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6(화)

오피니언
Home >  오피니언  >  기획/연재

실시간뉴스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23-11-19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1949년 겨울 북경의 ‘금창(禁娼)운동’ 내막
    중국의 민국초기 사창업은 규모화를 형성하기 시작, 가장 번창하던 1917년 북경에 등록된 기방은 도합 391개에, 기생 3500명에 달했으며 암암리에 사창업에 종사하는 기생은 적어도 7000명이 되었다고 한다. 항전시기 북평의 매 250명의 여성중 1명은 기생이었다는 기록도 있다. (1) 북평이 해방된 후 사회는 복잡하였다. 당시 정부에서는 비록 기방들에 대해 즉각적인 차압을 강행하지는 않았지만 사회의 치안을 정돈하면서 기방들을 관제범위내에 넣었고 각 공안분국과 파출소들에서는 경상적으로 기방의 표객(嫖客)들을 검사하고 나쁜 분자들을 추적하군 하였다. 당시 기방은 흔히 국민당 특무들이 숨어있는 장소이기도 했다. 하지만 당분간 차압할 수 없는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북경시 공안국에서는 사회치안을 수호하는 각도에서 기방들에 대해 약간의 잠정규정을 정해놓고 관제하고 있었다. 당시 북경시 정부의 규정에는 해당 공안국과 파출소에서는 우선 각 기방들에 대해 등록하고 각종 방식으로 해결방식을 탐색하군 하였다. 한편 어떤 공안분국에서는 표객들의 기방으로 드나드는 것을 제한하기 위하여 “표객검사” 도장을 만들어서는 파출소들에 발급, 표객이 발견되면 우선 교육을 하였으며 나중에는 표객의 신분증과 영수증에 도장을 찍군 하였다. 한번은 50세 가량의 한 남성이 기방에 들어왔다가 파출소 일군들한테 잡히게 되었는데 그한테는 그 어떤 증건도 없었다. 그러자 파출소 경찰은 그 남성의 와이셔츠에 “표객검사”란 도장을 찍어보내였다. 그 뒤 기방마다 “도장일군이 왔다”고 하면 모든 표객들은 도망가군 하였으며 기방은 썰렁하기 그지 없었으며 어떤 업주들은 문을 닫고 폐업하였고 적지 않은 기생들은 기타 지구의 기생방으로 자리를 옮기거나 암암리에 몸을 팔며 생계를 유지하군 하였다. (2) 1949년 5월, 북경의 사회치안은 혼란현상이 기본상 청리되었다. 그러자 북경시 정부에서는 회의를 열고 전문 기생들에 대한 문제를 연구하였다. 당시 북경시 시장이었던 엽검영은 “기방에 대한 처리는 반드시 먼저 사람을 파견하여 정황을 요해한 후 처리방침을 결정해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5월 23일, 북경시에서는 민정국, 공안국과 부련회 등 기관의 일군들로 구성된 사업조가 조사사업에 착수, 전 시 200여개의 크고 작은 기방의 기생들을 대상으로 공안국과 민정국에서 각각 조사자료를 작성, 기방의 역사, 분포상황, 등급, 시설, 영업상황 및 기생들의 종류, 내원, 생활상황과 윤락원인 등을 시정부와 중앙공안부에 바치었다. 한편 민정부문에서는 기생들을 집합시킬 장소를 선택하고는 일부 생필품을 구전하게 갖추어놓았으며 시부련회 간부가 직접 각 부문으로부터 뽑아온 간부들에게 정책선전 훈련을 시켰고 위생국의 의사를 초청해 성병방지지식강좌를 조직했다. 또한 기업국에서는 수용된 기생들이 해야 할 일, 즉 털실옷 뜨기 등 일거리를 마련하군 하였다. 10월 15일, 북경시위와 북경시정부의 지시에 따라 공안국, 민정국, 부련회 등 부분에서는 “기방 봉폐행동 총지휘부”를 내왔으며 시공안국 국장 나서경이 총지휘를 맡았다. (3) 행동시간: 1949년 11월 21일 오후 6시 책임부문: 북경시 공안총국 총지휘: 나서경 행동방식:3명씩 1개 소조로 배비, 1명의 여간부 5개 내지 10개의 기방 조사기록. 조사대상: 주인, 마담 및 대리인, 기생, 심부름꾼 등 행동을 통일하기 위하여 오후 6시를 행동시간으로 규정, 집합시켜 회의를 여는 방식으로 주인, 마담을 집중시키고 오후 8시에 기생과 심부름꾼 등을 집중관제에 들어간다. 행동지휘부는 기방 분포상황에 따라 도합 5개의 소지휘부로 설치, 기방이 비교적 집중된 5개 지역에 각각 설치하였고 행동소조는 27개로 구성되었으며 도합 81명으로 매 소조마다 3명씩이었다. 그리고 매 소조마다 1명의 성격이 드세고 사업능력이 비교적 강한 여간부와 정책선전수준이 뛰어난 과장급 이상의 간부를 두었다. 행동소조의 임무는 지정된 기방에 도착하여 북경시 각계대표회의의 결의를 선포한 뒤 기생들을 집중시키고 심부름꾼과 마담 및 표객을 해산시키고 기방 재산을 차압하는 것 등등이었다. 이 날 어느 한 행동소조가 소상루(潇湘樓)에 도착하자 한 심부름꾼이 문어구에 앉아 안쪽에 대고 소리쳤다. “기방검사단이 왔다. 손님이 있든 없든 모두 자기의 문어구에서 검사를 받으라!” 그러자 일부 요염하게 생긴 기생들이 엉덩이를 휘두르며 자기의 문앞에 나타났다. “기방검사단이 아니야, 우리는 너희들 기방을 차압하러 온 사람들이다.” 행동조 조장이 웨쳤다. 이어 머리에 철갑모를 쓰고 몸에 녹색제복을 입은 군인들이 총에 장탄한채 기방의 문어구에 버티고 서자 그제야 도고하던 기방의 주인과 심부름꾼 등은 사태의 엄중성을 느꼈던지 행동조장의 말에 고분고분해지기 시작했다. 몇시간 뒤 기생들을 가득 실은 자동차들이 전문밖, 숭문문밖, 서교백방자와 동교로부터 한가담과 백순골목에 자리잡은 8개의 부녀노동교양소에 도착하였다. 이 곳에서 기생들은 각각 여러 뜨락에 배치되어 학습하는 한편 노동개조를 하게 되었다. (4) 1949년 11월 23일, 북경내 기방들이 차압된지 3일 후 북경의 8대 골목중의 하나인 한가담(韩家潭)의 대문에는 “북경시 부녀생산교양원”이란 간판이 걸리었으며 역시 철갑모를 쓴 공안총대의 전사가 총을 쥐고 보초를 서고 있었다. 1949년 11월 29일, 북경대학병원 성병방치소 등 6개 의료부문의 57명의 의료일군들이 육속 부녀생산교양원에 파견되어 기생들에 대해 신체검사를 하고 성병에 걸린 기생들에 한해서는 무료로 치료해주었다. 교양원에서는 기생출신의 여성들의 출로문제를 두고 아주 심중하게 처리하였다. 이 교양원에서 개조를 마치고 나가는 여성들에게는 아래와 같은 수속을 밟아주었다. 첫째, 정부의 증명신을 발급, 증명서가 있는 본인은 정당 직업이 있는 주민이라는 것을 증명하였다. 둘째, 생활보장을 해주는 기초상 몇가지 보증을 하게 하였는바 그것들로는 교양원에서 나간 뒤 노동이거나 가무에 종사하고 더는 창녀생활에 종사하지 않는 것, 정부의 혼인법에 따라 혼인하되 변상적인 매매혼인행위가 있어서는 안되며 결혼시 반드시 위생부문을 통해 신체검사를 받아야 하는 것 등등이었다. 한단계의 학습과 개조를 통하여 도합 1077명 여성들이 교양원에서 나가게 되었다. 헌데 대부분 여성들은 집이 없기에 자원하여 교양원에 남으려고 하였다. 그러자 교양원에서는 그들에게 82대에 달하는 직포기, 양말편직기 등을 사줌과 아울러 그녀들을 위해 신생 편직물공장을 차려 주었다. 한편 교양원에서는 북경에 있는 희곡인원들을 초청하여 그녀들을 도와 일부 소형연극을 자체로 창작해 출연하게 하였다. 이 중 연극 “천년 빙하의 해동(千年冰河开了冻)”은 금교라는 여자가 기방에 팔려가 기생으로 전락되었다가 해방을 받는 내용을 주선율로 낡은 사회 창기제도의 잔혹성과 암흑성을 폭로하였다. 교양원에서는 또 특별히 극단을 조직, 한단계의 연습을 거쳐 1950년 춘절이후 이 극단에서 출연한 연극 “천년 빙하의 해동” 북경성내에서 대 환영을 받았는바 1일주일간 출연하는 동안 극장안은 번마다 초만원을 이루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7
  • [연재] 동년을 회억하여 ( 3 ) 할아버지편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2. ‘땅과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농사는 天下之大本이다. 할아버지는 밭이 일체를 결정하며 밭이 없으면 설 자리도 말할 자리도 없으며 밭이 있으면 근본을 바꿀 수 있다고 여기였고 또 한 평생 그 밭을 위하여 분투하시였다. 할아버지는 후세에 다시는 밭이 없는 치욕을 물려 주려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씀에 의하면 아름드리 나무를 베여 내고 그 자리에 그 재료로 집을 짓고 그 주위에 밭을 개간했는데 지금 보면 그 밭 면적은 한상(垧)은 되는 것 같다. 그리고 아래 마을 강변을 개간하여 수전을 만들었는데 그 면적도 반상(垧)은 되는 것 같다. 이로서 그때에도 의식주 문제는 기본상 해결된 것 같다. 그 후에도 할아버지는 계속하여 유동촌 밭에 백여메터 되는 수로를 파서 장풍동 하천과 봉암동 하천을 끌어들여 수전을 만들었다. 할아버지는 여기에도 만족하지 않고 봉암동 하천 량쪽 황무지를 계속 개간하였으며 땅 한 뙈기라도 사들여야 마음을 놓았다. 우리 집이 전부의 주요 재산은 밭과 농기구 였다. 할아버지는 돈을 모아 밭만 사들였다. 특히 일본이 망한 후 연변 조선 사람들중 돈과 땅이 있고 공산 혁명의 형세를 아는 사람들은 헐 값으로 밭을 팔고 조선에 갔다. 이리하여 밭 값이 눅어 지자 할아버지는 형세를 모르고 땅이 눅다고 많이 샀다. 그후에 광복을 맞아 외지에서 일하던 둘째 셋째 아들들이 집이 돌아와 장풍동 집에 식구가 많아지자 번동에 밭을 사고 집을 지었다. 그리고는 둘째 숙부에게 장풍동 집과 주위의 밭을 주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 할아버지 토지 구매욕은 형세를 모르고 48년 토지개혁 이후에도 계속 되였다. 