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0(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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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화 속 장면, 미녀와 야수 함께 ‘충격’
    최근 러시아의 인터넷 매체에 재미있는 사진이 올라와 화제다. 소녀와 숲속의 야수가 함께 찍은 사진인데, 온순한 야수가 다정하게 소녀의 곁에서 함께해 충격적인 장면을 이루고 있다. 신비한 화면 속 소녀의 평온한 모습이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감동을 일으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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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2
  • 희망은 발밑에 있다
    ■ 차영란 (중국조선족대모임 응모작품) 얼마나 잤는지 나는 습관적으로 손을 더듬어서 핸드폰을 잡는다. 눈을 비비고 시간을 보니 벌써 10시가 다 되어 갔다. 이불을 젖히고 누르끄레한 광선이 들어오는 창문을 내다 보았다. 4월의 해빛은 그렇게 찬란하지만 반지하실을 들어오는 광선은 누르끄레하여 대낮이여도 전등빛을 빌지 않으면 안된다. 주방문을 열어 놓으면 그나마 밝은 빛을 볼수 있으련만 옆집 할머니와 공동으로 전기요금을 부담하기에 사람이 하나라도 늘면 전기요금때문에 분쟁이 생긴다고 한다. 엉거주춤 일어나 전등을 켠다. 밝은 전등불이 삽시간에 어둠을 몰아간다. 나는 불시에 옆에 포개져 있는 신문을 쥐고 방바닥을 탁-하고 내리쳤다. 신문지를 들고 보니 바퀴벌레 한마리가 뻐드러져 있다. 요놈이 하루밤에 고손까지 본다더니 또 얼마나 새끼를 쳤을까 하는 생각에 온몸이 오싹해난다. 이윽고 익숙한 솜씨로 신문지 한모퉁이를 대고 쓸어 쓰레기 통에 넣고는 씁쓸한 생각에 입을 쩝쩝 다셔본다. 축축한 반지하방이 바퀴들의 활무대였고, 그들과 한 공간에서 숨쉬는것이 어지간이 습관이 되어가고 있는 자신을 새삼스레 발견한다. 어둠이 깃들어 우리가 휴식을 취할때면 바퀴들의 왕성한 활동이 시작된다. 그러다 불을 켜면 오도가도 못하고 참사를 면치 못하는 바퀴들. 한국에 온지 두달이 되지만 마땅한 일자리를 찾지 못하고 바퀴들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내 신세 또한 가련하다. 전등불빛에 9평이나 될가 말가한 둘째 이모의 간단한 세간살이가 수줍은듯 드러났다. 옛날 꽃밥통만한 전기밥솥이 냉장고 옆에 댕그러니 놓여 있고 냉장고는 고장났는지 전기를 넣어도 돌아가지 않아 그릇이거나 계란판을 올려놓는 찬장으로 쓰인다. 한쪽 귀퉁이에는 며칠전 큰 이모가 집부근의 작은 회사에서 버린 테블을 주어들여 가정기물이 하나 불었다. 그걸 둘째 이모가 깔끔히 닦아 이불을 올려놓고 서랍에 약과 화장품 같은 것을 넣으니 제법 훌륭했다. 그 밑에는 커다란 트렁크 두개가 누워 있다. 하나는 내거 다른 하나는 막내 이모거. 그러고 보니 우리 엄마를 빼고는 외할머니 슬하에서 태여난 자식들이 다 한국에 와 있다. 나라에 개국신이 있다면 우리 외가집에서 큰 이모가 공신이라고 할수 있다. 한국남자와 결혼해 한국에 온 큰 이모는 우리가 조금만 큰 소리로 불러도 들을수 있는 바로 윗 층에서 살고 있었고 그 혜택을 받아 둘째 이모, 막내 이모도 초청돼 한국행을 이루게 됐다.큰 이모네가 잠시 있는 전세집은 대낮에 불을 밝히지 않아 좋다. 그래서 이모부가 안 계실 때면 이모집에 물방울이 해면 속에 스며들듯 소리없이 잦아들군 한다. 그럴 때면 왜 내 머리속에 <옥탑방>이란 소설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떠 오를까? 지상으로 내려가는 것이 그들의 소망이었다면 오늘 나의 소망은 지상으로 올라가는 것일까? 나는 자던 이부자리를 개여서 이쁘게 올려놓는다. 배가 촐촐 해난다. 싱크대에 가 손을 씼고 밥주걱을 들고 밥솥을 마주한다. 내손으로 밥을 뜨는 것도 참으로 오랜만이다. 안산에서 장장 일주일동안 하루에 두때도 먹지 못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어제 밤 늦게야 이모집에 돌아왔다. 말로만 듣던 한국생활의 고달픔을 뼈저리게 느끼게 한 안산에서의 생활이다. 친구의 소개로 안산 <중국동포의 집>에 머무르게 되였다. 6평이나 될가 말가한 방에 5명이나 비집고 자야 했다. 헌데 나한테는 덮고 잘 이불이 없었다. 먼저 온 사람들은 몇개씩 차지하고 깔고 덮고 하는데 그 누구도 나한테 넘겨주려고 하지 않았다. 강집사님과 상황 이야기를 했더니 아직 오지 않은 언니 탄자를 하나 뽑아 나한테 주었다. 헌데 그 언니(한족)가 퇴근해 돌아온후 자기 물건에 동의도 없이 손을 댔다고 인상을 쓰며 난리다. 상황이 얼마나 위태롭던지…… 강집사가 와서 해석을 해야 일이 해결되였다. 한쪽 귀퉁이에서 탄자로 몸을 감고 새우처럼 꼬부리고 쪽잠을 청하는 내가 그때처럼 외롭고 처량하게 느껴본적이 없었고 자신이 이처럼 작아 보이기는 처음이었다. 후~ 집이 그리웠다. 엄마, 엄마 하던 새끼가 사무치게 보고 싶었다. 