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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 국가안보국이 공개한 ‘비밀문서’ 1호의 붉은 女 특공요원들
    [동포투데이] 중국 혁명전쟁 당시 공산당에 대한 충성심으로 용담호소(龙潭虎穴)에 깊숙이 침투하여 생사고난을 겪으면서도 그 은둔 전선에서 공을 거듭 기록하면서 한 공산당원의 신성한 사명을 충실히 수행했던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었다. 오늘 우리는 3명 여성 전사의 전설적인 경험을 그리워하면서 그들이 숨은 전선에서 파란만장하고도 눈부시게 찬란했던 비범한 삶을 기억하고 있다. 안아: 최초로 국민당 비밀기관에 잠입한 붉은 여 특공 요원 “랄라라 랄라라, 나는 신문 파는 꼬마 신동, 날 밝기를 기다리지 않고 신문 판다네…”, 귀에 익은 이 노래 ‘매보가(卖报歌)’는 그 작사자가 안아(安娥)이다. 그리고 ‘어광곡(渔光曲)’ ‘싸워서 고향으로 돌아가자(打回老家去)’ 등 명곡의 가사도 그녀의 손에서 나온 것이다. 이 재주 많은 여류시인, 극작가이며… 아니 중국 공산당 최초로 그녀가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침투한 붉은 여성 특파 요원일지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안아- 그녀의 원명은 장식원(张式沅)으로 1905년 중국 하북(河北) 획록(获鹿)의 한 ‘서향지가(书香之家)’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좋은 교육을 받아 사상적 진보를 추구하였으며 1925년 중국공산당에 입당하였다. 이듬해 안아는 대련(大连)으로 건너가 노동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27년 봄에는 명령에 의해 소련 모스크바 중산대학에 유학하게 되었다. 1928년, 공산당 비밀 전선의 전문기관인 중앙 특공과는 국민당의 첩보기관인 조사과에서 중요한 관계를 발전시켰고, 조사과 주 특파원(가명 양청보)은 1929년 안아가 상해로 귀국하여 중앙 특수과에 참여하게 하였으며, 공산당 조직의 지시에 따라 조사과에 들어가 비서를 맡아 정보 수집 업무를 도왔다. 안아는 공산당 역사상 최초로 국민당의 첩보기관에 잠입한 여전사이다. 안아는 첩보원의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듯, 화려한 옷을 입었을 때는 대범하고 우아한 비서 아가씨로, 투박한 장옷을 입었을 때는 소박하고 수수한 아가씨였다. 조사과 내에서 안아의 업무는 매우 효과적이었고, 당 조직에 중요한 정보를 적시에 제공해 각종 업무를 훌륭하게 수행했다. 어려서부터 고문·고시를 능란하게 익혀 문학과 음률에 관심이 많았던 안아는 다양한 작품을 창작·발표하여 예술성·전파성이 강해 당시 이름난 ‘의용군 행진곡’의 작사자였던 전한(田汉)을 비롯한 많은 재주가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고, 많은 사람들이 안아의 청초한 용모와 대범한 행동거지에 매료되기도 했다.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안아는 다시 전쟁터로 달려가 전장 기자로 활약하면서 무한, 중경, 계림 등 지를 돌며 항일 구국 사업에 종사하여 당과 국가의 사업에 기여하였고, 새중국이 창립되자 안아와 전한은 문예 사업에 투신하여 끊임없이 새로운 작품을 창작하였다. 호제방: 외국에 공식 파견된 중국 최초의 여성 외교관 호제방(胡济邦)-기자이자 외교관으로 중국 대외교류 최전선에서 활약한 그녀는 수십 년간 조용한 전장에서 꿋꿋이 버티어 온 은둔 전선의 여전사이기도 했다. 1933년 호제방은 중국공산당의 첩보 업무에 참여, 그는 자신을 소개하면서 국민당 병무 서장 변대유의 집에 가서 그의 아들에게 영어를 가르쳤고, 이 유리한 조건을 틈타 대량의 국민당 핵심 군사 기밀을 입수하여 중국 공농 홍군 중앙 소베트 구역의 반토벌 전쟁에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같은 해 여름 변대유는 그녀를 국민당 외교부 여권과에 추천하였다. 이어 당 조직이 소련행 여권 16개를 만들어 내라고 지시하자 호제방은 재빨리 움직여 여권을 손에 넣었고, 국민당 공작원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기 위해 당원의 애인으로 가장해 16개의 여권을 당 조직에 전달하는 데 성공했다. 이 일은 주은래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새중국이 창립된 후 주은래 총리는 그녀의 앞에서 “동무의 덕분에 우리 공산당은 출국할 수 있는 여권을 구했다”고 칭찬했다. 1934년 중국 공산당에 비밀리에 가입한 호제방은 1936년 남경 국민정부에 의해 국민당의 소련 주재 대사관에 파견되어 근무하다가 ‘중소문화’지의 주 소련 기자를 겸임하면서 중국 역사상 최초로 공식적으로 해외 주재 외교관이 되었다. 소련에 있는 동안 그녀는 공산당의 지시를 마음에 새기고 대중적 신분으로 중-소 문화교류에 주력하는 한편 국내 정세를 염두에 두면서 공산당에 대량의 정보를 제공하였다. 호제방은 다국어에 능통하여 스탈린, 루스벨트, 처칠, 드골, 티토 등 수많은 해외 인물들을 인터뷰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호제방은 전선에 달려나가 독·소 전장에서 유일한 중국 여성 기자가 되었다. 그녀는 총탄이 빗발치는 가운데서도 수많은 진귀한 전선 사진을 찍고, 전쟁터의 군사‧정치‧경제와 문화생활에 관한 몇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자료들은 당시 국내에서 소련의 반파시즘 전쟁을 이해하는 중요한 창구로 되기도 했다. 진수량, 공산당의 첫 대도시 여성 서기 1946년 중국 국민당 통치의 중심지였던 남경은 장개석에 의해 쇠통 같은 도시로 불렸다. 국민당은 군정 인원이 무려 11만 명, 현역 경찰이 만명에 달했고, 중국공산당 남경의 지하당은 연이어 8차례의 파괴적인 타격을 입었고, 다수의 공산당 남경시위 지도자들은 처참하게 살해당했다. 결정적인 시기에 당 조직은 지하 공작 경험이 풍부한 여성 간부 진수량(陈修良)을 남경으로 파견해 시위 서기를 맡게 했다. 같은 해 진수량은 남경 정보시스템을 건립하였고, 1948년에는 남경 지하 반첩보 시스템 만들어 두 극비시스템을 그녀가 단선으로 연결하였으며, 그녀의 주도하에 남경 지하당조직은 200여 명의 지하당원에서 2000여 명으로 급속히 발전하였다. 그들은 국민당 내부는 물론 각 업종에서 비밀리에 활동하면서 대량의 중요한 정보를 입수하여 공산당 중앙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1947년, 중국 인민해방군이 전장에서 혁혁한 승리를 거두면서 군민 사상자를 줄이기 위해 공산당 중앙에서는 국민당 군정 인사들의 봉기를 책동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이러자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 조직을 이끌고 신속하게 호응하여 국민당 폭격기 제8대대 수하 기동부대, 국민당 해군의 가장 앞선 군함 ‘중경호’ 및 남경과 장개석의 안전을 책임지는 국민당 소장 사단장 왕안청(王晏清) 등을 차례로 봉기에 가담하게 했다. 1949년 4월 20일, 중국 인민해방군의 장강 도하 전투가 막을 올렸고, 진수량은 남경 지하당을 이끌고 전면 출격하여 해방군의 도강에 협력하였으며, 4월 23일 남경이 해방되자 진수량은 우리 당 역사상 최초의 대도시 여성 공산당 서기로서의 위험천만한 호랑이굴에서의 삶을 마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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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2
  • 중국공산당은 악의 모체? 조선족간부는 악의 실천자? 황당주장
    악의 평범성이란 말이 있는데 독일 유태인 출신 미국 정치철학자가 1963년 '이스라엘 아이히만'이란 책을 출간하면 내놓은 개념인데 한 때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아이히만은 히틀러가 600만 유태인 학살 당시 나치스 친위대 장교로서 유태인을 수용소에 이송하는 임무를 담당했다. 2차 대전에 끝나자 아이히만이 아르헨티나에 망명 갔는데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체포되었고 이듬해에 재판이 열렸는데 아이히만은 이미지가 아주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 같은 모습이고 그는 재판장에서 자신은 상부의 지시에 따랐을 뿐 한 사람도 직접 죽이지 않았다. 그러므로 무죄다라고 진술했다. 재일조선족 학자가 지난해에 한국에서 '한국인이 모르는 조선족 정체성'이란칼럼을 발표했는데 "조선족간부들은 악의 평범성을 실천하는 모범생들이라고 말했고 조선족 지식인을 얼치기 중국인이라고 공격했는데 같은 조선족으로서 굳이 이렇게 까지 비하하고 공격할 필요가 있을까 이 분의 주장은 너무 항당하다.(김정룡) https://youtu.be/EMQe8mETHps?si=Wg92x3QheDi0zN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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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13
  • 조선족 어떻게 빨갱이 되었나
    빨갱이란 도대체 무슨 뜻인가를 이해하려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를 이해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고 왜 조선족이 빨갱이 되었고 또 조선족이 빨갱이 될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배경을 한국사람들이 이해하고 나아가서 조선족이 빨갱이기 때문에 차별하고 거부했던 편견을 버리고 더불어 살아가는 공동체 건설에 함께 노력하기를 원하는 입장에서 본 강의를 진행하였음. https://youtu.be/tw2fMhYOBjw?si=p8r6AiD6IsG5RkL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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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5
  • 홍범도는 한국인인가?