하여 가을이 되면 앞마당에 낟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여 졌다. 할아버지는 밭을 부치기 위해 자식들이 집을 떠나 직장을 찾는 것도 반가워 하지 않았다. 45년 8.15광복후 도문철로 기관차 부사수로 일하다 일본 놈이 감방에1년2개월 갇혀 있으면서 전념병으로 생사의 고비를 넘기고 기적같 이 살아온 둘째 숙부와 도문철도 기무단에서 일하다 광복을 맞으며 잠시 돌아온 셋째 숙부에게 정부에서 복귀 통지서를 보냈지만 할아버지는 그들을 꽁꽁 묶어두고 보내지 않았다. 만약 그때 숙부들이 복귀했다면 오늘 같은 신세가 아니었을 것이다. 특히 셋째 숙부가 조선에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할아버지가 토지개혁 이후까지 밭을 사들여 아버지가 안 계시는 우리 집에 밭이 너무 많아 할아버지 혼자서 부치기에는 아주 힘들었을 것이나 할아버지가 밭에 못 나가게 하여 할아버지가 일하던 기억은 없다. 다만 넓은 앞마당에 집채 보다 더 높은 벼 낟가리 조 낟가리 콩 낟가리가 줄지어 있었던 기억만 생생하다. 남들이 낟가리는 이와 비교도 되지 않았다. 우리 집 앞마당은 아주 넓었는데 봄에는 오이 고추 가지 마늘등 채소를 심어 먹고 가을이면 탈곡장으로 사용했다. 인상 깊은 것은 벼 조 콩등의 탈곡이였다. 벼 탈곡은 어른둘이 발판을 밟아 고리가 달린 원통을 돌리면서 벼를 탈곡했는데 힘들어 할 때에 한사람이 두 사이에 끼여 들어 밟아주군 했다. 호기심이 많고 작난꾸러기인 나는 어른들이 말도 듣지 않고 어른들 사이에 끼여들어 발판을 밟기도 했는데 도움은 커녕 방해가 되었을 것이다. 조 탈곡은 할아버지가 얇은 철판으로 만든 가리개를 사용하였으며 어머니와 삼촌들은 자작나무를 곱게 가공하여 만든 가리개를 사용 했다. 혹시나 어떤 때에 할머니도 참여했는데 앉아서 무딘 칼로 조 이삭을 자르곤 했다. 이렇게 잘라낸 조 이삭은 마당에 펴놓고 소가 군재를 돌리며 끌고 다녔다. 어른들이 마당 복판에서 소를 몰았는데 나도 끼여 들어 소를 몰기도 했다. 군재가 끝나면 도리깨로 낟알을 철저히 털어냈다. 이미 60이 넘으셨고 중병에 계신 할아버지는 이 모든 일을 주관하셨으며 손수 다 하였다. 사랑채에는 큰 뒤주가 세 개 있었는데 널판으로 만든 뒤주에는 벼와 조, 조짚으로 만든 뒤주에는 콩을 보관했다. 벼 뒤주는 너무 높아 나는 무서워 올라 가지도 못했다. 당시4-50년대에 장풍동 골안에서 입쌀밥을 먹는다는 것은 정말 희한한 대사었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1
  • 【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2)
    ■ 김철균 순자네 친정형제들을 보면 둘째 오빠 김구준이네가 연길시 공화대대에 살고 있었고 셋째 오빠 김구완이네가 개산툰에서 살고 있었으며 남동생 김구춘이는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그 중 둘째 오빠 김구준이네는 한뉘 농촌에서 살다 보니 그저 마음치레나 할 줄 알았지 세상물정에 대해 아는 것이 극히 적었고 많은 거래에서 남한테 당할 때가 많았다. 그러다가 둘째 오빠가 사망하자 형님이 혼자서 잔밥들을 거느리고 있는 이 집의 가정형편은 점점 어렵게만 돼갔다. 그러던 중 어느 한번은 둘째 오빠네가 연길현 산골인 신광이라는 곳의 어느 한 가정으로부터 중돼지 2마리를 사왔는데 사온 이튿날부터 돼지가 왝왝 토하면서 먹지를 않더니 일주일도 되지 않아 2마리 모두 죽어버렸다. 이미 병든 돼지를 사온 것이 분명했다. 돼지 2마리의 값은 그 때의 돈으로 90위안, 가난한 농민의 가정으로 놓고 말할 때 이는 실로 떼 돈이나 마찬가지었다. “돼지 두 마리를 키워서 팔아 집살림에 보태려고 했는데 아이구 안될 놈은 앞으로 넘어져도 뒤통수를 깬다고 휴유ㅡ…” 형님의 하소연을 듣는 순자의 마음은 괴롭기 그지 없었다. “그래, 병든 돼지라는 걸 진짜 몰랐단 말이유?” “알았으면 왜 병든 돼지를 사왔겠수.” 형님은 하소연을 하면서도 원 돼지주인을 찾아갈 궁리는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럼 이제라도 원 주인한테로 찾아가 도리를 좀 따져 보기오. 아무리 팔아버린 돼지라 해도 팔아버린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돼지가 죽었는데 왜 책임이 없겠소?!” 그러자 형님은 순자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다시 머리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 돼지의 주인과 시비를 캐서 이길 자신이 없는 모양이었다. “좌우간 가보기오. 길고 짜르고 하는 건 대 봐야 할게 아니오?!” 형님이 주저하자 순자는 조카를 불러일으켰다. 년로한 형님이 길 떠나기 불편하기에 조카와 함께 가기로 하였다. 그때는 신광이라는 곳은 연길에서 버스도 통하지 않는 산골이었다. 순자와 조카는 걸어서 길을 떠나는 수밖에 없었다. 순자네가 하루 종일 걸어서 원 돼지의 주인이 사는 신광에 도착하니 해가 져서 땅거미가 내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방정맞게도 그 주인의 집을 찾아가니 어디로 외출했는지 문에는 자물통이 잠겨져 있었다. 다행히도 그 동네에 먼 친척집이 있어 순자와 조카는 그 친척집에 들어가 하루밤 지낼 수가 있었다. 원 돼지의 주인은 이튿날에 나타났다. 순자네가 찾아온 사연을 말하자 처음에 그 주인은 “돼지가 죽은 것이 자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고 하며 하늘이 낮다 하고 길길이 뛰었다. 여자 둘이 찾아갔다고 업신여기는 모양이었다. 말 그대로 조카 혼자서 찾아갔더라면 말도 못붙일 정도였다. 하지만 순자는 달랐다. 착하였지만 시비를 캘 줄 알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하게 나올줄도 아는 여인이었다. “여보시요. 여자들이라고 업신보지 마시우. 원래 병든 돼지가 아니구서야 어떻게 일주일도 되기 전에 2마리 다 죽을 수가 있수. 우리 함께 공사수의소에 가서 다시 시비를 캐봅시다.” 수의소로 가보자는 말에 그 주인은 어딘가 켕기는지 말투가 달라지는 것이었다. “번거롭게 공사수의소에 가는 일이 없이 좋도록 합의합시다. 그럼 두 분이 이 먼 곳으로 찾아온 걸 봐서 내가 그 손실의 절반을 배상해주겠수.” “안 돼요. 돼지가 이 집에서 기를 때부터 병든 것이 분명하니 2마리의 값을 몽땅 배상해야 합니다.” 순자는 딱 잘라 말하면서 그렇찮으면 그 며칠동안 돼지를 먹인 사료값과 노동공가 그리고 손실비까지 함께 계산해서 받겠다고 못을 막았다. 그 주인은 더이상 고집을 부려봤자 이 여인을 이길 수 없다고 여겼던지 180도로 태도 변화를 보이면서 그럼 그렇게 하자고 수긍하였다. 아마 순자를 도시에서 온 높은 간부쯤으로 여기는 모양이었다. 그 날 순자네는 돼지 두마리의 절반 값인 40위안만을 받고 돌아섰다. 나머지 절반 값은 한 달 후에 받기로 하고 말이다. 주인이 지금 가진 돈은 이것 뿐이라고 하도 사정하니 어쩔 수 없었다. 주인의 말 그대로 그한테 진짜로 그 이상의 돈이 없을 수도 있었다. 하긴 그 때의 세월에 현금 40위안이라는 것도 도시직원의 한달 노임에 맞먹는 액수었으니 그럴만도 했다. “고모, 정말 대단해요. 전 돼지값을 받아낼 궁리도 못하구 그저 속만 태웠는데 그걸 언제 다 생각했수?” 조카는 40위안을 받은 것만 해도 아주 다행으로 여기는 기색이었다. “사와서 일주일도 되지 않아 2마리가 다 죽었는데 그게 문제가 없어? 만약 수의소에 가서 시비를 캐면 원값에 손실비까지 더 받을 수도 있는 일이야.” 그 말에 조카는 순자에 대해 내심 탄복해마지 않았다. 순자는 둘째 형님네를 위하는 일이라면 뭐든지 발벗고 나섰다. 후에 둘째 형님네가 또 돼지새끼를 사다 기르게 되자 집의 구정물을 받아서는 거의 이틀에 한번씩 둘째 형님네 집에 보내 주었는데 어떤 날에는 공화촌까지 날라다주었고 또 어떤 날에는 연길교 부근까지 이고가노라면 마중을 오는 둘째 형님을 만나서 넘겨주기도 했다. 여하튼 옛날부터 순자는 올케라면 친언니 이상으로 따랐고 진심으로 도와 주었으며 그 마음은 수십년이 지난 뒤에도 마찬가지었다. 그 외 1979년 개산툰에 있는 셋째오빠 구완이의 셋째 아들 길성이가 직장에서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해있을 때 순자가 길성이의 친어머니 이상으로 정성껏 간호해주어 의사와 간호원들마다 처음에는 모두 순자가 길성이의 어머니인줄로 착각하여 화제에 올랐었다. 그 때 길성이 또한 어머니를 집에 보내고 고모(순자)와 함께 있고 싶다고 하여 길성이의 어머니 역시 시누이(순자)한테는 두손 들었다고 감탄했다. 이런 일은 한두번이 아니었다. 1982년 연변대학에서 교편을 잡는 남동생 구춘이의 딸 김순희가 출산할 때도 그랬다. 출산직전 임산부 순희는 진통을 올 때마다 고통을 호소하며 고모(순자)부터 찾군 했다. 그러면 순자는 지체없이 다가가 순희를 달래기도 하고 여기저기 주물러주기도 해주어 친 어머니인 구춘이의 부인이 더욱 감동을 받았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1973년 6월 연길시 하향지식청년 학부모대표대회에 참가한 후 남긴 기념사진) 1969년의 여름, 전 주 우수학부모대표대회가 수부도시 연길에서 열렸다. 순자는 당시 연길시 신흥가두에서 유일하게 우수학부모대표로 선발되어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대회가 끝난 뒤 대회 주최측에서는 우수 학부모대표들이 여러 갈래로 팀을 나누어 주내에 산재해 있는 집체호들을 순회방문하기로 결정했다. 