갖고간 옷을 베개삼아 베고 누운 나의 눈에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한국에 금방 도착해 한밤중에도 거리를 헤매면서 울었다던 친구들의 이야기가 떠오른다. 오늘에야 그때 친구의 이야기를 듣는것이 침대에 누워서 단과자를 먹으면서 전생시대 이야기책을 보며 느낌 찾는 것과 같은 허무한 짓거리라는것을 알았다. 그때 그 친구가 얼마나 고달팠으랴? 일주일동안 일당을 다니려고 매일 아침 다섯시반에 중개업소에 갔다. 고정된 일자리가 없는 사람들이 문어구에 주렁주렁 서있고 여자들이 건물안 걸상에 덕지덕지 앉아 일을 소개해주는 아저씨가 오기를 기다린다. 그 광경은 중국 연길에 있을적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갔을 때 양쪽으로 쫙 깔린 아가씨들이 손님이 자기를 부르기를 바라면서 앉아 요염을 떨던 모습과 어쩜 이리도 흡사할가? 다만 화려한 장소가 아니고 이쁘게 차려입고 남자를 꼬시는것이 아닐뿐이다. 그러고 보니 튼튼한 신체를 가진 것이 밑천이였다. 일자리 없어 헤매는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데 장애인인 나를 고용해주지 않는것이 불보듯 뻔한 사실이다. 일당에 선정된 사람들은 즐거워 하면서 일하러 따라나서건만 일당이 차려지지 않은 사람은 열시가 지나도록 아침밥도 못 먹고 폭 절인 파김치처럼 후줄근해 집에 돌아갈 것이다. 연속 며칠동안 일당을 뛰지 못한 러시아 고려인 이모가 엉엉 소리내어 울던 일도, 불법체류 한족 아가씨가 온 하루 땅이 꺼지게 한숨만 쉬면서 누워 있던 심정이 이해된다. 노동의 진가를 생각하며 나는 씁쓸히 웃어본다. 옆에 있는 작은 그릇에 밥을 뜬다. 그리고는 밥솥의 밥을 살살 부풀려서 살짝 덮어준다. 밥이 눈에 띄게 줄어드는 것을 감추려는 나의 반사적인 행동이다. 늦게 일어났으니 아침이자 점심이니 한끼는 생략한 셈이다. 밥 한숟가락을 입안에 넣고 시군 김치조각을 씹으면서도 오늘은 어떻게 보내야 할지 고민중이다. 내가 와서 두달동안 함께 생활했지만 둘째 이모는 반찬도 따로 없이 싸구려 돼지 살고기를 사다가 냄비에 미역국을 가득 끓여놓고 퇴근하면 덥혀 드신다. 김치쪼각도 윗층에 있는 이모가 식구들의 눈치를 보면서 가져다 주면 그날 반찬 한가지는 추가된다. 세 자식을 대학생으로 키우는 우리 어머니의 고된 모습이다. 큰 이모집에 가 컴퓨터나 놀가. 숟가락을 손에 든채로 저켠에 댕그러니 놓여있는 핸드폰을 잡고 큰 이모댁 전화번호를 누른다. <뚜~뚜~>하는 발신신호가 가는데 받는 사람이 없다. 그제야 오늘이 수요일이어서 이모가 여성회관에 가는 날임이 생각났다. 얼마전에 이모가 다니는 여성회관에 함께 간 적이 있었다. 이모는 그렇게도 열심히 살풀이 춤을 익히고 있었다. 큰 이모는 손을 감싼 긴 천을 흐느적거리면서 구슬픈 젖대소리에 어우려져 있었는데 보는 내가 그렇게도 처량할수가 없었다. 마치 지나온 세월을 절규하는듯한 몸짓이었다. 이모부의 헛풍스런 씀씀이에 빚을 걸머져 파리떼처럼 달려드는 빚군들 땜에 부득이 이혼을 선택해야 했고 중학교교원 자리마저 자퇴하고 두 어린 자식을 고향에 남겨 두고 한국길을 걸아야만 했던 고달픈 삶. 큰 이모는 어린자식을 그렇게 떼어두고 온 속병이 심장으로 넘어 자리에서 일어도 못나고 장장 삼년동안 앓았다고 한다. 헌데 작은 딸이 관광비자를 맡고 한국에 엄마보러 와서부터 기적처럼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한다. 큰 이모의 말을 듣는 나의 가슴은 짠해진다. 자식이 뭐길래? 큰 이모는 또 교통비라도 아끼겠다며 걸어서 장보러 다녔으며 이모부가 생활비를 주면 천원이라도 모아 중국에 계시는 외할머니한테 보내느라 애썼다. 어떤땐 이모부 자식들이 밝혀서 얼마 안되는 돈을 안 신는 신발에 넣어 두거나 또 신발을 버릴 것 같아서 눈에 안 띄우는 곳에 치우느라고 애썼다고 한다. 그러다 집식구들이 느닷없이 들이 닥치면 가슴에 참새를 감추듯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고 한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지금은 두 딸이 다 일본유학을 갔다. <한국은 나한테 아무 미련도 없어. 나 한몸 훌쩍 떠나면 뒤 돌아볼 것도 없지만 또 떠날 수 없었다. 가까이에 새끼들을 두고 보살필 수 없지만 꿈속에서도 두고 온 자식들을 찾아 헤맸어.> 큰 이모가 눈굽을 찍으면서 하던 말이 생각난다. 큰 이모도 집에 안계시니 먹은 그릇을 대수 가시고 나는 무작정 길거리에 나섰다. 어디론가 가야만 했다. 골목마다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다. 집에서 갖고 온 한화도 얼마 안 남았다. 일자리 찾을 때까지 며칠이나 더 버텨야 할지 알수 없어 아껴 써야만 했다. 4월을 마감하는 뜨거운 해볕이 정수리를 지진다. 큰 길에도 오가는 차량들로 꽉 메운다. 조금 지친 나는 어디 들어갈 곳이 없나고 살핀다. 그리 넓지 않은 길 양편에는 각양각색의 음식점들이 빼곡히 늘어서 있다. 불고기집 창 너머로 지글지글 고기굽는 소리가 들리는듯 싶다. 고향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불고기집을 잘도 다녔는데 지금은 불고기 맛이 어떻던지도 가물가물해난다. 시원스레 마당을 차지한 생회집 수조에는 낙지들이 유리벽을 벗어나려듯 꼬불거린다. 그것을 보니 한달전에 이모부랑 함께 제부도에 광어회 먹으러 갔던 기억이 난다. 