    앞 부분은 방송 프로그램 설명입니다. 뒤 부분은 제1편 입니다. 요즘 한국사회에서 홍범도에 대한 이념 논쟁이 심각합니다. 우선 이념논쟁은 시대역행이라는 저의 관점을 피력하고 한국법무부 정책에 따르면 홍범도는 무연고동포일 뿐 한국인이 아니라는 것을 주장했습니다. 저의 이 관점에 대해 찬반양론이 뜨거울 거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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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1
  • 중국인은 왜 만만디인가
    한중일 세 민족성격 비교 한 민족의 성격형성에 있어서 자연지리환경이 결정적인 역할한다. 중국은 황하중하류 지역은 물이 부족하고 수질이 나빠 물을 끓여 마시고 차를 타 마시는 과정이 긴데서 만만디 성격이 형성되었다. 한반도는 산이 많고 물이 좋아 과정이 생략된 민족이고 멋의 민족이다. 일본은 열악한 자연환경에서 살아남으려고 절약적이고 섬세하고 정교한 민족이며 대신 츠츠우라우라 고인물 환경에서 정을 나누지 않는 고립된 민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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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실시간 기획/연재 기사

  • 오묘한 세계대백과 (33)
    호수위로 기차가 달린다? 이런 희한한 현상을 볼까? 이는 확실히 존재하는 일이다. 중국 청해성에는 한 찰한염호가 있다. 이곳은 일찍 한 수역이 넓은 함수호었다. 후에 기후가 건조해짐에 따라 많은 물이 증기로 변하여 날아가 버렸고 호면이 갈수록 작아지다가 나중에는 염호로 변한 것이다. 이 염호의 표면에는 두꺼운 소금층이 있다. 마치 겨울의 호수에 얼음이 언 것과도 같다. 그런데 이 소금층은 얼음에 비해 훨씬 더 견고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30-50cm 두께의 소금층은 평방미터터당 1600kg의 무게를 받아낼 수 있는바 완전히 자동차와 기차가 누르는 무게를 받아낼 수 있다고 한다. 중국 청장도로의 31킬로미터의 구간이 바로 이 찰한염호위에 수건되었고 심지어 32킬로메터의 철도 역시 이 찰한염호위에 부설되어 있다. 가령 자동차와 기차가 이 찰한염호위로 오가는 정경을 보게 되면 아마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 수도 없을 것이다. 만약 찰한염호우의 도로로면 혹은 철도가 파손되었다면 어떻게 될까? 연구에 따르면 도로로면 혹은 철도 옆의 소금층에 구멍을 뚫고 호수물이 흘러나와 부단히 파손된 부분에 들어가게 하는데 수분이 증발하면 나머지 소금이 파손된 부분을 고르롭게 하게 된다고 한다. 이런 방법은 재료를 절약하고도 효과가 있는 것이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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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3
  •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문명기적 시리즈(32)
    바빌론유적의 서류 소속대륙: 아시아, 소속국가: 이라크, 지점: 바그다드 동남부의의: 바비론문화의 상징임 바빌론유적(巴比伦古城)은 세계 저명한 옛성유적과 인류문명의 발상지의 하나로 약 기원전 1800년과 기원전 600년 사이에 수건, 바빌론과 신바빌론 등 두개의 강한 왕국이 선후로 수건에 참여하였다. 기원전 539년, 페르샤인들이 바빌론성을 점령하면서 이 성은 점차 그제날의 휘황을 잃어갔다. 후에 바빌론성이 사막화가 되면서 도시주민들은 분분히 떠나갔고 사막에는 그제날 휘황했던 바빌론성만이 남았다가 사막에 묻혀버리고 말았다. 그러다가 지난 20세기 초엽에 이 “명주”는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 다시 볕을 보게 되었다. 공중화원 바빌론의 공중화원은 “현원(悬怨)”으로도 불리며 고대 세계 7대 건축기적 중의 하나이다. 기재에 따르면 이 공중화원은 신바빌론국왕 네자르 (尼撒) 2세가 그의 왕기를 위해 수건한 것이다. 전반 건물은 높이가 25메터로 제형고지의 지세에 근거하여 한층한층의 계단을 만들었으며 매층의 계단마다 모두 작은 화원으로 돼있다. 그리고 화원과 화원 사이에는 작은 집까지 있다. 전반 화원은 공중에 걸려있는듯 하다고 하여 이 화원의 이름을 “공중화원”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이다. 장엄하고도 아름다운 통천탑 통천탑은 전설이 아니라 바빌론성에 진짜 존재했던 것으로서 바빌론성의 또 다른 하나의 건축기적이다. 통천탑은 일찍 손상이 된 적이 있었으나 신바빌론왕국이 건립된 후 국왕 네브카드네자르 신(新) 바빌로니아왕 2세가 영을 내려 다시 통천탑을 재건하게 하였다. 재건된 이 통천탑은 습지에 세워졌으며 도합 7층으로 아주 신비한 장소였다. 전한는데 따르면 이 방대한 공사를 진행할 때 벽돌만 해도 5800만장이 들었다고 한다. 이로보아 당년의 통천탑의 웅위롭고 장려함을 쉽게 알 수 있다.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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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획/연재
    2015-05-13
  • [장편실화연재] 한 여인의 인생변주곡(30)
    ■ 김철균 4 열차는 네시간 달려서야 서서히 돈화역에 멈춰섰다. 연길에서 열차에 오를 때와 마찬가지로 돈화에서 내릴 때 역시 순자네 내외간은 그 무거운 짐짝들을 등 뒤에 지고 손에 들고 하면서 맨 나중에야 열차에서 내릴 수 있었다. 순자는 열차에서 내리자 바람으로 숨을 돌릴 사이도 없이 문영이부터 찾았다. 그런데 문영이가 보이지 않았다. 어제 온다던 것이 오지 않으니 오늘도 아마 오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마중 나오지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니 순자는 저도 몰래 또 눈물이 앞을 가렸다. 이 때 문영이와 한 단위에서 근무하는 시댁의 5촌 조카 창범이가 달려오면서 “아저씨, 아지미 오는 길에 고생이 많았겠소”하며 반겨주었다. 순자는 “문영이가 나오지 않았구나”하고 생각하면서도 습관적으로 사위를 둘러 보았다. 순간 개찰구 배자 옆에 흰 꽃무늬가 돋친 죠세트 적삼을 입고 하얀 머리수건을 쓴 처녀가 머리를 수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옷을 본 순자는 그가 곧바로 문영이란 것을 알아 보았다. 그 죠세트 적삼은 큰 아들과 큰 며느리가 북경에 출장갔다가 어머니한테 선물로 사다준 것을 문영이한테 준 것으로 문영이는 그 때까지도 그 적삼을 시체옷으로 나들이를 할 때마다 입군 하였다. 문영이가 마중나온 것이 분명했다. 그런데 열차에서 손님들이 거의 다 내리도록 순자네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자 실망되어 머리를 수그리고 흐느끼는 모양이었다. “문영아ㅡ” 문영이를 알아본 순자는 다급하게 달려갔다. “어머니, 마마ㅡ” 귀에 익은 부름소리에 정신이 든 문영이는 개찰구로 빠져 나오며 목이 빠지도록 어머니를 불렀다. “어머니, 왜 인제야 오세요? 