그 때 순자가 소속된 대표팀이 방문하는 집체호로는 안도현에 있는 여러 대대의 집체호들이었다. 순자는 당시 10여일간에 거쳐 참관방문한 집체호 중 제일 마지막으로 찾은 집체호가 가장 인상에 남았다. 그 집체호가 바로 상해지식청년들이 생활하고 있는 안도현 장흥공사 서북대대의 한 집체호였다. 서북대대는 안도현 소재지에서도 30여리 떨어져 있는 험한 산골이었다. 순자네가 찾아가자 처음에 집체호 청년들은 별로 반기는 기색이 아니었다. 이를 보아 이전에 많은 방문팀이 다녀갔어도 그들한테 별로 도움이 될 일을 하지 않았음이 분명했다. 집체호 청년들이 사는 꼴은 말이 아니었다. 모주석께서 “지식청년들이 농촌에 내려가 빈하중농의 재교육을 받는 것은 매우 필요하다”고 했으나 그들이 사는 꼴을 보는 순간, 순자는 이는 모주석의 뜻과는 다르게 번져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른지 몇해가 되는지 갈라터지고 쥐구멍이 숭숭난 굴뚝아래와 불을 때면 연기가 꽉 차는 방안 … 모든 것은 이것이 사람이 사는 집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벼알이 나무에서 달리는줄로만 알면서 자라던 도시의 철부지들이 이 두메산골에 와서 당하는 고생은 순자로 하여금 몹시 가슴이 아프게 했다. 특히 자식 2명을 농촌집체호에 보낸 어머니로서의 순자는 그 애들이 도무지 남의 자식으로만 보이지를 아니했다. “여보세요. 우리가 이 곳으로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이 애들이 어떻게 사는가를 구경하러 온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 애들이 사는 꼴을 좀 보세요. 가슴이 아프지 않습니까?!” 순자가 신발과 옷을 벗고 나서자 방문팀의 기타 몇몇 성원들도 동조해나섰다. 그날 대표팀은 흙을 이겨가지고 굴뚝밑과 부뚜막 그리고 구들장에 생긴 틈을 발라주었고 굴뚝에 숭숭 난 쥐구멍들도 막아주었다. 일을 마친 후 집체호의 부엌에 불을 지피자 “웅 ㅡ”하고 소리까지 내며 불길이 구들고래쪽으로 빨려 들었으며 방안 온들이 골고루 따뜻해나는 것이었다. 방문팀이 돌아갈 때가 되었다. 그런데 집체호애들이 옷을 입고 떠날 차비를 하는 순자를 둘러쌌다. “마마(어머니), 가지 말아요. 마만, 우리의 친 어머니와 같아요. 마마, 제발 가지 말아요.” 애들은 순자를 둘러싸고 울음을 터뜨렸다. 순자는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둘러보니 큰 대야에 빨래거리를 담아놓은 것도 여기 저기에 보였다. 방문팀의 다른 성원들은 떠났지만 순자는 다시 옷을 벗었다. 그날 순자는 애들의 빨래를 다해주고 이불까지 해주느라고 밤새껏 진땀을 빼야 했다. 특히 이불을 하자고 보니 바늘이 5센치미터 길이도 안되는 바늘뿐이어서 손가락끝이 심하게 닳아 뭔가에 부딫쳐도 기절할 정도로 아프기가 일쑤였다. 그 이튿날 상해지식청년들은 떠나려는 순자를 붙잡고 또 울음을 터뜨렸다. 순자는 그들한테 “후에 꼭 다시 오마”하고 열번도 더 약속을 하고서야 그들과 떨어질 수 있었다. 전날밤에 비가 내리고 이튿날 날씨가 개여서인지 날씨는 제법 쾌청하였다. 헌데 비온 뒤의 개인 날씨라 돌아오는 길에 순자는 몇번이고 뱀무리와 맞다들군 했다. 그럴 때마다 몹시 놀라면서 가슴을 붙안군 했다. 안도에서 돌아온 뒤 순자는 자주 그 상해지식청년들이 고생하던 모습이 머리속에서 맴돌면서 마음은 늘 괴롭기만 했다. 집체호에서 생활하고 있는 영남이, 영순이도 마찬가지로 고생이 막심할 것이란 생각이 들자 그 괴로움은 더해만 갔다. 순자는 자식들이 생활하고 있는 집체호들을 돌기 시작했다. 어느 한 집체호에 갈적마다 부뚜막과 굴뚝 등을 손질해주는 등으로 일손을 놓치 않았다. 물론 상해지식청년들이 살던 그 서북대대 집체호로 다시 간다던 약속을 어기지도 않았다. 그리고 1973년의 어느날 영옥이가 있는 안도현 장흥공사 장흥대대로 갈 때는 토마토 한 바구니나 이고 30리가 되는 산길을 걸어서야 집체호에 도착, 집체호의 모든 성원들이 눈물이 나도록 감동되게 하였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21
  • [연재]동년을 회억하여 (2) - 할아버지편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1. 나의 동년  나는 지금도 1950년부터 있은 사건들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어 나의 동년을 회억하려 한다. 나는 여러번 어머니와 숙부,숙모들과 옛이야기를 나눌 때 나의 기억을 말하곤 했는데 모두들 나의 또렷한 기억에 대하여 놀라고 탄복해했다. 나는 1946 년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번동에 지은 새 집에서 태여 났다. 나의 행복한 동년을 쓰려면 먼저 할아버지 아버지의 걸작인 지신향의 일류의 집부터 먼저 쓰게 된다. 봉금령이 취소되자 수천수만이 조선 사람들이 연변으로 들어오며 각지에 많은 조선사람 마을이 생겨났다. 청정부는 연길 룡정으로 가는 이민들이 길목인 지금 룡정시 지신에 관리기구 화룡욕(和龙峪) 통상국을 세웠는데 내가 세상 알고 학교에 다닐 때까지 화룡욕 아문 토성이 있었다. 그후 58년 대약진 시기에 토담을 허물어 퇴비를 하면서 없어졌다. 이전에 어른들은 이곳을 和龍 아문(衙門)이라 불렀다. 이리하며 아문城 남쪽은 城南이라 하고 동쪽은 城東이라 하였으며 서쪽고래는 새풀이 많다하여 샛골이라 하였다. 성남으로 가는 첫마을은 마통새 지팡(地方)이라 하고 좀 더 올라가면 회령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라 회령촌이라 하였고 또 남으로 올라가 오른쪽 고래는 樊씨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樊洞이라 하였고 중간고래는 張豊이라는 사람이 살았다고 張豊洞이라 하였는데 해방 후에 오래오래 풍년이 들라고 동음 글자로 바꾸어 長豊洞이라 하였고 왼쪽 고래는 오봉산아래에 있다고 五峰洞(노루막이라고도 함)이라 하였다. 서러골에 가는길과 오봉동에 가는 길어 귀에는 성이 董가라는 지주가 토성을 쌓고 살다가 해방전에 이사갔다. 지금 부르는 제일촌은 이전에 마통새(漢朝통역을 한다고 통새라 했다) 지팡(地 方 )이라 하였는데 마씨는 이 마을 지주로 높이가3- 4m되는 높은 토성을 쌓고 살았다. 해방후 그들은 청산을 맞고 살다가 심양에 이사가고 지금은 토성도 다 무너져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해방후 이 마을은 성남에 올라가는 첫 마을이라 제일 촌이라 불렀다. 할아버지는 장풍동 초창기 개척자의 한분이시다. 1913년 할아버지가 이곳에 이사 올 때만 하여도 장풍동은 3-4호가 사는 인구가 적고 아름드리 나무가 울창한 未開發 地區였으나 지주 張豊의 地畔였다. 할아버지는 큰 고모를 데리고 한 살된 아버지를 업고 조선 함경북도 회령군 벽성면에서 보리쌀 한말과 쪽바가지 하나를 허리춤에 차고 빈주먹으로 서러골령 70리 고개를 넘어 장풍동에 왔다.  당시 장풍동에는 지주 장씨 외에 조선 이민 3-4호가 금방 와서 개발하며 거주 하였다. 그중에는 유동촌과 장풍동 아래 마을에 노할아버지와 그의 큰 아들과 셋째 아들도 있었다. 30년대에 유동촌에 집들은 일본놈 토벌대가 항일 지사들이 활동 장소라 불태워 버렸다. 당시 노 할아버지는 한해 먼저 장풍동 아래 마을에 와 자리를 잡고 이듬해에 할아버지를 데려왔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지금 장풍동 웃 마을에 아름드리 고목을 베여 내고 그 자리에서 베여낸 재목으로 8간 집을 짓고 계속하여 주위의 고목을 채벌하며 토지를 개간하였다. 피득(언뜻) 생각하면 이 주인없는 땅은 개척만하면 다 내 땅인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성남에만 하여도 지주 넷이 있었는데 그들은 馬氏 樊氏 張氏 董氏다. 이곳의 매 한 치의 땅을 개척하면 모두 지주에게 엄청난 대가를 치려야 하였다. 이 지주들은 모두 외지에서 온 한족들로 관가에 뢰물을 먹이고 땅을 차지하고 이민들이 피와 땀으로 지주가 된 자들로 목적만 달성하면 모두 급급히 이 곳을 떠나버려 어머니가 35년에 장풍동으로 시집왔을 때는 그들은 이미 떠나간 뒤로 그후 이야기로만 들었을 뿐이었다. 당시 도끼와 톱 밖에 없는 상황에서 아름드리 고목을 베여 내고 집을 짓고 땅을 개간하던 그 로고가 어떠했겠는지는 지금 그 누구라도 조금만 생각해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할아버지는 장풍동 윗마을 서쪽 구벅이(구벅은 구석의 함경도방언)에 팔간집을 짓고 그 집에서 근 사십년간 사셨는데 동네사람들은 그 집을 구벅이집이라 하였다. 그후 둘째 삼촌과 세째 삼촌까지 결혼하고 1945년 8.15광복에 외지에서 일하다가 돌아와보니 집 식구는 16명이나 되여있었다 한다. 그리하여 할아버지는 번동아래에 집터를 잡고 밭을 사들이고 지신구에서 제일로 자랑하는 열간 집을 지었다.  이 집은 할아버지의 자존의 걸작이었다. 