제부도에 도착하니 금방 잡아들인 생선을 회쳐서 파는 편의 음식점들이 그렇게도 많았다. 대륙에서만 살아온 내가 그렇게 살아 있는 별의별 희구한 생선들을 보기에는 처음이다. 바다밑 세계를 옮겨다 놓은 듯 현란하였다. 함께 간 일행이 한 테블에 앉았다. 광어회가 식탁에 오르기전 꼬불거리는 낙지회가 먼저 올랐었다. 생회먹는 것에 습관이 되지 않은 나는 조금 거부감이 들었다. 저가락으로 작은 낙지다리를 집으니 저가락에 착 달라 붙었다. 온몸이 다 근질거리는 것 같아서 도무지 입에 넣을수 없었다. 이모랑 이모부랑은 초장에 찍어서 참 맛있게 드셨다. 나도 집은 낙지를 초장에 찍었다. 토막은 났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몸부림인듯 꼬불거리는것을 보니 저도몰래 도전장을 걸고 싶었다. 그래, 한번 먹어보자! 입에 넣으니 꼬불거리는 것이 좀 그렇긴해도 생각보다 맛있었다. 자연산 광어회도 얼마나 단백하고 맛있던지 진짜 회맛을 그날에야 제대로 느낀 것 같았다. 그래, 모든것은 직접 체험하고 느껴야 해. 먹거리를 지나니 지하철역이 나타났다. 스르르 올라가는 계단식 엘리베터에는 사람들이 자석에 붙은듯 <1>자로 오른쪽에 찰싹 붙어 오르고 왼쪽은 갈길이 급한 사람들이 달음쳐 오르고 있다. 엘리베터에 실었던 몸을 내린 나는 매표구로 천천히 걸어간다. 앞에 아직도 몇사람이 있다. <무임권>을 받으려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노인들과 교통카드를 충전하려는 사람들이다. 나는 일부러 늦장을 부리며 여유를 갖는다. 표를 파는 사람이 나를 볼 수 있을 정도로 천천히 걷는다. 충전한지 얼마 안된 교통카드는 바지 호주머니에 있지만 매표구에 섰다. 나의 차례다. 매표구에서 <무임권> 한장을 쑥 내민다. 살짝 목례를 하고 그것을 받아 들고 달려가 입구에 넣는다. <무임권>이 쓱 빨려들어가고 작은 문이 열린다. 작은 문을 통과하며 출구로 빠져나오는 <무임권>을 다시 받아 쥔다. 이 모든것이 익숙하게 진행된다. 언젠가 표파는 아저씨가 나를 한국장애인으로 착각하고 <무임권>을 내 밀었었는데 그것을 계기로 <무임권>을 받아가지고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서울권 전철을 마음대로 탈 수 있는 혜택을 누리게 되였다. 그러고 보면 인간은 정말로 간사한것이다. 백원도 아껴써야 할 시점에 낯에 철판을 깔아야만 했다. 플래트 홈으로 1호선이 들어온다. 열차가 들어오니 안전에 주의하라는 안내방송도 흘러나온다. 사람들이 꾸역꾸역 좁은 문을 통해 나오고 대기 하고 있던 사람들은 흡진기에 먼지가 빨리듯 빨려 들어간다. 어디에 앉을가? 렬차에 앉으면 항상 하는 고민이다. 노약자석은 그대로 비어 있다. 그래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려고 일반석에 앉았다.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노약자석에 앉으면 오해를 받기 쉽상이기 때문이다. 다음 정거장에 도착하니 또 많은 사람들이 올랐다.그때면 나는 노약자석으로 슬그머니 자리를 옮긴다. 노인들이 오르면 또 살그머니 일어서 자리를 비워드린다. 그러기를 반복하다보면 결국 의자에 엉덩이를 별로 붙이지 못한다. 어디에 가나 내가 머무를 곳이 아닌듯 그렇게도 불편하다. 이때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타향살이>라는 흘러간 옛 노래가 은은히 울려퍼진다. 내가 목을 빼들고 소리나는 그 쪽을 바라보니 멋을 이상하게 부린 한 아저씨가 녹음테프를 팔고 있었다. 흔하게 보아 오던 풍경이다만 그 노래를 듣고 있노라니 눈에서 주체할수 없는 눈물이 주르르 흐름은 웬 까닭일까? 모두들 눈을 감고 지친 몸을 달래느라 나를 주시하는 이는 없다. 그래도 소매치기 하다 들킨 사람처럼 나는 인츰 차창밖에 눈길을 던진다. 흐릿한 시야로 언뜰언뜰 지나가는 모든 것이 흐릿하다. 언젠가 한 장애인이 전철에서 구슬픈 노래를 부르면서 돈잎을 동냥한 적이 있다. 모두들 백원짜리 쇠돈을 넣어주는데 나 만은 모르쇠를 놓고 있었다. 사실 나한테는 그를 동정할만큼 여유가 없었고 가능하다면 나도 엎드려 구걸하고 싶었다. 누가 나한테 일자리를 구해 주십소 하면서. 그만큼 나한테는 일자리 찾는 것이 그 무엇보다도 절박하였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찾는다고 일자리 찾기 위해 겁도 없이 마산에 무작정 달려갔던 일, 간난신고 끝에 찾아간 곳은 콜레스텍이라고. 연변에서 말하면 무도장이라고 하면 적당할가? 그런 곳이였다. 지배인은 정수리 머리가 훌렁 뻣어진 칠십대를 훌쩍 넘긴 시각장애인이었는데 한달 월급은 30만도 안되지만 대신 DJ과 비슷한 음향기술을 배워주겠다고 하였다. 달랑 주소 하나 가지고 한가닥 희망의 끈이라도 잡아 보려고 찾아 갔는데 그때 당한 허무함은 억장이 무너진다고 표현해야 할가? 이미 늦은 밤이라 안하겠다고 박차고 나올 수도 없고 그냥 어두컴컴한 한쪽 방에서 테불위에 달랑 놓여 있는 성경책을 붙들고 두려움에 부들부들 떨면서 온 밤 뜬눈으로 새워야 했던 나. <다음 내리실 곳은 신도림, 신도림역입니다.> 전철에서 흘러나오는 상냥한 말씨다. 안양에서 앉았는데 벌써 신도림? 나는 광역전철 노선도를 꺼내들고 갈 곳을 정하려고 애썼다. 그래 뚝썸에 가 시원한 한강 바람이나 맞자, 갑갑한 가슴이 뻥 뚤리게. 