전 어머니가 그리워 줄을 번 했어요.” 문영이는 순자를 끌어 안고 울다가는 다시 보고 또 보다가는 다시 끌어 안고 울음보를 터트렸다. 어찌나 서럽게 우는지 순자의 의복 앞 섶을 눈물로 흠뻑 적시었다. 전날부터 기다리다가 혹시 오늘도 오지 못하는 줄 알고 실망하여 울고 있었는데 이렇게 만나고 보니 눈물부터 앞섰던 것이다. …… 미구하여 문영의 거처에 도착한 순자는 문영의 결혼준비 상황부터 점검했다. 아니나 다를가 순자의 짐작대로 문영이는 거의 아무런 준비도 못하고 있었다. 음식을 만들 재료래야 달걀 10여 알에 달랑 시금치 한단뿐이었고 의복이래야 이전에 순자가 문영이한테 선물로 주었던 몇견지었으며 이불 또한 위생학교 기숙사 시절부터 덮어오던 색이 바랜 이불뿐이었다. 신랑켠에서 첫 날 옷, 옷장과 기타 가정기물들을 지참물로 도맡아 해온다는 한족들의 전통풍속이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정이 있는 것 같았다. 신랑측 부모들은 워낙 살림이 풍족하지 못한 형편에 한해에 자식 셋이나 결혼시키다 보니 신부의 첫 날 옷 한견지밖에 마련하지 못하였다는 것이 문영이의 해석이었다. 순자는 억이 막혔다. 자기네 내외마저 가지 않았더면 어쩌라 싶었다. 순자는 나들이 옷을 벗어 내치고는 다른 것으로 바꿔입었다. 우선 시장부터 다녀 와야 했다. 시장 또한 영감을 앞세우고 나섰다. 그래도 돈화시내의 지리엔 영감이 순자보다 더 밝았기 때문이었다. “허허, 여태껏 짐군을 시키더니 이번엔 짐군에 길 안내까지 시키는구려.” “바빠 죽을 지경인데 웃음이 나오우?” “그럼 웃지 않구 울라우?!” 영감의 익살에 순자 역시 그만 웃고 말았다. 그랬다. 힘들고 답답할 때는 그래도 영감이 뒤심도 되고 버팀목도 돼주니 순자는 그만큼 힘이 생기기도 했다. 5 이튿날은 문영의 잔치날이었다. 전날 긴 노정에 지친데다 문영의 잔치근심으로 온밤 잠을 설치다 보니 순자는 몹시 피곤했다. 눈에 핏발이 서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가 늦장을 부리면 그만큼 잔치가 어수선하기에 아침 일찍 일어나자 바람으로 팔소매를 거둬 올렸다. 한동안 지지고 볶고 하니 그래도 신랑의 첫날상과 둘러리로 올 손님들의 상에 올릴 음식 몇가지는 마련이 되었다. 미구하여 신랑과 신랑측 둘러리들이 도착했다. 순자는 검소하지만 신랑의 첫 날 상을 정성들여 차렸다. 드디어 첫 날 상에 마주 앉은 신랑은 웬간히 놀라하는 모습이었다. 문영이와 약속하기는 첫 날 상을 아예 차리지 않거나 그저 차리는 흉내만 내기로 했던 것이 생각 밖으로 음식가지수가 늘어 났으니 그럴만도 했다. “아버지, 어머니 술 드세요.” 신랑은 술을 부어서는 먼 길에서 오신 조선족 장인과 장모한테부터 권했다. “아니 신랑이 상을 받소 아니면 우리가 상을 받소?” 순자는 한 옆으로 돌아 앉으며 거절했다. “어머니가 문영이를 도와 나서지 않았더라면 오늘의 문영이가 없었을 것이고 또 그가 없다면 전 누구한테 장가를 듭니까? 그러기에 이 잔은 장인 어른과 장모님부터 받아야 한답니다.” 이렇게 말을 주고 받다 보니 푸짐한 음식 한점 없는 잔치었으나 웃음만은 차고 넘쳤다. 순자 역시 문영이가 드디어 결혼까지 하는구나고 생각하니 마음이 흐뭇했다…… 이윽고 혼례용 소형버스는 신랑 신부와 순자네 내외까지 싣고 문영네가 새 살림을 차릴 거처로 떠났다. 친정부모가 결혼하는 딸을 따라가는 법은 조선족은 물론 한족들의 풍속습관에도 없지만 문영이의 경우만은 특수하여 그런 풍속습관 같은 것은 아예 타파하기로 했다. 새집이라고 도착해 보니 신방이래야 한달에 37위안씩 세를 내고 드는 허술하고 비좁은 방이었다. 신부인 문영이는 자기가 가지고온 짐들을 풀기 시작했다. 쌀함박이며, 사발, 접시, 숟가락, 국자 등이 나오다가 다음으로 보따리를 푸니 양말과 기타 식료품들이 온돌에 쏟아져 나오면서 쌓이었다. 이불과 요를 궤짝우에 올려놓으니 그제야 방안은 광채를 띄우면서 안온한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 어머니 이 많은 물건을…” “아니다. 이 엄마 역시 남들처럼 너한테 잘해 주지 못하는 것이 속에서 내려가지 않는구나.” “어머니, 그런 말씀을 하지 마세요. 어머니가 갖고 온 물건은 남들이 해주는 몇만위안 아니 수십만위안의 물건보다 더 가치가 있고 정성이 깃든 것이예요. 어머니 전 대 만족이고 더 이상 남들이 부러울 것이 없답니다.” 문영이는 자기네 생활 구석구석을 낱낱히 헤아려 보고 정성을 다한 순자의 소행에 다시 한번 목에 메였다. 그 날 점심, 신랑신부의 단위에서는 그들의 처지를 헤아려 공동으로 돈화시내의 어느 한 식당을 선택하여 그들의 혼례식을 치러 주었다. 결혼식 장소로 가보니 양쪽 단위의 손님외 가족으로는 진짜 사람이 적었다. 신랑 켠에서는 그래도 10여명 잘되게 친척들이 왔으나 신부 측에서는 문영이의 먼 벌수가 되는 숙부 1명과 순자네 내외뿐이었다. 진짜 간소한 결혼식이었다. 결혼식 역시 많은 절차를 취소하다 보니 매우 간단하였다. 결혼식을 시작하는가 싶더니 어느 결에 신부측 가족대표가 발언할 차례가 되었다. 결혼 사회자가 “이번에는 신부측 가정대표의 말씀이 있겠습니다”라고 하자 순자는 문영의 숙부벌이 되는 손님을 건너다 보며 박수를 쳤다. 그러자 문영이가 다가 오더니 “어머니, 어머니가 말씀하세요”라고 하며 순자의 팔을 잡아 끌었다. 순자는 아니 아니 하며 주저하다가 결국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음식상에 마주 앉은 손님들이 박수갈채를 보내왔다. 하지만 첫 날 신부옷을 입고 곱게 앉아있는 문영이를 보는 순간 순자는 눈물이 앞을 가리고 목이 메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여러 분 바쁘시겠는데 이렇게 찾아와 문영이에 혼사를 축하 해주니 대단히 감사합니다. 그리고 신랑과 신부측 단위에서 일부러 이런 장소를 마련해 주었다고 하니 더욱 감사하며 신부의 친정 어머니인 저로서는 부끄러운 나머지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전 오늘 저의 딸 문영이의 결혼에 진심으로 축하를 드리는 한편 딱 한마디만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문영아, 너희들은 맡은 사업을 잘하는 것으로 이 분들의 관심에 보답해 드리고 또 앞으로 화목하게 살면서 시 부모를 잘 모시고 형제 간에 사이 좋게 지내거라. 너 화목하지 않고 부부간에 서로 다투고 싸우는 일이라도 있으면 이 어머니의 얼굴을 더럽히는 걸로 알고 있거라…” 한 쪽에서 용환 령감의 5촌조카 창범이가 한어로 통역하여 순자의 의사를 전달하자 장내는 일시에 박수소리가 요란했다. 문영이 시 어머니는 그 말을 듣고 좋아서 어쩔바를 몰라했다. 좌석이 흥성거리자 신랑의 학교 교장 선생님이 순자네 쪽으로 찾아와 술을 따르며 말을 물었다. “아니, 어머니는 딸이 없어서 한족처녀를 딸로 삼았습니까?” “아닙니다. 나한테 딸이 셋이나 있습니다.” “아니, 그럼 후일 신세를 보자고 그랬습니까? 이 집엔 돈도 없고 지도자 직위에 있는 친척도 없는데요…” “어머니가 딸을 키울 때 그 무슨 보답을 바라고 키우겠습니까? 어머니란 딸을 키워 사회에 떳떳이 나서게 하는 것이지요. 저는 다만 친 어머니가 없는 문영이한테 친 어머니다운 사랑을 주고 싶었을 뿐이었습니다.” 이 말을 들은 교장은 너무도 감동되어 연신 손수건으로 눈굽을 찍어냈다. “대단합니다. 대단합니다. 세상에 이런 조선족 어머니가 있다니 정말 우수한 어머니입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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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1