직경이 50cm넘는 대들보로 받쳐진 웅장한 열간 큰 집에 남들의 살림집 못지 않는 사랑채가 있었고 앞뒤에 넓은 터전, 뒤에는 과일나무, 안밖을 백토로 칠한 새하얀 전통적 조선식 건물, 지붕은 조이짚을 량쪽을 짤라서 예였는데 특히 조이짚은 잘 썩지 않는 특점이 있어 만년 먹기라고 한다. 1954년 우리가 이사 간후 우리 집을 사다가 새로 지은 집에서는 55년이 지난 오늘에도 여전이 그 짚 이영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당시 집들은 웃 방만 천정을 눌렀는데 우리 집은 웃방과 정주간 모두 천정을 누르고 정주간에 일본 군사용 밀페식 고급 펌프를 안장하였으며 직경이 1m넘는 무쇠 물독 그리고 펌프주위와 가마 후런은 콩크리트로 하였다. 그 때만 하여도 콩크리트는 매우 귀하였다. 이런 집은 40년 대가 아니라 5-60년대에도 보기 드물었다.  집에는 소, 수레, 벼 탈곡기, 군재, 가대기등 농기와 방아간에는 멎진 방아, 사랑채에는 베틀과 커다란 뒤주와 풍기가 있었다. 風機는 당시 일반적으로 쌀을 찧을 때 사용했는데 할아버지는 탈곡시에 사용 하였다. 집안에는 재봉기, 축음기, 매돌, 직경이 70cm가 넘는 피나무로 가공한 보기 좋은 가벼운 매판, 직경이 50cm넘는 참나무로 가공하여 만든 떡구시, 그리고 각종 크기의 함지 책상과 크고 작은 밥상, 특히 매판과 함지는 모두 피나무로 만들어졌는데 직경이 1m넘는 나무를 구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며 몇 십년을 사용하여도 트고 갈라지지 않았으니 그 건조 가공 기술도 대단하였다. 그리고 떡구시를 만든 자작나무도 직경이 50cm 넘는데 그렇게 땅땅하고 비틀게 꼬여 자란 곧은 나무를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창문과 간문은 아주 정교하고 단단하고 맵시 좋았는데 지금도 사용하고 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목수기술이 아주 좋아 벼탈곡기 제외한 이 모든 것들을 전부 손수 만드셨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자기의 두손으로 혼신의 힘을 다하여 후대들을 위하여 살기 좋은 리상촌을 건설하였다.  나는 할아버지 전성기에 태여 났기에 나의 동년은 아주 행복하였다. 우리 집에는 오가는 사람들도 아주 많았다. 나의 친구들도 많이 왔는데 옥인이 옥봉이는 경상적으로(자주) 오고 때로는 고모사촌 춘호 장풍동에 10촌동생 옥련이도 놀러 왔다. 우리는 세감질(소꿉놀이)을 놀거나 숨박꼭질 아니면 강변 모래톱에서 혹은 뒷가 산에서 뛰놀았는데 뒷산은 돌이 많아 개간하지 못하여 초목이 자란 그다지 크지 않은 산으로 우리가 놀기에 맞춤했다. 봄이면 노란나리. 백합, 도라지꽃, 함박꽃과 이름 모를 꽃들이 많이 피였다. 그리고 고사리, 삽찌, 닥시싹, 고추나물, 우정금등 산나물도 있었다. 그 산 아래에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심어 놓은 배나무, 사과배나무, 돌배나무, 질구배나무, 오얏나,무 살구나무들이 있었다. 우리 집 과일 나무는 봄에 별로 꽃들이 많이 피지 않았는데 둘째 숙부네집 과일 나무가 꽃이 필 때면 마치 집이 꽃밭에 뭍혀 있는 듯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꽃이 적게 핀 원인은 과일나무를 옮긴지 얼마 안되고 땅이 너무 슾한 원인에 있는 것 같다. 우리가 한번 뒷가 산에 놀려갔다 오면 땅이 너무 질어 발이 빠질 정도였으니. 어쩌다가 형님들과 같이 뒷가 산에 가면 형님들이 싸리가지를 꺽어 백합뿌리를 캐여 왔는데 어머니가 삶아 주었다. 감자같은 맛에 달콤한 맛이 더 해져 정말 맛 좋았다. 그러나 돌밭이여서 한 뿌리 캐기에도 여간 힘들지 않았다.  강변 모래톱에는 할아버지가 파놓은 일 년 내내 얼지 않는 샘물이 있었으며 봄이면 할미꽃, 민들레꽃, 장미꽃외에도 이름 모를 각종 꽃들이 만발한다. 여름이면 강가의 푸른 잔디 또한 좋았다. 가을이 되면 샘물터에서 물고기를 한 소래씩 잡아다 철엽을 했다. 집에서는 셋째 삼촌이 사온 축음기도 띠우며 놀았는데 축음기판도 적지 않았다. 그 중에서 인상 깊은 곡은 왕서방 련서와 농부가다. 이것이 바로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오매에도 그리던 리상촌의 평화롭고 오붓한 일가일 것이다.  나는 이때를 회억 할때면 이 노래가 생각 난다. 내가 살던 고향은 꽃피는동산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 울굿 불굿 꽃대궐 차리인동네 그곳에서 살던때가 그립습니다  할아버지는 우리들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한 분이시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총명과 지혜 근면과 의지로서 빈손으로 장풍동에 와 근40년간 고전 분투하여 우리에게 공부할 기반을 닦아 주었다. 할아버지는 밭이야 말로 인생사의 근본임을 잘 알고 있었으며 토지를 확보하기 위하여 억척같이 황무지를 개간하시였고 돈만 생기면 밭을 사들이었고 아무리 흉년이 라도 밭 한 뙈기는 사야 한다는 철칙을 가슴에 품고 있은 분이다.  벼슬길에는 자식들에게 희망을 두지 않고 다만 그 다음 항렬 즉 镛자 항렬 에서 인재가 나오리라는 족보의 명시를 굳게 믿었으며 손자들을 공부시켜 부귀와 공명을 이루려 했다. 할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손자들을 보면서 자신의 所願인 ‘進士’길이 눈앞에 보이시는 듯 자신이 벼슬한 것보다 더 기뻐하시며 손자들을 공부시키기 위해 토지 개혁 이후 에도 더 많은 밭을 사들이었다. 이는 좀 잘못된 선택이였으나 집체 생산전까지 가정수입의 주요 원천이었다. 만약 할아버지의 근40여년이 피타는 고전분투가 없었다면 우리의 오늘은 암담했을 것이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10
  • [연재] 동년을 회억하여 - 머리말
    저자: 리락용(1946~현재) 전주리씨43세, 의안대군파 21대손 머리말 나는 동년을 회억하여란 제목하에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그리고 숙부들에 대하여 쓰려한다. 평범한 생활 속에서 그들의 이야기는 별로 큰 사회적 의의가 있다고 여기지는 않지만 천지개벽의 년대에 우리 집의 면모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기 위하여 억척같이 일하신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피타는 노력과정은 바로 연변 근대사 120 여년간에 우리민족 선배들이 연변땅에 이민하여 피땀을 흘려가며 개척하던 그 모습의 숙영이라고 생각하기에 또 할아버지와 어머니의 노력이 너무나 비장하기에 이를 우리의 후세에 알리고 싶어 이 글을 쓰게 되였다. 그러나 당시 내가 너무 나이가 어리기에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적어 유감스러운 점도 적지 않다. 시대배경: 기사년에 기근과 이민 간토(墾土) 할아버지가 늘 말씀하여 나의 귀에까지 익숙한 기사년 재황과 이민에 대하여 간단히 이야기하려 한다. 기사년 재황은 전례없는 특대 재황으로 이 재황은 조선 이민의 시작이었다. 할아버지 말씀에 의하면 청나라때에 興京이동 伊通이남 두만강 이북 연변땅을 포함하여 동북의 동남 쪽 장백산 지구를 청나라가 흥기한 구역 성지라 봉쇄하여 인가가 없는 황량한 곳으로 200여년간 비어있었다. 1860년부터 1870년까지 11년사이에 조선북부에는 대 한재와 대 충재가 련이 어 들었다. 특히 1869년(기사년)에 함경도 무산 회령 종성 온성 경원 경흥등6읍에 덮쳐든 한재는 유사이래 보지못한 특대 한재였다. 이리하여 굶어 죽고 얼어 죽는 사람이 아주 많았다. 이는 대폭 이민이 발단이었다. 10여년간 련속된 재해로 두만강을 건너는 것은 북도 사람들이 유일한 삶이 길이었다. 그러나 청나라와 조선 조정에서는 강안에 숱한 포막을 세워놓고 월강을 금지시키며 월강하다 잡힌 사람들을 월강죄로 마구 목을 따 버렸다. 그러나 계속 이민자들이 증가하자 조선 조정에서 월강금지령을 페하고 청정부에 월강자들에게 지권을 주며 강북으로 이주를 승인하라 요구했다. 1881년에 청 정부는 동북지방의 최후의 금단지역인 길림성 동남부의 봉산위장을 개방하고 훈춘에 招墾總國을 설치하고 이민 실변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청정부는 연변지구에 이미 다수를 차지한 조선사람을 축출할 수 없고 개간한 토지를 황무지로 만들 수도 없다고 여겨 집조를 발급하며 조선 이주민을 리용하여 연변을 개간하기로 하고 또 황무지 개간을 고무하기 위하여 초기에는 ‘훈춘 녕고탑조간(照垦)장정’을 반포하고 당해에 토지를 받은 호들이 땅세를 면제하고 소작료는 매상에 600문씩 받기로 하되 반드시 5년 후에 갚게하며 그 나머지는 한 푼도 풍기지 않기로 하였다. 그 밖에 간민들에게 부림 소를 대주고 기한을 정하여 빛을 갚게하는 등 우대정책을 실시하였다. 1885년에 봉금령이 취소되고 월강금지령이 페지되자 수 천 수 만이 조선인들이 터진 조수마냥 연변으로 밀려들어왔다. 하여 각지에 조선족마을이 생겨났다. 청나라 는 변방보위 수요로 군량을 해결하기 위하여 조선족 이주민을 받아들이고 관리 기구인 월간국을 세우고 지금 龍井市 智新郷에 和龍峪(화룡욕) 통상국을 앉히고 두만강 이북 길이 700여 리 너비50여 리에 달하는 구역을 조선족 간민의 개간 구역 으로 확정하고 행정관리를 강화하였다. 이는 연변 역사와 조선족 역사에 아주 중요한 사건이었다. 간민들은 두만강 연안으로부터 해란강이북 부르하통하이북 그리고 훈춘 이북으로 끊임없이 들어와 황무지를 개간하였다. 