나는 신도림에서 내렸다. 2호선을 갈아 타려는 인파에 섞여 함께 흐른다. 이럴때 만큼 나도 한국의 국민들과 같이 동등한 위치에서 숨쉬고 있다. 녹색선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가니 자연스레 2호선 플래트홈에 도착했다. 일부로 반대쪽으로 가는 전철에 앉았다. 될수록 멀리로 돌아 가는것이 시간을 보내기 좋았다. 2호선은 대림,신흥,신대방 등 역을 지나고 역마다 골물이 터진듯 인파들이 쏟아져 나가고 또 오른다. 전철노선도에 동그라미를 하나씩 지날 때마다 나는 그다음에 거칠 곳을 외워본다. 내 주위에 사람들은 남자가 여자로 학생이 중년으로 수없이 바뀐다. 드디여 뚝섬에 도착했다. 다른 곳에서도 한강을 볼 수 있으련만 친구가 이곳에서 써핑을 하기에 한번 온적이 있었으니 익숙한 쪽으로 선택한 것이다. 한강은 넓었다. 그곳을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은 그렇게 평온하였다. 맞은켠 높은 빌딩은 한강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우월한 지리적 위치때문에 돈이 무진장하게 많은 부자들이 아니면 살수 없다던 친구의 말이 떠 오른다. 한강 뚝 여기저기에 철쭉이 활짝 피여 말그대로 핑크빛 축제였다. 연변의 진달래와 너무 흡사하여 가까이에 가 보니 이른 봄에 피여나는 파르르한 여린 진달래와 달리 억세게 보였다. 화창한 날씨여서 가족을 단위로 사람들이 꾸역꾸역 모여 앉아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한강을 누비는 어린 아이들의 모습 또한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우리 아들은 지금쯤 유치원에서 돌아 왔을까? 어린 자식을 몸도 겨우 운신하시는 어머님께 떠 맡기고 한국행을 했는데 이게 무슨 짓이람? 정오의 해도 저만큼 갔다. 눈부신 해빛이 한강의 물에 부서져 무수히 반짝인다. 연인들이 강뚝에 밀착해 앉아 사랑을 속삭인다. 이때 핸드폰에서 아름다운 멜로디가 흘러나온다. 누구지? 나는 핸드폰 액정화면에 떠오른 낯선 번호를 의심하면서 받는다. <여보세요?> <차영란씨 핸드폰 맞죠?래일부터 일당으로 박스 접는 회사에 나올 수 있으십니까?> <네. 그럼요. 혹시 제 신체 정황에 대해 아세요?> <네, 일단 오셔서 한번 가보세요. 래일 7시 전에 우리 업소에 도착해야 합니다.> <네. 알… 알았어요.> 나는 불시에 말까지 더듬었다. 안산에 있는 중개업소 몇군데다 핸드폰 번호를 남겼더니 연락이 온것이다. 답답하게 막혔던 나의 가슴이 한꺼번에 뻥 뚫린다.믿기지가 않지만 이번에는 꼭 믿어야 했다. 다시 한번 한강을 바라보았다. 지난 일들이 넘실대는 한강에 씼기워 나가는 듯 싶다. 그리고 웨치고 싶었다. 래일 일하러 나오래요. 래일부터 일 하래요. 나는 목표없이 가던 방향을 되돌려 도로 전철역으로 향한다. 고르롭지 못한 걸음이지만 그 어느때보다도 힘차고 활기찼다. 희망은 분명 내 발밑에 있었다.
    • 오피니언
    2014-04-12
  • 中, 민원 처리 과정과 결과 인터넷에 공개
    [동포투데이=베이징] 중국 인터넷 민원사업현장 추진회에 따르면 중국 전지역으로 하는 인터넷 민원정보 시스템 구축 시간표가 공식 출범했다. 올해말전으로 전국 인터넷 민원정보 시스템이 기본적으로 구축되여 민원업무 모두가 인터넷에서 유통된다. 중국 국가 민원국 관계자는 인터넷 민원사업을 추진하는것은 인터넷 플랫폼을 이용해 민원사항 처리과정과 결과를 공개하며 민원분야에서 국민들의 알 권리와 참여권, 표달권, 감독권을 보장하기 위한 조치라고 밝혔다. 한편 중국 최고법원은 지난 10일 텔레비죤전화회의를 열고 인터넷 민원신고 시스템과 원거리 동영상 방문접수 시스템 건설을 신속히 전개할것을 포치하고 전국적으로 인터넷 민원신고 및 동영상 방문접수를 추진할 것을 각급 인민법원에 요구했다. 최고인민법원 관계자는 인터넷 민원신고와 동영상 방문접수를 추진하는 것은 중앙정부의 결책 정신을 시달하는 것이고 당면 정세의 실연적 요구에 순응하고 민원신고의 건전한 운행을 추진하는 필연적 요구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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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뉴스
    • 아시아
    2014-04-12
  • 나의 유학생활은 열정으로
    ■ 곽용호 (중국조선족대모임 응모작품) 2001년 3월20일 김포공항에 내리면서 한국을 처음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할아버지 고향이 전라남도 나주시 봉황면이다. 어릴 때 할아버지와 할머니 곁에서 자란 장자로서 소년 시절부터 “남조선” 세글자에 대해서 생소하지는 않았다. 할아버지는 중국 연길에 계시면서 매일 저녁 주무시기 전 라디오를 통하여 KBS라디오 방송을 시청하였다. 1910년대에 중국에 이민 갔었지만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잊지 못하여 한국 뉴스도 시청하고 한국에 있는 친척을 찾는 프로그램을 열심히 듣곤 하였다. 이렇게 나는 간접적으로 한국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1999년 연변대학 영문과를 졸업하고 연변1중에서 영어교사로 2년 지냈다. 