  • 中 30세 이상 여성에 둘째 출산 먼저 개방해야 (1)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최근 중국의 신화사는 “떠메지 못할 유감, 기다릴 수 없는 시간…”이란 글을 발표해 계획생육분야에서 둘째 출산허락사업을 더한층 밀고 나가야 한다고 지적하였다. 현재 중국에서 둘째의 출산에 대해 전면 개방하는 것은 근근히 시간적 문제로 남아있다. 하지만 이것이 고령부부로 놓고 말하면 정책이 늦게 출범할 수록 생육기회가 묘연해지기만 한다. 이를 두고 광동의 전국인대 대표 하우림은 “둘째 출산을 전면 개방해도 생육고조가 올 수 없다”면서 먼저 30세 이상의 여성한테 둘째 출산을 전면 개방해야 한다고 주장, “어떤 여성은 연령이 많아 이제 더 늦으면 생육을 할 수 없기에 평생의 유감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이복동생 있어 둘째 낳을 수 없어 올해 36세가 되는 아군은 5살되는 여자애의 엄마로서 둘째를 낳고 싶지만 조건이 부합되지 않았다. 원래 그녀한테는 아버지가 같고 엄마가 다른 이복 여동생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비록 여동생이라 하지만 그는 종래로 본적이 없었다. “저의 부모의 결혼생활기간에는 오직 자식이란 저밖에 없었어요. 후에 부모가 이혼했고 어머니는 저를 데리고 살면서 더는 생육하지 않았어요. 하지만 아버지는 다른 여인과 결혼하면서 상대방이 아이가 없자 저의 이붓동생을 낳았던 것이었지요. 이는 3명의 부모가 모두 계획생육정책의 조건에 부합되는 상황에서 낳은 자녀들이었어요. 하지만 현재의 둘째출산 정책은 저와 같은 사람들이 둘째를 생육하는 것을 허락자지 않거든요.” 현재 아군으로 놓고 말하면 유일한 희망은 둘째출산정책이 전면 개방될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 “시간표”조차 없는 상황이다. 국가위생계획생육위의 뜻은 아직도 몇년간을 기다리면서 단독 두번째 자녀 정책의 효과를 보아야 한다고 한다. 그러자면 아군 세대의 여성은 이제 4년만 지나도 40살이 된다. 그러면 임신성공율은 물론 건강한 어린애를 낳을 수 있겠는가 하는 것도 근심이 된다. 39명 학자 연명으로 정책조정 호소 기실 올해초에 있은 중국의 “양회”의 개막전야에 전국 21개소의 고등학교 및 과학연구기구의 39명 인구학자들이 연명으로 “둘째자녀 출산정책을 전면 개방하고 공민의 생육제한을 취소하자” 건의서를 작성해 해당 부문에 교부하였다. 건의서는 “단독 두자녀 정책의 실행 1년을 돌이켜 보면 둘째자녀 출산신청을 한 부부가 현저하게 적으므로 이 정책 역시 생육율 상승에 극히 제한을 주고 있다”고 썼다. 건의서는 또한 생육제한을 취소하면 가능하게 나타날 출생인구의 증가는 생육정책을 개변한 성과이지 모험이 아니라고 지적, 현재 새로 증가되는 인구수는 외동자녀 가정이 적어지는 것으로 가정이나 사회에 모두 좋은 일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새로운 정책에 대한 많은 부부들의 냉담한 반응은 향후 한동안 중국인구의 급증현장이 절대 없을 것이란 것을 증명한다고 지적했다. 이 건의서를 작성을 발기한 중국인민대학 인구 및 발전 연구센터의 고보창 교수는 목전 인구의 폭증기는 이미 지나가기 시작, 제6차 전국인구보편조사를 금자탑으로 중국인구는 위축되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20세 이하의 인구군이 대폭도로 감소하고 있는 것이 가장 뚜렷한 증거로 되고 있다. 집계에 따르면 현재 중국에서 0~ 14세의 인구가 2.2억명으로 근근히 전국인구의 16.6%를 차지하는 바 제5차 전국인구보편조사시기에 비해 6.29%가 하강되었다고 밝혔다. 이렇게 말하면 중국의 소년인구가 이전의 4분의 1에서 이젠 6분의 1로 되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는 아주 엄중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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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10
  • 중국 도시들의 공동 난제- 주차의 어려움(3)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현재 외국에서는 주차장이 일종 산업으로 부상해 주차장을 건설하는 것은 돈을 버는 장사에 못지 않고 있다. 하지만 중국내에서는 투자를 해도 그만큼 비율의 수입을 창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때문에 주차장 건설은 흥성할 수가 없게 되고 있다. 2006년 광주시에서는 단기간의 건설계획(2006-2010년)에 관한 중대사항을 시인대에서 심의, 2010년까지 해마다 5개씩, 25개의 공공주차장을 더 건설하여 전 시내에 도합 5290개의 주차자리를 더 늘이기로 하였다. 하지만 2006년에 5개 곳을 선정한 후 그 이듬해부터 더는 공공주차장의 지점과 건설에 대한 해당 정보가 없었으며 그 5개의 공공주차장 역시 건설한다고 선정만 해놓고 아직까지 착공하지도 않고 있는 상황이다. “주차장을 건설하자면 원가가 많이 들고 수익효과가 낮기에 주차장건설에 적극성이 없는 것이다. 새로 건설되는 주차장이 없으니 주차의 어려움은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이는 북경시 인대대표이며 시 교통발전연구센터의 곽계부의 지적이다. 지난 정월 초닷새날, 이 날은 북경시민 반선생한테 있어서 잊을 수 없는 날이었다. 이 날 그는 자가용을 몰고 동4환의 한 상가를 찾아 물건을 사려하다가 상가가 있는 거리 입구에서 차가 막혀 한 시간 이상 기다려서야 겨우 물건을 살 수가 있었다. 이에 “그 상가를 다시 찾아가도 자가용을 몰 것인가?” 라는 물음에 반선생은 쓴 웃음을 지으며 “그래도 차를 몰고 가는 것이 낫다”면서 물건을 사면 주차비를 감면받을 수 있다고 했다. 북경시 교통발전연구센터 주임 곽계부에 따르면 현재 북경시의 많은 시민들은 집문만 나서면 크고 작은 일에도 자가용을 몰고 가는 습관이 있는바 중요한 원인은 그래도 자가용을 몰고 나가면 돈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북경시 교통발전연구센터의 조사데이터에 따르면 2005년 북경시 시민들의 73%가 자가용을 몰고 나가도 주차비를 물지 않았고 2010년에는 무료주차 비율이 86%에까지 달했다고 한다. 현재 중국 도시들의 상황을 보면 상가에 가서 물건을 사거나 식당에서 식사를 하면 무료주차가 가능하다. 하지만 이는 상가거나 식당의 주인이 마음이 고와서라기보다는 고객을 끌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며 아울러 이런 상가의 물건과 식당의 료리는 보편적으로 값이 바싸기 마련이었다. 주차를 무료로 하는가 아니면 수금해야 하는가? 이를 놓고 절대 대부분 사람들이 무료주차를 희망한다. 하지만 조사연구에 따르면 진정한 무료주차는 존재하지 않았거니와 존재할 수가 없었다. 한편 어떤 사람들은 주차수금료가 비싸면 돈이 많은 사람한테만 편리를 주게 된다면서 질의를 표한다. 이는 일정 정도에서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 하지만 이는 “돈많은 사람은 5성급 호텔에서 식사하고 돈이 적은 사람은 길가의 음식점에서 식사하며, 돈 많은 사람은 별장에서 살고 돈이 적은 사람은 셋집에서 산다”는 이론과 마찬가지로 주차문제 역시 절대적 공정이란 있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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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9