두만강기슭의 화룡현 숭선으로부터 연길현 광제욕에 이르는 기름진200리 땅이 전부 간민들에 의하여 개간 되였을 뿐만 아니라 해란강이북 지역과 가야하 연안도 대폭 개발되기 시작했다. 1900년에 의화단 운동이 일어나자 로씨아는 동청 철도를 보호한다는 구실로 동북에 처들어 왔고 잇달아 훈춘을 점령하고 연변지구와 조선북부지방을 강점했다. 이에 경황 질색한 연변 지방 관리들과 군관들은 길림으로 도망했다. 그 기회에 연변지구에 더 많은 이민들이 이주하였다. 청나라정부에서 황산지를 백성들에게 팔게 되자 외지에 관리들과 군벌 대 상인들은 파리떼처럼 달려들어 비옥하고 편리한 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혈안이 되였다. 그들은 권세를 등대고 청장(토지를 재주는)인원들에게 뢰물을 먹여 많은 황무지를 차지하였는데 어떤 자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광활한 황무지에 말뚝을 박아가면서 토지를 점유했고 또 어떤 자들은 토지개간회사라는 빈 간판을 내걸고 한 지방의 토지를 독차지했다. 이렇게 황무지를 헐 값으로 차지하여 일약 벼락 대지주로 된 지방의 관리 군벌 대 상인들을 점산호(占山戶) 라하였는데 기실은 占山虎였다. 이 기회에 외지에 한족들이 관청과 점산호들에게 뢰물을 먹이고 점산호들이 문턱을 뻔질나게 드나들며 점산호들로부터 몇 백상이 황무지를 얻어 이민들게 주어 개간하여 대 지주가 되었다. 또 지방관리들의 신임을 얻은 어떤 자들은 점산호를 대신하여 조선족 간민을 모집하여 황무지를 개간시키고 소작료를 받아들이며 그 중에서 어부지리를 얻어 점차 지주로 되였다 또 일부는 부유한 조선인 상인들인데 그들은 무역과정에서 강북의 넓고 비옥한 황무지와 헐한 땅값에 유혹되여 조선의 재산을 전부 팔고 남녀 노비들까지 거느리고 이주하여 일약 수 십 상의 토지를 소유 한 지주로 되였다. 봉금령이 페지로 손에 한푼 땅도 없는 조선 농민들이 땅을 얻을 수 있는 기회라 여겨 이 “주인 없는” 땅에 몰려와 개간하기 시작했는데 이때 앞에서 언급 하다 십히 외지에 한족들이 연변에 들어와 관리들에게 뢰물을 처먹이고 땅을 차지 하였다. 뢰물을 처먹은 관리들은 말을 타고 다니면서 마치 자기 땅인 것처럼 저 벌판은 마씨의 땅이오 저 산골 짜기는 장씨의 땅이라 하면서 말뚝을 밖아 지역(地畔)을 정해주고 명함을 찍어주어 땅이 주인이라 하였다. 이렇게 그자들은 하루 아침에 거대한 땅을 차지한 폭팔호로 둔갑되여 적수 공권으로 고향을 버리고 생계를 찾아 온 이민들이 피땀을 빨아 먹기 시작 했다. 이 신생 지주들은 땅의 정도에 따라 6할5할4할을 정하여 이민들에게 개발권을 주었다. 례를 들어 6할이면 한상을 개간하면 60% 를 5할이면 50%를 지주에게 바쳐야 하는 엄청난 대가를 치르면서도 이민들은 계속 이 땅을 개간했다. 이 신생지주들은 이민들에게서 받아들인 땅을 다시 이민들에게 팔아 먹고 또 다른 곳에가 이와 같은 만행을 계속 저질렀다. 어떤 곳에서는 이민들이 땅을 개간해도 자신의 땅은 한푼도 없이 모두 지주의 땅으로 되여 이민들은 자신이 개간한 땅에서 소작짓고 살아야 했다.이러한 폭발호(暴發戶)의 전형은 태양벌을 독점한 악패지주 한씨다. 해방 후 그놈은 인민들이 손에 처단되였다. 연변땅에 지주는 대 다수 이렇게 산생되였으며 성남의 마통새도 번씨도 장씨도 모두다 이러한 지주다. 이것이 연변에 조선족 지주가 아주 적은 원인의 하나다. 이렇게 살길을 찾아 정든 고향을 버리고 이민하는 조선 사람들이 행렬은 처음에 는 기황으로 시작되였으나 그후에는 일본놈들이 착취와 압박으로 그 규모가 점점 더 크게 전국적으로 계속되였다. 함경도 사람들은 도보로 연변과 장백현 집안현 경내로, 평안도 사람들도 도보로 료녕성 동부로, 그리고 배를 타고 이민한 충청도와 전라도 사람들은 료녕성내지로, 강원도 경상도 사람들은 길림성 흑룡강 성내지에 집단 이민하고 그곳에 부락으로 정착해 살았다. 이 이민 조선 사람들은 그후 동북 항일 투쟁 최전선에서 싸우며 가송찬미할 력사의 한 페지를 썼고 또 중국 해방전쟁에서도 역시 커다란 불멸의 공적을 쌓았다. 여기서 지명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들을 몇가지 첨가하면 이민들이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연변땅은 인연 없는 산구로 이름(지명)없는 곳이었다. 이민들이 대량 몰려 오기 시작하자 청정부는 길림성에 이민국을 설치하고 이 땅을 관리하 려고 이민국 관리 몇 명을 보냈다. 이들이 연변에 월간국을 세울 교통이 편리하 고 관리가 편리한 곳을 찾다가 ‘국자가’을 지정하고 지명을 다시 지으려고 고심하던중 한 관리가 길림성이 연장이라 연자에 길림성이 길자를 붙이여 연길이라 함이 어떠한가 하였는데 모두들 그 이름이 의미있고 신통하다 하여 연길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일설이 있다 。 그리고 연길은 그때 사방이 산으로 둘려 싸인 분지인데 바람이 불지 안는 고요한 때면 연기와 안개가 덮인 곳이라 煙集崗이라 하였는데 훈춘에 있던 招垦总局이 이곳에 오면서부터 土地局있는 거리라 하여 局子街 라 하였다가 다시 煙集을 한어의 동음자로 延吉(연길)이라 하였다는 일설도 있다. 여하튼 연길이라는 지명은 1900년 경에 지어진 이름이다. 마치 최근 烟集河를 延吉河라고 하듯이 고친것이다. 또 하나 왕청이라는 이름은 그때 왕청땅에는 함경도 사람들이 많이 이주해 왔는데 함경도의 하천들은 모두 동이나 동남쪽으로 흐르는데 이곳 왕청의 하천은 모두 서쪽으로 흐른다 그리하여 왕청같이 강하천이 흐른다 하여 왕청이라 지었다 한다. 일반적으로 지역들이 특점에 따라 지은 이름이 많은데 이런 이름로는 나의 고향에 룡정 성남 성동 회령촌 장풍동 샛골등이다. 여하튼 급시에 관리들이 기발한 생각으로 지은 이름이나 민간에서 지역의 특점에 따라 지은 이름이나 모두 재미있는 이야기거리다. 또 이 지명들만 들어도 이 땅의 력사에는 모두 이민들이 발자취가 고스란히 새겨져있는 비장한 땅이며 이 땅의 력사는 이민들이 력사며 이 땅의 주인 역시 이 땅의 력사를 창조한 그들이였다. 그리고 하나 더 쓰면 두만강, 두만강은 백두산에서 발원하여 내려 오다가 자신이 홍수시에 만들어낸 충적사 틈으로 새여 들어가 종적을 감추고 도망가 몇 십리 흐르다가 다시 돌틈에서 빠져나와 자신의 진면모를 자랑하며 700리 두만강이 유유히 흘러간다. 최초의 두만강의 이름은 도망 갔다고 도망강이라 하였는데 그 이름이 가상하지 않다고 여겨 한 선비가 음이 비슷한 두만강이라 지어 주었다 한다. 이러한 이름은 조선민족이 아닌 어떤 민족이 지을 수 없는 이름이다. 또 이러한 이야기는 민간에서 떠도는 이야기지만 백년 남짓한 이민사에 깃든 이야기로 誤傳되거나 무중생유(無中生有) 가능성이 적다고 본다. 나는 이렇게 우리 조상들이 력사가 깊이 새겨져 있는 이땅의 력사를 모두 소중이 여기기를 바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10
  • 오묘한 세계대백과(26)
    남극의 극주 남극의 극야 “극주”란 하루 24시간이 모두 낮인 것을 말하고 “극야”란 하루 24시간이 모두 밤인 것을 말한다. 지구상의 남극과 북극이 바로 아주 기이한 지방으로서 그 곳에는 극주와 극야 현상이 자주 발생한다 이는 무엇때문일까? 그것은 지구가 태양을 돌 때 몸의 한쪽면만 태양과 마주하고 돌기에 태양이 지구표면을 비출 때 변화가 발생하는 것이다. 3월부터 9월 사이의 한동안 태양은 줄곧 북극의 낮은 곳을 비추기에 이 때의 북극은 계속 낮이 되고 남극은 매일 밤이 될 수밖에 없다. 반대로 9월부터 다음해의 3월 사이에는 태양이 남극의 낮은 곳을 비추기에 이 때면 북극지구는 매일 밤이 되고 아울러 남극은 24시간 모두 낮이 될 수밖에 없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05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26)
    쾰른대성당의 자료 소속대륙: 유럽, 소속국가: 독일, 지점: 쾰른시 함의: 독일에서 제일 크고 세계에서 제일 높으며 수건시간이 가장 긴 성당임 쾰른대성당(科隆大教堂)은 역사가 유구한 나일강반의 쾰른성에 위치, 성당은 세계 종교건축사상의 3개 제일 중 하나로 독일에서 가장 큰 성당이며 세계에서 가장 높은 성당으로 건축역사가 가장 긴 성당이다. 쾰른대성당의 가치는 소장품이 이름나서만이 아니라 더 유명한 것은 무게가 24톤에 달하는 대형 추시계와 10세기 시대의 황금갑삼왕감(黄金匣三龛)이 있어서이다. 600여년의 역사를 갖고 있는 쾰른대성당은 하나의 정교한 예술품과도 같이 신성한 빛을 뿌리고 있으며 유럽의 3대 성당 중의 하나로 꼽히우고 있다. 곡절적사연이 깃든 성당 쾰른대성당은 1248년에 낡은 성당자리에 재건한 것이다. 일찍 16세기, 종교개혁 운동시대에 성당의 개조공사는 중지되었었다. 중지됐던 시간은 무려 3개 세기에 거쳤다. 그 뒤 프로이센국왕 빅토르 윌렌 4세의 추동하에 이 성당은 1880년에 드디어 준공되었으며 전후의 시간은 무려 632년이 걸렸다. 뾰족한 쌍탑 쾰른대성당의 벽체는 모두 가공된 돌로 쌓여졌으며 부지면적이 약 8000평방미터이고 외관은 웅위로우면서도 그 셈세함을 잃지 않고 있다. 그리고 뾰족한 쌍탑은 정문벽과 연결되어 있으며 그 높이가 157미터에 달해 유럽에서 가장 높은 뾰족탑으로 되고 있다. 그 모습을 보면 마치 두 자루의 예리한 검이 구름속에 꽂혀 있는듯 하고 네 주위의 무수한 작은 뾰족탑들이 서로 호응하여 이 쌍탑으로 하여금 더욱 뚜렷하게 만들고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05