우연한 기회에 경희대 정보통신대학원 진용옥원장님을 알게 되었다. 정보통신 분야에서 유명한 학자이시다. 그때 당시 중국 현지 언론을 통하여 정보통신분야에서 한국이 선진국이라는 뉴스를 많이 접하였다. 정보통신공부를 하여 벤처기업을 설립하자는 꿈을 가지고 나는 성스러운 교사직업을 그만 두고 한국 유학의 길을 선택하였다. 연변1중은 조선족고등학교에서 최고의 명문고등학교이고 대우도 아주 좋았다. 그런 좋은 직장을 그만두는 나를 친척, 친구들이 재삼 고려하라면서 만류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나의 결정을 꺾을 수 없었다. 북경에서 비자 승인을 받고 한국으로 출발하였다. 15명의 연변 청년들이 경희대정보통신대학원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한 형님과 나의 비자가 늦게 승인을 받아 두 명이 동행을 하게 되었다. 김포공항에서 경희대학교 수원캠퍼스로 버스를 잡았다. 제일 처음으로 인상 깊게 본 것은 차창밖으로 보이는 까치 둥지이다. 진짜로 까치 둥지가 아주 많았다. 우리 속담에 까치가 울면 반가운 손님이 찾아온다는 말이 있다. 나무위의 까치둥지는 나의 고향에서 볼 수 없는 풍경들이었다. 정보통신대학원 멀티미디어학과 전공을 선택한 나는 학부때 관련 지식을 공부하지 못하였으므로 선수과목 수업을 들어야 했다. 처음에는 교수님이 무엇을 얘기 하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다. 모르지만 듣고 또 듣고 용어사전 찾아가며 공부했다. 방학에도 다른 유학생들은 한과목을 선택하여 계절 수업을 들었지만 나는 두 개 과목을 선택하여 들었다. 공든 탑이 무너지랴 몇 달 지나더니 드디어 기초 용어를 알아들었다. 생활비도 문제다. 15명 조선족 유학생 친구들은 힘들어 했다. 주유소에서 시간당 2,500원 아르바이트생을 구한다는 주유소의 모집공고가 들어왔다. 한국 학생들도 방학에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 한다는 것을 들었다. 나도 중국 연변대학교를 다니면서 두 달간 방도문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한적 있었다. 80키로 되는 문짝을 옮기고 설치하고 꽤나 힘들었지만 일반 근로자들의 생활을 체험하기 좋은 기회였다. 주유소에서 주는 돈은 적지만 생활비를 얼마간 충당할 수 있고 여건이 좋은 아르바이트 기회가 언제 생길지 모르니 일단 시작하고 보자는 마음에 주유소에서 일을 시작했다. 낮에는 공부하고 저녁9시부터 새벽 두시까지 주유소에서 일을 하였다. 방학 때는 오전에만 수업이 있어 그 나머지 시간은 주유소에서 열심히 일을 하였다. 주유소에서 두달 가까이 지내다가 벼룩시장에 나온 식당 홀서빙 광고를 보게 되었다. 일은 수업 끝난 후부터 저녁 11시까지여서 수업에 영향을 주지 않았고 주유소의 아르바이트 급여보다 두배 가까이 받는다. 아직도 처음 면접때 일을 생각하면 재미 있었다. 일라인 스케티트를 타고 식당앞에서 멈추고 신발을 바꿔 신고 식당으로 들어섰다. 키가 크고 호리호리한 식당 주인이 나를 보더니 무척 반가워 하였다. 자신도 일본 유학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지 주파수 대가 거의 같았는지 모르겠지만 식당일 시작하기 전부터 나한테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가게 사장이 일라인을 타면 위험하니 자전거를 사주겠다고 하였다. 웬 떡이냐라고 생각했다. 처음 면접 본 풋내기 유학생한테 이런 선물을 하다니. 참으로 감사하였다. 그 생고기집은 6테이블 밖에 안되는 작은 식당이지만 고기도 최상급이고 소스도 일본에서 개발했던 소스를 사용하여 저녁 식사시간에는 손님들이 줄을 서서 기다린다. 가게 사장, 주방장, 그리고 홀서빙하는 나를 포함하여 세명은 저녁식사시간에는 전쟁이다. 야채, 수저, 밑반찬, 숯불목탄 세팅부터 남은 그릇 주방까지 나르기가 나의 몫이다. 이것도 열정이 없으면 안된다. 열정을 가지고 내가 맡은 업무를 착실히 수행해 나갔다. 항상 열심히 일하는 모습을 사장은 대견스럽게 여긴다. 일년 지나서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서 인턴연구원을 모집한다는 소식이 우리학교에 전해왔다. 같이 온 조선족 유학생들이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연구원에 보냈다. 행운스럽게도 유일하게 내가 선정되었다. 나중에 듣고 보니 영어를 전공한 것이 큰 점수를 받았다고 한다. 사실 정보통신에 대한 이론 지식은 학교에서 그나마 공부하였으나 이 분야에서 눈을 뜬 건 사실 연구원에서 한중 통역을 하면서 시작하였다. 근무하는 기간 여러 연구원들과 일을 같이 하고 생활도 하면서 한국에 대한 이해도 깊었고 많은 국제회의에 참석하면서 정보통신 첨단 기술 발전추세도 파악했다. 해외 정보 사업실에서 근무하는 동안 국제정음정보처리회의 (2002,심양)에서 “동북아과학기술정보교류 방안”을 제목으로 하는 논문을 발표하였고 중국 Computer Network Information Center와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과의 네트워크 관련 교류를 추진하였고 슈퍼컴퓨터, 디지털도서관, 인체영상 분야의 통역을 진행했다. 2002년 12월 16일에는 중국문헌정보센터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과의 자원공유 교류 통역을 수행하였다. 