  • 충격! 70여만종의 약 최저가 공장가격의 5~6배?(4)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현재 중국에서 외지에서의 진료비결재에 대한 문제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상황으로 호북성에서는 이미 전 성내적으로 외지진료비 결재가 실행되고 있으며 이는 현재 전국적으로도 점차 해결하고 있는 단계에 들어서고 있다. 외지진료에 대한 결재란 바로 B지역의 환자가 A지역에서 진료를 받은 뒤 그 지역에서 결재를 받는 것을 가르킨다. 이는 전자화를 통해 진료비가 결재되는 것으로 여러 방면으로 환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좋은 현상으로 봐야 할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각 지역마다에 따르는 정책차이와 가격의 차이가 존재하는 문제도 생길 수밖에 없다. 북경사람인 장전진은 사업관계로 외지에 체류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난해 말, 그는 외지에 있는 사업지에서 2차례에 달하는 수술을 하면서 도합 4.6만위안의 자기의 돈을 먼저 쓰게 되었다. 그 뒤 그는 체류지의 의료보험부문으로부터 근근히 1.8만위안만 결제받게 되었다. 이는 지불된 치료비의 40%밖에 되지 않았다. 처음에 그는 아무리 생각해도 달통되지 않았다. 정맥주사, 대소변 화험 등 일련의 가장 기본적인 의료비용이 결제범위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후에 그는 북경시 사회보험국을 통해 북경시의 진료검사비가 전국에서 비교적 낮은 편이었다. 요해에 따르면 지난해 전국의 많은 지역들에서 진료비수금표준을 조정, 북경시가 가장 낮은 편이었다. 때문에 외지의 진료수금비가 북경보다 높은 현상이 산생, 적어서는 수십위안의 차이가 나고 많게는 수백위안에 달하기도 한다. 당시 장전진이 외지에서 10여 일 간 입원해 있으면서 2차례의 수술을 받았는데 6장의 결제명세서가 나왔다. 당시 그의 결제명세서를 보면 보편적으로 자비부담 부분이 북경의 표준을 크게 초과하고 있었다. 이 외 이런 외지에서의 의료보험은 치료지역과 의료보험 참가지역의 목록범위가 일치하지 못한 폐단이 존재한다. 즉 의료보험지역에서 결제목록에 넣은 약이 치료지역에서는 결제목록에 들어가지 못하는 폐단으로서 많은 약들이 자비목록에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다음으로 지적되고 있는 것은 당지인과 외지인에 대한 의료부문의 정책이다. 예하면 병을 보일 때 당지인은 먼저 의료보험카드를 내놓으면 치료가 가능하나 외지의 환자는 당지의 의료보험 카드가 없기에 먼저 자기의 돈을 지불하고 치료를 받은 뒤 나중에 결제받도록 되어 있다. 병원들에서는 이런 환자를 “현금환자”라고 부른다. 현재 의료보험부문들에서는 대부분 병원에 대한 의료보험 비용액의 정액관리를 하는 동시에 자비비율에 대한 제한관리를 하고 있다. 하지만 외지의 의료보험인원 및 공비의료인원은 병원의 의료보험정액지표를 점하지 않기에 흔히 외지 의료기구들의 “환영”을 가장 받고 있고 있는 상황이다. 왜냐하면 이런 외지환자들의 자비치료비율이 크게 높기 때문이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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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6
  • [기획]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2)
    ■김철균 이틑날 필자는 아들과 함께 서울시 금천구 시흥대로 147-1에 있는 동포투데이 신문사 사무실을 찾았다. 아들과 동행한 것은 서울의 교통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이었다. 우리가 도착하자 GK희망공동체 허을진 이사장님과 동포투데이 정경화 대표님이 반겨 맞아 주었다. 우리는 1년이 넘도록 교류하면서 사진을 통해 상대방의 얼굴을 익숙히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무릎을 마주해 보기는 진짜 처음이었다. 두 분은 친절하고도 노력하는 분들이었다. 특히 GK 허을진 이사장은 10여년 전부터 중국조선족 대모임인 GK희망공동체를 운영해 왔고 현재는 동포투데이 대표이며 아내인 정경화 여사와 함께 이 인터넷신문의 편집과 디자인을 담당하고 있었다. 한국에 진출한 중국조선족 중 언론방면에서는 기틀을 잡아가는 신문/간행물이라는 느낌이었다. 현재 (사) GK희망공동체는 수 천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으며 허을진 이사장이 정경화 여사와 함께 운영하는 동포투데이는 2011년 10월 2일 준비판을 낸 뒤 10월 24일 정식으로 개통된 종합성 뉴스 사이트로서 재외동포, 국제뉴스와 동북아 정세에 초점을 맞추면서 자율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네트워크 방식에 의해 운영되는 인터넷 언론사였다. 동포투데이는 한국 현지와 중국 등지에 특파기구를 두고 운영되고 있었으며 자체 기사가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언론사이기도 했다. 이 날 필자와 허을진 이사장 내외는 우리 한인언론인들의 사명을 두고 많은 교류를 가지었다. 물론 처음 만나는 장소라 술이 없을 수 없었고 애주가라고는 할 수 없어도 무척 술을 즐기는 필자가 어느 정도 더 마시기 마련이었다. 동포투데이 사무실에서 나온 필자는 아들과 함께 재차 아들이 운영하는 사무실로 갔다. 아들한테 급히 처리할 사항이 있어서였다. 헌데 필자가 문제었던 것이다. 아들은 사무실을 떠나면서 자기가 올 때까지 잠이나 자면서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헌데 한잠을 자고 나자 무료하기 그지 없었다. 여느 젊은이들과 마찬가지로 필자의 아들도 방에 전화를 설치하지 않은지라 아들이 언제 돌아오느냐고 물을 수도 없었다. 어디에 문의하려 해도 이 날(27일)은 마침 일요일이라 빌딩 10층내의 사무실들은 모두 문이 잠겨져 있었다. 한편 여느 젊은 이들과는 다르게 바삐 보내는 아들한테 이 아버지로서 짐이 되는 것이 미안했다. 아들은 밤 8시경에 돌아왔다. 아들은 아버지한테 “감옥생활”을 시켜 미안하다면서 도리어 사과했다. 뒤이어 나와 아들은 택시에 앉아 서울시 강동구 천호동에 있는 한 양고기꼬치영업집으로 갔다. 아들의 집이 그 근처에 있기 때문이었다. 아들은 휴대폰으로 4~5명의 친구들을 더 불러들였다. 이 중 3명은 한국의 젊은이들이었으며 모두 아들의 수하에서 업무를 하는 친구들이었다. 이들은 한결같이 필자한테 “아버님, 아버님” 하며 깍듯이 대했다. 한국 젊은이들의 예의에 대해 잘 알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 날 아들은 휴대폰 한 대를 얻어와 필자한테 주는 것이었다. 휴대폰이 생기자 필자는 “자유의 몸”으로 되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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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3