  • [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1)
    ■ 김철균 3 순자 옆의 식구들은 날이 갈수록 계속 하나 둘씩 떨어져 갔다. 인류생활사에 있어서 자녀가 부모의 슬하에서 자라다가 성인이 되고 또 결혼하면서 부모와 떨어져 사는 것은 자연적인 윤리라 하지만 그 당시 사전에도 없는 “신조어”인 집체호로 인해 우리 중국에 나타나 수천수만의 가정에서 자녀들이 정든 도시와 부모의 곁을 떠나 농촌으로 가야 했다. 순자의 가정도 영남이와 영순이가 떠난 뒤를 이어 1970년에는 영옥이가 떠났고 1973년에는 영애, 또 그 뒤엔 경남이까지 집체호로 내려가게 되었다. 그리고 남편 용환이는 비록 돈화의 “5.7” 간부학교로부터 돌아와 명예를 회복하긴 했으나 얼마 안있어 의료대 성원으로 뽑혀 몇 달씩 내몽골과 기타 지구에 가있군 하다보니 역시 생이별이나 다름이 없었고 후에는 집체호에 내려갔던 둘째 아들 경남이까지 중국인민해방군에 입대하면서 집을 떠났다. 둘째 아들 경남이가 군에 입대하게 된데는 순자의 역할이 아주 컸다. 당시 경남이는 연길시 장백공사 동풍대대에 하향하였다. 그는 하향한 이듬해에 군에 신청했다. 둘째가 군에 신청했다는 소식을 듣자 순자는 아들이 매우 대견스럽게만 느껴졌다. 엄마의 잔등에 업혀 재롱을 부리던 때가 어제 같은데 어느 덧 성인이 되어 집체호로 내려갔고 이젠 또 군에 신청하다니 그야말로 볼수록 자랑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혹시 신체검사나 기타 심사에서 탈락하지는 않을는지 슬며시 우려되기도 했다. 기실 순자는 해방군을 몹시 흠모하였었다. 거리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들을 볼 때마다 내 아들도 저런 모습을 하고 나섰으면 하는 부러움을 가져본 적도 한 두번이 아니었다. 그리하여 큰 아들 영남이를 군대에 신청하게 하였었는데 뜻밖으로 당시엔 남편인 김용환이 “외국특무”란 누명을 쓰고 있었기에 그 소망을 이룰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젠 가정출신이 좋겠다, 남편도 “외국특무”란 누명도 벗었겠다 거기에 신체까지 좋은 둘째 아들 경남이가 군에 입대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집에서 안절부절하던 순자는 마침내 둘째 아들 경남이가 하향한 동풍대대를 찾아갔다. 동풍대대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을 만난 순자는 찾아온 목적을 이실직고하였다. “저는 아들 셋이나 둔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아들 셋 중 군대에 간 아들은 아직 한명도 없답니다. 큰 아들은 한시기 아버지가 ‘외국특무’란 모자를 쓰고 있어 가지 못했습니다. 이젠 걔들 아버지의 모자도 벗었으니 둘째 아들만은 꼭 군대에 보내고 싶습니다.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께서 아무쪼록 저의 아들이 신체만 합격된다면 첫 사람으로 추천해 주기를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이에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은 순자의 심정을 이해하면서도 뭔가를 궁금해하는 것이었다. “아니, 경남이는 집체호 지식청년이기에 몇년 안 있어도 노동자 모집으로 도시에 올라갈 수 있겠는데 왜 부디 군대에 보내겠다고 하는 겁니까? 군대에 가면 농촌 못지 않게 힘들고 고생스러울텐데요?!” “그것 때문이 아니랍니다. 남자대장부로 생겨서 나라를 지키는 일터에 가는 것이 얼마나 장한 일입니까?! 그리고 고생을 겪어봐야 더욱 견강한 남아가 될 것이 아닙니까? 또 아들 셋이나 두고 그 중 한명도 군대에 보내지 못하면 제가 어떻게 당당한 어머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이 말에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은 몹시 감동돼하면서 경남이가 평소의 표현도 출중하고 신체도 좋으니 경남이를 적극 추천하겠노라고 답복을 주는 것이었다. 당지부서기와 민병연장과 작별한 순자는 또 장백공사 무장부에도 찾아가 무장부장한테 재삼 이상과 같은 부탁을 하고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경남이가 평소에 잘해서인지 아니면 순자가 아래위로 뛰어다니며 “외교활동”을 적극 벌여서인지 그 해 겨울 경남이는 자신의 뜻대로 군대에 나가게 됐다. 그것도 일반 육군이 아닌 해군으로 입대에 성공했다. 소속부대는 광서에 있는 모 해군기지의 부대였다. 당시 중국의 남부 변경지대의 형세는 몹시 복잡했다. 1975년 베트남 북방이 남부를 해방하고 통일을 실현한 후 점차 구소련의 힘을 믿고 중국과 등지는 외교를 해오다가 1976년 9월 중국의 모택동주석이 서거하자 공공연히 중국을 반대하고 중국과 엇서는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그것은 당연히 변경에서의 집탈로 표현되었다. 베트남군은 쩍하면 포사격으로 중국 변경주민들의 안정된 생활을 파괴하였는가 하면 때로는 중국 쪽으로 건너와 중국주민들의 물건을 빼앗거나 중국 주민을 학살하기도 하였다. 또한 대내적으로는 화교들을 탄압하고 내쫓는 행위를 감행, 한시기 양국의 변경다리로는 중국으로 들어오는 화교들로 줄을 잇기도 했다. 베트남당국은 중국의 참을 수 있는 경고를 계속 무시하면서 이러한 행위를 계속했다. 두나라 관계는 일촉일발의 전쟁분위기가 짙게 감돌았다. 바로 이럴 때 경남이가 군에 입대, 그것도 중국과 베트남 변경인 광서로 가게 되었다. 드디어 경남이가 참군한 그 이듬 해인 1979년 2월 17일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자위반격전이 개시되었다. 전하는데 따르면 베트남에 대한 중국의 자위반격전에는 운남과 광서의 변방부대가 주력으로 출동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남이네가 소속한 해군부대도 출격한 것이 아닐까? 그러지 않아도 무시무시한 소식들이 자주 들려왔다. “장기간 전쟁이 세례를 받은 베트남 군대는 몹시 지독하다”느니 “부상당한 베트남의 여민병은 중국군대의 등에 업혔다가도 비수를 뽑아 중국군대의 목에 찌른다”느니 “인원상에서는 중국군대 측이 더 큰 손실을 입었다”는 등의 유언비어가 수없이 나돌았다. (혹시 경남이네도 전선에 나가 베트남해군과 맞붙지는 않았는지? 또한 싸움 중 어떤 불상사라도 생기지 않았는지?……) 순자는 불안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20년간 키워오면서 남의 집 애들처럼 잘 먹이지도 잘 입히지도 못했는데 그 애가 전쟁에 참가하여 혹시 불상사라도 생긴다면… 자식의 안위에 대해 걱정하는건 순자 역시 여느 어머니들과 마찬가지었다. 하지만 그것도 순간에 불과했다. 순자는 다시 자신의 마음을 정리했다. 모택동의 큰 아들 모안영도 전쟁터에 나가서 희생되지 않았던가. 모두들 자기 자식이 아깝다고 붙잡고 있으면 이 나라는 그래 누가 지킨단 말인가?!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니 순자는 부대에 간 아들 경남이가 자랑스럽기만 했다. 또한 혹시 그 경남이한테 어떤 불상사가 생기더라도 자신이 아들을 부대로 보낸 것은 아주 잘된 일이라고 단정하였다. 4 순자의 막내아들 김진이는 다행히도 하향지식청년 명단에서 제외되었다. 당시 자녀 5명이 농촌으로 하향하면 한명은 농촌으로 내려가지 않아도 된다는 나라의 정책이 있었기에 그 혜택을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17평방미터가 되는 작은 집에는 순자와 막내아들 김진 이렇게 모자 두 사람만이 남아있게 되었다. 식구가 단촐하면 살림을 조직하기가 보다 쉽다는건 살림살이를 해본 모든 주부들이 한결같이 입을 모으군 하는 이치인 것만은 사실이다. 하지만 순자네만은 그 예외였다. 당시 순자의 남편 용환이의 노임은 55원이었는데 의료대로 외지생활을 하는 용환이한테 매달마다 얼마씩 보내고 난 뒤 나머지로 집안의 생활을 조직해야 했다. 아니, 집체호에 내려간 영남이,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의 비누와 치약 등을 사는 생활비용도 대주어야 했다. 그것은 남편과 모든 자식들이 한 집에서 함께 생활할 때보다 그 생활비용이 곱절 더 들었다. 생활하다 보면 돈이나 물건같은 것을 가져가는 사람은 그것이 흔히 아주 적어 눈에 차지 않고 만족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퍼주는 사람은 그것이 크게 자리나게 축나기 마련이다. 그것은 돈이나 물건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니 집에서 여러 곳에 지원하며 살림을 조직하는 순자로서는 적은 생활비로 여기 저기에 맞춰대기가 여간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떤 달에는 남편의 노임을 받는 날로 그것이 거덜날 때도 있었으니 그런 달에는 쌀밥 한끼를 해먹는다는 것이 하늘의 별따기나 마찬가지었고 기타 배급표로 나오는 돼지고기같은 부식품을 사먹든다는 것은 아예 꿈도 꾸지 말아야 했다. 