중국에서 정보통신 관련한 분야의 용어를 접촉하지 못하여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모르면 배우자. 모른 것은 죄가 아니다. 나는 열정으로 모든 것을 압도하였다. 전문용어가 무슨 뜻인지 모르면 중국 정보통신관련 연구원들과 물어보고 또한 번역한 결과를 한국 연구원들에게 의사전달이 맞는지 확인하였다. 과학기술 통역은 어떻게 보면 연구원들에게 하나하나 배우는 과정이었다. 그 때 당시 배움에 대한 열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발전된 모습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에 있으면서 한중 엘리트들과의 접촉가운데 정보통신관련 많은 새로운 것을 배웠고 또한 이러한 것들은 나의 소중한 경험으로 되었다. 저자 곽용호 경력: 1995~1999 연변대학 영문학과 졸업1999~2001 연변1중 영어 교사2001~2003 경희대 멀티미디어학과 석사 졸업2005~2007 숭실대 마케팅박사 수료2011~현재 중국동포축구연합회 사무총장2011~현재 재한연변대학학우회 부회장
    • 오피니언
    2014-04-12
  • 연변팀 홈장경기 축구팬 전용뻐스 선로 개통
    [동포투데이 김철균]오는 19일, 중국축구 갑급리그 제5라운드 첫 연길홈구장 경기가 펼쳐지게 된다. 이 날이 다가옴에 따라 최근 연길경기장 티켓 종류와 가격이 출범되고 연길경기장으로 통하는 축구팬 전용버스의 노선이 정해졌다. 연변 장백산축구구락부에 따르면 올시즌 연길경기장의 티켓은 3가지 종류로 분류, 각각 일반 티켓(20원), 세트 티켓(200원)과 주석대 티켓(50원)이며 티켓 종류에 따라 관람석도 부동하게 분류돼 있다. 또한 키가 1.2미터 이하의 어린이(보호자 동반)와 70세 이상 노인(보호자 동반, 신분증 휴대) 및 장애인(장애자증 휴대)은 무료로 입장할 수 있다. 티켓은 경기 1주일전부터 연길시안의 우정편민봉사소거나 경기 당일 경기장 티켓판매처 혹은 임시판매소에서 구매할 수 있다. 임시판매소들로는 시대광장 즉석복권판매소, 서시장 주차장 북쪽문 즉석복권판매소, 연길시공안국 맞은켠 15002호 복권판매소, 주방역소 서쪽 복권판매소 등 곳이다. 세트 티켓은 첫 홈경기 2주일전부터 구락부에서 판매한다.
    • 스포츠
    2014-04-12
  • 김수현, 진정비 베이징서 이중언어로 매력 과시
    [동포투데이=연예] 중국언론에 따르면 지난 8일, 중국의 유명배우 진정비는 앤디야의 초청으로 세계 최고의 브랜드 구치(GUCCI) 체인점 개업식에 참가해 사회를 담당, 마침 자선을 목적으로 중국에 온 한국에서 날아온 김수현의 성원을 받게 됐다. 왜냐하면 김수현의 출현으로 개업식은 중국어와 한국어 이중언어로 진행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그날 모임에서는 한국드라마 “별에서 온 그대”중의 한단락이 선보여 현장무드를 짙게 했다고 현지언론들이 앞다투어 전했다. 최근 중국내에서 브랜드제품 소개 등 많은 모임에서의 이중언어사회는 갈수록 보편화되고 있다. 그날 중국사회자 현장에서 진정비의 빼어난 표현도 박수갈채를 받았지만 김수현이 출연한 “별에서 온 그대”에서의 키스신 장면이 스크린에서 재현돼 더욱 여성참가자들의 열광적인 절찬을 자아냈다.
    • 연예·방송
    2014-04-11
  • “엄-마-”
    ■ 이진숙 현재 내 나이 70세가 됐음에도 가끔씩 엄마가 그립고 보고 싶다. 너무도 너무도 못 견디게 말이다. 그래서 때로는 엄마의 사진을 보면서 나대로 하고 싶은 말을 하기도 한다. 나의 엄마는 일자무식이다. 그래도 총명했고 계산에 참 빨랐다. 가감도 구구도 모르는 엄마임에도 말이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도 신기하다. 나의 엄마는 근면하고 무던한 분이시다. 일가친척들과 동네에서는 나의 엄마를 좋아했고 존경했다. 세상 모든 엄마들 다 그러했듯이 나의 엄마 또한 자식들 사랑에 극진했다. 말수가 적었어도 묵묵히 그 행동으로 특별한 사랑을 쏟아주었다. 온나라가 굶주림에 떨던 지난 세기 60년대초, 3년 “대식품해”를 겪던 그 때의 엄마를 생각하면 너무도 가슴이 아프다. 그때 오빠와 언니는 이미 외지에 가서 사업에 참가했고 집에는 초중생인 나와 동생 둘이 있었다. “공산풍”이 불면서 거의 집집마다 집체식당에서 밥을 먹었다. 우리 형제중에서 제일 나이가 많은 나는 아침마다 밥그릇을 들고 10분씩 걸어 아버지가 근무하는 학교식당에 가서 밥을 타왔다. 배급소에서 주는 식량표준은 한달에 성인 27근반, 중학생은 35근, 출근하는 사람은 31근이었다. 그 중에서 입쌀은 겨우 2~3근뿐이다. 정말이지 육류도, 채소도, 부식도 없는 때라 허기찬 배를 달래기는 어림도 없었다. 똥배는 왜 그리도 컸는지 먹고 돌아 앉으면 또 배가 고팠다. 엄마는 우리 애들의 배가 부르게 하느라고 타온 밥(혼자 다 먹어도 성차지 않을 양)에 물을 붓고 죽을 끓이지 않으면 이삭으로 주은 감자와 시라지를 삶다가 밥을 섞어 수량을 늘이었다. 얼마 후 상급의 지시가 있어 식당들은 다 문을 닫고 우린 더 큰 굶주림을 겪어야 했다. 진짜 “대식품해”였다. 개떡, 누룩떡, 나무잎떡…학교에서는 대식품 잘 하는 곳도 참관시켰고 구사회의 쓰라림을 회고하는 대회도 열면서 간고분투하라고 교육했다. 