  • [기획] 코리아와 함께 숨쉬는 사람들 (1)
    ■ 김철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라랑 고개를 넘어간다 … 이는 우리 민족의 얼이 담긴 세계적인 명곡이다, 또한 사상과 이념을 떠나 8000 우리 민족이 가장 즐겨 부르는 노래이기도 하다. 2015년 4월 25일, 필자를 싣고 중국 연길공항을 이륙한 아시아나 z352 항공편은 요녕반도의 대련쪽까지 날다가 다시 기수를 황해(서해)로 돌리었다. 필자가 한국행을 하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 아니다. 지난 세기 90연대 초, 마도로스로 한국 선일해운의 송출선을 타고 선후로 부산, 울산, 인천에 상륙하여 ˝아시아의 4마리 용˚중의 하나였던 한국의 모습을 구경하기도 했었다. 그러니 이번의 한국방문은 20여년만에 다시 찾게 된 코리아이기도 했다. 한국속의 조선족 인천공항에서 내리자 공항의 규모에 재차 놀랐다. 공항규모가 무지무지 하게 컸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깨끗했으며 공항직원들은 한결같이 친절했다. 동행을 했던 연변일보 논설부 박정일 부장도 동감이었다. 우리는 공항버스에 올라 서울로 향했다. 경인고속도로를 따라 서울로 오는 동안 화창한 봄속에서 약동하는 한국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인천으로부터 서울로 들어가는 버스에 올라 보는지라 모든 것이 신기하기만 했다. 한강다리를 건너면서 63빌딩을 볼 수 있었고 이어 한국 KBS방송국의 본관건물, 서울역 및 서울시청 등 낯익은 건물들이 눈에 띄었다. 우리가 내린 곳은 명동이었다. 명동에서 내리자 박정일씨의 4촌형이란 분이 마중을 나와있었다. 명동은 서울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곳이었다. 특히 아까 명동에서 내릴 때 많은 중국인 여행객들이 내리었고 명동 골목에 들어서니 사처로부터 귀에 익은 중국말들이 들이었다. 화장품 가게를 찾는 사람들과 “싸구려¨를 부르는 목소리 중 자주 중국말들이 들리어 인상적이었다. 이어 우리가 도착한 곳은 박정일씨의 4촌 형이 운영하는 부대찌개집 “송탄¨이었다. 한국의 연예인인 강호동씨가 추천한다는 식당이었으며 명동에서도 중심에 위치해있었다. “송탄¨에 들어서자 몇개의 상에 둘러앉아 식사를 하는 손님들이 보이었는데 박정일씨의 4촌 형에 따르면 이 날은 일요일이기에 손님이 적으며 평소에는 손님들이 꽉 찬다는 것이었다. 또한 줄을 서서 남들의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부대찌개집 “송탄¨에서 한참 있을라니 서울에서 생활한다는 박정일씨의 친구 4명이 선후로 들이닥치었다. 우리는 술을 마시며 삼겹살을 구워먹기 시작하였다. 서울에서 고향분들을 만나 함께 술을 마시니 감개가 무량했다. 한참 뒤 서울에서 사업하는 나의 아들이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나의 아들은 서울에서 액세서리 장사를 하고 있었고 며느리는 화장품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박정일씨의 친구들은 나의 아들을 반겨맞아 주었다. … 식사가 끝나자 우리는 서로 갈라지었다. 박정일씨는 자기의 친구들과 함께 다른 곳 으로 향했고 나는 아들과 함께 아들이 차린 사무실을 구경하기로 하였다. 아들이 차린 사무실은 서울 남대문 근처에 있는 삼신빌딩 10층에 있는 10호였다. 그러니 1010호인 셈이었다. 아들한테 절로 감탄이 갔다. 나의 아들은 올해 33살이다. 사실 아들은 공부를 많이 못했었다. 17살에 사회를 나와 를 나와 여러번 사고를 쳐 나로 하여금 무척 속을 썩이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20살 좌우부터 셈이 들자 더는 나로 하여금 속타게 하는 일이 없었다. 절강 의오에서 힘든 한국회사생활을 견디어 냈으며 몇년 전부터 한국에 진출해서는 스스로자아창업에 나섰던 것이다. 이런 아들이 있음으로 하여 나는 몰래 자호감이 생겼다. 하지만 아들은 첫시작에 불과했다. 명동에서 생활하는 박정일씨의 4촌 형을 비롯해 한국에는 사업에서 성공한 조선족이 많았다. 특히 서울에는 성공한 조선족들이 많다고 했다. (다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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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1
  • 중국도시들의 공동난제 주차의 어려움(2)
    [동포투데이 김철균 기자] 북경시 5환구역의 모 소구역에 살고 있는 진모는 지난 음력설 전야에 소구역 개발상으로부터 전화 한통을 받게 되었다. 즉 자동차 주차자리를 사야 하는데 필요한 수속을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그가 자동차 주차자리값 15만원을 낸지 3개월이 지나서였다. 자동차 주차자리를 사야 하는가 사지 말아야 하는가를 두고 진모는 큰 고민을 하였다. 기실 그가 이 소구역에 입주한 뒤 5년이 되는 기간 이 소구역에 있는 지하주차장은 임대를 주었지 팔지는 않았었다. 그 임대비는 연간 3120위안으로 매달 260위안씩 내면 되었다. 하지만 주차자리를 사면 50년간 이 주차자리가 자신의 것으로 되는 한편 거기에 매달 물업비 120위안에 370위안의 관리비까지 내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것 때문에 소구역의 많은 사람들은 자동차를 길옆에 세울지언정 지하주차장 자리를 사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진모는 자동차 주차자리가 있으면 많이 편리한데다 또한 50년간의 재산권증을 가지기에 이를 악물고 이 주차자리 하나를 샀다. 한편 자동차 주차자리의 재산권증을 놓고 시민들은 반신반의하고 있다. 정주시 주차장관리센터의 부주임 장손에 따르면 정주시 많은 소구역에서도 자동자 주차자리를 “판매”하고 있으며 업주는 1차적으로 많은 돈을 바치고 있다. 하지만 영수증이 없다는 것이다. 이러면 앞으로 분규가 생겨 해결하려고 해도 의거가 없으며 주차장 자리를 산 시민들이 손해를 볼 가능성이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 소구역의 자동차 주차자리권은 도대체 누구한테 속하는 것인가? 물권법 제74조에는 건축구역내에 있는 자동차 주차자리 혹은 차고는 우선 입주자의 수요를 만족시켜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하다면 건축구역내의 주차자리 혹은 차고는 당사인 입주자들과 협의한 후 판매 혹은 임대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또한 입주자들 공유로 된 길 혹은 기타 장소에 자동차 주차자리를 만든다면 이는 입주자들의 공유로 되는 것이다. 하지만 법률종목에는 이것이 분명하지 못하다. 현재 이로 인한 분규가 거의 모든 소구역마다 생기고 있는 상황이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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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21