바로 이 때 신흥가두판사처와 제 9 거민 위원회에서는 순자네 가정의 생활형편을 요해한 뒤 토론을 거쳐 순자더러 연변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당시 직업이 없는 가정주부가 임시일이라도 하려면 거민 위원회에서 주민들이 선거추천하고 가두판사처의 토론과 심사비준을 거쳐야 하는 일종 “빈곤부축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었다. 당시에는 다만 가정이 가난해서만 여기에 뽑혀 임시일자리를 얻는 것이 아니었다. 가정출신토대가 좋고 사회적인 평가도 좋은 사람만이 그 “혜택”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중국판 “노가다”라고 할 수 있는 건축공사장에서 임시일을 할 수 있게 된 김순자, 이는 건국전 명신여자중학교를 졸업한 순자한테 있어서 너무나도 가혹한 운명의 희롱이었다. 순자는 억울했다. 명신여자중학교때의 동창생들이 자전거를 타고 출근하는 것을 봐도 억울했고 자갈치기, 벽돌부리기와 시멘트반죽을 나르던 몸이 데친 배추잎처럼 후줄근해진채 퇴근해서는 또 뒤죽박죽이 된 집안을 거두며 저녁밥을 지을 때도 억울했다. 하지만 순자는 이러한 억울함을 단 한번도 입밖에 내지 않았다. 순자는 이 모든 것을 숙명처럼 받아들였다. 위생학교 기숙사의 임시공일을 할 때도 그랬고 건축공사장의 막 일을 하는 그 때도 역시 순자는 뭐든지 하면 열심히 하였다. 한편 자기의 안위는 돌보지 않고 남을 위하는 순자의 정신세계는 그 곳 건축공사장에서도 체현되었다. 당시 공사장에는 순자처럼 임시공일을 하는 ×××이란 젊은 한족여인이 있었는데 어느 날 그녀는 공사장 책임자한테 며칠간 휴식하련다고 말미를 맏는 것이었다. 공사장에서 말미를 맡고 며칠씩 나오지 않는 일이란 흔히 있는 것으로서 당시 순자는 그녀가 말미를 맡는 것에 대해 아무런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저 몸이 불편하지 않으면 가정에 무슨 일이 있나보다고 여겼을뿐이었다. 헌데 며칠 뒤에 나타난 ×××이란 여인은 얼굴색이 백지장같고 몹시 부석부석한 모습이었다. (저 여인한테 무슨 일이 있었구나…) 순자는 의심쩍은 생각이 들어 그 여인이 일하는 모습을 자주 지켜보았다. 아니나 다를가 외바퀴밀차에 벽돌을 실어나르는 일을 하면서 그녀는 몹시 힘들어하는 기색이 역연했으며 현훈증을 느끼는지 외바퀴밀차를 밀다말고 자주 땅에 주저앉는 것이았다. 그리고 그닥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이마에서는 콩알같은 땀방울이 내돋군 하였다. “아니, 임자. 자네한테 웬 일이 있는 모양이구만.” “아니, 아무런 일도 아니예요. 괜찮아요. 언니 저한테 신경쓰지 마세요.” 그러면서도 여인은 두손으로 얼굴을 막으면서 분명 울음이 터져나오는 것을 가까스로 참는 것이었다. “아니 임자, 웬 일이요? 내가 조선족이라고 거리감을 두지 말고 언니처럼 생각하오. 어서 말해보오. 대체 웬 일이요?” “언니, 기실… 기실 제가 2일전에 낙태수술을 했어요.” “뭐, 유산을 하고 일하러 나왔다고?! 쯧쯧…그 몸으로 어떻게 이 일을 할 수 있어?! 내가 책임자한테 말할테니 집에 들어가 며칠 푹 쉬다가 나오라구.” 그러자 ×××여인은 급기야 순자의 입을 막으며 사정했다. “언니, 그러지 말아요. 기실 저의 집 생활형편이 말이 아니예요. 그러다가 책임일군이 혹시 저를 자르면 어떻게 하겠어요?!” 그 말에 순자 역시 짚이는데가 있었다. 자신 역시 가정의 생활고 때문에 건축공사장에서도 제일 힘든 임시공일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오, 오죽했으면 이 몸을 갖고 일나오겠는가! 순자는 머리를 절레절레 저으며 자기가 일하던 모래를 치는 곳에 가서 삽자루를 잡았다. 하지만 자꾸만 눈길이 ×××여인한테 돌려지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결국 얼마 안있어 순자는 다시 ×××여인한테로 다가왔다. “안되겠어. 임자 내가 하던 모래치는 일을 하라구. 내가 외바퀴밀차를 밀테니.” “?!…” ×××여인은 어안이 벙벙해했다. “뭘해? 어서 저 쪽에 가서 모래를 치라구?” 그제야 순자의 뜻을 알아차린 ×××여인은 “언니, 감사해요”라고 하면서 외바퀴밀차를 순자한테 넘겨주었다. 순자가 하던 모래를 치는 일을 하는 ×××는 자주 감동으로 어깨를 들먹이었다. 후에 몸이 완쾌되자 ×××여인은 호떡 2개를 사가지고 순자를 찾아왔다. 자기를 대신해 힘든 일을 맡아준 순자한테 고맙다는 마음을 전하기 위해서였다. 순자는 그 호떡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그 한족 여인의 마음이었기 때문이다. “임잔 참 성질이 곧은 아낙네구려. 그럼 임자가 나의 일을 대신 해준다면 나는 조선족 찰떡을 사주어야겠구만.” 순자의 농담에 ×××여인은 얼굴을 붉히면서 “언니도 참”하며 눈을 곱게 흘기었다. 한편 건축공사에서 임시공으로 일하는 3년간 순자는 해마다 “선진사업자”와 “민족단결모범”을 되었다. 이는 임시공들 중에서는 유일한 “선진사업자”였고 “민족단결모범”이었다. 또한 건축공사와 순자와의 계약은 더는 가두판사처의 추천과 소개를 거치지 않고 건축공사에서 직접 채용하군 하였다.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2-05
  • 저우언라이가 마지막 남긴 싸인과 말 한마디
    (위인 저우언라이는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향년 72세로 별세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1975년 9월 20일, 병이 위독한 저우언라이(周恩来)는 부득불 병원입원 후의 4번째로 되는 대수술을 받게 되었다. 당시 저우언라이는 그 수술결과가 예측하기 매우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 저우언라이는 사업일군을 불러서는 1972년 6월 중앙의 비림정풍(批林整风) 회보회의에서 한 “‘몽골 언더르한 사건’에 관한 국민당의 여론날조 문제”란 보고의 녹음기록을 적은 문건을 한번 읽은 뒤 떨리는 손으로 거기에 싸인하면서 그 싸인 날짜와 환경에 대해 “1975년 9월 20일, 수술실로 들어가기 전”이라고 적었다. 이는 저우언라이가 생전에 마지막으로 한 싸인이었다. 수술실로 들어가면서 저우언라이는 가까스로 목청을 높여 한마디 맘속의 말을 하였다. “나는 당과 인민에 충성하였다! 나는 절대 투항파가 아니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덩잉초우(邓颖超)는 후에 왕둥싱(汪东兴)을 통해 이 모든 것이 모우저둥(毛泽东)한테 전달되게 하였다. 1976년 1월 5일 새벽, 병원의 의료진은 병이 위독한 저우언라이한테 마지막 한차례의 수술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 저우언라의 병이 위독하다는 통지를 받은 베이징의 중앙정치국 성원 및 국무원 책임자들이 육속 병원으로 찾아와 병문안을 했다. 1월 7일, 저우언라의 병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숨소리는 매우 미약하였고 장기간 혼미상태에 있었다. 의료진 성원과 간호일군들은 주야로 병실을 지키면서 수시로 구급준비를 했다. 그날 밤 11시경, 저우런라이는 혼미상태에서 깨어나서는 두 눈을 간신이 뜨며 신변의 우제핑 의사한테 부탁했다. “나 여기는 별문제가 없을테니 당신들은 다른 환자들을 돌보시오. 당신들은 다른 환자들한테 더욱 수요될 것이오…” 이는 저우언라이가 마지막으로 남긴 한마디 말이었다. 중국의 부강을 위해 평생의 노력을 다 바친 총리 저우언라이는 생명의 경각에 이는 마지막 순간에도 타인의 병치료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1976년 1월 8일 오전 9시 57분, 중국과 세계 많은 나라의 존경을 받던 세기적 위인 저우언라이는 영영 깨어날 수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향년 72세였다.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1-30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0)