어느 날 엄마는 우리를 데리고 용평 뒤산에 가서 가둑나무잎을 마대에 넣어 가득 가져왔다. 그리고는 그걸 가루내여 수십번 우린 다음 떡을 만들었다. 웬걸 그게 뭐 떡이냐 쓰디쓴 약이였다. 배가 고픈지라 나와 동생들은 풍로불을 온 가운데 놓고 떡을 새까맣게 태워서 먹었다. 쓴맛과 탄맛이 범벅이 되어 먹기가 한결 나았다. 뽀얀 연기가 집안을 가득 채웠다. 탄것엔 발암물질, 연기는 환경오염-무지했던게 다행이었다. 이럴 때면 아버지 그저 “쯧-쯧”하면서 우리를 외면했고 엄마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그 세월에 엄마는 사시절 짬만 있으면 산이나 들로 나가 뭐든지 먹을 걸 찾느라 말 못할 고생을 다 겪었다. 색다른 음식이 생기면 “엄마는 배가 불렀다”, “난 그걸 안먹는다” 하면서 우리들에게 넘겨준다. 부모는 사흘 굶어도 먹을 것이 있으면 자식들한테 준다는 말 후에야 알았다. 그래도 이런 고생은 다 둘째였다. 그 때 엄마는 쌀도둑으로 몰리워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던가. 굶주림만 더한게 마음고생이라더라. 지난 세기 60년도의 겨울이었다. 옆집에 애 한명을 가진 중년부부가 이사해 왔다. 엄마는 한평생 거짓을 모르고 살면서 늘 진심으로 남의 일을 관심하고 걱정하셨다. 한번은 엄마를 따라 옆집에 놀러 나갔는데 마침 그 아줌마가 부지런히 입쌀을 주머니에 퍼넣고있었다. 이윽고 아줌마가 하는 말이 “일이 있어 며칠간 집을 비우겠는데 이 쌀을 어디다 두면 좋겠슴둥?” 했다. 엄마는 한참 이리 저리 보더니 “그래도 부엌쪽에 숨겨 두면 좋겠구만”라고 했다. 쌀주머니는 그 자리에 옮겨졌고 그 아줌마는 엄마보고 집을 잘 봐달라고 부탁했다. “걱정 마우.” 그런데 웬걸, 그 아줌마가 돌아오던 날 난리가 터졌다. 우리 집에도 불벼락이 떨어졌다. 그 사이 도둑이 들어 그 아까운 쌀을 주머니채로 몽땅 들어갔단다. “아는 사람이 도둑”이라고 엄마는 하루밤새 쌀도둑으로 몰리웠다. 신흥대대 치보위원인 김××가 찾아와 빈정대며 엄마더러 솔직하게 탄백하란다. 천백번 아니라 해도 곧이 듣지 않는다. 버선목이면 뒤집어라도 보이겠건만 하늘도 무심했다. 억울하고 원통했다. 온집안에 먹장구름이 쫙 꼈다. 선비인 아버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여 학교에서 돌아오면 애꿎은 담배만 뻑뻑 빤다. 엄마는 얼굴이 새까맣게 되여서는 종일 집에 누워서 한숨만 쉰다. 하루는 내가 집으로 오는데 동네 아줌마 둘이 수근대며 서있었다. “풍더분하게 생긴 분이 보기와 다르네. 사람속은 정말 모르겠당이.” 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라 집으로 막 뛰여와 엉엉 울어댔다. 그때 나를 한동안 지켜보던 엄마는 “후-”한숨을 내뿜었다. “도둑때는 어느 때건 벗는다더라, 걱정 말어라.” 겨울방학이 되자 오빠가 돌아왔다. 엄마가 도둑으로 몰리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난 오빠는 성난 사자처럼 씩씩 거리더니 씽하니 옆집문을 열고 소리쳤다. “우리 집 빨래줄에 널어놓은 옷들을 당장 벗겨갑소. 우리가 또 도둑질하면 어쩔라구.” 우리 모두 속이 다 시원했다. 억울함을 당하면서도 입 한번 뻥긋하지 못했는데 오빠의 그 한마디에 속이 시원했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아침, 움에 김치 가지러 나갔던 엄마가 빈바가지를 들고 들어왔다. 얼굴이 새까맣게 되면서 낮은 소리로 겨우 말했다. “열지도 않은 김치 한독을 누가 몽땅 퍼갔다.” 엄마는 온돌에 올라와 털썩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어떤 김치인데? 더구나 대식품해에 김치 한독이 어떤건데? 우리 모두 맥이 풀렸다. 배고프던 세월에 기나긴 겨울밤은 견디기 어려웠다. 밤참을 좋아하는 오빠는 저녁이면 배추김치 한포기씩 먹었다. 덕분에 우리도 더불어 끼워서 말이다. 그래서 엄마는 김치를 아껴 먹으면서 오빠를 기다리면서 새독은 열지도 않았었다. 너무도 아깝고 안타까웠다. 도둑때를 벗지 못했으니 내놓고 말도 못했다. 이듬해 봄의 어느날 길건너 집에 또 도둑이 들었다. 온동네가 떠들썩했다. 파출소도 동원되었다. (이번에도 엄마를 짚으면 어떡하지?) 겁이 더럭 났다. 맙시사, 원 세상에! 알고보니 도둑은 다름 아닌 그 아줌마였다. 엄마를 도둑으로 몰아붙힌 그 철면피한 여자였다. 그녀는 남동생과 함께 도둑질하면서 그 물건들을 집안 곳곳에, 지어는 구들고래에까지 감추어 놓았단다. 쌀도둑은 바로 그녀의 동생이었고 김치도둑은 그 아줌마였다는 것이 천하에 밝혀졌다. 시루떡빛이 된 얼굴에 헝크러진 머리를 한 광주리나 떠이고 초점잃은 두눈을 멀정하게 뜨고 땅바닥에 주저앉은 그 아줌마의 모양새는 정말 천하 꼴불견이었다. 도둑놈의 더러운 딱지를 달고도 참고 또 참으면서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던 엄마의 일을 생각하니 억울함과 분노에 온몸이 전률했다. “너, 당장 이 동네를 떠나라.” “도둑이 도둑이야 한다더니 참…” “꼬리가 길면 밟히는 법이야.” 동네사람들이 분노하여 손가락질을 했다. 엄마는 그 여자의 앞에 가서 소리쳤다. “도둑은 앞으로 잡으라 했다. 멍텅구리야. 오늘보니 오누이 똑같은 도둑이네.” “하하하…” 온동네가 들썽한다. 그날 나는 일자무식이지만 사리밝고 점잖은 우리 엄마를 다시 한번 쳐다보았다. 자식들의 마음 상할라 억울함도 묵묵히 참아가면서 속으로 눈물 떨구신 위대한 우리 엄마! 지금도 엄마의 얼굴에 드리웠던 그 어두웠던 그림자를 생각하면 가슴이 찡해난다. “엄-마-”