  • 【장편실화연재】한 여인의 인생변주곡(29)
    ■ 김철균 문영이를 졸업시켜 돈화에 보냈지만 순자는 여전히 시름을 놓지 못하였다. 조선족가풍으로 보아 자식이 학교를 졸업했다고 하여 결코 이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일자리를 구해야 하고 또 앞으로 결혼도 해야 하며 이 모든 것에 이르기까지 부모의 도움이 필요할 때가 많은 법이었다. 워낙 문영이가 연변위생학교를 졸업하자 순자는 그 애더러 연길에 남게 하고 싶었었다. 그 사이에 문영의 친 아버지도 사망했기에 문영이가 구태어 꼭 돈화로 가야 한다는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생각같아서는 문영이한테 연길의 직장을 찾아주고 그가 결혼하기 전까지 자기의 곁에 두고 싶은 것이 순자의 마음이었다. 그러다가 장차 연길에서 결혼상대자를 찾아 혼인을 이루게 하고 싶기도 했다. 헌데 그것이 뜻대로 돼주지 않았다. 문영의 직업문제는 오래도록 풀리지 않았다. 화전의 정수금, 장춘의 중경림과 훈춘의 장려 등 애들한테서는 선후로 좋은 직업을 찾았다는 희소식이 날아 왔으나 유독 문영의 일만이 풀리지 않는 것이 몹시 안타까웠다. 순자는 집의 영감과 아들네 내외, 심지어 딸네 내외들까지 집안에서 좀 활동력이라도 있다는 성원들을 몽땅 동원하여 문영의 직업을 위해 힘쓰도록 달구쳤다. 하지만 문영이가 대학본과 졸업이 아니고 대학전과생이어서인지 아니면 단위들마다 여성직원은 결혼하고 애를 낳으면 가정부담이 많아 단위일에 영향이 많다고 그 채용을 꺼려해서인지 아무리 애를 써봤어도 풀리지 않았다. 또한 맡은바 업무에서는 뛰어난 성적을 올리며 능력자로 소문났으나 인사배치 등 “외교활동”에 들어서는 제로에 가까운 용환영감이였고 또한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라고 큰 아들 영남이와 둘째 아들 경남이도 성미가 곧은 아버지를 닮아서인지 마찬가지었다. 이렇게 순자가 한창 문영의 직업 때문에 안달아할 때 마침 그가 돈화시 화교풍습전과병원에 배치받았다는 기별이 왔다. 문영이가 공영병원에 배치받았다는 기별을 받았지만 여전히 만족해하지 않은 순자였다. 알고 보니 순자가 진정으로 바라는 것은 문영이의 직업보다는 그 애를 자기의 곁에 두고 싶어하는 바로 그 것이었다. 한편 순자의 친자식들은 물론 친척들과 외부의 사람들마저 “문영이한테 그만큼 잘해 줬으면 이젠 시름을 놓으라”면서 “남의 자식이란 잘해줄 때뿐이지 때가 지나면 소용이 없다. 하물며 그 애는 한족이 아닌가”고들 하였다. 하지만 남의 자식이래서 다 그런 것이 아니었고 한족이래서 다 그런 것이 아니었으며 문영이는 더욱 그런 애가 아니었다. 순자는 그 점만은 굳게 믿고 있는 터였다. 순자의 환갑날 술을 붓는 문영이 1989년 10월, 순자네 내외가 환갑을 쇠게 되었다. 당시 순자네 내외는 보다 조용히 쇠려고 일부러 문영이와 정수금, 중경림과 장려 등 한족자녀들한테 알리지 않았다. 그런데 불현듯 문영이가 찾아왔고 기타 한족자식들도 약속이라도 한듯 줄을 쳐 찾아왔다. 알고 본즉 문영이는 진작 이전부터 순자네 내외의 생신날자를 알고 있었고 또 여러모로 탐문 끝에 10월에 환갑을 쇤다는 것도 알고 있었던 터였으며 또 이를 정수금 등 각지에 널려 있는 한족자식들한테 알렸던 것이었다. 순자네 내외의 환갑파티날, 순자의 친 자식들 외 6명의 한족자식이 참가하였고 또 그들이 술을 붓고 순자네 내외한테 조선족식으로 절을 하는 장면이 연출되자 장내에서는 우렁찬 박수소리가 터졌다. 순자의 환갑파티에서 문영이는 또한 조선말로 “오래오래 앉으세요”를 불렀다. 오늘은 온집안에 기쁨이 넘치는 날/ 어머니를 높이 모신 환갑날이랍니다// 아, 어머니 오래오래 앉으세요…… 한족딸 문영이가 부르는 노래는 재차 장내의 모든 사람들을 감동으로 설레이게 했다. 그만큼 문영이의 가슴속에서 우러 나오는 노래소리는 조선족어머니 김순자에 대한 고마움과 감격과 더불어 사랑에 넘친 진실한 것이었다. 순자의 환갑잔치날은 문영이한테 아주 깊은 인상을 남겼다. 아무리 조선족이 친절하고 문명하며 가정이 화목하다지만 순자네같은 가정은 실로 처음 보는듯 싶었다. 순자네 내외간은 물론 아들 며느리와 딸 사위들 사이 그리고 지어는 여러 사돈들과의 사이도 그러했으며 또한 타민족인 자기들마저 가족으로 대해주면서 깊은 사랑을 몰붓는 조선족의 미풍양속은 그야말로 한족인 문영이의 가슴속에 많고 많은 스토리거리를 심어주었다. 그러한 것이 계기로 되었을까? 훗날 문영이는 직업은 의료일군이었지만 작가공부를 하고 싶었다. 자기에 대한 순자와 그 가족의 사랑을 그대로 세상만방에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문영이한테 원래 천부적인 문학재질이 있어서일까 아니면 그녀 스스로 꾸준히 노력한 결과라 할까? 또 그것도 아니라면 그녀가 살아온 인생발자취 즉 한명의 불우소녀 – 연변위생학교 - “북해상점”과 조선족 김순자어머니- 이렇게 엮어진 스토리가 문영이로 하여금 작가로 되는 바탕으로 되였을까? 미구하여 문영이는 길림성작가협회의 일원으로 되었으며 성급과 주급은 물론 국가급의 간해물에도 많은 시, 수필, 산문과 실화 등 작품을 발표했다. 그 중에는 당연히 그녀의 조선족어머니 순자를 언급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2 마침내 문영이는 돈화시실험중학교의 남성교원 심엽군과 백년가약을 맺고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결혼날자는 1990년 5월 6일로 잡혀졌다. 인생에 있어서의 가장 큰 대사인 결혼식 – 문영이는 결혼날자를 정하자마자 이 소식을 우선 연길에 있는 조선족어머니 김순자한테 알리고 싶었다. 헌데 그녀는 이 소식을 결혼식을 치르기 10여일 전에야 연길에 전했다. 너무 일찍 알리면 순자한테 더 많은 부담을 줄가봐서였다. 그러나 문영의 생각은 필경 짧았다. 늦게 알린 것이 오히려 순자로 하여금 더욱 힘들게 할줄은 문영이 자신도 미처 몰랐던 것이었다. 다른 사람도 아닌 순자로서는 자기를 너무 초라하게 시집보내지 않는다는 것을 미처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었다. 문영이의 결혼식은 5월 6일, 앞으로 얼마 남지 않았다. 어떻게 할 것인가? 아무리 뭐고 뭐고 해도 시집가는 딸한테 첫날 이부자리만은 꼭 해보내야 조선족의 예의범절에 어긋나지 않는다는 것이 그 때 순자의 주장이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연길시의 시장경제가 발전초기에 있었는지라 지금처럼 각종 물건이 포화상태에 이를 정도로 잔뜩 쌓아놓고 판매하는 상황이 아니었다. 마음에 드는 물건을 사자면 적지 않은 신경을 쓰며 여러 곳을 돌아야 살 수 있던 그런 시기었다. 순자는 큰 딸 영순이와 함께 연길시의 많은 백화점들을 반나절 돌아서야 겨우 맘에 드는 이불등, 이불안과 요감을 살 수 있었다. 하지만 이불감과 요감을 샀다고 하여 일이 그대로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남들은 문영이가 순자 본인이 낳은 딸도 아니고 거기에 한족이기에 대충 이불을 해서 보내라고 권장했다. 즉 남들의 흉내나 내며 낯가림을 하라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사람들은 순자를 생각해서 하는 권장이었지만 순자는 그런 사람들의 권장대로 할 수 없었다. 