    ■ 김철균 제9회 역경의 지속 1968년 말에 접어들면서 폭풍우처럼 몰아치던 문화혁명의 기세는 한풀 꺾이는듯 싶었다. 거리에서 조직과 조직사이의 무단적 폭력투쟁은 가라 앉았고 “독재대상”이 되었던 김용환도 풀려나왔다. 사회는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듯 하기도 했다. 하지만 새로운 형식으로서의 문화혁명의 동난은 계속됐다. 김용환은 일단 구금생활에서 풀려나왔지만 얼마 안있어 돈화의 어느 한 산골로 노동개조를 가야 했다. 말로는 “5.7간부학교”라고 했으나 기실 정배살이와 다름이 없었다. 이어서 초고중을 졸업한 큰 아들 영남이와 큰 딸 영순이가 같은 날 동시에 농촌으로 내려가 집체호생활을 하게 되었다. 문화혁명은 순자네 부부와 자녀를 산지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였다. 그 때 그 세월, 이렇게 한집식구가 흩어져사는 가정이 어찌 순자네 가정 한집뿐이었으련만 그 당시 정신상, 경제상에서 순자가 받는 압력은 여느 가정과는 비할 수도 없었다. 한가지 실례를 들고 봐도 한꺼번에 식구 3명이 집에서 나가니 적어도 이불과 요 3채씩은 있어야 했다. 당시 집에 이불이라고는 고작 3채뿐이었다. 그러면 남편과 두 자녀한테 새 이불을 해주어 보내는 것이 마땅한 도리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때 다른 집들에서는 자식이 농촌집체호로 간다고 하니 모두 새 이불을 해주는 바람이 일다싶이 했다. 그러다보니 연길시내의 몇몇 백화상점들에는 이불등과 이불안감 그리고 이불솜이 거덜날 지경이었다. 그리고 많은 집들에서는 자식들한테 이불을 해주어야겠는데 천표와 솜표가 없어서 긍긍 속을 앓기도 했다. 한편 이와는 반대로 순자네는 천표와 솜표가 남아돌았으나 돈이 없어 새 이불 3채씩이나 할 수 없었다. 순자는 남들이나 자식들한테 새 이불을 해줄 수 있게 하기 위해 집에 있는 천표와 솜표를 몽땅 남들더러 쓰라고 줘버렸다. 이를 두고 남들이 “다문 얼마씩이라도 돈을 받고 천표와 솜표를 팔 것이지 왜 그냥 주고 말았느냐?”, “나 같으면 찢어버리거나 부억아궁이에 넣어 태워버릴지언정 남한테 그냥 공짜로 안 주었을 것”이라고 말한 것은 썩 후에 있은 일이다. 집에 있는 이불 3채는 남편과 영남, 영순이가 각각 한채씩 가지고 갔다. 그러자 집에는 이불 한채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이구 누님, 집에 이불 한채도 없이 밤에 어떻게 잔다고 그러오?!” 어느 날 순자네 집에 왔던 남동생이 기가 막혀하며 혀를 끌끌 차다가 이불천과 솜을 사줄터니 천표와 솜표를 달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순자가 하는 말이 천표와 솜표는 또 남들한테 몽땅 줬다는 것이 아닌가. 남동생은 너무 한심하여 머리를 흔들었다. “누님, 그 것까지 남들한테 줘버리면 어떡하겠다는거요? 그렇게 마음이 헐하니 가난밖에 차례지지 않는거요.” 남동생은 누나를 책망하면서도 자기의 집에 가서 천표와 솜표를 가져다서는 돈과 함께 이불감을 사라면서 순자앞에 내놓았다. 그날 순자는 반나절 눈물을 흘렸다. 남동생의 소행이 고마워서 울었고 자식과 남편한테 잘해주지 못하는 자신을 탓하며 울었다. 하지만 그토록 인심이 헤푼 자신을 탓하면서도 밤만 자면 또 남한테 뭔가를 주지 못해 속을 앓군 하는 순자였으니 이는 곧바로 그의 천성이었다. 2 착한 순자한테 세월은 무정하기도 했다. 설상가상으로 영남이가 하향한 안도현의 ××산골과 영순이가 하향한 의란공사 ××촌은 째지게 가난한 고장이었다. 죽도록 일해도 한공에 20여전밖에 가지 않는 고장이라 벌어서 집을 돕기는커녕 자립조차 할 수 없었다. 영남이와 영순이는 “돈 5원만 보내주오”, “털모자가 없어서 겨울에 일할 수가 없소”,“신이 다 판났는데 발이 시려서 일하러 다닐 수가 없소” 하며 한달이 멀다하게 찾아와서는 손을 내밀었다. 자식들뿐이 아니었다. 돈화에서 노동개조를 하는 남편 김용환도 인편에 신과 장갑을 보내달라고 부탁해왔다. 당시 집에서는 순자는 물론 영옥이, 영애와 경남이, 김진 모두가 동복과 겨울신을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석탄을 절약하느라고 불을 적게 때다 보니 집이 춥기로 말이 아니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물독의 물에 살얼음이 낄 지경이었다. 남편과 자식 모두가 헐벗는 판에 과연 누구부터 돌봐야 하는가? 결국 순자는 손수 자기의 손으로 손장갑 몇컬레를 만들고 아끼고 아꼈던 생활비로 겨울신과 두꺼운 양말 등을 사서는 남편한테부터 보내주었다. 왜서였던가! 당시 순자는 그저 가정의 세대주인 남편만은 건강해야 한다고 생각했을뿐이었다. 남편이 건강하게 살면서 역경을 이겨내고 무사히 돌아와야 이 가정의 앞날도 운운할 수 있다고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순자는 역경일수록 힘을 낼 수 있도록 자식들한테 자신감을 주기에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순자의 말마따나 경제적으로 도와주지 못하니 정신적으로 힘을 북돋우어주는 것이었다. 1968년 12월 19일, 순자가 큰 아들 영남이한테 쓴 편지에는 이렇게 씌어 있었다. 내 아들 지식청년 영남아, 도시에서 살다가 농촌의 간고한 환경에 적응하기 힘들겠구나. 어머니는 농촌에서 살아보았기에 그런 점을 잘 알고 있단다. 하지만 어려울수록 간고분투하는 뇌봉정신을 본받아야 하느니라. 영남아, “뇌봉일기”의 77페지에는 다음과 같은 몇개 구절이 씌어져있다. 가장 곤난하고 간고한 사업을 할 때에 황계광을 생각하면 온몸에 힘이 솟구치고 투지가 억세어진다. 임무를 수행할 때 구소운을 생각하면 자기한테 엄격히 요구하게 되고 규율을 잘 지키게 된다. 향수를 받게 될 때마다 베쮼동지를 생각하기만 하면 먼저 남을 돌보고 후에 자기를 생각하게 된다. …… 영남아, 이러한 영웅들의 일기를 잘 학습하여라. 영웅들이 한 말들은 흔히 평소에 사람들한테 많은 힘을 주고 살아감에 있어서의 거울이 되고 등대로 될 때가 많으니 이를 항상 명심하거라. …… 순자는 이런 편지를 큰 아들 영남이한테만 쓴 것이 아니라 선후로 집체호에 나간 영순이, 영옥이와 영애 등 모든 자녀들에게 써보냈다. 그 당시 순자는 모든 자녀들의 “거울”이였다. 자녀들은 어머니가 하는 일은 모두 옳다고 여겼고 어머니의 말씀이라면 100%로 잘 따라주었다. 농촌에 내려간 자녀 3명은 비록 생활적으로는 아주 가난하게 보냈지만 농촌의 각종 활동에서 모범을 보였다. 큰 아들 영남이는 아버지한테서 배운 의학지식을 토대로 생산대 사원들의 병을 떼주기도 하여 “맨발의사”라며 큰 호평을 받았고 영순이도 아주 부지런하게 일한 결과 집체호에 나간지 얼마 안되어 생산대의 부녀대장과 총 보도원으로 되었다. 이렇듯 어머니인 순자한테서 남다른 교양을 받아서인지 영남이와 영순이는 물론 후에 집체로로 내려간 영옥이와 영애 또한 부지런하고도 착하고 남을 잘 도와주어 항상 사원들의 입에 올라 칭찬을 받군 했다. 그중 1973년에 연길시 흥안공사 대성촌의 집체호로 내려간 영애한테는 다음과 같은 에피소드가 있었다. 한번은 영애가 판난 신을 신고 다니는 것을 본 순자는 그 것이 가슴아파 큰 결심을 내리고 새신 한컬레를 사주면서 시내로 오거나 집에 들어올 때마다 싣으라고 했다. 헌데 후에 집으로 온 영애를 보니 여전히 그 해진 신을 신고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웬일이냐고 물었더니 영애이 입에서 나오는 소리가 다음과 같았다. “어머니, 욕하지 말아주세요. 기실 우리 생산대에 저보다도 엄청 더 가난하게 보내는 가정이 있어요. 그래서 그집에 있는 제 또래의 친구한테 그만 그 새신을 주고 말았어요. 잘못했습니다. 용서해주세요.” 순간 순자는 어이가 없었다. 큰 결심을 내리고 사준 새신을 남한테 훌쩍 줘버렸으니 그럴만도 했다. 하지만 영애를 탓할 수도 없었다. 자기 자신이 자식한테 늘 자기보다 남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자녀들한테 교양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자녀들 또한 모두 자기를 닮아 저렇게 마음이 헐하고 착한데야 어찌하랴. 한편 당시 돈이 없어 영애한테 재차 신을 사주지 못한 것으로 하여 순자는 지금까지 그 때의 일을 가슴아파하며 늘 입에 올리군 한다. 1969년의 음력설전야, 남편 김용환은 “5.7간부학교”에서 특별허가를 해주었기에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영남이와 영순이도 음력설을 쇠러 집으로 왔다. 음력설 날 아침, 순자는 돼지고기에 감자를 섞어서 볶은 채와 통채로 덥힌 두부 등을 밥상에 차려놓고 전날 줄을 서서 받아온 술도 주전자에 덥혀갖고 남편한테 내놓았다. 아내가 부어준 술을 서너잔 마시더니 남편은 급기야 낙루하는 것이었다. “내가 나쁜 놈이지 당신한테 뭐가 있다고 손을 내밀었담. 아무렴 내가 나쁜 놈이구 말구…” 그도 그럴 것이 설전날 집이라고 찾아온 영남이와 영순이가 입은 모습을 보니 남루하기가 말이 아니었다. 둘 다 판나서 솜이 삐죽히 나온 솜바지에 발가락이 보일 정도로 험하게 판난 솜신을 신고 나타났던 것이다. 억이 막힌 용환이는 말이 나가지 않았다. 자초지종을 들어보지 않았지만 그 동안 아내가 얼마나 고생했음을 알고도 남음이 있었다. 자기한테 죄가 있어서가 아니지만 그래도 자기 때문에 아내와 자식 모두가 고생한다는 것을 용환이는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겨우 참고 참았던 모든 것이 음력설 아침 술이 몇잔 들어가자 울컥 치밀어올랐던 것이다. “여보, 미안하오. 당신한테 부담만 가득 안겨준 내가 정말 당신을 볼 면목이 없구려. 아이구 내가 못난 놈이지.” “여보, 설날인데 왜 눈물을 보이는거예요. 골란은 잠시적인 것이예요. 당신은 청백한 사람이고 앞으로 꼭 모든 것이 좋아질 날이 있을거예요.” “아버지, 저희들도 아버지를 믿어요. 아버진 훌륭하고 양심있는 인민교원이예요. 저희들도 잠시 고생하는 건 모두 참을 수 있어요.” 아들 영남이와 딸 영순이와 영옥이도 아버지를 위로했다. “그래 그래 고맙다. 이 아비는 청백하다. 훌륭하지는 못하지만 당과 국가에 미안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만하자. 자, 설날인데 우리 함께 설음식을 먹자구나. 그리고 영남아, 너도 이젠 사회로 나왔으니 어른이 되었다. 자, 이 아비가 부어주는 술 한잔 받거라.” (다음기 계속)
    • 오피니언
    • 기획/연재
    2014-11-28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