    • 오피니언
    • 칼럼/기고
    2014-04-11
  • 연변 새봄맞이 씨름대회 열기 화끈…수준 제고에 일조
    [동포투데이=연변] 연변일보에 따르면 연변자치주체육국,교육국,주민족(종교국)사무위원회에서 주최하고 연변성주청소년체육클럽에서 주관한 새봄맞이 2014년 전 주 중소학생 씨름경기(제2경기구역)가 7일 연변성주청소년체육클럽에서 하루 동안 성황리에 펼쳐졌다. 이번 경기는 민족전통체육문화를 더 한층 고양하고 조선족씨름의 전승과 발전을 추진하며 조선족씨름의 기예를 광범위하게 보급하고 경기수준을 높이는데 취지를 두고 열렸는바 연길,도문,훈춘,돈화,화룡 등지의 중소학교 남녀선수들 50여명이 참가하여 화끈한 쟁탈을 별렸다.특히 이번 대회서 각 체급별 5위권에 진입하면 고중입시 체육시험 40점을 따게 돼 학부모들과 학교측의 큰 관심을 끌었다.
    • 스포츠
    2014-04-11
  • 中, 2013년 이래 54명 관원 비정상적으로 숨져
    [동포투데이 김정 기자] 중국에서 2013년 이래 54명 관원이 비정상적으로 숨졌다고 중국신문망이 11일 보도했다. 중경시 경찰측은 중경시 “조직폭력배와의 전쟁”에서 공을 세운 유중구공안분국 경제정찰지대 주유 지대장이 올 4월 4일 밤, 유중구의 한 호텔에서 숨졌으며 자진했음이 확인됐다고 7일 밝혔다. 4월 4일, 절강성 봉화시 주민주택이 붕괴되면서 1명이 숨지고 6명이 상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그로부터 닷새후인 4월 9일, 관할가두 건설관리판공실 부주임 하고파가 자진한 모습으로 발견됐다. 이 주택의 건설기업은 이미 경영허가증이 말소된 상황에서 주민들은 경상 가두에 찾아와 주택이 금이 가 위험하다고 고소했고 그것을 하고파가 접대했었다. 하지만 수리비용문제로 여태껏 해결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주택붕괴 사고가 발생한 후 연 5일간 밤낮 사고현장을 떠나지 않았던 하고파는 닷새만에 부근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진했던 것이다. 4월 10일의 언론보도에 따르면 국가래신래방국 서업안 부국장이 4월 8일, 판공실에서 자신해 숨졌다. 관원들의 비정상적인 사망은 요즘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있다. 중국청년보의 통계에 따르면 2013년 1월 1일부터 2014년 4월 10일까지 기간, 중국에서 이미 알려진 비정상적으로 사망한 각급 관원은 54명에 달한다. 그들 가운데서 23명이 자진해 사망했는바 42.6%에 달했다. 그중 8명은 투신자살했고 기타는 목을 매 자살하거나 가스흡입, 농약마시기 등 방식으로 자살했다. 특히 우울증 등 정신질환이 직접적인 원인으로 꼽힌 사례가 적지 않았다. 중국철도주식유한회사 전 총재 백중인은 2014년 1월 4일, 집에서 자진해 숨진 채 발견됐는데 가족들은 그가 우울증을 앓았다고 진술했다. 관원들의 심한 우울증이 적지 않게는 당전 중국의 엄한 반부패와 관계되는 것으로 언론들은 인정하고 있다. 관원들의 비정상적인 사망의 두 번째 원인으로 음주와 의외사고가 꼽혔다. 관계부문이나 관계자들의 초대를 받고 술을 마신 후 교통사고를 당하는 사례들도 있었다. 그 외 피살된 관원이 3명이나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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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1
  • 연길냉면 전문점 '류수촌' 서울에서 개업
    [동포투데이 화영 기자] 중국 연길냉면 전문 음식점인 "류수촌" 1호점이 10일, 서울 구로디지털단지에 오픈했다. 연변조선족전통음식협회(회장 김순옥)와 (주)맛있는놀이터외식사업부(대표 공호진)가 협력하여 운영하는 류수촌은 중국 연길 음식을 대표하는 30년 전통의 "우의식당"과 기술 제휴하여 연변 전통방식 그대로 현지호텔 주방장이 직접 요리하여 고객에게 특별한 맛으로 제공한다. 뉴 메뉴는 연길냉면을 비롯해 육즙만두, 탕수육, 매운명태찜, 비타민 볶음 등이 마련돼 있다. 개업식에서 김순옥 회장은 "1호점 오픈을 시작으로 앞으로 한국에 연길냉면 전문 음식점을 100호점 까지 늘리는 것이 목표"라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이날 개업식에는 이구홍 전 재외동포재단 이사장, 윤숙자 한국전통음식연구소 소장, 김길남 한국문화국제교류운동본부 공동대표(전 미주총연 회장), 배희철 세계한인유권자총연합 회장 등 50여 명이 참석해 개업을 축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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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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