꼭 이불안을 적셔 풀을 하고 그것을 해볕에 바래운 후 한뜸 한뜸 정성들여 만들어 시집가는 문영이한테 주고 싶었다. 반대로 대충하거나 친 딸들에 비해 조금이라도 차별이 되게 해준다면 조선족민속에 어긋나거니와 자기 또한 문영이의 어머니로 될 자격이 없다고 여겼다. 순자의 주견은 그 누구도 말리지 못했다. 남편과 자식들은 오직 동조하는 길밖에 없었다. 헌데 이불안을 물에 적셔 풀을 한 뒤 볕에 바래우자고 보니 구름이 무겁게 드리운 하늘은 연며칠 구질구질 비만 내렸다. 여느해 같으면 비가 적을 계절이건만 그 해의 4월말은 비가 너무도 많이 내리는 것 같았다. 비가 적당히 내려야 모든 것이 좋기 마련이다. 특히 파종을 앞둔 농민들을 놓고 보면 너무 가물어도 걱정이고 비가 너무 내려도 파종하기 힘들게 된다. 순자도 이젠 비가 그쳐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비가 그쳐야 이불안을 볕에 바래울 수 있기 때문이었다. 2-3일만이라도 비가 그쳐 주었으면 얼마나 좋으랴 싶었다. 순자의 속은 재가 들어차는 것만 같았다. 신을 믿지 않는 순자였건만 하늘에 대고 기도를 드렸다. 유정하고 자비하신 하느님, 저의 딸 문영이가 이 어미가 만들어 주는 하얗고 깨끗한 이부자리를 갖고 기뻐하며 시집갈 수 있도록 요즘 며칠만은 비가 내리지 않게 해주옵소서ㅡ … 순자의 정성이 하느님을 감동시켰는지 아니면 비가 그칠 때가 되어서인지 마침내 그 이튿날로 비가 멎고 하늘이 맑게 개였다. 순자는 이 때라 하고 서둘렀다. 당시 순자네 집마당에는 빨랫줄이 있었지만 이불안같은 큰 것은 널어 말릴 수가 없었다. 마당면적이 하도 작다 보니 빨래줄을 길게 늘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담 넘어 옆집 마당에 있는 빨랫줄을 이용해야 했다. 헌데 낮에는 옆 집에서 앞마당 배자문을 잠그기에 순자는 부득불 사다리를 이용하여 높이 1.5미터나 되는 벽돌담장을 넘나 들어야 했다. 순자는 하루에도 그 벽돌담장을 넘나 들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땅에 살짝 내려 선다는 것이 그만 발을 빗디디면서 발목을 접질렀다. 순자의 발목은 삽시에 퉁퉁 부어났다. 그날 저녁 퇴근해온 남편한테서 침을 맞았으나 인차 낫지는 않았다. 순자는 이튿날도 절뚝거리며 그 담장을 넘나 들여야 했다. 이렇게 몇번씩 해볕을 받아 이불안이 새하얗게 되자 순자는 또 그것을 개여서 방치돌우에 놓고 토닥토닥 두드려 구김살 하나 생기지 않게 하였다. 이를 보고 영순이를 비롯한 딸들은 “어머니가 한족딸한테 푹 빠져 버렸다”고 악의없는 농담을 하면서도 어머니의 일을 도와나섰다. 3 문영이의 첫날 이부자리는 결혼날자 4일을 앞두고 결국 완성되었다. 그 때까지도 결혼할 때 조선족 여인들이 만들어 가는 이부자리는 그 크기가 한족들이 만드는 이부자리에 비해 거의 배가 되었다. 그 이부자리를 각이 날 정도로 잘 개어서 궤짝위에 올려 놓으니 집안이 화려해지는 것만 같았다. 순자는 친딸 셋씩이나 시집보내면서도 이번처럼 정성을 쏟은 적은 없었다. 친딸들한테는 그야말로 남들이 하는 흉내나 낼 정도에 그쳤으나 문영이한테는 모든 성의를 아끼지 않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이렇게 이부자리를 만드는 것도 마직막이라는 뜻도 있었지만 그 이상의 많은 다른 뜻도 깃들어 있었다. 문영의 이부자리를 만드느라고 순자는 손발이 퉁퉁 부었지만 쉴 수가 없었다. 문영이가 잔치를 한 뒤 인차 집을 잡고 살림을 해야 하겠으니 달랑 이불만을 들고 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또 딸들을 동원하여 연길시 거리를 돌기 시작했다. 이불안을 널에 해볕에 바래우려 할 때는 연며칠 비가 내리더니 이번에는 연며칠이 되는 무더위가 찾아왔다. 5월초부터 한여름이 시작된 모양이었다. 더운 날에 무거운 짐을 들고 몇차례씩 백화점과 집을 오가게 되자 둘째딸 영옥이와 셋째딸 영애까지도 “우리가 시집갈 때는 비비면 찢어질 것 같은 천으로 이불을 해주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더니 한족딸이 시집간다고 하니 기둥뿌리가 빠지는 줄도 모른다”면서 악의없는 농작을 걸어왔다. 그럴 때마다 순자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어머니를 도와 모든 힘든 일에 발벗고 나서주는 딸들의 소행이 그저 고맙기만 했다. 기실 아무리 딸자식들이었지만 모두 시집을 갔기에 그들을 마구 부려 먹는다는 것도 순자의 마음에는 썩 내려가는 일이 아니었다. 결혼식날자 이틀을 앞두고 순자와 영감이 그 동안 준비한 모든 봇따리를 챙겨갖고 돈화로 떠나게 되었다. 당시만 해도 돈화로 가자면 열차편과 하루에 한번씩 오가는 버스를 이용해야 했다. 처음에 갖고 갈 짐이 많았던 순자네 내외는 집으로부터 버스부가 가까운 거리에 있기에 버스를 타고 떠나기로 하였다. 헌데 공교롭게도 그들 내외가 짐을 챙겨갖고 연길 버스부에 거의 도착할 무렵 돈화행 버스가 경적을 울리며 훌쩍 떠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를 어쩌나? 미리 끊어놓은 버스표값도 아깝지만 돈화에서 기다릴 문영이를 생각하니 순자는 절로 눈물이 쏟아졌다. 그렇다고 이러한 사정을 돈화에 알릴 수도 없었다. 그들 내외는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집으로 돌아오는 수밖에 없었다. 순자는 집에 들어서자 바람으로 털썩 주저 앉으며 또 낙루했다. 그 이튿날 순자와 영감은 열차편을 선택했다. 순자네는 짐이 네짝이나 되다 보니 맨 나중에야 열차에 오를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날따라 웬 여객이 그다지도 많은지 바곤안에 사람이 빼곡히 들어선지라 자리가 있을리 만무했다. “웬 짐이 이리도 무겁소?!” 영감이 투덜댔다. “별거 아니우다. 그저 살림에 쓸 그릇들인데 별로 값진 것도 아닌데 무겁기만 하우다.” “아니, 돈화에 살림도구를 파는 상점이 없을가봐 연길 한 끝에서 사서 들고 간다우?!” “아따 영감두, 지난번 내가 시조카 잔치 때 가봤는데 거기 그릇들은 색갈이 어둡고 진하여 별로 밥맛마저 떨어지는 것 같더라니까. 그래서…” “…?!” 영감은 어이가 없다는듯이 열차의 천정을 쳐다보며 입만 벌리고 말았다. “아무런 그릇에나 밥을 먹으면 되는건데 여자들 마음이란 참…” 자기의 비위에 거슬리면 제법 큰소리를 치다가도 마누라의 말에 일리가 있다는 생각만 들면 인차 주죽이 들어 투항을 선고하는 영감이었다. 빼곡히 들어선 여객들속에 서있자니 무척 힘들었다. 거기에 몹시 무덥기까지 했다. 힘들긴 자신도 마찬가지었으나 용환영감은 마누라가 가여워 보였다. 의지가지 없는 자기와 결혼하여 6남매나 낳아 키우느라고 고생한 것도 모자라 한족딸까지 삼아 결혼시키며 고생을 찾아하는 마누라를 보며 영감도 눈언저리가 뜨거워나는 모양이었다. “당신이란 참 못말릴 사람이구려!” 열차가 안도역에 도착해서야 그들 내외는 겨우 자리에 앉을 수 있었다. 그것도 어떤 고마운 젊은이들이 그들 내외한테 자리를 양보해서야 앉게 되었다. 차창옆에 앉으니 제법 시원한 차바람이 들어와 잔등까지 푹 젖었던 땀을 들이기가 제격이었다. (다음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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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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