 우리의 눈앞은 이로하여 또다시 흐려졌다. 해외에서의 나날, 인간으로선느 최하층 대우를 받던 우리, 조금만 잘못해도 독방이나 냉장창고같은 곳에 갇히어 기합을 당해야만 했던 우리 중국 조선족로무자들, 중국사회가 좋다는것은 바로 우리처럼 중국땅을 떠나봤던 사람들만이 가장 잘 아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때 누군가 흥분에 젖어 선창을 뗐다. 오성홍기 휘날리고 승리노래 우렁차다/ 노래하자 사랑하는 조국 부강에로 달리는 조국 그러자 그것은 그 누구의 제의와 지휘도 없이 합창으로 번져졌다. 그 속에는 “안월강 2호”의 당서기와 선장도 함께 끼어 있었다. 산을 넘고 들을 지나 황하장강을 뛰어 넘어/ 우리 인민은 근로용감하고 새 일대 씩씩하게 자라난다… 설날 저녁의 그 노래, 그 노래소리는 막을 수 없는 힘으로 되어 산설고 물선 대서양바다의 군도인 라스팔마스항 상공에 오래도록 메아리쳤다. 그렇다. 1992년의 첫 날, 그 해의 설날은 춥지 않았다. 스페인 라스팔마스 무에그랑데 해변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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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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